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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멸렬의 미학

원고 청탁과 함께 도서목록을 받은 나는 단번에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를 선택했다. 순 제목 때문이다. 파계(破戒). 경계를 무너뜨리다, 금기를 거부하다, 뭐 그런 뜻인데, 이런 거 일단 매력적이다. 케케묵은 질서를 깨뜨리는 통쾌함 같은 게 기대된다. 갈등과 파란이 생겨나겠지만 그것을 거쳐야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지 않던가.

아무튼 정보가 없는 데다 일본소설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미모의 공주님을 꿰차고 야반도주하는 심복무사나 무리한 압박을 가하는 아버지를 업어치기하는 아들 이야기인줄 알았다. 아니면 (작가 약력에 잠깐 나오는) 조카와의 불륜을 떳떳한 사랑으로 선언한다거나.

그런데 읽어 보니 신분 문제를 다뤘다. 백정 집안 출신의 한 남자가 사범학교를 마치고 교사가 되었는데 천한 계급 출신이라는 것을 들킬까봐 전전긍긍한다는 내용이다. 상당 부분 지리멸렬하다. 그럴 수밖에. 석회처럼 굳어진 봉건시대의 위계를 단번에 뛰어넘는 사람은 없으니까. 정신의 DNA에 박혀 있는 유전인자 같은 것이니까. 그래서 끙끙 앓는 심정이 매번 위태롭고 절절하다. 지리멸렬도 이 정도면 호소력 있다. 풍경과 심리묘사의 연결도 뛰어나다. 그만큼 주인공 우시마쓰의 불안이 깊다는 소리이면서 전근대의 유물이 얼마나 끈질긴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 시절 신분은 대략 네 가지였다. 가장 위는 왕족. 그들은 세상이 자기들 거여서 자기들끼리 싸웠다. 그 아래가 귀족계급인데 한두 명한테만 잘 보이면 떵떵거리고 살 수 있지만 간혹 줄을 잘못 서서 망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대다수인 평민계급. 농사도 지어야 하고 세금도 내야 하고 군대도 가야 하는 이들은 천민을 공격적으로 천시하면서 삶의 고단함을 풀었다. 지금도 누군가를 괴롭히는 아이들은 십중팔구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이다. 지배계급에게 찍소리 못 하는 자신의 신세를 이런 것으로 위안을 삼았으니 맨 아래 천민계급은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멸시의 도착점이었다.

그러니 이런 말이 생겼을 것이다. 129쪽에 나오는 문구이다. ‘손님들에게는 차를 대접하지 않는 것이 백정 집안의 예의였다. 담뱃불을 나누는 것조차 꺼렸다.’ 보통 백정하면 소나 돼지를 도축하는 사람으로 아는데 그 업을 포함하여 유기제조업(柳器製造業), 육류판매업 등으로 생활하던 천민층을 싸잡아 일컬었던 말이다. 유(柳)는 버드나무다. 예전에는 버드나무 가지로 생활도구를 만들었다. 물건을 구하려면 그들의 처소를 방문하게 되는데 차를 내온들 마시겠는가. 뭔가를 같이 먹는다는 것은 서로 교류를 한다는 뜻인데 말이다.

소설은 주인공의 하숙집에 잠시 머물던 오히나타라는 사람이 쫓겨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오히나타는 돈이 많은 사람인데 백정 출신이라는 게 알려져버린 것이다. 그 장면을 보고 주인공은 곧바로 하숙을 옮겨버린다.

‘어떤 경우를 당하더라도,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결코 백정이라고 고백하지 마라. 한때의 분노나 비애로 이 훈계를 잊으면 그때는 사회에서 버려지는 거라 생각해라.’ 16쪽에는 이렇게 아버지의 사무친 가르침이 나온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동족집단에서 멀리 빠져나와 나름의 신분 세척을 거치기까지 했다.

여담 하나. 나는 태어나 보니 남자였다. 아무런 선택권 없이 남자가 된 것이다. 내 밑의 동생은 여자다. 그 애도 자신이 여자를 선택한 기억이 없단다. 어른 여자가 담배를 피우면 흥분해서 야단치는 남자들이 아직도 있다. 그들도 나처럼, 무슨 시험에 합격하거나 어렵고 힘든 코스를 수료해서 남자 자격증을 받은 기억이 없을 것이다. 똑같은 사람인데 왜 담배 가지고 그러냐고 따지면 궁색하게 답변한다. 그야 건강에 안 좋아서. 참, 언제부터 그렇게 남의 집 딸 건강을 걱정하고 살았는지는 모를 일이나, 대부분 이런 부류들, 담배 꼬나물고 침 찍찍 뱉고 있는 고3 남학생들에게는 아무 말 못 한다.

이 소설에도 주인공이 천민 출신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교활하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부류들이 등장한다. 우시마쓰는 천민 출신의 철학자이며 행동가인 이노코 렌타로를 존경하지만 스승처럼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말 그대로 지리멸렬하다가 결국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실토하기에 이른다. 학교에 사직서도 낸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대하소설 《임꺽정》이 내내 떠올랐다. 답답해서 그랬을 것이다. 읽어본 사람은 아시겠지만 임꺽정은 백정 출신이다. 계급사회에 대한 분기와 불만이 하늘을 찌른다. 그의 스승인 양주팔, 별명하여 갖바치도 백정 출신이다.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은 등장인물들이 계급사회의 불합리에 대해 전투적으로 달려드는 활극이다. 그에 비해 ‘파계’는 계급에 짓눌린 개인의 고뇌를 깊이 있게 다뤘다. ‘임꺽정’의 백정이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칼끝을 겨눴다면 ‘파계’의 백정은 칼끝을 자신에게 겨눈 셈이다. 그래서 더 아프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럼으로써 자신을 옥죄고 있던 사슬에서 마침내 벗어난 우시마쓰에게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는 행운이 찾아온다. 짝사랑하던 오시호와 장밋빛 미래의 뉘앙스도 깔린다. 이런 결말 부분이 좀 촌스럽기는 하지만 1906년에 발표되었던 소설이라서 이해하고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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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 출신임을 밝히기로  결심하는데…

《파계》는 시마자키 도손의 첫 장편소설이자 대표작이다. 도손은 1897년 시집 《약채집》을 발표하며 작가 활동을 시작했고, 연이어 세 권의 시집을 출간하며 메이지 시대 낭만주의 문학의 선두자로 평가받았다. 이후 시 창작 활동을 접고 나가노현에서 6년간 교사로 근무한 그는 1906년 공백기를 깨고 《파계》를 발표하며 낭만주의 시인에서 자연주의 소설가로 변신에 성공한다. 《파계》는 일생의 계율을 깨뜨리려는 청년 교사의 고뇌를 그린 소설로 천민 차별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며 출간 당시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나쓰메 소세키로부터 “후세에 남겨야 할 명작”이라는 극찬을 받았으며, 현실을 직시하는 적나라한 묘사와 건조하고 기교 없는 문체로 일본 자연주의 문학의 막을 연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도손은 이외에도 《봄》《집》 등을 통해 소설가로서의 입지를 굳혔고, 말년에는 일본 근대문학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역사소설 《동트기 전》을 발표했다.

백정 출신의 교사 우시마쓰는 천한 신분 때문에 사회에 나가지 못하고 산속 부락에 숨어 사는 아버지가 ‘절대 신분을 밝히지 마라’고 한 말을 줄곧 가슴에 품고 살아왔다. 그러나 같은 백정 출신의 사상가 이노코 렌타로가 당당히 신분을 밝히고 차별에 맞서는 모습을 보며 동경을 품게 된다. 그러던 중 갑작스럽게 아버지의 죽음을 겪으며 여태껏 계율처럼 여겨온 말을 어기고 싶은 파계의 욕구와 두려움 사이를 오가며 번뇌한다. 결국 우시마쓰는 모든 것을 밝히기로 결심하는데….

원제: 破戒

저자: 시마자키 도손(1872~1943)

발표: 1906

분야: 일본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파계

옮긴이: 노영희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25(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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