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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1년 7월 25일)
제목: ''여리고 가는 길-우리의 나그네 인생길''
말씀: 누가복음 10:25~37
기도: 오소협 부목사님
사회: 윤하중 부목사님
설교자: 전광식(전 고신대총장-독수리기독중등학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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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0:25~37,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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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식 목사님(전 고신대총장-“여리고 가는 길-우리 나그네의 인생길”)
 
-성경에는 예수님을 지칭하는 많은 용어들이 있다. 그런 많은 용어들 가운데 2천 년 전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과연 뭐라고 불렀을까? 생각해보면, 복음서에서는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 일반 제자들까지 우리 예수님을 한 결 같이 하나의 용어로 부르고 있는데, 그것은 ‘선생, 선생님’이었다. 그들의 호칭처럼 실지로 우리 예수님은 선생님이셨고, 그것도 당시의 율법 교사들이나, 오늘날의 선생들과는 격이 다른 선생님이요, 천상의 교사였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의 행동을 수식하는 많은 동사들 가운데 가장 흔히 쓰는 동사가 ‘말씀하시다, 가르치시다’와 같은 교육적 행동을 지시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해 보이면서도 우리의 지성이 도저히 미치지 못할 정도로 그 깊이는 가늠하기 어렵고 그 무게도 대단하다. 그의 교육 방식 가운데 매우 특징적인 하나가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인데, 주로 일반인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이 비유를 사용하셨다. 우리 예수님께서 얼마나 많은 비유를 사용하시는지 그이 제자로서 그를 가까이 지켜보던 마태는 이렇게 말한다.


*마태복음 13:34절에,
34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 이에 우리가 복음서에서 나오는 모든 가르침을 살펴보면, 분량으로 대략 정도가 비유로 되어있고, 그 가운데서도 오늘 본문에서 누가복음에 가장 많은 비유가 등장하고 있다. 이런 비유들은 한결같이 오며하고 심오한 뜻을 지니고 있지만 그 비유를 듣는 사람들에게 누구나 알 수 있는 소재를 사용함으로써 그들에게 더 깊은 진리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간 우리가 살펴볼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질문을 한 율법사가 익히 잘 알고 정보들을 활용하고 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는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두 번째는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이 두 가지 질문은 한 편으로는 예수님을 시험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이 질문은 온 인류를 대표하여 인류의 대 스승이신 예수님께 인류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질문을 던진 것이다.
 
영생에 관한 앞의 질문은, 구원에 관한 질문이며 종교적인 질문이다.
이웃에 대한 질문, 뒤의 질문은 우리의 삶의 방식에 대한 것으로 이는 윤리적인 질문이다.
 
그의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바로 답변을 하지 않으시고, 되물으신다. 이 되묻기는 질문자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게 하시려는 예수님의 독특한 교육방식이기도 하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율법에는 뭐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그리고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냐?’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율법사는 서슴지 않고,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사실 율법사의 답변을 보면 그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보통내기가 아닌 그런 율법사임을 알 수 있다. 신명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신명기 6:4~5절에 보면,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하나님 사랑을 말씀하셨다. 한 참 뒤인 레위기에도 나온다.
 
*레위기 19:18절에 보면,
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율법에 이렇게 흩어져 나오는 두 계명을 정말 조리 있고 잘 정리하여서 답변하고 있다. 게다가 이 율법사의 답변은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과 일치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네가 잘 알고 있으니 이제 너는 그대로 행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이제 율법사는 예수님을 더 시험할 길이 없었다. 자기도 책잡히지 않도록 답을 했지만, 예수님은 ‘네가 알았으면 그대로 행하면 된다.’라고 하시며 보다 더 정확한 답을 하시자, 그 때 율법사는 다시 ‘선생님이 말씀하신 이웃은 도대체 누굴 말하는 겁니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에 그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답변을 하시는데, 이 우리가 잘 아는 이 비유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모든 말씀을 그렇게 하시지만 비유로 빈틈없이 사용하시고, 그 사용하시기에 정확하게 분명하고 뜻이 있게 사용하시기에 이 비유에 나타나고 있는 몇 가지 등장인물과 장소를 우리가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왜 하필 장소로 여리고로 가는 길을 설정하신가?
그곳은 당시에 이 길은 악명이 높은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험로였다. 예루살렘은 해발 700미터이고 여리고는 해수면보다 400미터나 낮았다. 그곳의 편차의 낙차 편차가 무려 1KM가 넘는다. 따라서 성경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이라고 하고 있다. 이 길이가 총 27킬로 정도인데, 매우 험하고 돌이 많다.
 
히브리 전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에, 천사들에게 온 세상에 돌을 깔라고 명령을 하신다. 치마에 돌을 나르고 운반하던 천사가 이 지역 을 떨어뜨렸다고 할 정도로 이 지역은 돌이 많고 특별히 여리고로 가는 길은 돌산이요 돌길이다. 그러니까 걷기가 매우 힘들뿐 아니라 바위와 돌이 많아서 도적이 숨기가 편리했고, 종종 도적(盜賊)이 출몰(出沒)하여 사람들을 해쳤기 때문에 당시부터 ‘피의 길’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예수님께서 이 길을 말씀하신 것은 가장 위험하고 힘든 길을 예로 드신 것이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강도만난 자를 레위인과 제사장을 비유했는가?
제사장은 어떤 사람인가? -성전에서 제사 지내는 사람들이며, 예배 인이고 기독교로서는 많은 제사장을 말하면, 이것은 모든 예배 자를 의미한다.
레위인은 어떤 사람인가? -성전에서 찬양하고 가르치고 돌보는 자들이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굳이 성직자나 남자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모든 예배 자들이다. 모두를 지칭한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이런 자를 예로 들었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지금 질문한 율법사처럼 소위 제사장들, 레위인들, 율법을 잘 가르치고 지킨다고 하는 교회 직분 자들, 너희들, 실제 모습이 이렇다고 보여주는 것이다. 왜 그러면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을 사마리아인으로 설정하였을까?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너희들의 모습은 실상은 이렇지만, 너희들이 상종도 하지 않고, 심지어 개 취급을 하는 자들은 실제로 너희보다 훨씬 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선한 일을 한다는 것을 종교 지도자들과 대조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예수님의 비유에서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 되고, 이 율법사와 이 말씀을 듣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인가?
 
1. 첫 번째로 - 낯선 나그네를 돌보는 것도, 엄연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굳이 레위인과 제사장을 예로 들면서 무엇을 가르쳐 주시려고 하셨겠는가?

아마 이들은 종교인들로서 종교지도자들로서 자비를 떠들고 사랑을 외친 자들로 분명하다. 그러나 정작 삶의 현장에서는 너희들의 모습은 이 모양처럼 외식하고 위선한다는 것을 먼저 지적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더 나아가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은 율법사와 종교인들, 레위인들, 제사장들이 갖고 있는 잘못된 신앙관, 종교관이다. 이들은 분명히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는 일만 자기들의 할 일이요, 하나님의 주신 과제요, 하나님이 주신 일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우리가 일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지, 무슨 산속의 내 일터인가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성전에서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지, 이 낯선 길에서 낯선 땅에 와가지고 낯선 사람을 보고 돌보는 것이 이것이 무슨 하나님의 일이냐고 할 수 있다. 아마 제사장과 레위인 뿐만이 아니라, 이 비유를 들은 율법사, 특별히 교회 가운데 종사하고 있는 우리 모두가 지닐 수 있는 그런 생각일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먼저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은 이런 우리의 잘못된 예배 관, 하나님의 일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하나님을 한다고 하는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 계신다. 그러면서 강도를 만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런 일을 비록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나와 상관도 없는 사람이지만, 그를 도우는 것이야말로 너희 제사장과 율법사는 마땅히 해야 될 일이고, 그 일 역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가르치신다. 우리 예수님은 더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의 형식적 제사보다 인자함을 베풀 것을 더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고, 구약의 많은 본문이 일관되게 이것을 가르친다.
 
*호세아 6:6절에,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미가서 6장에도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께 나아갈까? 일 년 된 송아지를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아니다, 사람아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는 것은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냐.

- ※미국의 39대 대통령인 지미 카터가 1997년 신년사에서 이 구절을 두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이렇게 구약을 잘 보면, 구약성경 선지서 전체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는 말씀이 “너희들은 성전의 마당만 밟고 숫양과 비둘기는 왜 가져오는 것이며, 곡식이며, 재물은 왜 가져오는 것이냐 차라리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베풀라.”라고 그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면 우리 같은 복음주의 우리 성도들은 질문할 수 있다. 복음은 윤리의 차원을 벗어나는데 예배보다 윤리적인 삶이 더 중요한 것인가? 그게 아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지적하신 것은 먼저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교적인 의무감으로 형식적인 제사만 지내고 있으니, 그렇게 제사를 안 된다는 것이고, 그러면 형식적인 제사를 지내면 내가 받지 않겠다고 하신다. 더 나아가 너희가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너희의 일상의 현장에서도 말씀과 계명을 따라서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제사도 형식적으로 드리고 자기만족으로 드리고, 이런 삶은 그런 제사에서 나타난 하나님과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 너무 동떨어지게 삶을 살고 있기에 하나님께서 그런 형식적인 제사를 왜 드리느냐고 그렇게 부정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구약의 말씀을 정리를 하면, 우리에게 온전한 제사들 드리기를 원하신다. 먼저 제사를 드릴 때에, 예배를 드릴 때에 형식이나 자기만족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고 그 다음에는 삶의 제사를 일상의 현장에서 공의함과 인자함으로 드려야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온전한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깨닫는 것이 무엇인가? 예배가 중요하다. 특별히 오늘날 같은 상황에서 현장예배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현장 예배를 드릴 때에도 예배드리지만, 제사장과 레위 인처럼 삶의 현장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봐야 한다. 예배를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웃을 도우는 것도 하나의 예배이며, 그것도 우리가 마땅히 드려야 할 예배이다 .예배당에서만이 아니라 이 산속에서 강도만난 자를 도우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의 살아있는 삶의 예배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따라서 하라.
 
“우리의 모든 예배는 교회 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하고, 주일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중으로 연결 되어야 한다. 특히 삶의 현장에서 도움이 필요한 나그네를 돌보고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푸는 것이야말로 우리 하나님이 크게 기뻐하시는 하나의 예배이다. 이러한 예배자의 삶을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2. 두 번째는 -이 비유에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선을 알고도 행치 않는 것은 죄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죄만 짓지 않고 살면 된다고 한다. 어쩌면 길을 지나가던 이 제사장과 레위인은 나그네를 공격하고 습격한 강도가 나쁜 죄를 지은 것이지 내가 그에게 피해를 준 것이 없는데, 내가 잘못이 없다고 지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 세상의 일반 사람들은 양심이나 이성도 그것을 가르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칙인 신율은 우리의 인간의 이성이나 자율이나 판단보다 죄의 문제에 대해서 훨씬 더 레디컬 하고 그리고 엄격하고 과격하다.

 
*야고보서 4:17절에,
17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말하자면, 강도처럼 범행을 한 오미션 죄만이 아니라, 이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보고도 알고도 행하지 않고 지나가 버리는 누락의 죄도 엄연한 죄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의 윤리는 세상의 윤리와는 수준이 다른 것이다. 본문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누가복음 10:31절에,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이 두 사람의 행위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세 가지 동사를 유념해 보라. ‘보았다, 피했다, 지나갔다’ 이것을 우리가 정리하면, 이렇게 나올 것이다. 그들이 강도만난 자를 보자마자 얼른 피하여 빨리 지나갔더라. 이 세 가지 동사에 엉터리 종교인들은 적나라한 민낯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물론 우리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이들은 분명 바빴을 것이다. 혹 도와주었다가 자기의 일정이 뒤틀려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자기가 돈 들어야 되고 힘들여하고, 수고해야 하고, 심지어 해석학자들의 해석처럼, 그가 죽었기 때문에 시체를 만지면 부정을 타기 싫어서 외면했을 것이다.라고 해석자들은 그런 교묘한 해석처럼 부정 탈까 싶어서 피했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본문은 성경은 그들이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길거리에 강도만난 쓰러진 자를 본 것이고 긴급하게 도움이 필요한 것을 안 것이며, 성경 말씀에 이 자가 거의 반 죽게 되었다고 했기 때문에 자기 들이 돕지 않으면 이 자는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보았고, 안 것이다. 알았을 것이다. 이것은
 
정말 긴급하고 절대 절명(絶對絶命)의 위기순간(危機瞬間)이다. 이런 상황에서 천하보다 귀한 인간의 생명이라는 이런 가르침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이 그만 외면을 한 것은 사실은 종교인이기 이전에 아무것도 아니다. 신앙인이기 이전에 양심적인 사람도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어디인가? 이런 외면이 아니라, 어쩌면 이 종교인들의 근본적인 태도가 문제일 수 있다. 대게 이런 이들은 자기 외에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 그 사람이 도움이 필요한지, 그 사람이 어려움에 처에 있는지, 그 사람이 죽던 지의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 비유로부터 6장 뒤인 16장에 가면, 예수님은 또 하나의 케이스를 말씀하신다. 16장에 가면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도 있다. 부자는 떵떵거리고 호화판으로 살아가지만, 정작 자기 대문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 거지 나사로의 대해서는 일체의 관심이 없었다. 이 부자는 세상의 관심이 되겠는가? 자기 잘되는 것, 자기 인기 있는 것, 자기 잘 사는 것, 타자의 관심이 아예 없고 온통 자기 잘되고 자기 잘 나가는 것에 대한 관심만 있는 것이다. 두렵지만, 이런 삶의 태도가 우리의 자화상이 아니길 바란다. 도우지 못하는 이들과 사마리 인의 차이는 무엇인가? 첫 째는 타자에 대한 관심 있고 없고의 문제이고 두 번째는 그의 대한 긍휼의 마음, 따뜻한 마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이다.
긍휼은 하나님의 마음이고, 따뜻하고 긍휼한 것은 우리 예수님의 마음인 것이다.
 
*빌립보서 2:5절에,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지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찬양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본받은 자들이 되어야 하고 세상 사람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 어려운 일을 알면서 외면한다면 우리가 인생에서 이런 일을 우리의 지나가 세월들을 되돌아보면, 각자가 우리가 위기 때마다 우리가 쓰러지려고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권능의 팔로 붙드시고, 우리를 지금까지 이끌어주심을 알고 고백할 수 있다. 마찬가지이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하는 것은 이제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청하신다. 너희가 세상길을 가다가 강도 만난 자처럼 너희의 작은 도움이 필요하면, 그리고 너희의 사랑이 필요한 자에게 내가 너희를 살린 것처럼 너도 그들의 생명을 구하라고 하신다. 예수님 말씀 하시기를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갈수록 냉혹해지는 이 시대에 특별히 코로나로 이렇게 인간이 살벌해져가고 서로가 비하하는 이런 냉정한 시대에 이 명령에 순종하여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고 실천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따뜻하면 세상은 따뜻해지기 마련이다.
 
3. 세 번째는 이 비유는 우리가 선행을 한다고 해서 그것을 자랑하거나 칭찬을 들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율법사가 두 번째 질문을 한 이유는 29절에 나온 대로,,,

 
*누가복음 10:29절에,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질문했다라고 하고 있다. 첫 번째 질문은 예수님에게 올가미를 던지는 질문이었고, 두 번째 질문은 궁금해서가 아니라 자기 잘 난 것, 자기 의로움을 드러내보고 싶어서이다. 말하자만 앞에 질문은 고약한 질문이고, 뒤에 질문은 뻔뻔한 질문이다.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라는 것은 그가 이미 이웃 사랑을 잘 실천하고 있다 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유대인들에게 구제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였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그들은 구제를 위해서 소득의 , 가난한 자들은 을 바치게 했고, 그것만이 아니라, 구약의 많은 부분들이 곡식을 추수할 때에 가난한 자들에게 가져가라고 남기라고 했고, 과일을 딸 때에도 가난한 자들이 가져가도록 좀 그냥 두라고 했고, 심지어 장사를 하는 자들도 남으면 가게가 끝날 때에 그것을 봉지에 싸서 가게 앞에 두어서 가난한 자들이 가져가도록 남겨두었다. 구약의 말씀과 이스라엘 율법은 이렇게 서민들로 하여금 이런 구제를 하여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사람들에게 제시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종교적인 의무로 행했는데, 이들이 타락해 갈수록 점점 남이 보는 데서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데에서 했다. 따라서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특별히 맡은 이 문제를 거의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지 말고 골방에서 하라.” “너희가 금식을 할 때에 금식을 티내지 말고, 얼굴을 흉하게 하지 말고 얼굴을 씻고 하라” 하신다. 너희가 구제할 때에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폼 잡고 하지 말고 그렇게 나팔 불지 말고 하라고 하신다. 산상보훈 6장은 우리의 선행이 얼마나 사람 앞에 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질문하는 율법사는 자기가 잘 실천해 왔다고 자만했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에는 종교적인 의무에서 한 것이고 남이 보라고 한 것이 아니냐고 하신다.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데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스포트라이트 하는 데에서는 온갖 폼을 잡고 선행을 하지만은 아무도 안보는 곳에 이 깊은 산속에서 너희는 과연 어떻게 하냐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왜 산 속을 예를 들어 하시는가?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어떻게 하는지를 보시는 것이다. 아무도 안보는 곳에서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사마리아인과 비교해 보아라. 사람 보는 앞에서는 자비와 선행을 한다고 온갖 떠들지만, 아무도 안보는 산속에서 너희 모습이 이런 모습이다. 이 행위의 정말 심각한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이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람들은 사람 앞에서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고 살아온 자들이다. 우리가 말만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서 떠들지만,
 
※실제로는,,,
코람 도미니쿠스-사람 앞에서,
코람 포플리-대중 앞에서.
그렇게 살아온다. 모든 우리들은 누구나 다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다 철저하게 반성해야 한다. 실제로는 하나님 앞에서 산다고 하지만 사람 앞에서 신경 쓰고 누가 지켜보는 것에 신경 쓰고, 아예 하나님의 시선에 대해서는 신경을 끄고 사는 자들인지 모른다. 제사장과 레위 인들은 어떻게 했는가? 대제사장이 보았다든지, 왕이나 총독 같은 정치적인 최고 권력자들이 지켜봤다면, 정말 그들의 비유 맞추기 위해서 신경을 썼을 것이다.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 공직자들이 하나님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정치, 권력 눈치보고 종교권력 눈치보고 그렇게 한다면, 이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 나아가서는 이들은 만일 자신이 선행을 하고 헌신하는 것이 좀 알려진다면 하겠지만, 그런데 전혀 알려지지 않는 이 깊은 산속에서는 얼굴을 돌려버리고 외면하는 그런 냉혈한 같은 이런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정말 두려운 것은 이 믿음이 좋다고 하는 제사장 레위인 같은 이런 종교인들이 정말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것을 한 번이라도 신경을 썼을까? 두려워해야 한다.
 
故 김수영 시인 에세이처럼 이 거룩한 속물들이다.
이 거룩한 속물들 저편에 그들이 개로 부르는 사마리아인이 있다. 그런데 이 개로 불리는 이 사마리아인은 아무도 안 보는 데서 선행을 행했다. 그로서는 마땅히 행해야 될 일을 당연히 행한 것이다. 그러면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착각하는 것처럼, 그의 사마리아 선행을 아무도 안 보았는가?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군중들은 안 보았겠지만, 이 깊은 산속에서도 우리의 하나님은 보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계신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되고 그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해야 되고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올바른 태도이다. 더 나아가 우리가 선행을 행하되 가능한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일은 성경적이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 성경의 원칙에서 멀어져 있다. 그러면 드러내는 것이 죄인가? 그것은 아닐 수 있다.
 
*마태복음 16장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가 착한 행실을 하면, 다른 사람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다. 우리의 선행이 알려질 수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될 수 있다. 여기에서 동사로 사용하는 것은 너희가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가 아니라, 그들이 너희의 행실을 보고, 이다.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우리는 과시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착한 행실을 보이고가 아니라,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선행을 자기 과시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동네 떠드는 게 아니라 어쩌다보니 알려져서 우리가 했다는 것은 그것은 괜찮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괜찮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 칭찬을 들으려고 선행을 행하는 것은 이방인도 하지 않는다. 우리가 따르고 있는 칼빈의 기독교 강론으로 돌아가 보자.
 
▷칼빈,
이 땅의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칼빈은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이런 중요한 말을 하고 있다.
-사람의 칭찬을 얻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사람들과는 우리 하나님은 아무런 상관을 하지 않으신다. 그들은 이미 상을 받았고, 이들보다 창녀와 세리들이 하나님과 더 가깝다고 한다. 무서운 경고이다. 칼빈만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의 의를 드러내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신다.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고 하신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그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 네 번째- 이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이 나타난다.
이 비유는 이웃 사랑을 가르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비유를 오독한 것이다. 율법사의 두 번째 질문이 무엇이었는가? 내 이웃이 누구이냐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은 이런 자이다. 라고 설명하기 위해서 이 비유를 설명하신다. 이웃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이웃이 누굽니까?’의 질문에 대해서 네 이웃은 이런 자다라는 것이 이 비유를 읽는 가장 정확한 방식이다. 율법사는 이렇게 생각했다.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을 질문했기 때문에 자기는 이웃 사랑을 실천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볼 때에는 네가 사랑은 했는지 모르겠는데, ‘네가 이웃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어쩌면 너를 사랑한 것의 위장일 수 있다.’라고 말씀하신다. 율법사의 이웃은 누구인가? 자기와 급이 맞고 자기 수준에 놀 만한 사람들이 이웃이라고 할 것이다. 반면에 이 낯선 데서 쓰러져 있는 자기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고 이런 사람은 율법사나 레위인 제사장들이 자기 이웃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종교인들의 이웃관은 무엇인가? 자기의 의한, 자기를 위한, 자기들이 만든 자기들의 이웃인 것이다. 이웃이라는 이 개념의 중심에 자기가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뒤에서 가르치는 가르침은 무엇인가? 네 수준에 맞고 네가 마음에 들고,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너의 도움을 필요한 그 자가 바로 이웃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율법사의 이웃에 중심에는 자기가 있지만, 예수님의 이웃에 중심에는 이웃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웃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다. 우리가 주체가 아니고 객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아 중심이 아닌 타자 중심의 이웃을 예수님은 가르쳐 주신다. 율법사는 “누가 내 이웃입니까?” 예수님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고 묻는다.
이웃을 만드는 중심이 이 종교인들은 자기인데, 예수님은 너희는 이웃의 중심은 그 이웃이라는 것이다.
 
이 사마리아인을 상대중심으로 이웃이 되어주었는데, 너희들은 너희 수준에 맞게 이웃을 만들지 않느냐고 하신다. 실제로 우리 예수님을 보면 예루살렘 거리에 권력들과 어울리지 않고 과부나 고아나 어린아이나, 병자들, 소외 자들, 간음한 자들, 이런 세상의 민초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다. 성경에 나오는 사실이다. 우리는 관계에서나 구제에서도 너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다. 이웃을 사랑한다면서 우리교인 우리교파, 우리지역, 우리나라만 사랑하고 그런 게 어디 있는가? 그게 성경적 사랑인가? 이러한 경계를 깨야 하는 것이 가장 성경적이다. 내 이웃은 낯선 자들이든, 도움이 된다는 모든 경계를 넘어서 돕는 것이 사랑이다. 이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보이신다.
 
*잠언 19:17장을 보면,
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요즘 은행 이자가 안 되게 30배 60배 100배로 갚아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갚으신다. 우리가 선행을 행하면 그 보응이 자자손손에게 내려간다. 그것이 신앙의 원리이다.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이다. 너희를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하신다. 따라서 너도 가서 이같이 하라고 하신다. 우리 모든 지도자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다가가기를 축복한다.
 
 
 
♣요약
우리 모두가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참 이웃을 알아야 하고 도와야 한다. 낯선 나그네를 돌보는 것도 엄연한 하나님의 일이며, 선을 알고도 행치 않는 것은 죄이니 우리가 선행을 한다고 해서 그것을 자랑하거나 칭찬을 들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니 은밀한 중에 산 속에서 주님이 보고 계심을 믿고 선한 일을 해야 한다. 이웃 사랑을 가르친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자녀로서 사랑을 베풀기 위함이니 우리는 보이지 않는 산속에서도 어렵고 가난하고 힘든 자들을 도와야 한다. 이것이 우리 인생길에 주시는 선한 사마리아인을 닮아가는 것이다.

-예수님께 율법사는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느냐고 질문했다. 그는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생각은 교만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유대인들의 공적(功績) 신앙이 짙게 깔려 있는 질문이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비유는 영생의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졌으므로 자비를 베푸는 것은 영생과 관련된 것으로 교훈한다. 즉 강도 만난 자를 멀리하지 않고 그의 고난과 아픔에 동참하는 자비심을 보여준 사마리아 사람은 영생에 들어가게 됨과, 위선에 가득 찬 제사장과 레위인은 영벌 받게 됨을 가르치고 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의 진정한 이웃은 한 사마리아 사람, 즉 자비를 베푼 자였다.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여러 면에서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즉 제사장과 레위 인을 제치고 그들이 개처럼 여기던 사마리아 사람을 의로운 사람의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주님은 형식적 종교인들의 허위의식을 고발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비를 베푼 자가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 구원 얻을 것임을 역설하시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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