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주후 2021년 11월 22일)
제목: 우리 서로 기쁜 날
말씀: 누가복음 15:1~7
기도: 1부 김대규 부목사님
찬양인도: 오준석 전도사님, 영광찬양대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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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 오늘 와 니까 강단에 조이(Joy)라고 해 놓았네요. 제가 부탁해서 한 것일까요? 아님 그냥 했을까요?? 알아서 했다고 한다.ㅎㅎ LED로 이런 집 모습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게 뭐냐면  Wecome Home!!~~그래서 오늘 저녁부터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이 부르시는 영혼의 귀환이 있기를 바란다. 말씀은 살아 있는 것이다. 예배의 영광과 살아있는 말씀을 통하여 오늘 몸과 마음과 영이 새로워지기를 바란다.

  
자 오늘 본문을 읽었는데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위하여 목자가 찾기까지 찾는다는 내용이다. 잘 알 것이다. 이 말씀을 읽고 난 다음에 여려분들의 마음에 어떤 반응이 있는가? 어떤 분들은 아니 한 마리의 양을 위하여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가는 가는 것이냐 한다. 물론 두고 가는 것이 아니라 잘 보호하고 있지만 그게 좀 합당하지 않다. 가당하지 않다. 이런 분들이 있고, 또 어떤 분들은 정말 한 마리의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까지 찾으시는 그런 분들이 참 필요하다. 이런 마음의 생각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하셨는가?

누가복음 15: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누가복음 15:7,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우리가 주님 닮아가고 제자훈련, 사역훈련하고 순장으로서 영혼을 섬기는 것이 너무도 귀한 일이다. 그러나 하늘의 축복은 한 영혼이 예수 믿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더 귀하다. 진짜 기쁨은 한 영혼이 구원 받고 하늘 잔치는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는 일이다. 이 말씀이 우리의 것이 되기 위하여 주님께서 왜 이 말씀을 하시는가? 1절에 보면,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말한다.
 
오늘 1-2절을 보면,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모든 세리와 죄인들,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이 말씀을 듣는 대상들이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은 유대 나라에는 하층들이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유대 나라의 지도층이나 리더들 그룹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주님은 오늘 이 말씀을 신분을 막론하고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계층을 관통해서 주시는 말씀이었다. 그렇다면 이 순간 우리 모두에게도 주시는 음성이 될 줄로 확신한다. 잘 아시는 대로 유대 나라는 목축업을 하는 나라였다. 우리처럼 농경사회가 아니고 유대 나라에서는 목자와 양의 관계는 한국에서 양 치는 것과는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 한국은 양을 치다가 양이 말을 안 듣고 이러면 양에게 욕도 하고 양을 때리기도 하고 안 되면 말 안 들으면  잡아 먹고, 양꼬치도 해 먹는다. 유대인들의 있어서는 양은 가족이었다. 여러분 나단 선지자가 다윗이 밧세바와 범죄한 후 와서 다윗을 뭐라고 할 때 '네가 딸 같은 양을 그렇게 탈취했다'고 말한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가족의 관계였고 이제 목자는 양을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의로 자녀를 돌보듯이 데리고 다니다가 황혼역에 양 울타리에다 넣어준다. 백 마리쯤 되는 양을 이제 숫자가 맞는지를 확인하고 숫자가 다 맞으면 목자가 안심을 하고 그날은 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양 떼를 하루 종일 데리고 다니다가 황혼녁에 양을 점검하는데 양 한 마리가 없어져 버렸다. 아무리 찾아도 없는 것이다.


*누가복음 15:4,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목자가 일당 받는 자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목자는 양이 왜 그랬을까를 생각하며 한 눈 팔다가 길을 잘못 들었거나 뒤처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목자의 입장에는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다. 이 양을 어떻하면 좋겠는가!!하면서 걱정한다. 혹시 늑대의 밥이 되지 않았나, 절벽에 발을 헛뒤뎌서 낭떠러지에 떨어진 것은 아닌가? 가시덤불에 걸려서 피를 흘리지는 않은가? 이런 마음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자식이 열 명이 있는데 그 자식 가운데 한 명이 사라진 것이다. 나가서 밤새도록 양의 이름을 부르면서 찾아 헤맨다. 양을 부르는 것이다. 양아!! 양이 목자의 목소리를 듣고 순간 음매 하면서 나타난다. 찾아보니 산 기슭에 가시덤불 속에 옴짝달짝을 못하고 끼어 있어서 목자가 가서 가시덤불을 헤치면서 가시가 찔리기도 하고 피를 흘리기도 하면서 양을 꺼내온다. 유대 나라 광야에 목축지역은 가시가 아주 세다. 양을 치료하여 안고 온다. 너무 좋아서 목에 양을 메고 즐겁게 돌아 온다.

*누가복음15:5,
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즐거워 어깨에 메었다. 나오라고 말도 안 했는데 우리 사랑의교회 스테인드 글라스에 새긴 그 문양이 바로 목자가 양을 멘 모습이다.

*누가복음 15:6-7,
6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첫번째 질문이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목자와 양, 유대 지도자들의 개념이 소위 하나님 나라관과 천국관이 틀렸다. 너무나 전통에 고착화 되어있었다. 그래서 이 후에 이것이 드라크마 비유로 연결된다. 우리 돌아온 탕자가 이어서 나온다. 하나님께서 신앙의 본질, 하나님나라의 올바른 개념,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게 하시려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사람들이 아주 하나님 나라의 관, 천국관, 신앙관, 이런 것들이 잘못된 것이 무엇이냐면, 유대 지도자들의 분리주의적 사고방식이었다. 편견과 선입견이 컸다. 분리주의적 사고방식은 악한 사람은 악하고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그래서 악한 사람은 절대로 좋은 사람이 될 수 없고 선한 사람들은 죄인들과 상종하면 안 된다. 라는 그 당시 사고 방식이었다. 이것이 팽배해서 그들의 메시아의 비유, 그러니까 메시아 관도 잘못되어 있었다. 메시아는 선하신 하나님인데 선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지극히 선하신 분이 어떻게 천한 육신의 몸, 죄인의 몸을 입고 오시겠는가이다. 선하신다는 것은 초월자, 정복자로서 오셔야지 인간이 몸을 입고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를 지는 것은 모욕 당하고 침뱉음을 당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고 여겼다. 예수님께서 죄인의 몸으로 오시고 성육신 하시고 우리가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는 모습으로 오신 그 메시아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도 그러한다.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은 섞일 수가 없고 융합될 수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세리와 창기와 함께 예수님이 함께 밥 먹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 분리주의적 사고방식 때문에, 잘못 된 선입관 때문에, 그래서 2절에 보면, 너무

*누가복음 15:2,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ㅡ펴견이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이란 헬라어로는 '후토스'라는 단어인데 번역하면 사실은 아주 경멸의 표현이다. 이놈이, 이 자식이, 이 자식이 죄인을 영접하고, 이놈은 죄인과 한패야, 하면서 그런 경멸한 마음이 가득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볼 때에 예수님이 세리와 창기와 같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못마땅했다. 어떻게 선하신 하나님이 그들과 음식을 나누겠는가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잃어버린 양을 위하여  그 한 마리 부족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고 목자가 피를 흘리다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천둥벼락 같은 말씀이고 워닝 사인이었다. 왜 이 말씀이 중요하냐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을 믿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성경의 절대 주권을 믿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영적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기적도 믿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강한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이 강한 분리의식, 차별의식, 자기들만이 선택된 집단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존경도 받았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탕자 큰 아들, 분리의식, 차별의식, 영적 탈레반)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예수님의 행동을 비하하는 말)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그런데 그들의 편견은 강한분리 의식 차별의식이다. 잘못된 텔레반이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식사를 보통 하는데 거기에 이방인들이 와서 식사를 하게되면 그것을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그걸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아무나 밥을 같이 안 먹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선입관, 저 사람은 안 될거야 등. 베드로는 얼마나 하나님이 사람인가? 베드로도 유대인이기에 이방인들이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닌 것이다.
사도행전 10장은 생각의 패러다임이다. 그게 보자기를 보여주시고 부정한 것을 보여주시고 먹으라고 하신다. 베드로는 못 먹는다. 나중에 하나님은 세 번이나 보여주신다. 생각의 틀을 바꾸기가 그리 어렵다. 하나님이 이제 고넬료라는 로마 사람이 복음을 듣도록 해주었다. 그래서 잘 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갈라디아사 2장에 가보면 베드로가 이방인과 밥을 먹다가 유대인들이 들어왔다. 함께 받을 먹던 중 베드로가 나가버렸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그것을 보고 이방인들과 밥먹는다고 오해할까 싶어서이다. 그걸 보고 바울이 그 행동을 듣고 질책을 하는 것이다. 네가 말이 되냐고 한다. 그러면서 그만큼 유대인들이 분리주의적 사고방식이 강했다는 것이다. 쉽지가 않았다. 저 사람은 안 돼, 저사람은 구원 못 받아. 예를 들어서 기독교와 적대적인 사람들, 신앙에 아주 무관심하는 자들, 세속주의자들 자기애에 사로잡힌 자들, 자기 숭배자들, 저 사람은 안 돼,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여기에 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신가? 분리주의 사고를 타파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피를 흘리고 굶고 밤새도록 목이 쉬도록 외치시면서 찾아다니시는 그 모습을 말씀하신다. 찾도록 찾으시는 것이다. 얼마만 찾겠는가? 끝까지 찾으신다. 유대인들은 양들이 가족 같았다. 그래서 오늘 새 생명 축제에 편견을 버려야 한다. 이 사람은 안 돼, 저 사람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야, 예를 들어 기독교를 적대하는 사람들, 신앙에 아주 무관심한 사람들, 아주 세속적이고 쾌락주의자들, 그리고 자기 의에 사로잡힌 사람들, 그 다음에는 self worshiper(자기숭배자들),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아버지가 그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주는데 찾도록 찾는 다는 것은 얼마가 걸리는가? 찾을 때까지...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찾는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성군 다윗도 목자였다. 찾을 때까지 가족 같은 마음으로 찾는 것이다. 사무엘상에 다윗은 자기가 사랑하는 양이 사자와 곰에게 물려갔을 때, 그 곰과 사자의 입을 찢고 그 양을 찾아서 구해냈다. 유대인들은 양에 대해서 생명을 건다. 그러고 난 다음에 다윗은 고백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했다. 우리가 흔히 목자라고 했을 때,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그 정도가 아니라 목자는 곰의 입에서 피를 흘려가면서 자기 양을 살려내도록 피나는 투쟁을 하고 생명을 거는 것이다. 그것이 목자가 되는 것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다른 말이 아니라 주님과 나와의 관계는 생명의 관계이다 어떤 경우에도 찢어질 수 없는 생명의 관계이다. 그래서 주님은 피 흘리기까지 갈보리에서 피 흘리기까지 다윗은 예표이고, 우리를 위해 우리를 살려주시는 은혜가 있는 줄 믿는 것이다. 이것이 목자의 심정이다. 

찾을 때, 광야에 있던 그 양을 찾는데 막 딱 보면서 이 멍청한 놈아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니? 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양을 안고 너무 좋아서 어깨에 메고 기쁘게 돌아온다. 우리 자녀들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서 아홉 명 열 명 정도 아이들이 예전에는 많았다. 자녀가 그 중에 한 사람 한 사람 다 사랑한다. 그러니까 100프로를 사랑하는 것이다. 자녀들을 데리고 어느 날 놀이공원에 갔다가 아이를 잃어버리면 그러면 엄마가 It’s OK!~ 하지 않는다.

그 한 명을 찾기 위해서 목이 쉬도록 찾을 것이다. 아이를 보는 순간 기쁘고 안고 너 괜찮니? 밥과 숙식을 물어볼 것이다. 그 마음보다 주님은 더욱 사랑하실 것이다. 우리 주님은 오늘 말씀에 목자의 심정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를 로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전부 100프로 전부로 사랑하는 줄로 믿는다. 이게 복음이다. 모두가 다 백퍼센트이다. 우리를 대중, 도매금으로 하지 않으시고 주님은 오직 사랑할 자가 나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하신다. 주님을 깨닫게 되면 얼마나 감사한지를 알게 된다. 주님이 나를 적당히 로 대우하지 않으시고 나를 완전하게 전부로 대우하신다. 나를 대우하시고 찾아오시고 접근하시고 찾아오시고 나를 붙잡아 주시고 나를 자녀 삼아주시고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때부터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회복된다. 그렇게 회복되면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복음 중에 핵심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이것을 깨달으면 어떤 환경으로 인한 핑계가 없다. 주님과 나와의 관계가 인격적으로 잘 잡히면 나와 주님과의 관계 때문에 주님의 자녀로서 고유한 가치가 있어서 주님이 나를 참으로 사랑하시니 나도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주님께 헌신하길 원한다. 이런 인격적인 만남이 형성이 된다. 오늘 저녁부터 오늘 헤매고 있는 모든 삶의 종류에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주님이 나를 전부로 대하시는 그 은혜 앞에 목자의 심정을 깨닫고 오늘 기쁨이 충만하기를 소망한다.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 주셨다는 것 자체가 지나온 2천 역사를 지탱해 온 힘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고 인격에 있다. 그리고 난 다음에 7,5,6절에도 즐기자. 로 나온다. 그다음에
 
*누가복음 15:7,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즐거움이 생긴다. 5절에도 즐겁다. 6절에도 7절에도 다 같은 내용이다. 제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니 너무 감사해서 삼각산 꼭대기에서 친구와 밤 12시 비오는데 찬송하세 찬송하게 주님 나를 구하셨네,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가 절로 나오는 것이다. 우리도 그런 은혜가 넘치기를 원한다.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다. 7절에 잘 보면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더 기쁨의 강물이 넘칠 것이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아 예수님의 제자훈련하고 사역훈련하고 순장하고 주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무장되는 것도 귀한 일이지만 그것보다 한 사람이 주님 앞에 돌아와서 주님과의 생명의 관계로 접붙임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피의 보혈의 은혜로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면 모든 사람이 주님을 닮아가는 것보다도 그 순간 더 큰 기쁨이 넘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자녀, 친구, 친척들에게 나아가야 되는 것이다. 제가 이 새 생명의 축제를 위해서 물어보면 어떤 분들은 매년마다 안 되니까 4명을 작정을 했는데 두 명은 오기로 하고 두 명은 올까말까 속을 썩인다고 한다. 그래서 좀 귀찮았지만 팔년을 계속 데리고 오는 분의 말을 듣고 그렇게 심정이 고민할 마음이 없어지고 애써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우리 교회 병원 원장님은 무료 진료권으로 초청했다. 스킨케어를 하시는 분은 스킨케어를 무료로 하면서 초청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미장원 하시는 분은 머리를 무료로 해주시면서 머리하는 동안 꼼짝 못하니까 이야기를 전하고 초대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명이 돌아오면 우리 모든 성도를 누리는 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이다.
 
이제 개인도 마찬가지이지만 공동체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오늘부터 수요일까지 여기에 기쁨이 충만할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 편견으로 안 된다고 하는 입장으로 보지 말고 망가진 양, 파괸 된 양, 허물로 지켜 있는 양, 선입관으로 포기한 양들이 돌아올 때 무슨 일이 벌어지냐면 하늘에서는 엄청난 환희의 영광의 불꽃을 쏘아 올리는 21발의 축포가 터지는 것이다. 하늘의 합창대가 찬양을 하고 기쁨의 대 잔치가 열리고 어떻게 보면 안 된다고 하는 분리주의적인 오염된 그런 사고방식에서 하나님의 심정과 천국의 심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돌아올 때, 천국에서는 기쁨과 희락의 국경일이 선포되고 새 생명의 대잔치가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새 생명 잔치라고 이름을 붙였다. 얼마나 기쁜지 스펄전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있다.
 
♤잃어버린 한 영혼이 구원받는 그 순간 하늘의 새 예루살렘 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의 눈물이 강물처럼 되어 넘쳐흐를 것이다. 천사들과 이미 앞서간 성도들은 이 기쁨의 강에서 헤엄쳐 가면서 즐거워할 것이다. 아멘. -스펄전 목사-
 
여러분 한국교회의 기쁨이 왜 사라졌는가?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기쁨의 저장고가 이렇게 바닥이 되었는가? 우리 민족에게 왜 기쁨의 강수가 약해졌는가? 우리 성도들에게 기쁨의 먹구름이 끼었는가? 우리는 할 일이 많다. 한국교회 이미지로도 많이 나타나야 하고 또 우리 구제 봉사도 더 잘해야 되고 우리가 기도하면서 남북 복음도 더 해야 한다. 나라를 위해서 기도도 더 해야 하겠지만 오늘 이 순간 우리는 먼저 무얼 해야 하는가? 바로 기쁨의 근원, 기쁨의 모퉁이 돌, 기쁨의 초석을 세우고 희락의 만세 반석을 세우는 한 영혼이 주님 앞에 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오후부터 우리 서로 기쁜 날 은혜로 충만하기를 바란다.
 
♤C.K. Lee라는 유명한 중국의 학자가 있는데,
이 학자는 미국의 유명 대학에 가서 강의를 부탁받았다. 그래서 그곳에서 자기 강의를 하는 게 아니고 간증을 했다. 그러니까 설교를 한 것이다. 그래서 다 마치고 난 다음에 특별히 예수님에 대해서 설교를 했다. 마친 후 학생들과 Q&A를 했다. 학생들이 질문을 했다. 중국에 유교와 공자가 있는데 왜 기독교를 전하는가? 라고 질문했다. 그때 대답이 3가지로 답한다.

 
첫째, 공자는 훌륭한 선생님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선생이 아니라 구세주이시다.
-중국은 선생임이 아니라 구세주가 필요하다. 라고 답했다. 대한민국에도 지성인들, 좋은 분들이 많이 있지만 오늘 대한민국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과 생명의 복음을 통한 구세주가 필요한 줄로 확신한다.
둘째, 공자는 죽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셔서 다시 살아나셨다. 중국은 부활하신 구세주가 확실히 필요하다.
셋째, 공자도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예수님을 심판자로 만나기보다는 구세주로 만나기를 원한다. 라고 이야기 했다.
 
이것이 생명의 복음이고 물타지 않는 복음인 것이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오늘 태신자들이 교회에 와서 은혜를 받으면 오늘 하나님을 접하게 될 때 예수님을 심판자로 만나지 말고 구세주로 만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이혼의 위기의 친구가 있었는데 새 생명 축제에 초대를 했다. 부적도 굿도 해보았다고 했다. 안 해본 것은 교회 가는 것을 안 해보았다고 했다. 그날 데리고 왔는데 주님을 영접했다. 기쁨이 있어야 전도할 수 있다. 또 영혼을 구원하면 더 기쁨이 더 생긴다. 행복해야 전도할 수 있다. 전도하면 행복할 수 있다. 이 은혜의 선순환이 되는 것이다. 기쁨과 행복이 많이 약해지는 시대 앞에 생명의 복음을 통해 기쁨과 행복이 회복되기를 소원한다. 오늘 구원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좋겠는가? 제가 70년도 후반에 사직도 문간방에서 가난해서 거기에 자취를 했다. 나보다 나이어린 형제 하나 그는 하숙을 했다. 그 친구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 예수를 믿고 그 형제는 지금 북한의 해외 동포 외국 상을 받았다. 그는 정치와 상관없이 북한의 밑바닥부터 보기를 시작했다. 미국 시민권으로 계속해서 식량이나 구호를 펼쳤다. 아픈 사람 돕고 아이들 영양실조와 무너진 학교를 세워주면서 순전하게 북한을 도움으로 북한에서 외국상을 받은 것이다. 내가 참으로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알 사람이 없도다..우리가 전한 사람이 주님 앞에 돌아왔을 때,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기쁨이 충만할 것이다. 얼마나 좋을까~~ 생각만하여도... 우리 한국 사회에도 다시 한 번 복음을 통한 기쁨과 행복이 회복되기를 소망한다.
 
♣요약
코로나로 인해서 번 아웃 된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4차 산업혁명의 디지털 과부하로 지친 영혼들을 만지셔서 이 생명의 복음으로 기쁨과 행복이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길 기도하며 예수님의 심정을 깨닫고, 목자의 심정을 깨닫고 주님과 인격적으로 만나서 더 이상 환경 때문에 절망하지 않는 묵묵히 주님만을 섬기는 남녀종이 되어야 한다. 저 사람은 안돼 라는 차별적인 의식을 버리고 목자의 심정으로 찾아서 주님이 자녀로 삼아야 한다. 태신자를 데리고 와서 주님의 품안에 안주하도록 준비하고 기도해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귀한 생명을 천국 잔치에 초대하여 서로 기쁨을 나누는 축제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심으로써 바리새인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았다. 율법은 죄인과 어울리기만 해도 부정해지므로 이를 금하고 있다. 율법의 근본 취지는 죄를 근절하기 위함이었으나 예수님 당시에는 율법을 통해 죄가 오히려 만연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한다. 사실 인간은 모두 죄인이므로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이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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