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한 삶에 갇힌 자의 고독
글만 써서 먹고 사는 전업작가 생활 25년에 딱 한 번 직장생활을 한 적이 있다. 길지도 않은 6개월에 불과한 그 직장생활 덕분에 나는 어쩌면 거의 모험에 가까운 ‘위험하고 고독한’ 전업작가의 길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가가 되고 3년쯤 지난, 결혼을 앞둔 때였다.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느지막이 일어나 브런치를 만들고 있었는데 불현듯 ‘가장’이라는 단어가 뒤통수를 가격했다. 느닷없는 습격에 나는 계란 프라이가 바짝 타들어가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자취집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동안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체증과도 같은 무거운 압박감에 1주일을 내리 시달렸다. 취직은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았다.
첫 직장이자 ‘내 생애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직장생활’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두어 달쯤 지났을 때 결혼을 했고, 미어터지는 출근버스를 피하기 위해 일찍 집을 나서는 데도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이 더 지났을 때, 뭔지 모르게 이상했다. 가장이라는 압박감과는 또 다른 종류의 체증이 가슴 한켠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청탁받은 원고의 마감 기한은 맹렬한 속도로 다가왔고, 속절없이 지나갔다. 몇 번 기한을 연장했지만 끝내 원고를 넘기지 못한 채 펑크를 내는 일이 되풀이되었고, 나는 6개월 동안 단 한 줄의 ‘내 글’도 쓰지 못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제 사직서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서른두 살 때의 일이다.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다시 전업작가로 돌아온 봄날 오후, 서가로 무심히 뻗친 내 손에 얇은 책 한 권이 잡혔다. 한 해 전, 출판사 편집장으로 있던 친구가 신간을 냈다며 보내주었던 이오네스코의 소설 《외로운 남자》였다. 그냥 쓱 훑어보고 책꽂이에 꽂아놓았던 그 책이 그날 내 손길에 뽑혀져 나온 것이다. “나이 서른다섯이면 인생 경주에서 물러나야 한다. 인생이 경주라면 말이다. 직장 일이라면 나는 신물이 났다. 예기치 못했던 유산을 물려받지 않았더라면 난 권태와 우울증으로 죽고야 말았으리라”로 시작하는 ‘외로운 남자’는 단번에 나를 사로잡았다. 서가에 붙어 선 채로 나는 소설 속으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대머리 여가수> 등으로 부조리극을 대표하는 세계적 극작가 이오네스코에게 ‘외로운 남자’는 그의 유일한 소설이다. 연극 데뷔작인 《대머리 여가수》가 초연된 후 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의 일이다. 스스로 밝혔듯 ‘외로운 남자’는 희곡인 《진흙》과 《난장판!》과 함께 자전적 3부작을 이루는 작품이다. 자전적 작품이라는 사실은 ‘왜 갑자기 소설?’이라는 의문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대화로만 이뤄지는 희곡과는 달리 소설은 지문을 통해 자신과 자신이 처한 현실, 시간과 공간, 온갖 인물들에 대한 생각, 역사와 사회에 대해 자유롭게 설명하고 묘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외로운 남자’ 속에 편재하는 도저한 허무, 폭발할 것 같은 분노, 정치하면서도 날아갈 듯 가벼운 인식들은 오직 배우의 대사에다 작가의 생각을 모두 담아내야 하는 희곡으로선 버거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외로운 남자’는 만일을 대비해 침대 옆 탁자 위에 자명종을 놓았으나 항상, 거의 항상 자명종이 울리기 조금 전에 깨어서는 ‘매일 똑같은, 고통스러운 강제노동’에 시달리던 파리의 15년차 한 직장인이 미국에 사는 낯모르는 친척이 남긴 예기치 못한 유산 덕분에 아침에 호텔 방을 나올 때면 휘파람을 불며 계단을 경쾌하게 내려와 열시고 열한시고 그저 내키면 길로 나서는, ‘즐겁고 행복한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다. 그는 허접한 싸구려 호텔에서 벗어나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가정부를 두며, 더 이상 지각하지 않아서 출근부에 서명할 수 있었을 때의 환희와 출근부를 걷어가고 삼십 초 후에 도착했을 때의 격분에 휩싸이지 않아도 되었지만, 동시에 과거란 항상 아름답고 다정하며 그리운 법인데 이를 너무 뒤늦게 깨닫기도 하고, 정확히 정해진 목표가 있는 양 앞을 향해 똑바로 달려나가는 ‘서로 닮은 수만 명의 사람들’로 가득 찬 거리를 바라보다가 ‘마치 개들로 가득 찬 거리 같다’고 생각하며 ‘어디로 가는지 아는 듯한 꼴로 그렇게 달리는 것은 개들뿐’이라는 회한에 휩싸인다. 결국 조직의 한 부품에서 자의식을 가진 독립적 존재로 바뀌었지만 암울과 허무의 대상이 조직에서 세계, 혹은 우주로 환치되었을 뿐 여전히 삶의 부조리, 혹은 부조리한 삶의 늪에 빠져 있음을 ‘고독’하게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직장에 막 사표를 던진 30대 초반에 처음 읽었던 ‘외로운 남자’를 50줄에 들어서 다시 읽으며 문자 그대로 만감이 교차했다. 읽는 내내 미열이 오른 듯 이마가 뜨거웠다. ‘외로운 남자’의 주인공이, 혹은 이오네스코가 절감한 해명되지 않는, 해명될 수 없는 삶의 부조리는 오랜 기간 직장에 매이지 않은 채 자유인으로 살아온 나 역시 비껴갈 수 없는 운명이라는 사실은 결국 인간은 외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절감시킨다. 조직의 일원에서 벗어나 독존(獨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하기는 싫다. 그냥 그렇고 그럴 따름이다. 우주의 대감옥 내부에 그것보다는 작고 내게 맞춤한 감옥을 만들었다. 내가 살 만한 한 귀퉁이를 마련한 것”이라는 주인공의 독백이 허탈하게 읊조리는 허무의 송가가 아니라 놀라운 지혜의 시로 읽히는 이유를 오십이 되어서야 알게 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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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근원을 찾아가는 한 인간의 여정
♣‘외로운 남자’줄거리
베케트, 아다모프, 주네와 더불어 현대 부조리극의 대표 작가로 꼽히는 이오네스코의 유일한 소설이자 자전적 작품. 이오네스코는 1950년 첫 희곡 《대머리 여가수》를 발표해 프랑스 문학계와 연극계에 큰 충격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의자》《코뿔소》 등 20여편의 희곡을 발표하며 원숙기에 이르렀고, 이어 《노트와 반노트》《과거의 현재, 현재의 과거》《발견》과 같은 산문을 통해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통찰하기 시작한다.
《외로운 남자》 역시 이런 통찰의 연장선상에 위치하는 작품으로 이오네스코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인간 사이의 소통의 어려움, 인간의 존재 조건인 고독과 죽음의 문제,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을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오네스코는 20세기 후반 50년간 파리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작품을 올리며, 프랑스어로 쓰인 희곡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공연된 보편적 작가로 현재까지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예기치 않았던 유산을 상속받은 주인공은 일상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과 주변 여건, 더 나아가 인간이 처한 근원적 조건을 둘러볼 여유를 갖게 된다. 주인공은 이 우주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근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봉착하지만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 좌절하면서 일상의 삶에 매몰돼간다. 존재의 근원을 찾아가는 한 인간의 여정을 그린 소설로 파스칼의 《팡세》, 사르트르의 《구토》의 계보를 잇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원제: Le Solitair
저자: Eugene Ionesco
발표: 1973년
분야: 프랑스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외로운 남자
옮긴이:이재룡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47(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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