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주일예배(주후 2022년 11월 27일)
제목: "무엇이 부흥을 가능케 하나?" 말씀: 사도행전 4:7~20 찬양인도: 쉐키나(이원준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대표기도: 박인기 부목사님(1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ㅡㅡㅡㅡㅡ *사도행전 4:7~20,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하고.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ㅡㅡㅡㅡㅡ ▶제가 오늘 ‘무엇이 부흥을 가능케 하는가?’ 부제로는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겠다. 오늘 여러분들이 회중 찬송을 불렀는데 ‘천지의 있는 이름 중에’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하셔서 그 이름을 부르는 그 이름으로 우리에게 참 복을 내리신다고 하신다.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 모두에게 참된 복이 임하는 주일이 되길 바란다. 저희 교회는 지난 한 주간 새 생명축제, 다섯 번의 집회를 통하여 2001명의 영혼들이 주님 앞에 결신하고 새 생명을 얻는 은혜를 받았다. 지금 복음이 이제는 선포가 안 된다. 이제는 전도해도 잘 안 된다. 하는 그런 어떤 패배주의가 좀 있는데 한국교회 복음은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다. 2000여명이 주님 앞에 돌아올 정도로 사랑의 교회는 계속적으로 매력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2:15, 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그리스도의 향기로서 매력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고 잃어버린 영혼들이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하나님은 정말 기뻐하신다. 그리고 오늘은 새 생명축제 이후에 우리 성도들, 기존 성도들과 새롭게 구원 받아 오신 분들이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하면 좋으며 어떻게 신앙의 방향을 정해야 하나에 대해서 그런 차원에서 본문을 가지고 부흥을 지속하며 예수님의 능력이 어떤 식으로 우리가 체험되어야 하는지에 함께 나누겠다. *사도행전 4:4,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이 본문은 얼마나 대단했는지, 오늘 앞에 3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자가 기적적으로 치율ㄹ 받았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사람은 나이가 40세쯤 되었다. 여러분 법칙을 초월할 수 있다. 우리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니 나면서 걷지 못한 자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니까 하루에 본문에 보면 5천명이 예수를 믿었다. 그것도 남자만 오천 명이다. 그러니까 여자 분들과 아이들을 합치면 약 2만 명 정도의 놀라운 부흥이 일어난 것이다.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그 앞에 2장에 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 하루에 3천명이 주님 앞에 결신하는 부흥도 일어났지만 오늘 사도행전은 남자 장정만 오천 명이었다. 그러니까 부흥의 보고서 가운데서도 노른자위의 노른자위이다. 부흥의 최고로 집중되는 노른자위이다. 그래서 이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그 다음은 이제 부흥이 일어나면 항상 두 가지가 온다. 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흥이 일어나는데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지도 못하게 하고 박해가 있었다. 그 다음에 5장에 보면 내부분열이 일어난다. 부흥이 일어나는 곳에, 역사가 일어나는 곳에 항상 두 가지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예견을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내부 분열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나 개인이나 가정에 어려움이 있기 전에 우리 하나님이 돌이켜 보면 지난 8월 13일에 청계산 산상 기도회에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한 달 동안 강단 기도도 은혜 주셔서 9.26 한국교회 섬김의 날, 하나님께서 부흥을 주실 줄로 확신한다. 조금 여러분들 9월 26일 한국교회 이틀 동안 한국교회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줄 확신한다. 대단하다. 새벽에도 일어났고, 특별부흥회에도 부흥의 은혜를 주신 줄로 믿는다. 칼 세미나, 지난주일 새 생명축제에서 2천여 명이 결신을 하는 이런 은혜를 주셨는데 그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갖는 예견, 통찰력이 어려움을 당하기 전에 박해도 있을 수 있고, 어려움 당하기 전에 내부분열도 있을 수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미리 잘 생각하고 계속해서 부흥을 지속하는 것은 참으로 가치 있는 줄 믿는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부흥과 함께 따라오는 박해와 내부분열을 이겨낼 수 있는가?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어떻게 감당 할 것인가? I.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부흥을 가능케 한다. *사도행전 4:7,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사도행전 4:10,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초대교회의 성도들, 뭔가 이 부흥의 은혜를 계속 지속할 수 있는 무언가 원인이 무엇인가?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계속 유지 하는 한 개인이나 가정이나 올 수 있는 수많은 예견들, 수많은 일들을 극복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일 때마다 모든 대화가 삶의 주제였다. 그들은 모일 때마다 예수님의 이름을 찬양했고, 그들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했고, 심지어 핍박을 받을 때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싸웠고, 병자들을 앞에 놓고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벌떡 일으켰고, 귀신과 악령의 역사 앞에서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적 전투를 한 것이다. 한 마디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빼놓고는 할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예수님의 이름을 빼놓고는 할 말이 없다. 예수님의 이름이 그 분들의 주제였다. 예수님의 이름을 통하여 권능을 일으켰다. 오죽하면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빌립보서 2:9~10,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예수님의 이름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바울은 아예 선포를 하고 자기의 체험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늘에 있는 자들도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과 구원을 선포한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이미 예수님 믿고 먼저 구원 받아 주님에 품에 안긴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 우리 먼저 간 신앙의 선대, 모든 분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는 줄로 확신한다. 땅에 있는 자들, 저와 여러분 오늘을 사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예수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도록 그리고 땅아래 있는 자들은 누구인가? 사탄에 있는 모든 자들, 모든 잘못된 사탄의 궤계 그리고 사탄의 속아서 모든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이나, 땅 아래 있는 자들이나 모두가 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이다. 놀라운 그 이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 앞에 누구든지 무릎을 꿇기만 하면, 여러분과 제가 예수님을 높여드리고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영광을 돌리기만 하면 예수님 이름 앞에 부복(俯伏)하기만 하면 웬만하면 다 은혜를 받는다. 웬만한 어려움을 주님이 다 해결해 주시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부부간의 갈등, 예수님을 이름을 부르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은 응답하시리라. 하셨다. 가족 간의 갈등, 혹은 병고나 재정적인 문제로 어려울 때, 인생의 사면초과에 놓여있다 할지라도, 오늘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기만 하면 우리의 생각을 뛰어 넘는 결말을 하나님은 허락해 주실 것이다. 예수님이 이름에는 인격이 담겨있다. 너무나 이것은 신비한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적인 치유를 받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앉은뱅이가 어떻게 베드로와 요한이 알겠는가? 예수님의 이름을 전혀 모르는 사람을 인격적으로 서로 알 수도 없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을 알게 된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이 사람들과 네트워킹 되게 하신 것이다. *사도행전 4:4,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예수님의 이름 앞에 모든 오천 명이 네트워킹 된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21세기 현재에도 그대로 통하는 것이다. 우리가 동남아시아, 미국, 유럽 같은 곳에 이 복음을 전하고 난 다음에 우리가 특별히 예수님 안에서 신앙을 같이 갖은 사람들이 처음 만나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같이 기도하고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처음 만나도 지역을 초월하고, 인종을 초월하고, 문화를 초월해서 한 형제, 한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이게 예수님의 이름이 가진 능력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름을 중요시 생각한다. 아브람➔아브라함으로, 야곱➔이스라엘, 시몬➔베드로로 이다. 우리 동양에서도 입신양명이라는 말이 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말씀은 예수님의 이름의 소중성,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 그래서 오늘부터 대강절이 시작되었다. 오늘부터 예수님 탄생까지, 25일까지, 예수님을 목상하고, 예수님을 특별히 묵상해야 하는 것이다. 이사야 9장 6절에 보면, *이사야 9:6,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정사를 매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통치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삶을 통치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에 담긴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Wonderful). 모사라(counceller), 어떤 어려운 형편에서도 우리에게 필요한 상담도, 방향도 제시해 주신다. 전능하신 하나님(Allmight God), 오늘날 변화무쌍하고 앞뒤가 힘든 이런 상황에서도 주님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시다(Everlasting Father). 그 다음에는 예수님의 이름이 가는 곳마다, 주님은 우리에게 평강의 왕(Prince of Peace)의 능력을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이시다. 그러니 오늘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주시는 이 방향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으로서 확인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놀라운 예수님의 이름의 존귀함에 존재를 또 다른 자가 알고 있는데 그는 바로 사탄이다. 사탄은 어떠하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지 못하도록 박해한다. 예수님의 이름이 전파되는 것을 너무 싫어한다. 17절에 보면 *사도행전 4:17,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하고. -그들은 지금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 바리새인과 대 제사장들이 대단한 것 같지만 그 순간에는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지 못했다. 더 퍼지지 못하도록 위협을 가했다. 그럴 때 우리는 중요한 요절이 있는데 20절을 보면, *사도행전 4:20,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참 대단한 고백이고 선포이다. 그리고 오늘 요절, 주보에 나와 있다. 12절에, *사도행전 4:12,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예수님의 이름만이 우리에게 유일한 구원자가 된다는 것이다. 오늘 새 생명축제를 통하여 구원받은 분들과 우리 온 교우들이 평생을 확인하고 지속하고 우리 것으로 고백되어야 한다. 그 이름에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름은 비길 데가 없다. 예수님의 이름은 놀라운 그 이름이다.-His name is wonderful.!!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II 예수님의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저는 어릴 때부터 저의 부친이 “젊은 아이들은 요즘 예수라고 부르는데 너는 예수님이라고 하라.”고 하셨다. 이왕이면 예수님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식사 기도하는 것조차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을 망설이는 자도 있다.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능력에 확신이 없다. 예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고 약해진 사람들도 있다. 왜 그런가? 예수님의 이름을 잘 모르거나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머리로만 알고 가슴까지 내려오지 않았거나 이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끄러워하는 분들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2천 년 전에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끄러워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 이유는 누가복음에 있다. *누가복음 9:26,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무슨 말인가?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예수님도 아셨다. 초대교회에도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당시 로마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우습게 알았다. 아주 가난한 식민지에 예수님은 가난한 여인의 아들이었고, 목수였고, 십자가에 못 박힌 어떤 범죄인이었고, 강도들과 함께 처형된 정도로 생각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자들이었다. 헬라인들은 헬라 철학을 가지고 헬라철학 차원 앞에 예수님이 전한 복음이 어리석고 유치하고 미련한 것이라고 경멸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복음을 그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지난 토요비전새벽예배 때에 간증한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왔다. 와서 “나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는 보수적이고 공화당이라고 했다. 그분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 나라 대통령, 여러분 지금 우리는 회사에서 학교에서 비지니스에서 사회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하고 우리 자녀들이 학교에서 기독교인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 이 과학시대에 어떻게 예수 믿고 너 성경이 답이라고 할 때마다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한다. “너 과학을 적당이 알면 무실론 자가 되지만, 과학을 깊이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게 된다.”라고 하라. 우리는 당신 같은 지성인이 성경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아직 모른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해야 한다. III.예수님의 이름이 지금도 세계역사도 바꿔놓는다. -예수님의 이름은 세계역사를 바꾸었다. 멀리갈 것도 없이 100년 만에 수많은 종교들 가운데 백 년 만에 민족 종교 가운데 유일하다. 대한민국에 예수님의 이름이 들어와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예수님의 이름을 빼놓고 우리나라가 역사를 해석할 수 있는가? 우리나라의 예수님의 이름이 들어오고 난 다음에 한글 성경이 들어오고 한글 성경에 띄어쓰기 제대로 되어서 글 답게 만들었다. 한글이 제대로 정리되고 교육이 제대로 실천되고, 제대로 들어와서 연세대학, 숭실대학, 이화여대, 배제, 경신 등이 신학교가 되었고, 예수님의 이름이 들어와서 병원, 병원다운 병원이 되었다. 광주에는 기독병원, 전주에는 예수병원, 부산에는 일신병원, 대구에는 동산기독병원, 기독이라는 예수 이름의 병원이 되었다. 곳곳마다 학교, 병원, 대학 모든 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특별히 여성들의 권익이 신장되었고 미국에 노예들의 해방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되었다. 그래서 그 전에는 고려는 귀족의 사회, 조선은 유교의 나라였지만 1946냔 대한민국 건국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건국되고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 처음으로 대한민국이 귀족과 양반들의 나라에서 국민들과 백성들의 나라가 되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1886년에 이화학당을 개설한 스크랜트 부인이 있다. 이분은 이화학당을 52세에 며느리랑 와서 선교를 했다. 처음에는 이화학당을 시작할 때, 1889년에 20여명이었다. 스크랜튼 부인이 전국을 다니면서 아이들을 모았는데 한국의 아이들에게 영어와 기초과목을 고등과목을 가르쳤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랑스런 한국인이 되라고 했다. 양화진에 안장되어 있다. 사랑의 교회의 이대 나온 사람은 겸손하여 예수님의 이름이 대한민국을 변화시켜야 한다. 강화도에 홍의 마을에 복음이 처음 들어왔다. 마을 전체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처음 믿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은 후에 이름을 바꾸었다. 예수 믿고 교인 된 것은 마치 옛 자아가 죽고 새 사람이 된 것을 의미하는데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듯이 거듭난 우리가 새 이름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성은 못 바꾸어도 이름은 바꾸자고 했다. 그래서 예수 믿고 믿을 신, 그리스도의 사랑 애, 능력 능, 은혜 은, 은혜 혜, 충성 충, 봉사할 봉, 거룩할 성, 바랄 희 등으로 족보에도 이름을 새롭게 올렸다는 것이다. Ⅳ. 예수님의 이름은 어떤 핍박도 뛰어넘는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박해가 온다고 했다.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하는 자들에게는 오늘 날에는 좀 교묘한 형태로 나타난다. 한국 그리스도인이 받는 초대교회처럼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반기독교적인 정서, 반기독교적인 문화, 반기독교적인 교육, 특별히 대학 강단에서 교수들이 잘못된 가르침과 잘못된 반기독교적인 것과 잘못된 언론들이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그럴듯한 말로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도 나사렛 사람 목수로 비하했다. AD4세기 기독교가 공인 될 때까지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어마한 핍박을 받았다. 네로 황제부터 시작으로 디오크렌티아노스 황제까지 오죽하면 10대 박해가 있을 정도로 어마한 핍박이 있었다. 요즘 서양에서도 하다가 힘들면 f자로 욕을 한다. 예수님의 이름을 막 말한다. 어느 수도원에 하다가 무엇이 안 되면 막 예수님의 이름을 막욕을 하기도 한다. 우리 주위에 기독교를 핍박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His name is wonderful.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능력을 회복하자. 예수님의 이름은 능력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 예수님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소원한다. 그 이름이 우리에게 역사하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할 때, 역사가 일어난다. *사도행전 4:30,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몸이 아픈 자, 인생살이에도 짊을 지고 있다면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의 영적 마패를 사용하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길 소원한다. 놀라운 그 이름 찬송을 할 때, 치유가 있기를 원한다. 내 삶의 애환과 기도의 제목을 이 찬양에 올려라. 이 찬송이 강력한 기도의 제목이 된다. *요한복음 16:24,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약 박해와 분열도 통치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확신하며,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우리 모두가 삶의 현장에서 나는 예수 믿는 자라고 고백하여야 한다. 우리가 영적인 거룩한 기백을 회복하여 수많은 난제들이 해결되길 기도해야 한다. 역사를 바꾸신 예수님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받들어서 다음 세대를 세우고, 온전한 믿음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전권대사로서 살아가기를 실천하여 주님을 기쁘게 하는 자녀로 살아야 한다. -베드로가 성령 충만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담대히 선포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박해하여 복음 전파를 막으려 했으나 베드로는 오히려 이것을 복음 증거의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성도들도 어떠한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낙심하거나 두려워 말고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선용해야 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생애를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비유했다. 집 모퉁이의 머릿돌은 승리하신 예수님, 곧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리킨다. 사도들을 위협한 장로들-그들은 사도들에게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협박했다. 공회원들은 정당한 방법으로는 사도들의 답변에 반박할 수 없으므로 사도들을 부당하게 위협했던 것이다. 이처럼 진리를 위협으로 막아 보려는 생각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들에 대하여 베드로와 요한은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더 옳다고 말하였으며, 또 자신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답변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명령에 어긋난 법률을 단호하게 거부한 베드로의 태도는 초대 교회 이후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으며,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견지(堅持)되어야 할 황금률이 되고 있다.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