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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4월 6일)
제목: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말씀: 야고보서 1:19-27
사회:

설교자: 강경식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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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1:19-27,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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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리서치 회사를 통해서 2020년 전국 성인 남녀 천 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조사했다. 그 결과 한국 교회를 신뢰하지 않느냐는 그 비율이 얼마이냐면 63.9%였다. 반면에 신뢰한다는 응답은 그것에 ½에 미치지 못했다. 일 년 후인 2021년 전국 성인 남녀 천 명을 대상으로 다시 조사를 했다. 한국교회에 대한 조사를 했는데 또한 한국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비율이 76%를 넘었다. 신뢰한다는 응답은 21%에 불과했다. 이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일 년보다 12%나 증가했고, 신뢰한다는 응답의 3배가 넘는 수준으로 조사가 된 것이다. 참고로 신뢰한다는 응답을 개신교인과 비 개신교인을 나누어서 보면 개신교인 중 신뢰한다는 비율은 70%나 되었지만 비 개신교인은 9%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렇게 극명하게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비 개신교인은 한국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설문 조사를 보고 그렇다면 지난 10년간 한국교회에 대한 신뢰의 대한 변화는 어떻게 변화가 되었을까를 궁금하여 살펴보았다. 2010년 조사결과를 보니 한국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 라는 비율이 48.4%에 이르렀다. 신뢰한다는 비율은 17.6%의 비율이었다. 지난 10년간 한국교회의 신뢰도가 점점 떨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왜 이렇게 한국교회가 신뢰가 계속 떨어지는지를 생각해보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가 있을 것 같다. 먼저 역사적 관점에서 믿음의 순도를 통해 그 원인을 생각해 보겠다. 역사적으로 믿음의 순도의 변화가 있어 왔다. 초대 기독교 역사에서 그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초대 기독교 때에는 로마의 박해가 심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신앙생활 하는 사람의 옆에 있거나 예배드리는 사람 주변에 있다가 잘못 걸리면 그곳에서 죽임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믿음 없는 사람은 절대로 믿음 있는 사람 근처에도 얼씬도 못했다. 목숨을 담보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 없으면 할 수 없었다. 왜인가? 목숨은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배드리는 장소에 믿음 없는 사람은 있을 수가 없었고 그 당시에 많은 박해를 피해 발각되면 그 예배 장소가 공동묘지가 되기도 하였다. 그 즉시 처형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박해의 시대에는 교회의 믿음의 순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로마의 역사에서 AD 313년에 보면 밀라노칙령(종교의 자유)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 기독교가 공인이 된다. 그 이후로는 더 이상 박해를 받지 않았다. 그 이후에 약 70년이 지나고 나면 테오도시오스 황제에 의해서 AD 380년에는 로마에 기독교가 국교화가 된다.
 
이제는 전세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는 이교도들이 자기의 종교를 속이면서까지 기독교인이라고 거짓말을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왜 그런 거짓말까지 교회를 들어와야 했냐면 교회를 들어와야 출세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믿음 없는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면서 세상 적으로 보면 교회가 힘이 세지면서 믿음 없는 사람들이 교회에 더 들어오게 된 것인데 이런 것을 통해서 믿음의 순도는 점점 더 떨어지기 시작했다.
 
첫째는 교회의 박해가 심할 때는 오히려 믿음의 순도가 높아졌지만 점점 기도교가 세상에서 인정을 받고 심지어는 당시에는 가장 힘이 센 로마의 국교가 되고 나고부터는 믿음 없는 사람은 다른 종교 믿는 사람들까지도 교회 안에 들어올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그 이익을 얻기 위해서 순수하지 못한 마음으로 기독교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교회의 믿음의 순도는 교회가 세상 적으로 인정을 받으면 받을수록 믿음의 순도는 더욱 떨어지고 그러다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순도와 그 외 숫자가 반비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 날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초대교회만큼 그렇게 박해는 심하지 않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순수하지 못한 동기로 교회에 들어오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예컨대 믿음이 없어도 자기의 사업에 도움이 된다면 교회에 들어오기도 하고 그리고 젊은 사람들은 결혼할 수 있다면 교회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을 한다. 어떻든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교회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그것이 가능하게 된 큰 이유는 초대교회처럼 목숨을 내놓아야 할 만큼 그런 박해가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믿음의 순도는 초대 기독교만큼은 높지는 않다. 그러다보니 믿음 없는 사람들이 점점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되는데 그렇게 됨으로써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가 점점 제대로 세상에서 살아가지 못하는 믿음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본인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면서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점점 추락하기 시작한다. 그런 교회의 이미지 때문에 교회에 들어왔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이미지가 추락하면서 더 이상 교회를 다닐 필요가 없다. 라고 판단하여 믿음 없는 사람들은 점점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은 이러한 세상적인 이미지가 떨어지면 그와 반대로 믿음의 순도는 점점 높아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믿음의 순도가 높아지고 사람들로부터 이제는 더 믿음의 사람들만 남다보니까 그 사람들의 세상적인 삶은 또 많은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의 역학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점점 더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지기 시작한다. 그런 좋은 이미지로 또 믿음 없는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교회에 대한 이미지에 따라서 교회에 믿음 없는 사람들이 더 들어오고 또 그러다가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안 좋아지면 믿음 없는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게 되고 이러한 것이 반복이 되는 것이다. 이러다보니까 믿음의 순도와 세상적인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대한 신뢰성과 이미지에 대한 부분은 믿음에 대한 순도로 이해할 수가 있는데 또 다른 측면에서 한국교회에 대한 이미지의 신뢰도를 생각해볼 수가 있는데 그것은 첫 번째 믿음의 순도에 대한 변화를 이야기했다.
 
두 번째로는 믿음과 행함에 관계에 대한 다른 인식이 부족으로 그로인한 원인이 되어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났다.
사도바울은 믿음을 강조했다. 야고보는 반면에 행동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바울과 야고보는 어떤 대상자들을 듣고 이야기를 한 것인가?
 
먼저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으려 하는 바리새인들이나 이교도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바울은 지금 구원을 얻기 위해서 선을 행하는 사람들, 행위로 구원을 받고자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를 향하여 이야기 하고 있기에 행함이 아닌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인가? 아니면 행함으로 얻는 것인가? 아니면 믿음과 행함 두 가지로 얻는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물음에 답하는 내용이 전도폭발 교과서 250쪽에 나와 있다. 밧줄인가? 실인가? 라는 글의 제목이다. 그 내용이 이러하다. 한 사람이 백 미터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절벽과 절벽 사이를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가고자 한다. 그런데 천 길 낭떠러지 밑에는 바위 조각들이 널려져있다. 그 사람은 지금 수 톤의 무게를 견뎌 낼만한 밧줄이 있는데 그런데 문제는 그가 갖고 있는 밧줄은 오십 미터 밖에 안 된다는데 있다. 제가 만일 그에게 “염려마세요. 여기 오십 미터 정도의 실이 있습니다. 제가 실과 당신의 밧줄 끝을 연결해서 양끝 이 편 저 편에 있는 나무에 묶어서 매어놓고 건너가시면 될 겁니다.”라고 그렇게 제안을 한다면 그 사람은 그 제안에 대해서 어떻게 말을 하겠는가? 물론 거절할 것이다. 왜 그러시죠? 하면서 밧줄을 못 믿으시냐고 물어보는 반면 아니라고 할 것이다. 바로 실을 못 믿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 이야기를 바꾸어서 이제는 이 밧줄이 90미터이고 실이 10미터라고 가정을 해 보겠다. 이제는 십 미터 밖에 안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은 건널 수 없다고 할 것이다. 또 다시 밧줄을 99미터로 늘려서 이야기하고 단지 실이 1미터라고 했을 때, 그래도 그는 건너지 못할 것이다. 실이 10센티미터라고 했을 때도, 그리고 심지어는 1센티미터라고 해도 나머지가 다 밧줄이라고 해도 그는 건저지 못할 것이다. 왜 그런가? 그 실에 1센티미터 때문에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밧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행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실은 우리가 행한 일이라고 가리킬 수 있는데 우리는 이야기에서 무엇을 알 수 있는가?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 조금이라도 들어가는 그 순간 결국은 구원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은 우리의 노력은 구원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구원은 믿음과 행함 두 가지를 가지고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구원을 위해서 자기 행위를 강조하는 사람들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강조했던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만을 강조하였다면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이 야고보는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위선자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으로 얻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선행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님을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기의 삶에 믿음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만큼 그러한 증거도 그리고 행함도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을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의 증거, 행함을 행해야지만 진정한 믿음을 가져야 진정한 성도가 된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믿음 따로 행위 따로가 아니라 진정한 믿음은 행함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음을 확실히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면 지금까지 말씀드린 설교 본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오늘 본문을 말씀을 드리겠다. 본문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앙이 좋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되는데 과연 신앙이 좋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성경 본문은 우리에게 잘 제시해 주고 있다. 보통 신앙이 좋다. 라고 말을 할 때, ‘저 사람은 참 경건하다.’라고 이야기 한다. 그것에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본문 전체를 통해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I. 첫째, 경건한 사람은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와 성내기는 더디 하라.

-신약성경에는 특별히 편지 형식의 말씀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 발신자를 표현할 때에 종이라는 단어가 자주 쓰인다. 본문이 야고보서 1:1절에서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에서처럼 종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야고보가 자신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씀한다. 종은 주인의 뜻에 따라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입장에서 본문을 살펴보면 말하기와 성내기는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이다. 특히 성내는 것은 자기의 감정을 여과 없이 표출하는 것을 말하는데, 종은 주인 앞에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면 우리는 성내기를 더디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살면서 말이 많아지고 성내는 것은 결국 주님보다는 내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에 그렇다. 주님을 성내기와 말하기 대신에 듣기를 속히 하라고 이야기 한다. 듣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우리가 살다보면 어려움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때 급한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보다는 자기 생각과 뜻을 말하는 경우가 많이 생기게 된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럴 때일수록 오히려 사람들 앞에서 말하고 성내기보다는 잠잠히 자신을 돌아보고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함을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를 드러내려 하기 보다는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경청하는 모습이 있기를 원하고 특히 성내기를 더디 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내는 것은 자기를 들어내는 모습 중 가장 필터링이 되지 않는 모습이다. 이러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본문이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주의 말씀을 잠잠히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할 것이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모범이 되는 한 사람이 등장한다. 바로 여러분이 잘 아는 아람 군대 장관 나아만이다. 그는 나병을 고치려고 이스라엘에게 들어오게 되는데, 엘리사가 그에게 처방을 해줄 줄 알고 갔지만 유명한 의사를 소개해 주지도 않고, 그냥 대면도 하지 않고, 사자를 보내서 일곱 번 요단강에 씻으라고 이야기를 하고, 그 전달을 받은 이 나아만 장군은 너무나 자기를 냉대한다고 생각한 나머지 마음이 노하게 되었고 그러한 부분에 대해서 화나서 본국으로 돌아가려다가 자기의 종들의 만류를 받고 그는 다시 한 번 마음을 돌이키게 된다. 그가 서운했던 것은 최소한 엘리사가 자기 환부에 손을 대고 직접 흔들어서 낫게 할 줄을 생각을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 기분이 상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노를 누그려 트리고 엘리사 선지자의 말에 순종함으로써 결국 그는 자기의 나병을 낫게 되었음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우리가 자존심이 상하거나 상식선에서 잘 이해가 안 갈 때 노를 발하는 경우가 많다. 또 불순종하게 될 때, 이는 우리가 이해가 되지 않으면 먼저 불평을 말하고 화를 내는 경우들이 생기게 된다. 그런데 그러한 불평이 생길 때마다 화를 누그려 트리고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말씀에 내 안에 머물고 그 말씀 따라 순종하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이 있다면 먼저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 버리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죄악 된 생각이 있다면 그것을 내쫓아야 한다. 사단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악한 생각을 심어놓는다. 그럴 때 우리는 마음에 죄악 된 생각이 머물지 못하도록 속히 내 보내야 한다. 죄악 된 생각이 우리를 찾아올 수 있지만 방치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을 곱씹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유지할 때에 생명의 말씀이 우리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II. 둘째는 경건한 사람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다.

-본문 23절에 보면,
야고보서 1:23,
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을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라고 말씀한다. 본문에서는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것이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보는 것과 같다. 라고 이야기 한다.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보는 것은 자기 얼굴을 점검하고 기억하기 위함인데 그 목적이 무색하게 거울만 보고 자기의 생긴 얼굴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거울을 보는 것은 의미가 일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주신 것은 이유가 있다. 결국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유익을 주고자 함이다. 그 유익이 무엇인지 신명기에서 설명하고 있다.
 
*신명기 10:13,
13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이것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행복이 찾아올 것임을 약속하신다. 그리고 목자의 심정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는 구절이 또 하나 있다.
 
*신명기 30:11, 14,
11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 이 외에 약속의 말씀이 많다. 결국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라시는 것은 행복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는가? 그것도 행복이다. 경건한 사람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이렇게 해서 행복을 누리게 된다. 그렇지만 그것을 우리가 알고 있음에도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실천이 안 되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잘 되는 것을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다. 잘 될 수밖에 없으니까.
 
▷실천이 잘 안 되는 첫 번 째 그 예가 나온다.
*야고보서 1:26,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혀는 작은 부피를 차지하지만 사람이 실수를 잘 하는 것 중에 하나라고 이야기 한다. 나무를 잘 타는 이 원숭이, 나무에서 잘 떨어지기도 한다. 말을 잘하는 사람일수록 말의 실수가 많다. 그래서 혀에 재갈을 먹여서 조심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쉽게 하는 실수는 비방이 있다. 남의 실수가 너무 잘 보이고 남의 들보는 잘 보이고 나의 들보는 잘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자신은 안 그런 것처럼 남의 단점을 쉽게 이야기하는 것, 이것이 바로 비방인 것이다.
 
▷또한 실천이 잘 안 되는 두 번째 예가 있다.
그게 바로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누구나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현재 남을 돕는 것은 미래의 나를 돕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누구나 어려움이 찾아올 수 있음을 알려주셨다. 나는 안 걸릴 것 같은데, 이미 코비드에 내 주위에서 많이 걸리는 것을 보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누구에게나 어려움이 찾아올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안 그럴 것처럼 남을 돕는 것에 인색하게 되는데 우리도 그 도움을 받아야 할 주인공이 언제든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을 해야 한다. 고아와 과부와 같은 연약한 자를 돕는 것이 곧 나를 돕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주변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도움을 베푸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한다.
 
▷실천이 잘 안 되는 세 번째 예가 있다.
-본문에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야고보서 1:27,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과 타협하고 또 세상살이에 필요한 돈에 의존하게 된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살지만 세상의 흐름 속에 흘러가게 내버려두지 말라고 한다.
 
마태복음 6:25,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왜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가? 돈이 있다면 그런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돈이 있는데 메뉴를 골라야 하나, 그런 걱정을 하는 내용인가? 그렇지 않다. 필요한 이 재물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걱정하는 것이다. 결국 누구를 선택했냐면 하나님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절 앞에 있는 구절을 보면
 
*마태복음 6:24,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라고 이야기를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걱정을 하는 것은 재물이 아닌 하나님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러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장 돈을 걱정하는 것이다.
 
그런 염려를 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공중의 새와 들에 백합화를 먹이시고 입히신다고 강조를 하고 있다. 공중의 새 중에 참새가 있다. 이 참새가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성경 마태복음 10:29, 누가복음 12:6절에서 비교하여 설명하신다.

*마태복음 10:29,

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참새 두 말리를 살 수 있다고 한다.

*누가복음 12:6,
6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참새 다섯 마리를 산다고 한다. 결국은 한 앗사리온을 더 얻기 위해서 참새 한 마리를 덤으로 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참새의 가치가 덤의 가치라는 것을 이야기 한다. 여기서 나온 한 앗사리온은 화폐 단위로는 로마의 동전으로서 한 데나리온의 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 데나리온이 1인이 하루 품삯이라고 하면 예를 들어 하루 8만원이라고 하면, 한 앗사리온은 5000원이다. 이 오천을 가지고 참새 두 마리를 살 수 있고, 그 다음에 만원을 가지고는 참새 5섯 마리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은 이 2500원에 해당하는 것을 덤으로 주느냐 안 주느냐에 따라서 돈을 더 벌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 정도의 가치 참새조차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 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말은 우리가 이 참새들보다 귀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며 너희가 재물을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을 선택했기 때문에 너희들이 당장 돈이 없어서 걱정하는 무엇을 입을지,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마실지의 걱정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기에 그런 염려를 하지 말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이 참새 이야기, 들에 백합화 이야기를 꺼내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선택하신 자는 하나님이 끝까지 책임져 주실 것을 안심 시키신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 돈을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을 암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돈이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를 입히시고 먹을 것을 주실 줄 믿고 끝까지 하나님을 붙드는 믿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정리를 하겠다.
 
오늘 한국교회에 대한 불신이 점점 증가하는 이 흐름은 믿음과 행함에 대한 바른 이해 속에서 해결할 수가 있다. 믿음과 행함은 따로 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에 따른 행동을 열매로 맺게 된다. 행하면서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내 자신을 들어내기 보다는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으로는,,,,
 
첫째,말과 성내는 것은 더디 하고 상대를 존중하는 듣기는 속히 하는 것이며,
둘째, 말씀은 듣는 것으로 멈추지 않고 반드시 행함으로 이어져야 한다.
셋째, 본문에서 설명한 대로 혀를 제갈 물리는 것, 고아와 과부와 같은 약자를 돌보는 것, 자기를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은 우리가 잘 안 되는 것이기에 하나님을 신뢰하며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기도하고 결단을 하는 우리 모두가 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요약
우리의 모든 삶이 주님 앞에서 삶임을 잊지 않고, 내 자신을 들어내기보다는 오직 나의 영원한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들어내는 삶을 살고 말씀을 듣고 있는 사는 삶이 아닌 말씀을 듣고 실천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참 행복을 누려야 한다. 말씀 중에 실천이 안 되는 것이 있을 때 주님을 더욱 붙들어서 말씀을 철저히 실천하는 믿음의 열매를 가져야 하며 말에 신중함으로 어려운 자를 돌아보고 하나님을 더 신뢰함으로 끝까지 세속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의 인생 여정 가운데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우리의 참 주인이신 주님의 종으로서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기는 속히 하고 내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말고 말하기와 성내기기도 더디 하여서 실천하여 본이 되어 경건함을 참 행복을 누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장애와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는 자세와, 성내기를 더디 하는 자세, 더러운 것과 악을 버리는 자세, 도를 행하고 자신을 속이지 않는 자세, 스스로 경건한 체하지 않고 자기 혀를 조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며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자기를 세속에 물들지 않게 돌아보는 자세와 말씀 안에 거하기 위해 온유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생활 자세를 가져야 한다. 말씀의 올바른 실천에 의해서만 성숙한 신앙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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