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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쿠쇼가 쓰다

이시미네.

나는 오늘 굉장한 것을 썼다. 소설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것도 썩 괜찮은 소설이다. 처음 쓸 무렵에는 이런 굉장한 것이 될 줄은 몰랐다. 구상하게 된 계기도 하찮았다. 습기에 지쳐 창턱에 몸을 의지하고 마당을 내다보며 가려운 발가락 틈을 긁다가 말이다, 동과(冬瓜)가 열린 것을 보았다. 넓은 잎 틈으로 벌써 내 넓적다리만하게 열매가 자라 있었다.


이시미네.

우리가 군인의 신분으로 배고프고 목마른 채로 미군을 피해 구덩이에 누워 있을 때, 다른 것 말고 시원하게 얼린 동과 한 점을 씹고 싶다!라고 말했던 것을 나는 여태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렇다고는 해도 소금에 절인 반찬으로나 올라오는 동과를 보고, 나, 도쿠쇼가 소설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렇게 굉장한 것을 말이다. 최근 요양 차 마을에 머물고 있는 소설가 선생에게 이것을 보여주고 평가를 받을 생각이다. 좋은 평가를 받고 선생에게 추천을 받으면 신문에 내 이름을 싣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후련해질 것이다. 이시미네, 너나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죽어서도 죽었다고 이름 석 자 실리지 못할 신문에, 살아서 이름이 실리는 꼴을 보게 된다면 말이다.

신문에 실릴 경우 원고료라는 것도 받게 되는 모양이다. 그 돈을 받아 여름 웃옷을 마련하고 싶다. 지금 입는 것은 소매가 너무 닳아 움직일 때마다 여기저기 걸린다. 전쟁 때 눈물 나는 이야기를 팔아 돈을 벌면 벌을 받는다고 마누라 우시는 핀잔을 주었지만 책도 읽지 않는 여편네가 알 일이냐. 조만간 원고를 가지고 선생을 찾아갈 생각이다.


이시미네.

어제 쓴 것을 다시 읽어 보았다. 이런 하찮은 것을 써두고 굉장한 것을 썼다고 말했다니 부끄러워 면목이 없다. 다른 부분은 그럭저럭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나도 미처 몰랐던 기지를 발휘해 모든 것을 생기 있고 재치 있게 다듬어 소설로 말해 두었다.

그런데 그 부분만은 지금 읽고 보니 밋밋하기가 짝이 없다. 밋밋하다기보다는, 아무래도 거짓말 같다. 기가 차고 모를 일이다. 거짓말을 동원한 다른 부분은 참말 같은데, 참말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한 부분만은 거짓 같다.

이시미네, 네가 죽은 대목 말이다.

그 부분을 쓸 적에 나는 정성을 다해 네가 정말 어떻게 죽었는지를 말해 보려고 노력했는데, 희한하게도 그 대목이, 가장 거짓 같은 대목이 되고 말았다. 부끄럽다. 이런 것을 신문에 싣겠다고 생각했다니 믿을 수 없다. 남에게 보일 것이 아니다. 오늘 밤에라도 찢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시미네.

어제의 일이다. 종이 풍선을 파는 네 누이가 마침 길을 지나는 나를 흘겨보았다.

안녕이고 뭐고 인사도 없이 말이다. 심하게 흘겨보았다. 착각이 아니다. 그녀가 그 이야기를 알아낸 것이다. 나를 책망하는 것이다. 내 소설을 찾아내 구석구석 읽어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온 즉시 나는 책상 서랍을 뒤졌으나 소설을 찾지 못했다. 온 집안을 다 뒤졌는데도 찾지 못했다. 마누라 우시를 불러 그것을 어떻게 했느냐고 따져 묻자, 우시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당신이 직접 마당에서 태웠잖아요, 어제, 라고 대꾸했지만 뭔가 착각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 내게는 그 소설을 태운 기억이 없으니 말이다. 태웠더라도, 다른 종이였을 것이다. 본래의 원고는 바람에 날려서, 결국 네 누이의 손에 들어갔는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태웠다면, 그 재가 남김없이 그녀의 귀로 날려가 그 이야기를 기필코 다 속삭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시미네.

그녀가 알게 되었으니 여태 죽지 못하고 너를 그리는 너의 노모도 알게 될 것이다. 우시도 알게 될 것이고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알게 될 것이다. 나는 폐인이 될 것이다. 지금보다도 더 폐인이 될 것이다. 마을 아이들이 내게 돌을 던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억울하다.


이시미네.

죽은 척하고 있던 네가 나빴다. 이시미네, 하고 부르는 내 목소리에 제대로 대답만 했더라도 나는 너를 죽은 셈 치고 그 물을 다 마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너를 단념하고 혼자서 그 자리를 빠져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시미네, 네가 나빴다. 아니다. 조국이 잘못이었다. 전쟁이 잘못이었다. 나 도쿠쇼에게 조국이란 해변에 엎어진 조개껍데기를 물들이는 석양이고, 마누라 우시의 종아리에 밴 짠맛이고, 내 집 마당에 열리는 동과의 즙이었는데, 조국에게도 조국 자신이 그런 것이었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내가 아니다. 나는 살아남아 억울하게 되었다.

살아남아 나만 억울하게 되었다.


이시미네.

억울하게 십 년을 살고 이십 년을 살아도, 살아 있는 게 좋다.

똥밭에 굴러도 이승, 이승이고 보니 똥밭도 꽃밭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대로 이 세계라는 똥밭을 구르며 만끽할 것이다.


이시미네.

네가 그것을 심하게 원망하고 질투하여 매일 밤 이 도쿠쇼의 머리맡을 방문하는 것 아니겠냐.


황정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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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발가락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물방울'줄거리

『물방울』은 현대 오키나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메도루마 ?의 작품집이다. 메도루마는 오키나와의 비극적인 역사, 일본 본토와 미국인에 대한 오키나와인의 의식을 해박한 지식과 독특한 상상력으로 풀어내는 작가로, 일본 문단에서도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제117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인 「물방울」은 그만의 기상천외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아내 우시와 단 둘이 살아가던 도쿠쇼에게 어느날 갑자기 이상한 일이 생긴다. 그의 오른 다리가 큰 과일처럼 부풀어 오르더니 엄지발가락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그날 밤부터 도쿠쇼와 함께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했던 동료 이시미네를 비롯한 전우들의 유령이 그를 찾아와 그 물을 찾기 시작한다. 메도루마는 전쟁 후의 상처와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을 유머러스한 인물 묘사와 위트 넘치는 문체로 무겁지 않게 풀어 나간다. 색채감 풍부한 문체로 오키나와의 자연 풍광을 느낄 수 있는 「바람 소리」와 기존 소설 형식을 파괴하고 가상의 책에 대한 서평들로만 이야기를 완성시키는 기발한 단편 「오키나와 북 리뷰」를 함께 실었다.

원제:水滴

저자:目取眞俊(1960~ )

발표:1997년

분야:일본문학 한글 번역본

제목:물방울

옮긴이:유은경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92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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