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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3년 7월 2일)
제목: "역사적 신앙관"
말씀: 에베소서 1:3~6
대표기도: 유종성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설교자: 박영선 목사님-초빙(노포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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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1:3~6,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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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에베소서 1장 3절에서 6절은 하나님의 계획, 의지, 목적 같은 것을 어 증언하고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지와 계획, 목적이라는 것의 중요성은 우리들이 다 같이 경험한 것 같이 예수를 믿으면 중생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복을 받고, 천국에 가는 것으로 가장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본문은 그런 우리가 아는 확인보다 더 큰 의미를 그 문장이 갖고 있다. 이 문장은 이 목적이 하나님의 의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보상을 받느냐? 어떻게 해야 되느냐? 라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가? 우리가 기독교인이라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는 것에서 자부심과 확신을 갖고 있지만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보시면 모든 종교란 신이 있어야 되고, 그 신의 정체성이 설명되어야 한다. 그래야 신자들이 그 의도와 방법을 이해하고 쫓아갈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서 종교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해되느냐 하면 내가 진심을 가지고 간절히 빌면 답을 얻을 수 있다는 식으로 보통 종교가 성립된다. 그래서 무속 신앙이라는 것은 신에 대한 설명이 없고, 신 자체가 없고, 그 갈급한 인간과 인생에서의 비는, 그 고함지르는 것들이 중요한 내용이 된다.
 
그러나 기록 기독교는 하나님의 창조주요, 부활의 주인이시며 심판자라고 얘기하는 것이 순서를 가지며 시간과 과정을 가진다. 그러니까 우리가 쉽게 기독교 신앙을 확인할 때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어? 그럼 난 구원의 확신이 있어. 나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주를 만났어. 그리고 여기에 다음 질문은 모든 걸 건너뛰어서 오늘 죽어도 천국 갈 걸 믿어. 이렇게 끝장으로 가서 그 간격이 없어졌다. 예수를 믿는 게 본인에게 확실하고 죽으면 천국 가는 게 확실한데. 오늘은 그 지갑 되는 거다. 믿고 감격했으면 데려가야 되는데 현실에 다 내버려둬서 믿지 않는 자들과 비교할 때. 아무런 혜택이 없고 미 싸운 일을 아무리 외워도 곤란하고 지랄 같은 현실을 아무도 면할 수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 도대체 어떻게 하시자는 건가? 라고 다시 돌아와서 왜 성경이 구약이 있는지, 신약이 있는지 우리가 왜 예수를 믿고 나서도 현실에 갇혀 있어야 되는지, 예수를 믿으면 우리 보통 승리주의라고 표현하는 것 같이 우리가 자리를 지위와 권세를 가지고 세상에 의를 베풀고 복을 베풀고 하는 자리에 있을 것 같은 기대를 한 번도 경험할 수 없이, 하나님 스스로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권력으로, 폭력으로 증언하시지 않고 우리를 통해서 일하신다고 해놓고 우리에게 특권을 주시지 않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실존적 신앙관에 역사적 신앙관을 보태야 된다. 실존적 신앙이라는 것은 이것은 규칙도 아니고, 주문도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신 것이고, 내가 하나님을 만난 것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나를 아는 것 이것이 실천적 신앙이다. 난 예수가 누군지 알아. 나는 예수를 믿어. 예수님도 나를 알아 내 이름이 생명책에 있어. 이건 다 실존적 신앙입니다. 교훈이 아니며 어떤 구호가 아니며, 내가 알고, 내가 붙잡힌 어떤, 어떤 운명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여러분 꼭 기억하셔야 될 것이 구원론적인 신앙 고백이다. 구원론 적이라는 것은 예수를 모르다가 예수를 알게 되어 구원받은 소위 말하는 중생 그리고 천국이라는 소망 속에 있는 것이 다 구원론이고 하나님은 구원론을 벗어나 있다. 그러니까 쉽게 얘기해서 잘 외우시는 요한복음 3장 16장 같이,
 
*요한복음 3:16,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조를 우리는 언제나 자신에게 적용한다. 그러면 안 믿는 것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 이 예의를 다해서 안 믿는 님 들은 어떻게 되나요? 놈이 되나? 남이 되나? 우리의 신앙을 확인할 때마다 여러분이 쓰시는 방법은 나는 믿었고, 너는 안 믿었어. 라는 이분법이란 말이다. 근데 성경은 훨씬 크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범위를 창조 세계 전체를 끌어안고 계시단 말이다. 믿었느냐 안 믿었냐는 중요한 구별이지만, 하나님은 여기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쪽에도 하나님이시더라 말이다. 우리가 아직 믿었는데도 천국을 못 갔듯이 이들도 안 믿었는데 아직 지옥에 안 가고 살아남아 있고 둘이 합작으로 작품을 만들어야 되는 인생을, 역사를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나는 믿어 난 천국 갈 거야’ 라고 얘기하는 것으로는 일상을 살 수가 없다. 안 믿는 사람들하고 살아야 되고, 믿음으로 분명치 않은 형편을 현실을 살아야 되고, 가서 직장생활을 해야 되고, 동료가 있고, 상관과 부하가 있고, 가족이 있고, 이웃이 있고 그리고 그 나라의 형편이 있고 사회의 정신이 있고, 하나님 속에서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고백에 단순한 분명함같이 인도하시지 않고 이렇게 알 수 없는 자리에 우리를 두시는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현실적인 질문이 돼야 된다. 이 모든 질문들을 이 이분법으로 나누어서 나는 믿었어. 착하게 살면 돼. 착하다는 거는 답이 없어서 만든 말이다. 착하다는 말에 반대는 뭔가요? 악하게 사는 거 아니요, 우린 악하게 살지 않는데, 착하게 살아도 아무 보상이 없다. 착하게 산다는 걸로는 예수님이 오셔야 될 필요는 없다. 착하게 사는 것은 맹자와 공자면 된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일을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방법을 썼는가? 이건 훨씬 큰 문제다. 하는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착하다는 건 우리가 아는 도덕법이다. 윤리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 정도가 아니라는 거죠. 잘 아시는 욥기는 구약 성경에서 바로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설명한다.
 
욥기 1장에서 그는 의인이다. 라고 소개된다. 그래서 나중에 그가 고난을 받고 어려움에 처하자 친구들이 와서 너 회개해라. 하는 것은 말이 안 맞는 거래이다. 왜냐하면 설정이 욥은 의인이다. 그런데 고난을 당한다. 재산도 뺏기고 자식도 다 죽고 자기까지 병에 붙잡혀 있는데 그는 의인이라 한다. 친구들은 와서 그들이 아는 신앙은 잘하면 복 받고 잘못하면 벌 받는다. 라는 잣대밖에 없으니까 빨리 회개해라 그러니까 여기, 난 회개할 거 없다. 여러분한테 뭐라 그러겠어요? 우리도 다 하는 거야 너 교만해 니가 잘못한 적이 한 번도 없단 말이야? 라는 식의 판정밖에 내릴 수 없듯이, 친구들도 그랬다. 야, 너 말 그따구로 하는 것만 봐도 니가 잘못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잘못했단 말이냐? 이렇게 됐죠? 그러니까 욕이 그게 내가 환장하겠는 거다. 내가 잘못하지 않는데 왜 이 꼴이냐 니들하곤 얘기가 안 되는데 하나님께 직접 물어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는 거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뭘 하냐 하면 창조 세계를 보이신다. 또 악어를 봐라 또 우박 창고를 봤냐 이거 누가 만들었느냐 왜 만들었느냐 이게 무슨 뜻이야? 이 있는 것들이 자기에게 조건이 있고 원인이 있어서 그 결과물이냐 아무 조건도 없는데 내가 만들었다 창조주시잖아요? 하나님이 욥에게 하는 대답은 이건가요? 욥의 질문은 “하나님 난 억울합니다.” “넌 뭐가 억울하냐?” 하나님, 왜 일을 이 땅으로 하세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너는 잘못한 것이 없으니까 당당하다 이거지 그렇죠? 난 잘못한 게 없잖아요? 야 그럼 애들은 잘해서 생겨났냐? 이건 하나님의 기쁘신 뜻, 하나님의 권능의 결과물들이다. 너희는 이런 세상의 창조물들과 훨씬 다른 내 상속자야. 내 후손이야. 내가 너를 잘잘못에 따라서 보상하는 정도에 불과하단 말이야? 부모가 자식을 기르는데 너 잘못만 안 하면 돼. 매일 집 안에서 나오지 마, 그러는 부모 봤어 너 해봐, 해봐 자식이 뭐라 그래요. 저 공부 안 하고 나가서 장사할게요. 공부는 해서 뭐해요. 나 공부하기 싫어요.
 
그러면 부모가 뭐라 그래요? 내가 언제 너보고 돈 벌어 오라 그랬어. 이 새끼야! 이 니가 커야지 뭐 훌륭해줘야 될 거 아니야! 자식이 부모만 못하다. 라고 얘기하면 평생 원수가 되는 거다. 누구가 미우면 그러세요. 왜 본인은 훌륭하신데, 자식은 그 말 못하세요 그러면 그날로 이제 안 보는 것이다. 자식을 칭찬하면 아이 부모님도 훌륭하지만, 어우! 그 아드님은 바르세요. 그러면 그날부터 만날 때마다 뭐 먹고 싶으냐고 물어보고 한다. 성경이 그러는 거예요. 야곱이 그 하나님과 씨름을 했을 때, 하나님이 야곱이 고집을 꺾지 않자, 환도 뼈를 꺾는다. 집어 간다. 못 간다. 축복해 주셔야 됩니다. 왜 축복을 해달라 했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물어본 거예요. “그 축복하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습니다.” 그러니까 네 이름이 뭐냐? 그렇지 너는 야곱이지. ‘야곱입니다.“ 야곱은 발뒤꿈치를 잡은 자고, 약탈자라는 뜻이다.
 
히브리의 표현으로는 날강도다. 날강도, 날강도란 강도짓이 도덕적으로 틀렸다는 얘기가 아니라 저는 제 필요를 누구에게서 뺏어 와야 되는 자다. 제 필요를 채워줄 자가 없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너 다시는 그 이름을 쓰지 마라 너는 이제부터는 이스라엘이다.” “너는 하나님과 싸워서 이긴 자이다.” 인간이 무슨 하나님과 싸워서 얻을 게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이거예요. 너는 남의 것을 뺏어 와야 되는 보호자가 없는 넌 고아가 아니야. 넌 강도짓을 할 필요 없어. 내가 네 부모야. 자식이기는 부모봤어? 이게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희가 나를 위해 존재하라 그러지 않고, 너희를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걸 알아라. 라고 얘기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 고백인데 예수가 오신 이후고 결과물인데 그걸 역사로 보인다. 야곱에게서도 그 유명한 창세기 28장 벧엘 사건이 그렇지 않은가? 돌베개하고 자고 있는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에게 축복하신다. “너 누운 땅 동서남북을 다 너와 내 자손에게 줄 것이다.” 그래서 그 약속을 주시면서 그때 “니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함께하고 너를 이리로 데려올 때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 그게 20년이 걸린다. 근데 가서 개고생하고 말이 자꾸 험해지는 이유가 뭐야 분위기에 자신이 생겼나 보죠. 다 우리 편 내 자식이라는 느낌이 들어와서 그렇다. 20십 년을 왜 놔두는가? 거기서 악착 같이 번 것을 여기 와서 다 잃어버리잖아요? 형한테 다 내주고 혈혈단신으로 남았다고요. 그런데 하나님이 거의 다 되고 너는 이스라엘이다. 그럼 그 나라 이름이 돼요. 이 역사들이 왜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 가신대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은 경우예요. 경황, 도전, 시험, 경력 이라는 속에서 우리를 만들어 간대요. 왜 왜 결론을 꼭 짚지 않고 이런 과정을 나보고 그래요. 나보고 그래요. 철이 들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에 걸 맞는 자가 되래요.
 
오늘 본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바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그래서 찬송을 하게 하겠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영배하고 무릎 꿇는 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그가 사랑하시는 이 자녀들의 광으로 같이 화음을 이루겠다. 그런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목적으로 하고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는 목숨도 건다. 그게 십자가이다. 그걸 만들려면 뭘 해야 되냐면 시간과 경호라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사랑과 믿음을 나눈다. 기독교를 대표하는 두 단어이다. 사랑과 믿음, 이 두 단어는 상대가 없으면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사랑도 상대화해야 되고, 믿음도 상대화해야 되는데 우리는 계속 하나님 앞에 죽으라면 죽겠어요. 뒹굴라면 뒹굴겠어요. 지 까짓 게요 뭐. 이렇게 자신의 신앙을 윤리 도덕적으로 금욕적이고 자기 비하로서 증명할 줄만 알았지. 커바 커바 아버지가 너한테 뭘 원하는지 따라와 봐라. 는 데는 못 가고 있어요. 겁을 내요. 겁을 낸다고요. 사랑이란 믿음의 대상이 돼야 한다는 걸 몰라요. 그러니까 그런 사랑과 믿음이 대상을 필요로 한다는 건 무슨 말이냐 하면 한쪽이 다른 쪽에 조작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각각 자발성을 가져야 된다. 각각이 그래야 사랑이 믿음이 성립이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저 아담에서부터 이제까지 전 역사에 걸쳐서 이 자발성을 기른다. 철이 들게 하며, 하나님이 누군가를 뼛속 깊이 그리고 자신의 이해와 인생이라는 경험 속에서 이 자리에 오게 만든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 제일 많이 하시는 게, 한국교회에서 제일 많이 하는 게 회개(悔改)이다. 회개의 약점은 뭐냐 하면 잘못한 것을 지우고 있지 더 나아가는 데가 없다. 윤리와 도덕과 양심은 결코 훌륭한 대로 가는 길을 제시하지 못하고 잘못한 것을 꾸짖을 뿐이다. 기독교가 착하게 살면이 아니라, 커야 되는 문제라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교회에 올 때는 보통 뇌를 안 갖고 오더라고요. 그래서 뭐 얘기가 되는 얘기를 하면 어쩔 줄을 몰라요. 그러시면 안 돼요. 다음엔 꼭 갖고 오세요. 냉장고에 넣어놓고 온대요. 이제 상할까 봐 그러니까 생각해 보세요. 자식을 길러보면 다섯 살 때까지가 제일 예뻐요. 그다음부터는 완전히 원수예요. 그런데 자식에게 이 병이 생기면 큰일이에요. 이게 뭐냐면 안 크는 거 애가 안 크면 큰일이에요. 그죠? 애가 다섯 살로 영원무궁이 산다. 그렇게 끔찍한 것도 없어요. 밤낮 도리도리 작곡만 하고 그럼 큰일이라고요 이가 커야 돼요. 크는 증거가 뭐죠? 키가 크죠. 체중이 늘죠. 그리고 말을 안 듣는다. 이건 잘못이 아니에요. 이건 크는 거다. 싫어가 나온다. 싫어, 난 이러고 싶어. 반발이 나온다. 우리는 이게 절정에 이 절정에 다 달았을 때를 사춘기라고 한다. 사춘기는 자기 주권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납득을 해야 하겠어 난 이해가 안돼. 난 이렇게 해보고 싶어. 이걸 다 허락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게 없으면 안 된다. 왜? 부모님이 그렇게 이렇게 하라. 그랬는가? 왜 부모님이 공부는 꼭 해야 된다. 그랬는가? 여러분 다락방 방장(순장) 정할 때도 학력이 들어간다. 그러니까 공부는 맞선 볼 때도 나오고, 성가대 대원들도 아마 학력은 봤을 걸로 생각이 든다. 학력은 학력에 등급이 있는 게 아니라 훌륭해지는 인류가 발명한 최후의 방법이다. 공부는 지름길이 없다 노력해야 된다. 하고 또 해야 된다. 포기하면 안 된다. 이런 것들을 공부해서 배우는 것이고, 인생 자체에서 배우면 여러분들이 이런 것들로 인해서 이제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을 분별할 수 있게 되고, 선택을 할 수 있게 되고, 선택한 것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런 일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가는 그 아들을 보내서 출발시켜서 만들어가고 싶은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 에베소서 4장 30절식으로 얘기하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의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라라.” 라는 성경이 말하는 성숙과 신앙의 어떤 지점인 것이다. 왜 그러면 이걸 좋은 말로 하시고, 좋은 분위기에서 하시지 않고, 이렇게 못살게 구시는가? 거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는데 성육신에서 그게 나타난다. 성육신이란 잘 아시다시피 하나님이 우리를 구하러 인간이 되신 것이다. 그 예수님께서 마지막 밤에 요한복음 17장을 유언같이 기도문으로 남기는데 거기 이런 약속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어.” 여기서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이다. “우리 안에 있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알게 하시리라.” 아버지가 그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그의 가족으로 부르신다. 이게 기독교이다. 로마서 8장에서도 “우리는 다시 두려워하는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느니라.”
 
이런 성경의 얘기들이 이렇게 복종하는 신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만드는 싸움이고 자녀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를 분별과 판단에 절정에 올라와 하나님과 사랑과 믿음의 연합을 할 수 있게 우리를 만드시는 일을 역사 내내, 모든 인생 내내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보내신 것,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내가 너희에게 교훈한 것을 가르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모든 것을 배워 지키게 하라.” 라는 명령을 준다. 땅 끝까지, 땅 끝까지는 선교적 표현에서는 이방 나라들을 의미하지만 우리가 땅 끝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스라엘에서 우리만큼 온 나라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땅 끝이고 여러분이 거기 태어나셔서 기독교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한 과거 유교와 불교의 유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자 우리로 하여금 내가 있는 거기가 내가 너를 보낸 자리다. 라고 얘기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가지셨던 별명,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예수가 우리에게 오신 것은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세상을 구원하러 오시는데 그 메시아가 인류 속에 들어오시므로 인류는 구원의 대상이 되었고, 그 복이 되었다. 를 나에게 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나를 보낸 것 같이 내가 너희를 보내고 너희가 땅 끝까지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 제자가 되게 하라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니라.” 에 있는 것이다. 거기가 여러분들이 매일 일을 가는 그지 같은 현실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도 예수님이 볼 때 우리가 거지같은 현실이었을 것이다. 안 그런가? 죄인들 속에 오는데. 하고 아 모욕하고 드디어 죽인다. 거기에 예수님이 오시는 방식으로 우리가 보냄을 받고 있고, 우리는 그 부활을 본 자이고, 요한복음 14장식으로 얘기해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든지 내가 이루리라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일도 하리라.” 에 들어 있다.
 
예수님은 자기의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기적을 도입하여 책임을 면하지 않는다. 죽는 길을 가신다. 죽는다는 걸, 여러분 최악의 진심, 최악이라 그러면 안 되고, 극단의 진심이라고 보시지 말고, 그 영광과 진리를 이해받지 못하는 데까지 가야 된다. 그들이 다 믿어야만 여러분의 사명이 완성되는 게 아니라 모르는 자리에도 가라. 끝까지 몰라도 된다. 그러나 너는 내 책임을 해라. 이렇게 보냄을 받는 것이다. 로마서 12장식으로 얘기를 하면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저주하지 마라. 저주하지 말고 도리어 축복하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라.” 이게 세상을 살아야 되는 신자들에게 준 명령이다. 악에게 지지 말고 손으로 악을 이기라는 우리가 윤리 도덕적 정성에 묻혀 있던 신앙의 수준에서는 악을 감동시키는 선, 상상하곤 했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는다. 악당이 악당 노릇하는 것 같이 너는 네 자리 지켜라. 지지 말아라. 그를 이겨야 된다. 가 아니라, 니가 흔들리지 마라. 이런 얘기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형통하게 살기는 글러 먹은 것이다. 하나님이 아직도 구원의 문을 열고 있다 누구에게나 손을 내밀고 있다. 라는 걸 알고 살아야 되는 것이다. 여러분이 복음적이고 선교 적이라는 것은 말투나 어떤 표현하는 단어들이 있는 게 아니라, 인간성에 있어야 된다. 세상이 만든 인간과 하나님이 만든 인간은 뭐가 다른가? 하나님이 만든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은 용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기다려 줄 수 있다. 정죄하지 않는다. 보복하지 않는다. 여러분을 아주 완연하게 다르게 만든다. 그러나 얼른 보이지 않는다. 어느 날 누가 이렇게 물을 것이다. 너는 좀 이상해 뭐가 아니? 하여튼 이상해. 왜 너는 화낼 때서 화를 안 내 그리고 화 안 낼 때서 화를 내 판단 기준이 다르고 방향이 다르고 길이 다른 것이다.
 
이 길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요구하신다는 것은 여러분을 그 아들을 보내셔서 만드신 구원 메시아에게도 이렇게 선언한 것 같이 히브리서 5장 8절같이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권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다. 왜 순종과 온전함이 등장한가? 신인데 뭐가 부족하단 말이죠? 죄로 말미암은 사망의 자리를 경험하시는 것이다. 그가 육신으로 오신 것은 히브리서 식으로 사망을 맞보러 오신다. 사망으로 사망을 물리치러 오신다. 사망에도 들어오신다. 그러니 여러분, 어느 누구도 내가 살아있는 한, 그가 살아있는 한, 그의 운명이 끝났다고 저주하지 말란 말이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맡겨진 현실에서 여러분이 제일 어려운 것은 나는 잘하고 싶은데, 내 옆에 동료들이 자라지 않더라. 말이죠. 악착하고 거짓말을 떡 먹듯 하고, 떡을 1년에 한 번 먹나? 이 속에서 몸부림을 치면서 왜 여기다 넣으셨어요? 그걸 모르면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구라이다. 그렇죠? 그러니까 우리는 순교시대도 지났고 부흥시대도 경험했다. 이것은 하나의 한국 기독교의 성장 과정이다. 목숨을 걸 수 있다. 그리고 너무나 풍성하다 감동적이다 이상 만족할 수 없다. 그래서 다음에 어디로 가야 돼요? 철이 들어야 되는 거야. 철이 들면 가장 중요하게 뭐가 있냐? 세상 짐을 같이 쳐야 된다. 이웃의 짐을 져야 된다. 저들은 모른다.
 
아버지와 저들을 사하소서! 는 멋있는 대사가 아니라, 실제로 죽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특별하다는 걸 안다. 하나님이 이런 방법으로 일하신다는 사실, 예수님 세대에 태어나지 못한 것, 제일 억울해. 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예수가 걸으신 길과 그 존재를 잊고 있다. 예수님을 아무도 못 알아봤듯이 세상은 우리를 못 알아본다. 예수는 왜 믿어? 그딴 소리나 하죠. 그러면 이렇게 대답하세요. 넌 몰라도 돼. 그 말할 때가 제일 좋다. 그러면 여러분이 신앙생활이 현실에 이어진다. 현실에 왜 이 지지고 볶는 걸 반복해야 되나? 왜 하나님은 내게 이런 환경과 조건을 요구하시는가? 해서 여러분이 거기에서 변한다. 어떻게 변하는가? 알고 있으면 되는 게 아니라, 모르는 데서 아는 것이 한 걸음이라면 그 아는 것을 하려면 실력이 있어야 된다. 실력은 어떻게 생기는가? 훈련을 해야 된다. 하고 싶은데 안 된다. 물어본 적 있는가? 왜? 나는 안 돼요? 내 정성이 부족한 게 아니라 실력이 모자라니 내일 다시 하자 다시 하자!! 다시 하자 언제쯤 처리되나요? 제 경험엔 환갑이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수많은 좌절과 수많은 자책감에 사로잡히는 날들을 지나가야 처리된다. 안목이 생기며 분별이 생기며 선택할 수 있으며 책임질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서 더 가자 그러신다. 그 영광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종말, 천국은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모든 인류를 예수를 보내서 구원한 것 같이 우리를 보내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기르시며, 우리를 통하여 영혼들을 부르시며, 천국에 백성들을 만들어내신다는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이다. 역사와 인생의 주인의 동반자가 된다. 이를 기억하여 여러분의 답이 없다고 생각하는 현실을 살아내는 그 아무것도 아닌 습관 같은, 개념 같은 그 나날들이 여러분을 만든다는 것 여러분의 그 분노와 원망과 그 절망들이 그게 우리에게는 한 단계씩 높아지는 과정이라고 이해하시는 하나님의 뜻깊은 그 아들을 보내신 사람이 여러분들의 생애에서 다시 꽃피는 귀한 증거들을 기적들을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란다.
 
♣요약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지금 일하고 계시듯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녀들은 저희임을 알아서 복되고 명예롭고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기적과 은혜의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고통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실패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영광의 찬송이 되고 세상이 상상하지 못하는 자리로 인도함을 받아서 인류의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증거가 되는 인생으로 성실하고 신실하고 충성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역사적 신앙관을 가져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찬양하고 있다. 성부는 태초에 인간에 대한 구원 계획을 세우시고 성도들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끝없는 사랑의 아버지로서 우리들을 향한 변함없는 도우심과 인치 심을 인하여 찬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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