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6월 15일)

제목: "여호수아의 삶이 주는 메시지"
말씀: 여호수아 24:29~31
찬양인도: 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장명철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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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24:29~31,
29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30 그들이 그를 그의 기업의 경내 딤낫 세라에 장사하였으니 딤낫 세라는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이었더라.
31 이스라엘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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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견고한 말씀에 의지하며 치유와 응답을 체험하는 수요저녁기도회에 오신 분들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한다. 오늘 우리에게 합당한 말씀을 주실 줄 믿는다. 오늘 본문 여호수아 24장 29-31절까지 말씀을 드리겠다.
 
여러분 이번학기 수요저녁기도회에 설교의 주제가 일정하게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관찰력이 뛰어난 분들은 눈치 빠르게 알 수도 있다. 지난 한 학기 동안 우리는 온전 론의 다섯 가지 영역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말씀을 듣고 있다. 전혀 몰랐다는 분위기인 듯하다.
 
여러분, 온전 론의 다섯 가지 영역을 한 번 해보다.
첫 번째, 사고의 온전함,
두 번째, 감정의 온전함,
세 번째, 의지의 온전함,
네 번째, 행실의 온전함,
다섯 번째, 관계의 온전함.
이 다섯 가지가 온전 론의 영적의지인데 우리의 인격, 우리의 내면과 관계된 부분들이다. 뒤에 두 가지는 행실과 관계는 우리의 삶에 관계된 부분이다. 이 다섯 가지 주제 중에 오늘 설교가 어디에 속하는 것인가? 오늘 설교의 주제는 행실의 온전함이다. 그래서 제가 설교의 제목을 “여호수아의 삶이 주는 메시지”라고 적어보았다. 여러분,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여호수아의 죽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다. 그의 삶이 어떠했는가? 그가 남긴 영향력은 어떠한가? 이런 질문에 우리가 답을 하면서 그가 이 땅 가운데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돌이켜보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제가 지난 5월 초에 장례가 하나 있었다.  제가 우리 교구에 장례가 한 건 있었다. 70세 되신 한 권사님이 소천을 하셨는데 코로나 상황 때문에 제가 직접 심방(尋訪)하지는 못하고 두어 번 전화를 드렸던 그런 권사님이었다. 제가 이분을 살펴보니까 이 권사님이 두 자녀가 있는데 아직 자녀가 결혼을 안 했다. 그래서 ‘이번 장례에는 조문객이 적겠다.’라고 생각을 하고 낮 다락방에 순장님께 부탁을 드렸다. 이런 장례가 있으니 순장님들이 좀 참여해 달라고 요청 드렸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장례식장에 갔는데 깜짝 놀랐다. 너무나 많은 분들이 이미 와계셨다. 먼저는 1권사회, 2권사회, 우리 이 고인 되시는 권사님이 2권사 시절에 임원을 섬기면서 단기선교를 가셨던 함께 하셨던 분들이 와 계시고 우리 권사님이 교구에 순장으로 섬기실 때에 순원으로 함께 했던 여러 분들이 와 계신 것이다. 또 너무나 많은 분들이 와 계심을 보고 제가 위로 예배를 인도했다. 그리고 나서 한 분 한 분이 가족들을 보면서 인사를 나누시는데 이 고인 권사님께서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셨는지 눈에 선했다. 그래서 이 장례식을 바라보면서 ‘한 사람의 일생이 이 죽음의 순간에 이렇게 평가되고 있구나!’ 라고 생각을 해보았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여호수아의 죽음이 등장하고 있다. 여호수아의 죽음은 도대체 우리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는지를 오늘 본문에 발견하는 여호수아의 삶의 흔적들을 살펴보시면서 몇 가지 교훈의 말씀을 나누려고 한다. 먼저 29절 말씀을 한 번 더 보자.
 
*여호수아 24:29,
29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여기에서 여호수아가 어떻게 소개되고 있는가? 여호와의 종이다.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종(從)이다. 이렇게 소개되고 있다. 사실 종이라는 단어는 딱 떼어놓고 보면 그렇게 호감(好感)이 가는 단어는 아니다. 종(從)이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는가? 우리 사극에 등장하는 종, 또는 하인, 서양사에 등장하는 노예(奴隸), 이런 분들의 이미지가 우리 마음속에 떠오를 거라고 생각이 든다. 그런데 우리가 누구의 종으로 사는가? 우리가 과연 누구의 종으로 사는가? 의 질문을 던져본다면, 종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 들어보았는가?
 
어떤 기자가 나사(NASA) ‘미 항공우주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이 기자가 나사에 정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원에게 질문을 했다. “당신은 여기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이 때 경비원이 말하기를 “저는 달의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멋있다!. 반응이 없는 것 같다. 굉장히 멋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이 경비원이 자신 맡고 있는 경비원이라고 하는 직책에 자신의 정체성을 한정한 것이 아니고 그가 속해 있는 나사(NASA)라고 하는 그 기구의 존재 목적이 자신의 정체성을 합치시켰기 때문에 본문에 등장하는 종이라고 하는 말, 여호수아는 누구의 종으로 말하고 있는가? 여호와의 종이다. 여호와는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그분의 종으로 섬긴다면 우리가 그의 종으로 불림을 받는다면, 이보다 큰 영광이 있겠는가? 참 큰 영광 중에 하나가 그분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여호와의 종이라는 호칭이 사실은 모세에 붙여졌던 호칭이다. 
  
*여호수아 1:1,
1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여기 여호수아 1장 1절에서 누구에게 여호와의 종이라고 붙어있는가? 모세이다. 출애굽기의 말씀을 참고해 보면 사람이 친구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모세와 하나님께서 대면하여 말했다. 라고 표현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할 수 없는 친밀한 관계를 허락하신 것이다. 반면에 같은 구절에 여호수아는 어떻게 소개되는가? 모세의 수종자, ‘모세의 수종자 여호수아’ 라고 소개되고 있다. 여러분 여기에 수종자라고 하는 이 단어를 히브리어로 찾아보면 ‘메샤렛’ 단어로 쓰여 있다. 기본적 의미가 ‘섬기는 자’ 라고 하는 의미이다. 쉽게 표현하면 ‘조수’, 우리 어른들이 표현하는 ‘시다’, 이런 의미가 수종자의 의미이다. 우리가 이 수종자라는 단어를 이해하는데 조금 더 도움이 되는 단어의 이야기가 있다. 지난주에 담임 목사님이 설교에서 언급하신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이다. 열왕기하 말씀을 보면 엘리사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한 것이 있다.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엘리사, 라고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여러분, 이게 무슨 의미인가? 엘리야가 손을 닦고, 엘리야가 손을 씻을 때, 그 옆에서 물을 부어주던 섬기는 역할을 하는 ‘엘리사가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호수아는 엘리야 옆에서 종처럼 섬겼다는 이런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처음부터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종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여호와의 종이었던 모세를 섬기는 수종자, 그것이 바로 여호수아 출발점이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여호수아는 그게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여호와의 종’이라고 하는 불리어지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여호와의 종으로 살고 싶은가? 아니면 모세의 수종자로 살고 싶은가? 여호와의 종으로 살고 싶을 것이다. 저도 여호와의 종으로 살고 싶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처음부터 여호와의 종으로 사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처음부터 그렇게 살아내는 삶이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도 여호수아처럼 모세의 수종자로부터 출발해야 되는 것이다.
 
제가 벌써 15년째 사랑의 교회를 섬기고 있다. 세월이 참 빠른 것 같다. 저는 15년간 담임 목사님을 도우면서 담임 목사님의 목회 철학과 사역들을 지켜보고 배우고 있는데 제가 마음에 담고 있는 문장이 하나 있다. 무엇이냐면, ‘목회는 신발 정리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목회는 신발정리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인가? 우리가 지금은 편안하게 신발을 신고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우리의 선배님들이 교회를 섬기실 ‘때, 그 교회는 신발을 벗고 예배당에 들어가는 구조였다. 그래서 예배당에 찾아오시는 많은 분들이 신발을 어수선하게 벗어놓고 예배당에 들어가면 목사님이 그 신발들을 가지런히 정리하면서 예배한 참여한 성도들이 은혜 받도록 기도하시고 섬기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 안에서 훈련된 분들이 이 일을 맡아하면 더 좋은 일이고 목회자로서 말씀과 기도로 더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하는 이 섬김의 원리가 우리의 가정과 일터와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루아침에 여호와의 종으로, 존귀한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다른 사람의 손에 물을 붓는 작은 손이 누군가의 신발을 정리하는 작은 출발에서부터 우리는 실천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작은 일을 감당할 때, 내가 지금 여호와의 사역에, 하나님이 존귀한 사역에 동참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섬길 수만 있다면 우리 모두는 모세의 수종자에서 여호와의 종으로 변화되고 성숙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호수아의 삶이 어떠했기에 변화의 성숙이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우리가 그 이유를 30절 말씀에서 볼 수 있다.
 
*여호수아 24:30,
30 그들이 그를 그의 기업의 경내 딤낫 세라에 장사하였으니 딤낫 세라는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이었더라.
-여러분 이 구절에 두 번 반복되는 단어가 있다. ‘딤낫 세라’라고 ‘하는 지명이 두 번 반복된다. 사사기에 보면 ‘딤낫 헤레스’ 라고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 ‘태양의 지역’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아마도 그 골짜기가 햇볕이 잘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30절에서 님낫 세라는 것에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세 가지로 찾아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딤낫 세라는 여호수아의 기업이었다.
두 번째 딤낫 세라는 여호수아의 매장지였다.
세 번째는 딤낫 세라는 에브라임 산지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성읍이었다.
-여러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여호수아가 어느 지파 사람인가? 에브라임 지파 사람이다. 에브라임 지파, 여호수아가 에브라임 지파를 대표해서 갈렙과 함께 가나안 땅을 정탐(偵探)했다. 40일 동안 정탐했기 때문에 가나안 땅 구석구석 살펴보았을 것이다. 어떤 지역이 사람이 살기에 좋은가, 그렇지 않은가,를 명확하게 분석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호수아를 가나안 정복전쟁(征服 戰爭)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탁월한 리더쉽으로 가나안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 자신이 원하기만 했다면 먼저 좋은 땅을 선택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과연 그랬을까?
 
오늘 본문 다시 보면, 딤낫 세라가 에브라임 산지 가셋은 북쪽에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딤낫 세라가 산지인가? 평지인가? 산지이다. 그렇다면 산지가 살기가 좋았을까? 평지가 살기가 좋았을까? 평지가 좋았을 것이다. 평지에는 물이 흐른다. 평야가 있다. 훨씬 평지가 좋은 곳이다. 게다가 가나안 정복 전쟁 당시에 에브라임 지파의 힘이 컸다. 그리고 제비뽑기를 했는데도 에브라임 지파가 가나안 땅의 중심부를 차지했다. 에브라임 산지에서 서쪽으로 쭈욱 펼쳐진 샤라 평지가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딤낫 세라는 에브라임 지파가 얻었던 그 성읍들의 목록에도 그 이름이 들어가 있지 않는다. 무슨 이야기이냐면, 여호수아가 에브라임 산지, 그것도 불모지(不毛地)였던 땅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 여호수아는 그와 같은 선택을 했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여호수아 17장을 참고해 보아야 한다. 여호수아 17장은 요셉 자손,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가 모세를 찾아온다.
 
*여호수아 17:14-15,
14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찌함이니이까 하니.
15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하니라.
-요셉이 볼 때, 그들에게 땅이 너무 좁다는 것이다. 더 넓은 땅을 달라, 요청을 하고 있다. 그 말을 들은 여호수아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여호수아가 지금 요셉 지파에게 강력한 도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땅이 좁으면 스스로 개척해서 땅을 넓히라.’고 하는 것이다. 이를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은 그렇게 할 만한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이렇게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여호수아 17:16,
16 요셉 자손이 이르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하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주하는 모든 가나안 족속에게는 벧 스안과 그 마을들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다 철 병거가 있나이다 하니.
-여러분 요셉지파가 주장하는 핵심이 무엇인가? 그들이 싸워야 될 상대가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당시는 역사적으로 청동의 시대이기 때문에 전쟁용 무기는 돌과 칼이다. 돌을 매끄럽게 갈아서 전쟁에 썼던 그 시대인 것이다. 그런데 요셉 지파가 상대해야 할 적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철 병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오늘날과 비교하자면, 소총을 들고 싸우는 이스라엘 부대가 전차와 장갑차를 무장한 브리스 족속과 싸워야 되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너무나 게임이 안 되는 말이 안 되는 싸움인 것이다. 바로 이때 여호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호수아 17:17-18,
17여호수아가 다시 요셉의 족속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18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하였더라.
-정말 엄청난 기백이다. 놀라운 사실은 여호수아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에브라임 산지에 딤낫 세라를 개척하라는 것이다. 여호수아 19:50절 말씀을 보면,
 
*여호수아 19:50,
50 곧 여호와의 명령대로 여호수아가 요구한 성읍 에브라임 산지 딤낫 세라를 주매 여호수아가 그 성읍을 건설하고 거기 거주하였더라.
-여러분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여호수아가 딤낫 세라를 그 지역을 자신의 지역을 삼았다. 그 성읍을 건설해서 거주했다. 다시 말해서 여호수아는 말로만 지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직접 그의 삶으로 본을 보여 주었던 리더였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우리 교회 식으로 표현하자면, 여호수아는 행실의 온전함을 가진 지도자였다. 이와 같이 행실의 온전함을 갖춘 오늘 날 우리 교회와 우리 사이에도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든다.
 
※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이 한 분 계신다. 이 분은 제자훈련과 가정교회라고 하는 사역을 통해서 지금도 굉장히 건강한 목회를 잘하고 있는 목회자이시다. 제가 신학교 때부터 목사님을 알고 뵈는데 한 결 같이 여전하게 교회를 섬기시는 분이시다. 제가 한 번은 목사님 담임 하시는 교회에 세미나를 참여한 적이 있다. 그 때에 여러 가지 은혜와 도전을 받았다. 그 중 한 가지 제 마음속에 남는 권면의 말씀이 있었다. ‘목회자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처럼 해봐요 이렇게”...이렇게 목회자가 말할 수 있어야 된다. 라고 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어렸을 때 부른 동요의 한 구절이다. ‘나처럼 해봐요. 이렇게’ 무슨 뜻인가? 목회자가 삶의 본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평신도 사역자들은 자신들이 일을 하는 대로 자신들이 들은 대로 사역하는 것이 아니고 목회자가 보여준 대로, 목회자가 하는 것을 본 그대로 닮아가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이말 맞는 말이다.
 
제가 지난 주일 대면으로 다락방 심방을 했는데 순장님은 9년 전에 저와 함께 제자훈련을 하셨던 분이시다. 그날 다락방 심방을 하면서 식사교제도 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가운데 순원 한 분이 이런 말을 했다. “목사님, 저는 우리 순장님이 너무 좋아요. 왜냐면요, 순장님이 질문을 하실 때, 제가 엉뚱한 대답을 해도 칭찬을 해주시거든요. 그래서 너무 좋아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때 제가 이렇게 답변을 했다. “우리 순장님이 명문 제자 반을 수료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명문 제자 반, 제가 웃자고 한 이야기지만 사실은 굉장히 의미가 있는 말이다. 제가 훈련을 계속 진행하고 있는데, 훈련을 진행하다보면, 목회자의 질문에 아주 시원하게 정답을 하는 훈련생이 있는 반면에 가끔은 핵심을 벗어나서 대답을 하는 분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다그치지 않는다. “집사님, 정말 창의적인 대답을 하시네요. 제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그런 답을 하셨네요.” 이렇게 말하면, 그 말이 칭찬인 듯, 아닌 칭찬 같은 말로 들리게 된다. 그러면 훈련생이 그 말을 듣고 “아, 내가 좀 부족하구나.”를 생각하게 된다. 순장님이 그대로 적용했을 때, 다락방에서 그와 같은 반응이 나온다고 생각되었다. 여러분 우리가 속으로 잘 이해하고 지적으로 삼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득하는 그런 원리들이 오랫동안 기억하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바로 본이 되어서 보여주시는 것이다.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고 한 것을 말로만 지시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을 통해서 딤나 세라를 개척함으로 삶으로 보여준다. 그 사람이 바로 여호수아였다.
 
가끔 우리 교회에 오셔서 설교를 하시는 권성수 목사님이 계시는데, 그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2‘1세기는 실천적 지식인의 시대’이다. 라고 하셨다. 여호수아야 말로 정말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실천적 지식인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분과 저도 여호수아처럼 삶으로 본을 보여주는 21세기의 실천적 지식인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지금까지 여호수아에 대해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요약
모세의 수종자로서 시작한 여호수아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여호와의 종'으로 인정 받은 것처럼 우리도 섬김의 삶을 통해 더욱 삶으로 본을 보이는 행실의 온전함이 되어야 한다. 
 
-요셉은 약 200년 전에 애굽에서 죽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안식을 얻기까지는 자기 뼈를 무덤에 두지 말라고 명하였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요셉의 뼈가 든 관을 애굽에서 가지고 나와 광야를 행군하는 동안 줄곧 운반하였고, 가나안이 완전히 정복될 때까지 자기들 진에 간직하였었다. 이제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뼈를 그의 아버지 야곱이 그에게 주었던 세겜 근처의 땅에 안장시켰다. 아마도 이 장에 나오는 여호수아의 설교는 요셉의 장례식 설교와 자신의 고별 설교가 겸하여진 것일지도 모른다. 여호수아가 죽어 장사되어진다. 그는 여기서 여호와의 종이라고 불리운다. 모세가 죽을 때에 같은 칭호가 주어졌었다. 여호수아의 장지는 '가아스산 북편'으로 알려졌다. '가아스'는 '흔들린다'는 뜻이다. 유대인의 전설에 따르면 여호수아를 묻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그 위대하고 선한 사람의 죽음을 마땅히 애도했어야 하는데 어리석게도 그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꾸짖기 위하여 산이 울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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