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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예배(주후 2021년 6월 30일)
제목: "풍성(豊盛)한 삶의 비결(秘決"
말씀: 여호수아 24:1-15
설교자: 박인기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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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24:1-15,
1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들의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부르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선지라.
2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3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으며.
4 이삭에게는 야곱과 에서를 주었고 에서에게는 세일 산을 소유로 주었으나 야곱과 그의 자손들은 애굽으로 내려갔으므로.
5 내가 모세와 아론을 보내었고 또 애굽에 재앙을 내렸나니 곧 내가 그들 가운데 행한 것과 같고 그 후에 너희를 인도하여 내었노라.
6 내가 너희의 조상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바다에 이르게 한즉 애굽 사람들이 병거와 마병을 거느리고 너희의 조상들을 홍해까지 쫓아오므로.
7 너희의 조상들이 나 여호와께 부르짖기로 내가 너희와 애굽 사람들 사이에 흑암을 두고 바다를 이끌어 그들을 덮었나니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을 너희의 눈이 보았으며 또 너희가 많은 날을 광야에서 거주하였느니라.
8 내가 또 너희를 인도하여 요단 저쪽에 거주하는 아모리 족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매 그들이 너희와 싸우기로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겨주매 너희가 그 땅을 점령하였고 나는 그들을 너희 앞에서 멸절시켰으며.
9 또한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일어나 이스라엘과 싸우더니 사람을 보내어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러다가 너희를 저주하게 하려 하였으나.
10 내가 발람을 위해 듣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오히려 너희를 축복하였고 나는 너희를 그의 손에서 건져내었으며.
11 너희가 요단을 건너 여리고에 이른즉 여리고 주민들 곧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이 너희와 싸우기로 내가 그들을 너희의 손에 넘겨 주었으며.
12 내가 왕벌을 너희 앞에 보내어 그 아모리 족속의 두 왕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게 하였나니 너희의 칼이나 너희의 활로써 이같이 한 것이 아니며.
13 내가 또 너희가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설하지 아니한 성읍들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에 거주하며 너희는 또 너희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열매를 먹는다 하셨느니라.
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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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코로나 팬데믹 기간을 보내고 있다. 조금 있으면 끝날 줄 알았는데 시간이 가면서 변이 바리러스가 등장하고 지금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줄어들지 않는 코로나 확진 자와 또한 매일 착용해야 하는 마스크, 불편함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마음껏 만나지 못하는 우리 마음 가운데 불편함도 있다. 그런데 이런 불편함도 시간이 가면서 조금씩 적응이 되는 것 같다. 또한 적응됨과 아울러서 우리 삶 가운데 즐거움과 기쁨도 조금씩 사라지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 삶들 가운데는 여러 가지 스트레스들이 있다. 좀 불편함이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내가 무슨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시는데, 우리 삶들 가운데는 또한 우리 생활 가운데는 하나님이 주시는 그 풍성함이 있는가를 돌이켜 본다. 어느 날 저녁 길을 가다가 광고판에 걸린 어느 문구를 보았다. ‘오늘 하루도 잘 버티셨습니다’ 그런데 그 문구를 보는데 갑자기 마음이 뭉쿨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약속하시고 또한 그 풍성한 삶으로 우리를 초청해 주셨는데, 우리의 삶, 우리 생활은 어떠한가를 돌이켜 본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의 삶들은 어떠한가? 삶에 대한 풍성함, 하나님이 쥐는 만족들이 우리의 삶들 가운데에 가득한가? 아니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생존의 의미에 더 가까운가? 이런 고민들이 저에게 있었다. 한동안 나는 생존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함 가운데 거하며 힘 있게 살아가는가? 이런 고민들 속에 있다가 한 인물을 만나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평생 하나님 앞에서 풍성하고 힘 있고 후회 없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오늘 본문은 나누고자 하는 그 한 사람의 삶에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그의 이름은 여호수아이다.
 
여호수아는 삶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자기와 함께 하였던 민족의 지도자들을 세겜으로 부른다. 각 지파의 장로들과 또한 지도자들과 족장들을 다 불러 모은다. 아마 이들은 여호수아 함께 하였던 광야 40년 동안 동지들이었고, 가나안 정복 기간 동안 함께 영적 전투를 감당하였던 용사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을 불러놓고 여러 가지 이야기, 자기의 삶을 마무리하는 유언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본문 말씀을 통해 여호수아의 과거, 현재, 미래를 대하는 모습 중에 우리 또한 풍성한 삶으로 나아가는 삶이되길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이 예배를 통하여 또한 말씀을 통하여 주께서 우리에게 나누시는 주의 음성을 듣기를 소망한다.
 
▷여호수아를 통해 볼 수 있는 풍성(豊盛)한 삶의 비결(秘決).
 
I. 과거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해석한다.
 
-여호수아는 본문 가운데 그의 모든 삶, 그의 과거들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여호수아는 세겜의 모든 민족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아 이스라엘의 역사들을 쭉 ~~ 나열하고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그리고 출애굽 과정, 광야생활, 모든 것들을 나열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여호수아의 이야기를 가운데 무언가 좀 이상한 부분을 발견한다. 3절부터 13절까지 계속해서 반복되어 나오는 단어가 있는데, 무려 14번이나 등장하는 단어는 ‘내가, 나’라는 단어이다. 이 내용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여기서, ‘내가’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세우셨고, 아브라함을 어떻게 부르셨고, 어떻게 홍해를 가르게 하셨고 어떻게 광야 생활을 인도하셨는지에 대하여 계속해서 나열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여호수아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여호수아 주변의 인물들이 다 아는 내용이었고, 어쩌면 여호수아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까지가 아니라 여호수아는 11절부터 14절 사이에도 ‘내가, 나’라는 단어들을 사용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읽으면서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조금도 다른 각도에서 본문을 보면, 한 가지 의문점이 떠오른다. 왜냐하면 11절부터 14절까지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이며 동일하게 여호수아가 경험하였던 역사이기 때문이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 요단강을 건너고 가나안 땅에 수많은 민족들을 쳐부수며 성을 함락시키며 그 피비린내 나는 목숨 건 전투를 통하여 행하였던 그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여호수아는 자신이, 우리가, 우리 민족이, 우리 군인들이 이런 전투를 통하여 여기를 함락시키거나 아니면 전쟁에서 승리하였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의 삶의 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요단강을 가르게 하시고, 여리고 무너뜨리게 하시고 수많은 적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고 이 땅을 주셨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인공이신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모든 것들을 평가한다. 여호수아는 역사에서 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족적들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재해서 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자기의 삶을 그렇게 보는 의미가 아니라 완전히 세계관이 열리는 획기적인 일이다. 자기의 생각을 뺀, 하나님의 관점으로 모든 것들을 바라보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이런 예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이 요셉이다.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이기도 하다. 그는 서른 살에 애굽이라는 강대국에 총리가 된다. 남부럽지 않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삶을 찬찬히 살펴보면 요셉의 삶은 처참하다 못해 비참한 인생이었다. 그는 열일곱 살에 형들의 시기(猜忌)로 말미암아 형들로 인해 팔려간다. 인신매매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이억 만 리 타국에서 보디발이라는 장군의 집에 노예(奴隸)로 들어간다. 그런데 거기서 어찌어찌 잘 풀렸다. 괜찮은 듯하다. 하지만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을 받아 언제 나올지 모르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 당시 감옥(監獄)은 형기(刑期)가 정해 있지 않았다. 어쩌면 평생 거기에 있다가 거기서 죽어서 시체로 나올 수 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것이 요셉의 인생이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생각해보았다. 팔려가는 요셉, 감옥에 갇혀있는 마음과 그 심정이 어땠을까? 완전 배신감(背信感)과 분노(忿怒)로 부글부글 끓지 않았을까? 어떻게 동생이 나를, 어떻게 내 인생이 이렇게 불행한가? 라는 자포자기(自暴自棄), 한 심정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감정이 있다 라면 당연히 형들에 대한 복수심(復讎心)도 있고, 만나기만 하면 분명히 이것을 몇 배로 갚아 주리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런 요셉의 생각들이 전혀 다르게 표현 되는 것들을 본다.

 
*창세기 45:5~8,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어떠한가? 요셉의 이 표현 가운데 형들에 대한 원망이나 복수심이 느껴지는가? 1도 그렇지 않다. 왜 그런가? 요셉은 거의 모든 인생을 하나님의 관점(觀點)으로 해석하고 있다. 여호수아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그 인생이라고 짜증나는 일이 없었겠는가? 가데스바네아에서 불신앙을 보고를 하고 그 열 명의 정탐꾼들 때문에 그의 인생 110세까지 근 40년 동안을 그것도 가장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청장년 40년간을 광야에서 뺑뺑이 돌았다. 얼마나 아까운 시간이었겠는가? 또한 전쟁에서 실패하고 졌다. 어쩌면 그의 인생 가운데 쓴 뿌리 흑 역사가 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그의 실패조차 하나님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있다. 이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기 인생을 재해석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성경은 자세하게 이야기 해주지 않지만 말씀을 묵상하며 깨달은 것은 이들은 이들의 감정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자신이 자신의 흘러나오는 그 감정의 소리에 자기의 삶을 의탁하거나, 자기의 생각을 두지 않았다. 대신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율법을 좇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았다. 만약, 요셉이 자기의 감정에 귀를 기울였다면 어쩌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열 두 지파의 역사가 아니라 요셉과 베냐면 두 지파의 역사로 전락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여호수아가 40년 광야 시간동안 열 명의 정탐꾼들, 그 보고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다고 불평과 원망과 짜증스럽게 그 40년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자기의 감정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주와 동행하는 것으로 모든 감정들을 잠재웠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들의 성공뿐 아니라 그의 실패조차 아픔조차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다. 우리 사랑의 교회에 있으면서 참 많은 훈련을 한다. 제자 훈련과 사역훈련을 한다. 제자훈련과 사역훈련의 첫 시간에 항상 자기를 소개한다. 맡은 반에서 특별히 하는 것이 있는데, 자기를 소개 할 때, 인생그래프를 그리도록 한다. A4용지에 자기의 그래프를 그리게 한다. 먼저 검은색 볼펜으로 그리게 하면 인생의 고봉도 있지만 인생의 깊은 절망인 골짜기도 있다. 이것이 반복된다. 골짜기에 그 사람의 실패도 있고, 아픔도 있고, 건가의 어려움, 관계가 틀어짐도 있었을 것이다. 그 그래프를 가지고 본인들의 인생을 설명하고 난 후에 또 다른 그래프를 그리게 한다. 이번에는 빨간 볼펜으로, 영적인 그래프를 그리게 한다. 자기 인생 가운데 영적인 모습은 어떠했는지, 그리게 하면 신기한 것은 자기의 인생그래프와 영적 그래프가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정반대의 그래프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인생 가운데 실패고 좌절이고 절망이라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때 우리를 깊이 만나시고, 우리를 다듬으시며, 우리를 붙들고 계신다. 시편 기자가 동일한 고백들을 우리에게 하는데,,,
 
*시편 119: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어떻게 고난이 유익이 될 수 있는가?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으로 그 고난을 바라볼 때, 그 고난은 오히려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줄 믿는다.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분들 중에 어쩌면 요셉의 경우만 13년의 종살이와 옥살이를 동일하게 비슷한 감정으로 보내고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여호수아가 경험한 그 40년 동안의 광야의 시간을 보내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 과거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한다. 우리는 실패, 좌절, 절망이라고 생각하는 그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셨다. 우리의 인생을 그 오른 손으로 붙들며, 나를 위로 하시며, 힘내라고 응원하고 계셨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우리의 과거를 볼 수만 있다면 그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쓴 뿌리나 상처가 아니라 풍성한 삶으로 나아가는 은혜가 있을 것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재해석 하고 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는 분임을 믿는다. 아멘,
 
 
▷여호수아를 통해 볼 수 있는 풍성(豊盛)한 삶의 비결(秘決).
 
II. 현재를 하나님 주신 소명(召命)에 집중한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집중하고 있다. 여호수아는 산전수전(山戰水戰)을 이야기 한다. 공중전까지 다 경험한 사람이다. 40대까지는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그리고 40년 동안 출애굽하여 광야생활을 했다. 이후에 요단강을 건너는 30년 동안 가나안 정복전쟁, 그 가나인 땅을 차지하는 일들을 하였다. 여호수아의 110년의 삶 동안, 그의 삶 가운데 어려움이 없었겠는가? 모든 삶이 쉬었을까? 전혀 아닐 것이다.
 
※한 달 정도 전에 동네에 놀이터에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데, 어린 꼬마 두 명이 놀이터에 왔다. 아마 형제 같았다. 한 명은 2학년쯤, 한 명은 일곱 살쯤 되어 보였다. 코로나 시기라 밖에 나가 놀지 못하니까 엄마가 운동 좀 하고 오라고 보냈을 것이다. 줄넘기를 몇 개를 하더니, 형이 200개를 하고 다 끝냈다는 것의 신호를 했다. 그의 동생이 보고 있다가 줄넘기를 두 개 넘다 걸리고 또 걸리고 하다가 좌절하는 눈빛이 역력히 보였다. 그것을 보는 형이 동생에게 어깨를 만지면서 하는 이야기가 “사는 게 다 그래” 라고 한다. 어린 아이들이었는데도 인생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이미 발견하고 있다.
 
-여호수아도 마찬가지이다. 일상이 불평인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란 쉽지 않았다. 죽느냐 사느냐 그 심각한 전투였기 때문에 어쩌면 자기들의 처자식까지 죽을 수 있는 전투였기 때문에 너무 마음에 큰 부담이 있었다. 그래서 주께서 여호수아 1장에서 말씀하신다. “강하고 담대하라” 몇 번이나 강조하시면서 말씀하신다.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너면서 여호수아 인생은 피곤하였다. 아마 누구보다 쉬고 싶고, 그 짐들을 벗고 싶을 때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그 모든 삶의 과정들을 쉬거나 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 가운데는 약속의 땅, 가나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가나안 땅이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었고, 또한 소명이며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그는 홍해를 건너는 순간부터 삶을 마치는 순간까지 그의 마음도 오직 하나님이 주신 소명, 약속의 땅, 가나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심심할 틈도 없었고 지루해서 어떻게 시간을 때우나 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의 모든 인생은 소명에 의하여 움직여졌다. 소명은 한 사람의 생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며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꿈이기도 한다. 또한 소명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의 목표점이다.
 
※인도에 가면 마주리라는 섬이 있다. 이 섬은 한 때, 살림이 울창한 아름다운 섬이었다. 그런데 인간의 욕심 때문에 그 아름다운 나무를 벌목해서 또한 흐르는 물로 인하여 참 많은 흙들이 유실되면서 황폐화되었다. 마치 사막처럼 변해갔다. 어느 날 그 섬에 사는 열여섯 살 된 소년이 해변 가를 걷다가 나무가 없어 땡볕에 말라죽어가는 파충류를 발견하고 충격을 받는다. 그날부터 그는 그 섬에 나무를 심기를 시작한다. 한 그루 두 그루, 계속해서 심기 시작한다. 그 일들을 무려 사십 년간 하였다. 수많은 과학자들은 그 섬이 없어질 거라 이야기 했지만 40년이 지난 그 섬은 다시 울창한 숲으로 바뀌었다. 코끼리가 많고 코뿔소, 동식물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아름다운 숲으로 만든 것이다. 그 숲의 넓이가 117만평이다. 그 넓이가 짐작이 안 된다. 여의도이 두 배라고 한다. 혼자서 감당한 것이다. 없어질 섬이 그로 말미암아 그 섬은 아름다운 낙원이 된 것이다. 왜 그러는가? 그 마음 가운데 한 가지 꿈을 가지고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가는 그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 소명의 초점을 맞추고 달려갈 때, 역사가 일어난다.
 
※돋보기를 들고 놀았던 이야기이다. 여름이 되면, 검은 종이와 돋보기를 들고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그 검은 종이에 돋보기를 들고 햇빛의 초점을 맞추어 집중한다. 처음에는 변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나 시간이 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 검은 종이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결국 불까지 난다.
 
-우리 인생 수많은 관심과 재미있는 것들이 있다. 어쩌다 학교 앞에 문방구에 아이들이 들려서 문방구에 정신을 팔려서 학교에 못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소명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재미있는 것 가운데 시간을 빼앗겨 우리의 소명에 집중하지 못할 때가 있다. 또 이야기 한다. 나이가 몇 살인데 무슨 소명이냐고.,, 60,70이 다 되어 가는데 라고, 소명이란 나이에 상관이 없다.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꿈인 줄 믿는다. 그 소명을 붙들고 나이에 상관없이 우리가 뚜벅뚜벅 걸어갈 때, 우리가 많은 것을 이루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일들을 이루고 하나님의 기쁨이 될 줄 믿는다. 여호수아는 그를 향한 하나님의 소명, 약속의 땅 가나안. 그 소명 붙들고 마지막까지 달려갔다. 그리고 끝내 그의 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소명이 이루어지는 것들을 본다. 청년이라고 소명이 없으면 무기력하지만, 나이가 많아도 소명 자는 매일 새롭기 때문이다. 여호수아 인생은 그러했다.

 
▷여호수아를 통해 볼 수 있는 풍성(豊盛)한 삶의 비결(秘決).
 
III. 미래를 믿음의 계승으로 준비한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의 정복으로 삶을 마무리하지 않는다. 그에게 한 가지 더 남아있기 때문이다. 미래를 위한 믿음의 세대계승이다. 담임 목사님께서 참 많이 강조하시는 내용이기도 하다. 여호수아는 자기를 둘러싼 수많은 지도자들을 바라보며 14절과 15절을 이야기 한다. 요약하면,
“여러분, 나는 이제 떠난다. 지금까지 내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너무나 좋은 분이셨다. 그래서 나는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길 것이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말한다. 주위에 선 사람들이 당신처럼 우리의 족속이 여호와만 섬기겠다라고 확답을 한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이 확답으로 시원치 않은 것 같다. 재미있는 퍼포먼스를 한다.
 
 
*여호수아 24:26~27,
26 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 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가져다가 거기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세우고.
27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니라 그런즉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하고.

- 돌들을 세우고 그 돌들을 증거라고 말한다. 여호수아 인생 가운데 하나님은 너무나 좋은 분이셨다. 여호수아가 그의 인생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마음을 이야기 할 때, 그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묵상을 해보니, 상상이 갔다. 여호수아의 얼굴 가운데는 너무나 감사한 미소가 있었을 것이다. 그의 일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대한 추억들 때문이다. 하나님이 너무나 좋기 때문에 그는 기쁨과 감사함으로 미소 지으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풍성한 삶의 온전한 마침표는 우리 자녀들과 다음 세대에 우리가 만났던 주님을 전해주는 것인 줄 믿는다. 우리 집에는 두 아들이 있다. 내년에 수능을 치는 아들과 중2가 있다. 사춘기를 한참 지나고 있다. 두 아이들을 보면 부모로서 마음이 있다. 모든 부모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애들이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 가서 좀 편안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끔씩은 아이들이 열심히 하지 않으면 잔소리도 한다. 한 번은 아이들을 싫어하는 소리를 하고나서 생각해 보았다. ‘나는 공부를 잘했었나?’ 그렇게 잘하지 못했다. 서울에 있는 명문대학에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 볼 때에 삶은 풍성했다. 하나님 때문에 너무나 풍성했고 너무나 감사했다. 마음속에 만족감이 있다.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것은 없지만, 하나님이 제 안에서 일하셨던 수많은 이력들이 있기에 하나님이 역사하신 그 삶 가운데, 곳곳 가운데, 켜져 있기에 보석처럼 빛나고 있기에 삶은 언제나 풍성하고 감사하다. 그러면서 생각해 본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아이들을 위하여 열심히 저축하면서 조금이나마 물려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아이들이 필요한 것을 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인생 가운데 계신 그 주님을 만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 주님을 가르쳐 주면, 그 주님이 아이들의 인생을 책임질 것이며, 주님은 풍성한 삶, 후회 없는 삶으로 인도하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모든 성도님들의 고백이라 여겨진다. 우리 인생 가운데 정말 끝까지 놓지 않아야 할 것은 다음세대에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가 경험하였던 그 주님을 함께 물려주는 것임을 믿는다. 그들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하고 그들과 함께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 그것이 주님이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기대하시고 바라시는 바이실 것이다.
 
-여호수아의 인생, 110년을 살고 24장 뒷부분을 보면, 그의 삶을 마무리 한다. 수많은 일과 사건들이 있었던 어쩌면 아픔, 슬픔, 괴로움, 인생의 경험을 동일하게 겪은 여호수아의 삶이었지만, 그의 인생은 그 아픔과 고통이 지배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풍성한 삶이었고, 후회 없는 인생이었다. 그는 그 과거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재해석했고, 그의 현재를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열심히 달렸으며 그의 미래를, 믿음의 세대계승으로 준비했다. 아마 그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착하고 충성된 종아” 그 평가로 주님의 기쁨에 동참하였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은혜의 기쁨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요약
여호수아를 통해 볼 수 있는 풍성(豊盛)한 삶의 비결(秘決)을 배워서 과거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현재를 하나님 주신 소명(召命)에 집중해야 하며, 미래를 믿음의 계승으로 준비해야 하나님의 은혜와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생존을 넘어 풍성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집중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아브라함의 소명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삭, 야곱, 그리고 출애굽 역사와 가나안 정복·정착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와 무한한 사랑, 그리고 수고도 하지 아니한 땅과 성읍을 거저 주시는 복으로 살고 있음을 배워야 한다. 인간은 자기의 노력이나 공로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에덴 동산에서 인간은 완전한 타락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구원받은 이후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돌보심 속에서 안전하게 거하게 된다. 이렇게 구원받은 이후의 삶은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이라 한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셔서 그가 친히 구원자이심을 보여주시고 우리의 믿음을 굳게 세워 주신다.

하나님의 섭리는 누구도 거스릴 수 없다는 것과 미혹하는 자들을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발람은 탐욕에 눈이 어두워 이스라엘을 우상 숭배에 빠지도록 배후에서 계략을 꾸몄다. 때문에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잔재했던 우상 세력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이 기사를 말했던 것이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든지, 아니면 여러 이방신들을 섬길 것인지 택하라고 하면서 자기만이라도 결코 하나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살 수 없다. 여호수아의 유언과도 같은 고별 설교이다. 모세가 죽기 전에 했던 것처럼, 여호수아도 하나님의 언약을 새롭게 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언약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가를 강조하며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믿고 섬길 것을 다짐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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