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저녁기도회(2021년 8월 4일)
제목: "왜 주님은 나병을 만지셨는가?"
말씀: 마가복음 1:40~45
설교자: 윤현수 부목사님
--------------------------------------

 마가복음 1:40~45,
40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42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43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44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
 
▶중학교시절 미술 시간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정물화를 그리는 날이었다. 해바라기를 그리고 있얶는데그림에 문제를 발견하게 되었다. 실제 해바라기 꽃은 매우 밝은 꽃인데 이 그림의 꽃잎은 어둡고 칙칙했다. 마침 옆을 지나가시던 미술 선생님께서 상황을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붓으로 암술머리와 꽃잎 주변 배경을 어두운 색으로 덧칠을 하셨다. 그러자 그림에 해바라기 꽃잎이 환하게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때 예술가의 회화기법과 선생님의 솜씨에 놀랐다. 틀렸고 망쳐버린 것 같은 작품도 선생님 같은 예술가가 덧칠하시면 좋은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혹 지금까지 그려온 내 인생의 그림이 엉망이라 할지라도 만약 위대한 미술가가 붓을 잡고 내 인생의 그림에 덧칠을 하신다면 분명 명작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절망적인 인생 그림을 들고 나아온 나병환자가 있고, 천지를 지으신 예수님이 계시는데 이 두 사람이 만났다. 나병환자는 내가 내 마음대로 열심히 그려왔으나, 탄식어린 인생의 그림을 그려온 우리들의 자화상 같다. 그를 주님이 손을 대어 내밀어 고쳐주신다. 이 말씀 속에 담긴 진리를 해석해 나가면서 주님께서 우리의 인생 그림도 새롭게 변화주시는 은혜가 가득차길 소원한다.
 
오늘 본문 40절을 보자.
*마가복음 1:40,
40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우선 우리말 성경에서 나병이라고 번역된 이 질병은 히브리어로 ‘짜라트’ 헬라어로 ‘에투라’라고 하는 단어이다. 오늘날의 질병인 한센병과 유사해 보이는 부분도 있지만 정확히 같은 질병은 아니다. 그러므로 현대의 관점이 아니라 성경시대에 그리고 성경 자체적으로 어떤 질병이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나병은 성경에서 중요한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 번째, 나병환자는 살아있는 시체와 같다. 민수기 12장에 보면 미디암이 하나님의 종, 모세를 비방하자 나병에 걸렸는데 살이 반이나 썩어 모태로부터 죽어서 나온 자 같다라고 말한다. 나병에 걸리면 살이 썩어간다는 것, 죽어서 나온 자, 즉 송장과 같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나병환자를 살아있는 송장과 같이 여겼다. 나병은 죄와 관련이 있다. 죄와 같다. 민수기 12장에 미디암이 나병에 걸린 것은 하나님의 종을 비방한 죄 때문이었고, 역대하 26장에 보면, 웃시아왕이 이마에 나병이 걸린 사건이 나오는데 이 때 웃시아도 율법을 어기고 성전에서 향로를 들고 분향하다가 나병에 걸렸다. 두 사람 다 죄를 짓자 나병에 걸렸다. 나병환자는 부정한 자이기에 이스라엘 진영에서 추방되어야 했다. 부정함이란 무엇인가? 성경에는 정결법이라고 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길 수 있는 상태와 관련하여 간단히 세 가지 구분이 있다.
❶거룩 -하나님께 속한 것, 하나님께 바쳐진 것.- 거룩한 것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성별된 것, 온전히 바쳐진 것,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담임 목사님을 통하여 ‘온전함을 사모합니다’를 통해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는데, 바로 이 온전함이 거룩함의 속성이요 거룩함의 비결이다. 우리는 모두 온전함을 사모하고 그 온전함의 고봉에 힘써 전력투구 하여 올라감으로써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항상 나아가서 충만한 생명을 누리길 간절히 간구한다.
 
거룩함 외에 부정함이란 상태가 있다.
❷부정함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상태, 이스라엘에서 부정한 자는 추방되게 된다. 이스라엘 진영 광야, 부정의 장소로 부정한 자는 추방된다. 이 거룩함과 부정함의 중간 상태의 정결함이란 상태가 있다.
 
③정결함 –거룩함과 부정함의 중간 상태인 거룩해질 수도 부정해질 수도 있는 그러한 상태이다.
 
이 세 가지 상태에서 부정은 전염성이 있기 때문에 정결한 사람이 부정한 사람과 접촉하면 정결한 사람이 부정해진다. 그리고 부정한 것과 거룩한 것은 절대로 접촉해서는 안 되는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한 하나님의 성소와 이스라엘의 진영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진영 밖으로 추방되어야 했다.
오늘 본문의 나병환자는 레위기 13장과 14장에서 규정하는 대표적인 부정한 자이다. 그래서 나병에 걸리면 이스라엘 진영에서 추방되고 광야에 머물러야 했다.
 
*레위기 13:45~46절에,
45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46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여러분은 하나님의 관계의 측면에서 이 가운데에 어떤 상태에 있는가? 자녀들은 어떤 상태인가? 성경에 따르면 특별히 택하셔서 정결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성별하게 하지 않는 한 모든 인류는 원칙적으로 부정한 상태에 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되고 거룩하게 되는 길을 발견하고 그 길로 나아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전 생애를 통해 그 어떤 문제보다도 중요하고 절박한 문제이다. 오늘 본문도 바로 그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나병의 중요한 특성의 또 한 가지는 나병은 인간의 힘으로 고칠 수 없다.
 
아람 왕이 아람나라에 대장군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달라고 이스라엘 왕에게 편지를 보내자 이스라엘 왕이 ‘내가 하나님이 관대 나병을 고칠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필시 이것을 핑계 삼아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는 이야기에서 볼 때, 성경에서도 나병은 오직 하나님만이 고칠 수 있는 질병이며, 인간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병임을 알 수 있다. 레위기에 나오는 나병에 관한 그 긴 유래는 나병을 진단하고 정결해진 나병환자를 다시 진영에 복귀시키는 절차만 규정되어 있지 나병을 고치는 방법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병환자는 사실상 부정하다는 선언을 받게 되면 언약에서 끊어지는 것을 의미했고 영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사형선고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나병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살아있으나 시체와 같고, 죄의 결과로 발생하였고,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에서 추방되고 사람의 능력으로 고칠 수 없는 나병환자의 모습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과 너무 유사하다. 나병환자는 아담이 범죄 하여 하나님의 낙원에서 추방된 모습을 보여주는 마치 시청각 교재와 같다. 그러므로 나병환자는 구원받기 전애 범죄 한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모든 인류는 죽어가고 있고, 썩어가고 있으며, 하나님의 복과 임재로부터 추방되어 있고,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본문에 나병환자가 우리의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와 같아 보인다. 우리를 대표하여 예수님과 시합하려고 경기장에 오르고 있고 성경저자가 우리에게 그것을 녹화 중계방송을 해주고 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과 경기장에 올라서 어떻게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는지 우리 대표선수로서 그 이기는 장면을 확인하면 우리도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본문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왔다. 40절에 예수님께 와서 이야기를 한다. 정말 주소를 잘 찾아왔다.
 
*마가복음 1:8절에,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성령님은 거룩한 영으로 세례를 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거룩한 영으로 세례를 받으면 모든 병이 씻겨나갈 것이다. 참으로 나병환자는 주소를 잘 찾아왔다. 나병환자는 결사적인 각오로 예수님께 찾아왔다.

*레위기 13:45~46절에,
45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46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나병환자는 자신이 알리기 위해 부정하다고 외쳐야했고 진영밖에 혼자 살아야 했는데 이런 모든 규레를 다 버리고 예수님께 고침 받기위해 주님 앞에 나아왔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사적인 각오로, 주님 앞에 치료받기 위해 왔다. 그리고 나병환자는 오늘 본문에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라고 말하고 있다. 마음을 쏟아 예의를 갖추고 주님 앞에 진지함과 겸손과 경배의 자세로 나와 있다. 그리고 나병환자는 ‘주님은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믿음으로 나아왔다. 나병환자와 같은 우리들, 큰 고통과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아마 이 수여저녁기도회를 듣는 성도님들은 예수님께 나아가는 길이 생명이 길이라는 것을 다 알 것이다. 교구 다락방 순원들 심방을 하면, 다락방에서 예수님께 나가는 길에 거부하겠다는 성도는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렇지만 주님 앞에 나오면서 이 나병환자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죽음의 결사적인 자세가 있는지는 우리 스스로 물어야 한다. 진실 된 겸손의 자세가 주님 앞에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믿음이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성도님들이 욥과 같은 길, 광풍이 일어나는 바다를 건너는 순간의 위태한 분들과 가족, 그리고 친척이 분명히 정상적이지 않는 고통을 겪고 있는 성도들을 만난다. 오늘 나병환자의 모습에서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할 자세가 나타나있다.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주님은 분명히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러한 결사적인 자세와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오는 길이 우리가 은혜 받는 길이요, 회복되는 길이요, 고침을 받는 길이다. 이어지는 본문에서 이러한 나병환자에게 우리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행동을 확인해 보도록 하자.
 
*마가복음 1:41~42절에,
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42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주님은 범죄 한 인류의 자화상인 나병환자에게 분명히 말씀하신다. ‘주님 저를 원하시면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주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그리고 주님께서는 손을 내밀며 그에게 내밀며 깨끗하게 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몇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서두에 말씀드린 구약의 정결 법에 따르면, 나병환자, 부정한 자는 만지만 안 되게 되어있다. 정결한 자가 부정한 자를 만지면 정결한 자가 부정해진다. 그런데 왜 주님은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셨는데, 주님이 부정해 지셔야 하는데 나병환자가 정경하게 되었는가? 왜 하필 주님은 정결법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손을 대어 고칠 수 있었는가? 우선 왜 예수님은 부정해지지 않고 나병환자가 정결해졌는가? 왜 구약의 정결법이 뒤집어지는 일이 발생했는지를 확인해보자. 정결 법을 위반했는데도 부정해질 상황에서 부정해지지 않은 주님의 손은 평범한 인간의 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손이 매우 반복해서 등장하는데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마가복음 1:30~31절에,
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마가복음 9:25~27절에,
25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26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말 못하고 귀신 들린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신다. 이 마가복음에서 질병과 부정과 죽음과 장애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구원을 주시는데 이러한 손이 과연 누구의 손인가? 이 손을 보고 누구의 생각이 나는가? 이것은 바로 구약성경에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바로 여호와의 손의 권능이 예수님께 있다. 예수님의 손은 애굽의 열 가지 심판을 내리시고 바로의 압제에서 초자연적으로 구출해 내셨던 여호와의 강한 손의 능력과 구원을 재현하고 있다.
 
*출애굽기 6:1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신명기 5:15절에,
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바로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셨던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한 권능과 능력을 가지셨고 여호와와 같은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는 구원 주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손이 정결의 관한 율법을 능가하는 손이신 이유를 우리는 알 것 같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셨던 시내 산에서 수여된 율법이 아니라 여호와의 강한 손이었기 때문이다. 율법을 지켜서 노예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의하여 여호와의 강한 손이 역사하사 이스라엘이 죄악 된 구출되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강한 손과 편 팔을 재현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손은 구원 역사에서 율법보다 크신 손이시다. 율법에 앞서 계신 손이시며, 정결 법에 절대 갇힐 수 없는 차원이 다른 권능의 손, 여호와의 손이시다.

이처럼 예수님이 재현하고 계시는 여호와의 손은 구약성경에 여러 구절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구원과 은혜와 자비를 베푸신다. 사무엘상 4장과 5장에서 여호와의 손은 하나님의 백성의 대적을 치시는 손으로 나타나신다. 에스라 7장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손으로 나타나시며, 에스라 8장에서는 자기 백성에게 선을 베푸시는 손으로 여호와의 손이 나타나신다. 시편 10장에서는 가난한 자, 외로운 자를 도우시는 손이 여호와의 손이셨다. 전도서 2장에서는 우리에게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일상의 기쁨의 손이 여호와의 손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사야 14장에서는 여호와의 손이 열방을 점령하시고 통치하시는 전능자의 손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여호와의 손은 하늘을 지으시고 땅을 지으시고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는 창조주의 손으로 나타나신다. 여호와의 이 귀한 역사와 은혜를 묵상하면서 특별히 마음에 가는 부분이 전도서 2장에, 우리에게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일상의 기쁨을 주시는 손이 참으로 감사하고 아름다운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코로나 펜데믹 사태로 인하여 마음껏 먹고 마시고 우리의 일터와 사역현장에서 수고하며 일상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특별히 이 손이 하루 속히 이 대한민국과 온 지구촌을 치료해주시길 간절히 소망한다. 오늘 우리에게도 우리의 부정이 씻겨나가고, 우리의 대적이 쫓겨나가고, 가난과 외로움이 회복되고, 우리의 일상이 회복될 수 있는 비결은 율법과 의식과 제도와 인간의 수단이 아니라 이러한 주님의 손이 우리의 병든 삶의 환부를 만져주실 것이다. 그런데 나병환자가 주님께 여쭙는 질문과 동일한 질문은 마음속에 생긴다. ‘주님 원하신가요? 그 손을 내게 대주시는 것을,,,’ 주님이 과연 우리도 만져주실까? 마가복음을 살펴보면 주님은 본문에 나병환자처럼 주님께 나아가는 모든 사람을 다 만져준다는 것을 우리들은 확신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전능하신 여호와의 권능의 손을 재현하고 계시지만 왜 하필 정결 법을 어기고 손을 대시는 모습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아무에게나 손을 댈 수 없다. 지구상에 수십억명의 인구가 있지만 내 마음대로 가서 손을 펼쳐서 막을 수 있는 이성은 제게는 두 명 밖에 없다. 제 아내와 제 딸이다. 이와 같이 아무나 손대고 만질 수 없다. 우리는 악수할 때도 아무나 악수할 수도 없다. 바로 나의 친구 나의 가족, 나의 친척, 나의 교우들, 좀 더 넓게 정리하자면 아는 사람과 악수를 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손을 대는 것은 이 나병환자와 가족이 되시길, 친구가 되시길 원하신다. 교우가 되시길 원하시고, 한마디로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신다. 특별히 정결 법은 접촉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명령을 부과하고 있기 때문에 나병위에 손을 대는 것은 매우 불쾌 하고, 거리끼는 일이고, 미련한 일이다. 한 마디로 고통스러운 일인데, 주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손을 대셨다고 하는 것은 주님은 매우 깊은 관계성을 형성하시기를 원하셨고, 본인이 불쾌함과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그와 관계하고 싶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손 대심은 바로 피조물의 고통 속에 창조주 하나님의 손을 재현하시는 주님이 참여하시겠다는 표시이다. 나병환자의 고통은 전혀 관계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거기 함께하고 나병환자를 위해서 함께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 이후가 무엇인가? 이러한 관여와 관계 맺음은 주님의 사랑 때문에 발생했다. 오늘 본문에 불쌍히 여기사~라고 하는 단어가 나온다. 불쌍히 여기사, 헬라어 동사는 스플랑 크니스 페이스라고 하는 단어이다. 우리 한국식으로 번역을 하자면, 애간장을 태우는 자비와 사랑의 마음을 의미한다. 바로 우리 주님의 목자의 심정을 이야기는 단어가 바로 이 단어이다. 주님의 사랑의 마음, 목자의 심정 때문에 부정한 자에게 손을 내미셨다. 주님은 기독교적인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계신다. 기독교적, 주님의 사랑은 함께함과 희생을 동반하는 사랑이라고 보여주신다. 이렇게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고 그를 사랑하신 것은 더 큰 사랑, 더 큰 부정의 손을 대시는 것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마가복음 15:22, 25절에,
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25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십자가형의 특징은 죄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못은 어디에 박는가? 손과 손목에 박는다고 하는데 우리가 요한복음서나 신약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박히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십자가는 이스라엘의 정결법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학자들은 정결법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레위기 16장에 대속 제에 드리는 속죄제와 의식들이 주님의 십자가에서 성취되었다고 해석한다. 총신대 박철현 교수님은 그의 레위기 주석에서 대속제일을 해석하면서 예수님께서 죽으심을 통해서 완전하고 영원한 대속제일 제물이 되셨다고 한다. 레위기 16장에 대속제일은 어떤 날인가? 이스라엘은 성소에 모든 부정을 씻는 날이었다. 그리고 대속제일은 이스라엘 회중의 모든 죄와 부정을 씻는 날이 대속제일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대속제일의 성취로서 모드 택한 받은 백성의 죄악과 부정을 씻는 우주적인 대속제이 제단이요, 모든 부정과 허물을 씻는 우주적 대속제일의 제단이다. 모든 피조 세계의 만백성의 죄와 허물과 부정이 올려 진 그 제단에 우리 주님이 자신의 손을 내어 대시고 그 손이 십자가 제단에 처참하게 못에 박히시면서 결박되신 것은 우리 주님이 그 십자가 제단에 쌓여져 있는 모든 인류의 죄와 부정과 고통과 고난과 질병의 속량에 우리 주님이 손을 대셨다라고 우리는 볼 수 있다. 주님은 손이 고난당하시고 대신에 주님을 영접할 모든 백성들의 부정을 씻어주시고 정결함과 거룩함의 은혜를 주시는 장소가 십자가 제단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나병환자를 만지신 예수님이 그 사건과 패턴이 거의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나병환자를 만지신 것은 바로 십자가 사건이 상징적인 예고편과 같았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손뿐만 아니라 나병환자와 똑같이 되셨다. 나병환자는 부정한 자로서 이스라엘의 진영에서 추방되고 하나님의 언약에서 끊어지고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은 자였는데,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다.
 
마가복음 15:34절에,
34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우리 주님이 나병환자처럼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당하셨다. 그리고 로마시대에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 사람의 이미지는 십자가에 달린 죄수는 송장과 같았다. 신약학자 마틴 렘헬이라고 하는 ‘십자가의 처형’이라고 책에 보면 당시 십자가에 달린 중요한 이미지를 설명하고 있다.

-“독특한 문제는 십자가형의 형태가 매우 다양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범죄자를 산 채로 달아 처형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처형된 자의 시체를 십자가 위에 전시한 것인지의 사이의 구분은 항상 분명하지 않다. 어떠한 경우이든 간에 십자가형은 희생자를 대단히 모욕하는 방식이었다. 세네카에게 있어서 십자가 위에서 겪는 고통과 비결될 수 있는 인생, 그리고 처형될 것으로 유일한 위로를 삼는 인생은 더 이상 생명을 부지할 가치가 없다... 천천히 죽어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생명‘이라고 부를 가차가 없다.”- 마틴 렘엘 –십자가 처형-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나병환자를 다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신다. 자신이 송장과 같이 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고난당한 죄인들을 그대로 취한 모습은 복음서에서 나온다. 무덤가에 사는 광인을 고쳐 주셨는데, 주님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다. 하나님께 버림받았고 송장과 같았던 환자도 주님은 회복시켜 주셨으나, 주님이 하나님께 버림받고 송장과 같이 되셨다. 고난 받은 모든 백성들의 아픔과 질병과 상처를 주님께서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주님은 고난당한 고통을 아신다. 나병환자와 같은 우리가 주님께 탄원할 때 그 고통을 들어주실 것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는 확신하여 주님 앞에 결사적으로 나아와야 한다. 교만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 믿음으로 나아와야 한다.
 
*로마서 8:32절에,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내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요한일서 3:16절에,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에베소서 5:2절에,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고린도후서 5:21절에,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그 사랑이 그 아들과 함께 모든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는 위대한 축복이 경험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은혜를 받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거룩한 하나님이 자녀로서 일평생 하나님께 바쳐져서 사나죽으나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신다.
 
*마가복음 16:14-18절에,
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제자들은 주님을 닮아가고 함께 있고, 고난당한 주님의 길을 함께 가고 주님이 하신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평생 설명하는 사람들이 제자들이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셨던 그 사랑, 그리고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며 보여주셨던 그 사랑의 길을 동일하게 걸어가야 할 것이다. 여기서 손을 얹어 병을 고치라고 하시는 말씀이 단순히 손을 얹으라는 그 은혜도 있겠지만, 그러한 의미를 훨씬 초월하는 것이다. 이 복음서 전체에서 우리 예수님이 손으로 행하신 모든 의미의 일을 그 안에 다 담고 그것을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고 제자들에게 위임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이 희생하셨던 것처럼 나의 소유와 시간을 드려야 한다.
 
*갈라디아서 2:20절에,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면 그분의 손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고난의 사명 가운데 하나로 고정되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 손을 대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 못 박인 자만이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이란,
주님의 사랑의 손으로 쓰임 받아 부정한 자에게 손을 대어 온 세상을 거룩하게 회복시키는 자이다. 우리 삶 가운데 항상 있어야 한다.


♣요약
나병환자를 치유하시는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크고 위대한 것인지를 조명하여 주심을 감사하며 우리가 믿음과 진실함과 결사적인 간절함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주님의 사랑과 능력의 손을 통해 거룩하고 정결한 주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우리가 닮아가서 세상의 죄악에서 부정을 깨끗하게 씻기어져서 주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문등병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겸손의 표시이다. 사실 문등 병은 잘 고칠 수 없는 병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엎드리고 무릎을 꿇음으로써 결국 고침을 받은 것이다. 이처럼 어려운 문제는 예수님께 나아와야 해결이 된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이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므로 언제나 그의 뜻은 선하시다.
 









728x9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