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2년 10월 1일) 제목: "자녀를 축복한 이삭의 믿음" 말씀: 히브리서 11:20 대표기도: 황정호 장로님(당회 총무) 말씀읽기: 최지우 어린이(소년부),권은서어린이(초등부)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김기섭 목사님(LA 사랑의교회) ------------------- *히브리서 11:20, 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 ▶김기섭 목사님(LA 사랑의교회)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고 주린 영혼을 채워주시는 하나님께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오신 여러분의 한 분 한분을 만족케 하시고 또 채워주실 줄 믿는다. 지난 2년 반의 코로나는 저희들에게 많은 부분을 바꿔 놓았는데 특별히 교회는 코로나로 인해서 과연 ‘교회는 무엇이냐? 예배란 무엇이냐?’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저희들에게 던졌다.
이런 도전 앞에서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로서 많이 위축되고 그리고 쉽게 패배의식에 빠질 수 있는 그런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번 사랑의 교회가 섬겨주신 한국교회 섬김의 날은 많은 목회자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이번에 총회 참석차 한국에 나왔는데 저를 위해서 준비해 주신 것 같다. 이번에 제가 참석하면서 ‘우리가 혼자가 아니구나! 누군가가 생각해 주는구나! 우리가 함께 모이면 힘을 얻는구나! 코로나의 한계가 아니라, 우리 믿음의 한계, 하나님을 기대하지 않았던 우리의 한계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제 도약에 대한 용기를 주신 사랑의 교회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참석한 모든 목회자들의 마음을 모아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저는 35년째 이민교회를 섬기고 있는 이민교회 목회자이다. 장로회 가정에서 태어나서 모태 신앙으로 교회 생활을 쭈욱 했지만 자라면서 교회를 통해서 험한 일을 많이 보면서 제 아내는 교회에 대한 소망이 없다. 더 기가 막힌 것은 하나님은 저를 그런 교회를 섬기라고 목회자로 계속 Calling을 해주셨다. 20대를 많이 방황을 하다가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저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을 찾다가 호주를 선택해서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저를 깨시고 그리고 순종을 결단하면서 친구들이 대학을 다 졸업한 늦은 나이에 저는 시드니에게 학부와 대학원을 7년을 공부하게 되었다. 제가 호주에 가서 받은 충격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호주 교회에서 젊은이와 어린 자녀들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몇몇 교회를 제외한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텅빈 건물 교회에 열 명, 열다섯 명의 희끗희끗한 노인들만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또 하나는 한인 교회를 섬기는 1.5세대의 2세 젊은이들과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이민을 왔다고 한다. 쭈욱 10년, 15년 주일학교를 다녔지만 예수님과 찐한 만남을 가지 아이들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많은 아이들이 교회가 깨어지는 아픔 속에서 한인교회의 부모 1세대에 대한 적계심이 가슴 가운데 가득 차 있었다. 만약 이 아이들이 졸업하고 독립했을 때, 과연 이 아이들이 신앙 생활을 할 것인가? 제가 볼 때는 그러할 가능성이 없어보였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기셔서 짧은 기간의 수많은 순교의 피를 흘리게 하시고 그 순교의 피 위에 교회를 세워주셨는데, 아무리 이민의 땅에 옸다 할지라도 한 세대가 되기 전에 과연 이 신앙이 끝나야 되는가? 하는 생각을 하니까 마음에 위기감이 오고 절박해 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교회가 저를 전도사로 불러준 것도 아니고 저에게 사례를 준 것도 아니지만, 그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것이 젓 번째 사역이 되었다. 제가 시드니에서 학부와 신대원의 7년의 학업 기간 동안에 저에 가장 큰 고민은 다음 세대에 어떻게 신앙을 계승할 것인가? 저는 이 부분을 고민을 하다가 우리 한국 민족보다도 더 먼저 호주에 이민을 와서 정착한 다른 이민 교회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떻게 자녀세대에게 신앙을 계승했을까?’를 생각했다. 하지만 제가 찾아본 열 몇 군데 이민 교회 가운데 신앙 계승을 성공한 민족은 한 민족 밖에 없었다. 자,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제 마음은 더 절박해졌고 위기의식이 더 강해졌다. ‘과연 신앙의 세대 계승은 불가능한 일인가?’ 의 가운데 있을 때, 제 안에 이런 질문이 들어왔다. 지는 2000년 하나님의 교회는 어떻게 자녀들에게 신앙의 계승했을까? 가 저는 이것이 너무나 궁금했다. 그래서 시드니에서 학업을 마치고 미시간의 캘빈 신학교에서 다음 과정을 공부하면서 틈나는 대로 도서관에 앉아서 지난 2000년 교회사를 읽기 시작했다. 지난 2천년 교회사를 보면,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바울을 통하여 유럽과 미국을 거쳐 아시아로 계속해서 이렇게 서진해 오고 있다. 하지만 이 민족에서 저 민족으로 확장되는 것은 복음의 계승이라기보다는 복음의 전파라고 봐야 될 것 같다. 제가 교회 역사에서 관심을 가졌던 부분은 복음을 처음 받았던 그 민족이 자기의 민족 안에서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계승했는가? 의 이 부분이었다. 지난 2천년의 교회역사를 보면, 한 민족 안에서 신앙이 계승될 때에 이런 패턴들이 있었다. 신앙의 1세대가 있다. 이 신앙의 1세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드리고 만났던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몸으로 체험한 세대이다. 그래서 1세대는 뜨겁다. 살아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그러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 그 다음 2세대는 어떨까? 살아있는 하나님을 만난 그러한 체험한 부모를 눈으로 목격한 세대이다. 그래서 2세대까지는 신앙이 살아있다. 그러면 신앙의 세대는 어떻게 되겠는가? 신앙의 형식은 남아 있지만 예수의 생명과 능력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세대이다. 자, 이렇게 한 세대가 더 넘어가 4세대가 되면 어떨까? 4세대의 신앙은 그냥 문화로만 남는다. 그래서 신앙은 어느 세대이냐에 따라서 하나님과의 만남에 깊이가 다르고 신앙의 내용이 다르고 영적 체험과 능력이 다르고 헌신과 희생의 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그럼 복음이 한 민족 안에서 이런 패턴으로 1세대, 2세대, 3세대, 4세대에까지 내려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나님이 더 이상 그 민족과 일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촛대를 옮기셨다. 이게 역사의 흐름이었다. 자, 여러분이 역사를 보라. 바울세대가 복음을 증거 했던 소아시아는 그 초대교회 당시에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있던 땅이었다. 바울 서신을 받은 교회들이 그곳에 있고, 사도요한의 환상가운데 나타났던 교회들이 다 그곳에 있다. 지금은 어떠한가? 99% 이슬람의 땅이다. 교회는 유적지로만 남아있다. 여러분 신앙이 세대계승이 안 되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런데 지난 2천년 교회 역사 속에서 한 민족 안에서 신앙의 계승이 아름답게 이루어진 그러한 일들이 있다. 보통은 1세대가 2세대에, 3세대가 4세대에 내려오면서 하나님의 촛대가 옮겨지곤 했는데 아주 드물게 신앙의 3세대가 다시 영적 1세대가 되는 그러한 경우들이 있었다. 분명히 세대 계승으로는 3세대인데 영적 체험으로는 1세대가 되는 것이니까 4세대가 살아있는 하나님을 체험한 부모를 보면서 몇 세대가 되는 것인가? 2세대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한 민족 안에서 신앙의 계승이 된 그러한 일들이 있었다. 저는 도서관에서 이러한 기록들을 읽을 때마다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뛰었다. 어떻게 3세대가 1세대가 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는가? 어떤 경우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그때에 가능했다면 지금도 가능하다. 하나님이 그때 가능했으면 지금도 은혜를 주신다. 사실 신앙의 3세대에게 하나님은 자신들의 하나님이라기보다는 부모의 하나님이다. 주일에는 그저 교회를 출석해주다가 부모로부터 독립하면 교회를 떠나가는 세대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3세대가 영적 체험의 새로운 1세대가 될 수 있었는가? 3세대 중, 소수의 사람들이 먼저 영적을 각성을 경험하는 일들이 있었다.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와 주님의 보혈의 그 마음이 사로잡히게 되는데, 그 전에는 자기 세대에 관심이 없었다. 나의 세대에 개념 없이 살았다. 그냥 나만 잘되면 되었는데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하나님 없이 자기의 세대가 너무 불쌍한 것이다.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의 세대, 개념 없이 살았다. 그냥 나만 잘되면 되었는데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하나님 없이 자기의 세대가 너무 불쌍한 것이다.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세대를 가슴에 품는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달려 나와, 주님의 보좌 앞에 엎드려서 때로는 식음(食飮)을 전폐(全廢)하고 “하나님, 나의 세대를 살려주십시오. 우리의 세대가 내가 만난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이사야 64장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절규하고 있다. “하나님, 하늘을 가르시고 우리 가운데 강림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직접 강림하셔서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고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 떨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영적 각성을 체험한 이들이 자기의 세대를 가슴에 품고 바로 이 이사야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하나님 필요하시면 나의 육신을 불러 쪼개시고 우리 세대 가운데 임재 해 주십시오. 하나님을 떠나가는 세대가 하나님이 여전히 통치하심을 보게 해주십시오. 내가 맛본 하나님의 세대가 우리가 함께 맛보기를 소원합니다. 저들이 그토록 귀하게 여겼던 세상의 것들이 한 낮 배설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십시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들으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는다.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는다. 비록 소수의 무리지만 자기의 세대를 가슴에 품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을 때에 하나님이 이 부르짖음을 들으셨다. 그리고 그 세대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기 시작하신다. 이 때 이 세대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사랑했던 것들이 이 따의 것들이 얼마나 보잘 것 없던 것인 줄을 보게 되고, 그토록 마음 졸이며 붙잡으려고 애썼던 세상의 것들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인생관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신앙의 3세대가 영적 1세대로 새롭게 태어났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 민족 가운데 일하셨다. 저는 35년째 이민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는 늘 우리의 자녀 세대를 주님 앞에 세우지 못하면 우리 부모세대는 주님 앞에 설 자격이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가 너희의 교회에게 나의 자녀를 주었는데 너희 자녀가 어디 있느냐?” 하실 때,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하나님 주신 하나님 자녀를 다 빼앗겼습니다.”라고 우리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지 않은가? 한국교회도 위가 같아 보이는데, 이 중차대한 시대에 우리 부모는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아니 무엇을 해야 되겠는가? 오늘 본문이 이삭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사실 이삭의 삶에는 대단한 기적이 잆다. 대단한 영적인 체험이나 간증도 별 기록이 없다. 요셉처럼 고난 가운데 다져진 영성도 찾아보기가 어렵다. 자, 그런데 성경은 지금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근거로 믿음의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는가? 이삭이 믿음으로 자녀를 축복했다. 이삭이 믿음으로 자녀를 축복했다. 자, 여러분, 부모라면 자녀를 축복하는 것 아닌가? 아니, 부모가 자녀를 축복하는데 대단한 믿음이 필요한가? 자 그런 한 번 생각해보라. 지난 한 주간 동안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를 위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얼마나 축복하였는가? 내가 자녀를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다. 그거 말고, 결국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면 그 여호와의 이름으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를 지난 한 주간 얼마나 축복해 오고 있는가?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믿음으로 축복하는 것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오늘 본문을 보니, 이삭은 자녀를 믿음으로 축복했다. 믿음으로 야곱과 에서를 축복했다. 자 그럼 이삭은 어떤 믿음으로 자녀를 축복했기에 하나님이 이것을 위대한 믿음으로 평가하고 있는가? 이삭의 삶에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창세기 22장 번제 단 사건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다. 자, 이삭의 목을 따기 직전에 천사가 아브라함을 말리면서 아브라함을 향해서 이런 축복의 메시지를 선포했다. *창세기 22:16-17,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하나님이 주실 복의 내용이 무엇인가?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다. 너의 자손은 원수의 성을 차지하는 승리를 경험할 것이다. 그리고 세상 모든 민족이 너의 자손 때문에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라고 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기고 약속하신 축복의 내영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아브라함아, 너의 믿음이 너무 이뻐서 너의 믿음 때문에 감동을 먹었는데 내가 너를 안아줄게, 내가 반드시 너와 너의 자녀들을 축복할거야, 내가 너의 이름을 걸고 하나님이 반드시 너에게 큰 복을 주겠다.” 그리고 그 복의 내용이 자녀들을 향한 축복의 도장이었다. 자, 그러면, 천사가 축복할 때 이삭은 어디에 있었는가? 번제 단에 누워있었다. 죽을 뻔하던 그 번제 단 위에 이삭은 누워있었다. 이삭은 그 번제 단 위에 누워서 천사가 축복하는 이 선포하는 약속을 들었다. 저런 이삭은 자신은 어떠한 존재일까? 이삭이 볼 때 자신이 어떠한 존재일까?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내가 누구냐? 은사가 무엇이냐? 가능성이 무엇이냐? 여러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자신 이삭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이것이 이삭이 붙잡고 살았던 믿음이고 이삭은 실제 자신의 살면서 이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이삭은 물이 귀한 그 토양에서 가는 곳마다 땅을 팠고 땅을 파면 물이 나왔다. 창세기 16장을 보라. 온 땅에 가뭄이 들었다. 농사를 지을 때, 홍수보다 무서운 게 가뭄이다. 가뭄이 들면 그 지역자체가 피해갈 수가 없다. 그때 이삭은 그 가뭄에 백배의 결실을 맺어서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다. 이삭은 자신이 왜 그 복을 받는지 잘 알고 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다. 아버지의 믿음과 순종 때문이다. 이 복은 자신만 받은 것이 아니다. 자신의 자녀들도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이삭은 이것을 믿었다. 이삭이 야곱에게 두 번의 축복을 한다. 처음에는 야곱에게 속아서 야곱에게 축복하고, 또 한 번은 형 에서의 낯을 피해서 외삼촌 집으로 도망가기 전에 작별 인사를 왔을 때, 이삭이 야곱을 더 축복한다. 그런데 여러분, 이삭이 야곱을 축복했던 이 두 번의 축복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는가? 모리아 산에서 천사가 전달해 주었던 바로 그 하나님의 약속이다. 자신이 번제 단 위에서 들었던 하나님이 약속 그대로를 당신의 아들들에게 똑 같이 선포하고 있다. 무슨 의미인가? 이삭은 하나님의 그 약속을 기억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 믿음으로 자녀를 축복했던 것이다. 자 여러분, 이삭이 야곱과 에서를 축복할 당시에 상황을 한 번 생각해 보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한 백 명쯤 되었는가? 그럼 이삭에게는 아들이 두 명 밖에 없었다. 자 그럼,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와 같이 그러한 후손이 이루어질 것에 대한 가능성이 있었는가? 아니다. 여러분, 눈의 현실에서는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또한 야곱과 에서의 삶을 한 번 보라. 그들이 무슨 선한 삶을 살았는가? 하나님의 복을 받을만한 믿음의 여정을 걸었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이삭이 자신의 자녀들을 축복했던 근거는 무엇인가? 그 근거가 자신의 여력에 달려 있었는가? 자녀들의 가능성에 있었는가? 아니다. 이삭은 단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이다. 자녀들의 현재 모습에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이 인생은 된다는 것이다. 나의 하나님은 나의 자녀들의 하나님이다. ‘내가 축복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약속을 이루신다.’ 이삭에게는 이 믿음이 있었다. 이걸 믿은 것이다. 이 믿음으로 자녀들을 축복했고 하나님은 이것을 위대한 믿음으로 인정하고 계신다. 여러분 이삭이 복을 받은 것은 누구 때문인가?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 때문이다. 야곱과 에서가 복을 받은 것은 그 이삭의 믿음 때문이다. 민수기 6장에 보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제가 22절부터 읽겠다. 하나님이 모세와 제사장들에게 축복을 하라고 명령을 하신다. 자기들의 축복이 무엇인가? 여러분, 축복의 내용을 주셨다 *민수기 6:22-27, 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아멘인가요? 하나님의 마음으로 여러분의 자녀를 축복해야 한다. 현재 아름다운 모습이 선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의 속을 뒤집어 놓을 때도 자녀들을 변화시킬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축복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을 선포할 때마다 여러분의 자녀들의 삶에서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이렇게 되실 것이다. 저희 모친이 한국나이로 93세이신데, 저희 아버님은 함경도에서 월남하신 장로님이셨는데 저희 어머니 35세에 그리고 제가 한 살 때에 돌아가셨다. 제가 태어난 강원도, 저희 집에서 읍내 교회에 있는 곳까지는 걸어서 1시간이 걸렸다. 저희 어머님은 저희 누님 셋과 저, 4남매를 키우시면서 365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새벽예배를 빠지신 일이 없다. 저희 교회는 코로나 팬데믹 16개월 동안 어떠한 모임도 하지 않았다. 교회가 완전히 문을 닫았던 이 16개월 동안 저희 어머님과 제가 새벽 제단을 지켰다. 저희 어머님은 지금도 의자에 앉으시면 이렇게 손을 드시고 일단 앉으시면 두 시간이시다. 여러분, 우리 어머님의 무릎의 복을 누가 받겠는가? 제가 받는 것이다. 믿고 축복하시는 어머님 때문에 그 복을 제가 받는 것이다. 저는 어머님의 평생의 눈물을 먹고 오늘까지 살고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녀를 위해 흘린 눈물은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자녀를 위해 꿇었던 무릎은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축복의 선포는 반드시 하나님이 일하신다. 하나님이 약속을 믿고 축복하라. 선포한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여러분의 믿음으로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이 일하신 위대한 간증들이 많아지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요약 우리 가정에 언약의 가정을 주신 하나님을 보며 죄악이 넘쳐 가치관이 무너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녀들이 악한 영의 공격과 유혹 속에서도 하나님 한 분을 참된 창조주요,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원자로 고백하는 살아있는 신앙인이 되길 소원해야 한다. 우리 자녀들의 속사람을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케 하여 믿음이 말씀 위에 뿌리 내려져서 세상을 분별하는 맑고 깨끗한 영을 부으셔서 이 시대와 구별된 삶을 살아내는 하나님의 자랑스런 자녀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영광과 성령의 임재의 날마다 사로잡히게 하는 기도를 올리며, 어릴 때부터 분별력과 민감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 목마른 가슴으로 달려 나와 은혜를 구하는 뜨거운 신앙인으로 자라나기를 소원해야 한다. 우리의 자녀들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흔들림 없는 믿음과 인격과 품성과 꿈과 비전의 능력의 사람으로 자라나게 하고, 자신을 세우며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며, 자신이 신실하게 준비되어 한 번 사는 인생에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는 삶이 되고 믿음으로 축복하는 부모, 교사가 되어야 한다. 내일 예배 준비와 모든 영역에서의 봉사도 주님께 하듯이 전심으로 하며, 모든 성도님들과 지체들에게는 진심으로 섬기며 늘 하나님이 자녀로서 기쁨으로 헌신하며 살아가야 한다.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