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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3년 8월 20일)
제목: "순종하지 않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말씀: 열왕기상 13:15~24
대표기도: 노주찬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
설교자: 김지찬 목사님-초빙(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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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3:15~24,
15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
16 대답하되 나는 그대와 함께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대와 함께 들어가지도 못하겠으며 내가 이 곳에서 그대와 함께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17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다.
18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19 이에 그 사람이 그와 함께 돌아가서 그의 집에서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니라.
20 그들이 상 앞에 앉아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하니.
21 그가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외쳐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22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하신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23 그리고 자기가 데리고 온 선지자가 떡을 먹고 물을 마신 후에 그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라.
24 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그를 만나 물어 죽이매 그의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서 있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서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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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찬 목사님-초빙(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2천 년대 들어서면서 우리나라는 기독교 후기 시대로 들어섰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너무 열악해서 기독교가 한 나라의 제도나 사회, 경제, 교육 등 국민의 삶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국가 위에 군림하거나 최소한 국가와 밀월 관계를 유지하던 기독교 시기가 지났다는 것입니다. 유럽은 18세기의 시민혁명으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었고, 경제는 오직 시장 논리로만 움직이고 사회 전 분야가 기독교적 가치관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건국 이후에 1960년대까지 200년 동안 기독교 시대를 누리다가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기독교 후기 시대로 들어갔습니다. 1962년에 국립학교에서 주기기도문, 암송이 금지된 것이 결정적 사건입니다. 한국 사회는 원래 세속국가인 데다가 기독교가 다수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서구 같은 형태의 기독교 시대였던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해방 이후에 1980년대까지 국가와 밀월관계를 유지하면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유사 기독교 시대라고 말합니다. 한국교회는 구한말 시대에 서구의 근대 문명을 받아들이고 양반과 천민이라는 신분 제도를 철폐하면서 계몽의 선두로 백성들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반공과 산업화가 국가 재건의 과제였는데, 한국교회가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사회의 기둥 역할을 했습니다. 실제로 13명의 대통령 가운데 개신교 출신이 4명이나 됩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면서 반미 정서가 생기고, 반공을 통치 이념으로 삼던 정권과 싸우던 운동권 세력이 기득권층을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세속화가 한국 사회에 들어오면서 한국은 기독교 후기 시대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후기 시대가 되는데 유럽은 1400년 걸렸고, 미국은 200년 걸렸는데, 한국은 채 100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기독교 후기 시대에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서구학자들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첫째, 사회의 중심에 있었던 교회와 교회의 스토리가 주변으로 밀려난다.
둘째, 사회 속에서 편안함을 누리던 그리스도인들이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소수를 느끼며 편안함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한다.
셋째, 기독교 후기 시대 현대인들은 기독교는 여러 세계관 중에 하나이며 웬만해서는 기독교 진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증거를 보여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면 이런 기독교 후기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미 기독교 후기 시대를 경험한 서구 학자들은 세 가지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첫째, 사회를 통제하려 하지 말고 복음의 증인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라.
둘째, 동교들이 이렇게 경쟁을 하고 있기 때문에 현상 유지하기보다는 적극적인 선교적 삶을 살아야 된다.
셋째, 제도적 기관으로서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교회는 강력한 생명운동과 구원 운동을 벌여야 된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포스트 그리스 덤 시대에, 기독교 후기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생명과 구원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진리의 증인으로서 적극적인 선교 적 삶을 살아야 한다. 이렇게 정의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복음의 증인으로서의 역할, 진리의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다른 이들이 기독교 진리가 무엇인지 알게 하려면 그 진리에 우리가 목숨을 걸어야 됩니다. 한 사람이 무엇에 목숨을 거는지를 봐야 그 사람이 믿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돈 버는 일에 목숨을 바친다면 그 사람에게는 돈이 진리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 후기 시대에서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가치와 신념에 목숨을 거는지 알고 싶어 하고 실제로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걸고 죽을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 진리가 뭐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거 아닙니까? 장차 주님이 심판주로 오셔서 믿는 자들에게는 영생을, 불신자들에게는 영원한 멸망을 선포하실 것이라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가 이 진리에 어느 정도까지 목숨을 걸고 순종해야 세상 사람들이 이 진리를 알아줄까요?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순종은 이 순종밖에 없음을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셨는데 아쉽게도 현대교회는 절대적 순종의 모습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아니 순종이라는 단어 자체도 싫어합니다. 이건 주례를 서보면 금방 압니다. 예전에는 신랑 신부가 주례사를 다소곳이 듣기만 했는데 요새 커플들은 주례사 중에 서로 쳐다보고 웃고 귓속말까지 합니다. 제가 이제 에베소서 5장 24절 본문을 가지고 아내들도 범사에 남편에게 복종할지라라고 권면하면 이전에는 그냥 아무 표정 없이 듣고 지나갔는데 묘사의 신부들은 저를 빤히 쳐다봅니다. 아니 어떻게 남편에게 복종을 하라고 하는 거예요라는 표정을 제가 얼굴에서 읽게 만듭니다. 제가 이제 앞에 5장 18절에서 21절에 보면 성령 충만의 4가지 결과가 나오는데 맨 마지막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가 나온다. 그러니까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피차 복종하는 게 더 큰 원리고 그 안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목숨을 내어주고 사랑해야 된다. 그러면 그때서야 신부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요. 이렇게 이런 신부가 한둘이 아닙니다. 요사이는 신부 눈치 보여서 주례사도 마음대로 못 합니다. 이렇게 복종이라는 단어가 가정과 교회에서 점차 잃어버린 영적 유산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 대해서 미국 복음주의 리더인 짐 몰리스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현대 교회의 크나 큰 비극은 믿음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은 많은데 순종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은 적다는 점이다. -짐 몰리스 목사님-
오늘 우리는 11기상 13장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느 정도까지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는지, 그리고 왜 순종을 요구하시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면서 절대 순종의 정신을 우리 모두 회복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열왕기상 13장을 이해하려면 역사적 배경을 좀 살펴야 돼요. 솔로몬 이후 르브함이 왕이 되었는데 왕국이 불로 분열이 됩니다. 북방 이스라엘 왕은 여러 보함이었는데 백성들의 마음이 남쪽으로 쏠릴까 봐 세 가지 조치를 취해요.
첫째, 예루살렘 순례를 막기 위해 북방 이스라엘의 남방 경계 근처인 벧엘에 사단 신전을 세웁니다. 벧엘은 야곱이 꿈을 꾼 곳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이고, 그곳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벧엘에 가서 3일마다 십일조를 드리려므나. 이렇게 호사가 얘기한 걸 보면은 굉장히 중요한 장소고, 사실은 이스라엘 안에서 예루살렘과 거의 맞먹는 중요한 영적인 어떤 장소가 벧엘이거든요. 그 벧엘에다가 이제 신전을 세우고 사당을 세우고, 그리고는 레위자손이 주로 예루살렘 성전 쪽으로 많이 붙어 있으니까
둘째, 일반 사람으로 제사장을 삼고 벧엘의 신전에서 담 옆에서 여러 보안 왕이 분향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벧엘의 단을 향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한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열왕기상 13:1,
1 이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단 곁에서 분양하는지라.
-하나님의 사람은 구약에서는 선지자를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이 없습니다. 어떤 묘사가 없습니다. 키가 얼마나 큰지, 성격이 어떤지, 어떤 출신인지, 배경이 어떤지 언급이 없어요. 딱 하나예요.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람은 외모가 출신과 배경이 어떻든 상관없이 오로지 여호와의 말씀에만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인 거죠.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아직은 여호와의 말씀이 자신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면서 보게 되겠지만, 여호와의 말씀 때문에 이 하나님의 사람은 생명을 잃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움직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때론 생명을 담보해야 될지 모르는 매우 위험한 사역에 뛰어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 온 이유도 뭐예요? 여호와 말씀 때문이죠.
*열왕기상 13:2,
2 하나님의 사람이 재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이르되, 제단화 재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아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내 위에 분양하는 산당 제사장을 내 위에서 재물로 바칠 것이오 또 사람의 뼈를 그 위에서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니까 다윗의 후손 중에, 그러니까 남방왕국의 다윗의 왕손 중에, 요시야 라는 왕이, 여로보암이 분양하고 있는 그 벧엘의 단 위에서 제사장을 재물로 드리고, 사람의 뼈를 그 단 위에서 불살라 부정하게 만들 것이라는 저주와 심판의 메시지였습니다. 이 본문 현재로는 이게 몇 년 후에 일어날 것인지는 본문에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나중에 역사를 보면 300년 후에 있을 일이에요. 어찌 되었든 여로보암 왕은 이런 저주를 듣고 그 사람을 체포하라고 명령하면서 손을 내밀어서 저 사람을 잡으라. 이렇게 하면서 손을 내밀었는데, 그 순간 몸에 이제 특별히 팔에 마비 증세로 인해 손을 거두어드릴 수가 없었어요. 여호와의 말씀에 능력이 나타나자 여로보암이 갑자기 태도를 바꿉니다.
*열왕기상 13:6,
6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청하건데 너는 나를 위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이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여호와의 말씀은 왕의 손을 마비시키는 권능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우리들은 인간 왕도 굴복시키는 능력의 말씀을 섬기는 자라는 점에서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한편 여러보암이 하나님의 말씀 능력에 굴복을 하자,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의 손을 치유하셨어요. 그러자 이제 여러보암이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서 나와 함께 집에 가서 쉬라. 내가 내게 예물을 주리라 이렇게 초청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유다에서부터 베델까지 약 20km 이상을 이제 여행한 것으로 보여요. 산길이기 때문에 나기를 탄다 해도 5시간 이상 걸렸을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왕의 면전에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고 왕과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아마 심신이 굉장히 많이 피곤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음식을 먹고 기력을 회복한 다음에 다시 길을 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게다가 여로보암 마왕이 유화적이 돼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예물까지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왕의 잔치 그다음에 얼마나 멋질까요? 왕의 예물이라고 하면 얼마나 대단할까요? 그럼 제가 한 30년 전에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서 한 교회에서 대학부 교육 목사를 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시간 강사를 할 때인데 외부로부터 처음으로 제 방에 전화가 걸려왔는데 대학부 부감 집사님이었습니다. 사업하시는 분인데 제 생일날 저와 제 가족을 대접하고 싶으니까 63빌딩으로 오라 그러더라고요. 59층 스카이라운지 룸에서 사실은 코스별로 이렇게 음식이 나오더니 맨 마지막에 이 큰 이 카트에 이렇게 케익이 나오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집사님이 식비 계산할 때 이렇게 어깨 너머로 보니까 35만 원이 나왔습니다. 당시 본국 70만 원 받을 테니까 순간 차라리 현찰로 주시지,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건 잠시 그랬을 뿐 그 후에는 식사 대접을 받은 게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로열패밀리의 잔치가 어떤 것인지를 조금은 맛보았고 행복한 추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는 그런 대접 안 받았으니까 오해하지 마시고 목사들은 뭐 그런 걸 좋아한다. 그러시면 안 돼요. 딱 한 번 사업을 하시는 분이 이 정도로 대접을 한다면 왕의 잔치 그러면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여로보암 왕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맛보고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면 왕의 잔치에 가서 먹고 마시면서 왕의 예물을 받는 거 괜찮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볼까요? 8절, 9절 보면
*열왕기상 13:8-9,
8 하나님의 사랑이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 절반을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9 이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왕에게 절반을 준다 해도 왕의 잔치와 왕의 예물을 받을 수가 없다고 거부합니다. 그 이유가 뭐예요? 여호와의 말씀 때문이죠. 그러면 여호와께서 무엇 때문에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고 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빙성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당장 이렇게 나와 있지 않지만 최소한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는 메시지는 미래에 일어날 일이에요. 언제 일어날지 언급이 없습니다. 나중에 보면 300년 일어나 제가 그랬잖아요. 그러면 더더욱 미래에 일어날 하나님의 말씀은 믿기가 힘들어요. 듣는 사람들이 먼 미래에 일어날 일 신빙성을 어떻게 확인하겠어요? 결국 그 메시지의 신빙성은 그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의 신빙성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델의 단을 저주하는 심판은 주전 930년이에요.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 하는 아들을 낳을 건데 이 사람이 이제 내 재단을 사실은 부정하게 만들 거다. 라고 했는데 열왕기하 22장 1절에 보면 요시야가 8살에 왕위에 올라요. 그게 640년이에요. 18년째 되던 해에 율법사를 발견하거든요. 그때가 622년이에요. 그리고 그 후에 이제 사실은 부정하게 만든 거니까. 300년 후에 있을 주요. 심판의 메시지가 있었는데 거기에 뭐가 달라붙어 있냐면 지금 지켜야 될 명령이 붙어 있는 거예요.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 이렇게 붙어 있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신빙성은 어떻게 알 수 있어요?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에 달려 있는 사소해 보이는 음식 금지 규정을 하나님의 사람이 지금 여기서 순종하느냐, 순종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의 신빙성을 확보하기 위해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는 음식 금지 명령을 주신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이 심지어는 왕의 잔치와 왕의 예물을 거절하면서까지 음식 금지 규정을 지금 여기서 지키는 모습에서 우리는 나중에 있을 하나님의 말씀의 신빙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음식 금지 규정은 인간적으로 볼 때는 가혹하기 그지없는 규정이에요. 원래 인간이 수고한 후에 이에 대한 대가로 먹고 마시는 것은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전도서 5장 19절에 보면 18절부터 볼까요?
*전도서 5:18-19,
18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
19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유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전도서에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한 게 마타트라고 하는 단어인데 왕이 내가 예물을 주리라고 했을 때 똑같이 ‘마타트’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수고한 다음에 먹고 마시는 거, 조금 낙을 누리는 거 이거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데 하나님의 말씀에 신빙성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선물, 최소한 먹고 마시는 낙조차도 허락되지 않은 거죠.
사랑의교회 부목을 하셨던 한 목사님이 저희 학교에 와서 간증을 하셨습니다. 토요일에 이제 설교 준비 때문에 바쁜데 한 권사님이 닭백숙을 해놨으니까 와서 식사하고 가라고 하셨다고 해요. 목사님의 사랑과 배려 감사하지만 설교 준비 때문에 죄송하다. 라고 하자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아니 그 설교가 맨 그 설교구만 왜 유난 떠는지 모르겠다. 이러면서 이제 뚫겠다고 그래요. 성도님들이 볼 때는 맨날 그 설교가 그 설교처럼 보일 수 있어요. 그러나 맨날 그 설교가 그 설교 같은 설교를 하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저같이 어쩌다가 단타 치고 빠지는 교수는 그나마 괜찮지만, 매주 설교하는 목사님들은 이게 보통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이제 그러니까 이제 하나님의 사람에게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인간적으로 너무 심하죠. 그러나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은 왕의 잔치와 예물을 거절할 만큼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는 사람인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이 땅을 살 때 그 먹고 마시는 그 낙을 충분히 누리게 해주면 좋을 것을, 왕의 예물도 조금 받아 누리고 좀 살면 될 거를 왜 그렇게 못하게 하시는 걸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신빙성이 확보돼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때로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허락하신 최소한의 선물조차 때로는 금지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찌 됐든 이런 절대적인 순종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의 신실함을 믿게 되는 거고, 앞으로 미래에 있을 그가 전한 벧엘을 향한 단의 향한 심판의 메시지를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거죠. 이것은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전화하는 기독교 진리가 뭐예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언젠가 주님이 도둑같이 재림하실 것이고, 그날 모든 인간은 행한 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 아닙니까?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하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한복음 5장 29절에서 주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29,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그런데 마치 우리가 이 세상이 전부인 양 먹고 마시는 것에 목숨을 걸고 이 땅에서 왕의 예물을 받고 재물을 쌓는 게 그곳에 생명을 건다면 주님이 영광중에 언젠가 재림하여 이 땅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기독교 진리를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요? 지금부터 이제 한 35년 전에 제가 이제 유학을 가기 전에 제가 번역을 하던 출판사에 이제 인사를 갔습니다. 그런데 그 방에 편집부장 방에 이장님 씨가 있었어요. 그 출판사의 직원이 숙제 그냥 거기에 직원이라는 걸 서로 이렇게 알고 있긴 했지만 초면인데 갑자기 저한테 언제 귀국하냐고 묻는 거예요. 한 7년쯤 걸린다고. 그러니까 갑자기 이 사람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더니 다 틀렸네. 이러더니 갑자기 방을 나갔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제 편집부장님에게 저 사람 왜 저래요? 물으니까, 이장님 씨가 두 명의 중학생이 받은 계시를 근거로 5년 뒤인 1992년 10월 28일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시한부 종말론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처음 알았어요. 이장님을, 제가 7년 후에 돌아온다고 그러니까 그전에 휴가가 있을 건데 유학은 다 쓸데없는 거라는 이유로 다 틀렸네. 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죠. 그러나 1992년 10월 28일에 휴거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건 휴거를 주장하는 이장님이 추종자들에게 수십억이 넘는 막대한 헌금을 받았습니다. 추종자들이 휴거까지만 먹고 살 돈 남기고 재산을 다미선교에 바친 것입니다. 정말로 웃긴 것은 이장님씨가 자신이 주장하는 휴가 날짜 이후인 1993년에 만기가 돌아오는 환매 조건부 채권을 구입한 사실로 사기죄로 구속되었습니다. 미친 거죠. 그러니까 이게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고 이야기하면 삶으로 그것을 입증해야 될 사람이 제정신이 아니죠.
다시 성경 본문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벧엘에 사는 한 늙은 선지자가 등장하면서 절대적으로 하나님 말씀에만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의 운명에 극적인 변화가 생깁니다. 이 늙은 베델의 선지자는 아들들에게서 베델의 신전에서 일어난 일을 듣게 되어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가서는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고 초대합니다. 그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두 번째 초청을 받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죠. 아니, 왕의 잔치를 거부한 사람이 평범한 노인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달리 생각해보면 그러나 왕의 잔치는 몰라도, 평범한 백성의 초대야 굳이 거부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의 사람은 여러 번 왕의 제안을 거절할 때와 거의 동일한 언어로 늙은 이 사람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나는 그대와 함께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대와 함께 들어가지도 못하겠으며 내가 이곳에서 그대와 함께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 내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내가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다.”
-여기서도 핵심은 중앙에 여호와의 말씀이 딱 들어 있습니다. 유다에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절대적인 순종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자 늙은 선지자가 방법을 달리합니다.
*열왕기상 13:18,
18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늙은 선지자가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다. 이렇게 말해요. 우리를 가장 쉽게 무너뜨리는 사람이 누굽니까? 선배 그리스도인들이죠. 너만 그리스도인이냐? 나도 그리스도인이다. 그런 거 하나 가지고 꼭 그럴 필요 있냐? 사회생활하려면 그것쯤이야. 넘어갈 줄 알아야지 이렇게 말하죠. 주로 똑같아요.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다. 이래놓고는 이제 여호와의 말씀에만 움직이는 사람임을 금방 간파한 늙은 선지자는 천사 운운하죠.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다가 천사를 덧붙였어요. 지금부터 춘사 운운하는 인간들은 조심하셔야 됩니다. 그리고는 이제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떡도 먹고 물도 마시라고 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 거죠. 하나님의 사람이 이것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모르지만, 성경 기자는 분명하게 이는 그를 속임이라고 못을 박고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은 선지자의 말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19절에 보면 이에 그 사람이 저와 함께 돌아가서 그 집에서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리라. 왜 그러면 하나님의 사람이 이 속임에 넘어갔나요? 성경 기자는 그의 동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늙은 선지자가 왜 속였는지도 동기가 안 나옵니다. 동기가 선하든 몰라서 그랬든 아무 상관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느냐 순종하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전혀 언급을 안 하는 거예요. 아마도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늙은 선지자의 말에 넘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늙은 선지자는 무엇 때문에 여호와의 말씀을 빙자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을 속이고 있는 걸까요? 본문에 안 나옵니다. 여로보암 산당근처에 살면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 이름으로 한가하지 않은 걸 보니까 타소 신앙을 잃어버렸는지도 몰라요. 벧엘의 선지자로 베델의 단을 저주한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이 거짓이기를 바랬는지도 몰라요. 벧엘의 사니까, 어찌 됐든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순간에 무슨 일이 벌어졌죠? 하나님의 말씀이요? 불순종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안 하고 그 전 하나님의 사람에게 임했는데, 하나님의 사람을 속인 늙은 선지자에게 임해요.
*열왕기상 13:21,
21절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돌아와서 요하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고 한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내 시체가 내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심판의 메시지가 즉시 실행돼요. 하나님의 말씀은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을 택해서 움직이는 거예요. 이 사람을 속였는데 왜 하나님 말씀이 이리로 임합니까? 여기가 순종 안 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 열리로 안 임하고 이리로 임하는 거예요. 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그를 만나 물어 죽임에 그의 시체가 길에 버린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서 있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서 있더라. 한 번의 실수인데, 그것도 순종하려고 했던 실수인데 어떻게 이렇게 비극적인 운명을 당해야 했을까? 저는 인간적으로 우리는 얼마든지 이 사람 동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 하나님의 사람을 꼭 죽이셔야만 했을까요? 인간적으로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순종한 하나님의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람의 불순종은 이 사람이 이어가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빙성을 위태롭게 만들기 때문이거든요. 하나님의 말씀의 신빙성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신빙성이 지탱하는 기둥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의 순종이 깨어졌기 때문에, 지금 당장 하나님의 말씀 음식 금지 규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먼 미래의 벧엘에 선포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에 신빙성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말씀에 의해 움직이는 하나님의 사람은 위험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삶으로 입증해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위험한 사역에 뛰어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절대적으로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는 결코 살아남을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인식해야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이 죽은 것이 인간적으로 마음이 아프지만, 하나님의 사람의 죽음이 오히려 그가 전한 말씀의 신빙성을 높이게 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를 봅니다. 그러니까 늙은 선지자가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말씀대로 바로 사자에게 물려 죽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을 향해 전한 말씀이 진리임을 확신하게 돼요.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 삶과 죽음은 벧엘의 늙은 선지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빙성과 능력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모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벧엘의 선지자가 자식들에게 내가 죽거든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묘실에 나를 장사하되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고 부탁한 거죠. 그리고는 32절에
*열왕기상 13:32,
32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성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이니라.
-벧엘의 선지자가 선포해요. 그러니까 벧엘에 살면서 약간은 탈락한 것으로 보이는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이 불순종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는 모습을 보고 회개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제 유다에 속은 하나님의 사람과 베드의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신빙성을 드러내는 형제 선지자가 된 거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행하다가 결국은 불순종하여 죽는다고 해도, 우리의 죽음이 다른 사람을 회개하게 만들 수 있다는 데 희망이 있는 거예요. 종종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신실한 종들을 때로는 선교지에서, 때로는 우리나라에서 갑자기 데려가시거든요. 절대적으로 순종하는데, 때로는 실수했는지도 모르지만 실수한 경우도 마찬가지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왜 이렇게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데려갈까? 순종하지 않고 약간 타락해 있는 늙은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이 경고하고 있는 거죠. 그러나 우리가 그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회개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제 내년 2월이면 은퇴라 65세거든요. 옛날에는 막 젊은 선지자, 막 이렇게 난리 치다가 요새는 이렇게 늙은이 나오면 갑자기 내 나이가 지금 이게 늙은이로 들어가고 있구나! 이래가지고 이제 저를 확실히 돌아보게 돼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찌 됐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승리의 행진에 초청을 받은 거예요. 때로는 우리들의 어리석음으로, 우리들의 불순종으로, 우리들의 믿음에 있어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이 승리의 행진을 하지 못하고 잠시 멈춰 설 수 있지만, 끝내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종과 불순종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승리하게 만드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 승리의 행진에 초청을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 기자와 베델의 선지자는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죽은 후에도 26, 29절과 31절에 보면 뭐라고 하냐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해요.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 이렇게 돼 있긴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인 거죠. 이 두 형제의 선지자는 순종하지 않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 제목을 순종하지 않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고 붙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로보암 왕은 이런 사실을 눈으로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결과는 눈에 뻔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 우리 34절에 보면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땅 위에서 끊어져 멸망하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열왕기하 3장 16절에 보면
*열왕기하 23:16,
16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산에 있는 무덤들을 보고 보내어 그 무덤에서 해골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 그 제단을 더럽게 하니라 이 일을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였더니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
-요시야가 한 비석을 가리키면서 이 비석이 뭐냐 그러니까 성읍 사람들이 요시야 왕이 방금 벧엘의 재단에 행한 일을 300년 전에 예언했던 하나님의 사람의 묘실이다. 라고 하자, 왕이 그대로 두고 그의 뼈를 옮기지 말라고 명령해요. 하나님의 사람이 열두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했던 하나님의 말씀이 완벽하게 성취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절대적으로 순종하지 않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순종하지 않고도 살아남으려고 이렇게 하다가 보면 베드로 늙은 선지자처럼 돼요. 그나마 젊은 선지자가 죽는 모습을 통해 회개하면 괜찮은데, 회개하지 않으면 그다음에는 방법이 없는 거죠.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절대적 순종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신앙의 선배 주기철 목사님이 우리에게 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절대적 순종을 보여주신 신앙의 영웅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주 목사님을 소재로 한 영화를 보면 인간적인 고민보다는 너무 영웅적인 모습만을 강조한 나머지 성도들을 좌절시키는 경향도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불에 타는 모판 위를 주기철 목사님이 걸어가는 장면이 영화에 나오는데, 이런 장면에서 성도님들은 주 목사님의 용기와 신앙에 감동하면서도 저런 상황에서 나는 신앙을 지킬 수 있을까? 순교는 특별한 사람만이 하는 게 아니야? 라고 포기할 수 있다고 지적하는 교회 사가들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숨을 내걸고 순종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교회 사과에 의하면 아들인 주강자 장로님은 아버지가 마지막 체포당할 때의 모습을 이렇게 증언했다고 합니다.
일본 경찰이 아버님을 잡으러 왔을 때 아버님은 팻마루 기둥을 붙잡으시고 가지 않으려 하셨습니다. 그러자 어머님께서 아버님을 끌어안고 목사님, 지금 문 밖에 교인들이 와 있습니다. 목사님은 개인이 아닙니다. 한국교회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하시면서 함께 우셨습니다. 그러자 아버님은 그래, 가야 할 길이라면 가야죠. 하시곤 두 분이 손을 잡고 오랫동안 기도하신 후 할머님께 하직 인사를 하시고 성경 찬송을 듣고 문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이 증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게세마네 기도를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 주님도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면서 이 자이 지나가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세 번씩이나 그리고 나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기철 목사님이 결사 각오로 절대적 순종의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주님과 교회를 향한 사랑,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간절함이 절대적 순종의 삶을 살 수 있었다고 한국교회사를 전공하는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주 목사님이 두 번째로 체포되어 6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고 풀려난 후에 산정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인간이 못할 일이다. 그러나 인간이 십자가를 지려고 한다면 십자가가 인간을 지고 간다. 그래서 갈보리 산상까지 갈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랑의 교회 성도 여러분, 절대적 순종의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마음속에 온전히 주님만 모셔놓고 우리의 정성을 다하여 주를 섬긴다면,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절대적 순종을 하려고 한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이끌고 십자가가 놓인 갈보리 선상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때 세상은 우리가 주님의 진정한 제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조금 후에 우리가 함께 부를 복음성가가 우리의 마음의 소원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의 마음속에 온전히 주님만 모셔놓고 나의 정성을 다하여 주를 섬기리. 기쁘나 슬프나 오직 한 마음 주위에 한평생 주만 모시고 찬송하며 살리라. 주는 나의 큰 능력, 주는 나의 큰 소망 내가 항상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이 찬송이 우리의 평생의 고백과 전생의 결단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약
절대 순종의 길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죽기까지 순종했던 주님의 본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믿는 복음, 진리를 위해 절대 순종의 길로 결심하며 나아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왕의 잔치와 예물을 거절하고, 때로는 먹고 마시는 것도 금하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할 때, 주님이 오시는 그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실 것을 기대하며, 주님이 날마다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이 세상에 나아가 세상을 이기고 승리를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유혹에 넘어갔다. 유혹은 인간의 육체적인 욕구와 결부되는 경우가 많은데, 유혹이 올 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적하는 것이다. 유혹에 넘어간 선지자는 사자에게 찢겨 죽는 결과를 맞았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언약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원하신다.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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