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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주후 2021년 1월 13일)

제목: “오직 하나님 앞에서”

말씀: 창세기 17:1-7절

설교자: 박요한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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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7:1-7절)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3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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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인해서 더할 나위 없이 우리는 위태로운 상황 가운데 직면하고 있다. 우리 모두에게 은혜가 목마르고 은혜가 필요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혹여 경쟁 가운데 뒤쳐져서 우리가 실패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마음가운데는 불안과 두려움이 점점 자라난다. 우리 내면에 불안함이 거대해 질 때마다 우리 안에는 은혜가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하나가 쓰러지면, 전부가 쓰러지는 도미노처럼 우리 안에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또한 무너져버리고 만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 안에 은혜가 사라지고 불안과 두려움이 가득한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되고 소망이 되기를 소망한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75세에 고대시대 문명이 가장 발달한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창세기 12-16장까지는 아브라함이 75세에서 86세에 이르기까지 11년간 하나님과 동행하며 이뤄낸 신앙의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창세기 16장 16절을 보면,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지난 11년의 동안 아브라함의 믿음의 성장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 창세기 17장 1절을 읽어보니까 갑자기 16장에서는 86세였는데 지금 17장 1절에서는 99세로 껑충 뛰어버렸다.

-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아브라함에 86-99세가 될 때까지 13년의 시간동안 아무런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왜 성경에는 13년이란 기간 동안 아브라함의 행적에 대한 아무런 기록이 없을까요? 하나님께서 분명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수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오늘 창세기 17장을 읽어보면 실재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하신 그 자손의 문제에 대해서 매우 인간적이고 상식적이며, 매우 이성적인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아내 사라의 몸은 노화로 인해 더 이상 임신할 수 없었다. 아내 사라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약속대로 가문의 계보를 이어가기 위해서 자신의 여종인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육신의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오늘 우리가 나눌 말씀이다.

I. 첫 번째 내용은 – 하나님의 생각보다 나의 생각이 앞설 때, 하나님의 친밀한 교제는 사라지게 된다.

-이스마엘이 태어난 지 13년이 흘렀다. 우리가 13년이란 시간동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믿음의 자손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19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하나님이 계획하신 언약의 자손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이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 가운데 아브라함의 계보 안에 태어나실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인 구원 계보에 포함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생각과 아브라함의 생각의 차이점이었다. 이것이 기껏해야 많으면 백년을 사는 좁은 안목을 가진 인간의 생각과 영원한 안목을 가진 하나님의 생각의 차이점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정말 안타깝게 생각한 것은 과거 11년 동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인도하심을 받으며, 특별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냈다. 그런데 이 아브라함이 오늘 본문에 13년이란 시간동안 그 긴 인생 가운데 하나님과 친밀한 영적 교제가 나누는 그 대목이 사라져버렸다. 더욱이 하나님 교제 속에서 누리던 은혜도 그 인생 가운데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신앙생활 하는 가운데 은혜가 사라져버린 것을 경험한다. 어떤

사람들은 코로나 19로 인해서 약이 된 문제라고 스스로 진단을 내리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왜냐면 우리가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전에도 우리 신앙 가운데 하나님의 친밀한 영적인 교제가 사라지는 것을 非一非再하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람은 신앙이 어떻게 신앙이 뜨거울 수 있겠냐고 그런 태도로 체념하는 모습으로 말한다. 또, 이러한 영적인 정체의 상태를 빠져나오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함께 나와 하나님을 부르짖고 하나님께 나아간다. 하나님과 과거에 나누었던 풍성한 그 은혜를 다시 누리게 해달라고 부르짖고 기도한다. 하지만 기도함에도 불구하고 그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에 하나님의 친밀한 교제가 조금씩 약화되어져 간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점점 냉담해지기 시작한다. 현재 나의 삶에는 과거 내가 하나님과 친밀하게 누렸던 그러한 교제가운데 누렸던 그 풍성한 은혜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그 이유를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충돌할 때, 마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육신의 뜻을 선택한 것처럼 하나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충돌할 때, 하나님의 생각보다 나의 생각을 최고의 대안으로 선택할 때,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사라져간다. 하나님의 생각보다 나의 생각이 앞설 때,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는 무너져버리고 만다. 더욱이 우리 안에 있는 은혜조차 사라지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언제나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또 나눌 내용이다.

II. 두 번째 내용은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우리를 향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무려 13년이란 동안 기다리시고 인내 하시다가 하나님의 길로부터 인간의 길로 동떨어져버린 그 아브라함을 찾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친히 내려오셨다.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여기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다고 하신 말씀에 주목하면, 위로부터 내려 오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끊어진 것을 참지 못하시고 하늘로부터 내려오셔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은혜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선택하신 은혜이다. 바로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로 행하시는 은혜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속에서 누렸던 것이 사라지고 교제가 무너져버렸을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우리를 향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은 결단코 하나님의 백성이 망해져가는 것을 목도하시지 않는다. 언제나 무조건적 사랑과 선택한 것을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친밀한 교제가 무너진 아브라함과 같이 자신의 생각이 최선으로 믿었던 그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이번에도 하나님 자신의 사랑으로 인해서 아브라함의 인생 속에 친히 개입하셨다. 그리고 5절을 보면 우리에게 행하시는 그 영원한 은혜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신다.

 

5절에 -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아브라함을 친히 찾아오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친히 이름을 주셨다.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라는 뜻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부르신 대로 반드시 성취되는 것을 믿는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리고 부르시면, 그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루게 될 줄 믿는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하시매 빛이 창조되었고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창조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열국의 아비가 되었다. 아브라함은 거대한 제국을 세우지 않았다. 그리고 거대한 땅을 정복하지도 않았다. 자기가 묻힐 막벨라 굴조차 가족의 무덤으로 사용할 것이 그 전부였다. 13세의 이스마엘과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이삭이 전부였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그의 영적인 능력이 가득 찼고, 전 세계 77억 명 가운데 3분의 1 가까운 인구가 그리스도인이다. 그 많은 영적인 후손들이 온 세계 가운데 가득 채워졌다. 유대인을 제외하고도 수많은 영적인 후손들이 가득채운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줄 믿는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라고 부르신 이름의 개명은 아브라함의 전환점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역사의 전환점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개명하신 이 사건은 우리에게 너무나 영광스런 역사적인 사건이다.

 

창세기 26:24절을 보면,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이삭에게 나타나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22장 32절에 보면,

마태복음 22:32절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하나님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그의 호칭을 부르고 계신다.

 

ex) 아들 하니가 있다. 아니 아빠 엄마라고 부르면 더 좋다. 그래서 아들을 내 생명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그렇게 부를 때, 자랑스럽고 기쁘다. 아브라함의 개명 사건은 박요한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하니 아빠라고 부르는 것처럼 더 이상 하나님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이름으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호칭으로 불리신 것이 역사적인 사건이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지옥의 땔감이라고 경멸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혈통도 아닌 이방인을 우리를 위해서 친히 아빠 아버지라고 불려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름으로 자신이 불려주시기 위해서 단 하나 뿐인 독생자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무너져 버리고 마치 우리 안에 은혜가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믿어야 한다. 이 은혜가 여전히 우리를 향하고 있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유지하는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육신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살아갈 방법은 무엇인가?

1절에 보면 하반 절에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한다. 영적인 준비상태를 의미한다고 신학자들은 말한다. 영적인 준비상태를 갖추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영적인 준비를 갖추라고 하신다.

-5분 전투 대기조를 아는가? 군대 용어이다. 잘못하면 징계를 받는 일이다. 이것은 이러한 군인처럼 영적으로 무장하고 긴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적으로 무장하기 위해서는 가정과 교회 그리고 일터에서 우리의 일상의 최전선에서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서 경험하는 상태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삶의 최전선에서 영적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무장되고 긴장된 상태로 살아내는 것이다.

 

*우리가 나눌 내용의 마지막이다.
하나님을 날마다 은혜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기위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III. 세 번째 - 지금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중심사상이 코람데오였다. 코람데오는 두 개의 단어가 합쳐진 것이다. 이 코람이라는 단어는 면전에서,~앞에서란 의미를 담고 있고, 데오는, 데오스, 하나님이란 뜻을 담고 있다. 그래서 코람데오는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이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지속적으로 매순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처럼, 나를 지켜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날마다 살아가는 것이다. 위클리프는 성경을 번역을 하다고 처형당할 것이라 생각해왔다. 그러나 늘 오직 하나님 앞에서라는 생각으로 생명의 위협가운데 위클리프를 하나님은 보호하셨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오직 코람데오이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살아내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전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서야한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듣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친히 서 계셔서 직접 보고 듣는 것처럼 서야 한다. 우리가 시청이 아닌 예배를 전인격적으로 드려야 한다. 은혜는 박재된 과거의 기억이 아니다. 또한 그저 내일 오는 것이 아니다. 지금 하나님 앞에 대면하여 바로 설 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되고 교제가 된다. 은혜가 목마르고 힘들 때, 지금 누릴 은혜가 무엇인가? 1절에 보면,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바로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라고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거하게 된다. 말씀 앞에서 전인격적으로 직접보고 들을 때에 우리 안에 은혜가 거하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지금 살아내는 자 되어야 한다.

 

♣요약

아브람은 ‘고귀한 아버지’라는 뜻인 반면에 새로 얻은 이름인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라는 뜻이다. 즉 그의 이름에 하나님과의 언약이 비로소 반영된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요구 사항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행하는 것이다. 우리도 성도로서의 이름에 걸맞게 살려면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해야하며, 하나님의 약속이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후손에 대한 것 외에도 가나안 땅을 영원한 기업으로 주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이 땅의 기업을 넘어서 하늘의 영원한 기업을 약속하시고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 주기로 약속하신 것이다.

- 우리는 과거 하나님과 함께 친밀하게 교제하며 살았던 그 풍성한 은혜가 사라지고 위태로운 가운데 살아가고 있을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살피시고, 나의 좁은 생각을 오히려 더 크고 놀라운 능력을 주시며, 하나님의 생각을 딸라서 영적으로 준비되고 충만한 교제가 되어야 한다. 선택받은 우리 백성은 망하게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되게 하신다. 그러니 오직 하나님 앞에서 매일 매순간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을 동행하고 경험하며, 오직 하나님 앞에서 살아내야 한다.  우리의 영혼은 목마르지만,. 우리 가운데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생각이 아닌 아브라함에게도 일방적으로 선택하셔서 찾아오신 것처럼, 아브라함과 같이 여전하게 우리를 향하시고 계심을 믿고, 성령을 의지하여 삶 가운데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하나님과 친밀하기를 소망해야 한다. 늘 성령이 충만해져서 해갈되고, 우리 안에 은혜가 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씀을 듣고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대하듯 주님 말씀을 듣고 보며,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서서 살아내서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여 어디서나 복음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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