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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2년 4월 10일)

제목: “해석보다 해결이다”(새 판짜기의 비유 19번째)
말씀: 누가복음 10:25-37
사회자: 장광천 부목사님(1부)
대표기도: 정민교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 영광찬양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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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0:25-37,
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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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주일을 한 주 앞둔 종려주일이다. 강단에는 많은 십자가가 이렇게 장식되어 있다.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많은 복잡한 일들을 만나는데 그 마음을 정리하고 십자가를 통해 다 정리하기를 바란다. 십자가에서 주시는 십자가의 능력과 보혈의 능력이 오늘 여러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덮어주시길 소망한다. 오늘 제가 비유 설교를 하고 있는데,,,‘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이다.’ 이 말씀이 너무 귀해서 빌리그램 목사님은 ‘사마리안들 지갑(Samaritan's Purse)’이라는 NGO그룹을 만들어서 전 세계에 큰 공헌을 하고 있을 정도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말씀이 익숙하다. ‘선한 사마리안인의 비유’를 오늘 처음 듣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 알 것이다. 자 오늘 이 관심은 뭐냐면 누가 이웃인가이다. 오늘 주로 관심이 뭐냐면 ‘누가 나의 이웃인가?’
 
*누가복음 10:29,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질문한다. ‘누가 네 이웃이냐?고 이렇게 질문을 던지면서 이제 그 이웃에 대한 해석을 하는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그 이웃에 신경을 쓰지 말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누가복음 10:37,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가서 너도 같이 하라고 하신다. 해석도 필요하지만 해석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해결이라는 것이다. 요즘 실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한국교회도 어떤 이론을 많이 하는 것보다 실체가 와 닿아야 한다. 우리교회 성도님들 가운데 대학에서 교수직을 하시다가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셔서 큰 회사를 운영하는 CEO가 되었다. 본인이 대학교수도 해보고 회사의 CEO도 해보니까 그런 이야기를 했다. 교수는 논문으로 하니까 비판하고 지적하고 해석하고 논문만 쓰면 되는데 그렇게 하면 되지만 CEO가 되니까 날마다 부딪히는 문제를 반드시 해결을 해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살이가 만만하지가 않듯이 지난 주일에 은혜를 많이 받았지만 한 주간 동안 수많은 일이 일어났다. 먼저 그것을 앞에 놓고 우리가 분석하고 해석할 뿐만 아니라 그 문제를 말씀의 능력과 주님의 인도를 따라서 해결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예배를 통해 많은 것들이 해결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유교의식이 강해가지고 일단 뭔가에 그렇게 해석하는 논리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예전에는 유교의 특징은 먼저 깨닫고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는 나라가 망한다. 그래서 선지후행이 아니고 지행합일을 우선으로 했다. 그러니까 요지는 먼저 깨닫는 것과 행동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문제를 보는 눈도 필요하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는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생각과 행동이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숨을 쉬는 동안 수많은 문제들을 우리 곁에 두고 매일 문제와 살고 있다. 그래서 오늘 영적인 선지후행이 아니고 지행합일이 중요하다. 영적으로 깨닫는 것과 행하는 것이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청소년 하나가 인생의 문제가 많고 인생이 괴롭다고 말한다. 그 청소년을 보고 아버지가 궁금해 하니,  ‘아빠, 요즘 내 삶이 너무 힘들고 어렵습니다.’ 라고 하니 아빠가 냄비에 물을 붓고 계란을 삶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애야, .어떤 사람들은 계란을 조그만 잘못 만지면 터지고 한다. 너도 그런 문제가 있다면 그 계란을 냄비에 삶아버리면 된다.’고 하신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깨지기 쉬운 달걀을 삶아서 안전하게 만든다. 라고 이야기 해준다. 계란이 깨지기 쉽다가 전전긍긍하고 이렇게 하지 말고 삶아버리면 된다. 이해가 가는가? 삶은 달걀이 되듯이 말씀으로 삶아버리면 된다. 그래서 오늘 율법사가 말하는 것을 보면,

 
*누가복음 10:25,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시험이라는 말이 복음서에 몇 번 안 나오는데 사탄에 예수님을 ‘시험’한다는 말을 한다. 그러니까 이 율법 교사를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문제를 제시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문제를 지적하고 판단하고 그다음에는 문제를 계속 이어가는데, 예수님은 문제의 해결자이시기 때문에, 사실 오늘 이 말씀의 배경은 누가복음 사마리아인의 배경이 9장 앞장의 뒷부분에 뭐가 나오냐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성을 지나가려고 하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좋게 대우하지 않는다. 배척을 하는 것이다. 요한과 야고보가 열을 받아가지고 예수님, 저 사마리아 사람들 모두를 하늘에서 벼락을 내려서 다 죽어버리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 유댜인이 갖는 어떤 세계관인 사마리아인의 거의 인종(人種)차별적(差別的) 발언이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영적인 카운트 펀치를 한 방에 날려버리신다. 세계관 자체가 너 자신의 세계관을 한정 시키는 제자들에게 세계관을 확장시켜 주신다. 자기 세계관에 빠져 있는 것이다. 사마리아인도 너의 이웃임을 깨닫게 한다. 사실은 율법사도 율법 전문가이지만 남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자기를 비추어보아야 하는데 남을 지적한다. 
 
오늘 주님은 “네가 정해놓은 프레임 속에서 헤매지 말고 그 좁은 간장 종지만한 그런 세계관을 넓혀서 하나님 나라의 큰 은혜의 세계관으로 바꾸라.”고 하신다. 글로벌 스탠다드로 나아가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율법교사는 잘 못 알아들었다. 요즘 말로 하면 법조인, 교수, 교사 같은 자이다. 이스라엘 당대의 지식인이다. 그러니까 마음과 목숨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다. 알겠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제 해석을 잘했다고 하시고, 너희 대답이 옳다고 하신다. 28절에 옳다고 하시니, 그러면서 이웃 사랑을 제대로 하라고 하시니까 이 율법사는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이냐고 질문한다. 그 마음속에 생각들을 끌리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이웃은 동족들뿐이었다. 심지어 오순절 성령 강림주일에도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예수님은 문제 지적보다 해결을 할고 하신다. 
 
*사도행전 10:28,
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이런 세계관에 갇힌 사람들을 앞에 놓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신다.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여기에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성경에는 예루살렘은 해발 753미터이고 여리고 성은 해저 사해를 끼고 있어서 258미터 정도인데 아주 아래에 있어서 천 미터 이상이 차이가 난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의 거리는 약 27킬로미터이다. 아주 그냥 험악한 길이었고 그 길은 강도들이 많았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중에 강도만난 사람이 이제 강도를 만났는데 아주 죽을 정도로 맞았다. 옷이 다 벗겨지고 피투성이가 되었고 빈사상태에 빠졌다. 그 피투성이가 된 자의 곁은 두 사람이 지나갔다. 소위 제사장과 레위인이 지나갔다. 저는 제사장이 어떻다고 판단하기에 앞서서 그 나름대로 그냥 지나가는 나름 이유가 있기는 하다. 그 당시에 제사장과 레위인은 시체를 만지면 부정했기 때문이다. 일 년 동안 제사장 직무 이행을 못하기 때문이다. 사역을 감당하는데 죽은 사람이 부정하기 때문에 시체를 보고 지나간 것일 가능성이 높다. 만지면 일 년간 직무 금지 박탈이라서 그렇다. 그런데 주님은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시는지를 보아야 한다. 시신을 만지거나 부정한 사람이 되지만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치유하시기 위해 손을 대실 수 있다는 것이다.

율법에는 나병환자는 부정한 자이다. 그래서 나병환자는 전염이 안 되도록 공동체에서 멀리 떨어져 살아야 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옆에 지나가면 나는 부정한 자라고 이렇게 외쳐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병환자(癩病患者)를 고치시기 위하여 손을 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유대의 모든 프레임과 관습을 깨뜨리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해석보다도 예수님은 문제해결에 집중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나는 것이다. 구약의 율법의 말씀이 왜 필요한가? 사람을 살리려고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결론적으로는 율법을 가지고 사람을 옭아맨다. 법이 사람을 살려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때가 많이 있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 이런 율법을 누구에게 적용을 해야 하는가? 자기 자신에게 적용한다. 율법은 나에게 적용하고,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한다. 중요하다. 율법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의 눈을 열어야 하는데 모든 율법과 법은 나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남을 삿대질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비추어 보아야 한다. 율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율법을 해석하고 율법을 다루는 사람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문제를 놓고 적용을 하겠다.

 


*누가복음 10:33,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긴다. 예수님께서 목자 없는 양 같이 백성들을 보고 불쌍히 여긴다는 말과 돌아온 탕자의 말과 아버지가 그을 측은히 여긴다는 말과 오늘 불쌍히 여긴다는 말과 똑 같은 목자의 심정이다. 핵심 말씀이다. 그러니까 이 사마리아 사람이 피투성이 된 사람에 대하여 공감을 갖는 것이다. 예수 믿는 우리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자연스러워야 한다. 누가복음 15장에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가 측은히 여겼다는 말씀이며 예수님이 민망히 여긴다와 똑 같은 단어이다. 목자의 심정, 스프랑크 리조마이라고도 한다. 이 말은 우리가 기독교 신앙에서 생각과 마음을 다루는데 중요하다. 오늘 이 종려주일에 한 주간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웃을 향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가까운 사람끼리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다. 남편도 보기 싫다고 여기지 말고 진짜 불쌍하다고 여겨야 하고 우리 아내 진짜 불쌍하다고 여겨야 한다. 믿는 사람들의 마음이 서로 그런 마음이 있어야 한다. 서로 아파하고 공감해 주어야 한다. 해석보다 이 사람은 정말 해결을 하는 사람이다.

I. 사마리아인처럼 목자의 심정을 회복해야.

아마 사마리아인은 사업하는 사람인 듯 하다. 힘을 다하여 친절을 베풀었다. 자기의 물건들을 사용해서 치료했고 기름과 포도주와 자기가 아끼던 것을 들여서 외과의사 같은 일을 했다. 민첩하고 침착하게 좋은 솜씨로 치료했다. 투자를 한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렸다. 포도주로 기름으로 현재 돈과 그리고 비용이 더 들면 더 도와주겠다고 하면서 미래의 비용 드는 것까지 준비를 했고 자기 짐승에 태웠다. 요즘 같으면 자가용에 태워서 갔다. 그리고 주막에 가서 하루 머물면서 시간을 함께 나누고 있다. 머물면서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이 목자의 심정을 가진 사마리아인이었다. 그것을 뛰어 넘고 불쌍히 여긴 것이다. 

 
II. 개인 민족의 감정을 뛰어넘어야.

-원수 같은 사람이 당하면 꼴좋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런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 뛰어 넘는 감정이다. 오늘 어떤 목자의 심정을 가진 것이다. 개인과 민족의 감정을 뛰어 넘었다. 살다보면 개인감정도 있고 케미가 잘 안 맞는 사람도 있다. 제자 반에서도 꼭 그런 사람도 있다. 일 년내내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 어떻게든 서로 그러하지 말고 학연 지연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되고 뛰어 넘어야 한다. 프레임을 뛰어넘는다. 도와주는 사람도 사마리아인이고, 도움을 받는 사람은 유대인이고 유대인인데... 우리가 일본도 무시할 수 없고 중국도 그렇다. 잘 지내야 한다. 이 비유에서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인과의 관계가 일본과의 관계가 비슷하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축구를 하는데 육만명이 넘는 축구장에 욕만 하는 경기였다. 사이가 엄청 나쁘다. 경기를 할 때도 욕을 강하게 하는 팀이 기가 세서 이기더라. 하나님은 여기서 민족 감정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코로나 시대를 주시고 코로나 이후에 엔데믹이 있는데 여기에서 우리가 너희들에게 주시는 음성은 글로벌 스탠다드로 가라고 하시는 것임에 틀림없다.
 
제가 미국에 21년 살았는데 LA에서 살았는데 흑인들이 가계들을 다 뒤집어 엎었다. 폭동이 일어난 것이다. 엉망이었다. 한국 사람들이 안된 일이었다. 그래서 흑인들이 나빴기에 한국 사람들은 흑인과의 관계가 안 좋다. 그래서 한국인들이 흑인을 비하한다. 흑인들에게 연탄이라고 하고 그 거리가 있는데 흑석동 거리라고도 한다. 한국 갱단하고 흑인들 갱단하고 하면 흑인 갱단을 제일 무서워한다. 흑인 갱단은 멕시칸 갱단(히스패닉)을 무서워한다. 그 갱단은 베트남 갱단을 무서워한다. 그런데 베트남 갱단은 누구를 겁내냐면 한국 갱단을 겁낸다.ㅋㅋㅋ 한국 갱단 →훅인 갱단 →멕시칸 갱단→베트남 갱단→한국갱단 서로서로 이렇게 된다. 한 마디로 우리는 다 뛰어넘어야 한다. 우리는 그래서 우리는 개인감정을 넘어서 살아야 한다. 일본 사람과도 잘 지내야 한다. 일본 채플도 우리교회에도 있다. 어떻게 잘 해결해서 회복해야 한다. 인류애, 족속애는 기독교적인 말이다. 에수님은 모든 족속에게 인류애를 주셨기에 글로벌 스탠다드는 기독교 용어이듯이 일본과의 관계가 좋아야 한다. 같이 가야하고 일본 교회에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수현 학생이 지하철에서 일본인 취객을 구하고 죽는다. 선로에서 죽었기에 일본 사람들에게 큰 감동이며 충격을 주었다. 당시 빈소를 찾아주었고 한국에 대한 감정이 좋아졌으며 십 년 동안 이수현을 총리가 계속 추모하기도 했다. 이제 선한 사마리안으로서 해석보다 해결을 앞에 두고 모두 뛰어 넘어야 함을 믿는다. 일본인들이 우리 교회에서도 수십명이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 빌리그램 목사님도 섬김의 본을 보이셨다. 사마리아인의 지갑처럼 자연스럽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저는 지금 우리 교회 사랑광주리가 있다. 특별히 북한을 돕고 있다. 지금 고난 행군할 때보다 더 힘든 시기이다. 상해처럼 봉쇄되어서 지금 북한도 어떤 곳보다도 식량문제가 처절하게 어렵다. 북한의 17-35세 정도의 젊은이들이 반이 군인이고 그 중에 여자 군인들이 많고 키가 우리나라보다 10센티 이상 작다. 어떤 사람들은 북한에 퍼주면 그들이 핵을 만들거나 총부리를 우리에게 댈텐데 뭐하려고 도와주냐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다. 그들은 힘들고 굶어서 동남아 사람처럼 키도 작은 것이다. 우리가 선한 사마리아인으로서 그들에게 자주 보내 주면 하나님이 처리하신다. 개인적인 감정을 뛰어넘어야 한다. 누가 도왔냐고 했을 때 한국교회가 도왔다고 말할 수 있는 은혜가 있으면 좋겠다. WFP라는 세계적으로 큰 단체이다. 그것은 유엔세계식량계획 기구인데 사무총장님이 노벨평화상을 받았는데 아주 좋은 그리스도인이다. 그 곳의 구호가 있다. 제로 헌금, 기아가 없는 세상. 선한 사마리어인의 지갑, 그 해석과 다르다. 해결이다.

 
III. 영적으로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야.

-우리가 선한 이웃이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이웃을 돕는다는 것은 추상적이다. 우리가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참 된 이웃으로 목자의 심정으로 개인적 민족적 감정을 초월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영적으로 사탄이라는 강도를 만나서 피투성이가 되고 피범벅이 되는 영혼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우리 주위의 이웃을 보고 불쌍히 여기기를 바란다. 서울만 하더라도 영적으로 불쌍한 사람들이 많다. 우리 주위에 영적으로 강도 만난 자가 많아서 죽어가는 영혼들이 많다. 조금 더 들어가면 죄와 사망의 쇠사슬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복음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으로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기 위해서 우리의 가슴이, 믿음의 용량이 커져야 하고,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복음의 진수를 깨달아야 한다.

먼저는 우리가 강도 만난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죄로 인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거부한 채 하나님을 떠나 살았다. 우리의 옷을 벗긴 강도들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었고, 자신에게 자기가 상처주고 자신을 자학했다. 심지어 예수님의 포도주와 기름을 거부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옷이 벗겨졌고 우리가 상처로 우리 스스로 할퀴어 져서 생채기가 난 것이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예수님을 대적하였고, 예수님을 거부했던 사람들이다. 강도만난 자를 사마리아인은 거부하지 않지만, 예수 믿는 우리는 예수님사랑을 거절했던 사람이다. 예수님이 부어주시는 포도주와 기름을 거절했던 자들이었다. 그래서 고난 주간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께 진정한 감사가 되어야 하며 선한 사마리안인을 깨달다야 한다. 우리의 흉악한 몰골들을 주님께서 치유해 주시길 사모해야 한다.  우리를 위해 피흘려 주신 것을 감사하며 강도 만난 내가 주님의 치유로 각성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있어야 내가 이웃에게 좋은 이웃이 된다. 

그래서 우리 주위에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을 감당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번 주부터 당장 시작해야 한다. 기도부터 시작해야 한다. 가족, 영적으로 강도 만난 자, 영적으로 옷이 다 벗겨진 자들을 위해 간절하게 기도해야 하고 실천해야 한다. 선교사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기도를 시작하고 공감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공감능력이 무엇인가?

 
*로마서 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선한 사마리아인의 입장에 서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 함께 우는 공감 능력을 잃어버린 마음이 없는지를 돌아보고 내 나름대로 법적인 프레임을 가지지 말고 율법은 나를 위한 것이니 우리 속에 어떤 공감 능력이 부족하면 진심으로 기도하여 회복하게 도와주시길 기도해야 한다. 우리 대형교회는 약점이 있다. 개척교회의 심정으로 감당해야 한다. 은혜의 사각지대를 깨달아서 이 공감능력으로 개인적으로 가슴이 뛰어야 하는데 내가 아니라고 교회 교인이 많으니까 누가 하겠지.. 라고 할 수 있다. 이 자리에 그런 마음이 있다면 나에게 공감능력을 주시라고 기도해야 하고 실천을 해야 하고 우리는 지체할 수 없다. 돌아보면 금방이다. 그렇게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금방 60, 70, 80이 된다. 삶의 현장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는 것은 우리에게 몸이 있고 힘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다음 주일은 부활 주일이다. 공감 능력을 가지고 지금 시작해야 한다. 안아주시는 이 영광스런 이 쉼터에서 인생의 피투성이 된 사람들이 와서 치유 받고 은혜가 되고 쉼을 얻고 여기 와서 회복되기를 초대하고 그 은혜의 장이 되어야 한다. 포도주와 기름을 사서 나누어 주고 부활절 계란도 좋으니 많이 삶아서 나누어 주기를 바란다. 깨지 말고 삶아라. 그래서 그냥 나누어서 주님의 마음을 깨달아서 실천해야 한다. 우리가 우크라이나를 위해 기도하기도 하지만 나한테 가장 가까운 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나한테 피해를 준다는 이웃이라도 진정으로 사랑하고 전하고 동역, 동서, 동기, 동자는 쉽지가 않겠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서 나를 손을 잡고 개인의 감정을 초월하여서 공감능력으로 섬겨야 한다. 그리하여 주님의 지상명령을 순종해야 한다.
 
“주여, 나와 맞지 않아도 손을 잡는 자 되어서 기쁘게 감당하게 하옵소서.”
 
♣요약
선지(先志)후행(後行)의 시대에 목자의 심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복음적인 지행합일(知行合一)로 개인의 감정과 민족의 감정을 초월하여 날 위해 찢기신 십자가의 예수님의 은혜를 깨달아서 영적인 공감능력을 회복하길 소망하며 나부터 미운 사람, 싫어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강도만난 자의 선한 이웃이 되어야 한다. 진정으로 사랑으로 배려하고 복음의 삶을 사는 본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 율법사는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느냐고 질문했다. 그는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생각은 교만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유대인들의 공적(功績) 신앙이 짙게 깔려 있는 질문이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는 영생의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졌으므로 자비를 베푸는 것은 영생과 관련된 것으로 교훈한다. 즉 강도 만난 자를 멀리하지 않고 그의 고난과 아픔에 동참하는 자비심을 보여준 사마리아 사람은 영생에 들어가게 됨과, 위선에 가득 찬 제사장과 레위인은 영벌 받게 됨을 가르치고 있다(마25:45, 46). 강도를 만난 사람의 진정한 이웃은 한 사마리아 사람, 즉 자비를 베푼 자였다.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여러 면에서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즉 제사장과 레위 인을 제치고 그들이 개처럼 여기던 사마리아 사람을 의로운 사람의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주님은 형식적 종교인들의 허위의식을 고발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비를 베푼 자가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 구원 얻을 것임을 역설하셨다.

※ 1부 예배 내용과 영상(2부)예배 내용이 약간의 다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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