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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과 소외, 고통 속에서도 오늘을 살아낸다는 것

고통을 묘사하는 어떤 수사(修辭)도 현실의 무수한 개별적 고통들 앞에서는 무력하다. 나는 고통에 대해 다만 멀리서 응시하는 소설이 좋다. 점점 더 그렇게 되어 간다. 멀리서, 라는 표현은 물론 몹시 주관적인 것이다. 그럴 때 내 거리감각의 기준이 되는 작가는 언제나 존 치버다.

치버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기억한다. 막 첫 책이 나왔을 무렵이다. 그때 나는 계속 소설을 쓰며 살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방송국에서 단막극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고 나에게 새 드라마의 작가가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어쩌다 보니 우리는 각자가 좋아하는 소설과 영화 얘기를 하게 되었다. 혹시 존 치버를 읽어보았느냐고 그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나는 이름은 들었지만 아직 읽어본 적은 없다고 대답했다. 그는 조금 부끄러워하며 고백했다. 언젠가는 꼭 「다리의 천사」 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절판되지 않은 치버의 한국어 번역본은 정우사에서 나온 『주홍빛 이삿짐 트럭』뿐이었다. 간신히 한 권을 구했다. 맨 앞에 실린 단편을 읽은 후 나는 어떤 소설은 한 인간의 내부를 완전히 바꿀 수 있음을 알게 됐다. 거기 실린 단편들을 차례로 다 읽은 후에는 책을 덮고 한동안 가만히 누워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그에게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고 했다. 시간이 없어요. 아마도 나는 더듬더듬 말했을 것이다. 드라마를 쓸 시간이 아니라 다른 것과 나눌 시간이 없는 거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소설이 쓰고 싶어서 죽을 것 같다고도, 내가 「다리의 천사」의 세계에 발끝이라도 닿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소설을 통해서였으면 한다고도 하지 않았다. 그건 굳이 다른 이에게 선언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미국 단편문학의 거장이라 불리는 존 치버는 1912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 태어나 1982년 사망했다. 『팔코너』는 1977년, 그러니까 죽기 다섯 해 전에 쓴 작품으로 그의 네 번째 장편소설이다. 평론가들은 치버의 작품 세계를 도시 교외에 사는 중산층 가족의 평온한 삶과 그 이면을 통해 인간 본성의 이중성을 밝히고 생의 기묘한 아이러니를 포착하고 있다고 요약하곤 한다. 『팔코너』는 그런 일반적인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또 다른 독특한 의미를 품고 있는 소설이다.

소설의 주 무대는 미국 동부의 교도소 팔코너. (그런 이름의 감옥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모른다.) 주인공은 대학교수였던 사내 패러것이다. 그는 구금된 인간이다. 마약중독자로, 형을 살해하고 독방에 수감돼 있다. 감옥 안에서도 그는 여전히 약 중독 상태다. 감옥에 갇힐 때 정신과 전문의들로부터 진단을 받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국가는 패러것에게 매일 몇 알의 약을 지급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은 패러것의 현실인 감옥 안 세계와 과거 기억인 감옥 밖 세계를 오가며 전개된다. 때론 자유인과 비자유인의 접경지대를 지나가기도 한다. 이를테면 아내와 면회장에서 만나는 장면.



(…) 패러것의 얼굴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의 방문을 어쩔 수 없이 수락한 사람처럼 딱딱해져 있었다. “안녕, 여보.” 패러것이 마샤에게 소리쳤다. 마치 기차에서, 배에서, 공항에서, 진입로 입구에서 혹은 여행의 끄트머리에 이르러서 소리치며 인사하듯이 (…) “이혼할 거지?” “지금은 아냐. 현재로선 변호사와 단 한마디도 나누고 싶지 않아.” “이혼은 당신의 특권이야.” “알아.” (…) “여기 있는 사람들은 어때?” “많이 만나진 못해.” “식사 시간에만 보는데 그때도 대화는 금지돼 있어. 알겠지만 나는 F동에 있어. 그곳은 뭐랄까 일종의 잊힌 장소지. 피라네시의 그림에서처럼 말이야. 그래서 그랬는지 지난주 목요일엔 저녁식사도 주지 않더군.” “독방은 어떻게 생겼어?” “가로 십이, 세로 칠 피트 정도야.”(후략)


그는 다른 모든 죄수들처럼 스스로를 ‘형제를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부당하게 갇힌’ 교도소 침대의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마흔여덟 살의 남자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그는 하얀 셔츠를 입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평범한 사내이기도 하다. 팔코너는 일상적인 인권 유린이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는 폐쇄 공간이지만 그 안에서 사람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몰래 고양이를 키우고 라디오를 만들어 다른 교도소의 폭동 소식을 듣고 타인을 질투하거나 연민한다. 패러것의 실존을 위협하는 것은 사랑과 성욕과 고독이며, 감옥 밖의 생활이라고 해서 더 나았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억압받고 소외되고 고통스럽고 우스꽝스럽다. 그럼에도 어쨌거나 오늘을 살아내는 것. 존 치버의 다른 소설 속 인물들이 그러하듯이. 나와 당신이 그러하듯이. 이 지점에서 패러것은 한 명의 구금자를 넘어 인간으로서의 보편성을 가지게 되고, 팔코너는 여간해선 도망갈 데 없는 이 세상 그 자체가 된다.

마지막에, 패러것은 죽은 동료 대신 자루에 담겨 탈옥을 시도한다.


패러것은 (…) 버스에서 인도로 발을 디딜 때 추락에 대한 공포가, 또 그와 비슷한 다른 모든 두려움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패러것은 머리를 높이 쳐들고 등을 꼿꼿이 편 다음 힘차게 걷기 시작했다. 기뻐하라. (…) 마음껏 기뻐하라.


소설은 거기서 끝난다. 패러것의 탈주는 성공했을까, 그렇지 않았을까. 어떻게 되었더라도, 살아 있는 한 고통은 영원히 그의 곁에 머물 것이다. 그것이 모든 훌륭한 소설들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공통의 진실이다.

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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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수 팔코너는 어떻게 살인자로 전락했을까

♣'팔코너'줄거리

대학교수이자 마약중독자인 에제키엘 패러것. 그는 형을 살해한 죄로 방금 팔코너 교도소에 수감됐다. 이제는 몰락했지만 부유한 미국 상류계급 가문의 차남이던 그는 어떻게 살인자로 전락했는가.

소설 『팔코너』는 겉으로는 부족할 것 없어 보이지만 비정상적이고 비윤리적인 가족관계-배 속의 아들을 낙태시키려고 했으며 본인 자신도 툭하면 자살 소동을 벌이던 아버지, 불 같은 성격에 생활고로 집 앞에 주유기를 설치해 기름을 팔면서도 드레스를 포기하지 못했던 허영심 강한 어머니, 어려서부터 틈만 나면 동생을 죽이려 들었던 알코올중독자 형, 파탄을 눈앞에 둔 결혼생활속에서 균열하는 인간의 정신세계를 그려낸 20세기 걸작의 하나이다. 교도소라는 폐쇄된 공간을 무대로 구금이라는 물리적 고통이 낳은 정신적 소외와 그 절망의 심연 속에서도 새로이 잉태되는 희망과 삶에의 긍정이 아름답고 절제된 언어로 구현된 작품이다.

원제: Falconer

저자: John Cheever

발표: 1977년

분야: 미국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팔코너

옮긴이: 박영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61(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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