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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슬픔의 식민지

이 소설의 원제목은 ‘아니말 트리스테(animal triste)’다. 독일 작가의 독일어 소설이지만 이 단어들은 독일어가 아니라 라틴어다. 나는 라틴어를 모르지만 이 두 단어가 들어 있는 오래된 관용구 하나를 알고 있다. ‘옴네 아니말 트리스테 포스트 코이툼(omne animal triste post coitum).’ 즉 ‘모든 짐승은 교미를 끝낸 후에는 슬프다.’ 혹은 더 리듬감을 살려 ‘post coitum, animal triste’라고 쓰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짐승의 보편적인 진실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짐승만의 특수한 진실이라는 듯이 ‘섹스가 끝나면 인간은 슬프다’로 번역하기도 한다. 모니카 마론이 저 관용구를 염두에 두고 제목을 정한 것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다만 이 소설이, 중년의 나이에 짧은 기간 섬광 같은 사랑을 나눈 이후(post coitum), 수십 년의 세월을 그 사랑만을 추억하며 살다 육체와 정신의 모든 부분이 슬픔에 점령당해 식민지가 돼 버린 한 여자(animal triste)의 이야기라는 것은 안다.


그녀는 제 나이를 모른다. 아마 백 살쯤 된 것 같다고 스스로 짐작할 따름이다. 40~50년을 죽은 듯이 살아왔고 모든 기억이 희미해졌다. 정확하진 않지만, 결혼을 했고 남편과 20년을 살았으며 딸 하나를 키웠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원인 모를 발작 증세를 경험했고 그날 이후로 질서정연하던 삶에 균열들이 생겨났다. 그때 그녀는 자문했다. 만일 그날의 발작으로 내가 죽었다면 나는 내 인생에서 무엇을 놓쳤다고 생각했을까 하고.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사랑밖에 없다. 그것이 대답이었고, 그 문장을 마침내 말로 꺼내 얘기하기 오래 전부터 이미 나는 그 대답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로부터 1년 뒤에 그녀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베를린 자연사박물관에서 일하던 그녀가, 여느 때처럼 거대한 공룡 브라키오사우루스의 뼈대 모형을 예배를 드리듯 쳐다보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말을 건다. “아름다운 동물이군요.” 그녀는 “마치 신탁을 받은 것처럼” 충격을 받는다. 이 남자는 내 존재의 결락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인 것 같다. “그렇죠, 아름다운 동물이죠.” 그녀가 대답한 순간 그녀의 삶에는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음악이 울려 퍼진다.

그날 이후로 두 남녀는 각자의 가족이 있었지만, 사랑에 빠진다. “나는 사랑이 안으로 침입하는 것인지 밖으로 터져나오는 것인지조차 아직 알지 못한다.” 사랑은 바이러스처럼 침입해서 나를 점령해버리는 것인가, 아니면 죄수처럼 갇혀 있다가 나라는 감옥을 뚫고 나오는 것인가. 그녀는 자신의 경우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그 남자, 프란츠(그녀는 그 남자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냥 프란츠라고 부를 뿐이다)를 만나면서 그녀의 사랑은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프란츠는 어느 날 가족에게로 되돌아간다. 그날 이후로 그녀의 삶은 멈췄다. 사십년 혹은 오십년. 그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어떠한 일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실천했다. 대신 그녀는 이런 일들을 했다. 그가 남기고 간 안경을 몇 년 동안 끼고 살아서 자신의 눈을 망가뜨리기. “그것이 그의 곁에 머물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이었다.” 혹은 마지막으로 함께 누운 침대 시트를 빨지 않고 보관해 두었다가 가끔 꺼내서 펼쳐 보기.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아름다운 내 연인의 정액 흔적”을 다시 보기 위해서.

이상의 내용은 이 소설의 첫 번째 챕터가 들려준 것들을 정리한 것이다. 1년 전 일이니 분명히 기억난다. 고작 20쪽 남짓인 이 첫 챕터를 나는 몇 번에 걸쳐 쉬어가며 읽어야 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쪽을 다 읽고 나서, 이것이야말로 내가 늘 기다리고 찾고 꿈꾸는, 바로 그런 종류의 소설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딘가에도 썼지만 ‘자신에게 전부인 하나를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나는 당해내질 못한다. 뿐인가. 이 소설에서 여자와 남자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그 해에 만난다. 여자는 동독 출신, 남자는 서독 출신이다. 두 사람의 짧은 사랑과 영원한 이별의 서사는 통일 이후 독일 사회에서 새로운 국면으로 다시 나타난 동서 갈등의 양상과 맞물려 있다. 동독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모니카 마론은 서독으로 이주한 지 1년 만에 통일을 맞았다. 그런 그녀여서 쓸 수 있었던 이야기다. 나는 우리 내면의 모든 것이 역사라는 변수에 완전히 종속돼 있다고 단언하는 난폭한 역사주의자가 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소설이 개인의 삶을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더 위대해질 가능성이 높다는 현명한 생각에는 동의한다.

한편으로는 지독한 사랑과 참혹한 애도의 서사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통일 독일의 섬세한 스케치인 이 소설을 모니카 마론은 최상의 산문 문장으로 끌고 나간다. 그녀의 문장을 읽는 일을 꿈을 꾸는 일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 꿈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한없이 눈물을 흘리다가 탈진한 상태로 깨어나서는 한 참을 더 울게 되는, 그런 꿈이다.

모니카 마론의 문장을 읽는 일을 잠드는 일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 잠은, 탈진한 상태로 깨어나서 한 참을 더 울다가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 그 슬픔이 달콤한 안도감으로 서서히 바뀌는 것을 느끼는 순간 다시 찾아오는, 그런 잠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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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독 출신 남녀의 격정적 사랑과 집착

♣'슬픈 짐승' 줄거리

현대 독일 문단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 모니카 마론이 1996년에 쓴 『슬픈 짐승』은 독일 통일 직후의 베를린을 배경으로 서독, 동독 출신의 두 남녀가 겪는 격정적인 사랑과 집착을 그린 소설이다. 옛동독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뤘던 이전 작품들과 달리 사랑과 열정이라는 모티브를 전면에 내세워 작가의 문학 세계에서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1996년 독일국가상을 수상했다.

모니카 마론은 『슬픈 짐승』에서 개인의 삶과 사회 전체에 엄청난 충격과 변화를 가져왔던 ‘독일 통일’이라는 소재와 ‘사랑’이라는 주제를 짜임새 있게 결합시킨다. 주인공 ‘나’의 회상 속에서 개인, 주변 사람들, 독일의 역사는 교묘하게 짜이고 조화를 이룬다. 한 여인의 지독한 사랑을 그린 이 작품은 ‘기이한 시대’라고 지칭되었던 구동독이 사라진 후에도 그 시대와 결별하지 못한 사람들의 욕망과 슬픔을 성숙하고 강렬한 문체로 형상화한다.

주인공 ‘나’는 어느 날 길을 걷다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고 끔찍한 혼돈을 경험한다. 죽음 직전까지 갔던 이 사건으로 ‘나’는 인생을 돌아볼 계기를 갖게 되고, ‘만일 정말로 그때 죽었다면 내가 놓쳤던 것이 무엇이었을까?’라는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해본 끝에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사랑밖에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1년쯤 뒤 우연히 ‘프란츠’를 만난 ‘나’는 그가 인생에서 놓쳐서는 안 될 사랑임을 깨닫는다.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프란츠와의 사랑에 미친 듯이 집착하기 시작한다…….

 

원제: Animal triste

저자: Monika Maron(1941~)

발표: 1996년

분야: 독일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슬픈 짐승

옮긴이: 김미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29(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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