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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워지 않는 얼룩

초등학교 6년 내내 교복을 입어야 하는 학교에 다닌 나는 유독 교복에 얽힌 에피소드가 많다.

그때는 하복도 동복도 달랑 한 벌뿐이었고 동복 상의에 부착하는 흰 깃만 두 개였다.

 5학년 여름, 담임선생님 심부름으로 몸이 아파 학교에 나오지 못한 K의 집에 병문안을 갔다.

그런데 그날 내가 점심을 먹으며 흘린 반찬 국물이 교복 상의의 왼쪽 가슴께에 묻어 있어 계속 신경이 쓰였다.

 K는 머리에 수건을 얹은 채 소파에 누워 있었고 K의 엄마가 과일을 가지고 나와 앉아 찬찬히 나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같은 동네라 부모가 뭘 하고 사는지 정도는 다 아는 사이였고 친구의 엄마는 칭찬인지 뭔지 모를 말을 했다. “키가 크구나. 그런데 교복에 뭘 묻히고 다니니 여자애가.”

K와 나는 그 후로 더 친해지지 못했고 남녀 학교로 갈라져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날 수돗가에 가 얼룩을 지워보려고 그토록 애썼지만 얼룩은 남아 있었고 K와 친해지지 못한 이유가 그 얼룩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은 인생의 얼룩에 관한 소설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에게나 지워지지 않는 인생의 얼룩 하나쯤은 있을 수 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이 소설의 제목처럼 ‘오점’(stain)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필립 로스는 80세에 가까운 할아버지이고 영미권의 평론가들이 ‘현대 미국을 충실히 기록한 거장’이라고 평가하는 작가다.

처음 읽은 그의 작품은 미국 남성 잡지 ‘플레이보이’에 연재되었던 작품들을 모은 앤솔러지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익사체’에 실린 ‘이웃집 남자’라는 단편소설이었다.

자신의 아내가 이웃집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믿는 한 위태로운 중년 남자의 이야기로 쾌활하면서도 진지했다.

그리고 2000년대 후반, 죽은 사람이 화자로 등장하여 나이듦의 상실감과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을 회고하는 ‘에브리맨’, 한국전쟁 와중에 유대인 가정 출신의 촉망받던 한 대학생의 억눌린 학교 생활과 젊은 시절의 방황과 혼란을 다룬 ‘울분’ 등이 계속 번역 출판됐다.

작가에게 문장이란 혈액이나 유전자처럼 비밀스러운 부분이다. 매력적인 문장은 작가에게 문장 하나씩 낱낱이 해체해 읽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독자들에게는 시대를 초월해 큰 감동을 준다.

필립 로스의 문장은 아름답다거나 완벽하다고 평가되지 않는다.

드라이한 설명체의 문장과 탐미적인 문장을 함께 쓰며, 문장의 길이와 어조가 다양해 독자로 하여금 활발한 지성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고 평가된다.

그만큼 그의 문장이 난해하고 복잡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과 욕망, 악과 선 사이를 속사포처럼 오가는 필립 로스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언어로 축조한 예술의 형식미란 이런 것이 아닐까 짐작하게 된다.

《휴먼 스테인》의 주인공은 고전문학을 강의하는 유태인 노교수다. 그는 어느 날 수업에 들어오지 않는 두 학생을 향해 ‘스푸크’(spook)라고 말한다.

스푸크는 ‘유령’이라는 뜻이지만 흑인을 비하하는 뜻도 담긴 단어였다.

하필이면 그 두 학생이 흑인이었고 주인공 콜먼은 이 일로 대학 내에서 인종차별주의자로 낙인찍힌다.

그는 자신에게 씌워진 오명을 벗고자 노력하지만 주위에서는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

이 소설은 주인공 콜먼이 추락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그와 관련된 인물들의 이중성, 잔인함, 고독, 복수 등을 적나라하게 비추며 미국 사회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낸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비난의 강도가 거세지는 가운데, 그는 피부는 희지만 흑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백인이었고 지금껏 유태인으로 위장해 살아왔음이 밝혀진다. 대학교수였지만 흑인의 후예임을 당당히 밝히고 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콜먼이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인종 편견에 대항할 힘이 없는 나약한 한 인간이었음이 드러나면서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전 남편에게 시달리며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온 대학 청소부 포니아라는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콜먼과 포니아가 타살인지 사고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죽기까지 그들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콜먼과 포니아의 마지막 나날들을 따라가다보면 콜먼 인생의 오점이 오히려 그를 사랑으로 이르게 하고, 비밀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움을 가지게 해주지 않았나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뿌리가 흑인임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콜먼의 오점은 과연 그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다인종 다문화의 집결지인 듯한 미국 사회에서조차도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인종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사실은 사회의 오점, 국가의 오점인지도 모른다.

《휴먼 스테인》은 결국 인간이 가장 위험한 존재이며 또 가장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묵직한 울림으로 전해주는 우리 시대의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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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숨겨온 콜먼의 비밀을 알게 되는데…

‘휴먼 스테인’ 줄거리

1998년 한 스캔들이 미국을 뒤흔든다. 빌 클린턴 대통령과 모니카 르윈스키의 섹스 스캔들.

 대통령의 거짓말과 진실, 그리고 이를 둘러싼 정쟁과 이전투구 앞에서 미국인들은 엄청난 충격과 혼란에 휩싸였다.

 이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휴먼 스테인》은 이 시기의 미국 뉴잉글랜드 시골을 무대로 미국 사회에 만연한 인종적ㆍ계급적 차별, 체면과 도덕성 이면의 위선과 편견을 가차 없이 보여준다.

유능한 교수이자 대학 행정가였던 콜먼.

강의 중 던진 한마디 때문에 그의 화려했던 경력은 순식간에 무너져버리고, 이 와중에 그의 인생 동지였던 아내마저 죽는다.

분노를 이기지 못한 콜먼은 글로 자신의 억울함과 진실을 밝혀달라며 인근에 은둔해 사는 작가 주커먼을 찾아온다.

사이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콜먼은 주커먼에게 지금까지의 삶의 궤적 그리고 자신이 포니아라는 여성과 새로운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털어놓는다.

사회적 신분과 삼십여 년의 나이차로 인해 따가운 눈총을 받던 두 사람은 결국 의심스러운 사고로 죽고, 이후 주커먼은 콜먼이 평생을 숨겨온 비밀을 알게 된다.

피부만 흰색이었을 뿐 그는 흑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흑인이었다는 것을.

 하지만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기 위해 자신의 가족과도 절연했고, 평생 아내와 자식까지 속인 채 백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과연 무엇이 총명하고 지적인 한 인간이 자신의 역사를 부인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조작하게 내몰았는가?

‘오점 없는’ 인간의 ‘오점 없는 삶’이란 어떠한 것인가? 진정 그런 삶은 가능한 것인가?

원제: The Human Stain

저자: Philip Roth(1933~ )

발표: 2000년

분야: 미국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휴먼 스테인

옮긴이: 박범수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19~020(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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