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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1월 12일)

제목: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말씀: 요한복음 20:24-29
찬양인도: 쉐키나 찬양단(이다니엘 부목사님)
 
설교자: 백요셉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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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24-29,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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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아 어떻게 사랑하는 주님을 어떻게 하면 기쁘시게 할까 많은 고민했을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답을 이렇게 이야기 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그를 향한 참된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을 보면 무언가 하나 믿으려면 참 복잡한 세상을 사는 것 같다. 작은 것 하나를 믿기 위해서는 논리적 설명을 듣고 이유가 타당하고 합리적 판단이 서야 비로소 어느 정도 믿기를 시작한다. 보이는 확실한 증거와 그것이 멊다면 정황적 증거라도 다수 있어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공간을 초월하여 직접 경험이 가능한 가상현실은 점점 발달하고 메타버스를 통해 아바타를 움직여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보여주는 시대가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이다.
 
요즘 젊은 세대를 MZ세대라고 한다. 이 젊은 세대들이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그것 중 하나는 어떠한 현상에 대해 이유와 증거를 파헤쳐 확실성 신빙성이 있는 것만 믿고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면 이들은 어떤 물건을 사고자 하면 일단 온라인으로 정보를 모은다. 그리고 모아진 DB를 기반으로 가장 저렴하게 나온 사이트 리스트를 만든다. 그리고 나서 그 리스트를 하나씩 들어가서 리뷰를 보는데 아무 리뷰나 보지 않고 실제 사진이 있는 리뷰들을 본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반드시 부정적인 리뷰가 있는 것들을 참고한다고 한다. 만약에 이러한 부정적인 리뷰가 있는 사이트라면 다른 사이트를 본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 사이트가 이런 부정적인 리뷰를 지웠다라고 생각해서 그런 의심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과정들을 여러 번 거친 후에 가장 저렴하고 본인이 생각할 때, 정말 믿을 수 있는 사이트를 통해서 물건을 구매한다고 한다. 이런 과정이 과장된 것이 아니라 그냥 최소한으로 줄인 일반적인 과정이다. 그런데 이러한 특징들을 단순히 세상에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일어난다. 구체적인 성경적 진리나 교회를 믿기 위해서는 정말 복잡한 자기만의 잣대를 들이대어 이해와 납득의 과정을 거친다.. 본인이 생각할 때 믿을 수 있는 것을 골라 구입한다고 한다. 구체적인 성경을 믿기 위해서 사실 세계관이라는 것은 내가 아무리 성경을 믿고 있다고 해도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내가 경험한 것들 보고 들었던 세상의 법칙들, 기준과 사회의 정의 법 가정의 역사 사회적 맥락, 이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실제로 성경을 믿어도 매사에 순전한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 현실이다. 아무리 성경을 들고 교회를 드나들어도 그 사람이 결정적인 순간에 선택을 보면 그 사람의 진정한 핵심 가치관을 볼 수 있다. 그 성격을 보면 그 사람의 중심에 하나님이 있는가? 아니면 아직 세상의 여러 가치관으로 혼란스러워하고 있는가? 를 알 수 있다. 때로는 믿음 생활 가운데 반복적으로 쓰러지고 또 쓰러지는 상황 속에서 언제쯤 온전한 승리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가 들기도 한다.
 
오늘 본문에서 읽은 도마라는 제자는 의심이 많아서 예수님의 못 자국에 자신의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못 믿겠다고 하는 제자로 유명하다. 마치 이 세대에 의심이 많아 자신이 본 것만 믿으려고 하는 이 세상 사람들과 닮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상 이 도마에게 인생의 마지막은 믿음의 사람으로 너무나 열정적으로 주님을 위해 살다가 순교한 인생을 살았던 예수님의 제자였다. 이러한 의심 많아 보이는 성령의 사람이 어떻게 믿음의 본을 보인 주님의 온전한 제자가 되는지를 우리는 도마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살펴보기를 원한다.
 
학자들이 도마를 연구할 때, 도마에게 붙여진 의심 많은 사도라는 별명은 너무 단편적이고 소극적인 평가를 한다. 사실 정말 의심 많았던 제자라는 것보다 질문이 많았던 제자라는 것이다.
 
요즘 세상에서는 문제제기 능력을 가진 사람을 인재라고 한다. 다른 사람을 인식하지 못하는 문제를 인식하여 질문하는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스라엘 민족의 창업정신인 후추파 정신의 첫 번째 덕목이고 제자훈련, 사역훈련, 순장 반에서도 귀납적 성경 연구법의 첫 번째가 그 구절에 끊임없는 질문을 하고 있듯이 말이다. 도마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은 4복음서 중 요한복음이 유일하다. 도마의 성향을 잘 나타내고 있다.
 
요한복음 1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디론가 제자들 곁을 떠나신다는 말씀을 한다. 베드로가 그곳이 어디이시냐고 묻지만 36절에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3:36,
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는 다소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신다. 사실 제자들의 생각으로는 예수님이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디에 거쳐를 준비하신다는 것인지, 왜 당장 못 따라간다는 것인지, 왜 우리는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그직 목적지를 알게 된다는 것인지, 아마 정확성을 목숨을 거는 현대인들이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지금 들었으면 속이 터져서 질문을 했을 것 같다. 그런데 도마는 저희와 같았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을 한다.
 
*요한복음 14:4-5,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이 말은 한 마디로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 지를 알아야 우리가 따라가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이다. 이것은 분명하게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저는 도마의 질문을 묵상하며 오늘날 현대 신앙인들의 대표적인 모습이라는 생각을 했다. 정답을 알고 싶은 마음, 확실히 하고 싶은 마음, 보이는 길이어야 발걸음을 떼고 검증된 길이어야 가고자 하는 태도이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가 오늘의 본문인 요한복음 20:24-25절에서 나오는데,,,
 
*요한복음 20:24-25,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부활이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찾아오셨을 때, 도마는 그 현장에 있지 않았다. 많은 제자들을 통해서 소식을 들었을 뿐이기에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이 아니고 들은 것만으로는 이 사실을 믿지 못 하겠다 라고 이야기 한 것이다. 도마가 결국에는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았는지 성경에는 기록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29절에 보면,
 
*요한복음 20:29,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
-이 말씀이 지금까지 믿음에 대해 우리들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남기게 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도마의 반응인데, 도마는 28에 이렇게 고백한다.
 
 
*요한복음 20:28,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는 의심 많고 질문 많은 성정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마침내 진정한 해답을 얻게 된 것이다. 소원하고 바라기는 도마를 통해 단순히 의심하며 궁금해하는 신앙인의 모습으로 머뭇거리는 것이 아니라 그이 고백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는 저와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소원한다. 이 고백이 있기까지 믿음의 원리를 3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려고 한다.
 
I. 도마의 믿음의 고백의 비밀은 진정한 진리는 오직 예수님 안에만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쉬운 것 같지만 참 어렵다. 그 이유는 출애굽기를 보면 잘 설명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 노예생활을 마치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앞세워 그들을 출애굽 시키신다. 출애굽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잘 모르는 그분의 백성들을 위해 엄청난 기적과 권능을 일으키시고 홍해를 가르게 하시며 마른 땅인 홍해 바다를 건너게 하신다. 또 매일 같이 만나를 먹이시고 저녁에는 메추라기 고기를 먹이시며 물이 없으면 반석(磐石)에서 물이 나게 하셨다. 그런데 출애굽기 32장에 보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를 불러 장시간 모세와 대면하고 십계명과 율법들을 주시는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을 중심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경배했다. 백성들이 그들의 리더 모세가 사라졌으니 하나님의 현존을 만들어내라고 들고 일어난 것이다. 출애굽기 32장 4절에 보면,
 
*출애굽기 32:4,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정말 놀랍게도 그들이 그토록 찾은 것은 다른 우상 신이 아니라, 그들을 여기까지 이끄신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모세가 사라지고 하나님이 임재를 느끼지 못하자 하나님을 그토록 갈망하여 우상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만든 우상 앞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그 곁에서 먹고 마시며 뛰 놀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시다시피 이에 크게 진노하셨고 부패한 백성들이라고 말씀하시며 떠나시려고 하셨다. 이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지만 그 어떤 방법에서도 온전히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죄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하나님을 갈망하고 그의 임재를 그토록 원하지만 본성인 죄인인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을 제대로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수많은 신화들과 우상 종교들 그리고 신을 찾고자 했던 철학의 역사를 보면 인간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열망하고 갈망하고 경배하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이 한 번도 꺼진 적이 없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인간이 찾은 하나님은 모두 왜곡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찾고 경배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밖에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하나님을 바로 찾고 만나고 따라갈 수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며 보혜사 성령님을 주셨는데 그분이 하시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밝히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알게 하고 그를 아는 지식과 지혜로 인도하신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리는 그 어떠한 생명의 진리와 마주칠 수 없기 때문이다. 아까 말했듯이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지금은 너희가 가는 길을 알 수 없다는 말씀에 도마가 물어본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정확히 알려달라고 한다. 그리고 도마의 말씀을 들은 예수님은 성경에서 말씀한 가장 위대한 진리를 공개하신다.
 
*요한복음 14:6,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도마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저울에 달아보았지만 예수님께서는 도마에게 또 도마같이 살아가는 이 시대의 우리들에게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며 구원의 길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수많은 세상의 학문들과 가르침 속에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며 생명의 지식인 것을 다시 한 번 마음에 확증하는 우리가 되길 소원한다.
 
II. 도마의 믿음의 고백의 비밀은 고난의 삶 가운데 주님은 날마다 허락하시는 새로운 권능을 보아야 한다.

-요한복음 11장에 도마의 다른 행적을 볼 수 있다.

*요한복음 11:16,
16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요한복음 11장은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 어느 날 나사로의 누이들이 찾아와 나사로의 병이 위급해졌다는 상황을 이야기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사로에게 바로 달려와 도와준 것이 아니라 이 병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수수께끼와 같은 말씀을 하시고 고치시는 것을 미루신다. 그런데 한참 후에 길을 가시던 예수님이 갑자기 대답하시며 나사로가 잠들었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때 제자들이 이해를 못하자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라고 사실을 알리신다. 이때 뜬금없이 도마가 말한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한다.
 
도마의 표현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가? 학자들은 두 가지로 이 해석을 한다.
첫째로는 당시 유대 상황 속에서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위험한 상황 속에 있었지만, 나사로가 죽었다, 주님이 사랑하신 제자, 우리들의 귀한 친구가 죽었다 라면 그의 죽음을 방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함께 가서 죽자. 라는 의미였다는 것이다. 또 다른
두 번째로의 해석은 예수님께서 서두르지 않으시고 나사로를 방치하시는 것에 대해 실망감, 빈정 섞인 대답이라는 주장이 있다. 우리는 도마의 이 표현이 청년 같은 용기의 표현이었지 낙심 가운데 자조의 표현이었는지 우리는 확실하게 알지는 못한다. 그런데 전자의 긍정적 용기의 표현이든, 후자의 실망스런 표현이든 도마는 상황을 바라보며 확실하게 하고 싶었을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고 들리는 상황을 통해 극적인 감정적 기복으로 결단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나사로의 죽음의 이유가 무엇인가?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도 그를 따르는 백성들에게 다양한 고난과 어려움의 자리로 인도해 주었던 이유는 단 하나이다. 백성들이 아직 다 모르고 있는 주님께서 많이 행하실 수 있는 권능을 드러내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앞에는 홍해, 뒤에는 적군으로 사방을 막으신 후 홍해를 가르시는 기적을 행하셨다. 또한 친히 구름 기둥을 통해 그의 백성들을 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셔서 고난을 겪게 하신 후 반석에서 물을 내는 권능을 보이셨다.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강한 상대와의 전쟁으로 그의 백성으로 몰아넣으신 후에는 오직 주님께 순종함으로 승리하게 하셔서 하나님 한 분만이 온 세상의 주권자이심을 드러내셨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당장 고치실 수 있으셨지만 조금의 기다림을 허락하셔서 어쩌면 그 시간들 속에서 감당할 수 없는 슬픔, 좌절, 낙심의 시간을 주신 이유는 그의 놀라운 권능을 드러내시기 위함이셨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잘 믿고 잘 따라가고 있으니 늘 좋은 말로 그렇게 말씀하시고 교훈하시면 좋은데 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고난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알려주시는가? 우리는 그분의 섭리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성경 스토리를 본 그 이유는 아직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의 창조주이자 주권자이신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마냥 좋으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떠한 능력의 주님이신지를 알 기회가 없고 오히려 죄 가운데 유혹받고 영적으로 어두워진 죄 성을 지닌 우리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어려움, 고난, 환난, 장애물, 아픔, 슬픔, 결핍 가운데 그것을 해결하시고 그 일에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새벽에 내린 만나를 먹고도 그날 오후 반석에서 물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은 몰라서 원망했고 열 가지 재앙을 통해 기적을 보고도 홍해를 가르시는 주님을 몰라 독설을 내 뱉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수님과 함께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경험하며 오병이어와 같은 온갖 기적을 다 보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실 것이라는 것을 꿈도 꾸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은가? 마치 치유하시는 주님을 믿고 병든 가족을 위해 전심으로 간절히 기도하는데 정말 주님께서 나를 먹이시며 돈과 물질을 책임지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여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의심하고 불안 속에 일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혹은 일터에서 왕 되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신뢰하지만 집에 와서 배우자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은 주님도 해결하지 못하신다 라고 생각하고 기도도 하지 않고 포기해 버리고 낙망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아침에 주신 은혜에 감사하다가도 오후에 다른 고난을 낙심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도마는 본인이 경험한 예수님에 대해 단편적으로만 알았다. 그래서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에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으심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이 저녁에 주님이 사랑하시는 우리를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능력의 제한이 없으신 그 하나님을 온전히 믿으시길 소망한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권능에 풍성함고 그 광대함 범위와 세심함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으심을 믿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결핍과 고난과 어려움과 방해물들을 주님께서 자신의 권능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심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소망 가운데 감사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래서 성도님께 도전하기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열심히 믿는데도 어떤 어려움을 만난다면 새로운 권능으로 임하실 주님을 기대하고 기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III. 도마의 위대한 믿음의 고백의 비밀은 예수님의 몸 되신 교회를 사랑하고 모이기에 힘써야 한다.
 
*요한복음 20:24,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한 이유는 요한복음 20:24절에 나와 있다. 도마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첫 번째 찾아오신 현장에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아니했다. 교회는 예수님이 피 값으로 주신 자녀들의 공동체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머리되시고 우리는 그의 몸이며 예수님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이 교회인 것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교회 전반적인 모습을 생각해보면 코로나가 시작된 이후 교회의 모임을 꺼려한다. 그런데 교회는 믿는 자들의 모임의 본질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도마는 그 모임에 없었기 때문에 부활의 첫 번째 소식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한참 의심하고 회의 하다가 나중에 그것을 믿게 되었던 것을 보았을 때에 함께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모이는 공 예배와 성도의 교제가 중요하다. 제 말이 아닌 예수님께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과 함께 한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공 예배에 감동이 있는 이유는 주님의 임재 때문이다.
 
도마가 두 번째 찾아오신 주님을 만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게 된 이유를 생각해보면 물론 찾아오신 예수님이 직접적인 이유이겠지만 결국 그 시간에, 그 현장에, 제자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체험한 것이다. 오늘 본문 26절에 보면, 이렇게 고백한다.
 
*요한복음 20:26,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드리는 예배마다 어떤 목사님, 어떤 장로님, 어떤 성도님은 없을지라도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참석하시고 예배의 주체가 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된다. 예배의 자리에서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 예배는 성도의 의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배는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성도의 가장 큰 특권이다. 중요한 것은 논리적인 설득으로 도마의 의심의 문제가 해결 된 것은 아니다. 사람이 지적으로 아무리 잘 설명을 해준다 해도 인간의 회의는 풀리지 않는다. 세상 논리법칙에도 아무리 타당한 이유로 설득력 있게 참을 주장한다하여도 모든 사람이 설득되지 않는다는 문장이 있다. 도마가 부활을 믿게 된 것은 그의 논리나 지성으로 이해가 갔기 때문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현존하시는 자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자 의심이 눈녹듯 사라진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야 하며 예배의 자리에 있어야 하나님의 살아계신 임재와 믿음을 체험할 수 있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때로는 교회의 모임과 예배에 대해 사탄의 공격이 심하기도 한다. 심한 낙심, 우울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도마 역시 주님이 죽으셨다 라는 이야기를 통해 말로 표현 못할 낙심에 젖어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에 에베소에서 교회에 대해 이처럼 이야기 한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에게 충만함이니라.” 이 말씀은 쉽게 이야기해서 교회는 상황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이 그분의 살아계심이 말씀으로 찬양으로 기도로 교제 가운데 충만하게 선포되고 고백되는 곳이라는 말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예배 자리에 나와야 하고 교제해야 한다. 우리는 성령충만 하다고 느낄 때는 너무나 뜨겁고 행복해서 당장이라도 부르신 선교지로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어느 날은 내 자신이 한심하고 절망스럽고 그냥 방구석에서 곤고한 마음이 들기도 하다. 그런데 교회를 가까이하고 예배와 다락방, 큐티, 성도님들과 영적인 교제를 쉬지 않을 때, 내 안에 성령님의 권능과 성취하시는 힘이 영적근력이 더해져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축구를 볼 점유율이라는 말을 쓴다. 이 말은 경기 안에서 공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를 통해 이길 수 있는 확률을 높인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영적인 싸운에서 성령님께서 점점 내 안에 점유율을 높이는 방법은 그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는 것, 교회를 사모하여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삶의 어떠한 가운데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존전에 나와 기도하고 찬양하고 부르짖을 때, 우리의 삶에 막힌 담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우리가 고백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통해 낙심은 극복될 뿐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놀라운 비전과 은혜를 체험하고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기를 역사하실 것이다. 도마가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을 고백한 이후의 삶은 어떠했을까? 요한복음 21장 2절을 보니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요한복음 21:2,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도마는 그 이후에 제자들과 항상 같이 있었다. 사도행전 1장에 나타난 제자들의 명단 속에서도 도마가 들어있었고 마가 다락방에서도 성령강림 속에 그 대열 속에서도 도마가 있었다. 도마는 부활이후에 성도의 교제와 모임 가운데 떠나지 않았고 교회의 자리에 굳게 서 있었던 것이다. 교회의 역사에 의하면 도마는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의 선교를 떠난다. 지금도 인도의 크리스천을 만나면 그들에게 복음의 빚진 두 사람의 이름을 들을 수 있는데 한 사람은 도마이고 또 한 현대 성경의 아버지 윌리암 케리이다. 도마는 인도에 도착해서 복음을 전하고 지금의 쳇낭 근처에서 전도하다가 그곳 원주민이 던진 창에 찔려 순교를 당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전례에 의하면 도마는 찔림을 당하면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주를 예배하나이다.’라고 계속해서 고백했다라고 한다. 지금도 인도 쳇낭에 가면 도마의 무덤과 그의 기념하는 도마 기념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 정면에 도마의 고백인 ‘주를 예배하나이다.’ 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고 한다. 도마는 성도의 교제 자리에, 예배의 자리에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고 평생 그 주님을 예배하며 예수를 증거 하다가 영광스럽게 주님 곁으로 가게 된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길 가운데 보이는 것만 전부라는 실의 가운데서 성도의 믿음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을 때가 많다. 아마 도마도 우리와 같은 가치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을 의심하던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분명히 보이지 않고 믿는 믿음이 더 복되다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서 11:1,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고린도후서 5:7,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진실로 믿음은 보이지는 않지만 약속의 말씀에 근거하여 신뢰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신앙의 본질이다. 그리고 이 믿음의 본질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 외에는 없다. 보이는 것만 믿은 이 시대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예수님의 임재 앞에 현존하시는 그분의 보좌 앞에 나오는 길 밖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다. 2022년 한 해 동안 예배하고 성도들의 모임과 교제를 소중히 여기며 복된 신앙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한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 인생의 모든 답이 있으며 그의 본능은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하게 하시며 광대하게 하시며 기도하고 예배하는 우리들에게 반드시 역사하실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나에게 어려움이 찾아온다면 어제는 몰랐던 새로운 주님의 본능을 기대하며 예배하는 성도가 되길 소망한다. 그래서 우리도 도마처럼 다른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믿음의 고백을 올려 드리는 새해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하고 소망한다.
 
♣요약
보이는 것, 들리는 것으로 살아가야만 된다는 세상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에게 정말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치유와 회복이 있음을 믿고 믿음으로 고백하고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소원하는 도마와 같이 평생을 주님의 이름으로 살아내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인생의 고난과 결핍, 수많은 장애물들을 믿음의 눈으로 깨닫게 하심을 알고 몸 된 교회에 나아와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며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면 모든 의심과 갈등과 고난이 사라지게 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경험해야 한다. 최고의 때에 임하시는 주님의 권능을 새롭게 체험되어서 주위에 믿음 없는 자들 앞에서 더욱 담대하여 본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배반한 제자들을 방문하여 허탈감과 고통을 느끼는 그들에게 ‘평강’을 주셨다. 즉 예수님은 제자들의 배신을 비난하거나 책망치 않으시고 새로운 약속과 사명을 맡기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 받을 것을 명하시고 속죄의 사명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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