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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3년 7월 29일)-여름토요성령집회-4.
제목: “다윗의 길, 내려갈 때 보이는 것들”
말씀: 사무엘상 22:1-5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홍성환 목사님-초빙(이천신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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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2:1-5,
1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3 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가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4 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은 다윗이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
5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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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환 목사님-초빙(이천신하교회)
-할렐루야. 감격스러운 자리에 초청해 주시고 말씀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린다. 이 안아주시는 본당에 계신 성도님들은 아마 두 부류로 앉아 계실 것 같아요. 저를 절대 모르는 분들과 저를 아는 분들이 분명히 계실 줄 믿는다. 제가 누군지 알고 말씀을 듣는 게 소화가 잘 될 것 같아서 제가 잠깐 소개를 할게요.
 
저는 2004년도에 부임해서 2012년 11월 8년 8개월 동안 교구 목사로 또 새 가족 3년, 성경 대학 3년, 권사회 2년, 그러다 보니까 하나님이 담임 목사로 또 불러주셔서 지금은 경기도 이천에 있는 이천 신하교회의 담임 목사로 섬기고 있습니다. 저는 목회를 어설픈 창조보다 우리 오 목사님에게 배운 확실한 모방으로 우회를 하고 있고요. 저는 이 모든 강단이 다 두렵고 불편한 자리지만 이 친정 기회에서 설교한다는 게, 여러분들은 편안하게 볼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 어느 자리보다도 불편하고 힘든 자리가 사랑의 교회 자리이다. 이 본당에서 여러분들을 보니까 더 반갑고요. 제가 이렇게 싹 둘러볼 때 아는 분도 몇 분 계신 것 같고 모르는 분이 더 많으신 것 같아요. 근데 하나님께 정말 감사한 건요, 교회를 건축할 때 제가 작정한 헌금이 2012년 11월 모든 것을 딱 마치고 다음에 부임하게 됐어요. 하나도 남김없이 더함도 없이 아니 박수 치라는 건 아니다. 제가 헌금했다니까 좋아하시는 거죠? 그래서 은혜 가운데 제가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가 귀하게 세워지고 친정 교회가 이렇게 든든히 서갈 때에 시집 간 이 목회자는 굉장히 자랑스럽다.
 
사랑의 교회가 이렇게 든든히 서 있는 것만 해도 제가 사랑의 교회 출신이라는 것만 해도 굉장히 뿌듯하고 자랑스럽고요. 이 모든 사랑의 대의 건강성을 닮아서 이 지역에서 열심히 분투하고, 열심히 목숨 걸고 목회를 하고 있다. 고은 시인의 ‘그곳’이라는 시가 있어요. 그 시의 내용은 긴데 그 시의 내용 중에서 이런 내용이 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그 곳을.’ 여러분 등산을 할 때, 가파른 등산을 특별히 하게 될 때, 너무 힘들면 머리를 푹 숙이고 정성만 눈에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도달해야 될 목표만 보이게 되고 나보다 먼저 앞서간, 먼저 올라가는 사람들만 눈에 보이게 되어 있다. 그리고 결국 정상에 도달해보면 올라오면서 본 것이라고 오직 목표 하나밖에 없었어요. 근데 내려갈 때 보는 것들은 올라갈 때 보는 것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많이 보게 된다.
 
여러분 내려갈 때 보게 되는 것이 뭘까요? 산기슭에 피어 있는 무명의 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뭇잎에 있는 그 바람도 눈에 들어오게 되고요. 젊었을 때 보지 못했던 것들을 인생의 황혼이 되고 나이가 들면서 보여주는 것이 있더라는 것이죠. 성공할 때 보지 못했던 것이 사업에 실패하여 많은 사람들이 내 주위를 떠나고 있을 때 또 보이는 것들이 있고요. 건강할 때 보이지 못했던 것들이 병들면서 환복을 입고 수술을 앞두고 있을 때 보이는 것들이 또한 있다. 라는 것이다. 이처럼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것들이 내려갈 때 보이는 것이 너무나도 참으로 많다. 라는 거예요.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내려갈 때 보는 것이 올라갈 때, 보는 것보다 훨씬 귀하고 소중한 경험들이 너무나도 많다. 라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보았던 그것이 우리 인생에 얼마나 소중한 경험이 되기도 합니까? 여러분 만약에 내가 지금 내리막길로 걷고 있다면 오늘 내가 지금 어딘가를 오르고 있지 않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오늘도 내가 내려가고 있다면 어쩌면 아주 소중한 것을 보기 위함일 수 있어요.
 
오늘 본문에 보면요 내려갈 때 보는 것을 아주 소중히 여김으로 인생의 역전을 경험한 사람이 나온다. 그가 누굽니까? 오늘 본문에 이 다윗을 이 다윗이 한때 잘 나갔다. 거침없이 올라갔다. 그는 성장 가도에 올랐었어요. 그는 청년회 때 블레셋의 이 골리앗도 쓰러뜨렸고요. 그 일로 인해서 많은 백성들에게 칭송과 환영을 받았고요. 심지어 당시에 왕이었던 사울보다 훨씬 더 큰 환영을 받았다. 그 순간부토 사울은 그를 주목하여 보죠. 그리고 결국 이스라엘의 거대한 대국을 이루기도 했다.
 
여러분 근데 그랬던 그가 평생을 왕이 될 때까지 오르막길만 걸었을까요?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시는가? 다윗이 항상 승선 가도만 걷고 성공의 길만 걸었을까요? 그렇지 않았다. 라는 것이죠. 그가 왕이 될 때까지 걸었던 길은 심한 내리막길이었어요. 절벽같이 거친 길을 그는 마다하지 않고 걸어야 했다. 다윗의 인생으로 보면 그 올라가는 길은 아주 잠깐이었어요. 사울을 피해 도망자의 삶을 10년을 살아야 했다. 그 길은 너무나도, 너무나도 길고 거친 길이었어요. 여러분 이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도망간 10년의 경로를 여러분 다 기억하십니까? 여러분 제가 이 사랑의 교회 성경 대학 강사였잖아요. 정말로요 제가 3년 동안 성경 대학을 가르치면서 제 목회의 평생의 기본 의식이 그 3년의 시간이었어요.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도망간 경로를 보면 작게 제가 정리해 보면 라마나욧에 있는 사무엘에게 피신해 간다.
 
여러분, 사무엘이 누굽니까? 사울을 왕으로 기름 부은 자이다. 자신과 사울의 영적인 멘토였다. 적어도 사무엘에게 피하면 사울의 그 추적의 길로부터 피할 줄 알았어요. 보호해 줄 줄 알았어요. 그러나 이 광기 서린 사울을 사무엘도 막지 못했어요. 다윗이 라마나욧에 있다. 라는 말 듣고 사울은 군대를 보내서 그를 잡으러 간다. 자신의 도피처가 드러난 이상 다윗은 그곳에 있을 수가 없었어요. 사무엘도 그를 지켜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가 그다음으로 간 곳이 어디냐 하면 요나단에게 찾아간다. 친구 요나단, “요나단아, 요나단아, 너희 아버지가 왜 나를 죽이려 하느냐? 나는 너희 아버지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 피를 흘리면서 수많은 나라의 정국 전쟁의 대승을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에게 들렸는데 왜 어찌하여 왜 나를 죽이려 하느냐?” 나와 아버지 사이에 중재를 해달라고 요청을 한다. 그러자 요나단이 미안하다고 얘기를 하죠. 그러면서 아버지와 식탁의 자리에서 이 다윗에 대한 변호를 하고 그의 억울함에 대해서 호소를 한다. 그러자 이 광기 이미 어린 이 사울은 창을 던지면서 이 미천한 계집에 소생아! 하고 그러면서 그를 죽으라고 벽에 박아 죽이려고 긴 창을 던진다. 요나단은 가까스로 그 창을 피하게 되죠. 그럴수록 이 사울은 다윗을 향한 적개심이 더 불타오르듯 더 커져갔다. 이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같은 하늘 아래서 사울과 함께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멀리 멀리 사울을 피해 멀리멀리 가게 된다. 그리고 그가 갖고 선 놉땅의 아이멜렉 땅으로 찾아간다. 근데 거기에도 이미 첩자가 있었어요. 그곳에도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가 결국 가게 된 곳은 어디냐면 같은 사울과 유다 땅 안에서 같이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의 포위망과 그의 첩자들이 곳곳에 깔려 있기 때문에 사울은 아무리 기름진 음식을 먹고 수많은 넓은 영토를 가져도 다윗이 살아있는 한 그는 행복하지 않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 다윗을 추격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이 사울을 피해서 급기야는 그가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간다. 어디입니까? 블레셋으로 간다. 블레셋은 어딥니까? 이스라엘의 적국 아닙니까? 자신과 지금까지 엄청나게 싸워왔던 나라가 불레셋 아닙니까? 지금으로 말하면, 38선을 넘어 북으로 간 거예요. 절대 가면 안 되는 곳을 갔다.
 
그러나 그 블레셋으로 가면 사울의 추격이 더 이상 없을 거로 믿고 그 블레셋으로 가게 된다. 살기 위해서 투항합니다. 망명을 시도할 수밖에 없어요. 블레셋 가드 왕은 그가 다윗인지 몰랐어요. 어찌 감히 다윗이 여기 넘어올 생각을 했겠습니까? 나중에 그가 다윗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에게 위협을 느꼈을 때, 그는 완전히 무장 해제가 된 이상의 상태로 침을 수험에 질질 흘리면서 미친 행세를 한다. 거의 미친놈이었어요.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위협할 수도 가해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고, 무능한 존재이고 정신 이상자이다.’ 살기 위해서, 목숨 연명하기 위해서 그렇게 있어야만 했다. 다윗은 블레셋 가드 왕을 피해서 먼 곳에 있다가 결국 이 블레셋을 탈출하게 된다. 여러분, 결국 이 다윗은 사무엘도, 친구 요나단도, 아이멜렉도, 그 땅 볼레셋도 그를 영원히 감춰주지 못했어요. 그가 결국 선택한 곳은 어딘지 아십니까? 황량한 유대광야였어요. 그 유대광야에서 무수한 세월을 보내야 했으며, 그곳에서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낸다. 그 유대의 광야는 물 한 모금, 풀 지푸라기가 자라지 않는 척박한 죽음의 땅이었다. 유대 땅에서 사울의 칼을 맞아 죽는 것이나 이 광야에 들어가서 굶어 죽고 짐승의 밥이 되는 것이나 죽는 것은 같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다윗은 광야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소중한 것을 보게 된다. 바로 그 광야에서 다윗은 우리가 알고 있는 다윗으로 비쳐지기 시작한다. 여러분 우리도 다윗처럼 내리막길을 만날 때가 있어요. 곤두박질을 칠 때가 있고요. 뜻하지 않는 내 의지와 전혀 상관없는 광야 가운데 거할 때가 있어요. 건강 문제에요,,자녀 문제, 물질 문제, 관계 문제, 부부 간의 문제요.
 
여러분 그 광야 가운데 내가 섰다면, 어느 날 문득 나를 보았는데 내리막길에 내가 차 있다면 여러분 거기서 무엇을 해야 됩니까?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게 뭡니까? 내가 그것을 어떻게 통과해야 됩니까? 여러분 명심하세요. 내가 내려가고 있다면 오늘 내가 있는 것이 광야라면,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이 있어요. 그 볼 수 있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볼 수만 있다면,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그 광야는 절망의 자리가 아니라 바닥을 박차고 다시 오를 수 있는 하나님의 축복의 점프대가 될 줄로 믿는다. 그렇다면 여러분 다윗이 그 거친 내리막길에서 보았던 것이 과연 뭘까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오늘 내리막길을 걷고 있고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는 이 광야 길을 걷고 있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봐야 될까요? 여러분 다윗이 도망 길에서 아까도 말했지만 놉 땅에 아이멜렉 제사장을 만난다. 너무 배가 고프고 쫓기는 신세가 되어서 제상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게 된다. 진설병을 그래서 한참 허겁지겁 먹고 있는 다윗을 향해서 제상에 물어본다. 왜 너는 홀로 있느냐 너와 함께하는 자들이 어디 있냐? 라고 묻게 된다. 그 말을 듣는 다윗은 적지 않은 당황을 하게 된다.. 아직 사울과 자신의 관계를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가 뭐라고 둘러야 되는지 아십니까? “지금 왕의 비밀 명령을 수행하는 중입니다.”라고 한다. 이렇게 거짓말로 둘러댄다. 그렇게 당당했던 다윗이 자신의 처지가 부끄러워서 이 내리막길을 가고 있는 아무도 자신을 따르는 자가 없는,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이 황량한 사막 가운데 있는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이렇게 거짓말로 둘러대게 된다. 이것이 다윗의 길이에요. 그뿐입니까? 여러분, 불레셋 땅에서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다윗이, 막대기 하나와 물맷돌 두 개 가지고도, 전혀 쫄지 않고 그렇게 당당했던 다윗이, 지금은 살겠다고 자신의 생명 연명하겠다고 미친 체하며 침을 수염에 흘리고, 그저적, 그적적 벽에다가 뭔가를 그리는 그런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치욕스럽고 부끄러웠겠습니까? 여러분, 이 길도 다윗의 길이었다. 다윗은 이처럼 내리막길을 하염없이 가다가 문득 평생에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 그게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너무나도 매우 실망스럽고 초라하고 매우 비겁한 자신을 만나게 된 거예요. 내리막길에서 문득 자신 안에 숨어있는 나약하고 비겁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여러분 그 시간은 다윗에게 실패도 패배도 아닌 우리가 아는 다윗으로 만들어지는 위대한 시작이 바로 그 광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여러분 모세도 그런 거 아십니까? 애굽 왕좌에서 바로의 후계자로 그는 천하를 호령했던 왕자로 살다가 애굽 인을 살해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광야로 도망치게 되죠. 거기서 양을 치는 목자가 된다. 여러분 당시 양을 친다는 것은 아주 하루 계급들이고 천한 일이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애굽의 왕자에서 천한 광야의 목자가 되었다. 라는 이 수지 하락을 경험했던 모세 또한 그 광야의 자리가 실패의 자리가 아니었다. 라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알고 있는 모세로 빚어진 자리는 애굽의 왕정이 아니었어요. 오직 나는 없고, 하나님만 있는 광야의 한복판에서, 다윗도 그랬던 것처럼, 모세도 광에서 만들어진 거예요. 아,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라는 시가 있어요. 시라기 보단 수필이다. 굉장히 긴 수필인데 제가 그것을 조금 정리해서 여러분에게 한번 읽어드리도록 하겠다.
 
한번 같이 공감해보세요. 작은 소제목이 ‘왜 나는 조그만 일에 분개를 하는가?’ 제가 읽어드릴게요.
 
“고궁을 거닐며 고대 왕궁의 권력과 부정과 부패를 생각하고 또는 비판하며 역사적 시각을 잔뜩 부풀려 관조하듯 고공을 나은 나는 고궁 근처 식당에서 갈비탕을 먹었는데 갈비탕에 고기는 없고, 기름덩이만 잔뜩 들어있었다. 그래서 식당 주인과 한바탕 실랑이를 했다. 그러면서 문득 갑자기 그런 행동 속에 자신의 매우 옹절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큰 역사를 관조하듯 내려다보면서 단돈 얼마 안 되는 음식 때문에 흥분한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다.”
-그리고 쭉 이어지면서 마지막에 이런 자성의 내용이 있다. 모래야, 나는 얼마만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만큼 작은 존재냐 정말 얼마만큼 나는 작은 자냐, 이런 글귀로 시가 마감이 된다.
 
여러분 다윗도 내리막길에서 이 광야길 가운데서, 이런 심정과 마음으로 시를 쓰게 되는데 그 시가 바로 시편 142편 6절과 7절 말씀이에요. 우리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시편 142:6-7절,
6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
7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다윗은 지금까지 자신이 제일 강한 영웅인 줄 알았어요. 그리고 이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억울하고 비참한 자라고 그는 자기 연민에 빠져 있었다. 그러한 그가 내리막길을 가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다면 나는 그저 자신의 연민과 두려움이라는 옥에 갇혀 있는 아주 가련한 존재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7절에 보니까 다윗은 주요 내 영혼을 옥에서 끌어내달라고 절교를 하게 된다. 여러분 다윗에게도 이런 일이 있었어요. 그가 위대한 성공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는 과정 속에서 이는 그만큼 비천하고 그만큼 가련하고 자기 연민과 자기 두려움에 옥에 갇혀서 시름하고 몸부림치는 시간이 다윗에게 있었다. 라는 것이다. 여러분 한번 물어볼까요?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성군이 되기 위해서 무엇인가 배워야 될 배움의 자리가 있다면, 여러분 그 자리가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골리앗과 싸워 이긴 자리, 수많은 정복 전쟁에서 승리하여 많은 백성들에게 칭송과 칭찬을 받던 자리에서, 그가 왕으로서의 갖추어야 될 리더십을 배웠겠습니까? 아니다. 오늘 이 낮아진 자리였어요. 버림받은 것 같은 이 광야의 자리에서 다윗의 진정한 리더십이 거기서 만들어지게 된다. 이곳에서 다윗은 진짜 나의 숨어 있는 모습, 나의 정직한 모습과 대면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그는 오유일한 구원자 하나님을 그는 찾게 된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진짜로 어쩌면 자신의 진짜의 모습을 대면할 수 있는 이 다윗의 광야와 모세의 광야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여러분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겉으로는 교양 있는 척 한다. 그렇지만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자주 분개고 화를 낸다. 그리고 사소한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작은 이익이 걸린 문제에 숨 걸고 달려든다. 그런 내 자신을 볼 때, 참 초라하고 부끄러운 내 자신을 만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런 모습이 여러분 모습입니까 아닙니까? 전혀 나 같지 않은 모습, 목사로서 장로로서, 순장으로서, 훈련받은 자로서 전혀 나 같지 않은 모습을 일상에서 만나게 될 때 낯설지 않습니까? 여러분, 내 모습이 아니라고 여러분 자신할 수 있습니까? 아니에요. 어쩌면 그것이 나의 정직한 모습일 수 있어요. 내 안에 숨겨 있는 내가 만나야 될 내 진짜 모습이 아마 그 모습일 수 있다. 라는 것이다. 나의 진짜 모습을 볼 줄 알고 인정해야 한다. 여러분 진짜 변화되길 원하십니까? 제가 목회를 하면서 가장 안타까운 분이 교회는 열심히 출석하는데, 삶의 변화가 전혀 없는 분들이에요. 정말 안타까워요. 여러분 우리 교회에서 보면 불교에서 40년을 보살처럼 생활하시던 분이 어느 날 갑자기 진리가 아닌 것 같아서 우리 교회를 찾아와서 말씀을 받아서 신앙생활을 너무 잘해요.
 
이 보살로 이 절에서 부처님을 섬겼던 그 신앙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데, 얼마나 정성스럽게 잘 섬기는지 몰라요. 저를 만나면요 어떻게 인사하는지 아세요? 주지 목사님, 아 나도 모르게, 그 말씀 앞에 얼마나 순전하고요. 지금까지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었는지 날마다, 날마다 말씀 들으면서 울고요. 하루에 한 가지씩 무엇인가를 전하기 위해서 또는 고민을 하고 또는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여러분 정말 신앙인이 되고 싶었어요. 제자 훈련하는 교회로서 이 말씀 앞에서 정말 진정한 변화를 원하십니까? 여러분 그렇다면 여러분의 정직한 모습을 만나야 된다. 내면에 숨겨 있는 낯설지만 익숙하지 않지만 숨기고 싶은 여러분의 모습을 볼 줄 알고,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어 있다. 내 안에 그 모습을 내가 진짜 만나고 내 자신을 인정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겸손해지고요 남을 비난하지 않을 수 있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내려갈 때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경험 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이것이 다윗의 길이에요. 여러분 다윗은 유다 광야에서 아돌람 굴에서 숨어 살게 된다.
 
여러분 이 아들놈 굴에 약 400명이 있었다고 그랬어요. 그들은 사회에 소외된 자들이다. 다윗이 평생 만날 수 없는 자들을, 다윗은 아둘람 굴에서 만나게 되죠. 그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사울의 폭정에 의해서 도망 나온 정치적 망명자들도 있고요. 그리고 빚을 갚지 못해서 함께 살 수 없는 도망자들도 있고요. 그리고 누군가에게 상처받고 원망하고 원통한 자들이 그것에 모여서 서로를 위로하고, 그 가시가 온몸에 있는 자들은 서로 찌르면서, 서로 위로하면서, 함께 아파하면서 고슴도치처럼 살아갔던 것이 이 아돌람 굴이었다. 그들은 세상 사람과 섞여 살 수 없는 사회 부적응 자들이에요. 다윗은 그 아들람 굴에서 가장 낮아진 곳에서, 소위 인생의 패배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그 아둘람 굴에서 그의 왕이 되어 준다. 여러분, 만약 이 다윗이 아둘람 굴에, 이 낮아진 자리의 경험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런 그가 왕이 되었다면 어떤 왕이 됐을까요? 힘이 센 권력자는 될 수 있어도 백성들의 마음을 보듬어주는, 참으로 귀한 성군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다윗은 그렇게 낮은 자리에서 자신보다 훨씬 더 비참하고 그리고 그 억울한 현실을 보면서 그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된다. “나는 더 이상 자신의 연민에 빠져 누군가를 원망하고 분노하는 도망가는 자의 삶을 살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이 자신의 연민과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이끌어내겠다.” 라는 새로운 사명과 꿈을 그 아둘람 굴에서 그는 발견하게 된다. 여러분, 다윗이 후에 유대에서 7년 6개월 동안 왕이 되고, 이스라엘에서 다시 왕으로 등극할 때, 그 초기 정부는, 초기 내각은 이 아돌람에서 만난 사람들 중심으로 초기 내각이 구성되는 거 아십니까? 다윗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영롱한 보석처럼 쓰임 받는 귀한 왕이 될 때까지의 그 리더십의 기초는 이 아둘람 굴이었어요. 자신보다 더 비참한 현실에 처해 있는 그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그 영혼을 향한, 소외된 자들을 향한 그 마음을 하나님이 부어주셨어요. 지금까지 다윗은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살아왔다. 그래서 사울의 진노가 풀리기만 바랬고요. 머리 위에 지나는 재앙이 멈추기만을 바랬어요. 그러나 그는 이제는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명을 따라 살게 된다.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덮고 있는 어둠, 그리고 오늘의 역사의 현실을 겪고 있는 어둠을 몰아내고, 새벽을 깨우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로 그는 아둘람굴에서 하나님 앞에 새로운 꿈과 비전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 결의를 담은 다윗의 유명한 시가 있죠. 시편 57편 7절로 8절 말씀이에요.
 
*시편 57:7-8,
7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 하리이다.
8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그가 예전 사울의 군대 장관으로서 모든 전쟁에서 전승하여 사람들에게 칭송과 영광을 받았을 때 그는 그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될지 몰랐어요. 인생의 방향성을 잃었다. 그러나 내려오는 길에서, 낮은 광야에서 비로소 자신이 누구를 위해 살아야 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되는지, 그는 인생의 주어와 목적어를 발견하게 된다. 여러분, 이것이 다윗의 인생의 길이다. 다윗은 그때부터 더 이상 사울을 향한 치졸한 복수와 이 적개심에 지배를 나가지 않고 살 수 있게 된 것도 그의 사명감 때문에 그랬어요. 그는 10년 동안 사울 향을 피해 다니면서, 사을 향해서 얼마나 상처를 받았으며, 내가 저 사울을 언젠가는 ‘내가 복수하겠다.’ 라는 이 복수심에 그는 휘둘리면서 얼마나 지배를 받았을까요? 그런데 그는 가장 낮은 이 광야의 자리에서, 전혀 소망이 없을 것 같고 다시 기회가 없을 것 같은 그 정박한 이 죽음의 땅에서 비로소 하나님이 주신 이 사명을 발견하고, 더 이상 그 치주는 복수심과 적개심에 그는 휘둘리지 않기로 하나님 앞에 다짐한다. 여러분, 다윗뿐만이 아니었어요. 형들에게 팔려나온 요셉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요셉이 형들을 향한 복수심을 하나님의 구원의 승리로 승화시킬 수 있던 이유도 어디 있습니까? 내가 한민족을 이끌어내겠다는 그 꿈 때문이 아닙니까? 그의 꿈과 비전 때문에 형들을 향한 복수심이 다 사라진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이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라는 것이죠.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세요. 하나님의 사명을 발견한 사람은 내 안에 크고 작은 상처에 휘둘리거나 제한받지 않는다. 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안에 상처와 원망과 원통함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은혜의 보좌에, 기도의 자리에 말씀의 자리에 나가기가 주저한다면, 여러분, 바로 그 실패의 자리에서, 낮은 자리에서, 광야의 자리에서 사명을 발견하시고 사명을 붙들고 죽을 듯이 사명을 이루는 삶을 살아보시기 바란다. 주를 위해서 한 번 죽는 것도 순교지만 주를 위해서 죽을 듯이 살아가는 것도 순교일 줄로 믿는다. 그 사명 붙들고 “하나님 내게 주신 사명을 내가 이루기를 원합니다.” “내가 죽을 듯이 살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사명을 향해서 살아갈 때, 더 이상 우리는 그 상처로 인해 아파할 시간이 없게 되는 것이다.
 
말씀을 정리하겠다. 낮은 곳으로 내려갈 때는요. 좁은 문으로 들어갈 때는요. 때로는 머리를 숙이고 몸을 웅크려야지만 통과하는 문이 있고 통과하는 길이 있다. 그러면 여러분 참 이상한 일이 생긴다. 예전에 그렇게 안 보였던, 보기 힘들었던 하나님이 그 낮은 곳에서 머리를 숙였더니 몸을 웅크렸더니,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잘 보이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여러분 그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다윗은 내려갈 때로 내려간 가장 낮은 광야에서 사명을 붙들었을 때, 그것이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 그곳에서 성소를 삼으신 하나님께, 하나님 앞에 예배와 찬송을 드리게 되는데, 그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에 대한 이 찬송의 시가 시편에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다윗이 잘 나갔을 때, 성공할 때 불렀던 노래보다, 사막에서 광야에서 아무도 없고, 오직 하나님만 있을 때, 나와 하나님만 있을 때, 하나님과 나만 있을 때 하나님을 불렀던 노래, 그 사막에서 성서로 삼으시고 내 예배를 받으셨던 내 눈물을 닦아주셨던, 내 통곡을 들어주셨던, 내 탄원의 노래를 들어주셨던, 그 하나님을 향한 그 노래가 시편에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메시지를 쓴 유진 피터슨이 뭐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광야는 하나님으로 가득하고 광야는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곳이다.”라고 고백한다.
 
여러분, 야의 길을 걸어보셨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있는 곳이 광야이십니까? 바로 내 곁에 주님이 계실 줄로 믿는다. 렇게 안 보이셨던 주님이, 선명하게 눈에 보이실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를 강제적으로 광야로 내몰 때가 있어요. 저는 그것을 하나님의 강제적 은혜라고 저는 말하고 싶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허허 벌판에 우리가 서 있을 때가 있다. 내가 그 광야에서 무엇을 해야 됩니까? 내가 그 광야에 섰을 때 누구를 붙들어야 되는가? 예수님께서 말씀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여러분, 광야에서는 마음이 가난해지고 겸손해져야 된다. 그래야 자신을 만날 수 있고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요 사명을 붙들 수 있게 되는 것이에요. 머리를 들고 마음이 여전히 교만하고 내 마음이 여전히 더 광야 같아지면, 절대 만날 수 없는 것이 내 자신이고 하나님이고 사명이다. 마음이 겸손해지시기 바랍니다. 저희 아버지는 오십에 개척을 하셨어요. 제가 7살 때이다. 형제 중에 제가 막내, 저희 아버님은 늦게 목회를 하시면서 성도들이 뜻하지 않는 고난 가운데 있으면 그 성도들을 향해서 굉장히 마음 아파하셨어요. 제가 어린 나이에도 성도들이 힘들어하고 잠을 못 주무셨던 아버지가 기억이 난다. 근데 우리 아버지가 했던 영혼이 지금도 기억난다. 성도들의 고통은 깨달음은 끝이 난다. 고 하나님이 나를 왜 광야 학교에 왜 나를 입소시켰는지, 그 하나님의 의미와 하나님이 내게 고난 준 이유를 내가 알고, 하나님을 만나고, 내 자신을 만나게 되면 그 고난은 끝이 난다. 왜 고난이 끝이 안 나고 왜 내 인생의 내리막길이, 이 광야길이 그렇게 길어지는지 아십니까?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자가 깨달을 수 있습니까? 광야를 만나면 좁은 길을 만나면, 무조건 머리를 숙이고 몸을 움츠려야 한다. 마음이 겸손해지고 마음이 가난해지면,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이 고통 가운데 하나님의 교훈을 깨닫게 된다. 오늘의 고난이 그치게 된다. 라는 것이다.
 
여러분 인생에서 광야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다만 그 광야에서 서로 다른 두 가지만 볼 뿐이다.한 사람은 광야에서 텅 빈 들판에 아무것도 못 보는 사람이구요. 또 한 사람은 광야에서 내 자신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이 있죠. 그래서 광야에서 더 마음이 광야처럼 되는 사람이 있고요. 광야에서 뜻밖의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따뜻한 안아주심을 경험하는 사람이 있다. 그 전자가 사울의 인생이고요. 그 후자가 다윗의 인생의 길이다. 여러분 내려갈 때 보이는 것을 잘 봐야 된다. 내려갈 때 보이는 것을 하찮게 여기지 마세요. 성도의 삶의 이유 없는 내리막길이 있다면 하나님이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이 있어요. 들으셔야 돼요. 보셔야 된다. 듣고 보면서 내 마음이 가난해지고 겸손해져야, 여러분 정상에 섰을 때, 높은 곳에 오를 때 보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며 여러분 머리를 들지 마세요. 제가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에게는 우리 모두에게는 언젠가는 내리막길이 다 있어요. 절대 아닐 것 같죠? 내리막길이 있다. 여러분 내려가는 길목에서 보이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시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란다. 내려갈 때 보이는 것들을 제대로 보고 그것을 통해서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을 붙들고 그 사명을 이루는 삶을 죽을 듯이 살아간다면 우리 또한 다윗처럼 회복을 넘어 부흥의 경지에 이르게 될 줄로 믿는다. 여러분이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가 되는 축복을 평생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요약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내 의지와 상관없이 거침없는 내리막길을 걸을 때, 내 죄 때문이라면 그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문제가 없는데 여전히 내가 내리막길을 걷고, 광야 가운데 내가 머물러 있다면, 내려가면서 보아야 될 소중한 것들을 내가 보게 해 주시길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광야에서 하나님의 따뜻한 안아주심을 경험하고, 무엇보다 마음이 겸손해지게 하고, 마음이 가난해지고, 이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의미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내 자신을 발견하게 하고,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여 주시길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영혼의 생수의 강이 터져 나오고, 우리 안에 치밀어 오르는 감격과 감사가 되어 지고, 평생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고, 영원히 잘 되는 복을 누릴 수 있는,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과 칭찬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의 부흥을 경험하는 자가 되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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