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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1년 7월 28일) 제목: "예수를 통해 만나를 맛보다" 말씀: 요한복음 6:47~51 설교자: 김은석 부목사님 --------------------------------------------- 요한복음 6:47~51,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 ▶어떤 요리를 드셨나요? 늘 먹던 저녁이라 특별한 것이 없나요? 근래에 먹은 음식 중에 특별한 요리가 무엇인가? 잊을 수 없는 음식일 수 있다. 음식은 참 중요하다. 왜냐하면 음식은 우리의 몸의 중요한 영양소를 공급하는 에너지원이며, 우리의 정서적인 에너지원이 되기 때문이다. 좋은 추억이나 좋은 친구, 좋은 여행에는 항상 좋음 음식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런 것처럼 음식이 정말 중요하다. 최근 저에게 좋은 음식하면 떠오른 분이 한 분이 있다. 그분은 얼마전 작고하신 故 임지호 쉐프라는 분이다. 사람들은 이분을 방락식객이라고 부른다, 그는 잔디나 잡초, 나무의 뿌리, 이끼 등, 자연 그대로 채취를 해서 사람들을 건강하게 할 뿐 아니라, 그들의 텅 빈 마음을 채워주는 요리를 해주셨다. 그분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한 분이 있다. ‘그리움으로 짓고 진심으로 눌러 담아 정성껏 차린 한 상차림, 밥으로 인생을 나누는 참맛’이라고 말했다. 인생의 참맛을 느끼게 하는 이 밥은 맛이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분의 음식을 먹고 싶어 한다. 한 요리 연구가는 이분을 가리켜서 ‘밥그릇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채워주는 자’라고 말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분을 만나고 싶어 하는가? 대화하고, 요리를 먹고 싶어 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부족할 것이 없는 이 세상에서 없는 게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 모두가 채울 수 없는 마음의 허기를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든 우리가 허기를 달랠 수만 있다면, 사람이든 음식이든, 정서적인 만족감을 찾아 나서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주의 사람, 솔로몬은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표현 한다. *전도서 1:8절에 보면, 8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 이 땅에는 만족함이 없다. 아무리 좋은 것을 보아도, 아무리 좋은 것을 들어도, 그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채울 수 없다. 독일 시인 - 칼 부세 (Carl Busse 1872∼1918)는 ‘행복이란 산 머너에 있는 것이라서 평생을 찾아다닐지라도 손에 쥘 수 없는 것이며, 그런 행복을 찾아다니는 존재가 우리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분명히 믿는다. 우리 하나님 안에 참 만족이 있다는 것을,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텅빈 영혼과 마음을 채워주시길 간절히 소원한다. 오늘 본문은 오병이어를 베푸신 그 기적의 사건 다음날 친히 말씀하신 내용이다. 저는 이 오병이어의 사건을 보면 큰 은혜가 되고 위로를 얻는다. 이 오병이어가 있기 전에 무슨 일이 있는가? 바로 세례요한이 헤롯에게 너무나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다. 세례요한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오실 예수를 예비하신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너무도 비참하게 헤롯에게 죽임을 당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요한의 죽음을 통해 낙심하고 두려워했던가?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수만 명을 먹이시는 것을 보여주시면서 복음은 여전히 살아있고, 복음은 세상을 여전히 이긴다는 것을 친히 보여주신 우리 주님, 그 사건이 바로 오병이어기기에 저는 이 오병이어를 통해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모든 복음서의 기자들이 잘 기록해 주었다. 그런데 오병이어의 기적이 우리의 오늘 본문을 통해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오병이어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전능자이시며, 우리를 물리적인 필요를 넉넉히 채워주신 분임을 우리가 보았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런 물리적인 필요주시는 예수님을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주님은 “내가 너희의 영혼을 영원토록 채워줄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이 땅에서 목마름뿐만 아니라, 너의 영혼을 영원토록 채워줄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이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깊은 은혜 가운데 들어가기를 경험하기를 바란다. 출애굽기 16장에 나타나는 만나를 살펴보자. -왜냐하면 구원계시의 연속선상에서 바로 우리 예수님을 비추어주기 때문이다. 광야의 생명양식이었던 만나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되셔서 우리의 영원한 생명양식이 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약에 이 만나를 자세히 살펴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만나를 통해 하나님의 공급하심이란 어떤면이 있는가를 살표보고 그 안에 담겨있는 우리 주님을 맛보길 소망한다. I. 첫 번째 –하나님의 공급하심은 충만함이다. *출애굽기 16:13-14절에 보면, 13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14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 만나가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광야의 지면에 있다고 한다. 광야는 어떤 곳인가? 오병이어는 빈들에서 생긴 사건이고, 만나는 광야가운데 덮여있다. 이 장소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바로 먹을 것이 있지 않는 없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심을 수 없는 곳이 광야이고, 그렇기에 그 광야를 통해 아무것도 거둘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광야의 온 지면에 이슬처럼 만나를 내려 주셨다. 하나님은 광야를 덮고 있는 만나를 통해 분명히 말씀하신다. “나 여호와는 어느 곳이나 충만하다.”는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광야 가운데 충만한가? 우리는 이 만나를 통해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알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다스리심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통치는 애굽에도 오늘 이곳 광야에도 앞으로 나아갈 약속의 땅 가나안에도 동일하게 있다.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은 어떠한가? 우리 주님을 살펴보자. 오늘 본문에 이렇게 기록한다. *요한복음 6:33절에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에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즉 예수님은 온 세상 가운데 충만하다. 세상 가운데 빛으로 오셨으나 그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세상이 그 빛을 보지 못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빛으로 이 세상을 비추신다. 비록 그곳이 광야일지라도 그곳이 광야를 덮고 있는 만나처럼, 그곳이 비록 죄악 된 세상일지라도 그 빛 보면 하나님을 두려함도 없고 하나님을 경외함도 없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통치는 온 세상에 가득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하나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충만하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모든 분야에 다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왕이시다. 주님은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분이시고, 주님은 모든 것 위해 다스리신다.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일터에서도 코로나로 뒤덮이 이 대한민국 가운데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은 영원하다. II. 두 번째, - 하나님의 공급하심은 충분하다. *출애굽기 16:18절에, 18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제 호기심이 나는 많다.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도대체 만나는 무엇으로 만들었을까?’를 생각해본다. 온 푸드 다이어트도 몸에 무리가 간다고 한다. 사람이 골고루 먹어야지 하는데, 만나 속에 무엇이 들어있기에, 40년간 이 만나만 주구장창 먹으라고 하시는가? 만나 가운데 무엇이 들었던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필요하면 주시는 분은 우리 하나님이시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만나를 주셨다면 그것만으로도 광야를 지날 수 있다. 우리 예수님을 살펴보자. *요한복음 6:47~48절에, 47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8절에 정관사 ‘곧’이 쓰여 있다. 여기서 정관사는 ‘오직 나만이 생명의 떡이다’라는 것이다. 정관사를 딱 생각하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며, 완전하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우리를 강력하게 도전하게 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 만나로만 광야 40년을 버틸 수 있을까? 정말로 이 만나로 살 수 있는가? 나 말고는 생명이 없고, 내가 아니고서는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한가를 생각해 본다. 다른 것이 없어도 이 광야 같은 세상을 걸어갈 수 있을까? 누가 그러더군요. 서울은 서서 우는 곳이라고 한다. 정말 치열한 경쟁 속에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일용할 양식이라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라면 과연 나는 그것만으로 살 수 있는가? ‘내게 주신 은혜가 족하다’고 한 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는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한 가지를 명확하게 깨닫게 하신다. 척박한 광야 길을 지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정말로 의지하게 되었다. 다른 모든 가능성이 닫혀있다. 하나님 밖에는 기대할 수 없다. 스스로 양식을 받을 수 없다. 자신의 힘으로는 이 하루를 살 수 없기에 절대적인 빈곤과 무기력 가운데에서 그들은 진정한 믿음과 신앙을 깨닫게 하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붙잡으면 한 가지는 명확해진다. 다른 길은 닫혀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길이 열리고,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진리가 되시고, 우리의 답이 되심을 정말로 경험할 수 있게 된다. III. 세 번째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은 날마다 새롭다. *출애굽기 16:21절에, 21 무리가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하나님의 은혜는 오늘의 은혜이다. 은혜는 현재적이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과거 속에 갇혀 사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오늘 살아계시므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오늘 우리에게 만나를 주시며 오늘 우리를 살게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고를 만들라고 하시지 않는다. 내일 먹을 것을 저축하라고 하지 않으신다. 그날의 그 신선한 만나를 매일같이 새벽배송이 되는 것이다. 오늘의 은혜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날의 은혜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요한복음 6:51절에 보면,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주님이 지금 살아 있다 라고 하신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시고 역사하시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이런 주님을 매일마다 생생하게 경험해야 한다. 소금보다 황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지금이다. 우리는 오늘 정말로 신선한 것을 먹고 있는지, 살아계신 예수님을 올 해, 이번 달, 아니 이 예배 가운데 정말로 주님을 그렇게 만나고 있는가? 모세의 열 가지 재앙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적적으로 애굽에서 구출되었다. 이 은혜에 감사하다. 얼마나 놀랍고 역사적인 사건인가? 언제 또 그런 일을 경험하겠는가? 수백만이 건넜던 홍해 사건도 얼마나 큰 은혜인가?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예전에 그렇게 감사하고 그렇게 좋았다고 한 지금은 어떠한가? 지금 광야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어떤가? 그런데 결코 과거의 은혜에 갇혀있어서는 안 된다. 우릭 말하곤 한다. 내가 처음 믿을 때, 제자 훈련 때, 사역훈련 때, 나 때는 말이야!!~~라고,,, 주님은 지금 살아계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2021년 상반기에 폭포수와 같은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셨다. 그 온전함의 고봉을 함께 손잡고, 힘차게 걸어왔다. 이 은혜를 잊지 말고 간직하라. 우리 주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이제 앞으로 놓여 진 하반기의 은혜를 준비하자.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살아계셔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다들 축구 이겼대!!~ 생생한 소식이 도쿄에서 소식이 들린다. 순장님 중에는 그곳에 가셔서 음식으로 섬기고 계신 분도 있다. 그런 것처럼 생생한 소식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처럼 생생한 은혜가 우리 가운데 영혼을 살찌우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소원한다. IV 네 번째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은 달콤하다. *출애굽기 16:31, 31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 이 만나는 맛이 어떠한가? 맛이 있는가?를 생각해본다. 세상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맛이다. 샘표 간장 같은 것이다. 맛을 보아야만 맛을 알 수 있다. 아마도 하늘에 만든 것이니 하늘의 맛일 것이다. 그런데 이 만나를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이스라엘 백성을 너무나 사랑하신 하나님, 아무것도 소확할 수 없는 땅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40년간 한 결 같이 내려주신 이 만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감히 이 만나를 맛으로 표현하겠는가? 예수님의 넓은 사랑은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은 알도다... 점입가경(漸入佳境-차차 재미있는 경지로 들어감)이라는 말이 있다. 경치를 더한다. 절경은 오를수록 그 멋을 더한다는데 오르지 않고는 말을 할 수 없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광야를 걷고 있다할지라도 이 광야에서만 맛을 볼 수 있는 오늘의 만나가 너무도 달콤하고 맛있는 만나가 매일처럼 주어지고 있음을 기억하고 맛을 보기를 바란다. 본문을 보면, *요한복음 6:50절에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시고, 그분의 권세는 하늘에서 말미암았다고 하신다. 세상에는 없다. 누구를 만나도 어디를 가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며 그 맛이 하늘의 맛이다. ※임지호씨와 함께 출연한 패널들에게 그 자리에서 음식을 먹고 이렇게 표현한다. 태어나서 처음 먹는 음식이라고 표현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께로 나아오라,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분의 손을 잡고 옷자락을 붙잡고 그분과 걷고, 그분의 살과 피를 들어야 한다. 예수님이 내 안에 살아 역사시면 세상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위로가 경험될 줄 믿는다. V. 다섯 번째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은 중단되지 않는다. *출애굽기 16:35절에, 35 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너무 감사하다. 충만한 은혜, 새로운 은혜, 달콤한 은혜, 그중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모자라도 하나님은 만나를 내려주신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랬는가? 이게 하나님의 사랑이다. 정성껏 아침을 차려주어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얄미운 자녀가 있다. 그래도 엄마는 한 숟가락을 더 먹으라고 하신다. 이것이 엄마의 마음이다. 광야가 힘들지, 너의 아품과 눈물도 수고도 잊지 않고 있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새벽부터 하나님과 함께하면, 언제나 만나를 내려주신다. *요한복음 6:51절에 보면,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너무 감사하다. 충만한 은혜, 충분한 은혜, 새로운 은혜, 달콤한 은혜, 그중에서 단연, 가장 값진 은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은혜이다. 우리가 부족해도 하나님은 만나를 내려주신다. 이스라엘 백성이 늘 한결 같았는가? 아니다. 그들이 언제나 하나님을 동일하게 섬기고 하나님을 경외했는가? 아니다 그들은 늘 부족했다. 하나님을 외면하기도 했고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기도 했다.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함께하고, 여기에 계신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아무리 말씀을 해도 이스라엘이 백성은 더 달라고만 했다. 결국은 금을 녹여 송아지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은 언제까지 만나를 주신다는 것인가?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데까지 곡식을 재배하고, 수확할 수 있는 곳에 닿을 때까지 만나를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정성껏 아침을 차려주어도 안 먹는다는 자녀가 있다. 다른 것은 없냐고 하는 얄미워도 엄마는 더 먹으라고 한다. 이것이 엄마의 마음이다. 광야가 힘들지만 포기하지 말라고 하신다. 너의 아픔과 눈물도, 수고도 모두를 잊지 않고 있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언제나 만나를 내려 주신다. 아들아, 딸아, 더 먹으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로 먹이기시l에 우리는 반드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6:51절에 보면,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떡을 먹으면 영생한다는 것은 떡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마치 선악과를 먹었을 때 어떤 독성이 있어서 먹기만 하면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먹는 순간 관계가 깨어진 것처럼, 이 생명의 떡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인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은 영원히 유효하시게 하신다. 영원히,,, 우리는 모든 것을 얻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주님은 부족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삶은 죄악으로 얼룩져 있을지라도 주님의 희생은 고결하다. 우리는 비록 죄인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우리는 의와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이다. 가나안 접경에 이를 때까지 만나를 내려 주시는 하나님께서 길을 잃지 않도록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도록 끝까지 인도하여 주실 것이다. ※임지호씨는 그와 함께 티브이에 출연했던 칼럼니스트가, 이런 말을 했다. ‘임지호씨는 자신이 요리한 음식을 먹지 않는다. ’손님이 먹을 음식으로 요리를 한 것이니 먹을 수는 없다’고 했다. 그것은 요리사의 정신 자세인줄 알았는데, 그것은 아니었다. 그는 식당 밖에서도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서 깨달았다. 그는 요리사가 아니고 그느 우리의 할머니이시고, 어머니였다. 우리를 먹이려고 기다린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임지호쉐프는 요리를 통해서 사람을 사랑했던 것이다. 참 좋은 분이었다. 그렇지만, 임지호 쉐프와 비교가 안 되시는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를 살리시려고 죽음을 선택하신 주님, 우리의 영혼의 허기를 채워주시기 위해 단번에 죽으심으로 영원토록 우리의 생명의 떡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식은 부모의 등골 빼 먹는다. 우리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 영 가족에게 도전한다. 혹여나 과거에 은혜에 갇혀살지 말고 우리에게 주시는 신선한 은혜를 놓치지 말고 살아야 한다. 체면, 자존심, 인정할 수 없었던 영적인 무감각, 갈증, 목마름, 주님이 없어 텅 빈 마음이 있다면, 그런 내 자신을 돌아보고 말씀의 거울에 우리의 영혼을 비추어보아야 한다. 과연 하나님 앞에 내 모습은 어떠한가? 오늘의 만나로 잘 유지하고 있는지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치열한 영적 전쟁 가운데 피투성이가 되었다면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다시 주님을 바라보라. 주님의 품으로 돌아와서 그 깨진 나의 마음에 그 조각들을 하나씩 주님 안에서 회복될 것이다. 주님은 인도하시고 용서하신다. 주님은 오늘도 기다리고 계신다. 주님 안에 거할 때에 신앙의 맛을 맛보게 된다. 주님은 그렇게 회복하게 하실 것이다. 주님은 그렇게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요약 주님만이 우리의 생명의 떡이심을 믿는다. 지금 우리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여드리길 소망하며, 하나님의 공급하심은 충만함과, 충분함과 날마다 새로우시며, 달콤하며 그리고 중단되지 않음을 믿고 주님께서 주시는 만나를 귀하게 받아서 과거에 갇히지 말고 회복되어 신앙의 맛을 맛보기를 소원한다. 그래서 치열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도록 끝까지 인도하여 주실 것을 믿고 예수님을 통해 만나를 맛보아야 한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는 비유 안에는 영생의 비밀이 담겨 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살렸던 만나와 비유된다. 하지만 만나는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영원한 생명을 주지는 못했다. 반면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는 자는 현재뿐만 아니라 영원히 그 생명을 소유하고 유지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살은 세상의 생명을 살리는 구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영적인 생명으로 태어날 수 없다. 예수님은 우리가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분이시다.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 적 죽음을 받아들일 때, 그분은 우리 안에서 생명으로 역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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