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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주후 2022년 3월 9일) 제목: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 말씀: 마가복음 10:35~45 설교자: 박요한 부목사님 ----------------------------------------- *마가복음 10:35~45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주의 말씀 가운데 담임 목사님께서 대선 날 투표할 때 기도하면서 투표하라고 하셨는데 기도하면서 투표를 했는가? 저도 기도하면서 투표했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통해서 지도자의 복을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우리는 지도자의 갈증 큰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나라만 그렇지 않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다른 나라들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일본을 봐도 중국을 봐도 그렇다. 러시아를 보면 우리보다 더 심각하다. 베스트셀러인 “권력의 심리학”이라는 책을 쓴 브라이언 하마스는 우리가 지도자의 기대를 가지고 있는 바를 산산히 깨뜨려 버립니다. 그른 이렇게 말한다. “권력자가 된다는 것은 더 이기적이고 동정심이 없고 위선적이고 힘을 남용하기 쉬워진다는 것이다.” 너무 씁쓸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스린 자가 아니라 도리어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라고 말씀하신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섬김의 리더쉽을 열망하는 이 시대 가운데 진정한 권세가 무엇인지 하나님 나라를 다스린 권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고 소유하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도상 가운데 일어난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곧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실 것을 상세히 설명하시면서 자신의 3번째 수난 예고를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마가복음 10:34, 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의미에 대해서 제자들이 이해하는 바는 예수님의 생각과 사뭇 달랐던 것 같다. 예수님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은 정면충돌하고 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킨 엄청난 시대적인 방향을 피부로 느끼고 눈으로 목격했다. 예수님의 손끝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기적과 수많은 표적들을 제자들은 눈으로 목격했다. 그리고 온 유대 사회가 그리고 로마인들이 예수님을 주목했다. 예수님의 기적이 많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유대 지도자들의 예수님의 대한 그 증오는 더 커져만 갔다. 그리고 예수님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유대 지도자들의 계략으로 인해 예수님께서 여러 번 죽음의 위기를 넘기셔야만 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예수님께서 자신이 끔찍하게 죽게 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더 강경하게 거부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이 지점에서 시작되고 있다. 34절에서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주님을 통해서 말씀 드린 이후에 제자들은 곧바로 누가 크냐?, 누가 다스리냐?에, 그 문제에 지금 자신의 모든 것들을 몰입하고 있다. *마가복음 10:35-37,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34절 말씀과 35절 말씀을 이어서 읽어보면 맥락이 이상하고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끔찍하게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얼마나 충격적인 말씀인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제자들은 누가 크냐에 대해서 몰입하고 있다. 누가 크냐에 대해서 더욱더 극대화 되고 치열해지고 있다. 그리고 뜬금없이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그 양옆에 앉혀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제자들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데 대해서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한 가지 단서를 제공한다. 마가복음 9장에 나온다. *마가복음 9:32, 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제자들은 그들의 내면의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고, 심지어 예수님께 묻기조차 못했다. 그렇다면 왜 제자들은 그들의 내면의 그 두려움의 문제 때문에 누가 크냐라는 이 문제에 대해서 몰입해져 갔을까? 왜 이 문제가 더 커져만 갔는가? 제가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 성도님들에게 질문을 하나 드리겠다. 긴장하지 말고, 여기서 여러분이 진정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가? 지금 내가 내 기대와 혹은 그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을까봐 두려움이 커진다는 것, 기대와 바람이 실패하게 될까봐 두려운 것은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씀하자면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내가 사랑하는 것이다. 잘 이해가 안 되는가?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이다. 자신의 친구들에서부터 자신이 뒤처지는 것을 매 두려워한다. 아마도 장년 세대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그래서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 그리고 좋은 성적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것도 너무 중요하다. 그리고 좋은 스펙을 갖추는 것도 너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을 통해서 더 좋은 직장에 취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좋은 스펙을 통해서 다른 사람과 더욱 더 그 경쟁체계 속에서 더 우위에 설 수 있다는 것이다. 바꾸어서 말하면 이 시대 젊은이들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 다른 사람들과 경쟁에서 우위에 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진정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제자들의 내면의 이 문제 때문에 그들이 진정 사랑했던 것,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기대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의 고난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극히 세속적인 영광만을 저울질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제자라는 이름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과 함께 있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지만 실상은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던 것이다. 결국 제자들이 자신의 생업을 내어버리고 예수님을 쫓았던 그 삶은 헌신이 아닌 현실적인 투자였을 뿐이다. 여러분, 과정 속에 드러난 이유는 헌신이나 투자나 똑 같아 보인다. 우리는 똑같이 대가를 지불하고 똑같이 노력하고 똑같이 섬긴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투자는 성과가 중요하다. 오직 성과만 중요하다. 이익과 손해에 매우 민감하다는 것이다. 성과에 따라서 내가 얼마나 많이 소유하는 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이런 마음 때문에 예수님을 쫓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그 이익을 위해서 그 상당한 대가를 지불했을 뿐이다. 그러나 헌신은 이런 것들이 아니다. 헌신은 내가 치른 대가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는다. 특히 야고보와 요한은 이 성광에 대해서 다른 제자들보다 더 예민했던 것 같다. *마가복음 10:35,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두 형제는 예수님께 노골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당시 갈릴리 지방에 세배대 가문은 당시 어부로 재력을 갖춘 가문이었다. 학자들은 요한이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공관에 고기를 납품했기 때문에 대 제사장 가문과 앞면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 유력한 가문이 예수님의 제자로 따랐던 것이다. 특히 세배대 가문은 예수님께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특히 더 가까이 두시고 그들을 데리고 다녔다. 그렇기 때문에 야고보와 요한은 내가 이러한 요구를 주님께 드려도 주님께서 받아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자신들은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충분이 앉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결국 제자들은 헌신이 아니라 말 그대로 영끌 투자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영혼까지 끌어 모아서 투자를 한다고들 한다. 오늘날만이 영혼까지 끌어 모아서 투자를 한 것이 아닌 것 같다. 당시 제자들은 주님께 영끌 투자를 했다. 이들의 영끌 투자의 목적이 마침내 드러난다. *마가복음 10:37,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야고보 요한은 주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실 때, 자신들이 주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아서 이 땅을, 이 세상을 다스리게 해달라고 지금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요구를 들은 제자들은 분노했다. *마가복음 10:41,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다른 제자들이 왜 야고보 요한에 대해서 왜 화를 냈는가? 다른 제자들이 지금 야고보 요한보다 권력 경쟁에서 한 발 늦었기 때문이다. 야고보 요한이 한 발 앞섰기 때문에 지금 분노하고 있다는 것이다. ※ 인간존재의 본질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존재의 본질은 권력에 대한 의지이다.”-니체- -인간은 권력에 대한 의지를 모두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욕망, 충동, 생존, 소유의 욕구를 가지고 있기에 심지어 어린 아이조차도 이 권력에 대한 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 때문에 인간이 가졌던 그 온전한 다스림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 죄에 대한 결과로 인간은 온전한 다스림을 갖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누르고 다스리려는 권력에 대한 의지를 가지게 되었다. 여러분 대통령이나 정치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권력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왜곡된 다스림으로 타인을 누르고 다스리려고 하는 죄 된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우리는 모든 인간과의 관계에서 갈등에 부딪친다. 실제로 우리의 부부관계에서, 우리 자녀와의 관계에서 늘 다툼과 갈등이 일어남을 목격한다. 여러분 부부 싸움의 본질은 무엇인지 아는가? 왜곡된 다스림의 충돌이다. 남녀가 다 하나님께서 다스림으로 창조하셨다. 그런데 우리의 죄악 된 본성으로서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다스리고 지배하려고 한다. 권력 다툼을 벌이는 것이다. 이러한 권력에 대한 의지는 가정에서 뿐만이 아니다. 우리 직장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오늘날 젊은이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세대가 그리고 사회 전체가 이 권력 다툼과 분쟁으로 인해서 몸살을 안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본질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지도력과 하나님 나라의 지도력에 대조하면서 설명하고 계신다. *마가복음 10:42-44,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2절 말씀은 세속적 특징들을 드러내고 있다. 주관한다. 권세를 부린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경험한 바이다. 비단 세상의 통치자뿐만이 아니다. 권력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모든 인간은 자신의 재력과 명예와 또한 권세를 통하여서 타인보다 또한 타인위에 군림하기 위해서 무단히 애를 쓴다. 이것이 바로 세상권력의 방식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위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스려지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흔히 우리는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너희는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시며 너희는 섬기는 자가 되라는 명령으로 오해한다. 여러분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너희는 이 세상 가운데 섬기는 자가 되라는 것이 명령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본문에서 현재 시제를 설명하고 계신다. 현재 시제를 설명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 43절과 44절의 말씀을 가지고 세상권력의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지금 다스려지고 있다고 설명하고 계신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의 이러한 방식으로 다스려지고 있음을 있는 그대로의 그 진리를 그 진실을 묘사하고 계신다. 우리가 다큐멘터리를 보면 여러 나라를 방문하고, 여러 나라를 취재하는 다큐멘터리를 보시면 그 나라 일상과 그 나라의 삶의 모습들을 영상을 통해서, 나레이터를 통해서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다큐를 보면 그렇듯이 마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다큐멘터리로 선명하게 보여 주시듯 지금 묘사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큰 자가 섬기는 자요, 으뜸이 되는 자가 모든 사람의 종으로서 다스려지는 나라, 바로 현재 시제에서 지금도 그 나라는 이러한 방식으로 다스려지고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곡된 세상의 권세에서 다스림 받는 이 땅에서 우리 가정과 우리 일터와 우리 삶의 모든 영역 가운데서 어떻게 해야만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소유하고 또한 소유함으로써 살아갈 수 있을까? 여러분 저를 따라 해보라.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는 섬기는 자에게 주어진다.” 아멘, 이것을 잊지 말라. 하나님 나라의 다스리는 권세는 섬기는 자에게 주어진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권력, 권위, 단어를 가지고 단어에 대한 차이점의 구분이 필요하다. ▷권력이란, 원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도 자신의 지위 또는 세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도록 강제 또는 지배하는 능력을 뜻한다. 반대로 ▷권위란 자신의 영향력을 통해 다른 사람들 지빌 적으로 자신의 의도대로 자발적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하도록 하는 기술을 뜻한다. -무슨 말인가? 쉽게 말하면 권력은 타인을 강제로 지배하는 능력이다. 누군가 여러분을 강제적으로 지배하려고 한다면 너무 좋다고 하겠는가? 인간은 이러한 억압을 너무나도 싫어한다. 그 역사 속에서 이러한 억압이 자유로 바꾸어지는 그러한 과정들이 근대의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권위는 이것과 다르다. 권위는 타인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기술이다. 강제나 지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발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다. 발휘하게 하는 기술이 바로 권위이다. 그리고 권력과 권위의 또 다른 차이점은 권력은 사고팔거나 주고받을 수 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가족들, 자녀들, 혈연으로 이 권력이 공유된다. 그리고 그러한 지위들을 누린다. 그러한 것들을 여러분은 잘 알지 않는가? 하지만 권위는 사고팔거나 주고받을 수 없다. 왜냐면 권위는 특별한 한 개인의 성품, 그리고 그 개인의 인격에 의해서 발현되는 영향력에 의해서 발휘되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존경할 만한 그분의 성품, 그분의 인격, 흠모하는 그 인격, 그를 통해서 우리 스스로가 그의 뜻을 따르고 싶어 한다. 그것이 바로 권위이고 영향력이다. 그런데 한 개인이 권위를 갖기 위한 전제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섬김이다. 섬김을 통해서 권위를 소유할 수 있다. 권위 있는 자는 섬기는 자이다. 이것을 조금 더 쉽게 설명하겠다. 우리는 종종 가정에서 권력이 굉장히 무차별적으로 휘둘려지는 것을 경험한다. 가정에서 어린 자녀들이 방을 어지르면 엄마가 소리친다. 협박까지도 한다. 아이가 엄마가 무서워서 방을 청소한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방식이 지속되는가? 이 어린 아들이 성인이 되면 부모의 뜻에 반항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방식이 우리 일터와 사회, 기업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한다. 한 기업에서 한 리더가 최고 경영자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고 있다면 그런데도 불구하고 회사가 잘 운영되고 있다면 착각하면 안 된다. 사실은 그 직원들 마음 가운데 반항심을 숨기고 있을 뿐이다. 숨긴 채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쩔 수없이...그렇다. 하지만 한 기업의 리더가 솔선수범(率先垂範)해서 리더가 직원들보다 더 낮은 위치에서 낮은 자세로 섬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직원들은 이러한 리더를 위해서 기꺼이 일을 하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직원들은 이 리더를 위해서 마음을 다하고 헌신할 때에 비로소 창의성과 아이디어가 풍성히 발휘될 것이다. 오늘날 많은 대기업들이 직원들의 창의성을 발휘하기 위해서 좋은 시스템과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서 많은 애를 쓴다. 그런데 기업의 창의성은 단순히 좋은 시스템과 환경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리더의 권위를 통해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리더의 권위는 바로 섬김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이 권력과 권위의 차이점이다. 예수님께서 이 가치를 제자들에게 저와 우리에게 공유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가 그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래서 그분을 길을 따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이 역설의 법칙을 바라보아야 한다. 온 우주의 창조자이시고 온 우주의 으뜸이 되시는 우리 예수님께서 주께서 이 말씀을 몸소 행하셨다. *마가복음 10:45,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러분 이 대속 물로 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의역하면 해방하는 값이다. 이 단어는 그리스 로마시대에 실재로 자주 사용되는 개념이었다. 누군가 대신 값을 지불해서 노예를 해방하거나 전쟁포로에서 자유를 주는 개념이 바로 이 대속물이다. 이 대속 물을 해방하는 값을 말한다. 제가 이 단어로 이 본문을 45절 말씀을 번역해 보았다. -“내가 이 땅에 온 목적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려고 왔고 많은 사람의 해방하는 값을 대신 지불하기 위해서 나의 생명마저도 내어 주기 위하여 왔다.” 아멘, 여러분, 그분의 희생이 하나님 자신의 희생이셨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바로 나의 형벌과 나의 저주를 대신 받아 주시고 나를 영원히 해방시켜 주시는 대속의 제물이 되어 주셨다는 것이다. 여러분 놀이터에 가면 시소가 있다. 시소는 놀이기구이다. 양 끝 쪽에 앉아서 한 쪽이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는 기구이다. 시소는 나보다 더 큰 존재이다. 나보다 더 무게감의 존재가 이 양 끝단에 앉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기울어진다. 더 낮아진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낮아진다. 기울어지는 쪽이 더 큰 존재라는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시소처럼 다스려지는 나라이다. 더 기울어지고 낮아지는 쪽이 진정 큰 자라는 것이다. 온 우주의 창조자, 온 우주보다 더 큰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거운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주셨고 영원한 해방의 값을 지불하시기 위해서 친히 낮아지셨다. 그러므로 온 우주보다 크신 분,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서 스스로 낮아지시고 우리를 위해서 친히 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서도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가장 큰 분이시다. 바로 주님운 이러한 방식을 따르기를 바라신다. 그럼 우리가 섬기는 자, 그리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본래 소유했던 그 온전한 다스림을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 속에서 회복시키기 위해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하는 값을 지불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섬김은 나의 가정과 일터와 그리고 살고 있는 삶의 영역 가운데, 세상 가운데 나의 배우자, 나의 자녀, 그리고 직장 동료들을 왜곡된 방식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이 죄의 권세를 깨끗이 끊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섬김은 왜곡된 죄의 권세로부터 온전한 다스림으로 완전히 해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는 종이 될 때, 우리 부부관계, 우리 자녀와의 관계, 그리고 우리 직장 동료들의 관계와 모든 인간관계의 문제들이 완전히 자유케 될 줄 믿는다. 내가 섬김의 종이 될 때 비로소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 내가 섬김의 종이 될 때, 나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 우리가 섬김의 종이 될 때, 우리 민족이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러한 방식으로 다스려지고 하나님의 나라는 이러한 방식으로 확장되고 있다. 여러분께서 오늘 말씀하신 이 하나님 나라의 권세가 우리의 삶 가운데 실재로 우리에게 이루어지길 소망한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이 땅에서 왜곡된 죄의 권세로부터 온전한 다스림의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불가능하다, 성령님께서 도와주셔야만 우리는 세상과 맞서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로마 황제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다스리는 거대한 세상의 권력에 맞서서 자신의 목숨을 친히 대속의 제물로 내어주시고 종의 길을 걸으시기 위해서 그분이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셔야만 했다. *마가복음 1:11, 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영혼부터 영혼까지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받는 자라고 하는 그 하나님의 음성을 통하여 세상을 향해 낮은 자리로 나아가는 능력을 얻으실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사랑하는 자, 라고 하는 그분의 정체성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그 종의 길을 끝까지 완주해 낼 수 있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의 간절한 바람은 이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의 영혼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영혼부터 영혼까지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존재,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 그 하나님의 아버지의 음성에 귀 기울일 때,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그 종의 길을 우리가 걸어가기를 끝까지 완주하기를 도우실 줄 믿는다. 예수님처럼 모든 사랑의 종이 되어 우리의 가정, 우리의 일터와 교회와 삶의 모든 영역 가운데 왜곡된 방식으로 다스리는 모든 죄의 권세를 깨끗이 끊어버리는 우리의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다스려지는 놀라운 권세가 우리 영 가족 모두에게 이루어지길 간절히 소망한다. ♧요약 오늘 이 시간 무릎 꿇고 이 나라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이 나라 가운데 지도자의 복을 주시며 지도자의 복 가운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가 되고 섬김이야말로 하나님의 권세를 주시니 주님을 위해, 국민을 위해 섬길 수 있는 민족의 지도자를 세우길 기도해야 한다. 이 말씀을 듣고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 가운데 우리가족, 모든 관계 속에서 왜곡된 다스림으로 내가 타인을 다스리려고 하는 죄악을 끊고 자유케 하는 주님의 대속물로 말미암아 그 은혜로 모든 권세들이 완전히 끊어지고 도리어 우리가 섬김의 종이 되며 도리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가정과 일터, 교회, 삶의 모든 영역이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지길 소망한다. 섬김을 통하여 본이 되신 예수님처럼 아파하고 연약한 자들과 이웃을 위한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실천하여야 한다. 복음에 응답을 위해서 믿음 가운데 예배 가운데 하나님만 높이며 열방 위해 쓰임 받고 시대의 모든 담을 뛰어 넘어야 한다. 또한 담임 목사님과 교회 모든 목사님들을 위해서 건강과 성령 충만을 위해서 늘 기도해야 한다. 영광의 날, 즉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고대하는 다윗과 같은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한 사람은 우편에, 다른 한 사람은 좌편에 앉혀 달라는 것이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그들의 모친이 예수님께 이 일을 간청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서도 오히려 세상이 주는 영광과 명예를 얻고자 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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