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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의 부자연스러움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목로란 ‘주로 선술집에서 술잔을 놓기 위해서 쓰는, 널빤지로 좁고 기다랗게 만든 상’을 의미한다. 목로주점이란 ‘목로를 차려놓고 술을 파는 집’이란 뜻이다. 굳이 목로주점의 의미를 찾아본 이유는 목로주점이라는 단어가 잘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전의 의미를 읽어봐도 잘 와 닿지가 않는다. 포장마차라거나 막걸리집이라고 한다면 조금은 더 잘 알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왜 이렇게 제목에 대해서 주절주절 늘어놓는가 하면 이 한문으로 된 고풍스러운 네 글자 이름이 실제 소설을 읽었을 때의 느낌과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제목과 작가의 이름만 봤을 때 이 소설이 이런 내용일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어렴풋이 그저 술집에서 벌어지는 무슨 일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사실은 파리의 한 세탁부 여자의 불행한 삶에 대한 사실적이고 또 절망적인 이야기였다.

주인공인 제르베즈는 건달 같은 남자 랑티에와 함께 파리에 왔다. 하지만 랑티에는 곧 바람이 나 도망쳐버리고, 혼자서 세탁부 일을 해 힘들지만 열심히 랑티에의 아이를 키운다. 그러다 어느 날 쿠포라는 함석공이 다가온다. 그녀는 착하고 성실해 보이는 쿠포와 결혼하여 한동안 열심히 일하며 행복하게 지낸다. 하지만 지붕에서 떨어지는 큰 사고를 당한 쿠포는 사고 후 게으름에 빠져 술고래가 되고, 다시 제르베즈에게도 불행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제르베즈는 그를 좋아하는 또 다른 남자 구제의 도움으로 세탁소가 딸린 집을 마련하여 꿈꾸던 자기 세탁소를 갖게 된다. 그리고 비극은 천천히 다가왔다. 랑티에가 돌아오고, 쿠포는 완전히 술독에 빠지고, 자포자기 심정에 빠진 제르베즈는 자신의 집에 눌러살게 된 랑티에와 바람을 피우는 한편 쿠포와 마찬가지로 술에 손을 댄다. 결국 쿠포가 죽고, 랑티에는 다른 여자와 또다시 바람이 나고, 세탁소도 잃게 된 제르베즈는 비참함 속에서 초라하게 죽는다.

이렇게 적고 보니 특별할 것 없는 통속적인 이야기지만, 사실 바로 그 점이 이 소설을 위대하게 만들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가난한 여자의 전형적인 삶의 비극을 주제로 삼아 하층민의 언어와 그들의 삶을 날것 그대로 소설 속으로 가져온 것은 그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백 년이 넘게 지난 지금 읽어보아도 이 소설의 내용은 여전히 파격적으로 다가온다. 도입부의 빨래터에서의 말 그대로 두 여자의 개싸움과, 등장인물들의 거침없는 욕설들, 그리고 한 여자와 두 남자가 한집에 살면서 벌이는 불륜 행각 등, 사실적인 상황과 묘사 들은 보수적인 독자들이라면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여전히 큰 힘을 갖는다.

이 소설의 탁월한 점은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에 대해서 어떤 환상도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쓸데없는 미화도, 그렇다고 격하도 시키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 제르베즈는 성녀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런 삶을 살아 마땅한 인간쓰레기도 아니다. 그녀는 그저 불운한 삶을 타고난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 그런 그녀가 결국 그렇게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 그런데 그 과정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는 것, 그러니까 아주 잠깐을 제외하고 그녀의 삶이 고통으로 가득 찼고 끝까지 구원은 없었다는 것, 이렇게 이 소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삶의 광경은 사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서 더 뼈아프게 느껴진다.

바로 여기에서 나는 의문을 갖게 됐다. 현실이란, 그러니까 우리가 사는 삶이란, 우리가 삶을 견디기 위해서 갖는 환상을 걷어내면 끔찍할 뿐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냉소주의나 염세주의와 뭐가 다른가? 결국 사실주의란 염세주의의 다른 이름인가? 냉철하게 삶을 인식하는 것과, 삶에서 어떤 가능성도 보지 못하는 것의 차이는 얼마나 되는 걸까? 나이를 먹고, 삶을 이해하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냉소적으로, 혹은 염세적으로 변한다. 어떤 가능성도 믿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며, 그게 자신이 손에 얻은 단 하나의 진실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냉소주의 혹은 염세주의와, 사실 혹은 현실 사이에는 가느다란 선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소설의 비극적 결말에서 졸라가 추구했던 자연주의의 한계를 본다. 실제로 이 소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제르베즈의 성대한 생일잔치를 정점으로 플롯이 대칭적으로 상승하고 하강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대단히 인공적인 구성이다. 인간의 삶이 그렇게 대칭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은, 모든 것이 인과관계에 따라서 흘러간다는 것은, 사실 예외적인 상황이 아닐까? 그러니까 사실 이 책이 보여주는 자연주의란 진짜 현실을 보여준다기보다는 잘 구성된 현실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잘 구성된 면이 독자들을 빨아들이고, 소설이 완성도를 확보한다.

하지만 그런 작가의 선택은 최선이었는가? 리얼리즘, 사실주의, 자연주의 등으로 칭해지는 근대소설의 사조들은 사실 현실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기보다는 현실이 무엇인가에 대한 일련의 작가들의 관점과 의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실에 대한 나의 관점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는 현실은 뭐고, 어떻게 해야 그것을 소설이라는 형식 안에 담아낼 수 있는가? 현실을 담아내는 행위를 통해서, 동시에, 어떻게 현실 너머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언제나 계속되는 질문이고,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

김사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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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와 두 남자의 기묘한 동거

♣'목로주점'줄거리

19세기 자연주의 문학의 대표 걸작 『목로주점』은 파리 하층민의 비참한 삶을 적나라하게 묘사해 출간 당시 격렬한 찬반 양론에 휩싸인 문제작이다. 당시에는 문학적 금기에 속하는 ‘민중’을 주제로 삼은 최초의 소설로, 하층계급인 세탁부 여인을 진정한 의미의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문학의 민주화’를 이루어냈다고 평가받는다. 인물들의 대화뿐 아니라 서술 부분에까지 민중의 어휘와 말투를 도입하는 파격적인 시도로 현대적이면서 맛깔스러운 언어의 성찬을 제공해준다. 출간 3년 후에는 100쇄를 돌파해 19세기 프랑스 최초의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플로베르, 공쿠르, 투르게네프, 알퐁스 도데 등으로부터 격찬을 받은 걸작으로 1956년 르네 클레망 감독에 의해 영화화됐다.

세탁부인 제르베즈와 랑티에는 결혼도 하지 않은 처지에 두 아이를 낳아 도망치듯이 파리로 온다. 그러나 랑티에는 제르베즈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사라져버린다. 제르베즈는 다시는 남자를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아이들을 위해 부지런히 일한다. 그러나 함석공 쿠포의 끈질긴 구애에 못 이겨 결혼을 하고, 열심히 일한 덕분에 어느 정도 저축까지 하게 된다. 그러던 중 남편 쿠포가 사고로 큰 부상을 입고, 그를 치료하느라 가진 돈을 몽땅 날려버린다. 사고 후 게으름을 피우는 버릇까지 생긴 쿠포는 술독에 빠져 상황은 나날이 어려진다. 설상가상으로 제르베즈의 동네로 돌아온 옛 애인 랑티에가 쿠포를 감언이설로 꾀어 제르베즈와 쿠포의 집에 얹혀살게 되고, 이렇게 한 여자와 두 남자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는데…….

원제: L’Assommoir

저자: Emile Zola(1840~1908)

발표: 1877년

분야: 프랑스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목로주점

옮긴이: 박명숙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83, 084(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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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의 부자연스러움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목로란 ‘주로 선술집에서 술잔을 놓기 위해서 쓰는, 널빤지로 좁고 기다랗게 만든 상’을 의미한다. 목로주점이란 ‘목로를 차려놓고 술을 파는 집’이란 뜻이다. 굳이 목로주점의 의미를 찾아본 이유는 목로주점이라는 단어가 잘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전의 의미를 읽어봐도 잘 와 닿지가 않는다. 포장마차라거나 막걸리집이라고 한다면 조금은 더 잘 알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왜 이렇게 제목에 대해서 주절주절 늘어놓는가 하면 이 한문으로 된 고풍스러운 네 글자 이름이 실제 소설을 읽었을 때의 느낌과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제목과 작가의 이름만 봤을 때 이 소설이 이런 내용일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어렴풋이 그저 술집에서 벌어지는 무슨 일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사실은 파리의 한 세탁부 여자의 불행한 삶에 대한 사실적이고 또 절망적인 이야기였다.

주인공인 제르베즈는 건달 같은 남자 랑티에와 함께 파리에 왔다. 하지만 랑티에는 곧 바람이 나 도망쳐버리고, 혼자서 세탁부 일을 해 힘들지만 열심히 랑티에의 아이를 키운다. 그러다 어느 날 쿠포라는 함석공이 다가온다. 그녀는 착하고 성실해 보이는 쿠포와 결혼하여 한동안 열심히 일하며 행복하게 지낸다. 하지만 지붕에서 떨어지는 큰 사고를 당한 쿠포는 사고 후 게으름에 빠져 술고래가 되고, 다시 제르베즈에게도 불행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제르베즈는 그를 좋아하는 또 다른 남자 구제의 도움으로 세탁소가 딸린 집을 마련하여 꿈꾸던 자기 세탁소를 갖게 된다. 그리고 비극은 천천히 다가왔다. 랑티에가 돌아오고, 쿠포는 완전히 술독에 빠지고, 자포자기 심정에 빠진 제르베즈는 자신의 집에 눌러살게 된 랑티에와 바람을 피우는 한편 쿠포와 마찬가지로 술에 손을 댄다. 결국 쿠포가 죽고, 랑티에는 다른 여자와 또다시 바람이 나고, 세탁소도 잃게 된 제르베즈는 비참함 속에서 초라하게 죽는다.

이렇게 적고 보니 특별할 것 없는 통속적인 이야기지만, 사실 바로 그 점이 이 소설을 위대하게 만들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가난한 여자의 전형적인 삶의 비극을 주제로 삼아 하층민의 언어와 그들의 삶을 날것 그대로 소설 속으로 가져온 것은 그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백 년이 넘게 지난 지금 읽어보아도 이 소설의 내용은 여전히 파격적으로 다가온다. 도입부의 빨래터에서의 말 그대로 두 여자의 개싸움과, 등장인물들의 거침없는 욕설들, 그리고 한 여자와 두 남자가 한집에 살면서 벌이는 불륜 행각 등, 사실적인 상황과 묘사 들은 보수적인 독자들이라면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여전히 큰 힘을 갖는다.

이 소설의 탁월한 점은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에 대해서 어떤 환상도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쓸데없는 미화도, 그렇다고 격하도 시키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 제르베즈는 성녀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런 삶을 살아 마땅한 인간쓰레기도 아니다. 그녀는 그저 불운한 삶을 타고난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 그런 그녀가 결국 그렇게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 그런데 그 과정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는 것, 그러니까 아주 잠깐을 제외하고 그녀의 삶이 고통으로 가득 찼고 끝까지 구원은 없었다는 것, 이렇게 이 소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삶의 광경은 사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서 더 뼈아프게 느껴진다.

바로 여기에서 나는 의문을 갖게 됐다. 현실이란, 그러니까 우리가 사는 삶이란, 우리가 삶을 견디기 위해서 갖는 환상을 걷어내면 끔찍할 뿐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냉소주의나 염세주의와 뭐가 다른가? 결국 사실주의란 염세주의의 다른 이름인가? 냉철하게 삶을 인식하는 것과, 삶에서 어떤 가능성도 보지 못하는 것의 차이는 얼마나 되는 걸까? 나이를 먹고, 삶을 이해하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냉소적으로, 혹은 염세적으로 변한다. 어떤 가능성도 믿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며, 그게 자신이 손에 얻은 단 하나의 진실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냉소주의 혹은 염세주의와, 사실 혹은 현실 사이에는 가느다란 선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소설의 비극적 결말에서 졸라가 추구했던 자연주의의 한계를 본다. 실제로 이 소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제르베즈의 성대한 생일잔치를 정점으로 플롯이 대칭적으로 상승하고 하강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대단히 인공적인 구성이다. 인간의 삶이 그렇게 대칭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은, 모든 것이 인과관계에 따라서 흘러간다는 것은, 사실 예외적인 상황이 아닐까? 그러니까 사실 이 책이 보여주는 자연주의란 진짜 현실을 보여준다기보다는 잘 구성된 현실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잘 구성된 면이 독자들을 빨아들이고, 소설이 완성도를 확보한다.

하지만 그런 작가의 선택은 최선이었는가? 리얼리즘, 사실주의, 자연주의 등으로 칭해지는 근대소설의 사조들은 사실 현실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기보다는 현실이 무엇인가에 대한 일련의 작가들의 관점과 의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실에 대한 나의 관점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는 현실은 뭐고, 어떻게 해야 그것을 소설이라는 형식 안에 담아낼 수 있는가? 현실을 담아내는 행위를 통해서, 동시에, 어떻게 현실 너머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언제나 계속되는 질문이고,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

김사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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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와 두 남자의 기묘한 동거

♣'목로주점'줄거리

19세기 자연주의 문학의 대표 걸작 『목로주점』은 파리 하층민의 비참한 삶을 적나라하게 묘사해 출간 당시 격렬한 찬반 양론에 휩싸인 문제작이다. 당시에는 문학적 금기에 속하는 ‘민중’을 주제로 삼은 최초의 소설로, 하층계급인 세탁부 여인을 진정한 의미의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문학의 민주화’를 이루어냈다고 평가받는다. 인물들의 대화뿐 아니라 서술 부분에까지 민중의 어휘와 말투를 도입하는 파격적인 시도로 현대적이면서 맛깔스러운 언어의 성찬을 제공해준다. 출간 3년 후에는 100쇄를 돌파해 19세기 프랑스 최초의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플로베르, 공쿠르, 투르게네프, 알퐁스 도데 등으로부터 격찬을 받은 걸작으로 1956년 르네 클레망 감독에 의해 영화화됐다.

세탁부인 제르베즈와 랑티에는 결혼도 하지 않은 처지에 두 아이를 낳아 도망치듯이 파리로 온다. 그러나 랑티에는 제르베즈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사라져버린다. 제르베즈는 다시는 남자를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아이들을 위해 부지런히 일한다. 그러나 함석공 쿠포의 끈질긴 구애에 못 이겨 결혼을 하고, 열심히 일한 덕분에 어느 정도 저축까지 하게 된다. 그러던 중 남편 쿠포가 사고로 큰 부상을 입고, 그를 치료하느라 가진 돈을 몽땅 날려버린다. 사고 후 게으름을 피우는 버릇까지 생긴 쿠포는 술독에 빠져 상황은 나날이 어려진다. 설상가상으로 제르베즈의 동네로 돌아온 옛 애인 랑티에가 쿠포를 감언이설로 꾀어 제르베즈와 쿠포의 집에 얹혀살게 되고, 이렇게 한 여자와 두 남자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는데…….

원제: L’Assommoir

저자: Emile Zola(1840~1908)

발표: 1877년

분야: 프랑스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목로주점

옮긴이: 박명숙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83, 084(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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