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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4월 20일)

제목: "입술의 열매"
말씀: 히브리서 13:9-15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전도사님

설교자: 김도훈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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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3:9-15,
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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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아이들이 사람 머리 모야 안에다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을 한 번 적어보라고 하고 여러 가지 공간을 이렇게 그림을 그려서 거기에 이것저것 그림을 그려서 놓은 것을 본 분들이 있을 것이다. 어떤 아이들은 자기 머리 모양에 큰 반을 잘라서 한 쪽은 만화, 한 쪽은 오락, 이렇게 적어놓고 그 옆에 조그맣게 ‘숙제’ 이렇게 써놓는다.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 만화하고 오락이고 숙제는 정말 하기 싫은데 적기는 적어놓아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적어 놓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만약 지금 그 그림을 그려 놓는다면 무엇을 그릴 수 있겠는가? 무엇을 지금 그려놓는가이다. 아마 여러 가지를 그릴 수 있을 있을 것 같다. 고난주일 부활절 전에 금식을 많이 하신 분들은 그 때를 그려보라고 한다면 설렁탕, 피자, 이렇게 적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사실 우리 마음 가운데 생각나는 것들,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들을 이것저것 생각해서 그려본다면 사실 우리의 철학, 우리의 사상,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시스템도 이렇게 그려볼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바로 당신의 머리속에 있는 것을 영역을 정해서 그려보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리겠는가? 중간에 십자가 하나를 딱 그려넣으실 수 있는가? ‘은혜’라고 크게 그려 넣을 수 있겠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경 기자가 그 대상으로 하는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마 그 중심에 예수님을 적어놓고 그 옆에다가 다른 것을 적어놓은 것 같다. 그러니 9절에 말씀에 다른 교훈에 끌리자 말라는 말씀이 나온다.
 
*히브리서 13:9,
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그렇다. 분명히 마음을 굳게 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단단하게 한다는 것이며 우리가 그 마음을 점프하고 나가서 열심히 일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단단하게 하는 그 무엇인가는 무엇이어야 하냐면 은혜이어야 하는데, 은혜로써 굳게 해야 하는데 다른 교훈 어떤 것이 그 안에 여러 가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 기자는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고 한다. 여기서 교훈은 그냥 급훈이나 그런 것이 아니라 나를 좌우지 하는 그 어떤 것이다. 예를 한 번 들어보면 교회를 아주 잘 다니는데 초팔일에 반드시 나는 절에 가야된다. 그래야지 내 삶이 바로 설 것 같다는 자라면 이 분은 그 마음의 중심에 교회를 하나 그려놓고 옆에다가 사찰도 하나 그려놓을 것 같다. 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리지만 연 초에는 “반드시 사주를 봐야지 나는 살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한다면 의아해 하지 않겠는가? 예수를 잘 믿는 분이 왜 또 사주를 보는가? 그분은 십자가를 그려놓았지만 그 앞에는 연 초에는 ‘사주’라고 그려놓는 것이다. 우리 안에 여려 가지 다른 교훈들이 있을 수 있다. 삼각산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계룡산에서 돌을 하나 올릴 수 있는 인생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 다른 교훈에 음식에 문제가 당시에는 있었다.
 
예수님을 믿고 이제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고 은혜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여전히 주님을 모르는 유대교 정통 유대인들은 제사를 옛날처럼 그대로 드려야 된다고 하고, 절기를 지켜서 어떤 음식은 먹어야 되고, 어떤 음식은 먹으면 안 되고, 어떤 때는 반드시 금식을 해야 하고, 어떤 때는 반드시 먹어야 하고,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이런 교훈들이 당시에 난무하였다는 것이다. 완전히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 옛날 유대교회에 정통했던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막하니까 은혜를 아는 자들까지 그 교훈에 꼬드김을 당한 것이다. 오락가락 중간에 애매하게 하는 그리스도인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성경 기자는 10-11절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히브리서 13:10-11,
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정말 어려운 본문이다. 이 시간 온라인 생중계로 보고 계신 분들은 정말 놀라운 은혜를 누리시는 것이다. 이 어려운 부분을 수요저녁기도회에서 특새 기간에 나누고 있지 않는가? 우리에게 제단이 하나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제단이 하나 있는데 그 제단에서는 이전에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먹을 권한이 없다고 한다. 옛날 레위인들 제사장들은 이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먹을 권리가 있었다. 화목제를 드리거나 소제를 드리거나 속건제를 드리거나 속죄 죄를 드린다 하더라도 제사장의 몫, 제사자의 몫, 돕는 자들의 몫들이 조금씩 있었다. 화목제 같은 경우에는 더욱 풍부해서 백성들까지도 초대받아서 풍성하게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고 나서 함께 먹고 나누고 즐거워하는 시간들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성경 기자는 우리에게 있는 제단에는 옛날 그 제단에서 섬기는 자들은 먹을 권한이 없다고 한다. 왜 그러는가? 옛날 제사에서도 옛날 유대교 제단에서도 못 먹는 때가 한 번 있었다. 그것은 대제사장이 대 속죄일 날, 모든 이스라엘 회중 한 명 한 명, 민족을 위하여 속죄할 때는 그 짐승의 피를 지성소에 들어가게 하고, 나머지를 하나도 안 먹고 영문 밖에 가져가서 다 불태웠다. 아예 아무것도 안 먹었다. 그때가 한 번 있다는 것이다. 성경 기자는 정말 성령께서 주시는 그 감동하심으로 지금 옛날제사의 정통해 있는 이들에게 너희들은 새로운 제사에서 먹을 권한이 없는데, 이게 이렇게 왜 이렇게 되냐면 ‘옛날도 이렇게 되는 날이 있었지, 옛날에 너희도 못 먹을 때가 있잖아. 그게 대 속죄일 때 못 먹었잖아. 그때를 잘 생각해봐’,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대 속죄일 때는 못 먹었는데, 이제는 예수님 이야기가 나온다.
 
*히브리서 13:12,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예수님께서 바로 대 속죄일에 하나님께 드려진 짐승처럼, 그 피를 다 지성소에서 올려드리고 영문 밖에서 주님께 또한 올려 졌다는 것이다. 이 제사가, 영적 완전한 이 제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제는 다시는 그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고 이제 다시는 제단 안에서 먹을 일도 없다는 것이다. 옛날의 시스템 가운데 유대교의 그 제단 안에서 먹는 일은 이제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제단, 우리 그리스도인의 제단은 옛날 유대교가 믿었던 그 제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막도 성전 안에 있었던 그 제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꾸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제발 옛날 시스템을 가져오지 말라. 먹고 마시기를 지키고 그 옛날 시스템을 해야 된다고 허락하지 말라. 다른 교훈을 가져오지 말라고 지금 간절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율법의 완성 자이신 예수님은 옛 제사를 완전히 다 예언을 다 성취하시고 구약의 율법과 제단까지도 다 만족시켜 주시고 그리고 새 제단을 이루셨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새 제단이 있다. 그 제단이 어디에 있는가?
 
*히브리서 13:13-14,
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2절에 예수님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고 되어있는데 지금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자고 하고 있는가?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 주님이 지금 어디계신가? 9절을 보면 우리의 제단이 어디 있는가? 예루살렘 도성에 있는가? 성전 안에 있는가? 아님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 있는 바로 그곳에 우리의 재단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치욕을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에 가신 것처럼 우리의 재단이 거기 있으니까 우리도 거기에 가자는 것이다. 그곳에서 예루살렘 성을 보면 그 도시가 평강의 도시를 보이겠다. 그 안에는 아름다움도 있고 옛날에 안정감도 있고 좋은 것도 있고 성전도 있고 다 있는 것 같지만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는다라고 말씀한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께 올려드릴 제단은 나그네 인생길, 도성 없이 영문 밖에 머무는 것과 같은 그런 삶이다. 제단에서 안정되게 고기를 먹고 나누는 것이 아니라, 치욕을 짊어지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바로 그 삶이, 그 제단으로 나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의 인생이라는 것이다. 장소적으로 사하라 사막에 가야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 깊고 깊은 산속에서 다른 사람을 아무도 만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바로 함께 이 세속 도시 가운데에 있지만 우리는 영적으로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세상은 이해할 수 없다. 더 정확히는 이해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고생스럽다.
 
오늘이 특새 4일차다. 3일차에 피곤함이 조금 더 무거울 것 같다. 매일 두 시 세시에 여기가 성도님들로부터 하나둘 채워져서 간절히 기도하고 찬송하는 이 공간이 지금 있다는 것을 예수님을 안 믿는 분들이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어떻게 생각할 것일까?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말로만 듣던 ‘광’자가 듣던 신도가 아닐까? 할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미친다면 우리는 이 '광자'가 즐거운 광자이고 '빛 광자'로 우리 안에 들어올 줄로 안다. 사실 영문 밖에 제단으로 나아가는 삶의 방식, 평강의 도시를 떠나 영문 밖 주님께서 계시는 제사는 그 제단으로 나아가는 삶의 방식은 우리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 우리의 제자도이다. 비전을 붙잡을 때도, 직장을 구할 때도, 자녀를 기를 때도, 가정을 섬길 때도, 기업을 운영할 때도, 공동체를 섬길 때도, 영혼을 위해 기도할 때도 바로 이 영문 밖 제단으로 나아가는 방식이 우리에게 그 삶의 방식을 적용을 받는다. 이번 한 주간 바로 오늘 우리가 이 놀라운 제자도,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적용을 한다면 이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제 20차 진행되고 있는 특별새벽부흥회 앞으로 기도하며 찬송하며 힘있게 나아가는 것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특새에에서 말씀으로 먹고 마시고 마음껏 찬양하고 기도하며 이 한 주간을 올려드리는 것이다. 주님이 걸어가신 길은 치욕의 길 고난의 길은 모든 영역 가운데 우리가 다양한 방법으로 감당해야 된다. 그러나 예배의 자리를 사모하며 기도의 자리를 사모하며 바로 이곳에서 마음껏 주님 앞에 올려드리는 것을 참으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너무나 놀라운 것은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삶이 쉽지 않은 삶의 패턴, 또 이렇게 새벽을 깨우고 또 낮에가서 정상적으로 일하고 밤에 먹을 거 먹고 일찍 잠에 들고 이 어려운 패턴 가운데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 있다. 

*히브리서 13:15,
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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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성경기자는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찬송의 제사를 드리자고 강력하게 권면한다. 몸이 지치고 눈물이 난다. 해결해야 할 것이 많다. 그냥 ‘특새’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전반을 바라보면 그리스도인으로, 주님의 제자,로 주님의 자녀로,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 치욕의 길, 내가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길은 참으로 때로는 무거울 때가 있고, 손해가 날 때도 있고, 눈물 날 때가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는 무엇을 드리자는 것인가? 찬송의 제사를 드리자는 것이다. 우리 입술에는 찬송보다는 불평과 억울함과 또는 이해할 수 없다는 고백이 나올 법도 한데, 그런데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찬송의 제사를 드리자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렇게 새롭게 치러졌다. 또 너무나 역설적이다. 너무나 이율배반적이다. 치욕을 짊어지고 주님께 나아가고 있는데 주에게 힘들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우리 안에서는 샘솟듯 찬송의 고백이 우리의 입술을 통해 나가는 것이, 우리의 환경이 우리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결정한다. 하루 종일 화장실에 있으면 화장실 냄새가 난다. 우리의 몸은 먹은 대로 배출한다. 우리가 매운 것을 먹으면 매운 것이 나오고, 쓴 것 먹으면 쓴 것이 나온다.

 
그런데 인생이, 환경이 고생이고 우리가 고난과 곤란과 어려움을 온 몸으로 감내하면서 인생의 고난을 먹고 마시며 나아가는데, 우리에게 나오는 것이 찬송의 제사라면, 이 얼마나 놀라운 총체이니가? 이것은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 주님에 제단에서만이 가능하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영 가족 모든 성도 여러분, 모든 존재는 열매 맺기를 원한다. 식물도 동물도, 종족 본능 유지를 가지고 있다. 영혼을 가진 인생은 더할 것이다. 반드시 열매 맺기를 원한다.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잘 됨을 통하여 열매 맺고, 자녀를 통하여 열매 맺고, 관계를 통해 열매 맺고, 자신이 섬기는 기업이 잘 되는 것을 통해서 열매 맺기를 원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열매를 맺기를 원하는가? 우리는 어떤 열매를 맺는 존재들인가? 우리는 찬송의 제사라는 열매를 맺는 존재들이다. 그런 인생이다. 우리의 입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리의 행동까지 그 행동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는 우리의 입술의 열매, 우리 삶의 열매는 찬송의 제사인 것이다. 은혜와 감격으로 삶의 결단으로 찬송하고 고백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모든 선한 일을 도모하고 섬기고 전도하고 애써서 주님께 다시 와서 주의 제단에서 찬송하는 우리가 되길 원한다. 기업을 경영하고 자녀를 양육하고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하면서 자신의 맡은 일을 다 하면서 그렇게 찬송의 제사를 때마다 입술로 올려드리는 아름다운 인생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영 가족 여러분,
이제 특새를 통하여 찬송의 제사를 올려드리면서 이 한 주간 은혜의 풍성한 바다가 되기를 바란다. 이후에 모든 삶 가운데 환경과 관계없이 상황과 관계없이 우리의 입술의 열매로 찬송의 제사가 계속 맺힐 것이다.
 
♣요약
우리를 다른 교훈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오직 주만 쫓아가게 하셔서 주님의 제자로서 거친 땅에서도 찬송의 제사를 올려드리는 제자가 되었음에 감사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다시 한 번 결단하고 고백함으로 기쁨과 감사로 찬송의 제사를 주님의 제단에서 올려드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잘못된 교훈들은 여러 가지이며 다양하지만 이것들은 전에 그들이 받았던 교훈과는 전혀 다르며 이러한 잘못된 교훈들은 교회에서 들어보지 못한 전혀 생소한 것이다. 이 잘못된 교훈들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 등 외적이고 사소하며 없어질 것들이다. 이 잘못된 교훈들은 어떠한 식으로도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그것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신령하게도, 겸손하게도, 감사하게도 못할 뿐만 아니라 물론 하늘에 이르게도 못한다. 이러한 잘못된 교훈을 받는 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제단의 특권을 박탈당하며,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리스도 교회에는 제단이 있다. 이 제단은 물질적인 제단이 아니라 인격적인 제단이며 곧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제단인 동시에 우리의 희생 제물이시다. 이 제단은 진정으로 믿는 자들에게 만찬을 제공해 준다. 주의 성만찬은 복음 시대의 유월절 만찬이시다. 구약의 장막이나 레위기 속의 율법을 고집하거나, 그리고 돌아가는 자는 이 그리스도의 제단의 특권에서 제외된다.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서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능욕을 감수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같이 하여야 하는 더 큰 이유는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다'는 사실에 있다. 즉 이 세상에서 우리는 잠시 후 죽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서 이 세상이 우리에 줄 수 없는 안식과 안착을 구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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