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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주후 2021년 12월 29일)
제목: ''황제도시 한 가운데서''
말씀: (마태복음 16:13~20)
설교자: 박인기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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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6:13~20),
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21년 마지막 수요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한다. 우리가 결혼할 때, 프로포즈를 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 프로포즈 때문에 평생 행복한 추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분들은 한 번의 실수로 평생 구박 받으며 살아가는 분들도 있을 듯하다. 몇 년 전 결혼 정보회사에서 설문조사를 했다고 한다. 결혼에 있어서 프로포즈, 고백에 대해서 중요한가? 수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아주 중요하다고 대답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소수의 의견이지만 상대편이 원하니까, 이것을 안 하면 구박 받을 것 같으니까, 아주 담대함이 있고 대부분의 사람은 고백을 통하여 상대편의 마음을 알 수 있고 그 사람이 나를 알 수 있고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고백을 통해 전달된 진실과 감동은 결혼생활 중 일어나는 큰 파도와 같은 고난들과 어려움들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고 또한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고백이 가지고 있는 힘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관계의 어려움들을 만나게 된다. 그 관계의 어려움들을 이리저리 묶여져 있고 똘똘, 흩어져 있던 엉켜져 있던 관계의 실타래를 풀 수 있는 것, 그 열쇠가 진실 된 마음의 고백이기도 하고 또한 서로 불편한 관계를 해결해 낼 수 있는 힘도 진실 된 고백이기도 하다. 고백은 그만큼 진실된 마음의 나눔이 그만큼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다. 오늘 본문도 진실 된 고백이 만들어내는 은혜의 향연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본문이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가이샤라는 빌립보 지방에 가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신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누구라고 하느냐?" 사람들이 나를 보고 어떤 사람이라고 평가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신다. 이 질문을 받은 제자들이 그동안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예수님께 이야기 한다. '"예수님,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요한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고 이야기 합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나 선자 자들 중에 한 명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한참 듣고 있던 예수님께서 다시 질문하신다.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질문하신다. 이 예수님은 두 번째 질문을 직역하며 그러나 너는 나를 누구라고 이야기 하신다. 예수님은 그 질문에 흡족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물으신다. 이런 두 번째 질문을 받은 제자들은 어떻게 대답해야 될까? 무엇이 정답일까? 주저주저 하고 어쩌면 그 사이에 침묵이 흐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갑자기 베드로가 침묵을 깨고 예수님께 대답한다. "예수님, 예수님은 그리스도 메시아이시며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말한다. 너무나 잘 아는 대답이다. 탁월한 대답이기도 하다. 베드로의 대하여 예수님은 지금가지 어떤 칭찬보다 저 탁원한 칭찬을 하시고 폭풍 칭찬을 베드로에게 하신다. 베드로의 고백은 기도문헌의 핵심이며 하나님이며 인간이신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님에 대한 완벽한 이유에서 나온 대답이었다. 유대인의 배경을 갖고 있는 베드로에게서는 도저히 그의 상식으로는 나올 수 없는 대답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베드로의 대답은 그 상식을 뛰어 넘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에도 큰 파장을 일으킨다. 뒷부분,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 뒷부분에 나오는 단어들을 보면 좀 알 수 있다.
 
*마태복음 16:21,
21 이때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이 때로부터 베드로의 고백이 큰 전환점이 되어 베드로의 고백 후부터라는 표현이다. 그런데 이 때로부터라는 표현들은 마태복음에 딱 두 번 나온다. 첫 번째 나오는 것이
 
*마태복음 4:17,
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이전에는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사탄에게서 시험 받으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그 시험을 이기시고 난 이후 이때부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시면서 비로소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시작된다. 그리고 한참을 뛰어넘어
다시 마태복음 16:21절에 베드로의 고백 이후로부터 예수님께서 또 다른 사역의 전환점을 마련하신다. 21절에 같이 한 번 읽어 보자.
 
*마태복음 16:21,
21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의 고백 이후 이때부터 예수님을 진정한 사역 적 목적인 소명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을 말씀하기 시작한다.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이며 본질적 십자가를 향한 출발의 계기이기도 하고 신호탄이기도 하였다. 이 장면에서 한 가지 의문을 갖는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고백이 어떠한지 왜 베드로의 고백이 예수님의 사역의 전환점이 되는 것인가? 베드로의 고백의 의미가 무엇이기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 이후로 사역의 전환점을 마련하시는가?
 
본문을 통해 우리가 질문을 가질 수 있는 질문이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하여 그 의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베드로의 관점이 아닌 예수님의 관점에서 다시 한 번 이 본문을 볼 필요가 있다. 전체적 맥락에서 보면 어쩌면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이후 이 고백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의 출발점, 출정식과 같다. 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보통 중요한 일을 하거나 중요한 임직을 맡게 되면 제일 처음 중요한 장소를 가지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이나 국회의장 법관인 등은 대체로 현충 원을 많이 간다. 현충원이 갖는 상징적 의미 때문이다. 예수님의 상징적 의미를 찾는다면 가이샤라 빌립보보다 훨씬 더 좋은 장소가 맞다. 당대의 정치 경제 문화 종교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던 예루살렘은 가장 좋은 장소였다. 뿐만이 아니라 예수님 사역의 첫 번째로 이적을 행하셨던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던 가나도 그렇게 나쁘지 않다. 많은 사람들에게 오병이어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하여 그분이 특별한 분임에 대하여 선포하셨던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갈릴리도 참 좋은 장소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장소를 뒤로하고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보고 있는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으로 가신다. 그런데 이 장소가 참 재미가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가이샤라 빌립보는 생뚱 맞는다. 이 본문의 한 번만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마태복음의 9장에 보면 9절에 한 번은 나오지만 상황 상 이 본문의 딱 한 번 나온다. 이렇게 중요한 출정식인데 굳이 예수님은 예루살렘이나 가나, 갈릴리가 아니라 이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을 택하셨을까? 가이샤라 빌립보는 이스라엘의 가장 아름다운 헐몬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갈릴리 바다로부터 북쪽으로 주욱 한 40킬로 정도 올라가는 있는 장소이다. 분봉 왕 빌립이 계획해서 세운 도시이고 그 도시에 로마황제 가이샤라 황제 이름을 덧붙여서 가이샤라 빌립보라고 한 도시이다. 이 당시에 로마 황제의 이름을 도시이름으로 붙인다는 것은 그만큼 그 도시를 중요하게 생각했을 뿐더러 그 도시가 황제의 이름에 걸 맞는 모습을 갖고 있어야 했다. 도시의 규모나 인구, 경제적인 수준뿐만 아니라 귀족들과 지식인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 거리에는 그리스 로마 양식의 아름다운 건물들이나 기둥들이 무수하게 세워져 있는 또 문양도 화려하고 아름다운 도시였음에 틀림없다. 화려한 황제의 도시다. 그리고 이 가이샤라는 빌립보는 황제의 도시일뿐더러 신들의 도시이기도 했다. 실제적으로 이곳은 유대지역에 속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이방신전들 화려하고 이방 신전저들이 있었던 도시이다.
 
예전에 몇 년 전에 성지순례를 하며 가이샤라 입구를 한 번 갔다. 가보니 그곳에는 아직도 너무나 거대한 신전들이 터전들, 그리고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부요의 상징인 바알 신전과 헬라시대 사람들이 섬겼던 탄 신전과 제우스 신전도 거기에 함께 있었다. 또한 이곳은 너무나 부요하고 풍요로운 지역이었다. 헐몬산에서 내려오는 그 물들이 이곳에 가득하였고 그 물들이 흘러 갈릴리 바다로 들어가는 수자원이 되기도 한 지역이었다. 여기에는 나무가 많다. 유대 전체 지역이 광야 지역인데 여기는 정말 비옥하고 아름다운 지역이었다. 황제의 도시이며 또한 신들의 도시이다.
 
말씀을 준비하며 생각해 보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가 이런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을 이야기 하자면 마천루의 초고층 빌딩들과 최첨단을 자랑하는 문명들이 있다. 수많은 기기들과 화려한 불빛들과 빛나는 도시이다.
 
제가 사랑의교회 사역을 위해 서울에 처음 왔다. 문화 충격이었다. 강남 길과 테헤란로를 버스를 타고 지나가는데 목이 부러지는 줄 알았다. 높게 솟은 수많은 빌딩들이 있었고 또한 밤 열두 시가 되었는데 어둠을 몰아내는 수많은 네온사인들의 화려한 불빛들이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강남 거리를 다니는 수많은 인파들의 모습에 참 아름답기도 하였지만 이 도시의 풍요로움을 볼 수 있었지만 이면의 있는 다른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황제의 도시, 가이샤라 빌립보이다.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도시는 신들의 도시이다. 물론 가이샤라 빌립보처럼 유형적인 신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각자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계셔야 할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가 섬기고 싶은 신들을 모시고 그 신들을 섬기며 살아간다.
 
최근 유행하는 단어들이 있다. 영끌, 빚투, 코인, 다 돈과 관련된 단어들이다. 사람들은 맘몬 신을 섬기며 자기의 삶을 지탱하고 자기의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다고 믿고 그 맘몬 신을 섬기며 그 맘몬 신에 목숨을 걸고 살아간다. 어떤 사람들은 성공이나 신에 심취되어 있다. 신이나 섬김을 당하는 사회부적응 자들이나 사용하는 단어이고 그 자리에 자신의 성공을 위해 속임수나 술수가 대신 자리 잡고 있다. 왠지 이것들을 쫓지 않으면 도태될 것 같은 불안함이 있고 이 불안 때문에 세상이 쫓고 있는 신들을 덩달아 쫓아가는 모습들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도시의 모습이다. 어른들은 어른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자기의 신에 빠져서 살아간다. 빠져가는 도시, 21세기 가이샤라 빌립보이다.
 
주님은 이런 도시 한 가운데서 제자들에게 질문하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황제의 도시, 신들의 도시 한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에게 동일하게 주님은 질문하신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고 하신다. 대답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깊이 묵상하고 대답하려고 할 때면 우리의 마음 가운데 주저함이 있고 참 쉽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어렵다.
 
몇 년 전이었다. 청년부 사역을 할 때, 한 지체와 관련된 일이다. 어느 날 그 지체가 전화가 왔다. 울면서 이야기 한다. 목회자의 직감으로서는 ‘무슨 문제가 있나?’ 이 자매는 열심히 공부하여 공무원에 합격했다. 어느 구청에 발령받아 열심히 신나게 재미있게 일하고 있는 중인 걸로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울면서 전화를 하니 걱정이 되었다. 자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목사님, 예수 믿는다는 게 왜 어렵나요? 예수님을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어요. 어렵게 공부해서 구청에 들어왔는데 예수님 믿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도답게 살아가는 것이 너무 짐 같고 바보처럼 느껴집니다.”라고 했다.
이 자매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제자훈련 때 그가 다짐하는 게 있었다. 내가 공무원이 되면 정말 그리스도인답게 예수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으로 살기를 다짐했는데 이 다짐으로 막상 구청에 갔는데 그 당시에 문화 가운데 하나가 근무 외 수당이 있었다. 공무원들이 퇴근하며 밥먹으러 가면서 태그하고 가야 하는데, 그냥 자기의 이름표를 태그하지 않고 밥을 먹으러 가는 것이다. 그리고 한 참 놀다가 조금 있다가 나가면서 태그를 찍는 것이다. 그러면 근무하는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근무 외 수당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는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자기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다짐하고 계속해서 살아왔는데 직장생활에 있어 주위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너무 힘이 든다고 말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고 새내기 직장인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일이었다.
 
이 자매의 이야기를 듣고 열심히 함께 간절하게 기도하며 전화를 끊었다. 마음 한켠에는 이것이 우리가 사는 황제의 도시, 신들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문제는 비단 이 자매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황제의 도시에서 너무나 많은 도전들을 보았다.
 
나의 구원자이시며 지금도 살아계셔서 나의 삶과 이 땅을 통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 이 고백이 싶지만 어떤 때는 너무나 주저될 때가 있다. 특히 코로나 상황에는 더더욱 그렇다. 직장생활하면서 주일 날 교회 다녀왔다는 이야기하는 것이 주저되고, 내가 성도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들을 말하는 자체가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이런 시대에 자기 부정은 진부한 이야기이며 시대와 동떨어진 꼰대 같다. 조그만 것으로 자기를 맘껏 뽐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평정을 유지하기란 참 쉽지 않다. 제가 목사인데도 불구하고 마음의 부담감이 있다. 
   
   
이것도 힘든데 어떨 때는 제가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부담감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 차체가 너무나 힘겹게 느껴진다. 저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문제가 아닌가? 우리의 현실적인 고민이 아닌가? 설교를 준비하며 2000년의 시간을 훌쩍 넘어 저 또한 가이샤라 불리는 빌립보에서 있는 것처럼 느껴지며 예수님께서 질문하신다. "인기야,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하신다. 돌이켜 보니 아주 위급한 상황에서는 주님은 나의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어떤 선지자 중의 한 명이었다. 나의 이익이나 자존심이 걸린 문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주로 고백되는 것이 힘겹게 느껴지는 저의 모습이었다. 말씀을 묵상하고 준비하고 어떻게 이 말씀을 나눌까? 참 많이 기도하는 중에 저의 마음 깊은 곳에서 짠하게 밀려오는 하나의 감동, 깨달음이 하나 있었다.



이 본문은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하고 동일하게 우리에게 하시는 질문이지만 그래서 제자들의 고백을 하는 질문이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고백을 원하시기 훨씬 이전부터 제자들을 향하여 고백하고 계셨다. 성경 곳곳에 우리를 향한 주님의 고백들이 가득 기록되어 있는 것들을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요한일서 4장에 나온다.


*요한일서 4:10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을 고백하고 계신다. 또한 그 사랑을 말뿐만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를 향하여 우리를 향한 케어를 하셨다.


*로마서 5:8,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고백을 하기 이전부터 주님을 우리를 위하여 사랑하신다는 말씀뿐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줄 믿는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이며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끊임없는 사랑의 고백이었다. 이 감동이 저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밀물처럼 밀려왔다. 그러면서 주님은 저에게 말씀한다.


나의사랑, 나의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하자.!!~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하자. !~~제가 부족하고 주님조차 제대로 고백하지 못하는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여전히 저를 향하여 사랑한다는 말씀하시고 저의 손을 붙들며, 나의 사랑, 나의 사랑!!~ 어여쁜 자야 일어나 나와 함께 가자!~~


다시 베드로 가이샤라 불리는 빌립보에 있는 곳으로 넘어가 본다. 갈릴리의 시골에서 올라온 제자들이 이 거대한 도시를 보며 아마 눈이 휘둥그레졌을 것이다. 그 화려한 도시 한 가운데 서 있는 초라한 옷을 입은 예수님, 흙먼지 가득한 샌들을 신으시고 있는 이 남루한 예수님, 만왕의 왕이지만 어느 누구하나 환영하는 이 없고, 신중의 신이지만 누구하나 경배함이 없는 이 예수님과 황제의 도시 신들의 도시, 가이샤라 빌립보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이런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신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한다. "주님, 주님은 나의 구원자 메시아이시며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답한다. 그는 당당하며 너무나 확신 있게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고백들을 하고 있다.


제자의 삶은 신들의 도시에서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는 외로운 길이며 화려한 황제의 도시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의 삶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외면하는 좁은 길이기에 찾는 이가 별로 없지만, 유쾌하지도 않지만 나와 함께 가자고 하시는 주님의 손을 붙들고 함께 동행 하는 길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무조건 복을 받는다고 이야기 하고 예수님 믿으면 성공한다고 이야기 하고, 예수님 믿으면 합격 한다고 이야기 하지만 그렇지 않다. 저는 그랬으면 좋겠지만 성경을 보면 제가 믿는 예수님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시며 나와 함께 가자고 말씀하시며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주님 때문에 황제의 도시 신들의 도시에서 주님과 함께 손잡고 갈 수 있는 줄 믿는다.


다시 아까 이야기 나누었던 자매 이야기이다. 시간이 한참 흘렀다. 몇 달이 흘렀다. 그 자매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번 전화는 처음 받았을 때보다 분위기가 달랐다. 유쾌한 목소리로 "목사님, 예수님이 승리하셨습니다." 너무나 생뚱 맞는 이야기 같지만 그러면서 예수님이 승리하신 일을 쭈욱 이야기 한다. 자기가 근무 외 수당 태그 찍는 것들을 거부하고 참 힘들었는데 포기하지 않고 계속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늦은 근무를 마치고 당직실에서 사무실 열쇠를 받기 위하여 갔는데 당직을 서고 있던 한 분이 이 자매에게 이야기 한다. "혹시 어느 부서 누구누구 아니신가요?" 하셔서 깜짝 놀랐다고 했다. 처음 찍는 분으로 유명한데요. 우리 모두가 다 그리 다 실천해야 하지만 그렇게 못하고 있는데 자랑스럽습니다.".라고 하셨다. 한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들으니 자매가 너무 기뻐서 전화를 한 것이다.


"목사님, 예수님께서 승리하셨습니다."라고 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황제의 도시들 사이에서 수많은 우상들에 싸여 무수한 유혹의 끈적거림에 살아가고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바라보며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질문하셨던 이유, 그 이유가 이 이유 때문이다. 이 베드로의 고백으로 말미암아 베드로의 고백이후 제자의 삶은 시작될 수 있고, 화려한 황제의 도시, 신들의 도시에서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그 순간부터 주님과 함께 하는 제자의 삶은 시작되고 주님이 우리에게 삶들 가운데 개입하시기 시작하신 줄 믿는다. 고단하고 여전히 힘겨워 허덕일 때 우리를 둘러싼 모든 자녀가 낙망과 핍절됨을 넘어 보좌를 박차고 그리스도 십자가의 본능으로 찾아오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고난의 아픔을 넘어 승리의 역사로 역전시켜 주실 것을 믿는다. 신랑되신 주님은 우리 한 명 한 명을 향해 십자가를 통한 사랑을 하시며 제자의 길로 초청하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물으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여정에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 참 쉽지 않고 호락호락 하지 않는 신앙의 여정 가운데 어떨 때는 참 힘에 겨워 지쳐 쓰러질 때 있고, 혼자 눈물겨워 할 때도 있지만 주님을 우리를 향하여 나의 사랑,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함께 가자. 라고 하시며 손을 내밀고 우리를 초청하신다. 그 초청 가운데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지금도 통치하는 만왕의 왕 나의 주이십니다. 믿음으로 고백하고 그 주님과 함께 승리의 제지의 삶을 살아내는 모두가 되길 기도한다.

요약,
황제의 도시, 신들의 도시 가운데 우리를 세우시고 너는 나를 누구냐고 물으시는 주님 앞에 우리는 부족하지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승리할 수 있는 자 되어 나의 구원자 되심을 고백하며 주님만 따라가서 수많은 유혹을 이기고 언제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기를 소망해야 한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중보자로서 성부에 의해 구별되었고 임명되었으며,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대예언자이시다. 또한 유일한 대제사장이시며 영원한 왕이시다. 베드로의 이러한 신앙 고백은 개인의 자격으로가 아닌 열두 제자를 대표한 것이고,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계시의 빛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게 되었다. ‘베드로’는 ‘반석’이란 의미로, 예수님께서는 그 위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울 것을 말씀하셨으며 그리하여 그는 천국 열쇠를 소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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