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3월 16일) 제목: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 없이" 말씀: 이사야 1:1 찬양: 쉐키나 찬양대 설교자: 유이삭 부목사님 ----------------------------------------------- *아사야 1:1 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오늘 3월 16일이다. 새해가 시작한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3월 중순이 넘어가고 있다. 새해 첫날 결심들을 많이 했을 것인데 그 변함없이 여전히 다 실천하면서 살고 있는가? 그런 분들도 계시겠지만 내가 새해 무엇을 하기로 계획을 세웠지? 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또 어떤 분들은 계획도 안하고 새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새해 결심은 안하더라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을 하고 그분을 나의 왕좌에 모시고 주님으로 인정을 하게 되는 순간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영적 본능이 생기게 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예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하는 인생이 되고 싶다는 그런 본능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어릴 적 초등학교 때에 선생님이 심부름을 시키면 좋아했던 것과 같다고 본다. 기억이 나실 것이다. 반에서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렀을 때, 심부름을 시키시면 위풍당당한 발걸음으로 어깨에 뽕이 들어가면서 벌떡 일어나서 뚜벅뚜벅 걸어 나갔던, 쿵쿵하면서 걸어 나갔던 경험이 있는가? 초등학교 때에 그 당시에 덩치가 커서 사뿐히 걸어도 쿵쿵쿵 소리가 났다. 한국에 와서 다시 살면서 층간소음이 참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 당시 기억하기로는 바닥에 왁스를 발라서 상당히 미끄러웠다. 친구들은 코너를 돌면 다 미끄러지는데 저는 미끄러졌던 기억이 안 난다. 우선 무거웠다. 실내화가 고무인데 면적이 꽤 되다보니 그렇다.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하면 꼴찌였는데, 실내에서는 제가 스피드가 가장 빨랐던 것 같다. 어찌 됐던 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심부름을 하게 될 때, 그런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런 것처럼 예수님께 쓰임 받는 인생이 되고 싶은 이렇게 쩌벅쩌벅 위풍당당하게 걸어 나가고 싶은 그런 마음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마 다 그런 마음이 있을 것이다. 교회 용어로 이걸 말하자면 한 번 뿐인 인생 속히 지나가리라.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한 그런 일만이 영원하리라.’는 표현으로 대변할 수 있겠다. 그런데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의 일을 섬기는 일이 한 결 같이 즐겁고 기쁘고 항상 설레고 지치고 감격스러웠는가? 지금 제자훈련이 사역 훈련을 받는 분들은 한 달 정도이지만 훈련 받으시는 분들은 아마 ‘아 나는 그렇다’고 답할 확률이 높기도 하겠다. 저도 20년 전쯤에 남가주 사랑의교회에서 제자훈련을 받고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다. 외국에서 다른 타주에서, 미국의 땅이 크니 다른 주에서 목사님들이 미주 칼 세미나를 참관을 하시려고 오셨다. 그 당시 제가 집사로서 자가용을 가지고 가서 공항에 픽업도 나가고 여기 저기 롸이드를 하면서 봉사를 했다. 목사님들이 공식적으로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식도 하지만 성도들에게 궁금한 것이 많다. 질문하셔서 제가 고백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여러 가지 물으시는데 이렇게 대답을 했다. ‘주일 저녁이 되면 ’다음 주일까지 제가 무얼 할지,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걱정이 된다.‘고 그런 말을 했다. 그 당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작은 한 모퉁이에서 섬겼던 기쁨이 충만했었는데 이런 섬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아마도 이 수요예배에 참여하신 분들도 그런 많은 경험들이 있으실 것이라 여긴다. 문제는 이 기쁨과 감격과 감사가 한 결 같이 끝까지 변함없이 지속이 되어야 하는데, 머리로는 되는데 감정적으로 안 될 때가 많이 있다. 지난주에 담임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는 아홉시에 부름 받은 자처럼 열심히 몸과 물질로 봉사하고 헌신하고 최선을 섬겼는데 어느 날 듣도 보도 못한 어떤 새 신자가 오후 3시쯤 교회에 들어온 것이다. 초고속으로 훈련을 받고 주일학교 교사가 되고 찬양대에도 섬기고 순장도 되고 여기저기서 부서에서 눈에 띄게 섬기게 된다. 심지어 어느 날 보니 목사님들이 다 그분을 가리켜서 대단한 순장님이라고 칭찬까지 하신다. 그러면 옆에서 진심으로 박수를 쳐주면서 그러면서 저도 저분으로 인해 많은 감동을 받고 있다고 기뻐해주면 좋은데, 그게 아니라 마음속 한켠이 불편한 것이다. 행여나 해성 같이 나타난 저분의 아주 작은 흠집이라고 발견을 하면 그분에 대해서 기빙수를 많이 만들어 낸다. 기빙수란 기도를 빙자한 수다이다. 가십이다. 기도해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슬픈 현실이다. 왜 은혜로 시작한 신앙생활이 이렇게도 어려운 일인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씀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내 스스로 비교를 해볼 때 이전과 지금을 비교해 볼 때, 어는 순간 내가 쓰임 받는 일에 나의 자라, 나의 훈장, 나의 공로, 이런 것이 들어가기 시작하고, 교만해지고, 유혹에 빠지고, 매너리즘에 빠지고 그래서 기쁨이 아니라 의무로 일들을 감당하는 날들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이 불완전한 이 환경에 상관없이 한 결 같이 변함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주님이 맡겨주신 사역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을까? 오늘 이 시간 이사야 선지자르 주목해 보면서 함께 교훈을 받기를 원한다. 이 당시 시대 배경은 본문 1장 1절 한 절이다. 다시 한 번 읽어보자. *아사야 1:1 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이사야서가 어떤 책인지 이사야서의 표제이다. 언뜻 보면 왕들 이름만 쭈욱 나열되고 이것이 무언가 하면서 별 내용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사야 선지자를 보통 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만 갖고 있는 이미지가 있다. 강력하고 영광스런 그런 이미지가 있다. 대표적인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오늘 본문 1장 1절의 말씀을 읽게 되면 여기 언급 되는 내용이 크게 우리 마음에 와 닿지 않을 수 있다. 4명의 왕이 언급이 된다. 이 1장에서는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 첫 번째는 이사야는 왕이 바뀔 때마다 교체가 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금 대한민국 대통령이 바뀌고 인수위원회가 세워져서 새 정부를 준비하고 있다. 앞으로 새로운 정부에 관료들이 굉장히 많이 바뀌고 변동이 많을 것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쓰임 받는 대거 교체 되어진다. 심지어는 같은 정권 도중에서 사람들이 많이 바뀐다. 여러 차례 바뀐다. 그런데 이사야는 어떤 이유인지를 모르지만 남유다 왕국의 4명의 왕, 10대 웃시아왕, 11대 요담왕, 12대 아하스왕, 13대 히스기야 왕까지 계속 사역을 해나간다. 심지어는 어떤 학자들은 히스기야 왕의 아들이었던 그 바보 같았던 어리석은 왕인 나라를 망친 므낫세 왕, 그때까지 사역을 해서 길게는 60년이 넘는 세월을 하나님께 쓰임 받는 한 결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 라고 기록한다. 이사야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왕이 바뀌고 정권이 바뀌었는데 세상이 바뀌어도 한 결 같이 쓰임을 받았을까? 보통 이사야 선지자로만 알고 있는데 왕실에 여러 가지를 기록을 하는 공식 기록관이었다. 역대하를 보면, *역대하 26:22, 22 웃시야의 남은 시종 행적은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하였더라. -가록관이었다. 여기서 질문을 하나 하겠다. 유다 왕실이 항상 거룩하고 기쁘고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그런 일들만 있었겠는가? 지난주와 이번 주 다락방에서 우리가 공부한 내용만 봐도 압살롬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2년 동안 계략을 짜서 자기 형을 살해하고 또 아버지를 몰아내려고, 다윗 왕을 죽이려고 4년이 넘게 계획을 세워서 반역한 반역의 아들이다. 이런 일들이 궁중 안에서 일어난다. 왕실에서는 이 불편한 내용도 다 기록을 해서 자료로 남겨놓은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이다. 왕실의 부끄러운 일들, 수치스러운 일들, 어떨 때는 남에게 말도 못하고 무덤까지 함구(緘口)하고 가지고 가야할 일들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사람이다. 더구나 이사야는 유대의 아마샤 왕의 형제 또는 아들이라고 추정을 한다. 그러니 이사야 선지자는 평민이 아니다. 로얄티이다. 왕족에 속한 상류층이었다. ‘야’자가 붙으면 높은 왕족에 속한 상류층이었다. 히스기야, 웃시야, 이사야, ‘야홰’ 하나님이란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왕족에 속한 상류층이었다. 얼마나 왕실의 좋고 안 좋고를 다 알고 있었겠는가! 그리고 그 당시 이사야가 활동하던 이 시기가 유다 왕국은 소돔과 고모라로 표현된다. 그와 비슷한 정도의 아주 타락했던 지역이었음을 성경이 기록한다. 제 이야기가 아니다. 같은 장 1장 10절을 보면 나온다. *이사야 1:10, 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소돔의 관원수준 정도였다. 그리고 그 밑에서 통치를 받는 이 백성들은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성경이 정의한다. 이것은 기원전 BC,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지금도 이 말씀 앞에 우리도 돌아보아야 되는 그런 말씀이다. 다윗의 언약을 받은 왕국이 어쩌다가 이렇게 타락을 하였을까? 이 당시 대회적인 상황을 봐도 관련이 있다. 그 당시 글로벌한 큰 두 제국이 있었다. 애굽과 앗수르였다. 이 두 제국이 국제 정세가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멀리 떨어져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이스라엘과 남 유다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자기들이 코가 석자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애굽 이집트는 왕조가 바뀌었다. 왕조가 바뀐 것이다. 다이너스티가 바뀐 것이다.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로 넘어온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혼란스러워서 거기에 적응하느라 바빴고 앗수르라는 제국은 내분이 있어서 참 복잡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을 괴롭히지 않았다. 여력이 없었다. 그 말은 무엇이냐면 나름 남 유다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외교적으로 태평성대를 누릴 때에 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나라나 개인이나 오히려 반대로 갔다. 유다도 마찬가지였다. 참 안타깝게도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얼마나 타락했는지 소돔의 고모라의 백성이었다고 성경이 정리해버린다. 남 유다의 내부적 상황을 보면 이사야가 섬긴 4명의 왕 중에 웃시야 왕이다. 웃시야 왕은 하나님께 처음에는 칭찬을 받는 왕이었다. 나중에 점점 교만해져서 제사장들이 분향하는 일을 그것을 자신이 하고 싶어가지고 그것을 하다가 벌을 받게 된다.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것이다. 나병환자가 된다. 나라는 돌아가야 되고 왕이 나병환자가 되니까 어쩔 수 없이 아들을 세운다. 다음 아들 요담이 섭정을 하게 되는데 아버지와 아들이 공동 정치를 하는 그런 나라, 아무리 아버지와 아들이 좋은 관계라고 할지라도 두 왕을 모시는 그 나라, 과연 평탄했겠는가? 그리고 타락한 관리들은 자기 잇속을 차리느라 일반 백성들의 생명에는 관심이 없었다. 먹고 살게 해줘야 하는데, 가계도 돌아가고 직장도 있어야 하고 먹고 살게 해줘야 하는데 관심이 없다. 건강하게 생명을 유지하고 잘 살게 해주어야 하는데 관료들이 관심이 없다. 더구나 다음왕은 정말 사악한 왕이었다. 북 이스라엘 왕들처럼 우상을 섬겼고 이방우상의 풍습을 따라 자녀를 불살라 바치는 행동을 서슴지 않고 행하는 악질이었다. 눈에만 보이지 않을 뿐이지 이런 모습은 지금도 그치지 않고 전 세계에 넘쳐나고 있다. 이렇게 심각한 타락한 나라의 민낯을 이사야가 보고 있었던 것이다. 볼 것 못 볼 것 다 보았다. 그럼에도 이사야는 마음을 지켰고 감정을 지켰고 믿음을 지켰고 한 결 같이 60년을 하나님 앞에 쓰임 받고 봉사한다. 그 비밀이 오늘 본문 1절에 뒷부분에 나온다. *아사야 1:1 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계시라. 이사야는 세상 돌아가는 일을 분별하는데 자기생각 자기 판단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생각, 심정을 보았던 것이다. 우리 사랑의교회가 사랑하는 박희천 목사님으로 말하자면 추이 의존적이 아니라 계시 의존적 사색을 한 것이다. 그러니 이사야가 왕실과 나라의 치부를 목도하고 알았으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자신의 일의 사명인 60년의 세월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부름 소명자로, 보냄을 받은 사명자로서 평신도 리더로서, 한 결 같이 끝까지 주님 앞에 쓰임 받으려면 본 것과 듣는 것, 너무나 중요하다. 이사야서 66장중에서 유명한 장면이 있다. 이사야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는 6장이다. -이사야는 온 땅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모습이 얼마나 큰 지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넘쳐나는데, 그 엄청난 모습을 목도하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난 죽었다고 펜을 잡고 책에 기록하는 기록관이 아니라 나 이제 선지자로 입으로 하는 직업인데 내 입이 부정하니 나는 죽었다고 벌벌 떤다. 하나님의 얼굴을 맞대면 나는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나님이 복수의 개념이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갈꼬하니.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 그때 마치 이사야가 손을 번쩍 들고 벌떡 일어나서 영광스럽게 저벅저벅 걸어 나가면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 하고 자랑스럽게 어깨에 뽕을 제대로 넣고 쩌벅쩌벅 걸어가는 그런 이미지를 많이 들었고 또 성경을 읽었고, 설교도 많이 들었다. 저도 이때 이사야 정도는 아니었지만 목격을 한 적이 있다. 2010년이라고 기억된다. 여름에 그 당시에는 제가 어린 전도사로서 선교 부를 섬겼다. 6월에 손니치 러시아에 오랫동안 계획했던 전략회의가 있었다. 그 주간에 제 위에 계시는 분 목사님이 출장으로 가신 것이다. 외부 초청자들도 그쪽으로 가시니 이것을 안 할 수가 없어서 다 가셨다. 그래서 저 혼자 부서에 있었다. 그런데 엎친데 겹친다고 그 주일에 세계에서 선교의 거장이라고 하시는 국제 OEM을 창설 조지 보올 선교사님(총재님)이 사랑의교회에 오셔서 설교를 여섯 번이나 하신다. 주일이니 6번을 하니까 제가 뭐 사시나무처럼 떨지는 않았지만 혹시나 뭐가 잘못 되면 어떻하나 하면서 많이 두려웠다. 이분이 좀 연로하셔서 지구본 같은 풍선을 막 던지면서 선교로 동원하시는 분이시다. 어쨌든 오셨다. 설교를 하시는데 조용히 하시다가 6부에 대학부 청년부가 되니 작은 본당이지만 가득찼었다. 눈빛이 바뀌셨다. 이해는 간다. 국제선교 대표자이시고 사람은 동원하고 일꾼을 찾아야 되고 강력하게 도전을 해야되니까 본문 이 말씀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시는데 그 당시 반 이상은 젊은이들이 일어났다. 울면서 설교를 듣는 것이다. 그때 부속실도 많았는데 강력한 모습을 보았다. 우리가 다른 면에 생각을 해보면 과연 이사야가 위풍당당하게 일어나서 날 보내 주시라고 이 엄청난 임무와 소명을 위해 걸어나갔을까를 생각하며 그 다른 면은 있지 않았을까를 생각도 해본다. 혹시라도 하나님께 대답을 하면서 제가 왕실의 영광과 모든 치부를 다 보았기에 어떤 일은 저 혼자만 알고 무덤까지 들어가야 하는 것들도 보았다고 지쳤다며 다 싫고 그냥 어디 산 속에 들어가 혼자 신앙생활 하다가 주님 만나러 가고 싶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럴 수 없는 것이 나라가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니까 현장 실제를 보니까 그것을 가장 잘 아는 자가 본인인데 이사야가 순복은 하되 위풍당당하게 일어나는 모습은 아니었을 것을 생각해보게 된다. “예, 맞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맞네요!”.라고 하면서 제가 돌아와도 갈 사람이 없다고 한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심부름을 시키는데 학생이 일어나 갈 사람이 없는 것이다. 회장도 부회장도 반장도 부반장도 다 그냥 그저 그렇고 선생님 제가 봐도 갈 사람이 저 밖에 없다고 조심스럽게 한 발짝 한 발짝 사뿐 사뿐 걸어 나가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본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삶의 현장에서 지금 섬기고 있는 현장에서, 어렵고 힘든 일을 많이 보고 많이 겪어서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 자리에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 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길 바란다. 여러분이 계신 그 복잡한 자리가 “주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해야 할 자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사야가 어떻게 ‘나를 보내소서.’ 라고 순종했다고 해서 순종만 했다고 해서 항상 그 인생길이 항상 꽃길은 아니었다. 애굽과 구스가 망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래서 그는 3년 동안 벌거벗고 다녔다. 신발도 안 신고 맨발로 뛰어다녔다. 사람들로부터 오해도 많이 받았고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유대교회와 초대 교회의 전통을 우리가 조사해 보면 므낫세는 히스기야 아들인데 이 어리석은 왕이 박해로 인해서 이사야가 순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믿음 장 히브리서 11장 11절을 우리가 함께 살펴보자. *히브리서 11:37,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여기에서 톱으로 켜서 순교 당하는 사람이 해당하는 사람이 이사야이다. 잠시 왔다가는 이 세상에서 이사야처럼 수치도 당하고, 어려움도 당하고, 부끄러움도 당하지만 한 결 같이 주님 맡겨진 것을 감당하고 마지막 영광의 문으로 입성할 때, 예수님께서 서서 스데반을 맞아 주신 것처럼, 이사야를 맞아 주신 것처럼 여기 계신 모든 분들, 예배 참여한 모든 분들도 그렇게 맞아 주시리라 확신한다. 그런 믿음을 갖기를 원한다. 성경 66권에 각 책이 있는데, 각 책에 1장인 첫 장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 책 전체를 개관해 주는 내용이 담아있다. 1장에서 첫 번째 구절인 1절은 대부분의 경우 그 책을 기록한 기자의 대한 정보가 나와 있다. 대선지자 이사야를 소개하는데, 소명 장 6장이 아니라 이사야서 1:1절을 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60년 동안 4명, 5명의 왕을 거치면서 한 결 같이 왕관에 기록한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한 이사야서를 보며 우리는 우리의 삶에 어떤 적용을 해야 되는가? 한 반도에는 지난 70년 동안 전쟁이 없었다. 태평성대 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 전 세계는 이미 제 3차 세계 대전을 겪고 있다라고 많은 분들이 생각하고 있다. 영적인 세계 대전, 정치적인 세계 전쟁, 생화학적인 전쟁, 우리의 화폐, 경제, 물류,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도 그것도 일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코로나 때문에 앞당겨진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정말 앞으로 첨단 기술이 어디 어디까지 변할지는 우리도 다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 알고 있는 것이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28). 이것만은 우리가 알고 믿는다. 우리의 시선을 외부 환경과 세상 돌아가는데 두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함으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아무개, 아무개 OOO의 이름을 대입하라.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나 OOO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시라. 이 시대에 하나님이 나에게 보여주는 계시라. 신앙 일기를 쓸 수 있을 정도로 주님과의 관계에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자 되길 간절히 소원한다. 이제 정말 분별하기 어려운 시대가 다가온다. 우리의 건강, 경제, 우리가 자랑했던 부동산, 70여 년간 우리가 풍족했던 식량, 물자, 나는 영적으로 충족하다고 생각하는 착각, 나는 충족하다고 하는 것, 그 외에 모든 착각들, 이제 우리는 영적으로 분별하고 살아야 한다. 이사야는 온갖 어려움에도 한 결 같은 섬김을 감당했다. 그의 시선이 오직 하나님께로 집중될 때, 하나님의 강력한 오른손이 그를 지키신다. 이 전에 계신 모든 우리 영 가족 성도님과 참여하신 모든 성도님들, 이사야와 같이 한 결 같이 변함없는 은혜를 체험하는 평생 되길 축복한다. ♣요약 삶의 여정 가운데 어려움을 만날지라도 빛으로 만드시는 주님을 바라보면 주님은 그 이상을 만들어 주시기에, 세상을 향해 보냄 받은 소명자로 내게 맡겨주신 사명을 지혜롭게 감당하여서 내 생각, 내 감정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어떤 상황일지라도 주님과의 관계를 온전하게 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 없이 주님 앞에 순종하고 나아가 실천해야 한다. -이사야 예언의 특징은 미래에 대한 계시 혹은 이상(異像)이라는 점이다. 이상을 다른 말로는 환상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환영을 보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전달하는 독특한 수단을 가리킨다.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