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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03월 20일) 제목: "에덴으로 돌아가는 길" 말씀: 골로새서 1:13-14 찬양인도: 아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김승진 부목사님 ----- *골로새서 1:13-14,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 ▶김승진 부목사님. 하나님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오늘도 기도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십자가 고난의 길을 기꺼이 걸어 결국 부활의 회복이 움트게 하신 사랑에 또한 감사드립니다. 성령께서 이 시간 좌정하사 사랑의 아들의 나라를 향하여 걸어가는 온전한 제자의 삶을 사모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수요 저녁 기도회 참 잘 오셨습니다.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회복을 넘어 새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는 복된 시간이 되실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세서 1장 13절, 14절 두절 말씀입니다. 주신 말씀 저와 한목소리로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 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성냥,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아멘 한국인은 일생 중 34년을 인터넷을 보며 보낸다고 합니다. 3세에서 9세 아동의 인터넷 이용률이 91%를 넘는다는 집계도 있습니다. 저마다 핸드폰, tv 같은 화면을 한두 개쯤 가지고 사는 세상입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화면 안에서 가능해진 세상입니다. tv를 보고 영화를 보고, 핸드폰을 보고,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길가의 전광판을 보고, 심지어 엘리베이터 안에도 영상이 보입니다. 보는 것이 익숙하다 보니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관심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과학의 발달은 이제는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육 환경의 변화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미신적인 것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보여줄 수 없는 것은 미개하고 무식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보이지 않는 것은 의미 없어 보입니다. 정말 우리 삶에 보이지 않는 세계는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저는 부산에서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곳 친구들 중에 아버지가 배를 타는 친구들이 참 많았어요. 친구들이 발걸음을 가볍게 두 손을 무겁게 교실에 뛰어 들어오는 날이면 그날은 어김없이 친구 아버지의 배가 들어온 날이었습니다. 책가방도 새 것 연필도 새 것, 가방을 열면 미국 허쉬 쵸코릿이 한 가득이었습니다. 제 부친께서는 목회를 하셨는데요. 상대적으로 가난했던 어린 마음에, ‘아버지 배나 타지 왜 어렵게 교회를 하시지.’ 이런 생각을 자주 했었습니다. 그런데 학년이 올라가면서 보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선물을 사들고 돌아온 아버지도 있지만,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없는 친구들이 하나둘 생겨나는 것을 보며 철없이 ‘아버지가 배를 탔으면’ 했던 생각이 무섭게 느껴졌었습니다. 경제적인 여유, 이제 일제의 물건을 가득 품에 안은 이면에는 아버지가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아내와 아들의 모습이 짙게 묻어 있습니다. 해운대 밤바다는 제게 낭만이었지만 남편과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두려움이기도 했습니다. 두려움은 사람을 간절하게 합니다. ‘배가 크니깐 괜찮을 거야. 기술이 좋아졌으니깐 괜찮을 거야. 항해 경력이 꽤 기니깐 괜찮을 거야.’ 다 필요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과학기술 같은 것보다 어떤 절대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어떤 대상이라도 의지해야 합니다. 돌이든 나무든 대웅전의 부처님이든, 바다의 용왕이든 닥치는 대로 있습니다. 그래서 부산에서는 미신이 많았습니다. 보이는 세계보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렇듯 헛돼 보이지 않는 세계가 위안을 주는 척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을 후벼 파듯 두렵게 하는 경우들도 있어 자살을 앞둔 청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 라는 표현을 하는 것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자살하고 싶다 말하지만 너무 살고 싶어 하는 생의 의지가 강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살고 싶은데 왜 자살을 하려고 목사님, 자살이 정말 무서운데 나도 죽기 싫은데 죽음과 보다 더 무서운 것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죽음보다 무서운 것이 뭔데? 라고 물으니, ‘내일’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다가올 내일이 가장 두렵다고 합니다. 오늘 하루는 겨우 살았지만 다가올 내일을 또 살아갈 힘과 의지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내일이 너무 두렵다고 합니다. ‘넌 분명 내일 완전 망할 거야. 넌 분명 내일 아주 수치스러울 거야. 넌 분명 내일 죽음을 넘어서는 고통을 경험하게 될 거야’. 보이지 않는 세계는 사람의 눈을 가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옷 이 있게 하며, 다리에 힘을 불어 주저앉기도 하며, 막다른 길과 어두운 서울에 가두어 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다른 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세계를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007년 아프카니스탄 샘물교회 피랍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단기 선교 중에 테러단체에 피랍되어 결국 죽음으로 돌아온 배형규 목사님을 아십니까? 배형규 목사님은 사랑의 교회 청년부와 샘물교회 청년부 연합 모임에 함께하셨던 분이십니다. 사건 때에 함께 뜨겁게 기도했던 이들이 바로 사랑의 교회 청년들이었습니다. 샘물교회 가면 배형규 목사님의 순교자 기념관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곳에 배형규 목사님의 마지막 대화가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 많은 분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협상을 위해서 한두 사람쯤은 죽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제일 먼저 나가겠습니다.” 그때 늦은 나이에 신학교를 다니다 선교에 참여한 유경식 장로님이 대답을 합니다. “목사님 아직 나이도 젊으시고, OO 다함께 한국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저는 나이도 많고 이제 살 만큼 살았으니 그러니 제가 먼저 나가겠습니다.” 목사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아닙니다. 선교지에 가서 마지막 여생을 보내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때 선교지에서 죽으나 지금 선교지에서 죽으나 다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 대화는 어떤 봉사하는 일을 솔선수범 하겠다는 내용이 아닙니다. 누가 먼저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대화입니다. 죽음 앞에 사람은 본능적으로 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죽음을 서로 선택하려 하는 아주 이상한 대화입니다. 이 대화 후에 실제로 배형규 목사님은 순교하셨습니다. 목사님도, 장로님도 죽음을 선명하게 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분의 대화는 죽음이 보여주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오히려 죽음의 순간이 아닌 죽음 너머의 무언가를 아는 것처럼, 마치 보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성경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두 가지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는 흙암의 권세가 지배하는 세계요,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합니다. 로마 정부의 죄수였던 바울, 곧 있을 재판을 기다리며 에 갇힌 바울은 다가올 판결 또한 좋은 소식이 아닐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굳게 닫힌 문 안에 갇혀 현실적으로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골로새서 말씀은 ‘흑암의 권세가 지배하는 감옥’ 이라는 공간에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를 바라보며 기록한 내용입니다. 13절 말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골로새서 1:13,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 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바울은 먼저 우리가 흑암의 권세 아래 있다고 말하고 있어 아담과 하와 덕분에 에덴동산 한 번 보지 못한 가인을 아십니까? 가인은 쟁취하고 빼앗아 소유하는 존재로 성경에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가인이 나타나자마자 성경에서 아벨은 탈락됩니다. 가인이 변명하는, 아벨을 살해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재산을 거절하고 양치기의 제사를 받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사건은 인류의 경쟁 사회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서론이 되었습니다. 가인은 살인 이후 하나님을 떠나서 자신만의 에덴동산을 세우려 합니다. 공부로 살아온 가인은 에덴동산 같은 고대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도시는 농경지 확보를 중심으로 세워졌고, 강제 노역에 시작되었고, 이 노역은 세금을 거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세금으로 공공시설, 공공시설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세워진 것들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도 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도시는 소돔과 고모라가 되었고, 바벨탑이라는 건축물이 되었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바벨 탑을 세우며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보세요! 에덴동산에서 우리를 쫓아내셨지만 결국 여기에 에덴동산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가인의 세상은 절대로 에덴동산이 될 수 없었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통해 무서운 환경과 지 하게 싸우는 인생을 일평생 살았습니다. 가인은 저주받은 땅, 적대적인 땅과 부딪히며 고된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의지했던 땅은 언제인지 모르게 가인의 주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상을 지배하고, 나중에 죽은 후에도 가인의 몸을 접수하여 버렸습니다. ‘경작하다’는 말에는 ‘섬기다.’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은 땅을 섬기는 종이 되어버렸습니다. 가인이 도시를 세웠을 때 땅을 전국 도시의 주인이 되었다 생각했지만, 저주받은 땅에 결국 묻혀버린 인생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각 속 깊이 묻혀버린 흑암의 권세의 사로잡힌 인생들의 모습입니다. 흑암의 권세에 반대는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입니다. 이곳을 다른 말로 하나님의 동산이라 합니다. 바로 에덴입니다. 성경에서 에덴은 하나님의 거주지였습니다. 성경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신들의 거처를 동산과 하늘에 두었습니다. 신들은 울창한 동산에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루하루 종일 먹고 사는 농경문화에서 물이 풍성한 동사는 신들의 세상이었습니다. 산과 동산에는 생명 유지를 위한 채소와 과일이 자라며 영양 섭취가 잘 된 짐승들이 흔했습니다. 신들이 사는 곳에는 결핍은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도 취미 삼아 등산이라는 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등산을 하고 싶어 또 높고 곳까지 올라갈 장비도 없었습니다. 산은 너무 멀고 높아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장소였습니다. 신들이 성가신 인간들의 피에 머물기에 완벽한 장소였습니다. 하늘을 향해 높이 치솟은 산꼭대기 일수록 신들의 영역이 확실했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왜 고대인들이 피라미드를 그런 모양으로 건축했는지, 가늠할 수 있게 합니다. 이 구조물들은 인간들이 지어놓은 신들의 ‘인공 동산’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동산 에덴은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온 세상이 에덴은 아니었습니다. 두 강이 가로지르는 동산이었고, 네 개의 수원지를 통해 그 위치가 묘사됩니다. 창세기 2장 8절 말씀에 보면 이 모습이 나오는데요. 우리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창세기 2:8,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시니라. -아멘 세상 어딘가에 창설하신 동산이 에덴이었습니다. 에덴은 울창하고 물이 넉넉한 거주지였습니다. 이곳은 다른 신들처럼 하나님만의 영역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살게 하시려고 지으셨습니다. 자신의 백성들이 살도록 지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도 자기 백성 가운데서 살기 원하셔서 지으신 곳입니다. 에덴은 ‘기쁨’이라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쁨의 정원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만나셨고, 선선한 바람이 날에는 나무 사이를 함께 거들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던 곳 에덴을 우리는 본향, 고향이라고 합니다. 저는 태어나기는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자꾸 사투리를 쓰죠. 그죠? 부산에서 유년시절과 학창시절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산이 제 고향 같아요. 처가가 부산에 있습니다. 그래서 부산에 내려갈 때면 유년 시절로 돌아가는 느낌, 또 학창시절이 생각나며 또 처가가 있어서 고향집에 가는 기분입니다. 저는 처가 가는 것을 너무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아내가 지금 설교를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ㅎㅎㅎ~ ㅋㅋㅋ~ 그리스도인들은 돌아갈 고향 고향이 있습니다. 죽어서 천국 간다는 말은 이제 긴 여행 끝내고 고향집으로 간다는 말과 같습니다.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어. 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고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돌아갈 곳도 없습니다. 죽음 앞에 섰을 때, 가장 큰 두려움은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돌아갈 곳이 지옥이라면,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잔인한 순간이 될 것입니다. 반대로 그리운 곳, 이제는 도망가고 싶은 곳, 우리가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 그곳을 사도 바울은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 합니다. 다른 번역들을 찾아보았습니다. 먼저 번역입니다.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 또 다른 번역은 ‘그분이 계신 아들의 나라’로 표현합니다. 골로새 교회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아들의 나라’로 가는 길을 알려주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갈 수 있다고 합니다. 들어보세요. -금욕적인 생활을 하십시오. -똑똑한 훈련을 받으셔서 자기 부정을 하십시오. -특히 음식이나 술은 절제하며 금식을 하십시오. -거룩한 절기는 필히 준수해야 합니다. 너무 맞는 이야기예요. 그렇죠. 분명히 들어온 새로운 교사들이 이단이라고 하는데, 이들이 하는 이야기들, 틀린 이야기가 하는 거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근데 이단을 ‘끝이 다르다’고 해서 이단 이라고 합니다. 끝 단(端) 자에, 다른 이(異) 자가 있습니다. 이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끝이 희한하게 끝납니다. 가장 중요한 것들을 터뜨려버리는데요. 한번 들어보세요. 인간의 노력으로 충분히 갈 수 있는 그 나라이기에 예수 그리스 역할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보이는 세상은 하나님과 반대되는 것이라 혐오해야 할 대상입니다. 이런 지저분한 세상에 지저분한 인간의 몸을 잊고 하나님의 아들은 절대 오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가면을 하고 온 신적 존재 천사와 같은 존재로 여겨버립니다.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없었던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걸어 다니면 땅에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라고 이들은 가르쳤습니다. 가장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를 지워가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발자국이 없다.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지워가듯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지를 알지 못하도록 지워버리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갈 천국을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 그리스도의 나라’라고 표현합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갈 수 있는 나라라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지워지면 천국도 에덴동산도 하나님의 나라는 없습니다. 이 나라를 야곱은 꿈에서 보고 있는데요. 창세기 28장 12절 말씀입니다. 우리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창세기 28:12, 12 꿈에 본, 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어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 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고. -하늘과 땅에 닿아 있는 사닥다리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페인트칠하기 위해 올라가는 사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행 중에 외국 신전을 가본 적 있으십니까? 하늘을 향해 계단이 끊임없이 놓여 져 있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야곱이 보고 있는 것은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계단이었습니다. 계단 끝에는 하나님이 서 계셨습니다. 말씀 한 절 더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51절 말씀입니다.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51,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제자도 야곱이 보았던 세계를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 자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을 잇는 것이 예수님인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보이면 야곱이 고백한 것처럼, 여호와께서 여기 계시거늘, 여호와께서 내 곁에 계시거늘,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계시거늘 고백하게 됩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 나라에 이르게 하는 계단이 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그 나라가 보이고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에덴으로 가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으며, 에덴으로 가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밖에 없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속량을 ‘죄 사함’이라고 합니다. 오늘 읽은 14절 말씀을 이렇게도 번역을 하는데요.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 "막다른 길과 어두운 굴에서 구출하셔서 그분이 몹시 아끼시는 아들의 나라로 인도하셨습니다." *골로새서 1:14,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막다른 길은 십자가의 길이며, 어두운 굴은 무덤입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은 우리를 에덴으로 인도하는 길이며, 무덤을 막았던 돌을 굴려 우리를 건져내신 것이 속량입니다. 마치 출애굽 당시 흑암의 권세가 온 세상을 뒤덮고 있을 때, 각 출입문 인방에 어린 양의 피를 묻혀 그 피가 흘러 흘러가는 곳마다, 죽음의 모든 사자들이 넘어가 그 피가 있는 곳마다 생명의 문이 열렸던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흘러, 흘러 무덤에 그 문 인방으로 흘러, 흘러 묻혀 져 내리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생명의 문이 열리고, 사슬 되었던 죽음의 죄 덩어리가 풀어지기 시작하며, 그때부터 이제 우리에게는 애굽과 흑암과 죽음의 권세들이 떠나가게 됩니다. 아멘!! 그때 그러므로 속량은 이제 우리가 에덴으로 돌아가도 된다. 라는 선언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죄 사함은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는 여정의 시작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은 아 나는 이제 착해졌구나, 나는 이제 죄인이 아니구나! 라는 그것을 말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죄가 없는 세상을 향해 걸어가는 걸음이 되고, 죄의 두려움에 눈을 돌려 기쁨의 나라를 볼 수 있는 능력이 되며, 죄로 인해 더 이상 고통 받지 않아도 된다는 하나님의 약 며 본향을 향한 소망의 여정이 됩니다. 그래서 에덴으로 가는 이들은 자유와 기쁨이 있습니다.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깊이 묵상하고 십자가의 고통을 잊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로 돌아갈 수 있음을, 에덴으로 돌아갈 수 있음을 또한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떠난 그 이후부터 한시도 쉬지 않으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나라를 향해 가는 여정 속에 있습니다. ‘페니 크로스비’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언젠가 존경하는 목사님께서 들려주신 페니 크로스비에 관한 이야기로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페니 크로스비가 태어난 지 약 6주가 되었을 때 병이 들어 눈의 시력이 너무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녀의 고백입니다. “나를 담당했던 사람들은 내 눈에 수포를 댔습니다. 그들의 지식과 기술 부족으로 나는 영원히 시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나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친구들의 얼굴이나 들판의 꽃들, 또는 푸른 하늘이나 아름다운 황금 별빛들을 결코 보지 못할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만족이라고 부르는 작은 보물을 내 마음에 담아두겠다.”고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고백을 들으며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아직 어려서 낙천적이고 낙관적이라 저런 말을 할 거야. 세상 풍파를 너무 몰라서 이런 생각 가질 수 있지. 장애인들의 어려움을 몰라도 너무 몰라. 아직 철이 없는 것 같아 인생을 너무 쉽게 보아서 이런 글을 남겼을 거야.’ 여기저기서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그녀의 나이 53살 되었을 때 그녀가 지은 노래입니다. ♬“예수를 나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주 안에 기쁨 누림으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 만 보이도다.~! -페니 크로스비- -죽을 때까지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녀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내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린 구속한 우리 구주 예수님은 보입니다. 에덴으로 돌아가는 길은 늘 험난합니다. 하지만 주 안에 기쁨을 누리면 마음의 풍랑도 잔잔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내일 하루, 내일 하루는 또 어떠실 것 같습니까? 누군가 이런 얘기를 하는 걸 들었습니다. 인간의 쾌락이 큰가, 아니면 인간에게 고통이 더 큰가? 이 질문에 이런 비유를 합니다. 사자가 먹이를 먹는 장면으로 설명을 합니다. 사자가 짐승을 잡아 입에 물고 있을 때, 사자가 먹이를 먹는 쾌락이 클까요? 아니면 사자에게 잡혀 먹히는 짐승의 고통이 더 클까요? 당연히 잡아먹히는 짐승의 고통이 훨씬 더 큽니다. 우리 인생에 쾌락과 고통이 있다면 우리 인생 속에서 쾌락을 오가는 그 무게 더 큰 것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진실은 인간의 인생은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기쁘고 즐거운 일은 너무 짧게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하지만 고통과 아픔은 약속한 것처럼 어김없이 늘 우리를 찾아옵니다. 여전히 고통이 우리를 찾아와도, 내일이 또 두려워도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여행이 아무리 고되고 힘들어도 돌아갈 집이 있으면 괜찮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에덴동산이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사는 날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게 됩니다. 이것이 에덴을 향해 걸어가는 그리스도의 여정이며 삶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암흑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우리는 그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아멘 ♣요약 어두운 무덤과 같은 흑암의 권세를 벗어나 사랑의 아들의 하나님 나라를 보아야 한다. 자기부인과 자아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본향인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십자가 없이는 그 누구도 온전함의 길을 갈 수 없음을 깨닫고 날마다 십자가를 묵상하며 십자가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그리하여 주님이 주신 에덴동산으로 가는 길이 아름다운 평생이 되길 소망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암흑의 권세에서 건져내시고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신 놀라운 은혜에 감사드려야 한다. 보이는 두려움과 고통의 현실 앞에 보이지 않는 흑암의 권세 앞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바라보며 살아가서, 눈을 열어 하나님의 동산을 보아야 하고, 기쁨의 동산에서 살아갈 날을 소망하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찾아온 많은 문제들을 넘어서게 하심을 확신하며,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의지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본향을 향하여 살아가는 에덴동산을 갈망하며 소망이며 능력의 하나님,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사회:김대규 부목사님. 오늘 말씀의 은혜에 놀랐고 또 하나 놀란 것은 우리 목사님 제가 27년을 알고 지냈는데 고향이 서울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습니다. 사랑의 아들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시고 그 나라를 향해서 걸어가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눈을 가리는 것들을 이겨내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날마다, 날마다 그 사랑의 아들의 나라를 향하여서 함께 걸어갈 수 있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 이 시간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함께 찬양하면서 그 하나님 함께 바라보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 우리의 눈을 가리는 모든 것들을 이겨내고 하나님 흑암의 권세를 벗어나 우리가 온전히 사랑의 아들의 나라, 그 하나님 나라 에덴을 바라보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을 바라보는 것은 나의 부인과 나의 죽음 선언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붙들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날마다 자아의 죽음을 선언하며 그 온전함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붙잡아 주시옵소서 내 눈을 가리는 모든 욕심과 욕망과 죄악과 불안과 우울과 걱정과 근심을 이 시간 모두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이 시간 우리의 눈을 들어 오직 사랑의 아들의 나라를 바라보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을 통해서 내 삶에 기쁨과 감사와 구원의 은혜가 충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같이 한번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며 하나님의 영광은 무궁합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그 영원한 영광과 그 무궁함이 우리가 함께 바라보며 나아가야 할 소망일 줄로 믿습니다. 모든 사랑의 교회 영 가족들이 하나님 하늘의 참된 부요에 눈을 뜨게 하시며 하나님 날마다, 날마다 우리가 은혜의 상층 권을 향하여서 다른 박질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사랑의 교회 다락방 가운데에 훈련 반 가운데에 믿음의 공동체 가운데에 그 부유와 그 풍성함을 부어주시옵소서 사랑의 교회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부흥헌신 토비새를 위해서 하나님 믿음의 사대가 함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 사명과 기적과 간절함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봄 특새를 기억하여 주시고 모든 강사분과 하나님, 우리 담임 목사님을 기억하사 봄 특새 가운데에 모든 교회가 은혜로 춤추게 하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것들을 우리가 소망하며 마음에 품고 준비하며 기도할 수 있도록 붙잡아 주시옵소서. 우리 교회 사역과 담임 목사님을 위해서 이 시간 한 번 더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이 나라 이 민족을 하나님 불쌍히 여겨 주시오며, 하나님 이 나라 이 민족이 복음으로 승리하는 민족이 될 수 있도록 붙잡아 주시옵소서 특별히 4월 총선을 기억하여 주시오며, 하나님 민족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승리를 기원하는 좋은 지도자의 복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4월 총선을 위해서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길 원합니다. 또한 기도하실 때에 하나님 저 북한 땅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지금도 눈물로 기도하는 사랑의 교회 성도들을 주님 눈동자와 같이 지켜 주시오며, 하나님 피 흘림 없는 복음적 평화통일의 그날을 속히 주시옵소서. 평양에서 특새(특별새벽기도회)하는 날이 속히 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복음적 평화 통일을 위해서 우리가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또한 세계 열방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 지금도 전쟁과 가난, 재해로 고통당하는 열방 가운데에 생명나무의 능력이 일어나게 하시며, 열방의 교회를 강하게 하시고 만국이 소생되는 치유의 은혜를 주시옵소서. 이 나라의 민족과 북녘 땅과 세계 열방을 위해서 다시 한 번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한 주간도 사랑의 아들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모든 믿음의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다가오는 토비새(토요비전새벽예배)의 해와 같이 빛나는 얼굴로 다시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기도하며 마무리하겠습니다. 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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