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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2월 2일)
제목: "믿음으로 겨울나기"
말씀: 여호수아 2:8-11, 히브리서 11:31
설교자: 문진호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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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2:8-11,
8 또 그들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히브리서 11:31,
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수요저녁기도회에서 맞춤형 응답의 은혜를 체험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한다. 여러분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가? 이틀 후에는 절기상 입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춘이 이 절기에 실제적으로 봄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2월은 여전히 추운 겨울이다. 절기와 계절에 이 간극을 보면서 우리 신앙생활도 이와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봄이 오는 소리를 들으며 믿음으로 소망을 품어보지만 여전히 삶은 겨울을 지나고 있다. 시대의 불청객인 코로나로 아직도 삶의 강바닥이 딱딱하게 얼어있는 듯하다. 오미크론이 얼마만큼 우리의 삶을 강타하게 될지 두려움과 불안함에 한겨울을 지나는 것이다. 어떤 성도들을 질병이 가져온 고통의 겨울을 지나기도 한다.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불안의 기다림의 겨울을 지난다. 요즘처럼 위축된 비즈니스 환경에서 사업을 해야 하는 분들에게는 위기라고 하는 리스크라고 하는 겨울을 지나고 있다. 자녀들이 가정에서 온라인 수업을 진행할 때면 가정주부들을 피곤함에 겨울을 지나게 된다. 어쩌면은 우리 모두는 저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강도에 있어서는 그 추운 겨울을 느끼는 강도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겠지만 모두는 다 겨울을 지나고 있다고 말씀을 드릴 수 있다.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겨울을 지나고 있는가? 겨울이 진정 문제가 되는 것은 겨울이라는 것이 알 수 없는 미래의 수해와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잘못하면 사방이 얼어붙은 길에서 길을 잃거나 절망이라고 하는 감옥 가운데 떨어져버릴 수도 있다. 실제 마주하는 환경이라는 겨울보다도 어쩌면 마음의 겨울이 더 차디찬 그리고 시리도록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겨울은 겨울나기에 지혜가 있으면 잘 넘어갈 수 있다.

 
겨울나기는 월동이라고 이야기들 한다. 우리는 부모세대로부터 배운 지혜가 있다. 그것은 겨울이 오기 전에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장을 담고 감을 말리고 방풍 지를 붙인다. 누비옷을 준비하며 뗄 감을 마련한다. 과거에 있었을 법한 그런 여러 가지 활동들일 것이다. 지금도 월동준비는 필요하다. 추운지방일수록 더 디테일하고 정교하게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자연계에서도 월동준비는 어쩌면 자연스런 현상이다. 식물이 가을에 잎사귀를 떨구는 것이나 짐승들이 털갈이를 하고 겨울잠을 자기 위해 배불리 먹어치우는 것들이 겨울나기의 지혜이다. 여러분 그림 하나를 보겠다. 이 둘의 차이가 무엇인지 알겠는가? 왼쪽에는 양배추인데 그것을 땄을 때 모습이다. 그러나 겨울이 되면 희한하게도 그 안에 있는 알맹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바깥에 있는 겉에 껍데기들이 속살을 보호하는 것이다. 다 오므려져 있는 것을 오른쪽에 볼 수 있다. 농사일을 하시는 선배 목사님이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신다. ‘믿음으로 겨울나기’ 설교 제목을 가지고 설교를 하고자 한다고 말씀드렸더니 이 사진을 보내주셨다. 자연계에서도 겨울을 나기 위한 지혜가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 인생의 겨울을 맞이해서 어떤 지혜로 어떤 대책으로 겨울을 나고 있는가? 인생의 겨울을 지나갈 때, 우리 모두에게 보호대책이 필요하다. 어떤 대책의 겨울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겨울은 복음을 새롭게 깨닫고 성장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무기력하거나 절망의 감옥에 갇히게 될 수 있다. 본문에 인생의 겨울을 지나가면서 믿음으로 겨울나기를 잘 감당하여 햇빛 찬란한 인생의 새로운 봄을 맞이하는 사람이 소개되고 있다. 그 사람은 라합이다.
 
▷라합이 만난 겨울은 어떤 것이었는가?
첫 번째는 공포감이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면 그가 만난 실제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여호수아 2:9,11.
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간담이 녹는다고 표현한다. 11절도 마찬가지 이와 같이 표현하고 있다.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한마디로 그녀가 느낀 것은 공포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가나안 땅, 그리고 가나안 땅 첫 성인, 여리고 성을 함락하기 위해서 진군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라합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소식은 그야말로 한겨울을 경험하는 것 같은 공포심이었다. 히브리어로 공포감은 ‘묵으’라는 말이다. 문자적으로는 ‘용기를 잃다.’ ‘주저앉을 정도로 무기력해지다.’의 뜻이다. 마음이 녹았다는 뜻을 ‘묵으’라는 단어로 무기력해진다. 또 주저앉을 정도로 힘이 없어지고 힘이 빠진다는 뜻을 담고 있는 단어이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사용할 때, 아주 독특한 상황을 상정해놓고 쓰고 있다. 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자로 임재하실 때, 특히 하나님 앞에 높아진 것들과 교만의 상징인 산들이 녹아내린다. 라는 표현으로 이 단어가 쓰여 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용례를 살펴보면
 
*시편 97:5,
5 산들이 여호와의 앞 곧 온 땅의 주 앞에서 밀랍 같이 녹았도다.
*이사야 34:3,
3 그 살륙 당한 자는 내던진바 되며 그 사체의 악취가 솟아오르고 그 피에 산들이 녹을 것이며.
 
*미가서 1:3-4,
3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4 그 아래에서 산들이 녹고 골짜기들이 갈라지기를 불 앞의 밀초 같고 비탈로 쏟아지는 물 같을 것이니.
-여러분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때 하나님의 향하여 높아진 모든 것들이 산들로 묘사되어지는 그 대상들이 다 ‘물같이 녹아내린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표현이 여호수아서에서 딱 한 군데 표현하고 있다.
 
*여호수아 7:5,
5 아이 사람이 그들을 삼십육 명쯤 쳐 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가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
-누구의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리는 것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물같이 녹아져 내려버리는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가나안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다. 그리고 홍해 물을 말리시고 또 광야 사십 년 동안 함께하시고 요단 동편에 있는 두 왕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다. 가나안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정상적인 반응은 간담이 녹아내리는 것이다.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인생 가운데 이제 한파가 불어 닥치는 한겨울이 임하고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정상적인 반응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리고성 사람들은 그러하지 않았다. 그것을 느낌으로 경험하고 있을 뿐 그것에 대한 실체를 자신의 삶으로 경험하고 있는 사람은 라합 뿐이었다. ‘마음이 녹았다.’는 그 표현은 라합이 그것을 실제로 의도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리 철옹성과 같은 여리고 성을 쌓고, 방비한다 할지라고 홍해를 말리시고 시혼과 옥을 멸망시킨 심판의 하나님 앞에 안전지대는 없다. 라는 사실을 드러내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라합이 경험하고 있는 겨울이다. 하나님의 품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공포감이 바로 겨울이다. 넓은 평수의 집과 연금과 보험으로 보장된 노년의 삶도,,, 그것으로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임재가 되시면 하나님을 향한 모든 높아진 것들이 물처럼 녹아내리게 될 것이다. 라합은 이 공포감의 실체를 마주대하는 것이다. 인간 본성 안에도 이러한 공포감이 있다.
 
하나님이 진실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실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따스한 어머니의 품으로 느끼게 되겠지만 하나님 안에 거하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리 그것이 견고한 여리고 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그것에 계시지 않으면 결단코 안전지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라합이 느끼는 이 공포감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공포감으로 느낄때,
분주한 일상을 잠시 멈추고 영혼의 속삼임에 귀 기울일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교만의 성벽을 높이 쌓고 마치 그것이 내 인생을 안전하게 지켜 줄 것처럼 착각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내일 쓰지 못할 큰 창고를 짓고 여러 해 쓸 것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하자! 할지라도 그 생명을 오늘 취하실 분은 하나님 아버지 이신 것을 믿고 하나님 임재 앞에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품과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소망하며 그 앞에 무릎 꿇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무엇이 공포감이라고 하는 하나님이 우리 삶 가운데 임재하실 때 교만한 자를 심판하시고 겸손한 자를 붙드시고 도우시며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는지 그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참으로 지혜롭게 반응하는 것이 무엇일까?
 
*시편 131:2,
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 이처럼 어머니 품 안에 고요하고 평안한 젖뗀 아기처럼 참으로 복 있는 자임을 믿는다. 라합이 두 번째 겨울을 지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소외감이다. 라합은 힌나님 없는 인생의 두려움과 공포감을 느낄 때 또 다른 느낌을 경험했다.
 
라합의 인생의 두 번째 겨울은 무엇인가?
 
*여호수아 2:12,
12절 하반 절을 보니
12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라고 고백한다. 신앙의 연조가 오래된 그런 신앙의 연륜을 가진 사람이 아닌 이 고백은 불신의 세상 한 복판에 거주하고 있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 안에 들지 못한 라합의 고백이다.
 
*여호수아 2:13,
13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그랬던 그가 이렇게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내 목숨이 누구에게 달려있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다. 내 인생의 생과 사를 누가 좌지우지 하고 있다고 하는가? 하나님께서 좌지우지 하고 있다는 고백인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하늘과 땅 모든 곳에서 하나님이 되시는 줄 믿는다. 온통 세상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내게 주어질 것은 단 한 평도 없다. 라는 이 고백이 라합이 경험하고 있는 소외감이다. 내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아니시기에 그렇다. 나는 여전히 이방인이요 나는 여전히 진노 받기에 합당한 하나님께 분깃이 없는 여전히 나는 버림받은 백성이라고 하는 그 정책성 가운데서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등산가서 서울을 내려다보면 옆에서 하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저렇게 집들이 많은데 내 것은 하나 없네~ 여러분 제 고백이라 하지 않겠다.
 
여러분, 수많은 내 것 아닌 것들을 바라보면서 내 것 하나 없네~ 저렇게 많은데~우리가 자주 생각하는 것 아닌가?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에게 주신 그 가나안 땅의 이제 여리고 성을 첫 제물로 삼아 이제 함락시키기 위하여 이쪽으로 진군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한다. 그리고 소외감을 느낀다. 두려우신 그 하나님 앞에 모든 교만한 자들, 하나님을 대항하여 모든 높아진 사람들이 눈 녹듯이 녹아져서 사라질 것처럼 그런 공포감을 가지고 있는 바로 그 순간 그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관계로 이 땅에서 단 한 평도 내 것이 될 것이 없다. 라고 하는 그 소외감 여러분 이것이 인간본성이 경험하는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감정인 것이다.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은 살려주어 우리의 목숨을 건져내라. 우리의 목숨 우리의 생명 우리의 가족들의 모든 미래의 삶, 내 손에 달려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 라는 것이 정직하고 진솔한 느낌이며 하나님 앞에서 느끼게 되어질 인간 본성의 감정인 것이다. 소외감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은 나에게도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내게 속한 모든 사람에게도 아전하지 않는 곳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여기에 우리의 인생의 겨울나가 두 번째 기회가 있는 것이다. 요즘 뉴스에서 건물과 토사가 무너져 있는 장면들을 보면서 과연 내가 있는 곳은 안전한가? 이런 생각을 한 번쯤은 해보았을 것이다.
 
모 건축회사에서 지은 그 아파트는 그 아파트 브랜드에서 빼려고 한다고 뉴스에서 들었다. 이름을 빼려고 하는 시도들이 벌어지고 있다고들 뉴스에서 듣는다. 여러분 계신 곳은 안전한가?
 
2m 두께의 벽이 이중으로 세워진 여리고성은 과연 안전지대인가? 눈에 보여 지는 것이 안전지대로 보여도 하나님 편에 있지 않은 것은 안전지대일 수 없는 줄로 믿는다. 여리고성은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에 대하여 높아진 것들, 교만해진 것들, 다 산들처럼 녹아져 사라져 버리게 될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911테러가 벌어진 다음 주일 타임스퀘어 강단에서 이런 메시지가 선포되었다. 뛰라는 것이다 그곳에서 뛰쳐나오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한다. 계속해서 좋은 삶을 살라는 초대도 아니다. 벗어나십시오! 살기위해 달리십시오! 당신의 생명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뉴욕의 경관들의 이야기는 나의 마음속에 영원히 새겨질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을 향해 도망치라고 외쳤다. 목숨을 걸고 외쳤다. 여러분도 살기 위해 달려야 한다. 벗어나야 한다. 번영, 부흥, 성공에 집중하는 것들로부터 달려야 한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자신의 이익으로 쓰는 사람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죄가 편하게 느껴지는 곳으로부터 당신이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왔을 때 당신의 삶에 죄가 있고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으로부터 도망쳐야 한다. 당신의 생명을 위해 달려야 한다. 여러분, 하나님이 없는 그곳에 과연 안전지대가 있을까? 하나님의 집만이 안전지대일 것이다. 하나님의 집이 어디인가? 너희 하나님은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 온 세상의 통치자이심을 깨닫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심을 고백하며 그리고 나도 하나님 편에 서고 싶다고 하는 강한 열망으로 사로잡히는 것이야말로 참된 겨울나기의 지혜인줄 믿는다.
 
*여호수아 2:13절에 다시 한 번 읽어보겠다.
13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라합의 절규인 것이다.
하나님이 온 세상의 통치자이심을 고백할 때 우리가 서 있는 그 모든 곳에서 호흡하며 살아가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붙드실 줄로 믿는다. 반대로 여리고와 같은 강한 성, 부족할 것이 없는 중국 자금성처럼 구중궁궐의 아홉 결의 보호막이 예비 되어 있는 곳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없는 그곳은 안전지대가 아닌 것이다. 그곳은 무너져 버릴 것이며 오직 우리가 월세 방을 살아도 우리가 우리의 이름을 새겨 넣을만한 그러한 곳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만 하면 그곳이야말로 하나님의 집이요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안전한 거처가 될 줄로 믿는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반전이 있는 줄로 생각할 것은 여전히 두 명의 정탐꾼이 탈출을 목적으로 성벽위에 있는 집의 라합의 집에 쳐들어 왔다. 그런데 라합이 살고 있는 그 집은 이 이중구조로 되어 있는 성벽 위에 지어진 집이었기 때문에 정탐꾼들이 숨어 들어왔을 가능성이 매우 큰 것이다. 그리고 그 수많은 성벽위의 집들 가운데 유일하게 두 정탐꾼이 들어온 집, 그 정탐꾼이 살기위해 방문한 집이 라합의 집이다.
 
여러분 인생 가운데 어떤 반전인가?
영적으로 보면 정탐꾼의 방문은 하나님의 구원이 여리고의 변방에 살고 있는 가장 보잘 것 없고 소외된 사람에게 임했던 구원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의 복음이 베들레헴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진 것처럼 변방의 라합에게 구원이 선포된 것은 복음의 수용성이 좋았기 때문인 것 같다. 복음의 수용성이 좋다. 라는 것은 이 땅에서 천국을 다 살아버리면 이 땅 이후의 삶에 진짜 우리가 살아가야 될 영원한 천국에서 더 이상 누릴 것이 없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실제로 우리가 누리게 될 그 어떤 것보다도 귀하고 아름답고 복된 것인 줄로 믿는다. 그런데 이 땅이 너무나 좋아서 어떤 분은 이 땅의 것을 다 누리지도 못하고 이 땅의 삶을 끝까지 붙잡고 있다가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인생들도 간혹 있다. 라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팔복에서 복음이 필요한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었다. 애통하는 사람들이다. 의의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었다. 하나님 없으면 나는 못살아요 하나님만이 나의 소망이요 반석이요 피난처이시다. 이와 같은 고백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의 삶 가운데 주님이 찾아오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인생이 월세 방이냐 아니면 청와대와 같은 구중궁궐이냐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도 하늘을 사는 자처럼 사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이 땅에서 모든 것을 누리며 살고자 하지 않고 늘 마음이 가난한 자처럼 주님의 복음 때문에 전전긍긍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에 하나님은 찾아오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모든 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의의 옷을 입혀 주시는 줄로 믿는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영적으로 두 번째 선택이 가능한 것이다. 그것이 은혜인 것이다. 소망 없고 빛도 없는 어두운 세상 가운데 공포감과 소외감을 온전히 느끼면서도 내가 속한 안전지대를 벗어나 하나님 나라에 속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 마음, 그 소외감의 겨울이 찾아오게 되면 우리 모두가 라합과 같은 선택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이것이 믿음의 선배들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본이었다. 그들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다가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다.
 
*히브리서 12:16,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이 땅의 삶이 영원히 지속될 거라 아니하고 나를 위해 예비하신 영원한 성을 소망하며 천국의 시민으로 살아가길 간절히 바랬던 믿음의 선배들처럼 우리의 삶에도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삶이 있기를 소망한다. 마지막으로 공포심과 소외감이 찾아왔을 때, 라합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그것은 믿음으로이다. 라합의 겨울나기의 본질은 믿음으로였다.
 
*히브리서 11:31,
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 라합의 삶을 한 줄로 요약한다.
라합의 믿음의 본질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한 것이다. 평안히 영접한 것을 선대하였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여호수아 2:12,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선대하다는 히브리어로 '헤세드'이다. 헤세드의 관한 가장 아름다운 언어 중 기억하고 있는 중의 이야기가 있다면 룻의 이야기이다. 룻은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낯선 곳인 시어머니의 고향인 베들레헴에 정착한다. 가난을 면하기 위해 밭에 나가 이삭을 주우며 늙은 시어머니를 먹이고 돌본다.
 
이것이 헤쎄드이다. 룻의 착한 행동을 보고 그것을 주목하고 있던 장차 남편이 될 보아스가 이렇게 이야기 한다.
 
*룻기 2:12,
12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시어머니에게 행한 헤쎄드,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을 보답하기를 원하는 그 행한 일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 자비와 긍휼이라고 하는 헤쎄드이다. 그 결과가 온전한 상이 주어지는 것이다. 룻은 남편을 잃었다. 모압 땅에서 기근을 만났다.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낯서 곳에서 정착하지만 생활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이삭을 주워가며 늙은 시어머니를 봉양한다. 이 모는 상황이 룻에게는 겨울이다. 공포감과 소외감이 파도처럼 밀려왔을 것이다. 내 인생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여전히 이방 여인이라고 하는 딱지를 달고 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품 헤세드로 반응한다. 인생의 얼어붙은 상황을 이 하나님의 성품 헤쎄드로 반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온전한 상을 베풀어 주시는 줄로 믿는다.
 
*룻기 4:21-22,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룻이 누가 되는가? 다윗의 증조모가 되는 것이다. 영원히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었던 모압 여인 룻은 하나님의 백성의 족보에 들어간다. 단순한 족보가 아니라 왕의 족,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쯤에서 족보 하나를 더 보겠다.
 

*마태복음 1:5,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라합이 나온다. 살몬이 이 라합과 결혼을 한다. 우리가 룻기에서 보았던 그 보아스의 엄마가 바로 라합이다. 유대지파의 족장인 살몬은 라합을 아내로 맞이하여 보아스를 낳았던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겨울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성품, 헤쎄드로 반응한 사람들이 기록된 역사이다. 하나님의 전으로 영원히 들어가지 못하는 모압 출신 여인 룻, 멸망당해 그리고 여리고 성 출신이기에 하나님의 그 성회에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았던 기생 라합은 자격 없고 비천하고 생명의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겨울 인생들이었다. 그 겨울의 인생들이 찬란하게 햇빛 비치는 생명 가득한 봄날 인생으로 바뀌어 진 것이다.
 
여러분 우리의 삶이 겨울이 찾아왔는가? 어떻게 반응하는가? 때로는 공포감으로 때로는 소외감으로 우리 인생 가운데 찾아온다. 그러나 그 공포감도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그 고통 겨울 한복판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성품, 자비와 긍휼이라는 헤쎄드로 반응하면 하나님은 선대한 우리는 그 작은 몸짓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스런 족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그것이 온전한 상이다. 우리 모두 우리 인생 가운데 찾아 온 이 겨울이라 하는 그 한복판에 우리가 놓여있을 때, 우리 스스로 절망과 무기력감의 감옥에 빠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온전한 상을 베푸실 것을 기대하며 하나님의 헤쎄드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반응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헤쎄드를 필요한가? 코로나의 겨울은 오히려 비접촉의 접촉을 강력하게 필요하듯이 직접 만나지 못해도 전화로 문자로 메일로 그들을 위해 매일매일 사랑이 담긴 중보의 기도로 우리 이웃들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하고 섬길 수 있다. 안아주심의 본당에서 드리는 현장의 예배는 비접촉을 위한 것이 남을 위한 배려한다고 하는 세상 사람들은 공포로 반응하고 세상 사람들은 소외로 반응할지라도 우리는 그러할수록 현장예배를 사모하고 안아주심의 본당에서 서로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며 또 손에서 손으로 옮겨지는 거룩한 성찬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나아갈 수 있는 줄로 믿는다. 그것이 살아있는 예배인 것이다. 여전한 두려움과 여전한 공포가운데 여전한 후회 감의 감옥에 스스로 갇혀있는 우리 성도들에게 우리는 그들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현장 예배의 은혜와 그 온전한 상을 베푸심에 그 현장, 그 축제 가운데 나올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권면해야 한다. 사랑으로 그들을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겨울이니까 할 수 없다고 해서는 안돼! 라는 메시지를 들으면서 절망하기보다 겨울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성품, 헤쎄드에 대해 참여하는 참된 하나님의 자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우리 삶 가운데 있어지길 간절히 소망한다.
 
♣요약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운 공포감과 소외감의 겨울을 지날 때 주님의 품안에 힘써 거하여 젖 뗀 아기의 평강의 복을 누리기를 소원하며 주님 아닌 것에 안주 감을 누렸던 자리에서 뛰쳐나와서 하늘과 땅의 통치자 되시는 하나님의 집에 머물러 참 된 안식과 기쁨을 소유한 자가 되어야 한다. 얼어붙은 시간을 지나는 동안에도 이웃들과 함께 하나님의 성품, 자비, 긍휼의 헤쎄드로 반응하여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기억하여 주님의 자녀로서 권세를 겸손하게 누리기를 소망해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따스함을 기대하면서 우리 인생에 공포감이 있을지라도 이 세상에 단 한 평도 단 하나도 없을지라도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내 마음을 이해해 줄 사람은 없는 것 같아도 그 소외감이 가득 차는 순간에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는 줄 믿기에 두 정탐꾼을 한 겨울을 경험하고 있는 그 라합의 삶 가운데 보내셔서 하나님의 위로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그에게 내밀고 계시는 것을 깨달아서 우리 인생에도 주님이 구원을 손길을 내밀고 계심을 믿어야 한다. 이 시간 찾아오셔서 진정한 화평과 안식과 기쁨을 우리 인생 가운데 허락하시고 계심을 믿고 그 은혜를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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