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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2년 10월 23일) 제목:"나와 씨름해 주시는 하나님" 말씀: 창세기 32:9~32 대표기도: 김대규 부목사님(1부) 찬양인도: 쉐키나(),영광찬양대 사회: 장광천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ㅡㅡㅡㅡㅡ *창세기 32:9~32, 9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10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11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12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13 야곱이 거기서 밤을 지내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14 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15 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 16 그것을 각각 떼로 나누어 종들의 손에 맡기고 그의 종에게 이르되 나보다 앞서 건너가서 각 떼로 거리를 두게 하라 하고. 17 그가 또 앞선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누구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의 것은 누구의 것이냐 하거든. 18 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하고. 19 그 둘째와 셋째와 각 떼를 따라가는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곧 이같이 그에게 말하고. 20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 21 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32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 ▶저는 인생의 에서가 있다. 오늘 야곱의 이야기를 할 터인데, 에서 때문에 다 두려워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싸워주시는 에서를 극복할 수가 있다. 이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시리즈를 하는데 제 마음에 먼저 와 닿았던 것 하나가 부흥은 어떤 개인의 고립된 사건이 아니다. 개인의 부흥은 공동체의 부흥과 같이 간다. 교회가 부흥되면 개인도 부흥한다. 제 이야기기 아니고 중요한 신앙선배 J.I 패커의 말씀이다. 닥터패커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 함께 보자. *“부흥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주시는 일이요, 동시에 개인의 삶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J.I 패커- -공동체가 새로워지는 것뿐만이 아니라 개인의 삶도 회복되고 부흥되는 것이다. 이게 같이 가는 것이다. 저는 하나님의 교회가 막 부흥할 때, 그 교회 속한 성도들의 비즈니스가 부흥하고 그리고 그 교회 속한 가정이 새로워지고 그리고 예술을 하는 자들은 그림을 잘 그리고, 음악 하는 사람은 음악이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게 되고, 인간의 수많은 한계를 갖고 있는 사람은 한계를 극복하고 학문의 세계에서도 부흥하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이번에 시리즈를 통하여 우리 교회뿐만이 아니라, 여러분 개인도 부흥하는 축복을 주시길 바란다. 아니 우리가 기도하는 이 말씀을 드려야만 하는 것이다. 바울 한 사람의 부흥은 바울 한 사람의 부흥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대 로마제국을 업사이드 하는 역사가 일어났고, 어거스틴은 개인의 부흥은 초대 교부 시대의 부흥을 이끌어냈고, 요한 캘빈을 비롯한 여러 루터의 부흥을 통하여 유럽의 대 부흥이 일어났고, 19세기에 미국의 대 각성을 통하여 대 각성이 일어났을 때에 여러분 단순히 미국 교회의 부흥의 정도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 미국의 팩스 아메리카나, 미국의 국가적인 대 부흥이 일어났던 것이다. 오늘 부흥 시리즈가 나오고 한국이 다시 부흥되게 도와주시며 이 민족이 다시 한 번 세계 선교를 마무리 할 수 있는 능력과 기백을 갖추기를 소원한다. 오늘 첫 번째 주인공은 야곱이다. 이 야곱은 잘 아시는 대로 인생의 고비 고비에 종합 선물세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장자권이 마음에 쓰여 가지고 하나님이 알아서 주실 텐데 이 야곱은 늘 자기가 더 아버지 속이고 형 속이고 어쩔 수 없이 그 라반의 집이라고 야곱의 외삼촌 집으로 도망을 간 것이다. 가서 20년 동안 죽을 고생을 한다. 그러니까 그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였던 것은 개인의 흑 역사이다. 그 흑 역사 때문에 도망을 갔다. 가서 20여 년 동안 죽을 고생을 했다. 중간에 14년 정도를 지나서 돌아올 기회도 있었지만 이십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이 내용은 20년 지나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너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라. 아비의 집으로 돌아가라. 그런데 아브라함 같은 경우는 야곱이 지금 하란이다. 야곱이 20년 동안 있었던 곳이 아브라함은 단순하게 가버렸다. 그런데 야곱은 자기가 똑똑하니까 온갖 우여곡절(迂餘曲折)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20년 동안 이 시간이 걸렸는데 사실 하나님께서 이십년을 기다려주신 것이다. 우리 가운데 수많은 에서가 있고, 우리 가운데 흑 역사가 있는 분들이 오늘 이 20년을 하나님이 기다리셔서 이 시간 이 예배를 참석하시게 하신 줄도 모르겠다. 하나님이 이십년을 기다려주신 것이다. 사랑의 교회 성도들이여, 이 말씀을 듣는 권속들이여, 이 말씀을 듣는 이들이여, 20년 30년에 걸쳐오는 신앙의 가문 중에서도 해결되지 못하는 일이 있거든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해결이 되길 바란다. 정말 진리 지식과 지혜가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 많은 인물들을 앞에 놓고 아브라함이다. 바울이다. 라고 하면 우리는 너무나 먼 당신이다. 아브라함이나 바울은 좀 멀어 보이지만 야곱은 우리와 좀 가까운 당신이다. 왜냐하면 우리와 속성이 좀 비슷하다. 구약에서는 야곱, 신약에서는 베드로, 오늘 야곱을 앞에 놓고 우리가 “사랑하는 성도야, 내가 너를 20년 동안 기다렸다. 이제 회복을 해야 할 때이다.” 라고 하시면 그 마음에 마음을 열기를 바란다. 잘 아시는 대로 야곱은 두 아내와 11명의 자녀가 있었다. 엄청난 수의 염소와 양과 나귀와 소가 있었다. 돈도 많았다. 이제는 두 떼를 이루고 부자를 이루었다. 그런데 그 마음속에는 사라지지 않는 두려움이 있었다. 말씀한 대로 아버지와 형을 속였다. 그래서 그 형을 속이고 난 다음에 자기가 머리를 많이 굴렸다. 어떻게 하면 자기가 살아볼까?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그런 것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잔 머리를 많이 굴렸다. 그래서 잔 머리를 잘 굴리는 것을 우리는 JQ지수가 높다. 라고 할 수 있다. IQ가 아니라 JQ가 발전된 사람이다. 그리고 형을 다시 만나는 과정에도 야곱의 잔꾀가 발달이 되었다. 먼저 종들을 에서에게 보내서 에서으 어떤 상황, 마음, 에서가 나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의 대해서 반응을 떠보려고 했다. 사실은 야곱이 좀 더 성숙했으면 이 문제를 하나님이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터인데 자기 나름대로 삶을 통제하고 살아서인지 그렇게 종들을 보내가지고 그렇게 알아본 것이다. 종들이 돌아와서 무어라고 보고를 하냐면, 오늘 앞에 32장 6절을 보면, *창세기 32:6, 6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사백 명을 거느리고 온다는 것인가? 왜 이렇게 오지? 자기가 잔머리를 굴리니까 나를 죽이려고 사백 명을 데리고 온다고 느끼고 자기의 마음이 떳떳하지 못하니까 오해하게 되는 것이다. 미리 판단하는 것이다. 사람이 두려움이 있고 상처가 있으면 전체를 보는 시각이 약해져서 자기 지레 짐작을 많이 한다. 그래서 삶에 헛발질을 할 때가 많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전심으로 기도하지 못했다. 야곱은 지금 사람에게는 진심, 하나님께는 전심이 아니고, 사람에게는 의심, 하나님께는 무심이었다. 그래서 JQ를 굴려서 하나님께 무심이 발동해서 자기 그 형의 상태를 보기 위해서 자기 무리를 둘로 나누었다. 앞 그룹은 자기가 덜 아끼는 그룹을 먼저 보내고, 뒤 그룹은 자기가 더 좋아하는 그룹을 보낸다. 8절을 보면 나와 있다. *창세기 32:8, 8 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 ‘만약 앞에 있는 그룹을 먼저 치면 그 순간 나는 도망가리라.’ 하는 마음이었다. 대단한 JQ이다. 그런데 야곱을 가나안 땅으로 돌려보내신 분은 누구인가? 9절에 나온다. *창세기 32:9, 9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하나님이 돌아가라고 하셨으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을 하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가지고 하면 되는데 그게 참 안 되는 것이다. 워낙 똑똑하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1절과 2절을 보면 너를 지킨다고 하신다. 옛날에 벧엘에서 혼자 아버지 엄마를 떠났을 때,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보여주신 것처럼, 지금 오늘 돌아갈 때, 천사를 보내어 너를 지키겠다고 하신다. 그것을 ‘마하나임’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군대, 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지킨다고 생각하니까 드디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시작한다. *창세기 32:1~2, 1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I. 회복의 기도는 이렇다 -그래서 야곱이 오늘 9-12절까지 야곱이 기도를 하는데 야곱이 이 기도가 회복의 문을 열게 해 주신다. 우리 모두에게 에서가 있고 우리 모두에게 두려워하는 트라우마가 있다하더라도 이 네 가지 기도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웬만한 사람들에게는 회복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다. *창세기 32:9, 9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야곱의 기도 첫째, 첫째 -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하님이 위대하심,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먼저 초점을 맞췄다. -옛날에는 항상 자기중심이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아주 재미있다. *창세기 32:20-21, 20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 21 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야곱의 기도 둘째, 둘째-자신이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지를 고백하는 인정한다. *창세기 32:10, 10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하나님 앞에서 겸비한 마음이다. *야곱의 기도 셋째, 셋째- 구체적인 기도 제목으로 간구했다. *창세기 32:11, 11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자기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구체적으로 고백한다. *야곱의 기도 넷째, 넷째- 하나님의 약속을 재차 언급했다. *창세기 32:12, 12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 - 이 언약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이삭에게 주었던 것을 리컨펌(재확인)하는 것이다. 이건 좋다. 문제는 이제 시작이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이렇게 기도한 다음에 야곱이 하는 여러 가지 절차를 보면 기도는 이렇게 멋있게 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이게 문제이다. 기도는 하지만,,, II. 기도는 하지만 믿지 않는 아이러니. *창세기 32:13, 13 야곱이 거기서 밤을 지내고 그 소유 중에서 형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너무나 과도한 예물을 가지고 형에서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형 에서가 자기를 칠 것을 연구하는 것이다. 믿기는 믿는데 실제로 안 믿는 이중성이다. 철저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확실한 응답을 믿지 않는 약점이 있는 것이다. 멋진 기도를 드렸지만 훌륭한 기도는 하는데 실제로 그렇지 않다. 이것이 야곱만이 아니라, 우리의 약점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야곱과 공감대가 있는 것이다. 열심히 기도하면 믿어야 되는데 인간적인 불신이 날마다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야곱 같은 경우도 기도는 그렇게 멋지게 했는데 하나님의 권능보다도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는 것이다. 나중에 실제로는 어떻게 되냐면 야곱이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다. 뭐 에서가 야곱이 에서에게 더 잘해준다고 해서 감동받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 33장 4절에 보면, *창세기 33:4 4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내 동생이 왔다고 막 울었다. 이건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20년간 야곱은 속으로 그랬다. 복수의 칼날을 갈았는데 이게 무언가? 했을 것이다. 야곱이 나름 대책을 세운 것이 전혀 계락이 효과가 없었다. 에서를 향하여 580마리의 소떼와 양떼와 이런 것을 갖다가 그 당시로서는 어머한 선물이다. 정주영씨가 1차로 북한에 소를 가지고 갔는데 소떼 500마리를 가지고 갔듯이 그러나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이다. 제가 볼 때 그러면 에서가 왜 400명 데리고 갔느냐고,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는데 나도 이만큼 대단하다. 나도 400명 데리고 올 수 있다. 동생에게 좀 과시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은 순전히 제 생각이다. 그러나 큰 무리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야곱이 인간의 꾀를 쓰고 애쓴다고 했지만 그 애쓴 것이 별로 의미가 없게 된 것이다. 드디어 22절부터 24절까지 III. 구체적 회복의 시작 *창세기 32:22~24,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창세기 32:24a 24a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아마 혼자 남아서 더 깊은 기도를 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하나님과의 일대일 대면을 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야곱과 하나님의 관계는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을 통해 만난 간접적인 만남, 마치 온라인 같은 비대면의 경험이었다. 오늘 드디어 대면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간접경험에서 직접 경허믕ㄹ 하게 되는 것이다. 과거에 20여년 전에 벧엘에서 만났던 하나님은 좀 멀리 계시는 것 같았지만 오늘 만남은 본격적으로 하나님과 대면하여 만난다. 24절 뒤에 홀로 남아가지고 무슨 이야기가 나오냐면,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여러분, 이 내용은 구약에서 너무나도 신비롭고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이 말씀을 우리가 보면서 야곱을 찾아와서 씨름한 사람은 누구인가? 제가 묻겠다. 야곱이 먼저 씨름하자고 했는가? 이분이 먼저 씨름하자고 했는가? 아주 흥미롭다. 이분이다. 이분은 하나님이시다. *창세기 32:30,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호세아 12:3~4, 3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4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야곱에게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신 것이다. 그래서 회복의 시작을 정리를 하자면 회복의 시작은 인간적인 계획과 나름 기도는 하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는 내가 통제하려고 하는 것이다. 똒똑하니까, 그리고 자기가 생각하는 이 400명이 나를 치러온다고 했을 때, 나름대로 자기 프레임이다. 오늘 이런 일이 많다. 유튜브를 보는 대로 여러분의 프레임이 가는 것이다. 지금 유튜브에 나오는 것이 그게 여러분이다. 저는 9.26 섬김의 날이다. 우리 아이들이 주일학교 아이들이 “주 하나님은 크고 능있어 못할 일 전혀없네. !!~~이번주일에 그 노래를 해야지 했다. 유튜브로 켜는 것이 바로 나의 프레임이 된다. 그러니까 4백 명이 나를 칠 것이다. 아닌데, 지레짐작해서 그런 일이 많고, 기도를 하지만 믿지 않는 기도를 하지만 그래도 내 삶을 통제해야 한다는 우리의 성향이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를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회복의 시작과 나름 인간적인 기도와 나를 치료하는 4백 명의 오해 이런 것들을 깨부수고 업그레이드가 되어야 한다. 좀 깊이 들어가면 힘 빼기 작업을 하는 것이다. 여러분 야곱의 문제는 무엇인가? *야곱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여 일하신다는 그 사실을 깊이 믿지 않았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을 하시는 것을 믿지 않은 것이다. 믿으면서도 믿지 않았다. 그의 내면은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시기는 하지만 내가 내 삶을 통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하실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안타깝다. 이런 상황이 되어서 하나님은 너희 진짜 믿음의 용략이 커지고 진짜 믿음의 조상이 되고 진짜 부흥하려면 자기중심적 생각이 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야곱의 기도가 나름 괜찮고 신학적으로 옳았지만 하나님께서 자기의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능력 있게 일하심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깨부수려고 하신다. 자기 나름대로 생각들이 다 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교회가 큰데 부흥을 많이 해서 또 얼마나 사람을 모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도 다 자기 프레임이다. 부흥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은 나중에 나타날 열매이고, 부흥은 내가 깨어지는 것이다. 부흥은 내게 있는 에서를 처리하는 것이다. 부흥은 내가 내 삶을 통제하려고 하는 하나님을 믿지만 기도도 하지만, 그러나 막판에서는 내가 마지막 결론을 내는 이런 스타일을 정리하는 것이 부흥인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 그럴듯하게 교회 내에서도 이런 저런 이야기 하는 자도 있지만 한국교회 내에 진짜 부흥을 맛보는 것은 자기 힘 빼기요, 에서를 처리하는 것이요, 자기 속에 있는 프레임을 처리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도 이런 성향이 있다. 우리 모두의 기도도 괜찮고 신학적으로 자리가 잡히고 신앙적으로 나름대로 흑 역사가 있어서 나름 멋진 기도를 하긴 하는데 하나님께서 내 삶에 실제적으로 일하시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내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이 없다. -옛날에 할머니 권사님들, 교회에 와서 날마다 새벽 기도를 다 기도를 제목제목 다 하고 나서 갈 때는 그 기도제목을 다시 거두어서 보따리에 싸서 가서 고민한다. 우리가 특새에 귀한 분들이 간증을 하고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하면 ‘김권사, 박집사, 장로님이나 기도가 되는 것이지 나에게는 되는 것이 아니야, 라고 한다. 나에게는 역사가 안 일어나!’ 한다. 그러니까 수천 년의 이 이야기나 내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특별히 교회 오래 다닌 사람들 중에 이런 신드롬이 많다. 남은 은혜 받는데 정작 내 스스로는 안 되는 것이다. 주로 언제가 위험하냐면, 3대가 위험하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다. 3대, 그래서 내 의지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별로 기대를 하지 않는다. 기대를 하지만 늘 신앙이 상식선이 된다. 신앙은 상식이 아니다. 상식을 뛰어 넘는 것이다. 신앙은 부흥을 체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이다. 내 상식선에 하나님을 믿으니까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생각도 안 해보고 부흥을 눈도 못 뜨는 것이다. 드디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기도를 하면서도 마음속에 남아 있는 불신앙의 잔재들이 이번에 이 기회를 통하여 청소되기를 소망한다. *창세기 32:25,26,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위골되었다. 골반 뼈가 어긋났다. 야곱이 저항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자 하나님께서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쳐버리신 것이다. 야곱이 인간적으로 저항할 만한 힘의 근원을 차단시켜버리셨다. 그래서 야곱이 할 수 있는 것은 낯선 분 앞에서 엎어져서 그분을 의지 하는 수밖에 없었다. 엎어지면 항복해야 되는데 야곱은 저는 26절에 보면 엎어져놓고 성격 자체가 독특하다. 씨름하는 사람이 매달릴 수밖에 없다.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창세기 32:27a,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창세기 32:28,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이 무언가? 속이는 자, 악착같은 자, 자기의 삶을 자기가 통제하려고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네 이름을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고 하라고 하신다. 이스라엘이 뭐냐고 물어보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엘이 하나님이 승리하신다. 하나님이 싸워주신다. “너희 힘으로 싸우며 인생 살지 말고, 내가 싸워줄게, 네 힘으로 인생 사려고 하지 말고 내가 싸워줄게. 네 인생 네 지팡이로 혼자 살지 말고 나한테 의지 하면 내가 싸워줄게” 그게 이스라엘이라는 뜻이다. 많은 분들이 야곱이 밤새도록 하나님과 싸워서 이겼기 때문에 야곱의 기도의 용사였다고 하지만 사실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했다고 하지만 싸워주시고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한 것이 아니라 야곱과 씨름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나와 씨름해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했다. 야곱의 고집스러운 자기 의와 자기 처신에 대한 과도한 의를 쳐부수기 위해 하나님이 씨름해 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싸우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싸워주시는 인생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져 주신 것이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최고의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져 주신 것이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져 주신 것이다. 실제로 야곱은 하나님을 이기지 못했다. 그의 환도뼈가 위골이 된 다음에야 하나님을 붙잡고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님이 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져 주신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환도 뼈가 완전히 위골이 되어서 내가 무너져서 하나님을 붙잡는 그 순간 세상 사람들이 볼 때믄 실패일지 모르지만 이 시간부터 야곱이 참으로 승리하는 시간이 되는 줄 믿는다. 내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싸워주는 아주 그냥 신비한 인생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오죽하면 바울도 깨닫고 내 능력이 약한 것에서 온다고 했다. 내 능력이 약할 때에 강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누가 싸워준다고? 하나님이 싸워주시며 날마다 힘 빼기 작업을 하시고 오늘 내 인생에 환도 뼈를 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이다. 오늘 이것이 회복의 플렛폼이 되는 것이다. 잔꾀를 부리고 생각을 많이 할 때는 에서의 얼굴이 많이 보였는데, 오늘 이렇게 자기가 위골 되고 난 다음에 드디어 하나님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무얼로 바꾸었냐면 브리엘이다. 맨날 에서 때문에 맨날 흑 역사 때문에 마음도 흑심이었는데 그것을 하나님이 대신 싸워주시니 회복이 되고 도움이 되고 새로워지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흑 역사가 바뀌길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축복했다. *창세기 32:30~31,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그 동안은 간접적으로 만났는데 이제는 직접적으로 대면한다. 비 대면이 아니라 대면하여 만나고 내 삶이 보전 되었다. *창세기 32:31,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참 여기에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야곱이 지금 허벅지로 인해서 위골이 되어서 절었다. 지금 의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영적을 해가 돋는 인생이다. 새로운 차원의 삶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코로나의 강을 지나왔다. 지나오면서 개인적으로 많은 트라우마도 상처도 많고 우리 사회도 수많은 많은 어려움이 생겼다. 이것을 우리 힘으로 해보려고 별짓을 다 한다. 기도도 많이 한다. 그러나 기도하면서도 믿지를 않는 것이다. 이런 속성으로 인해 우리에게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싸워 주심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내가 싸울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싸워주실 인생으로 살도록 만들어 주신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까지 위골된 환도 뼈가 어떤 것들이 있는가? 우리의 삶의 역사에 우리를 다리 절게 하신 하나님의 강력하게 인도하심이 있는 것이다. 믿는 가족에게 배신당해서 가족의 다리를 절게 할 수도 있고, 남보다 공부를 많이 못해서 우리의 어떤 지성의 다리가 절개 된 것도 있고, 육신의 질병 때문에 다리를 절게 되는 일도 있고 사업의 실패로 다리를 절게 될 수도 있고, 심리적으로 다리를 다칠 수도 있고, 과거의 상처로 다리를 절게 되는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다리를 절게 될 때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싸워주심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겉으로 볼 때는 이제 지팡이를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되었지만 겉으로 볼 때는 내 힘으로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지팡이를 의지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이 싸워주시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기도의 제목들과 두려움을 갖게 하는 것들을 주님께서 브니엘로 만들어 주신다. 브니엘을 지날 때 해가 돋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서 새로운 삶이 열렸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 인생의 다리를 절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주시길 주님이 나와 싸워주시면 더 이상 에서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인생에 해가 돋을 것이다. 이것이 부흥의 시작이다. Oh- I could not live without Him.!!~~ ♣요약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의심하는 나를 찾아오셔서 독대하여 주실 때,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으로 불신앙의 허벅지 환도 뼈를 깨뜨려 주시길 간구하며 내 인생에도 회복과 부흥의 창문을 활짝 열어주시길 소원해야 한다. -야곱은 형의 위협에 직면하여 겸손히 하나님께 구원에 대해 간구하였다. 야곱은 욕심도 많고 경쟁심도 많아 얻고자 하는 바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는 치열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는 지금 겸손하게 자신의 구원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를 단련시키며 믿음을 성숙시키고 있는 것이다.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천사와 한 씨름은 영육이 혼연일체가 되어 하나님께 매어달려 결사적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표현한 말이다. 그는 사람으로서 할 일을 모두 끝내고 남은 일, 곧 하나님과 씨름하며 은총을 구하는 일에 열중하였던 것이다. 야곱의 기도 가운데 끈기가 있음을 알려 주는 사실은 야곱의 환도 뼈가 위골된 점에서 알 수 있다. 환도 뼈는 허리 아래 넓적다리 상단에 위치한 뼈를 가리킨다. 환도 뼈가 위골되도록 그는 하나님의 사람을 당해 내지 못했으나 필사적으로 매달려 기도한 결과 마침내 응답을 받았다. 이 개명(改名)은 야곱의 삶과 인격이 근본적으로 변화됨을 의미한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발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이었는데 여기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또는 왕자라는 뜻의 이스라엘로 바뀌었다. 즉,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야곱처럼 우리는 자신을 위한 삶에서,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 변하는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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