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1월 26일)
제목: '내 삶의 이유, 부르심'
말씀: 고린도전서 7:22~24
찬양인도: 오준석 전도사님-쉐키나 찬양대
설교자: 김은규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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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7:22~24,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어떤 사람이 집안에 아주 소중하게 여기던 고문서를 진품 명품이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에 가지고 나왔다. 비싼 감정을 기대하면서 소중히 다루었던 그 문서는 다름 아닌 조선 시대의 노비 문서였다고 한다. 물론 노비 문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면 노비의 집안이 아니라 오히려 양반의 집안 가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만약 제가 종이면서 그 노비의 문서를 가지고 있었다면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 얼른 찢어버리거나 불태워 버리거나 별별 짓을 다 하면서 자유를 쫓아갔을 것이다. 과연 우리 중에 누가 종으로 살려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데 오늘 읽은 말씀 성경은 우리에게 ‘여러분은 종입니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주께 속한 자유인입니다.’ 라고 말씀하고 있다. 아니 어떻게 종이면서 자유인이 될 수 있는가? 여러분은 노예가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주인이 그 사람에게 자유 증서를 써 주었을 때에 바로 자유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어떤 돈 많은 사람이 그 노예를 불쌍히 여기고, 그 값을 대신 지불하여주고 그를 풀어 다니게 놓아 줄 때에 바로 자유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이지만 주께 속한 자유인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바쳐 값을 지불하고, 그 사람을 샀기 때문에 바로 그가 종이지만 주께 속한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 노예는 세상 적 신분이 노예일지 모르지만 죄와 종 앞에서 해방된 자유 한 종인 줄 믿는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이다. 반대로 자유인이 어떻게 종이 될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동일하게 그를 값 주고 사셨기 때문에 사회적 신분은 자유인이다. 하지만 영적으로는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이다. 결국 사회적 신분이 자유인이든 종이든 그리스도 안에서는 죄로부터 벗어난 자유인이 되는 것이고 둘 다 그리스도 안에서 붙잡힌바 된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진다는 사실이다. 이 영적 신비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복음이 조선에 처음 들어왔을 때였다. 양반과 머슴의 신분이 분명했던 그러한 계급사회였다. 또한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문화가 팽배했던 그 시절이었다. 교회는 양반과 백정이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었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예배를 드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교회 모양이 어떠했냐면 기역자(ㄱ)였다.
 
목사님은 그 기역자의 꼭지 점 강대상을 세워두고 한 번에는 이쪽을 바라보면서 설교를 하고 또 한 번은 기역자의 이쪽을 바라보면서 설교를 했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서로를 바라볼 수 없도록 칸막이도 설치가 되어 있었다. 그 시절에 김제의 큰 부자 조덕삼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머슴 이자익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김제를 지나가던 케이트 선교사님께서 조덕삼의 집의 마방에 말을 맡기고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가난한 타지에서 애를 쓰면서 희생하고 우리민족, 우리 조선을 사랑해주는 이 선교사님의 모습에 감동을 받은 조덕삼은 사랑채를 내 주면서 예배를 드리게 하였고 그로부터 금산교회가 출발하게 되었다 이 주인 조덕삼은 머슴 이자익을 영특하게 보고 그리고 아들과 함께 공부도 하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머슴임에도 배려를 해주었다. 그런데 몇 년 지나고 난 다음에 주인인 이 조덕삼과 머슴 이작익이 금산교회의 행정과 설교를 함께 맡아보는 영수가 되었고 그리고 금산교회의 장로후보에 함께 오르게 되었다. 신분 질서가 엄격했던 그 시절에 주인과 머슴이 장로 후보에 오른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더 경탄할 일은 무엇이냐면 바로 머슴 이자익이 장로로 선출된 것이다. 지주였던 조덕삼은 장로가 된 이자익이 설교할 기회가 되어질 때에는 교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 설교를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집에서는 머슴 이자익이 조덕삼을 아주 깍듯하게 모시고 섬겼다. 그렇게 시간이 3년이 지난 후 주인 조덕삼은 그제서야 비록 금산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여러분, 사람들마다 신분이 있고 해야 할 역할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양반도 종이 되는 것이고 머슴도 자유인이 된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너무나도 멋지고 아름다운 신앙의 선배들의 모습인줄 믿는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한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았고 세상에서 통용되고 있는 가치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종이 되었다고 한다면 ‘사람에 뜻에 따르는 세상의 종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세상을 거스르는 삶을 살아라.’ 하는 말씀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첫 번째는 열등감(劣等感)을 없애라.
-우리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스스로 비교하고 평가(平價)하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여러분 인사타그램을 하면서 올려놓은 그 장소, 가고 싶으 마음이 들지 않는가? 그걸로 그친다면 다행이다. 안 가게 되면 온 몸이 부스럼이 일어난다면 그건 분명이 열등감이 일어날 것이다. 남들이 먹었다고 자랑해 놓은 것을 나도 꼭 찾아가서 줄을 서서 먹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속이 불이난다. 남들이 간 대학에 내 자식도 가야하고, 남들이 취직한 회사에 나도 사원 증을 목에 걸고 있어야 하며 남들이 몰고 다니는 그 차를 나도 몰아야 열등감에서 해방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 대한민국에 참 많이 있음을 참 많이 보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좋은 대학에 입학한 다음에 교회에 나가겠다고 한다. 이야기를 하면서 교회를 떠난다. 취준생들은 멋진 기업에 취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멋진 기업 취직한 다음에 영광 돌리러 교회 다시 오겠다. 라고 이야기를 한다. 어른이 된 다음에는 경제적 형편이 나아질 때, 신앙생활을 하겠다며 미룬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상관하지 아니하고 그 자리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고 계신다. 라고 하는 사실이다.
 
요셉을 보라. 채색 옷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형들에게 버림받고 팔리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요셉을 부르고 계셨다. 사랑받는 아들의 신분이 이제는 보디발 가문의 집의 종의 신분으로 전락(轉落)하는 그곳에서 요셉을 부르셨고 보디발의 아내에게 숫한 유혹과 죄를 뒤집어쓰는 억울한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은 요셉을 부르셨다. 차디찬 감옥에서 멸시(蔑視)를 당하는 그 현장이 요셉을 부르는 장소였고 꿈을 해석해 주었던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잊어버리고 배신감을 안겨주었던 그곳이 바로 부름심의 장소였다. 동생이었던 자신을 모멸 차게 내다버렸던 형님들을 다시 만나는 그 현장, 얼굴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는 그 형들을 내려다보며 피가 거꾸로 치밀어오를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 자리도 바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자리였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자리는 세상 적으로 보았을 때, 요셉과 같이 끊임없이 열등감 속에 갇힐 수밖에 없는 그러한 처지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실 때가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요셉은 그 신분이 종이었고 환경은 너무나도 비참했지만 그 상황에 그 종의 신분에 얽매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유 했다. 어떻게? 종으로 팔려온 요셉이지만 신뢰를 받아 보디발 집에서 모든 것을 위탁받는 가정 총무로서 삶을 살았다. 보디발 아내의 유혹의 앞에서도 정직과 순결을 지키며 하나님 앞에 자유함을 누렸고 억울하게 죄수가 된 그 감옥에서도 성실과 책임감으로 맡은 일에 충성하는 하나님이 일꾼이 되었다는 것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배신과 울화통이 터지는 형님들과의 다시 만난 그 자리에서도 요셉은 그들의 멱살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두를 감싸 안으며 용서와 화해로 치유했던 것이 바로 요셉이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열등감은, 우리가 처해있는 그 열등감은, 우리가 소속되어져 있는 그 열등감은, 우리의 신분이 상승한다고 하여도 해결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학생들이 열등감이 제일 낮다. 라고 하는 통계를 읽어본 적이 있는가? 좋은 대학을 가고, 부러운 직장에 취직하며, 높은 지위와 명예, 좋은 집과 비싼 차를 소유했다고 해서 우리의 열등감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어떠한 형편에 있는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그 때에 그 시간, 그 자리, 그 상황이 바로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종이라고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고, 자유인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종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부름 받은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때에 우리의 열등감은 해결될 줄 믿는다.
 
암, 사고, 이혼이라는 생각지도 못하는 일이 나에게도 일어나거나 계획하고 추진했던 일들이 도루묵이 되어 지거나 신분과 내 지위가 추락(墜落)하고 명성이 곤두박질하는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내 인생이 망가지고 너무나도 초라한 그러한 인생인 것처럼 보여 진다고 할지라도 그 상황에 세상의 종으로 얽매이지 아니하고, 요셉이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예배 자가 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예배하는 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종으로 걸 맞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두 번째는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
-의미는 두려움의 종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에 두려워하는지 한 번 스스로 질문을 해보라. 우리는 실패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참 크다. 낙오하고 뒤쳐질 것에 대한 두려움, 내 앞에 좋은 기회가 나타났는데 그것을 잡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 내가 올라갈 수 있는 여건이 주워졌는데 미끄러져서 곤두발질 칠 것에 대한 두려움, 그러한 것이 우리 앞에 늘 도사리고 있고 그것을 피해가려고 한다. 이러한 인생의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반대로 나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해주고 성공과 행복을 가져다 줄 것 같은 것을 우리의 주인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내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경계하면서 사람이 만들어내는 문화, 권력, 불의한 일들에 대하여 종이 되지 말라. 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러분은 다니엘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바벨론의 문화에 맞섰던 사람이다. 바벨론은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를 가지고서 다니엘을 기르도록 하였지만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음식과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결단하면서 그것을 거절했다.
 
이는 단순히 바벨론의 음식 문화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왕궁에 설 만한 자들을 이 바벨론에서 선별하고 구별하여 특별 관리를 하는 이 거대 바벨론이 가지고 있는 규례와 법도를 거절한 것이다. 다리오가 왕이 되었을 때, 총리들과 이 고관들이 이 다니엘의 허물을 찾아서 고발을 하려고 했다. 고발할 근거를 찾지 못하자 누구든지 왕 외에 어떤 신에게 그리고 사람에게 머리를 숙이게 되어 진다면 사자 굴에 집어넣게 하는 금령을 만들고 왕의 조서에 도장을 찍도록 했다.
 
하지만 다니엘은 조서에 왕이 도장 찍은 알고서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씩 기도를 했다. 다니엘은 신이 아닌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이 아닌 것에 무릎을 꿇지 않았던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회사마다 회사에 회식 문화가 있다. 학과마다 술 문화가 있다. 사회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그러한 문화가 있다. 마치 법률처럼 지키고 있고 그것을 거스르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일 때가 많다. 그리고 나를 끌어주고 밀어주며 세워줄 내가 잘 보여야 할 라인들이 있다. 내가 성공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리고 더 큰 부와 명예와 권력이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내 앞에 찾아올 때는 권모술수를 써야 할 때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 잠깐만 한 번 눈을 지그시 감아주시면 안 되겠냐’라고 바랄 때도 있다.
 
이러한 우리들을 향하여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두려움의 종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다니엘이 뜻을 정하여 자신이 더럽히지 않겠다고 거절했던 것처럼, 우리도 세상적인 성공에 끌려 다니며 신앙 양심을 저버리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갈 것을 알고도 전에 하던 대로 기도한 것 같이 돈과 권력 명예를 쥔 것처럼 마치 나를 좌지우지 하고 높여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의 거대 신상 앞에 두려워 무릎 꿇지 않고 우리 앞길에 영원한 웨이 메이커(Way Maker)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밖에 신이 없음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2022년도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오래 전에 어떤 목사님께서 들은 이야기이다. 음악을 하시는 집사님이 계셨다. 한국에서도 좋은 대학을 나와 그리고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한국에 들어왔다고 한다. 한국에서 강사자리는 여기 저기 들어와서 열심히 일을 하는 중에 교수 자리가 나왔다. 그 당시에 그 자리에는 돈을 요구했다고 한다. 20년 이상을 교수직을 생각한다면 2년 정도의 월급과 본인이 레슨을 하면서 모아둔 것으로 충분히 갚을 수 있는 금액이었지만 신앙 양심상 사양을 하고 교수가 되지 못했다고 한다. 얼마나 지난 뒤에 또 다시 좋은 자리에 부름이 있었는데 그곳에서도 동일하게 돈을 요구했다고 한다. 얼마나 고민이 되었을까? 첫 번째는 그냥 지나갔는데 두 번째는 어떻게 하겠는가? 여러분이라면,,, 부부가 다시 한 번 손을 맞잡고 기도했다. 그리고 나서 신앙을 지키자며 거절을 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기적과도 같은 일을 펼쳐주시면서 어떤 대학의 교수의 자리에 앉혀 주지시는 않았다. 그렇지 않은 가운데 20여년이 지나고나니 일할 곳도 줄어들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지는 쓸쓸한 결말이었다는 말이다. 참 씁쓸하고 쓸쓸하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분이 계시구나!’ 했다. 하나님은 얼마나 사랑하셨겠나! 하나님은 얼마나 좋아하샸겠는가? 저는 생각했다. 훗날 저도 이런 삶을 살았다는 믿음을 주시길 기도했다. 이 시대 앞에 그렇게 살기는 너무도 힘든 시기이다. 하나님 아버지 뜻을 정하고 거룩하게 지키게 하시고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는 그 앞에서도 전에 하던 대로 신앙양심으로 그 담대함을 저에게도 허락해 주시라고 기도하게 되었다.
 
다니엘에 기도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얻었을까? 바벨론으로 끌려온 이스라엘 사람으로 보여 질 수 있지만 다니엘은 포로로 끌려온 종이 아니라 주님께 부름 받은 자로서 세상의 종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담대한 자유인이었기 때문에 그 두려움과 맞 설수 있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로운 결단과 다짐으로 한 해를 시작했지만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겹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는 것 같고, 나를 삼키려는 파도가 늘 우리 앞에 엄습(掩襲)해 오고 있는 그러한 현장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게 되실 것을 믿으며, 이 세상이 짓누르는 두려움과 맞서 싸워 담대하게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의 자녀가 되기를 간절히 축복한다.
 
비록 신앙 양심을 지킨 결과가 이 땅에서 씁쓸할 때가 있다고 할지라도 나중에 주님 앞에 설 때에 주님, 내 모습 아시지요? 이 세상은 살아주지 않았다 할지라도 ‘주님은 내 삶을 알고 계시지요?’ 라고 담대하게 당당하게 주님 앞에 고백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한다.
 
세상의 종이 되지 말라는 말을 전하다 보니 거절을 강요하는 목사처럼 보이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요셉과 다니엘을 보면 거절한 것도 맞지만 그들은 누가 시켜서 거절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한다. 참 자유자답게 스스로가 선택하고 결정해서 하나님을 섬겼던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자원해서 일하고 자원해서 봉사하는 사람을 우리는 종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다. 자원해서 하는데 어떻게 종이겠는가? 성도들은 그렇기 때문에 종이지만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자들이다. 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제가 토비새를 오면서 주차를 하려는데 빈자리가 있었다. 그런데 그 옆에 아주 비싼 스포츠카가 한 대 있었다. 다른 자리를 찾아야 되나 하다가 작년 연말에 보험을 들면서 외제차 특약보험료를 아주 세게 넣었기에 주차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조금 멀찌감치 주차를 했다. 그리고 뒤를 돌아 나오는데 별로 안 어울리는 스티커가 그 스포츠카 뒤에 붙여 있었다.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With Jesus!’라고 붙여있었다. 요리저리 봐도 그 멋진 스포츠카에 너무나도 안 어울렸다. 하지만 그 성도님은 값비싼 스포츠카를 타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예수님 있는 예수님 때문에 행복하고 그 예수님을 전하고 싶어서 붙여놓았다는 그 마음이 느껴질 수 있었다. 작년 말 수요예배 집회에 많은 성도님들이 올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 집회 이후에 복음을 전함 스티커를 붙이려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때 받은 은혜가 있고 지금까지 나에게 베풀어주신 그 하나님 아버지 은혜가 있기 때문에 내가 선택하여서 그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어야겠다는 것을 자원하여 붙인 것인 줄 믿는다. 어느 날 집을 가는데 좋아하는 국민 경차가 가는 것도 보았다. 가만히 보니 이천 년도의 초반 모델이었던 것 같다. 거기에도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먼저 드는 생각은 “당신은 행복합니까?”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까? 그 스티커로 말미암아 전도가 될까라고 하는 두려움이 먼저 엄습했다. 목사라도 세상적인 풍요와 인본 적 가치관으로 가득 차 있는 이 머리 속에 그냥 굴러 나왔던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그 순간 튀어나오는 대답이 있다. “은규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 라는 마음의 음성이었다. 경차의 차주의 역시 자신의 신분과 처지, 몰고 다니는 그 차종이 어떠하든지를 생각하지 않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감동되어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것이며 그분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선포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걸림돌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에게 깨닫게 해주셨다. 그리고 난 다음에 스티커를 다시 보니 너무나 멋지고 아름답게 보였다. 이것이야말로 참 자유함이고 세상 앞에서 당당한 그리스도의 종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바울은 24절에서 성도라면 자신의 상황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부르심 받은 그대로 하라고 하신다. 
 
내가 처한 신분과 상황 속에서도 어떠하든지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믿고 2022년을 믿고 힘차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1등처럼 보이지만 삼류 같은 인생이 있다. 반대로 삼등처럼 보이지만 일류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1등이 되려고 아등바등 거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속에서 부르받은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삼등이어도 괜찮고, 십 등이어도 괜찮고 하지만 삼류의 삶이 아니라 일류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어지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한다. 


요약
-우리의 세상의 종 된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참 자유 자로 불러주심에 감사하며, 육체적 욕심에 따라 살던 우리의 모든 죄와 과거를 내려놓고, 이제 종이지만 자유인으로 그리스도의 종으로 두 번째 인생을 살아가며 모든 것을 주님께 의뢰하고 믿고 의지하여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열등감이 극복되고, 세상적 두려움을 이길 담대함을 가지고 세상의 논리와 환경에 갇힌 자 되지 않고,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참된 자유함을 누리며 온 전한 예배자로 세워지고 내 삶이 이유를 정확하게 인지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에 납작 엎드리는 삶으로 살아가야 한다. 

-참된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에만 가능하다. 복음 안에서는 종이나 자유자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이 모든 사회적 차별이 극복되고 참된 평등이 회복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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