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장반 강의(주후 2024년 05월 14일)
제목: 9과 “45년을 한 결 같이”
말씀: *민수기 14:22-24,
찬양인도: 오준석 부목사님
 
강의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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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14:22-24,
22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23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24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여호수아 14:8~12,
8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9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10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11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 하니.
 
●-찬양: 이산지를 내게 주소서.
 
▶참 반갑습니다. 오늘 여기는 미국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 ‘남가주 사랑의 교회’입니다. 뒤에 교회 입구에 돌 위에다가 하러 블로우 비전이라고 써 놓았습니다. 그리고 옆에 5만 톤짜리 큰 앵커, 그 ‘믿음의 닻‘ 이라는 것, ’Anchor of faith’. 이렇게 돼 있습니다. 오늘 에 ’제자훈련 지도자 세미나 123기‘를 하면서 제가 정말 느끼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순장님들이 기도해 주시고 마음 모아주지 않으셨으면 지나간 40수년간의 제자훈련 사역도 그러고, 지난 21년 동안에 참 사랑의 사역도 쉽지 않았을 텐데, 여러분들께서 이렇게 해주셔가지고,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날짜가 미국은 또 하루 늦으니까요. 하여튼 이 화요 순장 반을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고, 또 하나님이신 꿈들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처음부터 우리 민숙이 14장 같이 우리 교독하고, 오늘 교제 제목 ‘45년을 한 결 같이’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 다시 한 번 한 결 같이 변함없이 꾸준히 지속적으로 같은 꿈과 비전을 가지고 함께 해온 우리 순장 여러분들 너무 감사를 드립니다. 사랑의 교회는 교회 역사가 길어지더라도 생명력 있는 유기체로서 주님 지친 사명을 기어코도 끝까지 감당하는 믿음의 어떤 역할 모델을 하는 그런 기회가 될 믿습니다.
 
저는 이번 주 중에 귀국해서 5월 18일 토비새에서 천 부장, 백부장, 50부장, 십부장 헌신예배를 드리고 그때 아마 2019년도 헌당 예배처럼, 기쁨의 잔치가 될 것입니다. 우리 이 손자님들을 포함한 7000 기도 용사가 시대적 소명을 가지고 결사적으로 기도의 불을 지필 때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에 촛대를 옮기지 아니하시고, 마지막 때 더욱 귀한 도구로 사용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본문 관찰을 하겠습니다.
 
◆본문관찰
오늘 본문은 사랑의 교회 순장님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내용이지요. 잘 아시는 대로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켜 가지고 홍해를 건너 광야를 지나는 도중에 여러 가지 장애물들을 많이 만났죠. 첫째는 출애굽기 27장에 아말렉 부족 같은 외부 장애물도 있었고, 또 하나는 불평불만(不平不滿)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내부 장애물들이 있었어요. 특히 치명적인 장애물은 가장 가까운 식구가 반기(反旗)를 든 것이었어요. 오늘 본문 앞에 민수기 12장에 보면 모세의 누나 미리암과 형 아론이 모세를 시기(猜忌) 질투(嫉妬)해 가지고 하나님이 모세만 말씀하셨냐? 이렇게 반기를 들었어요. 이것은 단순히 모세에게 반기를 든 것이 아니라 모세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에 반기를 든 것이었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진노하셔가지고, 미리암에게 나병에 걸리게 하셨어요. 모세가 중보 기도를 그렇게 해서 할 수 없이 하니까, 하나님이 미리암을 죽이시지 않고 7일 동안 격리(隔離)시키도록 하셨습니다. 그 참 보면요 배신은 말이에요. 배신은 측근(側近)이 배신(背信)하는 거예요. 자신의 최측근에 협력하던 누나와 형이 반기를 들자 모세는 너무나 허탈감(虛脫感)과 좌절(挫折)감에 빠져버렸어요. 이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 좌절에 빠지지 말고 과거에 아브라함에 가듯이 모세에게 너 미래를 향하여 새로운 비전의 눈을 들고 나아갈 수 있도록 터닝 포인트를 허락해 주셨어요.
 
그게 바로 뭐냐 하면 민수기 13장에서 12명의 정탐꾼들이 미래(未來)에 정복(征服)할 가나안 땅에 들어가 가지고 살펴보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그때도 또 아쉽게도 10 정탐꾼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냥 인간적인 눈을 가지고 사실 보고만 하고, 여호수아와 갈렙만 믿음보고, faith report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음보고를 한 갈랩에게 하나님께서 그가 정탐(偵探)한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어요.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침내 가나안 땅에 입성(入城)했고 7년간 가나안 정복 전쟁을 마칠 즈음에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오늘 자신에게 주기를 요청하는 것이 오늘 본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배경들은 여러분 대체적으로 다 알고 있으니까 잘 정리를 하시길 바랍니다. 이제 우리 마음의 문을 열며, 전체적으로 큰 그림을 보시고 마무리를 보겠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며,
-그리스도인은 미래의 이력서(履歷書)를 씁니다.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꿈과 비전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미래(未來)를 현재(現在)로 당겨쓰는 특별한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로 현재 이력서를 쓴다는 것은 신앙적인 수사(修辭)가 아니라, 사명자로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마나냐 할 삶의 실제입니다.
 
오늘 우리는 미래 믿음으로 미래 이력서를 쓴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말씀 속에서 사실보고가 아닌 믿음보고로 ‘45년을 한 결 같이’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따라 산 인물과 동행하면서 우리도 하나님이 인증하시는 미래의 이력서를 쓰는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뭐라고 그럴까요? 이렇게 마음을 모으면, 지금 우리가 당장 경험은 안 되지만 하나님은 무식한 데의 개념이 있기 때문에 미래의 이력서만 제대로 쓰면, 반드시 우리가 꿈꾸고 기도하는 것들이 발생할 수 있도록 그래서 제가 오죽하면 발생한 미래라는 말을 썼는데 발생한 미래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로 현재 이력서를 쓴다는 것은 신앙적인 수사가 아닌, 외톨이 아닙니다. 사명자로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만나야 할 실제 삶이죠.
 
그랬죠? 인생에 있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다 중요하지만 이런 과거보다는 현재가 더 중요하잖아요?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현재보다 미래가 더 중요하잖아요? 미래가 없는 현재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보면 여러분 한국 사람들은 그래도 해외 같은 나와 보면 미래를 위하여 저축하고, 교육하고 이렇게 합니다마는 어떤 다른 부족들은 민족들은 지금 현재만 즐기는 현재만 그냥 그 집중하는 그런 민족들도 있죠.
 
제가 뭐 누구라고 말은 못 하겠고 그러니까 한국 사람들은 부모 세대가 이루지 못한 걸 다음 세대가 이룰 수 있는 그것이 바로 미래를 위하여 준비를 하는 그렇겠죠. 제가 2주일 전에 ‘꿈이 없으면 부부가 싸우고, 꿈이 없으면 싸운다’ 고 그랬죠 꿈이 없으면 형제가 싸우고 꿈이 없으면 공동체가 싸우게 된다. 말씀드렸어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예요. 여기서 꿈이라는 것은 뭐냐 자기 스스로 갖는 어떤 인간적인 야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 각 개인과 가정에게 가정과 공동체를 향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큰 그림을 말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믿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면 우리가 믿고 반응할 때, 그 일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제가 2주일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뉴 아이덴티티(New Identity), 새로운 정체성을 주시고 뉴랜드(New Land) 새로운 지경을 주시고 그걸 두 가지를 잘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게 되고, 뉴 글로리(New Growly), 그리고 평생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주님께 영광 돌리겠다. 그러면 하나님 우리 인생을 또 영광스럽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므로, 주님추시는 꿈을 갖고 미래에 이루어질 일을 오늘 꿈꾸고, 그러면서 믿음으로 모험을 감당하면 그리고 믿음의 용량을 키우면 세상에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제가 늘 말씀은 한 번 뿐인 인생 속히 지나가지만, 우리가 써바이벌 라이프(survival life), 연명하는 정도가 아니라 생명력 넘치는 그냥 세상 적으로 성공하는 정도가 아니라, 썩세스풀(Successful life) 정도가 아니라, 늘 말씀한 대로 Significant Life, 생명력 넘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비결을 오늘 구체적으로 마음속에 확인하고 적용하는 그런 깊숙이 새기는 시간되길 바랍니다.
 
 
◎말씀의 실을 뿌리며.
 
▶ 1번(관찰 질문)
1. 가나안을 정탐했던 열두 지파(支派) 지휘관(指揮官) 중에서 10명은 아낙 자손의 거인(巨人)들을 보고 자신을 메뚜기처럼 여길 뿐만 아니라,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이에 반해 여호수와 갈렙은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면 땅을 정복(征服)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믿음 보고를 한 갈렙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은 무엇입니까?
 
*민수기 14:24,
24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땅을 차지하리라.
-
*여호수아 14:9,
9 그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忠誠)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을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企業)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하나님께서 갈렙에게 그가 정탐했던 약속의 땅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실제로 출애굽한 1세대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만 가나안 땅에 입성했죠.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받았습니다. 그러나 약속을 현실로 이룬 사람은 두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약속을 현실화하는 방법은 믿음보고에 있는 것인데,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가지고 내 것을 만드는 것인데, 여러분 제가 그래서 자주 얘기하잖아요. 지혜는 다니엘의 10대 1이고, 인격은 루커가 7대 일인데, 이 약속을 받는 이 꿈을 실현하는 것은 여호수아와 갈렙이 60만:2, 참 기가 막힌 거죠? 민수기 14장 11절에 보면,
 
*민수기 14:11,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11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믿지 않는 것을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나님이 준 꿈을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것을 하나님을 멸시(蔑視)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오늘 참고 민수기 24:11 구절에 보면,

 
*민수기 14:24,
24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지지난 주 설계한 대로, 뉴랜드(New Land), 그게 그대로 이루어지는 거예요. 갈렙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으니까, 온전히 따랐다는 증거(證據) 중 그중에 하나가 하나님이 주신 꿈에 대해서 의심하지 아니하고 집중하니까, 생명의 본질에 집중하니까, 꿈의 생명에 집중하니까 갈렙의 믿음을 하나님이 보시고 갈렙의 해주신 약속을 현실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더구나 민수기 14장 24절에서 갈랩에 대해서 ‘내 종 갈렙은’ 이라고 하신 것에 대해서 여러분 주목해야 합니다. 중요합니다. 여기 종(從)이라는 호칭(呼稱)은 이 종(從), 이라는 이름은 아무에게나 붙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나의 종’이라고 불러주신 사람은 몇 명 없어요. 욥을 ‘나의 종’이라고 그랬고 모세가 ‘나의 종’이라고 그랬고, 갈렙을 ‘나의 종’, 여호수아와 다윗 이사야 다니엘 정도, 외에는 뭐 하나님의 종, 함부로 말할 수 없을 정도죠. 여기 종이라는 것은 노예(奴隸)라는 의미도 있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학자들에게 붙여주시는 영광스러운 호칭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서신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나 바울은, 자주 얘기하죠. 서울의 독특한 언어 습관이죠. 여기에 이 예수의 종이라고 할 때 이 종은 사도 적 특권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다시요.
 
사도적 특권이 거기에 들어있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종 된 것은 너무나 영광스러운 축복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도직 자체는 계승되지 않지만, 이 여호와의 종 하나님의 종, 할 때에 우리가 사도성은 계승되어 세상을 향하여 보냄 받은 소명을 완수를 하게 되는 겁니다.
 
제가 이번 세미나 또 지지난 주 세미나, 이 주 계속 걸쳐서 세미나 하면서, 사랑의 교회는 끝까지 강력한 생명력 있는 복음 전하고 생명력 있는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제자로 양육하고 키우고, 그래서 우리 순장님들 여러분 한 분 한 명이 저의 목회의 동반자가 돼 가지고 같이 마음을 쓰고, 같이 애를 쓰는 것이에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꿈은 비전이 이루어질 겁니다. 참고 구절로 여호수와 14장 9절은,
 
*여호수아 14:9,
9 그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忠誠)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을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企業)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갈렙이 하나님께로부터 약속을 받은 지, 45년이 지나갔고 이 약속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다시 한 번 리마인드 하고 상기시킨 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2번(관찰 묵상 질문)
2. 갈렙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고 45년을 한 결 같이 푯대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다음 글에서 이 사실을 확인해 보세요. 그리고 갈렙이 일평생 좌고우면(左顧右眄) 없이 일관(一貫)되게 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보세요.
 
*갈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 번이나 하나님을 배반하고, 원망, 불평할 때에도(민수기 14:22) 동조한 적이 없고, 고라와 다른 지도자들이 모세를 대항하고 비난할 때에도(민수기 16:3), 가담하지 않았으며 애굽의 고기와 부추와 마늘이 그리워 불평하는 무리(민수기 11:4-5)와 함께 하지 않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집단적으로 금송아지로 우상을 만들 때에도(출 32:1-6) 그 기류에 휩쓸리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갈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 번이나 배반하고 불평했어도 동조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고라라든지 다른 이스라엘 지파, 지도자들이 모세를 대항하고 비난했을 때도 민속이 16장이 나오죠. 가담하지 않았어요. 애굽의 고기와 부추와 마늘이 그리워 불평하는 이 참담한 무리들 거기 함께 하지도 않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집단적으로 만들 때도 그 타락한 길 위에 휩쓸리지 않았습니다. 오직 갈렙은 하나님이 주신 꿈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에 대한 불평 대신에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현실에 대한 불평 대신에 미래에 대한 감사를 한 것입니다.
 
여러분 비교를 잘 시켜요. 귀납법적 질문할 때,
???질문====현실에 대한 불평, 미래에 대한 감사,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 때문에 남과 비교하지 않고 싸우지 않고 그렇게 했죠. 그래서 제가 볼 때 갈렙은 우리 모두처럼 하룻밤도 꿈 없이 잠들지 아니하고, 하룻밤도 꿈 없이 깨지 않았습니다. 이 사명으로 매일매일 이거 익사이팅한 거예요. 매일매일이 기본적으로 설레고 활기찼어요.
 
그것은 그에게 하나님이 주신 꿈을 통한 미래가 있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사명이 있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사명이 있었기 때문에 어제 뜨는 달이 오늘 또 뜬 것이 아니라, 날마다 뜨는 달이 날마다 새롭고, 매일 매일이 설렜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이 화요일 아침에 여러분들의 성장을 하고 이와 같이 나온 모든 것들이 하나님들의 꿈 때문에 표정이 달라지고 눈빛이 달라지고, 그것 때문에 육이 영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육을 통제해 가지고 성령의 역사와 은혜 때문에 또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고, 오늘 다 표정이 새로워지고 다 설레이고, 다 매리된 소명을 다시 확보하는 그런 영광스러운 순장 반 순장님들, 우리 앞으로 다락방 다 될 줄로 믿습니다. 같은 사명에 동참하십시다. 더구나 이번 9과 본문인 여호수와 14장 10절을 보면,
 
*여호수아 14:10,
10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45)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갈렙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다고 했어요. 이 말씀은 출애굽한 1세대들은 광야에서 몽땅 다 죽었는데, 20세 이상,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지키셨다는 놀라운 선포(宣布)를 하는 거예요. 이걸 증거(證據)하는 거예요. 증인(證人)이 된 거예요. 갈렙은 60만 명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죽었으니, 매일매일 얼마나 많은 장례(葬禮)를 많이 치렀겠습니까?
 
갈렙은 수많은 장례(葬禮)를 지켜보면서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신을 보면서 아침 해가 뜰 때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이루어 주셨구나! 나하고 여호수아에게 주셨구나! 아침마다 감탄사를 가지고 아침마다 감격(感激)했을 거예요. 그리고 감격(感激)과 감탄사(感歎詞)가 본인 스스로만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을 영향을 끼쳤을 것이고, 심지어(甚至於) 자식들도 갈렙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은혜를 그렇구나! 고백했을 거예요. 자신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약속의 증거가 되는 그런 삶을 사니까, 참 갈렙 이야말로 너무나 귀한 인생이고, 우리가 그렇게 따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중앙아시아와 인도에 선교할 때 중앙아시아 선교의 큰 제목이 뭐였냐면요. ‘갈렙 프로젝트’였어요. 갈렙 프로젝트, 그렇다고 갈렙이 인생에 시험 들만한 요소가 없었느냐, 그렇지 않아요. 갈렙은 여호수와의 먼저 여호수와의 관계에서 얼마인지 흔들릴 수가 있었죠. 갈렙이 40세에 유다지파의 지휘관 자격으로 가나안 땅을 정담했던 때에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의 지휘관이었어요. 민수기 13장에 보면, 갈렙은 유다지파,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 그 당시만 하더라도 갈렙이나 여호수아는 비슷한 위치에 있었어요.
※갈렙=유다지파, 여호수아=에브라임 지파.
-어떻게 보면 당시 갈렙이 여호수아보다 더 적극적인 믿음의 소유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갈렙은 유다지파니까 유다의 홀이니까, 그리고 여호수아 갈렙이 가나안 족속들을 향해서 이스라엘 나머지 열 지파들은 난리를 치고, 슬피 울고, 우리가 그들이 보기에 우리를 메뚜기라고 그렇게 했을 때도, 그들이 우리 밥이라고 했잖아요? 그때 하나님께서는 특히 갈렙의 이름만 거론하셨어요. 민수기 24:24절에 보면,
 
*민수기 14:24,
24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내 종 갈렙, 갈렙만 거론할 정도로, 그런데 갈렙의 이름은 이후에 아무런 언급 없이 사라져 버렸어요. 여호수아의 이름은 계속 언급되었지만 갈렙의 이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 같았어요. 젊은 시절 자신과 비슷한 위치였던 여호수아가 모세를 이어서 이스라엘 최고 지도자가 되고, 이렇게 막 올라갔을 때도, 갈렙은 그를 질투(嫉妬)하고 그러나 하나님께 섭섭해 하지 않고, 진심으로 여호수아를 도왔어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렇게 바로 되니까,
☞★ ★ ★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니까. 사람과의 관계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잘 형성이 되는 거죠.
그래서 갈렙은 동료 여호수와 비교하지도 않았고, 하나님께 섭섭해 하지도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늘 붙잡았어요. 왜 미래에 주신 사명과 꿈이 너무 확실했기 때문에, 미래를 앞으로 당겨서 발생한 미래가 될 수 있도록 미래의 이력서를 쓴 본보기가 되었으니까 그렇게 승리할 수가 있었어요. 3번 하겠습니다.
 
▶ 3번(관찰질문, 묵상 질문)
3번. 지금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복 중에서 가장 어려운 지역만 남겨둔 상태입니다. 갈렙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 여호수아에게 요구한 땅에 대해서 살펴보고, 85세의 나이에도 사명을 이룬 일에 주저(躊躇)하지 않는 갈렙의 무엇을 느끼는 바를 말해보세요.
 
* 여호수아 14:12,
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 하니.
-이산지를 내게 해 달라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날의 주께서 말씀하신~~ 그리고 성읍들이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겠다. 갈렙 이야말로 사명의 목숨보다 중요함을 오늘 보여주고 있고, 오는 세대에 본이 되고 있죠.
 
여러분,
이거 이렇게 하면서 귀납법적 질문 어떻게 할 것인가? 자꾸 여러분들에게 다락방마다 조금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차이가 있으니까, 귀납법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면서 여러분들 진행하면 좋겠어요. 그래서 로마서 14장 7절 8절에,
 
*로마서 14:7-8,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여기에 보니까 제가 세 종류의 인생 있는 거 보죠.
첫째는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나 아무도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다고 보니까 자기만을 살아봐야 나씽(nothing)이에요. 아무것도 없어요.
둘째는, 남들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어요. 나름대로 좋습니다. 그러나 또 베스트 오브 베스트는 최고는 뭐냐 하면 주를 위하여 사는 인생이에요.
셋째는, 베스트 오브 베스트(best of best)는 최고는 주를 위하여 사는 한결같은 인생이에요.
 
-갈렙이 45년간 남과 자신을 비교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출신 배경을 한탄하지도 않고, 한 가지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매어 달린 것이 12절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렇다고 산지가 갈렙이 요구하는 산지가 무슨 뭐 팔레스타인의 최고로 막 윤기가 나고, 비옥(肥沃)하고 그다음에 노른자위 그런 좋은 땅이 아니에요. 45년 전에 동료 정탐꾼들을 메뚜기처럼 만들어버린 아낙 자손들이 아직도 살고 있는 곳이었어요. 아직 여호수아의 군대가 점령(占領)하지 못한 미완성 과제가 남아있는 미완성(未完成) 땅이었어요. 무슨 말이에요. 갈랩이 요청한 이 산지는 헤브론 산지였어요. 여러분 헤브론은 어떤 곳입니까?
 
▷헤브론===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창세기 13장입니까? 13장 14절 15절에,
*창세기 13:14-16,
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그 말씀하신 땅이 헤브론이었어요. 에브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거주했던 땅이고, 이 땅은 온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가 태어날 땅이었고, 헤브론은 예루살렘, 베들레헴, 베다니, 갈보리, 감람산, 뭐 우리가 알고 있는 구원 역사에 산실된 그런 땅이었어요. 아니 산실이 될 땅이었죠.
 
그래서 갈렙은 하나님께서 귀한 구원 역사를 이루어 주실 모델을 영적인 눈을 열어서 바라보면서 이 산 지를 내게 달라고 그렇게 해요. 앞으로 일어날 놀라운 미래에 대한 사명을 가지고 미래의 이력서를 지금 발표하고 쓰고 있는 거예요. 특히 갈렙이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라고 말할 때 상황은 요수아가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때였어요. 여리고성 함락 이후에 7년 동안 계속 가나안 정복 전쟁을 했지만, 아직 해브론의 지역은 점령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갈렙이 나서서 목숨 걸고 그걸 담당하겠다고 나선 것, 쉽게 말해서 갈렙은 여호수아를 전에도 도와주었지만 지금 아주 200%로 도와주고 있는 거예요.

사랑하는 순장 여러분,
화요일 낮에 이렇게 나와 있는 우리 여순장 여러분, 또 우리 남순장, 여 직장 순장 여러분,
-우리가 다 나이가 들어갑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갈렙을 보면서 느낀 것은 갈렙을 보면서 확인된 것은, 여러분 신앙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좋아야 합니다. 믿음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깊어야만 합니다. 우리 한번 따라 합시다. 신앙은 나이가 들수록 더 좋아야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나이가 들어 갈수록 더 신앙이 깊어져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한 명도 예외 없이 은혜의 사각지대가 없이, 나이가 들수록 영적으로 더 깊어지기를, 나이가 들수록 순한들 더 은혜가 많기를 제가 간절히 소망하는 거예요. 우리가 나이가 들면 육신적으로 약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요. 아이구야! 저도 이제 조금 이제 육체 한계를 많이 느껴요. 그러나 젊을 때는 육체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에요. 사역도 하고 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있잖아요. 육체 한계가 있지만 4명과 비전을 가지고 육체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에요. 그러니 나이가 들수록 여러분의 사명과 신앙의 깊이는 더 커져야 되는 거예요. 영적으로는 더욱 강해지고, 더욱 견고하고 태산같이 있잖아요. 사명과 비전이 확실한 우리 순장님들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거예요.
 
제가 자주 말씀드리지만, 어떤 단체든지 어떤 인생이든지, 45년 세월이 지나면 다 굳어지고, 딱딱해지고, 화석화(化石化)되는 겁니다. 처음에는 창의력 있게 믿음의 모험을 갖고 시작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관료(官僚)화가 되고 관료화되다가 딱딱 굳어져 가지고 나중에 화석화돼 가지고 다 그냥 자 그냥 사라지는 거예요. 근데 갈렙은 관료주의(官僚主義)에 빠져가지고, 화석화(化石化)된 인생으로 살기를 원하지 않았어요. 다시 한 번 믿음보고 2.0을 통하여 아름다운 믿음의 계승, 신앙의 유산, 영적 레가시를 남기기 위하여, 다시 한 번 주님이신 사명으로 믿음의 전성기, 사역의 전성기를 회복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힘들지만 우리 모두 주님 부르시는 그날까지, 성령이 주시는 생각을 가지고 환경이 어떻든 간에 갈렙처럼 믿음과 사명을 계승하는 아름다운 믿음의 사명의 용장들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런 마음으로 우리 참 간절(懇切)함을 가지고 이번 9과를 진행하면서 순원들과 함께 진지하게 나누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미래의 사명과 비전이 목숨보다 중요한 거 기억하시고 4번 묵상 질문이죠.
 
▶ 4번(묵상 질문)
4번, 그리스도인은 한결같은 신앙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또 하나 한결같은 신앙으로 살기 위해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음 글을 읽고 묵상해 보세요.
 
반복-‘한결같음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혼토록 동일하시며(히 13:8) 주님은 한결같으십니다(시 102:27),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한결 같고, 우리를 이끄시는 주님의 인도하시며 한결 같으며,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의 체휼(體恤)하심이 한결 같습니다. 그러므로, 한결같으신 하나님을 따르는 우리의 신앙도 한결 같아야 함이 마땅합니다.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향한 순도 높은 한결 같음을 유지할 수 있습니까? 의지적으로 애쓰는 것만으로는 버겁고 어렵습니다. 우리 속에 신앙의 한결같음을 이끄는 동력은 뜨거운 사랑에 있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는 까닭에 라반의 권모술수(權謀術數)에도 7년을 며칠 같이 여겼습니다(창세기 29:20).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 흔들린다면 그것은 세상에 거친 풍파(風波)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흔들리기 때문인 것입니다.
 
-한결같은 사명, 한결같은 신앙, 한결같은 섬김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우리 순장님들과 제가 주림을 향한 순도 높은 사랑을 계속 유지를 해야 합니다. 아시는 대로 야곱의 7년을 수일 같이 여겼다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 이해가 됩니까? 한번 연애할 때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십 년, 20년을 한 결 같이 설레는 마음으로 그렇게 사는 거, 그런데 이게 우리의 의지나 노력으로는 역부족이죠. 성령께서 날마다 우리를 도와주심으로 말미암아, 그래서 앞으로 5월 우리 다음 주에 5월 19일 날 성령강림 주일인데 우리 가운데 순장을 오래하면서 이제 좀 딱딱해지고, 뭔가 기대감과 설렘이 사라지는 분이 있더라면 마음이 굳어있는 분이 있다면 이번 성령 강림 주일날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고 애색을 36장이 있는 것처럼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다락방 순원들과 함께 다 같이 기도로 준비하시는 그런 성령 강림주일이 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력 가운데서 이렇게 부활주일, 성탄주일을 지키는 것처럼 성령 강림주일을 저는 소중하게 여기는데 이번 주 성령강림 주일을 예배를 위하여 순장님들이 기대하시고, 순원 들과 함께 기도해 주시고, 또 성령 강림주일을 위한 메시지를 위하여 마음을 모아주시면 저에게는 너무나 큰 축복이 되겠습니다. 성령강림주일을 기대하도록 마음 모아주실 거지요?
 
5번, (적용 질문).
5. 한결 같은 갈렙의 비결은 무엇보다도 약속의 말씀을 붙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여호수아 14:12)이라는 하나님의 임재의식을 통해 그의 가슴에서 펄펄 살아 움직였습니다. 이처럼 영적 임재 의식을 가진 자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의 입술에는 불평이 없습니다. 자신과 주변 사람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만일 갈렙이 여호수아와 자신을 비교했다면, 그의 믿음은 그때나 지금이 한결같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여호수아 14:11).
어떻게 하면 우리도 갈렙처럼 약속의 말씀 붙잡고, 다른 사람과 비교 의식을 내려놓고 주어진 상황(狀況)에 감사하면서 살 수 있을까요? 이를 위한 당신의 각오(覺悟)와 실천을 나눠 보세요.
성령강림 주일을 기대하라.
 
-그리스도인이 한결 같은 신앙으로 사는 비결은 하나님의 임재를 매순간 경험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7과에서 우리 지난번 7과에서 나눈 것처럼, 적은 것 하나까지도 하나님께 질문을 물어보면서 ‘신앙의 차렷 자세’를 바로 함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을 억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날마다 감사하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하나님 관계가 넓어져 가는 Key가 되는 것입니다. 갈렙이 여호수아 14장에서 믿음보고 2.0 을 쓰면서, 마음을 썼던 그걸 우리 오늘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십시다.
 
*여호수아 14장 12절,입니까?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아시면 네 함께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 여호수아 14:12,
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 하니.
-하나님의 임재를 강력하게 체험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아주 내 삶의 피부 깊숙이 느끼면 그게 개인이든 공동체든 디클라인 하지 아니하고 내리막길을 가지 아니하고 유지하는 것이죠.

 
저는 사랑의 교회가 우리 순장님들이 사랑의 교회 역사가 깊어지고, 우리가 나이가 들어가도 하나님께서 기어코 이루어질 세계 선교의 완성의 미래를 현재로 당겨와 가지고 매해가 믿음의 모험 최고의 해가 되도록 그렇게 기도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세 가지 늘 기도하잖아요.
 
첫 번째는, 개인적으로는 여러분 축복의 제사장나라 사명을 감수하고,
두 번째는, 그다음에 우리 교회적으로는 세계 교회 복음주의 교회 쇠퇴를 막고,
세 번째는, 그다음 민족적으로는 통일의 복음적 평화통일에 우리가 참 초석 같은 은혜가 있기를,
 
-제가 자주 얘기하지만 이게 미래에 일어날 일이에요. 이 세 가지가 미래의 일어날 일을 지금 우리가 당겨쓰는 거예요. 그리고 아마 이걸 여러분들이 체험할 거예요. 세계 복음주의 교회 쇠퇴를 막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도 우리 교회에 7000 우리 한국 교회의 섬김의 날을 허락하시고, 또 앞으로는 또 세계 교회를 위해서 그래서도 여러분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던 그런 하나님의 사명과 또 기회와 또 은사(恩賜)를 주시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기도ㅏ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나는 부족하지만 하나님 부족하지 않으시고 나는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의 명과 비전은 한계가 없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구체적으로 우리가 원불비, 원망하고, 불평하고, 비판하는 그걸 뛰어넘고 어떤 세상 유명한 기업가는 그러던데요. 보니까 내가 말하는 법을 배우는 데는 이 년이 걸렸지만, 말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데는 60년 걸렸다고,,, 원망과 불평과 비난하지 않는 데는 60년 걸린다고, 원불비하지 않는 것이 믿음보고의 증거이죠. 오늘 우리는 보혈의 능력으로 무장이 되면 60년 기다릴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오늘부터 적용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나 지속 가능성을 갖기 위해서는 미래를 현재로 당겨 와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고 기대하고, 기대하고 기도하는 것이에요. 우리가 나이가 들어도 절대로 원불비 원망과 불편과 비난의 할매, 할배, 아줌마가 되면 안 되고 원불비(원망 불평 비판)의 아줌마 아저씨도 되면 안 되고 우리는 21세기에 갈렙과 여호수아와 같은 갈렙이 고백한 대로,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원블비 대신에 사명과 감사와 찬양이 그냥 자연스럽게 터져 나올 수 있도록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지금 체험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삶의 열매를 거두며,
 
◎삶의 열매를 거두며.
렙은 약속의 말씀을 붙듬으로 오고 오는 세대(世代)에게 소망(所望)을 주는 미래(未來) 이력서(履歷書)를 썼습니다. 하나님의 꿈과 비전으로 미래의 이력서를 쓰는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속사람이 더욱 강건(强健)할 수 있습니다. 갈렙처럼 연부역강(年富力强) 은혜 속에서 세상에 험한 파고에도 흔들리지 않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십시다.
※연부역강(年富力强)-나이가 넉넉하고 힘이 강하다는 뜻으로, 나이가 젊고 기력이 왕성함을 이르는 말.
 
여러분,
-미래를 현재로, 갈렙이 졌던 그런 꿈을 지금 당겨 와가지고, 날마다 가슴 뛰는 가슴 뜨는 인생 그러니까 21세기에 갈렙, 미스터 갈렙, 미세스 갈렙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저는 맨날 얘기하죠. 네 종류의 인생이 있다고, 에너지를 주는 인생이 있고 에너지를 뺏는 인생이 있고, 어둠을 밝히는 인생이 있고, 어둠을 탓하는 인생이 있고, 믿음 보고하는 인생이 있고, 사실 보고하는 인생이 있고, 날마다 가슴 뛰는 인생이 있고, 날마다 가슴 아파하는 인생이 있고,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The best is yet to come). 가장 좋은 곳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교회 모든 순상더들이 이 일을 위한 역할 모델 하시기를 바라고, 제가 늘 강조하지만 화요일 아침에 여러분 모일 때는 다 정말 기대감을 가지고 얼굴이 활짝 피워졌어, 라는 생각을 가지고, 이 자리가 21세계 미스터 앤 미세스 갈렙의 이 현장이 될 수 있도록, 여러분의 꿈과 기도의 제목을 주님 복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다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찬양도 하고 그리고 제가 마무리 기도하고, 난 다음에 먼저 동생이 오늘은 언니보고,
 
☞★★★언니는 어떻게 하나님 주신 사명을 유지하시나요?
순원들과 먼저 물어보고 거기에 의거하여 언니와 동생은 또 형님과 아우는 어떻게 주님이 준 사명을 구체적으로 삶의 현장에서 유지하고 있는지를 같이 쉐어링 하고 같이 필요하면 서로 짝 기도 해주시고 그렇게 하면 하나님 큰일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기도하기,
은혜 받은 증거로 혹시나 우리에게 입술이 우리의 입술에, 아직 남겨있는 이 원불비 제거하시고, 불평의 산지는 믿음으로 정복할 수 있도록, 우리 마음에 있는 모든 불평의 단지와 그릇들은 믿음으로 깨뜨려 버리게 하여 주옵소서! 아낙 사람들처럼 우리 앞에 높은 장벽이 있다 하더라도, 그 장벽을 깨뜨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의 디딤돌을 탁 딛고, 어떤 경우에도 집중하여 승리하는 우리 다락방들로 삼아 주옵소서! 에너지를 주는 사람 되게 하시고 에너지를 뺏는 사람 되지 말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에 영광스러운 사명을 밝히는 촛불 같은 인생 되게 하시며 아무리 힘들어도 21세기 갈렙으로 삼아 주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우리의 생명과 소망이 되시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 받들어 간절히 기도 올려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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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05월 15일)-서초역 사랑의 교회
제목: “가드 사람 잇대”
말씀: 사무엘하 15:19-23
찬양인도: 쉐키나(김재원 부목사님)
 
설교자: 장명철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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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15:19-23,
19 그 때에 왕이 가드 사람 잇대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도 우리와 함께 가느냐 너는 쫓겨난 나그네이니 돌아가서 왕과 함께 네 곳에 있으라.
20 너는 어제 왔고 나는 정처 없이 가니 오늘 어찌 너를 우리와 함께 떠돌아다니게 하리요 너도 돌아가고 네 동포들도 데려가라 은혜와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21 잇대가 왕께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내 주 왕의 살아 계심으로 맹세하옵나니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사나 죽으나 종도 그 곳에 있겠나이다 하니.
22 다윗이 잇대에게 이르되 앞서 건너가라 하매 가드 사람 잇대와 그의 수행자들과 그와 함께 한 아이들이 다 건너가고.
23 온 땅 사람이 큰 소리로 울며 모든 백성이 앞서 건너가매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건너간 모든 백성이 광야 길로 향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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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마 많은 분들이 학창 시절에 선생님이나 또 영적인 스승들을 찾아뵙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을 것 같습니다. 맞습니까? 네 오늘 스승의 날이잖아요. 또 공교롭게도 휴일이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뭐 너무나 잘 알려진 cm송인데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받아보면’ 그런 시엠송이 있는데요. 우리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마음과 마음이 통할 때가 있습니다만 이왕이면 얼굴을 마주하고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나누는 것이 더 좋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설교자로 서 있는데요. 설교자로서 또 성도님 여러분과 함께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이심전심의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가드사람 잇대”입니다.
 
“가드사람 잇대” 라고 하는 이 성경의 인물이 우리에겐 굉장히 좀 낯선 인물입니다. 어느 나이가 지긋하신 담임 목사님이 계셨는데, 젊은 부교역자에게 이렇게 보통의 말씀하셨대요. 목사님 성경에서 이때를 좀 찾아봐 주시겠어요. 그랬더니, 젊은 목사님이 바로 성경을 검색해서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보실까요?
 
*열왕기하 18:4,
4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네 여러분, 그 성경에 로또가 있다는 담임 목사님 말씀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네 로또(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물론 우리 사랑의 교회 목사님들은 잇대를 잘 아세요.
 
여러분, 우리에게 상당히 낯선 인물 이때인데요. 제가 이때에 대해서 오늘 여러분과 나누고자 하는 것은 그의 삶에서 제자 도를 발견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란 과연 어떤 사람인가 제자의 삶은 과연 어떠해 하는가? 이런 질문들을 여러분의 마음을 좀 품으시고 저와 함께 본문을 함께 묵상하시면 참 좋겠습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19절 말씀을 보시면 그때에, 라는 단어를 시작해요. 그때에 여러분 그때가 언제일까요?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서 다윗이 다급하게 예루살렘을 떠날 때, 도망갈 때를 이야기합니다. 그때에 다윗을 따라 함께 나온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 중에 가드사람 600명이 포함돼 있어요. 우리 함께 18절 말씀 읽어보겠습니다.
 
*사무엘하 15:18,
18 그의 모든 신하들이 그의 곁으로 지나가고 모든 그렛 사람과 모든 블렛 사람과 및 왕을 따라 가드에서 온 모든 가드 사람 육백 명이 왕 앞으로 행진하니라.
-이 가드사람 600명의 지휘관이 바로 잇대입니다. 여기에서 가드가 지명인데요. 당시 이스라엘의 가장 강력한 대적이었던 불레셋에 5개의 큰 성읍이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가드입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는 골리앗의 고향이 가드예요. 그러니까 잇대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심지어 적군의 장수인데 다윗의 부하(部下)가 되었다. 이런 말이죠. 그렇다면 잇대가 언제 다윗의 부하가 되었는가? 또 왜 그가 다윗의 부하가 되었을까?
 
성경이 우리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지는 않습니다만 우리가 좀 상상력을 조금 동원해 보면 이유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아둘람 굴에 있었던 거 기억하시죠? 그때 뭐 환난 당한 사람들, 빚진 자들, 여러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생활을 했었습니다. 그 시절에 블레셋이 그일라 라고 하는 한 동네를 침략하게 됐는데, 다윗이 구조 요청을 받고 하나님께 묻고, 또 묻고 마음의 결단을 세워서 600명의 군사들과 함께 그일라를 구해냅니다. 이때 아마도 잇대가 다윗을 만났을 가능성이 있어요. 왜냐하면, 그일라와 가드가 굉장히 지리적으로 가깝습니다. 다음으로, 사울의 위협(威脅)이 계속되니까. 다윗이 굉장히 어 두려움이 사로잡혀서 극단적(極端的)인 행동을 하게 되는데 블레세의 땅으로 망명(亡命)을 가죠. 사무엘상 27장 2절에 말씀입니다.
 
*사무엘상 27:2,
2 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600명과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여러분, 다윗이 누구에게로 건너갔다고요.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갔어요. 그런데 이때가 가드 사람이니까, 다윗과 잇대가 아기스 왕 밑에서 함께 활동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경에는 약 1년 4개월, 16개월의 시간 동안 머물렀다고 기록하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다윗이 남유다와 북 이스라엘에 통합한 왕이 된 이후에 여러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는데 가드도 점령하게 됩니다. 역대상 18장 2절 말씀 제가 읽겠습니다.
 
*역대상 18:2,
2 그 후에 다윗이 블랙셋 사람들을 쳐서 항복을 받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가드와 동네를 빼앗고.
-결정적으로 이 순간에 이때가 다윗의 부하가 됐을 가능성이 큰 것이죠. 여러분, 상당히 합리적인 설명이죠? 그렇다면 왜 이때가 이방 사람으로서 그것도 대적(對敵)으로 싸웠던 다윗의 부하가 되었을까? 우리는 힌트를 19절과 20절에 기록된 다윗의 말을 통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19절과 20절 말씀 듣겠습니다.
 
*사무엘하 15:19-20,
19 그 때에 왕이 가드 사람 잇대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도 우리와 함께 가느냐 너는 쫓겨난 나그네이니 돌아가서 왕과 함께 네 곳에 있으라.
20 너는 어제 왔고 나는 정처 없이 가니 오늘 어찌 너를 우리와 함께 떠돌아다니게 하리요 너도 돌아가고 네 동포들도 데려가라 은혜와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이 다윗의 말에는 다윗의 성품이 잘 드러나 있죠. 다윗은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인 잇대를 먼저 생각합니다. 잇대의 상황(狀況)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부담(負擔)을 주기를 원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잇대 뿐만 아니고 그의 부하들에게도 관심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잇대와 함께 있기를 바라고 축복합니다. 참고로 여기에 은혜라고 하는 단어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헤쎄드라는 단어예요. 해세드, 다시 말해서 다윗의 말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이 온전히 담겨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다윗이 평소에 보여주었던 이 하나님의 성품(性稟)이 이때에게 큰 영향력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가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 속에서도 다윗의 부하가 되겠다고 결단한 것이죠.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I. 첫 번째, 제자도는 제자는 또 다른 제자를 만든다.
-제자는 또 다른 제자를 만든다. 다시 말해서 제자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발휘(發揮)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예수 그리스의 제자(弟子)로 만듭니다. 여러분 동의하십니까? 네 본문에서 참 재미있는 표현이 있어요.
 
다윗이 형성했던 아둘람 공동체의 사람들, 그리고 잇대가 이끌었던 가드 사람들이요. 숫자가 똑같아요. 600명이에요. 마치 잇대가 다윗을 닮아 갔다는 것을 상징(象徵)적으로 보여주는 숫자라고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여러분 제가 지금 사랑의 교회에서 17번째 훈련 반을 맡고 있어요. 놀라지도 않으신데요. 네, 그러다 보니까 제가 지도했던 훈련생들이 순장님이 되고, 순장님의 순원이 저희 훈련생으로 오는 경우들이 종종 발생하고 있어요. 올해도 이제 두 분이나 저희 반에 그렇게 오셨습니다. 작년 연말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제가 한 남자 사역반에 이제 훈련 모임에 갔는데, 한 집사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목사님, 저희 순원 한 분이 사역반에 진급하셨다고, 그때 마침 이제 새로운 사역반, 제자반 담당 교역자들이 면담이 결정됐던 때가 그래서 물어봤어요.
 
순원 분이 무슨 요일의 훈련을 받으시냐고 그랬더니, 목요일이라고 그러시더라고요. 제가 목욕반이라고 그랬더니, 이분이 눈빛이 흔들려요. 흔들리더라구요. 아 목사님, 참 잘 됐네요. 제가 두 가지를 느꼈습니다. 하나는 이 집사님이 순원을 매우 불쌍하게 여긴다. 네 저를 만날 가능성이 높은데, 좀 힘들게 훈련을 받겠구나! 요런 생각을 했던 것 같고, 두 번째는 아 이 훈련생의 변화를 위해서 이분이 많이 돕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왜냐하면, 그분이 먼저 사역 훈련을 통해서 온전한 제자가 됐기 때문에, 자기 순원도 길을 가기를 바라기 때문인 것이죠. 실제로 그분이 많이 변화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믿어주세요. 변화되고 있습니다. 네,,, 여러분, 제자훈련사에게서 유명한 슬로건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 한 가지가 뭐냐 하면 이것입니다. ‘제자 되어 제자 삼자.’ 따라해 보실까요? 제자 되어 제자 삼자.!!~~
제자 삼 자 그렇습니다. 네, 제재훈련 사역에는 강력한 생명력이 있어요. 강력한 영향력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제자혼련을 통해서 배출된 훈련생은 또 다른 사람을 제자로 삼는 것입니다. 그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칼바르트 라고 하는 신학자가 예수님의 대명령,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 라고 하는 이 명령을 이렇게 해석했어요. ?베드로야 너는 가서 너를 닮은 사람을 만들어라.“ 여러분 굉장히 핵심을 뚫는 해석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잇대가 모든 상황을 뛰어넘어서 다윗의 부하가 되기로 결정한 것은 그의 삶과 성품에 드러난 영향력(影響力)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잇대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을 닮아가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이죠. 우리 모두에게도 여러 가지 ‘제자 되어 제자 삼는’ 재생산하는 역사에게 동참하는 놀라운 애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다음엔 자 이제 본문에 나타나는 두 번째 제자 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와 함께 21절 말씀 듣겠습니다.
 
*사무엘하 15:21,
21 잇대가 왕께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내 주 왕의 살아 계심으로 맹세하옵나니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사나 죽으나 종도 그 곳에 있겠나이다 하니.
-다윗을 향한 잇대의 마음이 잘 표현된 문장이죠. 먼저 잇대가 다윗을 부를 때, 반복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내 주왕, 내 주왕, 이렇게 표현하는데 영어 성경에도 마이 로드 더 킹(My Lord The King)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근데 같은 영어 성경을 보니까 본문에 나타난 여호와 라고 하는 단어를요 대문자 애를 써서 Lode, 라고 번역을 했어요. 왜 이렇게 번역 했어요. 의도가 있을 것 같은데, 제가 볼 때는 이때가 다윗을 나의 주, 이렇게 고백할 때 마치 하나님의 버금가는 존재로 다윗을 인정하는 마음이 담기지 않았나,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이어지는 그의 말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죠.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사나 죽으나 정도 그곳에 있겠나이다.” 다윗이 도망자가 되든지, 뭐 떠돌이가 되든지, 아무 상관없이 다윗이 있는 곳이라면 죽음을 각오하고 따라가겠다. 이러한 잇대의 고백인 것입니다. 참 인상적이죠. 여기서 우리는
 
II. 두 번째, 제자는 전적으로 위탁한다.
-제자는 전적으로 위탁한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을 것 같아요. 전적 위탁의 상징 누굽니까 룻이죠. 담임 목사님께서 전적(全的) 위탁(委託) 언급하실 때마다 자주 인용하는 인물이죠. 그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가기로 작정한 룻의 고백 잘 아시지만 한 번 더 살펴보겠습니다. 룻기 1장 16절과 17절 다 같이 있습니다.
 
*룻기 1:16-17,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사무엘하 15:21,
21 잇대가 왕께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내 주 왕의 살아 계심으로 맹세하옵나니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사나 죽으나 종도 그 곳에 있겠나이다 하니.
-지금 이렇게 하이라이트를 표시해 달라고 말씀을 드렸었는데 오늘 본문의 기록 잇대의 고백, 진실로 내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는지 사나 죽으나 종도 그곳에 있겠나이다. 잇대의 고백과 룻의 고백이 너무나 비슷합니다. 이와 같이 제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예수님께 맡기는 사람이죠. 그런데 이것이 그런데 쉬운 일이 아니에요.
 
제가 어느 날 사학을 마치고 집에 돌아갔는데 집안 분위기가 썰렁해요. 그 아내를 보니까 굉장히 심각하게 쇼파에 앉아있고 애는 책상에 앉아있고 뭔가 딸에게 문제가 있다. 이렇게 판단이 돼 가지고 아내한테 물어봤어요. 무슨 일이 있었냐? 이랬더니, 제 아내가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목사 딸이 구원의 확신이 없다. 목사 딸이 구원이 확신이 없다. 너무 놀래서 무슨 일이냐? 그랬더니, 제 아내가 이제 자녀의 신학 상태 점검했던 것 같아요. 얘가 첫 번째 관문은 잘 통과를 했어요.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돌아가시고, 3일 만에 부활 하셨다. 고백했다는 거예요. 문제는 두 번째 관문입니다. 아내가 이렇게 질문했대요. 선우야, 너는 예수님께 내 삶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겠니? 그랬더니, 제 딸이여 안 되겠다고 그거 어떻게 하냐고 이랬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내가 충격을 받고 심각한 모습으로도 앉아 있었던 것이죠. 제가 아내에게 그랬어요. 당신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니까, 예수님이 나의 유일한 주인으로 고백하는 믿음이 있는 것이고. 우리 선우는 아직 어린아이의 믿음이니까, 앞으로 성장하는 고백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얘기를 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이 시간 진지하게 여러분들에게 동일하게 한번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에 모든 것을 우리 주 예수님께 맡길 수 있습니까? 생각보다 큰 목소리가 나왔네요. 네 지금 어느 날, 우리 후배 목사님의 카톡 프로필 사진을 보다가, 마음에 좀 묵직한 감동을 받은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제목은 예수 중독자입니다.
 
*나 예수 중독자 되어야 하겠다. 술 중독자는 술로만 살다가 술로 인해 죽게 되는 것이고, 아편 중독자는 아편으로 살다가 아편으로 인해 죽게 되나니 우리도 예수의 중독자 되어 예수로 살다가 예수로 죽자 우리의 전생활과 생명을 주님 위해 살면 주같이 부활된다. 주의 중인이 주만 위에 일하는 자 되고 내일 되지 않게 하자 –손양원 목사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주인공 잇대가 다윗을 향해 고백했던 것처럼, 또 룻이 그의 사랑하는 어머니 나오미를 향해서 호소했던 것처럼, 손양원 목사님께서 강력하게 외치셨던 고백처럼, 우리 모두 예수님을 우리의 유일한 삶의 주인으로 고백하며, 전적 위탁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제자들을 살펴보겠는데요. 우리와 함께 22절과 23절 말씀을 한 번 더 읽겠습니다.
 
*사무엘하 15:22-23,
22 다윗이 잇대에게 이르되 앞서 건너가라 하매 가드 사람 잇대와 그의 수행자들과 그와 함께 한 아이들이 다 건너가고.
23 온 땅 사람이 큰 소리로 울며 모든 백성이 앞서 건너가매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건너간 모든 백성이 광야 길로 향하니라.
-잇대의 고백을 받아들인 이 다윗이요. 잇대에게 아 기도론 시내를 건너가라. 이렇게 명령합니다. 기드론 시내는 예루살렘의 동쪽에 있는 시내인데요. 이 기도 시내를 건너가면 감람산이 있습니다. 감람(橄欖)산 동쪽 배탈로 쭉 내려가면 내리길막 길인데 요단강까지 이제 광야지대를 지나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도망자의 길, 고난의 길을 출발하면서 잇대에게 선봉(先捧)장의 임무(任務)를 주는 것입니다.
 
선봉장 다시 말해서 잇대에게 우선적인 헌신(獻身)을 요구하는 것이죠. 제가 군에 있을 때 소대장 생활을 2년 했는데요. 좀 못 믿으시는 눈치인데 정말입니다. 네, 제가 이 사단 17년대 3대대 9중대 일 소대장이었어요. 한마디로 하면 선봉 소대장이었다. 제가 선봉이었습니다. 선봉 소대는 아시는 분은 아시는데요. 부대가 행진을 하는데 행군을 하면 가장 먼저 가요 척후병(斥候兵)으로 두 명을 먼저 보내고 그다음에 이제 선봉 군대를 배치를 하고 그다음에 제가 소대원들을 끌고 가는 건데, 제 뒤로 대대장님과 9대 이제 대대 병력들이 따라오는 것이에요. 훈련을 진행하면 우리 선봉 소대에게 여러 상황이 막 부여(附與)가 돼요. 예를 들어서 뭐 전방의 지뢰제대가 발견됐다. 뭐 적군의 진제가 발견됐다. 화생방 상황이 펼쳐졌다. 뭐 이러면 선봉소 대장이 조치를 막 합니다. 상황이 딱 종료가 되면 저희 소대 뒤를 따라오는 대대장님과 500명 되는 병력들이 아주 무사하게 지점을 통과하는 거예요. 까 잇대에게 주어진 임무도 비슷했을 거예요.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다윗과 나머지 병력들을 안전하게 지키는 사명을 위해서 우선적인 헌신을 감당하는 것이죠. 이와 같이 제자는 사명을 위해 헌신합니다.
 
III. 세 번째, 제자는 사명을 위해 헌신한다.
-담임 목사님이 즐겨 사용하시는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제자는 사명이 목숨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믿고 그대로 살아낸다,’ 이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묵상할 게 있어요. 여러분 다윗은 예수님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오늘 다윗이 기도론 시내를 건너갔잖아요. 예수님도 기도론 시내를 건너가셨어요. 요한복음 18장 2절 말씀 함께 했습니다.
 
*요한복음 18:1,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로 시내를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리에서 많은 말씀으로 교훈하셨어요. 그리고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대제사장의 기도를 올려드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과 함께 기도론 시내을 건너서 겟세마네 동산에 가신 건데,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지죠? 가롯 유다가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서 예수님을 넘겨주기 위해서 횃불과 무기를 든 사람들을 데리고 갑니다. 네 예수님이 붙잡히시죠. 그리고 본격적인 십자가의 고난이 시작되는 거예요.
 
사랑하는 순도 여러분,
잇대와 유다와 잇대, 너무나 대비가 되죠. 잇대는 다윗을 지키기 위해서 먼저 기드론 시내를 건너갔어요. 반면에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주기 위해서 기도론 시내를 나중에 건넙니다. 여러분은 잇대입니까? 아니면 유다입니까? 제가 올해 맡고 있는 사역 중의 하나가 여직장인 순장반입니다. 우리 교회에 일을 하시면서 또 다락방을 섬기시는 여직장인 순장님들이 986명이 계세요.
 
저희가 이제 매 학기를 시작하기 전, 그러니까 방학의 끝 무렵에 여직장인 다락방 전체 수양회를 늘 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방학 동안에 좀 느슨해진 우리의 영역 상태를 좀 긴장감으로 새롭게 무장하고, 말씀과 기도로 충전하자. 이런 목적을 가지고 진행을 합니다. 올해 이번에도 2월 3일 토요일에 겨울 수양회를 진행을 했어요. 그런데 수양회를 이제 준비하면서, 우리 임원들 사이에 이러저런 얘기가 오갈 때, 이번에는 좀 찬양집회로 은혜를 받으면 좋겠다. 이런 의견들이 나왔어요. 저도 동의가 됐고, 적절한 강사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마카스 50에 소진현 강사가 섭외가 됐어요. 너무 감사한 일이었죠.
 
수양회 당일 날, 이곳에 계셨던 여직장인 순장관의 많은 우리 순장님 순원들은 그날의 은혜와 감동을 지금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 사랑의 기회는 이런 분들이 너무 많아요. 우리 목회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정말 잇대처럼 앞장서서 섬기는 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랑의 교회 참 좋은 교회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훈련의 힘이고 제재훈련의 열매라고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2033-50 비전’ 앞에서 사명의 자리를 누가 헌신(獻身)하며 지켜야 합니까? 저와 여러분이 잇대처럼 기도론 시내를 앞서 건널 헌신으로 섬기가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제가 본문의 말씀에서 세 가지 제자 도에 대해 말씀을 드렸어요. 다시 한 번 정리해 볼까요? 자막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I. 첫 번째 제자는 또 다른 제자를 만든다.
II. 두 번째 제자는 전적으로 위탁한다.
III. 세 번째 제자는 사명을 위해 헌신한다.
-아멘.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가 훈련을 받아서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미 제자이기 때문에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더욱 변화와 성숙을 추구함으로써 또 다른 제자를 만들고 전적으로 위탁하며 사명으로 헌신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요약 1
예수님의 제자로서 인격과 삶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우리는 말씀에 주인공 가드 사람 잇대를 통하여 제자는 어떤 사람이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깨달아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제자이므로 우리의 또 다른 사람을 제자 삼아야 한다.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온전히 고백하며 내 모든 것을 전적으로 맡기는 믿음의 용량을 가지고 무엇보다도 사명이 목숨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기드론 시내를 앞서 건너간 잇대처럼 생명을 살리는 사명을 위해 목숨조차 내 놓을 수 있는 제자의 삶을 살아내는 헌신자가 되어야 한다.
 
♧요약 2
*가드사람 잇대에 대한 설교
- 학창 시절 선생님과 영적인 스승에 감사의 마음 전달.
- 설교자로서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설교자로 성장.
- 다윗과 가드사람 600명의 이야기를 함께 묵상하며 제자도 발견.
 
*다윗의 부하가 되었을 때.
- 다윗이 환란 중에 구조 요청
- 다윗과 가드왕의 연합 활동
- 다윗의 부하로서의 잇대의 성품이 다윗을 닮았음.
 
*제자훈련의 힘과 영향력
- 은혜라는 단어는 헤세드의 일부
- 제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
- 제자훈련은 강력한 생명력과 영향력을 가짐
 
*훈련생의 제자혼련과 하나님의 성품.
- 제자훈련으로 훈련생이 다시 제자 삼음
- 칼바르트의 해석: 베드로, 너를 닮은 사람 만들기.
- 다윗의 부하로 하나님을 닮아가는 변화
 
*제자로서의 고백과 위탁
- 다윗을 부르며 하나님의 존재 인정
- 다윗이 어떤 곳에 있든 죽음을 각오
- 자신의 모든 것을 예수님에게 맡기는 마음
 
*예수 중독자의 고백과 믿음
- 집안 분위기가 썰렁해지고 심각한 문제 발생
- 아내가 자녀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음을 알려줌
 
*예수의 중독자가 되어 죽음을 맞이하자
- 아편 중독자와 예수 중독자의 차이
- 목사님의 말씀: 예수님을 유일한 삶의 주인으로 고백
- 다윗의 고백: 선봉 소대에 대한 헌신과 임무
 
*제자는 사명을 위해 헌신, 다윗과 유다의 대조.
- 제자는 사명을 위해 헌신
- 다윗은 예수님을 가장 잘 보여줌
-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주기 위해 기도론 시내를 건너감
 
*사랑의 교회 참 좋은 교회, 제자훈련의 힘과 헌신.
- 사랑의 교회 참 좋은 기회
- ‘2033-50 비전’ 앞에서 사명의 자리 헌신
- 제자 헌신으로 예수님의 변화와 성숙을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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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4년 05월 12일)
제목: "사르밧 과부에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말씀: 열왕기상 17:13-22
대표기도:  이철민 장로님(3부)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할렐루야 찬양대
사회: 이기호 부목사님(3부)


설교자: 김지찬 목사님(前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교수님)
ㅡㅡㅡㅡㅡ

*열왕기상 17:13-22,
13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
1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5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17 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18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19 엘리야가 그에게 그의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20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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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기적(奇蹟) 스토리를 불편해합니다. 밀가루와 기름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죽은 아들이 살아나는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음식(飮食)이 저절로 생겨나는 일은 없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일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사르밧 과부(寡婦)의 이야기는 도대체 현대 그리스도인들과 무슨 상관(相關)이 있는 것일까? 라는 의문(疑問)이 생깁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왜 하필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는데, 마지막 떡을 먹고 죽으려는 가난한 과부에게 엘리야를 보내 숙식(宿食)을 해결(解決)하도록 한 것은 이해(理解)하기 힘듭니다.

게다가, 엘리야는 떡을 만들어 같이 먹자는 것도 아니고, 왜 자기 것부터 먼저 만들어 달라고 할까요? 왜 사르밧 과부의 아들은 또 죽어야 했을까요? 죽을 예정(豫定)이라면 마지막 떡을 먹고 차라리 죽게 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요? 이런 의문들이 꼬리를 뭅니다. 그런데 사르바과부의 이야기는 우리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도 매우 불편(不便)한 스토리였습니다.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會堂)에 들어가서 성경(聖經)을 읽으신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2829절에,

 
*누가복음 4:25-26,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인제 사르밧 과부 이야기를 하자, 고향 사람 예수님을 낭떠러지로 끌고 가 떨어뜨려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원래 히브리어로는 사르파트인데 헬라어로 사랩다로 번역을 하는 바람에 한글에서는 신약성경에서는 사랩다라고 된 거예요. 또 혹시 이게 왜 틀리냐, 이래서 고민하는 분들이 혹시(或是) 계실 것 같아서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아니 왜 이런 위험(危險)을 무릅쓰고 사르밧 과부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하셨을까요?

회당(會堂)에서 인제 이 말씀을 하기 전에 읽은 이사야(61:1) 성경 본문에 답이 있습니다. 뒤에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18-19”)
-그러니까 나사렛 사람들이나 현대 우리가 보기에 굉장히 낯설고 불편한 이야기지만, 많은 이스라엘 과부가 있었음에도 엘리야를 이방 시돈 땅 사르밧 과부에게 보낸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사야 본문을 언급(言及)하셨듯이 가난한 샤르밭 과부에게 복음(福音)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이해하기 힘든 스토리 안에는 복음이 도대체 뭔지, 복음을 받아들이면 무슨 일이 가능한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어떤 자들이며 어떤 자세로 일해야 하는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제 단서들을 가지고 오늘 오전에 저와 함께 엘리아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를 함께 해석해 가면서 복음의 풍성한 은혜를 맛보는 축복의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왜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수많은 과부(寡婦)를 제쳐놓고 왜 쉬돈 땅 사르밭 과부에게 엘리야를 보내 그곳에 머물게 하셨을까요? 이스라엘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不順從)하니까 엘리아 시대의 하나님이 그의 구원 사역을 이방 땅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하신 거예요. 유대인을 배제(排除)한 게 아니라 이스라엘인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니까 엘리야 시대에는 이방(異邦) 땅으로부터 인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시작하시려고 인제 사르바 과부를 이제 에게 보내신 건데 그러니까 인제 나사렛 사람들은 수많은 이스라엘 과부가 있는데, 이방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를 보냈다 그러니까 갑자기 자존심(自尊心)에 상처(傷處)를 받은 거죠. 그래서 죽이려고까지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방과 과부를 통해 가지고 하나님이 누구시고, 하나님이 복음을 받아들이면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사르바 과부에게 보여주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신 차리게 하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인제 바알를 숭배(崇拜)를 하니까 인제 엘리야가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걸고 자기의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 거다. 이렇게 맹세(盟誓)합니다. 여기 보면 내 말이 없으면 이라고 돼 있거든요. 물론 뒤에 가면 내 말이 여호와의 말씀과 연결(連結)된 건 사실이지만 그냥 아합 왕이 들을 때에는 엘리야가 내 말이 없으면 수년간 비가 오지 않을 거라고 어리석게 맹세하는 바람에 수년 동안, 3년 반 동안 이스라엘과 인근 땅에 기근(饑饉)이 일어 낮기 때문에 엘리야를 보자 뭐라 그래요. 아합 왕이 너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엘리야는 정반대 말을 하죠. 열한 기상 1818절에,

 
*열왕기상 18:18,
18 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왜 농경 생활에서 비를 관장한다는 바알 신이야말로 국가 경제의 가장 중요한 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아합 왕은 쉬던 왕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바알 숭배를 크게, 이스라엘 안에 들여오게 한 것이죠.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궁극적인 장본인은 아합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상황(狀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정치(政治) 지도자(指導者)들은 여당(與黨)과 야당(野黨)으로 나뉘어 서로 국민을 괴롭히는 자라고 비난(非難)하고 있습니다. 선거(選擧) 때만 되면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 라고 강조하며 자신들이 정권(政權)을 잡으면 달라질 것이다. 민생(民生)이 달라질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해방(解放) 이후 거의 70년 동안 여러 번 정권이 바뀌었지만 국민들은 정권이 바뀌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고 힘들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치, 권력의 취향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이 진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인지 영적으로 분별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使命)을 감당해야 됩니다. 우선 한국 시민(市民)으로 국민들의 생명(生命)과 재산(財産)을 보호(保護)하는 이 일을 잘 감당(堪當)해내며 천국 시민으로 복음(複音)을 전하며 부활(復活) 소망(所望)을 잃지 않고 경건(敬虔)하게 살아 하는 일에 최선을 다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설명을 감당하려면 엘리야처럼 우선 자기가 누군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됩니다. 왕상 171절에 보면,

 
*열왕기상 17:1,
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그러니까 엘리야가 자기를 소개(紹介)를 하는 거잖아요. 아합 왕에게, 내가 섬기는 여호와, 여호 앞에 서 있는 사람이라는 자기 인식(認識)이 분명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무슨 뜻일까요? 우선 여호와 앞에 서는 것은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블레셋의 법계가 빼앗긴 다음에 괴가 이스라엘에 돌아오니까 베스미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열어 보았다가 괄호 열고 5만 닫고, 70명을 여호와께 죽이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 괄호가 5만에 둘러싸여 있는데, 어떤 사본은 570 인이고, 어떤 사본은 70 인인데, 5만이 굉장히 많아 보이잖아요. 570? 그래서 이제 괄호를 쳐서 이제 학자들은 아마 70명일 것이다. 라는 쪽에 이제 무게를 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인제 이 벧세메스 사람들이 그냥 여호와 기회를 열어본 것뿐인데 570명이 죽으니까 이 거룩하신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앞에 서는 것은 위험(危險)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 앞에 서는 것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늘의 능력(能力)을 받을 수 있는 강력(强力)한 존재(存在)임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직무(職務)상 여호와 앞에 서서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을 제외(除外)하고는 엘리야 이전에 하나님 앞에 선 자는 딱 두 사람 아브라함과 모세뿐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아브라함과 모세 다음으로, 이렇게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선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가리켜 맹세(盟誓)하며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선언을 한 거죠. 여기에 서다이런 단어가 인제 랍비들이 볼 때에는 유대인들이 서서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인제 내가 앞에 서서 섬기는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이거를 이제 기도로 본 것이에요.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왕 앞에 딱 서서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을 거다. 이런 담대함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근데 실제로 하늘이 닫혀가지고 3년 만 동안 비가 오지 않은 거예요. 그런데 정말 놀라운 건 신약 시대에는 세례 받은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선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유일하게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고, 천사를 가리킬 때 사용해요. 그런데 요한 계시록에 보면 510절에,

 
*요한계시록 5:10,
10 그들로 성도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라고 한 것이고요.
**요한계시록 7:15,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하 아브라함과 모세와 엘리야의 전통(傳統)을 따라 하나님 앞에 선 왕 같은 제사장(祭司長)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못에 제사장들과 엘리야가 누렸던 건세, 하나님 앞에 서서 기도로 하늘을 닫고 여는 능력을 소유(所有)하게 된 거죠. 그래서 야고보는 51718절에서 이렇게 선언해요.
 
*야고보 5:17-18,
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18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인제 산에 올라가서 엘리야가 머리를 이 다리 사이에 이렇게 넣고 기도(祈禱)하고, 인제 비가 오는 조짐(兆朕)이 보이냐 이렇게 사원에게 물어보잖아요? 그러니까 땅에 엎드려서 인제 머리를 다리 사이에 이렇게 넣고 기도하는 간절(懇切)한 기도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에 인제 야구부는 이렇게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었다. 이렇게 선언(宣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니까 우리가 어떤 정부든지 간에 국민이 투표(投票)를 택한 정부와 또한 정치 지도자들 위해 기도해야 되지만, 정치 지형이 바뀌는 것에 너무 그렇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선 왕 같은 제사장으로 언제든지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하면 하늘이 닫히기도 하고 하늘이 열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정치가들은 하늘 못 닫고 하늘을 못 엽니다.

따라서 세상의 변화와 세속의 권력에 눌려서 세상의 눈치를 보기보다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때로는 말씀으로 때로는 기도로 세상에 담대(膽大)하게만 앞서는 엘리야와 같은 믿음의 용사들이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쨌든 이제 큰 기근(饑饉)이 들자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리심 시냇가에서 까마귀가 가져다주는 고기로 연명(延命)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제 하나님께서 다시 명하셨어요. 178절에 보면,
 
*열왕기상 17:8,
8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그래서 이제 엘리야가 사르밧 성문에 도착을 했는데, 그곳 과부(寡婦)가 성문(城門)에서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왜 하필로 나뭇가지를 성문에서 줍냐 하면, 성문은 좁아요. 그렇죠? 좁으니까 사람들이 오고 가면 수레를 싣고 오고 가고 그러면 이제 나뭇가지나 이런 것들이 부딪혀 떨어지는 거죠. 그 성문이 아니면 뭐 이 그러면 이제 엘리야가 이거 과부를 수소문하고 다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제 성문에서 나뭇가지를 줍는 과부를 본 것인데, 이 과부가 가지고 있는 것은 통()에 남은 한 움큼의 가루와 그리고 병()에 남은 기름 조금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제 나뭇가지를 주워가지고 나중에 나뭇가지 두 개를 줍는데, 나뭇가지 두 개를 주워 가지고 불을 피워서 떡을 만들어서 아들과 함께 먹고 죽으려고 한 거죠. 그런데 엘리야는 그날 처음 본 과부에게 마지막 떡을 자기에게 먼저 달라고 요구(要求)를 한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선지자인 사람이 이렇게 무례(無禮)할 수 있을까요?

그래 가지고 뭐 이렇게 인제 뭐 유튜브나 이런 데 보면 뭐 기독교를 막 욕하는 사람들이 목사님들은 원래 이렇게 목사나 뭐 이렇게 과부들까지 뭐 이렇게 달라고 그런다고 그러는데, 아 여러분, 아니 뭘 얻어먹으려면 부잣집 가서 얻어먹지, 왜 과부집 가서 하나 남은 거 그거를 뭐 얻어먹겠습니까?

 
저는 초등학교 때에는 꿈이 목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6학년 생활기록부에 보면 미래 희망 란에 성직자(聖職者)라고 적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저는 어렸을 때도 목사라는 단어보다 성직자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약간 묘한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서 목사가 되고 싶지 않았죠. 여러 원인이 있지만 그중에 하나는 성미(誠米) 때문이었습니다. 하루에 밥은 한 끼 정도 먹고, 두 끼는 인제 뭐 국수나 주로 이렇게 수제비 이런 거를 먹던 시절에 어머니가 밥을 할 때마다 소주잔 같은 거로 쌀을 담아가지고, 그것도 식구 수대로 성미 주머니에 넣는 거예요. 식구가 7명이었거든요. 작은아버님 뭐 할머니 이렇게까지 하니까 그렇죠. 저는 아니 왜 목사님들은 가난 성도들의 쌀을 가져갔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사실상 성미는 목사님들이 거두는 게 아니고, 목사님들에게 사례비를 줄 수 없는 초대 교회 시절에 한국 교회 시절에 경제력이 없는 부인들이 여성 성도들이 경제력이 없으니까 쌀은 이제 그래도 간대로 할 수 있으니까 목회자의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하려고 시작한 일이기 때문에 교회 사가들은 이 성미가 한국 한국의 자립 교회 전통이 되면서 한국 교회의 자랑 중 하나라고 봅니다.

게다가 성미은 뭐 캐자가 성도들의 경제적(經濟的) 상황(狀況)을 직관적(直觀的)으로 알 수 있는 일종의 실존적(實存的) 삶의 온도계(溫度計)예요. 성미(誠米)가 늘어나고 줄어드는 모습, 쌀과 보리쌀이 섞이는 비율(比率), 이런 거를 보면 성도들이 삶이 어렵구나, 좀 나아졌구나! 를 알 수 있는 온도계인 거죠. 그러니까 초대(初代)교회(敎會)에 있는 목회(牧會)자들과 성도들의 삶이 굉장히 긴밀(緊密)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성미가 가진 이런 목회 적이고 신학적인 의미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어머니께서 가난 가운데 성미를 떼는 게 못 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게다가 목사님들이 교인들의 성미에 의존(依存)하는 모습이 처량(凄涼)해 보였어요. 불쌍하지는 않은데 약간 처량한 거예요. 그래 가지고 목사 때려 쳐야겠다. 이렇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오늘날 성미를 하는 교회는 거의 없죠. 그런데 성도님들이 목회자의 사례비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지금도 목회자들의 모습이 처량해 보입니다. 그런데 때로 처량해 보이는 이런 묵회자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음 전파자들의 삶과 너무나 일치(一致)해요. 예수님이 70명을 파송(派送)하시면서 전도대로, 누가복음 103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0:3,
3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4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6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7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싹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집으로 옮기지 말라 그러니까 인제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라는 것은 열두 제자와 마찬가지로 70인에 전도 돼도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믿음으로 복음을 전하라는 거죠. 게다가 이제 동양에서는 문안 인사할 때 말을 많이 하면 시간을 오래 끄니까, 문안 인사하지 말고 복음을 전하는 게 중요하니까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다짜고짜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라고 말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평안을 전하는 거 이게 복음 아닙니까? 여기서 말하는 평안은 정서적인 안정이나 심리적인 편안한 감정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주님이 나 세례 회당에서 선포한 대로 포류 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하는 게 이게 복음이죠. 주의 은혜에 희년을 선포함으로 땅을 잃어버린 자들이 땅을 회복하고, 종 된 자들이 자유롭게 되고, 빚진 자들이 빚을 탕감(蕩減) 받는 거 이게 복음이죠. 그러니까 이런 복음의 소식과 평안, 해방과 자유를 선언하면 무슨 일어납니까? 자동적으로 축복과 은혜가 집에 임하는 게 아니에요. 만약에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 평안이 거기에 머물 거지만,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고 하시면서 복음을 전하라는 거죠. 이렇게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다음에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어떻게 음식과 숙소를 해결해야 하는지를 설명하셨습니다.

그 집에 유하여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삯을 받는 게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집으로 옮기지 말라.’ 그러니까 인제 음식이 고급이든, 아니면 아니든 상관하지 말고, 그냥 집에 유()하며 함께 먹고 마시라'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결과로 성도들과 성도들로부터 묵을 거처(居處)와 음식을 공급(供給)받을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격은 묵을 거처와 음식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포함하는 게 아닙니다. 그니까 이 집에서 집으로 옮기지 말라는 명령은 더 나은 잠자리와 더 좋은 음식을 위해 다른 집으로 옮기지 말라는 거죠. 그러니까 한마디로 복음사역은 더 나은 삶의 수단(手段)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엘리야도 똑같은 거죠.

사르밧 과부에게 가라고 하니까, 사르밧 과부를 보자마자 문안 인사 안 해 잘 지내냐 이런 거 안 해요. 그냥 두려워하지 말라. 이렇게 선포하잖아요. 복음을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내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위에 너와 내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두려워하지 말라. 이게 엘리아가 사르밧 과부의 집에 던진 복음이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늘이 닫혀 있어서 비가 내리지 않아도. 한 움큼의 가루와 기름 조금밖에 남지 않았어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거죠.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권면(權勉) 이게 바로 복음이에요. 그런데 이 복음에는 요구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자와 복음(福音)을 받는 자가 함께 좋은 것을 나누는 이거 좋은 거는 화려(華麗)한 것, 사치스러운 거, 이런 걸 의미(意味)하는 게 아닙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선한 것을 나누라는 거죠. 그러니까 엘리야가 먼저 자기를 위해 떡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이거를 이행(移行)하지 못한 사람들이 뭐 어떻게 과부한테 가서 떡 달라고 그러냐고 그러는데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뭔 소리인지 이해를 못 하는 거죠. 하나님들이 그러시려면 그냥 사르밧이여 부자한테 가라. 이러면 될 거를 왜? 떡 한 번 먹고 죽을, 왜 집에 왜 보내냐고, 뭐 때문에 가고 싶으십니까? 여러분 사르밧 과부는 이 복음의 선언과 인류와 요구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의 말대로 순종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럼 왜? 마지막 떡을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떡을 왜 먼저 엘리야에게 만들어 주었을까요? 아니 같이 먹자 그러면 더 떡 만들어 먹자 하면 되는데, 그럼 훨씬 나을 거를 왜? 먼저 달라고 그러죠? 어떤 사람들은 과부의 순종(順從)이 매우 가벼운 순종이었다고 말합니다.

사르밧 과부의 순종이 그렇게 힘든 것이었나? 사실 아무것도 아닌 매우 가벼운 순종이다. 한 끼 먹고 죽으나, 안 먹고 죽으나,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이 인간은 자기가 자기 상황이 아니라고 마음대로 내지르고 있는 거예요. 우리 같으면 어차피 한 번 먹고 죽을 거니까 다른 이에게 마지막 음식 곱게 나눠주시겠습니까? 우리 속담에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라고 하지 않아요. 저도 안 줍니다. 아니 이제 걔가 어린아이거든요. 나중에 죽은 다음에 이렇게 품에 아는 걸 보면 큰아이가 아니에요. 이 과부도 젊은 과부 같아요. 먹을 게 없어 가지고 이제 딱 한 끼 먹고 그리고는 이제 아이와 함께 죽을 요량으로 지금 왔는데, 떡을 쉽게 준다고요? 제가 보니까 이분 부자 같아요. 이 해석하는 분 성경 기자는 사르밧 과부의 순종이 쉬운 순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본문을 이렇게 읽어보시면 엘리야가 떡을 먼저 만들어 가져오라고 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전하거든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콩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약속과 약속의 성취 사이에 엘리아의 말대로 그가 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어떻게 쉬운 순종정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서 어린 아들과 함께 나뭇가지 둘을 죽고 있던 이 여인에게 다가온 복음의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약속을 듣자 불가항력(不可抗力)적인 은혜를 경험하며 순종한 거예요. 그러니까 엘리야와 과부의 이야기는 복음을 받은 자가 순종하면 어떤 일이 가능한지를 보여주고 있는 거죠. 엘리야를 통해 복음을 들은 이 과부가 엘리야의 말대로 순종했더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는 하늘이 닫혀 있어도, 통에 가루와 병에 기름을 공급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시돈의 신인 바알은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자기 백성을 먹일 수 없는 신이에요.

그런데 여호와는 비가 내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백성을 먹이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거죠. 잘 아는 청도 여러분 오늘날 많은 분들이 절망하고 있습니다. 청년들은 헬 조선이라고까지 말하죠. 그만큼 청년들의 절망감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민소득은 3만 불을 훨씬 넘어섰는데, 선진국 계열에 들어간 것 같은데, 왠지 내게는 하늘이 다친 것 같은 느낌이 드십니까? 이런 느낌 들어도 결코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앞에 서서 섬기는 여호와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늘이 다친 것처럼 보여도 자기 백성을 직접 먹이시는 하늘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죠.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것을 우리의 삶에 가장 큰 원동력으로 삼아 하늘이 다친 것 같은 기간에서도 승리(勝利)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집안의 형편에 따라 좋은 것을 함께 나누며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는 자들과 복음을 받은 자들이 그 형편 안에서 함께 좋은 것을 나누니까 하늘이 닫혔어도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한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런 문맥 없이 그냥 하나님을 믿으면 통에 가루와 기름의 병이 떨어지지 않냐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나누고, 복음을 받고, 또 복음을 또 삶 가운데서 나누는 이런 사람들이 여기저기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더 좀 잠자리와 더 좋은 음식을 위해서 이렇게 쫓아다닌 게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받고 하나님의 살아계신 기적(奇蹟)을 경험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서든 상황에서 삶을 함께 나눌 때 하나님께서는 통의 가루와 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하신다는 거예요.

이게 초대 교회에 한국 교회가 어려움을 당할 때, 뭐 회사와 성도들이 함께 삶을 나누며 기적을 경험한 것이고요. 지금도 동일하게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할 때, 그들과 함께 삶을 나누는 거죠. 그들의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상관없이 그러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먹는 음식 음식을 먹고 그들이 사는 잠자리에 누우면서 삶을 나누게 되면, 그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집에 기름과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이 다친 큰 기근(饑饉) 중에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을 경험해 살 수 있었던 사르바카부 집에 갑자기 문제가 생겼습니다. 17 자리 보면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症勢)가 심히 위중(危重)하다가 숨이 끊어진 질환(疾患) 그러니까 아마 병이 들고 좀 시간이 걸렸겠죠.

위중해지고, 그다음에 호흡(呼吸)이 끊기는 와중에 엘리야가 있었는데, 아무런 역할을 못 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제 드디어 과부가 와서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요.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相關)이 있기로 내게 오셨나이까?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십니까? 내 죄가 뭐예요? 과부가 이야기하는 어떤 해석자들은 엘리하고 과부 사이에 부적절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과부가 죄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해석해요. 또라이들이에요. 진짜, 이거 유튜브 보면 나와요. 유튜브에 이렇게 설교하는 사람들 잘 듣지 마세요. 왜냐하면, 유튜브는 과장되고 선정적이고 도발적이니, 들으니까 맨 이딴 소리 하는 거예요. 맨날 드라마 보고 영화 보다 보니까 과부랑 누가 나오면 항상 불륜 뭐 이런 이상한 짓을 하는 건데 성경 읽을 때 이렇게 의심에 해석하고 해석하면 안 됩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지적하면 그건 죄지만 언급을 하지 않고 있잖아요. 이 과부의 죄가 뭔지 성경 언급하지 않아요. 아마도 우리가 재앙(災殃)을 당할 때 경험하는 것처럼 무슨 죄가 원인(原因)인지 구체적으로 몰랐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냥 내가 죄가 많기 때문에 혹시 그런 게 아니냐, 막연하게 생각 갈 수도 있어요. 아들이 죽었으니까 이유는 잘 모르겠고 혹시 내 죄 때문 아니야. 부모님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게다가 사르밧 과부가 볼 때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 집에 머무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안 머무면 그냥 하나님이 신경 안 쓸 텐데 하나님의 사람이 머무니까, 그 집을 유심히 보다 보니까 요 과부가 죄를졌네. 이래 가지고 왜 쓸데없이 우리 집에 와 가지고 머무는 바람에 하나님이 내 죄를 드러내셨냐? 라고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얘기 자세하게 성경 원래 얘기하지 않아요.

그래야 굉장히 실제적이죠. 여러분 아십니까? 자녀가 죽으면 왜 죽었는지, 자녀가 죽은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죄인지, 성경은 그런 얘기 안 해요. 그러니까 엘리아도 왜 내 제일 생각나게 합니까? 왜 왔습니까? 네 아무런 해명하지 않고 그냥 아들을 달라고 한 다음에 여인의 품에서 받아서 취해 가지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 올라가요 여기에 취하다 받다 데려가다는 동사와 올라가다는 동사가 엘리야가 승천(昇天)하는 장면에 나옵니다.

열왕기하 2장 여호와께서 회오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하실 때에, “베델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나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그러니까 엘리야가 과부의 품에서 이렇게 아들을 취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늘로 취하시는 것과 같은 평행이고요. 아들을 품에 안고 이렇게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은, 위층이 다락방은 위층이니까. 하나님께서 하늘로 글을 올리시는 것과 같은 거예요. 그래서 인제 엘리야가 다락방에 올라가죠? 두 번 기도합니다. 우선 왜 내가 무고하는 지,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시느냐고 질문해요.

하나님의 사람이 머무는 곳이라면 재앙보다는 축복을 죽음보다는 생명을 하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자신에게 떡과물을 가져다주고 숙소를 제공해 주었는데 아니 어떻게 그런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시느냐 이렇게 지금 과부의 입장에서 하나님께 항변(抗辯)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죽은 아들을 위해 두 번째 기도를 드리는데 두 번째 기도를 하기 전에 엘리아가 세 번 죽은 아이 위에 이렇게 몸을 엎드려 펴서 엎드리는 제스처를 취해요. 세 번 그러니까 몸 전체의 접촉(接觸)을 통해 가지고 몸 전체의 어떤 생명을 아이에게 전달(傳達)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흥미로운 것은 엘리야의 제자인 엘리사가 수냄 여인의 아들이 죽었을 때에 죽은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는 자세를 취하거든요.

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 침상에 눕혔는지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의 입에 자기 눈을 그의 눈에 자기 손을 그의 손에 대고 그의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 번 이리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7번 재채기하고 눈을 뜨는지라.”
-그러니까 엘리야랑, 엘리사랑 굉장히 비슷하죠? 엘리야가 세 번 이제 이렇게 엎드려 가지고 눈과 코와 손을 이렇게 엘리사처럼 만진 건지는 확실치 않지만, 어떻게 보면 눈 이건 시력이고요. 코는 호흡이고, 손은 우리가 일을 해야 되는 손의 이런 기술을 의미하는 건데, 온몸에 접촉 교육을 통해 가지고 이 아이에게 온전한 생명력, 활력을 불어넣으려고 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바딜리 터치가 굉장히 의미가 있는 거죠. 그리고는 기동하죠. ‘내 하나님 여호하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 나니라. 성경을 유심히 읽으면 여호와께서는 죄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으세요. 먼저 과부가 죄를 회개해야 된다는 조건 다시지 않습니다. 성경 기자는 그냥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아이가 살아났다 이게 전부예요. 전 이게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죄의 심각성을 이야기하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항상 더 크게 강조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점을 가 강조해야 돼요. 실제로 엘리야 스토리는 죄를 언급하기는 하지만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 라는 사실과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하나님을 강조하는 데 더 큰 방점을 찍고 있어요. 그래서 야고보는 515절에서,
 
*야고보서 5:15,
15 믿음에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상하심을 받으리라.
-혹시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돼요. 혹시 죄를 통해 죄를 범해 병이 생겼다고 해도 걱정하지 말라는 거죠. 왜 믿음의 기도는 죄 용서를 받게 할 뿐만 아니라, 병 고침까지 받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질병이 죄 때문에 생기는 건 아니죠. 그런데 혹시 병()과 우환(憂患)이 집에 있으면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혹시 죄 지은 그런 게 생각날 수도 있죠.

그럼 이때 죄책(罪責)감으로 인해서 낙심(落心)하고 좌절(挫折)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 죄 때문에 아들이 죽고 내 죄 때문에, 뭐 남편이 문제가 생기고, 내 죄 때문에 부모님이 어려움이 생기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혹시 이게 중요한 죄를 짓더라도 단어입니다. 혹시 용서(容恕)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낙망(落望)하거나 절망(絶望)하지 말라는 것이죠. 이어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의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최근에 이렇게 주변의 기독교 방계에 흐르고 있는 이상한 흐름들이 막 죄를 엄청 많이 강조해요. 뭐 마지막 때다 뭐 마지막 신호다 막 이러면서 죄를 엄청 강조하거나 후원계자, ㅋ ㅋ ㅋ ~ 이런 사람들 위험한 사람들이에요.

성경의 핵심(核心)은 뭐냐 하면 죄를 강조하는 죄송하지만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기 때문에 일리 과 사르밧 과부가 죄를 언급하지만 엘리야도 그걸 반복하지 않아요. 하나님도 반복하지 않으세요. 혹시 죄가 있을지라도 사르밧와 과부의 가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죽은 아들을 살리시는 뿐이고, 따라서 하루 먹고 하루 산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중요한 일은 우리가 죽은 후에 영원한 생명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 아니에요. 그러니까 사람아 과부의 집에 보내서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 어떤 일을 하시는지 보여준 다음에 그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문제만이 아니라, 마지막 이 세상 떠날 때 우리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훨씬 더 중요한 관점이기 때문에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하나님은 아들을 죽게 하시고 끝내는 엘리야를 통해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 죽은 아들을 살려내시는 거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르밧 과부의 핵심 메시지가 뭐예요? 살아난 아들을 되돌려 받은 다음에 엘리야에게 말한 과부의 말 속에 들어 있습니다.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그러니까 사실은 오늘 이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는 문자적으로 우리의 우리에게 그대로 일어나지 않아요. 병에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고, 통에 가루가 사라지지 아니한 그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죽은 아들도 살아나지 않습니다. 어차피 이 아들도 살아났지만 죽었습니다. 중요한 거는 이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는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에 권세(權勢)가 얼마나 위대(偉大)한지,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말씀을 전하는 묵회자들과 이를 세상에 선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고 거예요.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병들고 죽은 것은 이스라엘의 오랜 동안 불순종(不順從) 인해 병들고 죽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상징(象徵)입니다. 어떻게 보면 현대교회도 마찬가지죠. 개인이든 교회든 불순종하면 병에 걸립니다. 병에 걸려 위중해지면, 위중(危重)해지면서 호흡이 사라진 과부의 아들처럼 개인이나 교회 안에 생명의 호흡이 멈추게 되죠. 이럴 때 생명을 회복시키는 유일한 수단은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반복적(反復的)으로 가르쳐야죠. 그래서 엘리야가 세 번 죽은 아들 위에 엎드린 것이고요. 엘리사가 입과 눈과 손 세 군데에 대고 죽은 아이와 온몸으로 접촉한 후에 살려낸 것처럼 우리도 살아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持續的)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의 반복적(反復的)으로 접촉시켜야 됩니다. 아니나 다를까 하나님께서 이미 신명기 66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신명기 6:6,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첫째, 오늘 내가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내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이든지 길에 갈 때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둘째, 너는 또 그것을 내 손목에 메어 기호를 삼으며 내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셋째, 또 네 집과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그래서 옛날 유대인들이 여기다 뭐 견문을 여기다가 붙이고 팔에 차고 옷 술에다가 이렇게 매달고 성 문 집 앞바께 문 옆에 붙인 거예요. 하나의 말씀을, 근데 이거를 그냥 유대인들의 교육법 이렇게 생각하고 멈추면 안 되구요.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는 끊임없이 읽고, 이해하고, 주해하고, 적용하면서 말씀과 에이 삼중(三中) 접촉(接觸)을 끈이 끊임없이 반복해야 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죽은 과부의 아들의 몸에 생명의 호흡이 돌아온 것처럼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은 내적인 활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는 하늘이 36개월 동안 다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어떻게 우리에게 임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하늘이 닫힌 것처럼 보여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딱 두 가지가 남아 있습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야고보서 513절 이하에 보면,
 
*야고보서 5:13b,
13 너의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라.
-야고보가 이렇게 말한 이유가 뭐예요? 우리가 찬송할 때, 하늘이 응답하고 우리가 기동할 때, 하늘이 닫히기도 하고 하늘이 열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애지중지(愛之重之)하듯 인간적 희망이 모두 사라져 죽은 것처럼 보여도 낙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엘리야가 죽은 아이를 품고 다락방에 올라가서 기도한 것처럼 우리 역시 기도의 골방에 올라가기도 하면, 엘리야를 하늘로 끌어올리셨던 하나님께서 우리의 죽어가는 희망도 한을 소망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부모로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最高)의 유산(遺産)은 신앙(信仰)입니다. 우리가 찬송하고 기도할 때, 하늘이 닫히기도 하고 하늘이 열리기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것, 이것이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축복(祝福)입니다. 남은 생애(生涯) 우리가 기도하고 우리가 기쁠 때 찬송하고 고난당할 때 기도함으로 하늘이 닫히고 하늘이 열리는 기적을 자녀들과 함께 경험(經驗)하며 남은 생의 자녀들과 영원토록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는 복된 가정과 교회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약
우리에게 주신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의 스토리의 핵심을 깊이 인식하고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러주신 대로 우리의 전 생애(生涯)가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받는 자들과 함께 삶을 나누며 끝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준 부활(復活)의 소망(所望)을 가지고 경건(敬虔)하게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엘리야에게 친절을 베푼 과부에게 더욱 귀한 보상이 있게 된 것을 보게 된다. 즉 그녀의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던 것이다. 그는 과부의 불평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답변도 없이 그 문제를 하나님께로 가져와 내어놓았다. 그 자신도 그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야 할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죽은 아이를 어머니의 품에서 취하여 자신의 침상으로 데리고 왔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감동하심에 의하여 이 아이의 소생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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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헌신 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2024년 05월 11일)
제목: "주님이 부르신다"
말씀: 사무엘상 7:5-9
대표기도:
찬양인도: 어린이연합찬양대(), 목양5팀 
말씀봉독:

설교자: 류응렬 목사님(와싱톤중앙장로교회-초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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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7:5-9,
5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6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7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그들의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8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니.
9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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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05월 08일)
제목: “마음 대로(大路) 사는 인생”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말씀: 신명기 8:2,
 
설교자: 이의수 부목사님(가정사역, 사랑패밀리센터,생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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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8:2,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모세는 신명기 5장에서 8장까지 광야 생활 이후 십계명을 중심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에 대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 줍니다. 9장부터는 새로운 미래,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이야기해줍니다. 광야 40년이 지나고 난 뒤에 모세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과 믿음이나 순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걸까요? 오늘 이 신명기 8장 2절을 새 번역으로 한 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신명기 8:2,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을 알고 싶으셔서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셨습니다. 참 이 마음, 알 것 같은데, 잘 모르는 게 이 마음이죠. 옆 사람만 보세요. 마음이 보이는지 안 보입니다. 부부지간에 이런 걸 서로 물으면 반드시 싸웁니다. 성경은 마음이라는 단어를 참 많이 씁니다. 구약성경에 819번을, 또 신약에서는 239번을 씁니다. 1000번이 넘는 표현을 단어를 씁니다.
 
우리가 힘겹게 겪는 인생의 대부분의 문제들은 여러분 마음의 문제라는 거 아십니까? 마음에 들어서,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마음이 불편해서 마음이 괴로워서, 마음이 즐거워서,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들의 출발점이 바로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죠.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이 ‘마음대로 사는 인생’ 이에요. 마음대로 설교할까요? 그냥 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뭐 아무렇게나 그런 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에 보면 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신념 가운데 생명의 길이 되셨습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로 연결된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견고한 대로를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는 예수님과 함께 걷는 바로 넓고, 견고하고, 영원한 길 마음의 대로가 있습니다. 이 대로에는 근심도 걱정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실패(失敗)와 좌절(挫折)과 낭만(浪漫)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천국까지 이어지는 탄탄대로(坦坦大路)입니다. 마음대로를 걷는 사람의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갖고 살아갑니다. 마음대로를 걷는 사람은 언제나 예수님과 동행합니다. 마음대로는 자막을 부탁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대로, 예수님의 마음대로,
 
-오늘 설교 제목의 ‘마음대로’의 의미입니다. 또 마음대로는 부모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마음대로, 하나님의 것과 우리가 태어나서 성장하면서 갖게 되어 그 마음대로 사는 것을 또한 이야기합니다 또 마음대로 사는 인생은 이 땅에서 가장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인생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오늘 이 마음대로 사는 인생에 대한 이야기들을 구체적으로 풀어보겠습니다. 마음대로 사는 인생은 어떤 인생일까요?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시작 한 번 더 읽어볼까요? 시작
 
I. 첫 번째, “마음대로 사는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인생입니다.”
-신명기 8장 2절의 마음은 3절에 나타나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대로 살려고 최선을 다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마음대로 사는 인생은 바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인생이죠. 오늘 여기에서 이 마음이라는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 내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쓰여 진 히브리어가 레바브 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감정이 아니라, 인격, 마음, 정신을 의미합니다. 인간 내면의 생활의 중심 처이고, 신앙생활의 근원이며 하나님이 거처하시는 곳 또 하나님이 일하시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윤리적인 태도 및 행위가 결정되어지는 곳이 마음이기도 합니다. 또 성경은 마음은 ‘성령과 그리스도교에서 계시는 곳’이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은 마음에서 세워집니다. 믿음을 주관적으로 내 안에서 받아들이고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마음이죠. 또한 마음은 우리의 인격이 성장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꽤 중요하죠. 어려운 말 알아듣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어렵게 해서 말씀드렸네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은 참 넓고 크고 아름답습니다. 마음대로 걷고 뛰고 마음대로 사람들과 함께 즐겁게 생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세상에 나 홀로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스로 만든 마음이라는 감옥에 갇혀 사는 사람들입니다. 누가 가둔 것도 아니에요. 마음대로 사는 것이 힘들어서 세상에 대한 마음을 접고 스스로 만든 감옥에 들어가 숨습니다. 절망과 좌절과 고통으로 만들어진 마음의 감옥, 마음의 감옥의 벽은 시간이 갈수록 더 두꺼워지고 출입문은 더 견고(堅固)해집니다. 마음의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한 가지 소리만 들립니다. 나의 내가 나에게 말하는 부정적(否定的)인 생각들이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큰 소리가 뭔지 아십니까? 내가 나에게 하는 소리 가장 분명하고 가장 정확하게 들립니다. 그리고 가장 크게 들리는 소리가 내가 나에게 하는 소리들입니다. 근데 부정적인 언어 이런 것입니다. 틀렸어, 안 될 거야. 끝났어, 그럴 줄 알았어. 넌 맨날 그래, 이런 이야기를 계속 자신에게 쏟아 붓습니다. 부정적일수록 제일 크고 정확하게 전달되어지는 이 음성들 이런 마음의 소리를 듣기 시작하면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마음의 감옥에서 밖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문을 타지면 모든 관계문도 닫혀집니다. 여러분, 잘 아는 책 있습니다. 로봇 몽어의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 훈련받을 때 다 읽죠? 그 책을 보면 7페이지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믿는 자의 몸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고, 인간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처가 되었습니다.”
-16쪽에 보면 이렇게 더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이 자그마한 마음의 방응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그곳으로 그리스도를 그곳으로 모셔드리려는 권면을 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 방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우고, 말씀을 공부하고, 묵상하며 언제든지 마음의 방에 주 예수님의 즉각적인 임재가 지속되도록 하십시오.’
 
인생은 마음이 무너지면 모든 것들이 무너집니다. 이런 마음의 감옥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복음을 믿고 예수님을 마음의 감옥에 모셔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마음이 힘들다면, 여러분 마음속에 스님을 모셔드릴 수 있게 되길 축복합니다. 예수님을 마음의 감옥에 모셔드리는 순간, 순간에 어둠은 사라지고 절망과 좌절과 고통의 벽은 바로 무너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위에 구원(救援)에 감사와 기쁨의 기둥을 높이 세우십니다. 마음 때문에 괴로웠던 인생이 마음대로 사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진리가 주는 자유 누리며 사는 인생이 됩니다. 이제부터는 마음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주신 마음대로 힘차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고난(苦難)과 고통(苦痛)이라고 표현할 만한 내 인생의 장면들이 시작될 때 내게 들려오는 천둥 같은 두 가지 소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 두려움이 내 안에서 내게 부르짖는 소리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소리입니다. 여러분은 일상 속에서 어느 쪽을 더 많이 듣고 사십니까?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내가 듣는 것과 상관없이 어느 소리를 더 듣기 위하여 노력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과 모세에게 반항하고 불순종하고 우상을 숨겼던 순간들은 낯선 광야에서 걷게 될 일들에 대한 두려움이 부르짖는 소리에 짓눌렸 때, 그때 냈던 소리였습니다.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을 지킬 수 있는지, 광야 40년의 시험(試驗) 방식은 놀랍게도 광야 이전의 창세기에서 노아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먼저 진행하셨습니다. 훨씬 더 긴 기간 동안 진행하셨죠. 노아가 400년 동안 묵묵히 방주를 짓고, 가족의 구원을 받게 된 것은 바로 사람들의 소리가 아니라 두려움의 소리가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결단한 마음대로 순종의 시간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브라함의 사건도 바로 이와 비슷한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燔祭)로 들이기 위하여 모리아 산으로 갔습니다. 창세기 22장 9절의 10절을 보면,
 
*창세기 22:9-10,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아브라함이 그곳에 제단을 쌓아 나무를 버려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산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아들을 잡으려 하니, 바로 순간까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시험하셨습니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아들의 죽음이 임박(臨迫)한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확인하신 하나님은 여호와 이례를 행하십니다. 이삭을 드신 날, 양을 준비하십니다.
 
노아처럼 길게 기다려야 한다면, 아브라함처럼 가장 소중한 것들에 대한 위기(危機)를 경험하고 있다면 여러분들의 마음이 힘들고, 어렵고, 괴로운 분들이 계신다면 눈을 감고 기도하는 일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눈을 감는 순간 두려움이 더 나를 지배(支配)하려고 할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들이 나를 삼키려 할 것입니다. 저는 이런 여러분들이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한 좋은 방법을 하나 제안(提案)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그럴 때에는 눈을 감지 마십시오. 눈을 뜨고 하나님의 말씀을 소리 내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을 읽으면서 말씀의 은혜가 되면 우리는 하는 일이 있죠? 뭐하죠. 밑줄 칩니다.
 
왜 치는지 모르겠어요. 성경 새로 사고 싶어서 칩니까? 막 밑줄 치느라고 자를 찾다가 또 다른 거 갖고 놀아요. 그러지 마세요. ☞여러분 손가락으로 말씀을 짚으세요. 그냥 그리고 ☞그 말씀으로 기도하십시오. 이런 기도를 했던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응답(應答)받았던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읽으면서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 이 은혜를 주세요. 왜 눈감으면 말씀이 내 마음 가운데 지켜지지 않으니까, 눈을 감으면 내게 들려오는 소리, 나를 마음의 감옥으로 밀어놓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면, 눈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내 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십시오.
 
그리고 말씀대로 말씀이 주시는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되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대로, 사는 인생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으로 기도하는 일이 어려우면 담임 목사님 가르쳐 주신 게 있잖아요. 찬양하십시오. 큰소리로 찬양하십시오. 우리가 아는 모든 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일상을 마음대로 사는 방법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마음대로 사는 인생을 사는 방법, 우리 마음의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대로 사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 주시는 마음대로 사는 인생, 여러분들의 인생이 될 수 있게 되길 축복합니다.
 
저는 얼마 전에 지금까지 전한 말씀이 저의 지나온 신앙과 저의 삶에 간절히 계속 기도해 왔던 기도들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번쩍 깨닫게 해주셨던 것은 내 마음을 믿지 말자라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마음을 찾아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아내셔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마음대로 살아가는 인생들 될 수 있게 되길 소망합니다. 그럼 마음대로 사는 인생에게 두 번째,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요?
 
II. 두 번째, “마음대로 사는 인생은 사랑하며 사는 인생입니다.”
한 번 더 읽어볼까요? 자 시작 ‘마음대로 사는 인생은 사랑하며 사는 인생입니다.’ 최근의 행복에 대해 좀 생각을 해 봤어요. 60년 살았으니까, 이만큼 살면서 내 행복은 뭘까? 이제 와서 내가 생각해 보는 행복은 행복을 그동안 말하고 살았는데, 행복을 가르치며 살았는데, 또 행복을 전하며 살았는데, 나에게 행복은 뭘까? 근데 의외로 단순한 정의가 나오더라구요. 제가 정의하고 발견하고 생각을 정리한 것은 딱 이거였습니다. 내가 받은 사랑과 내가 한 사랑의 총계, 맞아 행복은 바로 이런 거야. 내가 받았던 사랑이 행복이었고,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 것이 행복이었더라고요.
 
사랑받을 때 얼마나 행복해요. 그런데 진짜 더 행복한 것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더 행복했더라구요. 여러분,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여러분들은 행복한 사람 맞습니다. 요즘에 저는 그냥 보기만 해도 행복한 두 아이가 있습니다. 퇴근하고 데려가서 만났는데요. 영상 좀 한번 보여주시겠어요. 이거 저 그냥 행복해 보이지 않아요?. 퇴근하고 데려갔는데 한 녀석은 기어오고 한 녀석은 달려오는 거예요. 두 녀석을 다 한꺼번에 데리고 노는 방법은 저거 했습니다. 저게 한 판이 아니라 몇 판 했습니다. 손주 사랑하는 데는 체력이 필요하다는 것 좀 깨달았습니다. 저는 두 아이를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마음대로 사랑합니다. 요즘 손주를 사랑하며 참 행복을 누리는데요. 자녀를 키운다는 것이 두 가지의 축복을 주더라고요. 하나는
 
⓵첫 번째 축복은 세 자녀를 키우면서 제가 누렸던 축복이 있습니다. 참 행복했어요. 세 자녀를 키우면서 힘들다. 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지켜보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⓶두 번째 축복은 손주들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녀를 키운 자에게 주시는 보상(報償)이 손주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 같아요. 여러분 우리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랑하며 산다. 라는 건 참 행복한 일입니다.
 
저는 제 핸드폰 번호 중에 핸드폰에, 여러분 전화 기능 중에 우리 즐겨찾기 기능이 있잖아요. 제 아내가 1번입니다. 그리고 쭉 5명의 전화번호가 있습니다. 1번 사랑하는 아내, 2번 사랑하는 사위. 3번 사랑하는 큰딸, 4번 사랑하는 아들, 5번 사랑하는 딸, 6번 사랑하는 어머니,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쭉 나머지가 이어집니다. 어느날 자동차로 이동하는데 운전하다가 아내하고 잠깐 통화를 하고 난 뒤에 번호가 쭉 즐겨찾기 번호가 뜨더라구요. 다 호칭 앞에 사랑하는, 사랑하는, 을 써놨어요. 그런데 단어가 쑥 들어오는 거예요. 이 사랑하는 이라는 표현은 어떤 표현이지? 근데 뭔가 더 들어가 있는 거예요. 제가 그때 이 ‘사랑하는’ 이라는 단어를 이해한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사랑하는,,,,,, 사랑해야 하는’
-사랑해야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계속 사랑해야 사랑하는 가족이 될 수 있더라고요. 한 번 사랑한다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계속 사랑해야 하는 사람, 변함없이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더라고요. 여러분 가족에 대한 사랑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노력 없는 사랑은 행복한 가정을 만들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사랑의 열정을 저절로 갖게 만들어줍니다. 가족은 누가 사랑하라고 그래서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주신 마음대로 사랑하는 것이, 또 사랑하며 함께하는 것이 가족이죠. 저는 오늘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알고 싶으셨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계속 찾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열광하고 환호하는 반응을 살펴보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바로 모세와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셨던 이 질문이 이 질문의 답은 이것이었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베풀어주신 사랑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 돌보신 사랑을 기억하고 있는지, 그래서 말씀을 지킬지를 알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과 상관없는 이스라엘 민족들의 행동은 있죠. 원망하고 불평하는 은사(恩賜)를 갖고 있는 이들, 성경이 12번 정도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대부분의 이야기가 광야 생활 이 년 초기에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동거하는데 적용 기관들이 적용 기관들이 필요했죠. 제가 이 본분을 묵상하면서 찾아낸 것은 이것입니다. 광야 40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 받은 시간이 아니라, 시험 받은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신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이 어떤 시간일까요? 우리는 함께한 가족들의 마음, 아내의 마음을 알고 싶어 합니다. 자녀들의 마음을 알고 싶어 합니다. 부모들의 마음을 알고 싶어 합니다.
 
저는 오늘 모세의 이야기와 우리 가정의 이야기는 똑같다.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마음을 알리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가 줬던 사랑 우리가 함께 했던 사랑이 여전히 그대로 있는지, 또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어떤 행복을 줬는지를 찾아보고 싶은 것이죠. 가정을 이루고, 부모가 되고,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하나님 앞에 결단(決斷)한 것이 있습니다. 아내와 함께 결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입술이 아니라 삶으로 성경(聖經)으로 보여주자는 거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마음과 생각을 어떻게 하는지, 또 어떤 가치와 목적을 갖고 살아가는지, 어려울 때 어떻게 극복하는지, 성경을 보여줘야겠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집은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마음대로 살려고 나름 노력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저희들이 있는 모습 그대로를 함께 공유하고 성장해 가고 있습니다. 부모로서 자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저 자녀를 즐겁게 만들어주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자녀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을 동시에 보여줘야 했습니다. 이 모습을 통해 함께 공감할 수 있도록, 함께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들이 필요했습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인위적으로 잠시(暫時)는 할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이제 자녀들이 막내가 30대로 접어들어 가는데요. 이런 과정 속에 긴 세월 동안 변함없이 그것들을 유지(維持)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저는 목회자로 살아오면서 한 가지 선택한 저의 삶의 방식이 그였습니다. ‘있는 그대로 살자.’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그대로 대하자. 집에서도 역시 똑같은 방식들을 선택했습니다. 저희 부부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모습과 사역에 대한 현실, 또 훗날 생각만 해도 입과의 미소가 지어지고 많은 추억들을 쏟아낼 수 있는 사랑의 이야기들이 저는 우리 부부가 우리 자녀들에게 남겨줄 유산(遺産)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하나님 아버지께 주신 마음대로 가정 안에서 사랑하며 살려고 노력합니다. 우리 부부가 자녀들에게 보여주고 남겨줄 것은 사랑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참 감사한 것은 어젯밤에 제 자녀와 대화중에 이런 얘기를 저에게 해주더라고요.
 
아빠 엄마가 얼마나 많이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또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는지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사랑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있다. 그렇게 우리를 사랑해 주셔서 고맙다. 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참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행복했습니다. 밤이요. 깊어지는데 하나도 피곤하죠. 않았습니다. 사랑한다는 거, 참 쉽지 않습니다. 가족의 사랑은요, 석고 덩어리나 진흙과 같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놔두면 아주 미운 모양으로, 매우 단단하게 더 이상 그것을 이쁘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매 만질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게 굳어져 버립니다. 그다음에는 깨트리고, 또 가루를 만드는 힘든 과정들을 진행해야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사랑이 사라지지 않도록 굳어지지 않도록 따뜻한 사랑을 유지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게 되길 축복합니다.
 
저는 아내를 참 많이 사랑합니다. 근데 맨날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삐질 때도 있습니다. 아니요. 잘 삐집니다. 엄청 잘 삐집니다. 근데 삐진 마음을 아내가 되돌려 놓는 게 아니라, 제가 되돌려 놓으려고 애를 씁니다. 제가 그런 마음이 제 마음속에 스멀스멀 올라오고 제가 그렇게 삐졌을 때, 제 마음을 돌리는 일들이 있습니다.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싹 돌아와요.
 
1)첫 번째는 아내하고 데이트를 시작하고 난 뒤에 얼마 안 되었을 때 일이었습니다. 우연찮게 계룡산 국립공원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 금수봉 팔각정까지 올라갔는데, 거의 가까이 갔는데 갑자기 아내가 산 아래에 안경을 벗어놓고 왔다는 거예요. 약수터에 아내는 저에게 다녀와 줄 수 있냐? 라고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미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산행을 위해 간 게 아니기 때문에 양복바지에 구두를 신고 있는데, 산을 달려요. 제가 어젯밤에 지도 보고 대충 계산해 보니까 3Km가 넘더라구요. 3Km를 뛰어 내려갔다가 뛰어 올라왔어요. 미쳤지요 그 마음을 생각합니다. 여자에게 그렇게 잘 보이려고 애썼는데, 그 생각하면서 아내를 다시 봅니다.
 
2)두 번째는 제가 설교할 때 한두 번 이야기한 것 같은데요. 아내가 첫 직장에서 18년 넘게 일하고 그만둔 뒤에 집에서 차를 마시다 저에게 한 말이 있었습니다. 당신 내 마음 알어 그때 안다고 그랬죠. 성령께서 금방 깨닫게 해 주시더라고요. 까불면 안 된다고 그래서 겸손하게 다시 물었죠. 미안해 여보 내가 마음 못 썼는데, 살피지 못했는데 지금 말해줄 수 있겠냐고 근데 그때 아내의 눈에서는 이미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모를 거야. 모를 거야. 아직까지 미안합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한 가지 제가 결심한 게 있습니다. 그런 마음 더 주고 싶지 않다. 그런 마음 갖고 내 안에서 눈물을 흘리도록 만들고 싶지 않다. 이제는 아내의 마음을 살피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는 행복한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부부는 행복해지기 위하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주신 마음대로 살면서 저희 부부는 가정과 선교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가정 사역을 하면서 저희 마음속에 늘 염두에 두는 것은 가정의 회복과 영혼(靈魂) 구원(救援)입니다. 요즘에 결혼한 친구들이 많지 않은데요. 결혼 준비 교실을 진행하는데 이 3년 전부터 되게 특이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거의 절반이 불신자이거나 불신자에 가까운 커플들이 결혼 준비 교실을 옵니다.
 
그리고 끝날 때는 세 가족 반에 가거나 또 멘토들과 함께하면서 복음을 영접하는 것들을 경험하게 되어 집니다. 가정 사역을 진행할 때마다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는 기쁨을 누립니다. 작년에 아바로스쿨에 참석했던 한 남성은 대놓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예수 믿지 않겠다고, 지금 성경 대학 나오고 파노라마하고 토비새 열심히 나오고요. 그리고 자신이 세례 받겠다고, 세례 때 간증하고 싶다. 라고 이야기까지 하고 다닙니다. 온 가족을 끌고 다닙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봅니다. 이제 곧 6월 22일부터 23일까지 ‘사랑의 순례’가 진행될 겁니다. 사랑의 순례를 진행할 때 우리가 기대하는 것들이 있어요.
 
왜냐하면, 냉랭했던 부부가 사랑으로 회복되어지는 과정들 또 예수님을 전혀 믿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목에 걸고 너무 행복한 미소를 짓는 생방송을 보는 즐거움입니다. 그게 눈앞에서 1박2일 동안 펼쳐지거든요.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또 선교사들을 돕는 가정 사역, 멤버 케어 사역들을 계속해 오고 있습니다. 상처받고 마음이 어려워서 주저앉은 선교사님들을 일으켜서 다시 한 번 더 선교사에게 힘쓸 수 있도록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누가 요구하거나, 요청하지 않아도 열심을 외워 최선을 다하는 일이 바로 우리가 가정과 선교라는 두 가지 일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들을 자녀들에게 보여주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보여주며 살아가는 저희들의 인생 방식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마음대로 사랑하며 살 수 있게 되길 축복합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보고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 말하고, 또 자녀들에게 말할 수 있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마음대로 사는 인생’을 유지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III. 세 번째, “마음대로 사는 인생은 맡기고 사는 인생입니다.”
-마음대로 사는 인생은 맡기고 사는 인생입니다. 여러분, 수영 잘하십니까? 저는 배영은 조금 합니다. 조금 합니다. 몇 M는 갑니다. 그리고 꼬르륵 들어갑니다. 그런데 정말 수영 못하는 사람이 바다 가서 수영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잘하는 사람도 바다에서 수용하는 거 쉽지 않죠. 왜냐하면, 파도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살을 이해하기 때문에 웬만한 체력 가지고는 쉽지 않습니다. 근데 바닷물을 즐기는 탁월한 방법 중의 하나는 선크림 잘 바르고 튜브 위에 올라가서 바다에 몸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냥 여기서는 무능력해지는 게 지혜입니다. 파도가 오면 파도를 타는 것입니다. 파도에 몸을 맡기면 되어집니다. 파도를 타는 간단한 방법 하나 알려드릴까요? 파도가 앞에서 오면요 파도가 내 앞에 오는 순간, 제가 점프하면요. 파도를 타고 넘어갈 수 있어요. 니 까짓 거 내가 감당할 수 있어 하고 딱 버티면요 딱 때리시면 그대로 쓰러지십니다.
 
여러분,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맡기면 극복할 수 있습니다. 평안한 삶을 살기 쉽지 않습니다.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소유하기 위해 애를 쓰고 살아갑니다. 고생, 고생하는데 만족하는 것도 없고요. 감사하는 것도 없어요.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좋아져야 되는데, 불안만 더 커지고 평안한 삶을 망치며 살아갑니다. 누구나 꿈꾸지만, 마음대로 사는 인생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생각합니다. 알라딘의 요술램프를 갖고 싶다. 그리고 요술램프에서 나오는 요정 ‘지니’ 같은 존재가 내게 있었으면 참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합니다. 내 마음대로 해낼 능력이 없을 때, 내 인생 앞에서 좌절할 때마다 우리는 이런 충동들을 갖게 되죠. 여러분 행복한 사람은 있는 것으로 행복합니다. 불행한 사람은 없는 것 때문에 불행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소유에 따라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을 갖고 사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반 컵 밖에 없는 물, 있는 이걸 가지고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이 물이 얼마나 있건 간에 이 물을 어떻게 쓰고 어떻게 나한테 유익을 줄 것인지를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물을 먹습니다. 물을 먹는 방법도 가지가지입니다. 여러분 맡기고 살아갈 수 있게 되길 축복합니다. 맡기고 살면 평안해요. 평안한 이유는 내가 애쓰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면 우리가 할 일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순종(順從)만 하면 됩니다. 저는 우리의 모든 일들을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질 것이다. 라는 것을 언제나 믿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앞길을 계획할지라도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시다.” 라는 것을 흔들림 없이 믿습니다. 제가 믿어보니까, 제가 살아보니까, 또 목사로서 오랜 시간들을 살아오면서 성도들의 삶을 살펴보니까 결국 하나님의 계획대로 하나님의 목적 절대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들을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교회 오면 좋죠. 그런데 집에 돌아가면 불편하죠. 가족들만 보면 왜 그렇게 불편해요? 왜? 이렇게 가족들을 힘들어할까요? 여러분 내가 힘들게 생각하기 때문에 불편하다는 거 아십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내가 바라는 대로 바라는 대로 잘 되지 않아 늘 힘듭니다. 가정 안에서 대부분의 문제는 뭐가 문제인지 아십니까?
 
내가 해보겠다. 라는 내 남편, 인간 버르장머리 내가 고쳐보겠다고, 포기하세요. 어머니도 안 된 걸 왜 어떻게 당신이 하시고 계십니까? 내가 책임져 보겠다고 이런 결단이 꼭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덤벼든 대부분의 일들이 진짜 문제가 아니라, 가족들의 연약(軟弱)함이라는 거 아십니까? 연약한 것들은 함께 하다 보면 또 계속 사랑하다 보면 치료(治療)하고 회복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것을 문제 삼고 지적하고 비난하는 순간 진짜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이 가족들의 연약한 것들입니다. 무모(無謀)하게 무리하다 보면 서로에게 치료하기 힘든 상처(傷處)를 줍니다.
 
모든 가정에는 아픔 하나 눈물 가득한 문제들이 나와 있습니다. 없는 가정 없습니다. 가정 문제는 하나님께 내 가족을 전적(全的)으로 맡기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여러분 맡기실 수 있게 되길 축복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은 딱 하나입니다. 따라서 하겠습니다. “나는 사랑하겠습니다.” 변화는 주님께 맡기고 따라서 해야겠네요. 따라서 해봅시다. ‘변화는 주님께 맡기고, 나는 사랑만 하겠습니다’ 이게 맞습니다. 사랑하다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다 보면 내가 바라고 원했던 것보다 더 좋은 모소로 회복시켜 놓으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저는 제게 주신 마음대로 맡기고, 기도하고, 순종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왜 제 인생이라고 절박한 기도가 없고, 깊은 한숨이 없고, 눈물이 없고, 찢어지는 아픔이 없겠어요. 내가 하나님보다 앞서가거나 하나님을 조정하려고 하지 않고 저는 순종하며 살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평안합니다. 왜냐하면, 힘들 때 저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 한번 같이 큰소리를 읽어볼까요? 자 시작 “하나님 지금은 힘이 듭니다. 지금은 걱정됩니다. 하지만 모든 일들은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 질 것을 믿고 하나님께 맡깁니다.” 저는 순간마다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근데 이 기도는 시편 57편 2절에 다윗의 기도라는 거 아십니까?
 
*시편 57:2,
2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내가 큰소리로 외쳐서 기도하는 이유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하나님이 성취하실 것을 믿습니다. 라고 이야기했던 이 다윗의 기도가 바로 이 기도입니다. 이렇게 기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기도하면서 맡기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하나님께 맡기고 난 뒤에 사랑합니다. 맡기고 나면 내 마음의 분노(忿怒)도, 원망(怨望)도, 좌절(挫折)도 없기 때문에 사랑할 힘이 제 마음속에 생겨납니다. 내 맘대로 해 볼려고 애썼죠. 안 된다는 걸 일찍 파악했습니다. 그걸 붙들면 붙들수록 불안을 붙드는 것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러나 막히면 평안을 얻게 되고, 편안해집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해주신 것들을 순종(順從)할 것이기 때문에 저는 평안(平安)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 반대로 살아가는 인생 비결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렇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목사님 알고 있어요. 맞아요. 알고 있죠. 이거 되게 어려워요 따라 절살 그러니까 맡깁시다. 아는데 안 되는 거 뭐 어쩔 거예요. 아는데 안 되니까. 맡겨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근데 왜 자꾸 덤벼드세요? 쥐면 질수록 뭐만 아빠요? 손만 아픈 거예요. 여러분 인생만 힘든 거예요. 그냥 내려와 계세요.
 
제가 2014년에 안식 월이 주어졌을 때 제 인생에 주어진 한 달을 어떻게 했을까? 하다가 산티아고 순례 길을 갔습니다. 걷기 시작한 첫날 프랑스 쌩장에서 피레네의 산을 넘어 스페인으로 넘어가는 일정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첫 출발이었는데. 산을 오르는 것이고. 익숙치않은 길을 힘들게 걸어야 하는 날이었습니다. 숨이 정말 머리끝까지 차오르고 허벅지가 터지는 것 같았고 몸 땀은 저의 몸을 완전히 그냥 적지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12kg에 배낭을 메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보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날 걸었던 거리가 36Km가 넘었습니다. 첫날 진짜 바보 같은 짓을 했습니다. 그런데 산 중턱에 갔을 때, 하나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숨이 차오르면 멈춰 서는 것이고,. 거기서 호흡을 가다듬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남들보다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을 더 걸었지만 힘들지 않게 나머지의 길을 걸었고, 제가 걸었던 640KM의 구간을 방식으로 걸었습니다. 저는 그때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무거운 짐이 문제가 아니라, 그 짐을 다루는 내 방식의 문제가 있었다. 라는 것입니다. 숨 막힐 것 같은 일이 없는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안 될 때,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 당황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주시는 마음의 상태로, 마음대로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 저는 그 방법이 호흡기도입니다. 마치 멈춰서 숨 쉴 때,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막을 좀 한번 보여주시겠어요. 호흡기도는 이겁니다. 우리 1번부터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호흡기도-
1) 첫 번째 ,힘들 땐 바로 순간에 멈춰 서십죠
2)두 번째, 편안한 자세로 앉거나 기대어 호흡을 가다듬습니다.
3)세 번째,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실 주님께 맡기는 기도를 합니다.
-지금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께 내가 지금 힘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맡깁니다.
4)네 번째, 내게 평정을 주실 때까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호흡하도 계속 기도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다가 보면요. 내 마음이 평안해지고, 내 마음속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채워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음대로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영 가족들의 주소는 반포대로 121번지, 은혜대로 121번지죠? 오늘 제가 새로운 주소 하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마음대로 사는 인생들의 주소 같이 읽어볼까요?
 
-마음대로 사는 인생들의 주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대로(大路) 66-39-27번지”
-이 주소가 여러분들의 인생 주소가 될 수 있게 되길 축복합니다. 마음대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대로, 예수님의 마음대로입니다. 오늘 저는 세 가지로 이야기했습니다. 나머지 자막 보여주시겠습니까?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자 시작,
 
IV. 네 번째, “마음대로 사는 인생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인생입니다.”
-마음대로 사는 인생은 사랑하며 사는 인생입니다. 마음대로 사는 인생은 맡기고 사는 인생입니다. 여러분 이제부터 마음대로 삽시다. 아멘 힘 있게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요약
우리 모두가 천국 가는 그날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대로(大路) 사는 인생’ 우리가 행하는 모든 삶의 영역 속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나타나고 예수님의 마음을 전하는 마음대로(大路) 사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누려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마음대로(大路)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사랑하며, 남은 인생을 살아내야 한다. 언제나 나의 모든 것들을 맡기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릴 수 있는 믿음으로 우리의 남은 인생을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마음대로 사는 인생 되어야 한다.
 
I. 첫 번째, “마음대로 사는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인생입니다.”
II. 두 번째, “마음대로 사는 인생은 사랑하며 사는 인생입니다.”
III. 세 번째, “마음대로 사는 인생은 맡기고 사는 인생입니다.”
IV. 네 번째, “마음대로 사는 인생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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