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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2년 3월 13일)
제목: "박수 쳐주는 인생"
말씀: 마태복음 20:1-16
대표기도: 조철민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 영광찬양대(1부)
사회: 장광천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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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1-16,
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또 제 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5 제육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제 십일 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7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 십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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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영상과 좀 다를 수 있습니다 영상은 2부 예배이며 지금 이 내용은 1부 입니다.



▶봄비,,, 우리가 계절이 바뀌면 집안 청소를 하게 된다. 우리도 말씀을 통해 마음의 청소가 되었으면 한다. 청소할 때, 창문에 있는 먼지도 털어내고 또 더러운 때도 벗기기도 하듯이 말씀을 통하여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은 열일곱 번째 새 판짜기이다. ‘박수 쳐주는 인생’ 제목이 좀 도발적이지 않는가? 사실은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를 먼저 하려고 했다. 저는 결론은 제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본문의 내용을 이 시대의 여러분들의 귀에 들리게끔, 여러분의 삶의 변화를 위해 주님이 주시는 음성을 들어야 하니까 전체를 잘 보면서 마음속에 깨달음에서 나온 것이다.
결론적으로 마태복음의 20장에 포도원의 품꾼의 비유가 누가복음 15장에 돌아온 탕자의 비유와 아주 비슷하다.
 
*마태복음 20:1-7,
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또 제 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5 제 육 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제 십일 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7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그런데 오늘 이 여기 보면 이른 아침에 일찍
제6시(정오 12시)에 부름 받은 사람,
제3시(오전 9시)에 부름 받은 사람,
제9시(오후 3시)에 부름 받은 사람,
제11시(오후 5시)에 부름 받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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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데나리온 받았다고 일찍 온 사람이나 똑 같다고 대우가 부당하다고 공정하지 않다고 화를 내는 사람이랑 누가복음 15장에 첫째 아들이 자기 동생은 지 맘대로 살고 자기는 아버지 말을 잘 지켰는데 아버지는 나한테 송아지 한 마리도 주지 않았다며 불평하는 것이다. 돌아온 탕자도 제일 손해 본 사람이다. 송아지다. 이런 것들이 깊은 은혜로 깨달아졌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이 강력하며 파워이다. 2022년 3월 13일 여러분에게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 아주 특별한 비유이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 넘는 비유이다.
처음 부름 받은 사람은 이른 아침 오전 6시이다. 그 다음에 9시, 열두 시, 오후 세시, 오후 5시이다. 부름 받은 것이다. 그 부름 받은 것이 어떤 뜻인가? 첫 번째를 보면,,,
 
I. 나는 몇 시에 부름 받은 사람인가?

-이 말씀이 비유로 끝나면 안 되고 우리들과 접목이 되고 내게 주시는 말씀이 되어야 한다. 내게 변화를 주는 말씀이 되어야 한다. 오늘 이 말씀 가운데 나는 몇 시에 부름 받았는가? 아침에....
요한은 소년기에 부름 받은 사람이다. 일평생 부름 받아 주님을 섬기는 기회를 얻었다.
 
1. 이른 아침(오전 6시)에 부름 받은 사람-유아기 소년기에 부름 받은 사람이다.
2. 오전 9시(제3시)에 부름 받은 사람-대학 청년기에 부름 받은 사람이다.
3. 낮 12시(제6시)에 부름 받은 사람-중년기에 부름 받은 사람이다 -바울 같은 사람
4. 오후 3시(제9시)에 부름 받은 사람-장년기, 노년기에 부름 받은 사람이다.
5. 오수 5시(제11시)에 부름 받은 사람-인생의 모든 일이 끝나는 시기에 부름 받은 사람이다.
 
-바울 같은 사람은 중년기 이 시기에 부름 받았다. 오후 3시 장년기에서 노년기를 향할 때, 부름 받은 사람이다. 육십 세쯤이며 천국에 아직 문이 닫혀 지지 않을 때 부름 받은 사람이며 마지막으로는 오후 5시에는 인생의 모든 일이 끝나는 시기에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십자가상에 있는 강도가 오후 5시에 부름 받은 것이다. 이러한 장면에서 여기에서 품삯을 주는데, 일찍 부름 받은 사람이나 나중에 부름 받은 사람이나 똑 같이 품삯을 주는 장면이고 세 번째 장면은 여기에 대해서 열 받아서 아니 그럴 수 없다며 첫 번째 장면은 아침 일찍 일한 사람이 오후 5시에 와서 한 시간만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다며 한 시간 일한 값만 주어야 하는데 한 데나리온을 준다며 불평하는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장면은 요즘처럼 이야기를 한다면, 시급이 9천원이라면 그것만 주어야 하는데 하루 일한 10만원을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 번째 장면은 아침 6시나 7시에 일한 사람이 그러면 나는 백만 원쯤 주는가? 하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똑 같이 10만원 준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열이 올라서 불공정하다고 화를 내는 것이다. 세 번째 장면을 보면
 
*마태복음 20:13-14,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이런 전체 요약이다. 이해가 안 되는가? 그런데 이 말씀이 중요하다. 결론은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16절의 결론이다. 이 말씀이 나타나게 된 배경은 19장에 있다.

*마태복음 19:26-27,

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
*마태복음 19:30,
30 그러니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20장 앞에 19장에 나온다. 뭐냐면 베드로를 따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정말 헌신하고 최선을 다해 모든 것들을 주님께 올려 드렸는데 우리에게 뭐가 있냐고 하니까 포도원 품꾼을 가지고 대답을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이것과 같다는 것이다. 자 그러면 우선 여러분과 저는 몇 시에 부름 받았는가? 저는 당근이다. 6시에 부름 받았다. 이 말씀을 하게 된 배경은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이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 이 본문은 누가복음 16장에서 이야기 한 불의한 청지기, 지혜로운 청지기에 대해서 말씀할 때, 경제문제 재물문제를 이렇게 한다고 바리새인이 이렇게 재정관을 갖고 있으니까 이러면 안 된다고 재물을 가르쳐주는 재정관의 이야기도 아니다. 오늘 이 본문은 어떤 공정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오늘 뭐 인생에 효율성 좋은 이런 이야기도 아니다. 오늘 본문은 천국은 마치 하나님 나라의 핵심 원리가 무엇이며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무엇이며 하나님 나라에 바치는 핵심 토대가 무엇인가이다. 오늘 두 번째 생각할 것은 바로 공로주의냐, 은혜 주의냐이다.
 
II. ‘공로 주의’냐 ‘은혜 주의’냐?
 
-내가 하루 종일 일을 했다고 해가지고 공로주의냐 은혜 주의냐이다. 하나님 나라가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가이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무엇인가이다. 작동 원리는 이 세상에서 통하는 공로의 원리가 아니다. 은혜의 원리가 지배한다는 것이다. 공로의식이 아닌 은혜의식이다. 오늘 품꾼이 삯을 받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상급과 보상은 주권자인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루 종일 일해서 안 데나리온 받은 것을 자기가 열심히 했다고 하나님 앞에 공로 의식을 내 세울 수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만이 가능하다. 이것은 신약에 예수님께서 비유로만이 아니라 신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아주 일관성 있는 하나님 나라의 작동원리가 은혜의식이다.
우리성도들이 제대로 작동되면
 
*출애굽기 33:19b,
19b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ㅡ그러니까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적인 공로의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지배하는 것인데 은혜의 원리가 지배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실제적으로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마음에 불편한 사람이 많다. 예를 들어 내가 교회에서 이십년 삼십년 쭈욱 일을 했는데 어떤 사람은 중직을 받고 어떤 사람은 못 받는다라고 생각하면 내 마음은 어떨까이다. 자식도 간섭하면 안한다. 잔소리가 싫은 것이 사람들의 마음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의 작동 원리는 공로나 이런 것이 아니라 은혜의 원리이다. 보상의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로서 작동한다.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 ‘공로의식’의 밑바닥에는 우리의 죄에 대한 ‘십자가의 대속’과 ‘구원의 은혜’를 무력화 시키려는 사탄의 치밀한 의도가 숨겨져 있다.
 
-그러니까 오후 다섯 시에 와가지고 한 달란트 받는 것을 보면서 일찍 온 사람이 더 나은데,,, 라는 그런 공로의식, 비교의식으로 이런 것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대한 구원의 사역을 무력화 시키려는 사탄의 간교한 전략이 담겨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을 세워지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으로 채워지는가? 은혜로만 세워진다면 행위나 공로로는 설자리가 없는가? 인간의 행위나 공로로 설 자리가 없을까? 우리 인간이 스스로 죄 성을 통제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인간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 그래서 이것은 지나간 1600년 동안에 치열한 논쟁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란 인간의 죄성을 고쳐 주시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소위 AD5세기에 펠라디오스, 미국식 발음은 펠라지오스와 어거스틴의 논쟁이다. 펠라지오스는 인간이 어느 정도 인간의 죄 성을 통제할 수 있다고 하고, 인간이 어느 정도 선행을 쌓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학자이다. 어거스틴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느 정도 부패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죄 성을 우리 죄 성의 값으로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걸 가지고 비슷하게 싸우는 학자이다. 이것으로 서로 싸우는 부류들이 있다. 예수 믿고도 나름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주셔가지고 잘 나가는 분들 가운데 소위 선행으로 구원 받는다고 행위로 구원 받는다고 하는 그런 분들도 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펠라지오스쪽인가? 아니면 우리는 어거스틴 쪽인가? 질문하고 싶다. 사랑의교회 수준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가지고 좀 더 확고하게 하나님의 나라의 작동 원리는 공로 의식이 아니라 은혜의식인 줄 믿는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오늘 베드로가 주님을 위하여 온몸과 정성과 그 제자들 몇 명이 다 드린 것조차도 그들이 어떤 수준과 선행과 공로를 가지고 한 게 아니고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했다. 헌신하고 희생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줄로 믿는다. 여러분 이것이 오늘 누가복음 15장거기에 맏아들은 이걸 못 깨달았고, 돌아온 탕자에서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공로의식과 비슷한 말이 비교의식인데 비교하는 것, 소위 은혜에 집중하기 못하면 본문에서 계속 나오는 것처럼 비교이다. 12시간 일한 사람이 한 시간 일한 사람과 비교해 가지고 자기들이 우울하다고 생각했다.
 
*마태복음 20:12,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비교하는 것이다. 한 시간 밖에 일을 안 했는데, 우리는 땡볕을 견딘 우리와 어떻게 같을 수 있냐는 것이다. 한 시간 밖에 일을 안 했는데, 라고 비교의식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 우울하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예수님은 신경 쓰지 말라는 것이다. It's non of you business. 그런데 이게 쉽지가 않는 것이다. 가인의 후예인 우리는 이런 비교의식과 질투 의식이 시기 이런 것들이 우리 생애 기본 옵션으로 탑재되어 있다.
 
우리의 마음에 세상으로 찌들어져 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비교하지 아니하고 남들이 잘 될 때, 박수를 쳐주고, 남들이 잘 될 때, 시기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는 그런 축복을 주시길 원한다. 우리 한국사회는 참 답답한 게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고, 팔촌이 땅을 사면 축하하고, 남이 땅을 사면 꽃다발 들고 간다. 가까울수록 더 비교를 더 많이 한다. 특별히 한민족은 이십 분만 서로 알면 서로 알고 따진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우리 한국 사람은 연계가 되어있다. 비교의식은
 
*요한복음 21:22b,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베드로가 회개하고 이제 주님께서 조반을 먹으라고 하시면서 베드로에게 사랑하냐고 묻고 주님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그런 후에 주님께서 사명을 맡겼다. 네 양을 먹이라고 하신다. 거의 성자가 된 것이다. 그 후에 나가서 보니까 요한이 있는 것이다. 요한은 어떻하냐며 비교한다. 거의 성자 수준인데도 비교의식이 남아 있다. 주님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고 하신다. 누가 저렇다 신경 쓰지 말고 너만 잘 하면 된다 하신다. 이 비교의식을 좀 정리를 하라는 것이다. 여러분 이 공로의식, 비교의식, 열등의식이 다 연계가 되어 있는데 이것을 정리해야 주님 앞에서 믿음을 용량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이 오늘 생명의 복음의 본질이 들어가 있고 조금 더 센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있는 것이다. 가인을 살인자로 만들었다. 동생이 제사를 잘 드리니까 동생을 쳐 죽인 것도 비교이다. 이게 오늘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육신의 본성이 비교의식이다. 초대교회 고린도 교회는 골치 아픈 교회였다. 여기는 비교의식 때문에 나타난 바울파와 아블로파가 있었다. 그다음에는 게바의 파가 있었다. 또한 예수님파가 있었다. 서로 갈등을 일으킨다. 그러니까 바울이 그것을 고민하면서 말하고 있다.
 
*고전12:27,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그러니까 비교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지체의식이다. 우리는 살다보니까 별일이 다 있다. 동자가 들어 있는 말이 위험하다고 했다. 동서, 시집 안 가본 사람은 모른다. 돈이 없으면 가난이 원수이지만 돈이 많으면 혈육이 원수라고 한다. 돈이 많으면 자식들이 원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약점들이 있는 것을 다 아시고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떻게 극복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지체의식을 가지라고 하신다. 질투와 비교는 가인처럼 평정심을 잃게 한다. 여러분 주위에 성공한 사람들 가운데 너무 기쁘고 감사하고 하나님께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이 쉽지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저놈아 학교 다닐 때 나보다 공부도 못했는데 나보다 더 잘 되냐고 할때가 있다. 그럴 때 마음의 평정이 무너진다. 이게 나중에 온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면서 공정하지 않다고 하는 것과 똑 같다. 어떻게 12절에 이 땡볕 속에서 일한 나와 같냐고 불평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 새 정부가 들어 설 것이다. 보나마나 데모 잘하는 단체가 나와서 광화문에 나와서 막 무슨 짓을 할 수 있다. 비교의식은 지체의식으로 극복하는데,,, 데모를 한다면 우리 교회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피켓 들고 지체의식을 홍보하고 싶다. 이제는 새로운 나라가 되어야 한다. 이런 복음의 깊은 신비를 깨달은 하나님의 신비를 깨달아서 우리 성도들이 한 차원 올라가야 할 줄 믿는다. 지체의식으로 목자의 심정을 가져서 생각이 달라져야 한다. 누가복음 15장 같은 경우는 맏아들이 비교의식을 버리고 오늘 은혜로 새로 개편된다면 맏아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내 동생이 아버지 유산을 가지고 갔지만 그렇게 탕진을 했지만 고난당하고 돌아온 것이 안 되었다고 이해를 하고 애썼다고 하면, 그런 마음이 복음의 신비로 깨달아 지는 것이다. 오늘 아침 일찍 온 사람들이 비교의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식, 공로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주의로 무장이 되면 제 11시에 온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겠는가라는 것이며 오후 5시에 온 사람들이 우리보다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나를 생각하게 된다.
 
*마태복음 20:6-7,
6 제 십일 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7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사실 이것은 비명을 지르는 것이다. 비탄의 외침이다. 아무도 나를 써주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오후 5시까지 그러니 얼마나 힘들고 슬펐겠는가? 그러니까 그걸 일찍 온 사람이 이해가 될 것이다. 나는 그래도 일찍 부름 받아가지고 하루 종일 한 데나리온 십만 원쯤 받으면 이것으로 먹을 것을 사가서 가족을 좀 챙길 것이다. 뭔가 삶이 집중되는데 오후에 늦게 부름 받은 경우는 하루 종일 써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너무 마음이 답답한 것이다. 이해를 한다. 감사한 일이라고 서로 박수를 쳐주어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은 복음의 중요한 핵심 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헌신하고 희생하고 수고하고 최선을 다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것을 깨달으면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이것을 못 깨달으면 처음 된 자가 나중 되는 것이다.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우리는 비교의식, 우울의식, 공로의식 또 잘못된 열등의식을 총정리하고 오늘 복음의 신비를 깨달아 목자의 심정을 갖고 마태복음 20장과 누가복음 15장이나 같은 맥락이라고 기억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심정을 깨달아 하나님의 은혜의식으로 거할 때 하나님은 참으로 기뻐하시고 축복하시리라 믿는다. 어릴 때부터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축복이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너무나 신비한 것이다. 그리고 이 가운데 육십이 넘기며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우리가 영적인 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이 들어도 영적으로 어린아이다. 어린아이 순수함으로 나이가 들어도 그렇게 하면 매일이 주님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로 영적으로 찬양한다.
 
※어린 시절에 경건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아침 이슬이 풀잎에 맺혀 반짝이는 아름다움을 가진 축복받는 자들이다. 이들은 새벽의 빛같이 홍조 띤 순전한 수줍음을 가진 자들이다. 정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매력을 지니고 있고, 그 신선함과 광채가 말로 다 할 수 없이 사랑스럽다.
-찰스 스펄전-
 -이렇게 되면 평생 남에게 에너지를 줄 수 있다. 그 사람을 만나면 기쁠 수가 있다. 어릴 적부터 주님을 만나서 돌아온 탕자에서 맏아들이 되지 아니하고 오늘 본문처럼 불평하는 자 되지 아니하고 우리 모두가 다 헌신과 희생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 기억하면 어거스틴의 후예가 되어 축복이 될 것이다. 조자룡을 좋아하는 이유는 남을 성공시키는 자이기 때문이다. 남을 섬기고 남을 위해 박수를 쳐야 한다. 이런 마음으로 박수쳐 주는 자가 되라. 모두가 영적으로 성공하고 남이 잘 될 때 박수를 쳐 주어야 한다. 박수쳐 주는 인생이 되라.
 
♣요약
공로의식이 아닌 은헤 의식으로 남을 성공시키고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로 사탄을 무력화 시켜서 시기심과 질투심과 비교의식을 버리고 은혜로 박수를 쳐주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언제나 지체의식으로서 서로 사랑하고 하나 되는 통합의 미래를 가져오는 믿음의 산 증거가 되어서 주님의 기쁜 자녀로 살기를 소원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의 대상으로 삼으셨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을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에게 구원을 선포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택하심과 무조건적인 은혜에 달려 있음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한다. 영생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된 자나 나중 된 자나 동일하게 영생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한 것이기에,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인간이 구원을 얻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에 겸손해야 하며, 이 같은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주어짐을 증거해야 한다. 비교의식이 아닌 은혜의식으로 살아야 한다.
 






















※작성자-이향애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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