주일예배(주후2021년 4월25일)-1부 예배
제목: ''그대는 숨질 때 되도록 부를 찬송이 있는가?''
말씀: 창세기 28:10~22
찬양인도: 이원준 부목사님
기도: 강대인 부목사님사회: 윤하중 부목사님
설교자: 김지찬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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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8:10~22절)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
20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21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요즘 청년들의 고민을 듣다보면, 보통일이 아니다. 취업을 해도 언제 구조조정의 불안감 때문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공시생들이 많아졌다. 최종시험 합격자는 2퍼센트인데, 나머지 98퍼센트는 다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고 한다. 요새 젊은 청년들의 마음 고심이 참으로 심하다. 청년들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신앙생활을 잘 했는데도 알바자리도 짤렸다고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질문한다고 한다. 작년에 젊은이들을 조사에 의하면 결혼을 반드시 할 필요가 없다고 61퍼센트라고 한다. 아이를 갖을 필요가 없다고 60퍼센트에 이른다고 한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되면서 결혼과 출산이 극감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청년만이 아니다. 질병으로, 직장으로, 가족의 우환으로, 자녀들의 대학입시로, 앞길이 막막하다고 슬퍼하는 장년들도 많다. 불경기에 코로나 사태가 겹치면서 수입이 시원치 않고, 아이들은 크는데 집 장만할 가능성을 사라졌고, 투자해서 떼돈 벌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마음이 흔들린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이럴 때 하나님을 원망한다고 해서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돌을 베고 잤던 야곱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야곱이 지팡이 하나로 요단을 건너 외삼촌 집으로 가다가, 20년 동안 종노릇했던 야곱의 파란만장의 삶은 우리에게 위로와 도전을 준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부유했는데, 왜 야곱이 빈손으로 갔는지 이해가 안 된다. 창세기 29장 13절에도 라반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으로 나온다.

 

*창세기 29:13
13 라반이 그의 생질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맞추며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니 야곱이 자기의 모든 일을 라반에게 말하매.

-외삼촌 라반은 딸 두 명을 팔고 조카인 야곱에게 팔고, 야곱의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했던 이기적인 인물이다. 따라서 이렇게 이기적인 라반이 안고, 입 맞추며, 환대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라반은 조카가 재물을 많이 가지고 왔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동물들은 보이지 않았다.

 

라반은 야곱을 할 말만 가지고 왔다고 말했다고 한다. 어쨌든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형을 피해 도망을 가야하니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떠났던 것이다. 피신하는 야곱의 모습은 때론 아무것도 없이 세상 들판에 내 던져진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일부 해석 가들은 형과 아버지를 속였기에 이런 고생을 한다고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야곱이 도피하게 된 것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태에서부터 싸웠지만 출생에서 패배로 형의 장자 권을 끝내 차지하려고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야곱이 물리적으로 강제적으로 빼앗은 것은 아니다. 에서가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 권을 팔았으며, 아버지를 속인 것도 어머니가 그런 것이다. 야곱이 부친을 속인 것도 어머니이다. 어머니가 저주를 받겠다고 했다. 야곱을 축복했기 때문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에서를 달랬다. 어쩌면 에서가 가나안 여인과 결혼해서 부모의 마음에 들지 않자, 차라리 잘 된 것이라 이삭이 생각한 느낌마저 든다. 어찌되었던 외삼촌 라반의 딸을 아래로 선택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민족을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아브라함에게 준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리라고 축복하셔서 보냈다. 도망자 신세가 된 야곱에게 이 축복이 어떻게 들렸을까? 도망자 신세에,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아버지 약속처럼, 나의 축복이 될 수 있을까? 내가 약속의 상속자라면, 왜 약속의 땅에서 도피를 해야 할까? 이국땅에서 과연 아내를 만날 수 있을까? 약속의 땅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를 염려하게 되었을 것이다. 도피 길에 오른 야곱의 발걸음은 무거웠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자는 다음날 야곱의 발걸음은 현저히 가벼웠다.

 

창세기 29:1,
1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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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이 그의 발을 들었다는 것은 발걸음이 가볍게 앞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야곱이 발을 들어 유랑 길에 가벼운 것은 초월적인 궁극적의 힘의 비결이 등장한다. 따라서 이 주일에 우리의 남은 생애에 초월적인 힘의 비결을 발견하는 신앙이 되길 소원한다.

비결은 성경기자는 어쩌다 맞닥뜨리는 것이다. 갑자기 해가 지면서 밤을 지내게 된 것이다. 야곱은 그곳에 돌을 가져다가 베개를 삼았다고 한다. 머리맡에 두었다는 것이며, 잠을 잘 때 머리맡에 보호도구이다.

한번이라도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자 보았는가? 성경기자는 감정이입을 통해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자는 모습을 원한 것 같다. 형의 장자 권을 차지하고 눈먼 아버지를 속였지만, 실제론 칠 흙 같은 어두움에서 돌을 베고 잠을 자는 도망자 야곱을 상상해 보라. 야곱의 돌베개를 생각하면 마음이 먹먹해진다. 고1때, 산에 무허가 집이 헐리게 되어 신월동에 이주한 기억이 있다. 그때, 이사를 간 것이다. 강제 이주였다. 천막으로 간 것이다. 공동 화장실만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서글퍼진다. 그날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살던 집에서 가져온 몇 개의 가재도구와 커다란 돌 몇 개가 눈에 띄었다. 가져올 게 없어 돌을 가져왔냐고 화를 냈다. 속이 들면서 이해를 했다. 그 이후 야곱의 마음을 조금 도 이해도 하게 되었다. 돌베개를 자고 난 야곱이 꿈을 꾸었다. 도망자의 꿈이 아닌 황홀한 꿈이었다.

 

12절에 보면,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사닥다리는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 했다. 그 위에 여호와께서 계셨다. 야곱 곁에 여호와께서 서 계셨다. 야곱 곁에 서 계신다. 여호와는 사닥다리이다. 사닥다리는 하늘과 땅을 연결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늘과 연결된 것을 알지 못한다. 하늘과 땅이 전부인 것처럼 이야기 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사닥다리를 타고 내려오셔서 자신의 옆에 서 계심을 생생하게 서 계심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우리는 전부인가? 내가 가진 학벌, 재산, 지위, 권력, 인간관계로 이게 내가 가진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리스도인 우리는 야곱의 사닥다리와 비교도 안 되는 놀라운 꿈을 보았다. 예수님께서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예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우리의 필요를 날마다 천사들을 보내 공급해 주시고 계신다.

친히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닥다리가 되어주신 그리스도를 것을 믿는 순간 우리도 야곱의 꿈보다 더 큰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14절을 보면,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이 약속을 주신 곳이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이삭에게 주신 약속을 반복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약속을 주신 곳이 다 벧엘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시간과 공간의 축을 따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전 세대와 다음 세대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의 약속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삭을 거쳐 아들 야곱에게로 영원히 흘러 내려오며, 사망과 구속사를 써내려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멀티미디어로 인해 정신을 팔고 있기에,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들과 손자에게로 증손자까지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을 공유하며 함께 써 내려가는 구속사를 알 길이 없다. 44년간 4대가 모여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가는 성전이 여기가 아닌가? 같은 공간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대대로 이어가며, 놀라운 구속사의 역사를 써 내려 가야 한다.


15절에,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겠다는 3가지 약속이 있다.
첫째 –어디로 가든지-보고의 약속.
둘째 - 너를 이끌어 이 땅에 돌아오게 한다. - 무사구환의 약속.
셋째 – 내가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한다. - 무한 도중의 약속

상식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도망자 야곱에게 축복의 약속을 부어주시는 장면을 이해할 수 없다. 에서를 위로하셔야지 왜 야곱의 편에 서 계시는지가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축복은 인간의 노력과 공로로 얻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오직 은혜로만 축복을 받는 것이다. 야곱은 도망자 신세가 되어 아무것도 없었다. 야곱은 축복 받을 만한 게 없지만 그러나 야곱에게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셔서 눈물 난 아름다운 꿈을 주신다. 왜 야곱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셨는가? 이미 태중에 야곱을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서와 야곱이 이미 여호와께서 선택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사람이 사랑을 받으면 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랑만이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여호와께서는 사랑을 야곱에게 베푸시고 이런 사랑을 근거로 야곱에게 온전한 사랑을 요구하신다. 무조건 사랑이 온전한 사랑으로 바뀐다. 이를 근거로 거룩한 복음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야곱이 경험한 후에 잠에서 깨어나서 두려움을 느낀다. 이것이 야곱이 온전하게 변화되는 모습이다.

 

16절 이하를 보면, 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야곱이 두려워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자기가 누웠던 곳에 옆에 함께 서 계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야곱은 자기의 죄를 깊게 느꼈기에 자신이 누운 그곳에 하나님이 찾아오시리라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야곱이 하나님을 생각하면 저주를 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했을 때, 누구도 에서를 탓하지 않았다. 어머니 리브가는 내가 저주를 받겠다고 한다. 하나님은 찾아오셔서 축복을 하신다. 이 야곱은 온전한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 우리에게 복음이다. 우리의 약점으로 오히려 위로와 격려를 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슬퍼하고 낙망하고 주저하고 있다면, 그러나 그곳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난다면, 좌절과 쓰러져 있다면, 사닥다리로 내려오신 우리의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하늘의 위로이다. 진정한 사닥다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깊이 깨닫는다면 이곳이 벧엘이다. 우리를 구원해 주실 사닥다리를 통해 야곱은 돌을 기둥으로 삼아 예배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과 자신을 더 가까이 나아가며 온전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다.

 

20절이하
21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이렇게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으로 기도문을 세우는 자되고 예배하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마음이라면, 내게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해야 한다. 야곱이 움켜지는 것에서 주는 자로 바뀐다. 도망자 야곱에게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야곱은 이제 기꺼이 십일조와 예물을 드리는 자로 바뀐다. 우리도 주님 앞에 서원했다면 약속을 지켜가고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수단이다.

 

♣요약
성도의 온전함을 위하여 우리는 숨질 때 되도록 부를 수 있는 찬송이 필요하다. 같은 공간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대대로 이어가야 하며, 놀라운 구속사의 역사를 써 내려 가야 한다. 하나님의 축복은 인간의 노력과 공로로 얻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오직 은혜로만 축복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과 자신을 더 가까이 나아가며 온전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간 야곱처럼 우리도 주님 앞으로 더욱 가까이 나아가고 있다. 숨질 때 되도록 하나님을 찬양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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