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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기도회(주후 2022년 3월 12일) 제목: "가려진 말들" 말씀: 마가복음 14:1~11 기도: 고경진 집사님(사역1반) 찬양인도: 제자반,사역반 말씀읽기: 김예환(소년부), 손예진(초등부)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조 샘 선교사님(SaGA일터선교& 글로벌네트워크, 한동대 교수) -------------------------------------------- 마가복음 14:1~11, 1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2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10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11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 ▶성도님들, 반갑습니다. 사랑의교회 새벽기도회에 대해 소문을 많이 들었는데 사실은 깜짝 놀랐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하고 모이신다는 것을 보면서 주님께서 그 마음의 소원대로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여러분에게 베풀어 주시길 소망한다. 제가 작년 11월에 코비드(covid)가 한참 진행 될 때이다. 그렇게 오래 갈 줄은 몰랐다. 제 조카아이가 어떤 미술 전시회에 저를 초대했다. 저도 오랜만에 마스크를 쓰고 갔다. 화면에 나오듯이 이런 전시였다. 안국동에 조그마한 전시회였는데 설치 미술 중에 하나였고 제목이 “가려진 말들”이었다. 그게 무슨 뜻일까? 하며 달리는 말인 줄 알았는데 영어로 보니 아니었다. Mask Word-그러니까 마스크를 써서 말을 할 수 없는 상태를 표현을 한 내용이었다. 그런 의미라 생각을 하면서 전시회에 들어가 보았다. 전시장에 들어가 보니 앞이 전부 천으로 가려서 앞을 한 치 앞을 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 천을 가만히 보니까 마스크 천이었다. 그것을 길게 연결해서 한 치 앞으로 볼 수 없는데 더듬어서 가보니 그 벽에 마스크를 붙여놓았던 것이다. 그 대부분의 글자는 볼 수가 없게 되어 있고 중간쯤에 아주 흐리게 작은 글씨가 있었는데 “뭐라고 해야 할까요?”라고 씌어 있었다. 이게 무슨 뜻인가? 생각하게 했다. 그리고 이층을 올라가보니 비디오가 상영이 되고 있었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는 내용과 달의 모습과 뒷모습만 보이고 소리는 안 들렸다. 그 모습이 계속 불안하게 보이고 달의 모습이 떨고 있는 모습이었다. 마스크가 있는데 희미하게 적혀 있었다. ‘말로는 표현이 안 되는’이라고 적혀 있었다. 원래는 미술이 상상하는 대로 생각이 되지만 그 작가의 생각을 조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조카아이가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코비드 시대에 모두가 마스크를 끼고 살았듯이 그 기간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들이 어떤 마음을 가질까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 동영상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 코비드 기간 동안에 우울증을 앓았던 청소년들, 청소년들이 한참 액티브 할 때이다. 친구들을 만나고 싶은데 못 만나고 이런 과정 중에 우울증을 갖는 아이들, 그리고 코비드 기간 동안에 가장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 주부들이다. 하루 종일 집에서 거두어야 하고 아빠도 하루 종일 집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을 인터뷰를 한 것이다. 벽에 걸어져 있는 것은 그 사람들이 느낀 감정과 우울증까지 갔던 마음이 어려웠던 사람들, 자기가 정말 힘든 가운데 말로는 표현이 안 된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통곡한다거나 울어버리면 감정이 해소가 될 텐데 사실 그것이 쉽지가 않다. 우는 것도 연습과 학습이 필요하다. 대개는 울지 말라고 학습을 받는다. 오랫동안 그 일을 안 하면 마음이 답답하고 표현할 길이 없는데 울 수도 없고 말로도 설명이 안 되고 상담 자랑도 안 되고, 그런 상태가 연속된 것이다. 그것을 그 사람들의 뒷모습을 촬영을 한 것이다. 그리고 말들을 얹혀 놓는 것이다. 그날 밤에 집에 돌아와서 기도를 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았다. 사람들 안에는 뭐가 있는 것일까를 그런 생각을 쭈욱 했다. 아마 현대 사회를 이끌어가는 사회과학자들, 현대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큰 사고가들, 개인적으로 3명을 꼽는다면 지금은 ‘지그문트 프로이트’ 라고 하는 심리학자이다. 그분은 정신병에 걸리거나 노이로제 걸린 사람들을 만나면서 어떤 패턴들을 만들었냐면 사람들이 행동하는 것에 실제로는 대부분이 본인도 정확이 뭔지 모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의식이 그 사람들의 행동을 좌우하고 있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가려진 말들이 이미 사람들 안에 있다고 한다. 어떤 것들은 우리의 시각 중에 프로이트의 어떤 것은 신앙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부분도 있다. 하지만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우리에게 행하신 많은 사역들을 보면 그 부분의 대부분의 시간들이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 데에 있다. 아픈 사람을 치유하고 그리고 요즘으로 말하면 정신병이지만 그 당시는 귀신 걸린 사람들의 마귀를 쫓아내는 일들을 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 안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원래 심겨진 하나님의 형상, 생명이 있음을 예수님은 믿으셨다. 그리고 그 안에 씨앗이 심겨질 때에 원래의 모습이 살아날 수 있는 것을 예수님은 믿으셨다. 그 원래의 그 토양은 무엇일까? 가려져 있고, 어두워져 있고 자기도 표현할 수 없지만 그것은 하나님, 삼위일체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기에 우리 안에는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은 깊은 갈망이 있다. 그 어떤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러하시는 서로를 존중하고 개인이 개인으로서 독립적이고 자유 함을 얻기를 원하는 그 갈증이 깊이 있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러하시듯 그 어떠한 사람이라도 이 땅 가운데 보냄 받고 쓸모 있고 누군가를 위해서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깊은 갈망이 있다. 예수님께서 그걸 믿으셨던 것이다. 사실은 그 즈음에 저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선교사 대표로서도, 필드에만 있다가 단체에 들어와서 깜짝 놀랐던 것 하나는 많은 선교사들이 어렵다. 특히나 아이들, 저는 이 선교사님들에게만 생기는 현상인지 아니면 이 시대의 흐름인지 몰라도 아픈 아이들이 많다. 많은 부모들은 그 아이들이 아픔을 모르는 경우가 참 많다. 그 일이 어렸을 때 알면 좋을 텐데 청소년이나 청년이 되어서 사건이 터진다. 그러면서 부모가 굉장히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게 되었다. 심지어는 자살을 한다거나 아니면 부모와 이야기를 안 한다거나 이런 일이 생기는데 통계 자료를 뒤져보니 이 시대의 가장 큰 질병이 정신질환인데 가장 많은 게 공황장애와 우울증이다. 그리고 이십대와 십대의 사망률이 가장 많은 부분이 자살이다. 이 대부분이 남자 아이들이다. 그날 밤에 기도를 하는데 제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는 원래 학자로 훈련을 받았고 계속 공부를 해 왔던 사람인데 현상을 말로 정리하고 말로 설명하는 데 굉장히 익숙한 사람이다. 그러면서 제가 그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말로 정확히 들을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과연, 그리고 나에게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에 내가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했을까? 내가 과연 예수님처럼 다가갔는가? 그날 밤 기도를 하면서 오랜만에 방언으로 기도를 한 기억이 난다. 그 내면의 그 답답함이 그냥 말로 기도가 될 수 없었다. 오늘 본문은 베다니에서 생긴 일이다. 향유를 깨뜨렸던 여인의 말씀은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여러분들이 4복음서를 읽어보면 이야기가 조금씩 다 다르다. 그 여자가 정확히 누군지도 다르고,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 어딘지도 섞여 있다. 아마도 이 4복음서에 있는 사건은 초대교회에 내려왔던 두 사건 이야기들이 전승되다가 아마 편집자들에 전승에 의해서 다양한 변증들이 나오는 것 같다. 크게 두 가지 사건인데 하나는 초기 예수님이 일하시던 사건인 갈릴리에서 주로 일을 하셨다. 거기에 바리새파 바리새인 집에 들어가서 죄 많은 여인이 발에다가 옥합을 깨뜨려 발을 닦는 사건이 있었고, 또 하나 사건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다니 사건인 예수님 마지막 일주일에 있었던 일이다. 문둥병자 시므온 집에서 일이 생겼고 그리고 이 여인이 마리아일 가능성이 높은데 오늘 본문은 그냥 여인이라고 하고, 아마 아까 말씀드린 첫 번째 사건과 섞여서 죄 많은 여인으로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예수님께서 전에 문둥병을 앓았던 시므온 집에 가서 이 여인을 만났을 상황은 예수님에게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예수께서 기존의 질서들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사건이 최 정점에 이르렀던 주간이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하나님이 오랜 시간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어 왔던 성전 시대가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거듭 예언을 하셨고 또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신다. 신기하게도 한 시대의 마무리, 이 성전시대의 마무리 때에 성전은 가장 크고 가장 화려했다. 그것을 지은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라 전체 건축 디자인부터 시공을 하고 애를 썼던 사람들이 당시에 최고의 건축술을 자랑하고 행정력을 자랑하는 로마가 지었기 때문이다. 그 성전을 보고서 제자들은 너무도 놀랐다. “예수님 성전 좀 보세.” 라고 했을 것이고 아마도 그 당시 성전은 지금 우리나라 롯데 타워를 보면서, 외국 사람들이 서울에 들어오면 롯데 타워를 보고 느낄 만큼, 예루살렘 랜드마크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성전은 동시에 하나님 백성의 타락의 결정체가 모인 곳이었다. 헤롯당을 대표하는 로마의 정치세력, 그리고 사두개인들 대표하는 자, 성전을 중심으로 해서 자기의 뱃속을 채웠던 그런 지식인 종교인들의 모임, 그리고 세상과 분리해서 종교에만 열중하게 했던 바리새인들이 모두 세파에 모여서 이권에 개입되어 헌금도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로마의 정치를 정당화시키는 일을 앞장서서 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주간에 마지막 예루살렘을 방문하시면서 성전을 척결하시면서 그 세력들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이 세파는 사실은 그렇게까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성전이라고 하는 그런 문제에 부딪혀서는 세파가 결탁을 했고, 위협을 느꼈고, 세파가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한다. 그 주간에 생긴 일이다. 제가 오늘 본문을 나눌 때에도 그래서 11절까지 나누었다. 그 앞 뒤 정황을 읽으면 그 리더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그리고 가롯 유다가 어떤 결정을 하는지가 그 사이에서 일이 생긴 것이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형제처럼 지내던 마리아, 마르다, 야고보 집에서 나사로 집에서 나사로를 부활시켰다. 난리가 났다. 죽이려고 작정했는데, 예수께서 메시아의 증거인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그것도 예루살렘에서 불과 이마일 떨어진 곳에서 그 일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나병환자 시므온이다. 그 자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왔다. 구경 온 사람들도 있었고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 온 첩자들도 거기 있었다. 거기 그 자리에 예수님이 계신 것이다. 그 일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 주간에 예수님 자신이 살해당할 것을 알고 계셨다. 제가 놀라는 것은 그 절박한 가운데 예수님의 집중력이다. 예수님은 한 때 나병을 앓았던 나병환자 시므온의 집에 찾아간다. 이 절박한 상황 가운데서... 그 사람에게 집중하고 치유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또 예수님의 마음은 이 여인에게 가 있다. 이 여인이 했던 행동은 대게 당황스런 일이다. 왜냐면 그 자리에는 여성들이 나타나는 곳이 아니다. 그 자리는 남성들이며 당시 문화로는 음식을 접대하는 정도인데 그런데 난데없이 나타나서 옥합을 머리에다 붓는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그 여인에게 집중을 하세요. 사실은 헬라어나 영어 성경에 보면 좀 더 명확히 나오는데 한글 성경에는 정확하지 않다. 현대인의 성경에는 잘 나와 있다. “이 여자는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했으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세상 어디든지 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이 여인의 행동은 거칠다.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과거에 살았던 자신의 기억, 그 가운데 예수님을 만났던 감명, 예수님께 대한 사랑, 감사, 예배함, 고마움, 이런 것들을 그 당시 문화적으로 합당하게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굉장히 비정상적이고 사람들이 수근 거릴 만한 일을 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가려진 말들 가운데 숨겨져 있는 그 여인의 진심을 보면, 그리고 칭찬하신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했다고 칭찬하시며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 교회 가운데, 모든 사람들 가운데 전해질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역을 기억을 해보면 예수님은 세상에 보냄 받아서 가난하고 병든 이들과 대부분의 사역을 치유사역으로 보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그 메시지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왔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시며 헬라어로는 이미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얘기를 들었던 유대 사람들에게 그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에게는 그런 개념이 없다. 예수님도 그 말씀을 한 적이 없고, 듣는 유대인들도 그런 식의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나라는 다윗의 나라이다. 다윗의 통치이고, 이 땅 가운데 임하는 종교적일 뿐만이 아니라, 동시에 정치적이고,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모든 평화를 말한다. 그랬기에 그것은 로마라고 하는 기존의 마치 하나님의 백성 위에 있는 것 같은 통치자와 정면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은 정치적인 죽음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굉장히 거대담론을 이야기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이 그 일하시는 방식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고 치유하시는 것이었다. 이것이 기독교를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근본적으로 가르는 포인트이다. 사실은 기독교 세계관에는 이러한 거대담론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막시즘 자체가 기독교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 두 세계관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막시즘(Marxusm)은 구조적인 것이 바뀌면,,, 우리가 한 복음의 증거는 그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 가운데 일어나면서 어떤 모습을 사회적으로 가져야 하는가? 또 우리가 각자 가지고 있는 직업을 통해서 그 일 가운데 어떤 새로운 나라를 가져오게 할 것인가에 대한 상상력을 갖고 일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라 전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전체적인 하나님의 시각을 보시면서도 놀랍도록 집중하신 것은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에게 집중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 숫자가 많지 않았다. 저희 단체는 생긴 지가 170년이 되었다. 굉장히 오랜 기간 동안 일을 했다. 집중해서 일하는 곳은 아랍과 아시아 지역이다. 대부분이 이슬람이다. 또 북한에서도 일을 한다. 또 닫힌 불교 권을 향해서 가기도 한다. 우리가 지난 2011년부터 시작하는 거대한 이슬람의 균열들, 그리고 그 가운데 생기는 일들,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일들을 생각한다. 그러나 거듭거듭 경험한 것 중에 하나는 우리가 하는 일이 결국 우리에게 맡겨진 소수의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여는 것은 논리와 설명이 아니다. 어차피 우리 아랍어를 그 사람들만큼 할 수가 없다. 우리가 키르키스탄의 말을 그 사람들만큼 하지 못한다. 우리가 중국어를 그 사람들만큼 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고 섬기고 사랑할 때에 복음은 증거 되어 진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아프고 있다. 코비드 전에도 양극화 현상은 전 세계적으로 굉장히 가속화 되었다. 그리고 코비드 기간에 풀려진 자본적 유동성으로 인해서 그 양극화는 더욱 가속화 되고 이제 코비드가 끝나고 나면 그것이 가시적으로 드러나게 될 텐데, 수많은 사람들이 아프고 가난하고 힘들 것이다. 그 가운데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하셨듯이 말이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고 설교가 아닌 그들과 동행함으로 그리고 복음 전도가 아닌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일로 그들 가운데 함께 하라고 예수님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한때 가려진 말을 들고 표현할 수 없는 우리의 죄의 결과로 인한 아픔 가운데 찾아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라고 오늘 본문을 말씀하신지 모른다. 제 개인적으로는 세 가지를 다시 기억하고 다시 결심했다. 1. 공동체가 아니고 관계이다. -우리가 포비드 가운데 교회가 다른 모습의 징조들이 띌 것이 계속 나타났다. 왜냐면 그 이전부터도 포스트 모더니 시대 가운데 사라들은 공동체가 승리하고 공동체가 잘 되는 것보다도 나에게 복음이 어떤 의미를 주는가에 집중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 일은 코비드 이후에는 이 기간 이후에는 더욱 더 강화될 것이다. 교회가 아니라 그 전에 있었던 공동체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처음 시작했던 것은 가시적인 교회와 건물이 아니었다. 물론 그런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 원형은 공동체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맺으셨던 그 공동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원형은 한 사람 한 사람과의 관계이다. 우리가 관계라고 생각하면 우리의 사역은 훨씬 더 유연해진다. 그전에는 사람들을 전도해서 공동 체 안으로, 교회 안으로 불러와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교회 올만큼 건강하지가 않다. 공동체 가운데 올 만큼 남의 문제에, 전체 문제에 신경을 쓸 수가 없다. 그때에 예수께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셨다. 예수께서 가셨다. 그들이 예수의 무리에 소속되든지 안 되든지 관계 없다. 치유하셨고, 다시 그 집까지 찾아가셨다. 대중성이 아니라 동행이다. 우리들의 말씀으로 일하는 사역자로서 집중해야 할 것은 많은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일반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지나갔다고 생각한다. 코비드 전에부터 진행 된 현상인데 이유에는 분명해질 것이다. 원래 내가 배웠던 목양,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서 그들과 동행하고 끝까지 가는 것을 결심했다. 2. 또 한 가지 결심한 것은 말과 능력이 아닌 성령의 능력을 간구하기로 했다. 그것은 마지막 그 주간에 그 절박한 상황 가운데 그 성령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 성령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아픈 사람을 보도록 했다. 자기가 위협을 받는데 아픈 사람을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진심을 꿰뚫어 본다. 저는 제 안에 그런 성령의 능력이 약하고 때론 요즘 없다고 느껴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다. 능력에 있다. 그 능력의 정점은 남을 위해 자기 생명을 지는 십자가에 있다. 그 예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과거에 찾아오셨다. 그리고 여러분의 사정에 찾아오셔서 가려진 말들의 숨겨진 여러분의 사정과 사명을 인정해 주셨다. 그 예수님을 기억할 때이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맡겨진 사람들의 아픔가운데 함께 동행 하고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을 다시 배워야 할 때이다. ♧요약 성전시대의 몰락 가운데 오히려 한 여인에게, 문둥병자에게 집중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된다. 자신이 살해의 위협 가운데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집중하고 제자들을 돌아볼 수 있었듯이 우리에게도 그런 성령의 신비한 능력과 그 놀라운 신앙의 믿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 예수님을 기억하여서 가려진 말들 가운데 그 진심을 깨달아서 해야 될 일에 최선을 다해서 서로 인정하고 사랑하며 동행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기를 소원하고 실천해야 한다. 코비드 가운데 드러난 한국교회의 민낯을 성령으로 인도하시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새롭게 빚어지며 새롭게 거듭나서 주님을 증거 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공동체와 개인이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명절 곧 유월절과 무교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이므로 전국 각처에서 모여든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때 예수님을 잡아 죽이면 민요가 날까 두려웠기 때문에 명절이 지난 후에 예수님을 잡기로 모의했다. 이것으로 보아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미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메시아 혹은 선지자로서 인정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향유를 부은 여인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고난 받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메시야이심을 알지 못했음에도 이 여인은 미리 그것을 알고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했다. 즉, 이 여인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던 것이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그녀를 칭찬하셨으며,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그녀의 이 선행을 말하여 이 일이 기념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자신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 바친 여인의 희생과 사랑은 모든 제자들 위에 뛰어난 것이었기에 우리는 배워서 실천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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