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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1년 9월 12일)-Jesus Parables for the New Nomal Age. 제목: ''작은 겨자씨의 꿈(Small Mustard Seed's Dream)" 찬양인도: 이원준 부목사님 기도: 윤현수 부목사님 말씀: (마태복음 13:31~33) 사회: 윤하중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 (마태복음 13:31~33) 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 ※ 아래 설교 동영상은 1부와 다른 2부 영상이니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음.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오늘 이 예배의 날은 주께서 정하신 날이니, 축복하고 즐거워하라고 했다. 오늘 예배를 통하여 창백하고 메마른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생수가 흐르는 밈음 동산을 경험하기를 바란다. 이번 시리즈를 새 판짜기를 위한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이라고 했는데, 조심 조심스럽다. 요즘 사회상을 보면 어떠한가? 기축(기축(基軸)이 흔들리는 세상이다. 지난주에 목사님들과 대화를 하는데, 4차 산업혁명인 메타버스, 증강현실 가성현실에서 지금 현실과 가상세계가 혼대되어 있는 것이다. 사역을 어떻게 할까 대화를 하는 가운데 네이버에 보면 ‘ZEPETO’라는 가상 메타버스가 시작되고 있다. 벌써 이억 명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제패토에 가서 개척교회를 해야겠다는 것이다. 어떤 대학은 후기 졸업식을 메타버스로 했다. 아바타 사용해서... 기축이 흔들리는 세상과 사회 정치적 상황은 어떠한가? 그냥 때를 쓰고 큰소리치는 사람이 사회 정의를 붙잡아가는 이상한 세상이 되고 있다. 오죽하면 주님은 다수를 따라 악을 행치 말라고 하시겠는가? 이 사회 정의가 기울어졌다. 오늘 저는 ‘겨자씨와 누룩’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는데, 여러분이 다 알고 있지만, 주님은 그 시대 1세기에 이 말씀을 듣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이 말씀을 듣는 청중들에게, ~~ 주님은 이 말씀을 듣는 대상을 놓고 제자들에게만 했다ㆍ 특별히 이제 다음 주에 설교할 내용의 ‘보화와 진주의 비유‘이다. 특정한 대상을 두고 이야기 한다. 그것은 제자들에게만 이야기 했다. 오늘 말씀은 제자들이 아니라 모든 일반 청중들, 남녀노소, 겨자씨가 밭에 뿌려지는 것은 주로 남성들을 위해, 누룩은 여성들을 위해, 남녀노소 누구에게가 해당되는 말씀이다. 내가 자격이 있다, 없다가 아닌 따라서 이 기축이 없는 상황 가운데, 이 겨자씨와 누룩의 말씀의 당시에 배경도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당시에 정치적 환경은 로마제국의 눈치를 보고 사는 암흑의 시대였다. 종교적으로는 성전의 영광이 떠나가는 시대였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아래서 종노릇을 하고 있었다. 사회 안전망은 얼마나 취약했는지, 강도들이 너무 날뛰어서 여리고로 가는 길이 너무 무서운 상태였다. 소망이 한 조각도 찾기 힘든 기울어진 낙관론을 펼칠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서 주님은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새 소망과 꿈을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대해서 오늘 이 비유에 대해서 겨자씨와 누룩의 이 비유를 말하고 있다. 스펄전-‘겨자씨와 누룩’이 비유는, “지극히 작은 씨앗 속에 엄청난 세계를 담고 있는 위대한 짧은 비유이다.”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고, 다음 주에 말씀드린 값진 보화와 극히 값진 진주의 비유는 아주 익스클로씨브(Exclusive-독저점적인)한 대상이었다. 그 듣는 대상이 누구냐면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다. 그야말로 집중에서 듣는 자들에게 주는 말씀이지만, 오늘 말씀은 누구나 다이다. 겨자씨는 남자, 누룩은 여자, 집안에서 일하기에 익숙하다. 이 겨자씨의 비유는 모두가 다 포함된다. 지금은 팬데믹이라는 상황 때문에 사람들이 영적 패배주의가 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를 정신 차리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 비유를 내것으로 삼으면 하나님은 일 하실 것이다. , *마태복음 13:31, 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마태복음 13:33, 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마태복음은 하나님 나라를 천국이라고 함부로 부를 수 없고, 천국은 이것이라고 정의할 수 없다. 이것은 영안이 열리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이것은 이 세상의 가치관, 이 세상에 때를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이 세상의 수많은 어떤 대단한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고, 오늘 정말 힘을 없는 자이다. 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렇게 예배를 사모하고 현장 예배와 온라인 생중계를 시간을 지켜서 드리며 잔정하게 사모하며 드리는 예배 자들에게 영안을 열어주시길 바라는 것이다. 핵심은 그렇다. 겨자씨의 가지들이 자라서 큰 나무가 된 것이다. 단수가 복수가 된 것이다. 조금 더 들어가면, *마태복음 13:32,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겨자씨가 너무 작다. 겨자씨를 가지고 왔다. 그 작은 것이 커서 새들이 깃들이다. 그 당시에 새들이라는 것은 단순하게 상징하는 것이었다. 헬라어로 ‘탑페텐’으로 이방인이 축복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겨자씨 같이 아무것도 아닌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수많은 이방인들이 복을 받을 수 있도록 물댄 동산 같은 은혜를 받는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초대교회는 십자가의 복음이 너무 초라했지만, 강가에 자라는 나무처럼 크게 번성해서 복음의 가지가 수천, 수억으로 사람들에게 연결이 된 것이다. 그리고 비유로 말씀 하시되 천국은 가루 서말과 같다고 부풀게 하여 영안을 열고, 이것이라고 말은 아 하지만, 이 누룩과 밀가루에 대해서 눈을 열어라는 것이다. 누룩이 밀가루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고, 누룩이 밀가루로 들어가서 밀가루 그리고 그 비유로 말씀하신다. 누룩은 밀가루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더 밀가루가 많으면 많을수록 설렌다. 그 많은 밀가루를 누룩은 밀가루의 영향을 받지 않고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이 겨자씨와 누룩은 큰 나무가 되고, 작고 미미한 아무것도 아닌 것이 전체를 변화시킨다. 이사야가 고백한다. 예수님에 대해서 표현을 할 때에 ‘마른 땅에서 나온 작은 줄기와 같다.’고 말한다. 이사야 11장에 보면, 보잘 것 없다는 것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마구간이었고, 무슨 선한 것이 나겠냐고 천대 받던 나사렛이었다. 공생에 기간 동안 그 고생을 많이 하시고, 로마의 반역자로, 십자가의 죄수로 수치스럽게 참담하게 세상을 마치셨다. 누가 예수님을 세상이 구세주가 되시고, 왕 중에 왕이 되시고, 다시 오실 왕이 되시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되시고, 역사의 주인이 되실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지금 우리는 오늘 날 전 세계가 예수님이라는 복음의 나무 아래 모여 있는 줄 확신한다. 무엇보다도 삶의 목적이 없고 우울증, 자살하려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 수많은 시대의 새들이 예수님이라는 구원의 나무 밑에서 치유 받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생명수 역사를 가지고 창백한 영혼이 생수의 강이 된 것이다. 판이 바뀐 것이다. 열 두 제자를 보라, 그 가운데 제대로 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다 하찮은 겨자씨와 같은 존재들이었다. 뒤에 사도들 가운데 대표적으로 좀 잘났다고 했던 사도 바울도 로마를 향하여 로마에 복음을 전하겠다는 그런 소명을 가지고 로마를 향해 갈 때는 초라하게 죄수의 몸으로 갔다. 누가 초라한 바울을 추대했겠는가? 그런데 수많은 역사가들이 바울이 걸어간 로마의 아퀴아 가드의 걸음걸이 때문에 대이동의 역사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었다. 우리 시대도 그런 사람이 많다. 초라한 집안에 힘없는 며느리가 예수 믿는다고 집안의 박해를 받고 머리채 잡히고 온갖 수모를 당하고 이혼의 위험을 당했는데, 결국은 온 집안이 그 며느리 때문에 복음이 된 것이다. 할렐루야!~~얼마나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된 것인가? 어릴 때 안동 지역에서 예수 믿는다고 어린 아이가 예수 믿는다고, 선교사를 통해 예수를 믿었는데 복음이 너무 좋았는데, 광산 김씨, 종가 집이었다. 초등 5학년 때 그 광산김씨가 대청 밑에 데려다 놓고 그 예수 믿는 아들을 인두로 팔을 지졌다. 계속 믿겠다고 하는 아이를 어른들이 인두로 어깨를 지지니 도망쳐 나왔다. 선교사를 만나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사명을 받고 신학교를 갔는데 그 집안 어른들과 아버지가 얼마나 쌘 지 모든 세간살이를 다 부순다. 기가 막힌 그런 핍박과 횡포를 당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아버지가 그 세례를 받았다. 기가 막힌 일이다. 부산 부민교회라고 하는 교회이다. 오케스트라가 와서 그 목사님의 위임 식을 하는데, 시온성과 같은 교회, 그 영광이 찬란했다. 중3때이다 위임 식 오케스트라 반주할 때, 아들에게 아버지가 세례를 받고,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된 것이다. 한국교회가 이런 힘으로 버텨온 것이다. 겨자씨와 누룩의 영적인 DNA가 무엇인가? 작지만 위력적인 것이다. 작다고 위축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놓고 이제 끝났다. 이제 한국 교회가 부흥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이, 이것 자체가 겨자씨 같은 상황이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자격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역발상을 해야 할 줄 믿는다. 내 자신이 겨자씨와 같다. 내 자신이 작다고 생각하고 이 상황, 그것이 오히려 내 자신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전적으로 주님만 의지하는 환경을 받는 것이다. 제자들 입장에서 삶 자체가 오히려 유대의 귀족이 아닌 상황자체가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배우기 결심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시대에 지역주의와 혈연주의의 민족주의의 모든 것들, 내세우기가 하나도 없는 제자들이 예수님만 붙잡고, 예수님께 배우고, 예수님만이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계기가 작은 겨자씨가 되어 바뀐 것이다. 그래서 우리 상황 자체가, 한국교회와 내 개인이나 모두의 상황 자체가 작은 겨자씨 같이 초라하다고 생각한다면, 새판 짜기의 키가 뭐냐면, 내가 작은 겨자씨 같이 초라하기에 절박한 심정으로 주님만을 붙잡는 것이다. 그리고 환경적, 가정적으로 내가 겨자씨 같아서 어렵다고 주님만을 붙잡게 되면, 그런 마음으로 주님 섬기고, 그런 마음으로 자식을 키우고 그런 마음으로 가정을 세우면, 그 아이들 절대로 예수님을 거부 안 한다. 강남에서 잘나가고 있는 대로 돈 가지고 다하는 것이 그것은 애가 겨자씨가 아니다. 그 아이는 처음부터 하나님 앞에 뻣뻣한 것이다. 주님을 의뢰해야 한다. 눈물로 기도하고 모두를 주님이 주시지만, 이 상황을 하나님 앞에 나와서 나는 겨자씨 같다고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겨자씨 새판 짜기 어떤 토대이다. 끝까지 우리는 주님 앞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주님 앞에 납작 엎드려야 한다. I’m nothing!!! 아임 나씽!!!~ 목회자인 저도 죄인이고, 주님 앞에 어린아이이다. 오늘 이 배경을 가지고 한두 가지 앞으로 계속 집중해야할 새판 짜기를 하겠다. I. 겨자씨는 뿌려져야 한다. -겨자씨가 뿌려져야 한다. 또 누룩은 밀가루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겨자씨와 누룩의 DNA는 작을수록 위력적이다. 뿌리지 않으면, 심지 않으면, 작은 것으로 끝난다. *시펀126:6,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중요한 것은 울며 씨를 뿌려야 한다. 우리가 겨자씨 같다고 해서 아무리 꿈과 비전이 있어도 뿌리지 않으면, 씨앗을 심지 않으면, 평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겨자씨 속의 엄청난 생명이 역사가 담겨 있지만, 오늘 우리에게 각인 시켜 주는 것이 무엇이냐면, 진짜 중요한 것은 겨자씨 자체가 아니라, 겨자씨가 땅에 떨어져서 심겨져야 하는 것이다. 겨자씨가 고귀하고 대단하다 하더라도, 심겨지지 않으면 나씽이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나름대로 확신하고 감동도 받지만,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겨자씨를 마음에만 담을 뿐, 감동만 있을 뿐, 일상의 삶의 땅 속에 열심히 심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새판 짜기가 안되고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 상자 속에 여러 개의 씨앗이 있다고 여겨보라. 그 상자를 가만히 두기만 하면 그 씨앗은 열두 달이 지나도 여전히 같은 상태로 있을 것이다. 예쁘고 아름답고 예쁜 씨앗이 그대로 있으면, 그냥 놔두면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겨자씨는 뿌려져서 흙속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결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 내용은 교회를 오래 다닌 자들이 깊이 고민해야 할 것이다. 오래 다닐수록 조심해야 한다. 그러니 새판 짜기가 쉽지 않다. 그런 사람들에게 오늘 이것이 답이다. 아무리 좋은 씨앗이라도 흙 속에 뿌려져야 한다. 그냥 있으면 안 되고 내가 기도의 씨를 뿌리고, 겨자씨처럼 조그만 것이라도 뿌려야 한다. 그래서 이번 새판 짜기에 모두가 보라고 반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의 포스터를 걸게로 만들어서 걸어두었다. 새판 짜기는 '반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반고흐는 저렇게 그림으로 나타냈지만 우리는 씨를 신실하게 뿌리자. 뿌리되 믿음과 인내로 뿌려야 한다. 씨를 뿌리되 인내하면서 겨자씨 자체가 믿음의 행위이다. 너무나 작기 때문이다. 또 씨를 뿌려도 한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즉각적으로 싹이 나거나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 봄에 뿌리고 바로 추수가 될 수 없다. 염천과 폭우와 바람을 견디어야 한다. 그런 그 씨앗이 오십 배 백배 천배의 결실을 내는 것이다. 씨를 뿌리되 인내해야 된다. 내가 뿌린 씨를 내가 보지 못할 때가 있다. 당대에 못 봐도 그 믿음으로 뿌리면 그 다음 대에도 된다. 결과에 대해서 염려도 말라. 그 씨를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너무나 신비한 것이다. 성령님이 하신다. 저는 이 말씀이 정말 맞는 것 같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너무나 억울하고 답답했다. 말 그대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어 가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에 전국이 혼란했을 때 말도 못한 일들이 있었다. 제주 4.3사건이나, 여수순천사건을 우리가 함부로 해석을 하면 안 된다.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왜냐하면 여수 순천 사건을 함부로 해석하다가는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가 우습게 된다. 동일이 동신이 순교가 그 아들들이 우습게 되는 것이다. 손양원 목사님은 ‘사랑의 원자탄’이란 책으로 유명하듯이 자식을 죽인 아들을 양자로 삼는다. 믿음의 씨를 뿌렸다. 과거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굶어죽어도 자식들을 신앙 속에서 제대로 교육하고 올바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믿음의 기도로 자식을 키웠다. 6.25때 낙동강 밑에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영적인 겨자씨를 뿌리고 그 어려운 가운데 천막치고 아이들을 교육했다. 그게 그런 씨를 뿌리지 않았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이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이렇게 한국교회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에 신앙의 선배들이 그 겨자씨를 뿌리지 않았다면, 새들이 와서 먹는 것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멋진 씨앗을 예쁜 상자에 종류대로 담아두기를 말아야 한다. 안 뿌리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겨자씨는 너무나 깨알보다 작다. 한 번 보여주겠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미국에 있을 때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이 이 패를 만들어서 놓고 기도했다고 가져왔다. 그랬더니 사업 망한 것이 다시 상생되었다고 했다. 요새는 이런 것을 만들지 말라. 요즘은 메타버스 시대이니까... *마태복음 17:20, 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못할 것이 없으리라... 오늘 날 작은 겨자씨 한 알만 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긴다는 것이다. 그다음에 새판은 겨자씨 한 알 만으로도 사는 것이다. 진짜 중요한 것이다. 주의 성일 기억하고 시간을 지켜서 주님 앞에 올바른 제단을 쌓는 것이 겨자씨를 심는 일이다. 겨자씨는 올바른 예배, 아침마다 기도, 차별금지법,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 그것 다 겨자씨 뿌리면 앞으로 큰 나무가 되어서 유럽교회를 답습하지 않게 될 것이다. 본당에 오려고 한두 시간 일찍 나와서 줄서고 있는 것도 겨자씨를 심는 것이며, 광장에서 예배드리는 것과 정오기도회를 지키는 것, 내년 3월 9일까지를 위해 참 자유의 복을 갖는 지도자의 복을 주시라고 기도하는 것도 겨자씨를 심는 것이다. 북한은 혼자 김정은 자유가 있다. 나머지는 자유가 없는 것이다. 지금 자유가 없어지고 있다. 코로나 이 사태로 인해서 이제 유럽은 자유를 찾았다. 개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못한다. 우리는 개인의 동선을 추적하고 경찰국가 만들어가지고 살아간다. 미국은 자유가 있어도 그렇게 개인을 침범하면 큰 일이 일어난다. 참 자유를 아는 지도자의 복을 주시라고 기도해야 한다. II. 새판 짜기는 꿈 판짜기이다. 겨자씨의 은혜를 꿈 판짜기가 되어 다음 세대에 전수를 해야 한다. 어제 아침에 대학부 그들의 가진 꿈을 이야기 했듯이 88올림픽 어떻게 했다고 나누었다. 그때 모두가 하나가 되었다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우리 한국이 그렇게 되어야 하나가 되어야 한다. 굴렁쇠 굴릴 때, 대한민국의 굴렁쇠가 다 동이났다고 했다. 그게 모두가 한마음 하나가 되었다. 미국에 있을 때, 그것을 보고 감동이었다. 중국 사람은 세계에 어디나 중국음식을 가지고 나타낸다. 세계 곳곳마다 없는 곳이 없다. 일본사람들은 일본 무역상사 만든다. 한국은 세계에 나아가면 교회부터 세운다. 열가정만 모여도 교회를 세웠다. 너무나 신비하다. 훨씬 더 좋은 여건을 이민교회를 통해 얻었다. 그래서 글로벌화가 우리가 먼저 했다. 한국 교회는 이민 교회에 모여 예배드리고 애들 교육하고 했기에 그렇게 글로벌화가 된 결과이다. 인구가 훨씬 적지만 우리민족은 역동적인 DNA를 갖고 있다. 폭발적인 에너지를 가진 자들이 우리 민족이며, 누구도 BTS와 손흥민을 못 만든다. 3-40대 젊은이 하나가 아프리카에 휴대폰만을 가지고 갔다. 그 아프리카 사업이 번창했다. 전쟁의 폐허에서 겨자씨보다 못한 그 환경에서 컸다. 세계 10대 경제 강국인 우리나라가 유대민족보다 아이큐가 더 좋다. 배움의 대한 열망도 더 높다. 또한 정이 많아서 살기 어려운 시대에 내 젖을 물려주었다. 새판짜기는 모판짜기이다. 우리의 연약하지만 이러한 강점들이 살아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랑글로벌 아카데미는 내년도부터 예배 대학원, 제자대학원 글로벌네트워크 대학원 텔레이오스, 유스아카데미, 집중적으로 젊은 대학생들을 제대로 훈련시킬 것이다. 한해 휴학시키고 6개월은 하나님 나라, 역사의식, 제자훈련과 아프리카와 런던에 가서 배우고 6개월은 우리나라에 전국에 다녀와서 제대로 키워야 함을 계획하고 있다. 어른들은 은퇴하신 어르신들 큰 나무에 깃들어 젊은이들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여러분, 아무리 비참한 인생일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겨자씨의 꿈을 갖고 있는 한 다시 일으키시는 주님의 계획을 믿어야 한다. 이 겨자씨의 놀라운 씨가 뿌려져야 한다. 새판짜기, 모판짜기가 오히려 아무것도 아닌 것이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아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있는 집에 태어난 것보다 가난한 집에 태어난 것이 오히려 더 큰 축복이라는 것을 지금 깨달아야 한다. 나중에 뿌리지 말고 지금 뿌려야 한다. 나이가 많은데,,, 핑계이다. 지금 뿌려도 늦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이 일하기기 때문이다. 신비한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지금 주님은 깨달으라고 하신다. 나중이 아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그러기엔 우리 인생이 아쉽다. 지금 어려울수록 오히려 더 설레이고 그래서 주님의 신적개입이 있어서 신실한 종으로 살기를 축원한다. ♧요약 하나님이 작은 겨자씨를 큰 나무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연약하고 항상 위대하신 주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시기에 초라하고 절박할수록 눈물로 작은 위력을 가진 겨자씨를 심어고 인내하여서 영적인 패배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산을 옮겨주시기에 우리는 새판짜기의 은혜로 베풀어주실 것을 믿고 꿈 판짜기의 겨자씨로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예배와 모든 영역에서 헌신적으로 신실하게 드려야한다. 그래서 겨자씨의 작은 꿈을 이루어가야 한다. ㅡ겨자씨는 모든 씨보다 작지만 자란 후에는 많은 새들이 깃들게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는 처음은 미약하나 결국은 많은 결실을 거두게 된다. 누룩은 작은 것으로도 전체를 부풀게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천국 복음의 능력은 비록 작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 시대의 모든 영역에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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