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어린 짐승들의 모험

쓰시마 유코의 『웃는 늑대』는 늑대에 대한 여러 문헌을 소개하며 시작된다. 도도하고 날렵한 짐승의 카리스마를 한껏 서술한 후 본격적인 이야기의 무대는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살고 있는 묘지로 옮겨간다. 글의 배경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직후, 일본이다. 묘지에 사는 아버지와 아들은 배가 고프면 새를 잡아 구워 먹고 밤이 되면 낡은 모포 속에서 잠을 청하며 살아간다. 어느 날 아이는 무덤 앞에서 동반자살을 시도한 세 남녀를 발견한다. 불륜 관계인 여자와 화가, 그리고 여자의 남편이다. 아이의 아버지가 경찰에 신고를 한 덕에 죽기 직전의 여자는 가까스로 구출된다. 이 일로 인해 더이상 묘지에서 살 수 없게 된 두 부자는 다른 곳을 떠돌게 되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는 객사하고 만다. 세월이 흐른 후 소년이 된 아이는 무덤가에서 죽은 화가의 아내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녀의 어린 딸과 마주친다. 그렇게 만난 열일곱 살의 소년과 열두 살의 소녀는 무작정 여행을 떠난다. 그들은 서로를 『정글북』에 나오는 ‘아켈라’와 ‘모글리’라 부르기로 약속한다.


이 무렵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내가 여섯 살쯤 되던 해의 겨울이었을 것이다. 나는 한 남자아이와 함께 눈이 펑펑 내리는 언덕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이름이나 얼굴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살이 까무잡잡하고 콧등에 작은 흉터가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어스름해진 저녁 하늘 아래를 종종걸음 치며 걸었다. 그애는 집에 늦게 들어가서 할머니께 혼날 게 분명하다며 걱정스러워했다. 나는 그애에게 어른들이 살지 않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자고 말했다. 그애는 솔깃해했다.

“버스를 타고 한참 가면 어떤 동네가 나오는데 거기 엄청 넓은 풀밭이 있어. 거긴 항상 따뜻해. 나무마다 복숭아랑 앵두(당시 내가 좋아하던 과일이었다)가 주렁주렁 열려 있는데 배가 고프면 맘대로 따 먹으면 돼. 동물들도 되게 많다.”

그애는 정말이냐며 두 눈을 반짝였다. 나는 그애를 더 즐겁게 해주기 위해 덧붙였다.

“그 숲 속에는 너보다 큰 로봇도 있어. 말도 할 줄 안다.”

그애는 로봇을 만나면 하고 싶은 일들을 내게 열심히 설명했다. 나는 뭐든 할 수 있을 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 나서 입김을 토해내던 그애가 갑자기 조금 시무룩해졌다. 넌 여자애라 로봇을 별로 안 좋아할 것 아니냐며, 자기도 뭔가 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난 로봇보단 인형이 좋아.”

우리는 다음 날 여행을 떠나기로 약속했다. 그날 저녁 나는 동네 피아노 학원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선생님이 방문을 두드리더니 누군가 나를 찾아왔다고 말했다. 학원 입구에는 머리 위에 눈이 하얗게 쌓인 그애와, 그애의 할머니가 서 있었다. 그애는 내게 네모난 상자를 내밀었다. 원피스를 입은 마론 인형이 담겨 있었다. 그애의 어깨 너머로 깜깜한 하늘에서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따뜻한 슬리퍼 안의 발가락을 오므렸다. 아까 그애와 했던 약속은 이미 까맣게 잊고 있던 중이었다. 그애는 손을 흔들며 돌아갔다.

다음 날 그애에게 여행을 갈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하는 대신, 풀밭에 대한 이야기를 더 지어내서 들려주었다. 그애는 내가 안 가면 나중에 혼자서라도 가겠다며 기대에 차 있었다. 이사를 떠나온 후에도 종종 나는 그애를 떠올렸다. 그애는 정말 혼자 여행을 떠났을까?

누구나 어릴 적에 『톰 소여의 모험』이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고 한번쯤 모험을 꿈꿔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선뜻 그 꿈을 실행하지 못했던 건 아마 어린 마음에도 현실은 소설과 다르리라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웃는 늑대』 속 ‘아켈라’와 ‘모글리’의 여행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들의 모험은 애초에 ‘풀밭의 낙원’을 꿈꾸며 시작된 것도 아니다. 기차 안에서 원숭이처럼 바글거리는 사람들 속에 끼어 간신히 쪽잠을 자고, 빗물에 젖기도 하며, 극심한 설사와 복통에 시달린다. 여행 도중 그들은 『정글북』에서 이별이 예정되어 있는 ‘아켈라’와 ‘모글리’의 관계를 버리고 ‘카피’와 ‘레미’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바꾸어 부르기로 한다. 지치고 험난한 여행의 끝에 소년은 소녀의 납치범으로 몰려 경찰에 체포된다. 이토록 비극적 결말과 지독하게 고생스러운 여행 과정에도 불구하고 나는 글을 읽는 내내 순수한 어린 짐승들의 유대와 모험을 동경했다. 빗물에 젖은 몸에서 피어오르는 오래된 목욕탕 냄새도, 화장실 앞에서 어린 소녀의 젖은 옷을 꼭 짜주는 소년의 손길도 참 애틋하고 낭만적이었다.

패전 후 일본 사회의 단상과 그외 인간 군상은 이 소설에서 스쳐가는 배경 이상의 인상은 주지 못했다. 다른 설정에 눈을 돌리기에는 ‘아켈라’와 ‘모글리’의 모습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이다. 영롱한 비눗방울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순수보다는, 넘어져 까진 무르팍에서 배어 나오는 붉은 핏방울.

그 비릿한 순수함을 대면하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어쩌면 책을 덮고 난 뒤 한 가지 궁금증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아켈라’와 ‘모글리’는 대체 왜 여행을 시작했던 것일까?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만이 줄 수 있는 아름다움도 있으니까.

전아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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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없는 유괴사건이 시작되는데…

♣'웃는 늑대'줄거리

등단 44년을 맞은 일본의 대표 작가 쓰시마 유코의 『웃는 늑대』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적자생존의 논리만이 적용되는 정글 같은 일본을 그린 소설이다.

일본을 횡단하는 두 소년소녀의 눈을 통해 쓰시마 유코는 전후 일본 사회의 피폐한 풍경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더 나아가 이제는 멸종된 ‘늑대’로 형상화되는 근대 일본이 잃어버린 고고한 무엇에 대한 증언을 시도하고 있다.

2000년 『신초(新潮)』에 연재된 후 출간된 『웃는 늑대』는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쓰시마 유코가 아버지 다자이 오사무가 사망한 패전 직후와 자신이 소녀 시절을 보낸 1960년께, 이렇게 일본의 두 시대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당시 사건들로 이야기를 풀어낸 작품이기 때문이다. 인칭과 화자, 사실과 환상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과감한 서술로 겹겹이 쌓인 죽음과 부조리를 드러내는 『웃는 늑대』는 전대미문의 주제와 방법이라는 호평을 받으며 아사히 신문 주최 오사라기 지로 상을 수상했다.

열일곱 살 미쓰오는 아버지와 묘지에서 노숙하던 어린 시절, 치정 문제로 얽힌 세 남녀의 동반 자살을 목격한다. 소년은 자라서 세 사람 중 하나인 유명 화가의 집을 찾아가고, 그곳에서 열두 살 소녀 유키코를 만난다. 유키코는 밤기차를 타러 떠난다는 미쓰오를 그길로 따라 나서고, 이것은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유괴 사건의 시작이 된다……

원제: 笑いオオカミ

저자: 津島佑子(1947~)

발표: 2000년

분야: 일본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웃는 늑대

옮긴이: 김훈아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60(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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