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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7월 19일)
제목: "하나님의 보호막 아래"
말씀: 예레미야 20:9~13
찬양인도:
설교자: 신성식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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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0:9~13,
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10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이 두려워함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내 친한 벗도 다 내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며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11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하지 못하므로 큰 치욕을 당하오리니 그 치욕은 길이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12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심을 나에게 보게 하옵소서.
13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ㅡㅡㅡㅡㅡ
 
▶우리가 공사하는 장소를 지나가보면 보호막이 쳐저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일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서 보호 장비를 설치한다. 오늘 우리 인생에도 예상치 못한 여러 가지 위험들이 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보호막이 되어 주셔서 우리의 안전을 지켜 주시는 줄로 믿는다. 하나님의 보호막 아래 들어갈 때, 진정한 안전이 있다. 여러 우리 인생의 경험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보호막아래 들어가는 시간 되시고 오늘 무더운 날씨 속에서 우리 안아주심의 본당에 나오신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 이 시간, 이 예배가 하나님의 보호막이 되시길 간절히 원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장 안전한 하나님의 보호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하신, 때로 우리가 넘어진다 할지라도 다치지 않는 장치, 우리 하나님의 그 보호막이 필요한 것이다. 오늘 이 말씀 가운데 11절 말씀을 같이 한 번 더 보겠다.
 
*예레미야 20:11,
11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하지 못하므로 큰 치욕을 당하오리니 그 치욕은 길이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오늘 이 말씀 가운데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다. 라고 예레미야가 믿음으로 고백했다. 그렇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힘들 때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용감무쌍한 용사처럼 예레미야 곁에 서 게셨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위협과 암살, 음모들에서 그가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보하심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예레미야가 원망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그를 보호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전에도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항상 예레미야를 지키시고 보호해 주셨다. 그래서 선지자를 어렵게 했던 사람들을 힘을 쓰지 못하게 하시고, 모두 무너지게 하는 그들이 예레미야를 무너뜨리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마치 두려운 용사처럼 지켜주셨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를 보호하기 위해 쳐놓으신 보호막을 순간적으로 보지 못하였다.
 
지난 주간에 많은 비가 내렸다. 전국적으로도 많은 피해가 있는 것을 우리가 뉴스를 통해서 보았다. 저는 제자 반 단기 선교로 중국 연변을 지난주에 다녀오게 되었다. 가기 전에 일기 예보를 보니까, 저희가 4박 5일 동안 가게 되었다. 4일 동안 계속해서 비 예보가 되어 있었다. 한 번 여러분에게 묻겠다. “선교지에서 우산을 사용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 우산을 사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비옷을 준비해갔는데요. 포장도 뜯지 않고 그대로 가져왔다. 물론 비는 내렸다. 그런데 목적지에 도착하면 비가 안 내리고 버스에 올라타면 어떻게 비가 또 쏟아지고 그러한 일들을 경험을 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단선을 떠나기 전 토비새가 기억이 났다. 토비새에서 그 중에 우리 우크라이나에서 온 우리 소녀 합창단 공연이 있었던 토비새가 저희가 단선을 떠나기 전 마지막 토비새였다.
 
담임 목사님과 함께 우리 기도의 지팡이를 높이 들고 우크라이나와 북한을 위해서 중보 기도 했던 그 시간이 기억이 났다. 선교지에 가서 선교사님의 그 사역의 모습들을 보면서 고군분투 하시는 정말 그 어려운 현장 가운데서 최선을 다해서 목숨을 열어놓고 사역하시는 그 현장들을 볼 수 있었다. 그동안 우리 사랑의 교회가 오랫동안 연변 과기대 UST(유스트) 사역을 위해서 우리가 많이 애를 썼는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 사역들이 중단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동안 우리가 기도하고 뿌려놓았던 그 씨앗들이 하나도 되지 않고 오히려 평양 과기대, 그 사역에 그 연변 과기대, 출신 졸업생들이 교수 요원으로 또 많이 들어가서 그 사역이 아름답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그 현장의 소식들을 듣게 되었다. 그 사실을 들으면서 우리의 마음들이 참 뜨거워졌고, 우리 담임 목사님과 함께 기도하는 것처럼, 평양에서 특새하는 그날이 속히 올 수 있겠구나! 라는 믿음의 확신을 가지는 귀한 시간이 되었다. 참 비가 억수가지 쏟아질 때에, 우리가 우산을 준비하지 않아서, 담벼락 처마 밑에서 겨우 몸만 가리고 비를 피하고 있을 때에, 누군가가 와서 우산을 내밀어준다고 생각해 보자. 그런데 그 우산은 크고 멋진 두 사람을 다 커버할 수 있는 우산이 아니라 작은 우산이다. 혼자 쓰기에도 부족한 작은 우산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함께 그 우산을 쓰고 폭우를 지나갈 때에, 그 포구를 지나갈 때에 겨우 머리만 그 속에 넣고 비를 피한 그 사람의 마음, 두 사람이 다 옷이 다 젖을 수 있는 그 상황이었지만, 그러나 우산을 내밀어주었던 그 우산 속에 들어가서 함께 비를 피하고 있는 그 사람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로와 기쁨의 귀한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인생의 복구 가운데 몸을 웅크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못하는 그 많은 분들을 위해서 우리가 작은 기도의 우산에 펼칠 수 있고, 우리의 우리가 붙잡은 그 기도의 지팡이를 내밀어주실 수 있기를 원한다. 우리가 원래 온 교회가 기도의 지팡이를 높이 들면서 얼마나 많은 큰 은혜를 받았는지 모른다. 저도 교구에서 한 집사님이 기도 지팡이를 요청해서 급하게 기도 지팡이를 가지고 그 집사님에게 전달을 해 주었다. 근데 그 지팡이를 받자마자 그 여 집사님이 너무나 깜짝 놀라시는 것이다. “목사님, 어떻게 제 차량 번호를 알고 계셨습니까?” “예 제가 제 사무실에 있는 것 중에 하나를 골라서 가지고 갔던 그 지팡이 번호가 그 집사님의 차량번호였다. 오늘도 보니까 그 집사님이 와 계셨다. 오셔서 5시에 오셔가지고 제가 5시에 교회 도착을 했는데 오셔서 중보 기도실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 집사님은 개인적으로 또 가정에서 많은 기도의 제목이 있었는데, 오히려 그 시간을 통해서 많이 힘을 얻고 또 원래 제자 훈련도 하시고, 얼마 전에도 단기 선교도 다녀오시고, 오늘 중보 기도도 하시는 그 우연히 전달되었던 차량 번호와 똑같은 그 지팡이를 받아들고,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하신다는 그 확신을 가지시는 그 모습을 보았다.
 
다시 하나님의 보호막을 보게 되었던 예례미야 선지자는 마음에 자신감이 생겼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이 하시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보호막을 경험하실 수 있기를 원한다.
 
I.첫 번째로 하나님의 그 보호막 안에는 탄식하면서도 사명을 감당하는 자리입니다.
-한번 같이 한번 볼까요? “탄식하면서도 사명을 감당하는 자리입니다” 사람들이 거부하고 거절할지라도 예레미야 선지자는 주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러나 선지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비난과 조롱이었다. 예례미야는 자신이 수치를 당하는 이유를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가 탄식했던 것처럼 예레미야의 수치는 하나님의 수치였고, 그가 당하는 조롱이 하나님을 향한 조롱이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처럼 예레미야의 삶은 하나님과 연결되어진 삶이었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의 삶도 하나님의 보호막 아래에서 하나님과 연결된 삶이되시기를 바란다. 우리 자신의 죄와 연약함으로 피난을 당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으로 인해 수치와 비난을 당하는 사람도 있다. 만약에 내 죄와 연약함으로 인해 당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슬퍼하며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주님으로 인해서 당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으로 인해 받는 그 핍박에는 복이 있다. 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들에게 하늘의 상이 크다. 라고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다. 마태복음 5장 11절, 12절 말씀 우리 같이 한번 읽겠다.
 
*마태복음 5:11-12절,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중간에 기뻐하고 어떻게 해요? 즐거워하라. 그리고 오늘 본문의 9절 말씀도 같이 한번 보겠다.
 
*예레미야 20:9,
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아멘. 예레미야 선지자는 고통으로 인해서 다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으려고 했다. 연약한 인간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사명이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예레미야의 선지자의 그 내면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괴로워서 견딜 수 없음을 고백하면서 어떻게 표현했는가? 나의 마음이 마치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고 답답해서 견딜 수 없다. 라고 고백했다. 오늘 이 고백이 우리 성도님들의 믿음의 고백이 되실 수 있기를 원한다. 답답하다는 이 표현이 히브리어로는 ‘라라’는 단어이다. 이 뜻은 ‘지치다’는 의미로서 그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도 이와 같이 탄식하면서 사명을 감당하시는 우리 많은 성도님들이 계신다. 때로는, 그만하고 싶고 때로는 세상의 방식대로 살고 싶지만, 그러나 우리 속에서 꿈틀거리는 복음에 대한 열정과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가 세워지는 것에 대한 강력한 소망의 이 시가 우리 모두에게 있는 줄로 믿는다. 저에게도 항상 복음에 대한 열정을 일깨우는 말씀이 있다. 우리 아마 성도님들 중에 90% 이상이 좋아하시는 말씀일 것이다.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이다. 암송할 수 있으시지만 자막을 띄웠다. 같이 읽겠다.
 
*요한복음 3장 16절,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이 말씀은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지금으로부터 한 45년 전의 스토리이다. 그때 암송했던 말씀이다. 한 줄 말씀이 뭐가 대단하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한 절이 아니라 요한복음 3장 전체를 암송했다. 예 조금만 놀라주셔서 감사하다. 그래서 제가 시골 교회 이 암송 대표로 노회에 열리는 그 대회에 참여하게 됐다. 하도 작은 시골교회였기 때문에 암 속에 나가겠다는 지원자가 저 혼자밖에 없었다. 그래서 제가 교회 대표로 출전을 하게 되었고. 저는 이제 경남 마산이라는 곳인데 그때 이제 경남도 노회에서 그때 모인 그곳에는
한 100여 개 교회에서 하는 대표 주자들이 나와 있던 그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제가 시상을 했을까? 못 했을까요? 예 했기 때문에 오늘 제가 이 얘기를 하겠죠? 예 2등을 했다. 1등을 해야 박수를 받을 수 있는데, 요한복음 3장은 참고로 36절까지 있다. 근데 제가 중간에 암송을 하면서 좀 바뀔 때도 있고 두려움이 있었는데 3장 16절에서 너무 힘을 받아버린 거예요. 이 말씀을 우리가 잘 하는 말씀이에요. 그래서 36절까지 끝까지 완주를 할 수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제가 이 말씀 때문에 오늘의 제가 있게 되었고, 이 말씀을 암송했던 그 시간들이 정말 하나님께서 제가 힘들 때마다 붙잡아주셨던 그 말씀의 은혜가 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을 해보게 된다. 저를 살릴 뿐 아니라 또한 저희 가정을 붙잡아주시고 살려주셨던 귀한 말씀이 되었다.
 
저희 둘째 아들이 이제 있다. 둘째 아들이 유치원을 다닐 때, 제가 이제 사랑의 교회에 오게 되었다. 사랑의 교회 참 오래 있었다. 그애가 이제 유치원에 다닐 때 집에서 이렇게 게임을 하면서 게임 아이템에다가 제가 그 당시 했던 사역이 이제 호스피스 사역이었다. 그 게임에다가 유치원 다니는 둘째 꼬마가 호스피스 사역 그 이름을 정해놓고 게임을 하는 그 아들이었다. 그래서 그 아들이 저는 나중에 목회를 했으면 좋겠다는 그 기도를 하기 시작했고, 우리 담임 목사님처럼 훌륭한 목회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는데요. 지금은 우리 담임 목사님처럼 키만 그 정도 따라갔다. 지금 185 정도 되는 싫어 우리 담임 목사님을 따라가서 앞으로 영성만 따라가면 되는데요. 그래도 그 고3 다닐 때 학교 친구들을 10명 정도를 새 생명 축제로 인도해 왔고, 지금은 총신 신학대학에 입학해서 오늘 제가 설교하는 이 날에 우리 단기 선교로 출발을 해서 오늘 사역 지를 향해서 떠나갔다. 참 뒤돌아보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 제가 외웠던 그 요한복음 3장의 말씀이 저를 살렸고, 힘들 때마다 제가 넘어질 때마다 그 말씀을 붙잡고 일어났던 그 기억들이 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에 보시면 우리가 그 가장 단순한 말씀이지만 한번 보시고, 우리 다시 한 번 기억하시죠 하나님 어떤 하나님이신가? 그 하나님이라는 단어 속에 가장 큰 사랑의 하나님, 그 하나님이 등장한다. 예 정확하게 나왔다. 제가 앞에 노란 부분을 읽으면 여러분이 한번 지혜 숫자를 읽어주세요. “하나님이 세상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주셨으니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 얻게 하심이라.”. 3장 16절에 가장 큰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는 제가 뒤돌아보니까 이 말씀이 저를 살리고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가장 큰 확실한 하나님의 사랑이시를 인도해 주셨던 것을 고백하게 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너희를 위해서 살아갈 때에 주님을 위해서 사실 때, 반드시 핍박도 있을 것이다. 많은 현실적인 불이익과 손해를 당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으면 하늘의 상이 크게 될 줄로 믿는다. 세상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고난과 어려움의 상황에서도 그 상황 자체로 인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줄로 믿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상황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음에 대한 실제적인 증거거든요.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에 하나님 앞에서 누리게 될 상급이 그 상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확정 시켜 주시는 보존해 주시는 것이 바로 이 땅에서 복음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 때문에, 어려움이 있는 이것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상금에 보증이 되어진다는 귀한 사실이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보호막 아래에서, 어떠한 어려움과 탄식의 상황에서도 탄식하면서도 사명의 자리를 끝까지 지켜나가시는 복된 우리 성도님들 되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II. 두 번째로 우리 하나님의 보호막 아래는 연약함 속에서도 찬하나님을 송하는 자리입니다.
-같이 한번 보겠다.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한 예레미di 선지자는 결국 그들이 대적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고 하나님임을 깨닫게 되고, 그들이 하나님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 과정에서 선지자는 자신의 내면을 다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 갚아주시기를 부탁하고, 다시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우리 13절 말씀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13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아멘.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면서도 자기 영혼의 깊은 침체를 막지 못하는 연약한 질그릇 같은 선지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예레미야의 모습은 현실의 삶 속에서 믿음의 여정을 묵묵히 걸어가시는 우리 성도님들도 동일하게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하나님만을 의지해 간구하지만 현실에서 느끼는 고통의 무게가 너무 커서 힘들어하는 예레미야처럼, 오늘 우리들이 현실에서 느끼는 고통의 무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을 통해서 순금같이 정결하게 만드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소망 가운데 끝까지 믿음의 길을 걸어가실 수 있기를 원한다.
 
저희 교회에 순장님 한 분은 27번 이상의 방사선 치료를 원래 받으셨다. 그 방사선 치료를 많이 받으면서 결국에는 식도가 허물어져서 제대로 음식물을 삼키지도 못하고 힘든 그 상황 가운데서 마지막 순장막 모임에 나오셔서 그 순장님이 이런 고백을 했다. 이렇게 연약함이 있고 불편함이 있지만 “목사님, 순장님들 제가 병원에 있는 동안 그 속에서 다른 환우들에게 소망을 전하기를, 복음을 전하기를,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의 그 사랑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순장님의 그 모습 속에서 많은 도전들을 받았다. 아픈데 도무지 빠지지 않고 긁을수록 살 속 깊이 들어가서 더 깊은 아픔을 만들어낸 그 육체의 가시, 사도 바울이 간절하게 세 번이나 하나님 앞에 기도했을 때, 하나님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우리 고린도후서 12장 9절 말씀인데요 같이 한번 보겠다.
 
*고린도후서 12:9,
9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아멘.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내 은혜가 너희에게 족하다. 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언뜻 보면 이 바울의 기도는 거절당한 기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울은 이 하나님의 응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바울이 그 연약함 속에, 육체의 가시 속에서도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은혜에 반응하면서 그 본문의 말씀 속에 도리어 크게 기뻐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바울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왜 저에게 주시지 않은 것이 이렇게 많습니까? 라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깨닫기 시작했다. 라는 것이다. 질병 때문에, 연약함 때문에 주시지 않은 것을 묵상하면서 살아갈 때가 많은 것이 얼마나 많은 우리의 모습인가?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뒤돌아보면 받은 것이 너무나 많다. 라는 것이다. 우리 성도님들이 오랫동안 기도하고 계시지만 응답이 없는 기도의 제목들이 있으신가? 이제 그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우리 교회와 연약한 지체들과 믿음의 능력자들을 위해서 축복 기도로 나아간다면 기적 같은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주실 줄로 믿는다. 때로는 이 세상이 우리를 알아봐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기도의 지팡이를 높이 들게 되실 때에 알아주심을 본당에서 우리 주님께서 베풀 만한 자비와 은혜를 허락해 주실 줄로 믿는다. 우리 다시 한 번 고린도후서 12장 9절 말씀 다시 한 번 더 이 말씀을 읽도록 하겠다.
 
*고린도후서 12:9,
9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아 저도 이렇게 단기선교를 다녀오면서 목감기가 생겨버렸다. 저에게는 참 너무 큰 과업을 앞두고 있는데, 단기 선교를 다녀온 그날 저녁부터 너무너무 심하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그런 상황이 되고 말았다. 오늘 마침 바울이 그 육체의 가시처럼 연약함에 대해서 고백한 것처럼, 참 매일 아침마다 참 간절하게 기도하면서 이렇게 나와서 준비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오늘 이만큼이라도 또 이렇게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 줄로 믿는다. 아마 저를 아시는 분들은 참 제 목소리가 참 크다. 라는 것을 많은 분들이 참 알고 있는데, 오늘 이 시간, 이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끝까지 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오히려 이 연약함의 그 은혜들을 오히려 체험하게 하시고, 또 나눌 수 있는 귀한 은혜를 허락해 주신 줄로 믿는다. 우리 인생의 어떤 고통과 연약함 속에서도 우리 인생의 보호막이 되어 주시고, 연약함을 통해서 순금같이 정결하게 만드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믿음으로 끝까지 믿음의 길을 걸어가시는 우리 귀한 성도님들 되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마지막으로
III. 우리 하나님의 보호막 안에서 찬양과 기쁨이 최종적인 언어가 되는 자리입니다.
-같이 한번 읽겠다. “찬양과 기쁨이 최종적인 언어가 되는 자리입니다.” 우리의 최종적인 언어가 뭐라고요? 찬양과 기쁨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속에서,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때는 참된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한계가 있는 이 세상이 주는 기쁨은 분명히 한계가 있는 불완전한 기쁨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무한하며,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는 줄로 믿는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살일 때에 우리 안에 무한하며 끝없는 그 기쁨이 충만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우리의 삶이 쉽지 않아서 태산을 넘어가는 것 같은 힘든 일이 있다 할지라도, 오직 우리 주님 안에서 빛 가운데 걸어가심으로 우리 성도님들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바란다.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의 기도를 통해서 신실한 자들의 기도는 궁극적으로 탄식에서 찬양으로, 두려움에서 기쁨으로 바뀌게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탄식이나 두려움이 자동적으로 찬양이나 기쁨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가르침은 항상
찬양과 기쁨이 우리 성도님들의 최종적인 언어가 된다. 라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가? 왜 비탄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 이 기도의 지팡이를 높이 들고 기도자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님들의 마지막 그 최종적인 은혜가 될 수 있는가? 바로 신실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개입하시고, 간섭하시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 10절까지 보면 많은 탄식이 있다. 그러나 오늘 예레미아 선지자는 11절에서 하나님께 대한 확실한 신뢰를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도움을 간청하면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고 반드시 도와주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13절에 보시면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기뻐한다. 오늘 12절, 13절 말씀 같이 한번 보겠다.
 
*예레미야 20:12-13절,
12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심을 나에게 보게 하옵소서.
13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할렐루야 12절의 간절한 그 기도와 오늘 13절에 감사의 그 찬양 사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간섭하시고, 개입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예레미야의 그 믿음이 있다. 그 믿음의 바탕을 두고 예리미야 선지자는 아직 도래하지는 않았지만 그 도래하지 않은 구원과 도움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미리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찬양을 올려드린 것이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의 어떠한 삶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간섭하시고, 개입하시는 분이시라는 이 예레미야의 믿음이 오늘 이 수요 예배, 수요 기도에 나오셔서 하나님 앞에 온전히 집중하시고 하나님의 보호막 안에 나아가기 원하시는 우리 성도님들의 믿음의 고백이 되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지금까지 우리의 삶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의 그 인도하심의 손길이 얼마나 귀힌가? 가장 최선의 삶으로 우리 인간이 생각할 때에 우리가 생각하는 최선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최선의 삶으로 아름답게 인도해 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좋으신 아버지께서 앞으로 우리 사랑의 교회와 우리 모든 성도님들, 어떤 삶 속에서도, 어떤 삶에도,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고, 간섭하시고, 개입하시고, 인도해 주실 것을 믿는다.
 
백두산 천지에서 떨어지는 백두산의 폭포가 있다. 그런데 백두산 천지에서 오른쪽으로 떨어지는 물은 두만강을 거쳐서 동해로 흘러가고요 왼쪽으로 떨어지는 물은 무슨 강을 거쳐 가겠는가? 압록강을 거쳐서 서해로 올라간다고 한다. 똑같이 백두산 천지에서 그 폭포에서 오른쪽으로 가느냐? 왼쪽으로 가느냐? 에 따라서 한 줄기의 물은 동해로 올라가고, 한 줄기의 물은 서해로, 이 동해와 서해가 얼마나 먼 거리니까 그런데 그 발원지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출발하는 지점이 같고 한 방향인 것 같지만, 나중에는 엄청난 간격이 생기게 된 것이다. 오늘 우리가 동일하게 우리의 출발이 불평과 원망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찬양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의 어떤 삶 속에서도, 오늘 이 예레미야 선지자가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고백하면서, 간섭하시고, 개입하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들을 바라보면서, 정말 믿음의 방향 전화를 이루었던 예레미야의 그 선택이 오늘 우리 성도님들의 믿음의 선택이 되실 수 있기를 원한다.
 
예 갑자기 목소리가 많이 좋아졌다. 불평과 원망이 아니라, 기쁨과 찬양을 선택하는, 믿음의 방향 전환을 이루시는 우리 귀한 성도님들 되실 수 있기를 원한다. 오늘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마지막, 우리 하나님 앞에서 최종 언어가 기쁨과 찬양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란다. 연약한 우리 인생의 보호막 되시는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을 기뻐하고 자랑하는 우리 성도님들의 삶이되시길 원한다. 인생의 어떤 어려움 속에서라도 우리 인생의 보호막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 성도님들의 어려움에 간섭하시고 개입해 주시는 분이심을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인생 속에서 영원히 함께 동행 해 주시고, 보호막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쁨과 찬양의 그 최종 원으로서 사명을 뭉치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요약
우리 인생에 주님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보호막이 되어 주시고, 간섭하시고, 개입하셔서, 우리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귀한 시간으로 역사해 주실 것을 믿고, 기쁨과 찬양이 되어서, 우리들의 최종 언어가 되심으로 연약한 우리 인생의 보호막 되시는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을 기뻐하고 자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보호막 아래 예비하신 은혜를 사모하여 끝까지 변함없이 기도의 자리를 신실하게 지켜 나아가야 한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 선포를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고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그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불이므로 그 말씀을 들은 자는 전하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전하고 외치는 것이 자신의 해야 할 사명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박해와 조롱을 받는 자신의 처지를 견딜 수 없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탄원한다.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고 했다. 이 말은 흠 없는 예레미야에게 조그마한 흠이라도 발견되면 고소하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레미야가 당시에 복음을 전하기가 힘들고 어려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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