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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1년 10월 3일)

제목: ''지금과 그때"
말씀: (고린도전서 13:12~13)
기도: 이정우 부목사님

찬양인도: 이원준 부목사님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
전교우찬양: 사랑브라더스

 
설교자: 이동원 목사님(지구촌 교회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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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3:12~13,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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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예배로 영상과 좀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내용은 같은 내용임.
-영상은 2부 예배 내용임.



▶지금으로부터 1년 전 10월 9일에 미국에서 r국제 변호사 활동하고 있던 둘째 아들이 대장암 투병으로 하다가 8개월 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으로 떠났다. 그때 누군가가 저를 위해 목사님께 꼭 이 말씀을 권해 드리고 싶다고 글을 보내 왔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커다란 용량을 끼쳤던 신학자 ‘칼 마르크’는 자기의 아들을 떠나보낸 후에 묵상했던 말씀의 본문이라고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을 권해 주었다. 저는 이 말씀을 천천히 묵상하고 또 묵상하면서 저희 가족의 슬픔을 극복할 수가 있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 한 번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반드시 작별의 시간을 갖게 된다. 그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예로부터 사랑하는 부모님을 떠나보낸 우리 조상들은 그 아픔 그 고통을 천붕지통(天崩之痛-하늘이 무너지는 고통)이라고 표현을 했고, 자식들을 앞세울 때는 참척지변(慘慽地變-땅이 무너지는 고통)이라고 했다.
 
우리 사랑하는 오정현 담임 목사님이 모친상을 당한 오 목사님의 가정에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슬픔을 함께하는 사랑의 교회 모든 성도님들에게도 동일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이런 이별의 시간을 맞이하면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왜? 라는 질문이 있다. 왜 조금 더 사셔서 자식들의 사랑을 주고받을 수 없었는지, 조금 더 우리 곁에서 충분히 사랑의 대화를 주고받고 원 없이 섬김을 주고받으시다가 가실 수는 없었는지 라는 그런 질문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 중에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작별을 하고 아직도 그 고통을 소화하지 못하고 아픔으로 오늘을 견디고 있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지금 우리는 옛날 우리가 사용하던 금속 거울이나, 청동 거울을 보듯, 희미하게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하나님이 부르신 그 섭리를 바라보고 척척하고 있을 따름이다. 지금 우리는 성경이 증거하고 약속하는 우리가 믿고 있는 저 멀리 천국의 영광조차 사실은 희미하게 바라보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사랑했던 그 사람들의 치열했던 생존의 노력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묻고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올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오늘 우리 기억과 회상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묻고 있기도 하다. 지금 모든 것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기만 하다. 지금 우리가 인생의 대한 죽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조차도 아주 구분 적으로만 조금 알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의 존재가 나에게 끼쳐준 그 영향조차 그가 떠나고 비로소 부분 적으로 조금 이해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고린도 전서 13장 이 사랑 장에 본문 12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전12:12,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여기 ‘지금’과 ‘그때’라는 단어가 두 번씩 반복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Then/nuoni/now] 라는 단어가 쓰여 진다. 그때[Then/tote/]로 대조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 때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그날일 수도 있고 우리가 이 땅을 떠나 그분 앞에 서는 바로 그때일 수도 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때를 희미하게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희미하다/ainigma/riddle/수수께끼]로 쓰이고 있다. 그렇다 수수께끼처럼 인생에 대한 질문을 갖고 우리는 그 해답을 우리는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그때에 우리의 사랑하는 이들을 부르신 섭리에 대해서 그때 비로소 온전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주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매우 부분 적인 것이지만 그분은 우리에 대해서 완벽하게 알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를 온전히 알고 계신 것처럼 그때에 우리도 비로소 인생들을 이 땅에서 살게 하시고 어느 날 그분의 섭리를 따라 우리가 사랑하는 분들을 천국으로 보내주는 그 이유를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 분명하고 온전하게 알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이 땅과 저 세상의 경계선에서 서성거리며 먼저 떠나간 이들을 그리워하며 살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때까지 우리가 붙들고 살아야 할 하나님의 선물 세 가지를 우리에게 다시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다. 이 세 가지의 선물은 저의 일 년 전에 떠난 우리 둘째 아들이 자기 홈페이지에 자기 아들의 사진과 함께 놓았던 세 가지의 단어이기도 하다. Faith, Hope, Love. 어떤 이들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믿음과 소망이 필요하지만 천국에 도착하면 사랑만 필요할 뿐, 더 이상 믿음과 소망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다. 저는 그런 해석을 동의하지 않는다.

 
*고전 13:13
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이 세 가지는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의 여행길에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만나 믿음으로 그분을 구원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게 된다. 그분을 만난 그 순간부터 우리들의 인생의 여정은 믿음의 여정이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믿고 살아간다. 또한 하나님 안에서 믿음의 동역자로 허락하신 가족들을 믿고 도와가며 살아간다. 때로 인간성의 연약함 때문에 이 믿음이 흔들리기도 하지만,
한국의 한 시인의 시처럼,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며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는가? 우리의 믿음은 바람과 비에 젖으며, 믿음의 꽃을 피워가는 것이다. 저는 천국에 가서도 이 믿음은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고 믿음은 완성품이 아니고, 계속해서 자라가는 것이며 저는 천국에 가서도 우리의 믿음은 더 크게 더 아름답게 자라갈 것이라고 믿고 있다. 우리가 이 믿음을 붙들 때, 우리는 믿음 안에서 비로소 즐거워하며 이 땅과 저 세상을 바라볼 수가 있다. 무엇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머니를 떠올릴 때, 어머니가 우리에게 남기신 가장 커다란 유산은 믿음의 유산일 것이다. 나를 믿어주시는 어머니,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내게서 등을 돌릴 때도, 한 결 같이 나를 믿어주신 어머니, 그리고 믿음의 기도를 제일 먼저 가르쳐주신 믿음의 어머니,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더욱 믿음을 세워가는 인생을 살수가 있었다. 이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리자. 그리스도인은 천국의 시민이 되는 그 순간부터 또한 영원한 소망을 담고 살게 된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해보면 이 소망에 대해서 3가지 수식어가 따른다. 천국의 소망을 수식하는 세 가지이다.

첫째는 살아있는 소망(Living Hope),
둘째는 복된 소망(Blessed Hope),
셋째는 확실한 소망(Sure Hope).
-우리의 소망은 살아있는 소망이며, 복된 소망이며, 확실한 소망임을 믿기를 바란다. 그리고 믿음을 통해서 이 소망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 불완전한 세상에 살아가면서도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고 이 땅에서의 모든 환난과 치열을 이기고 살아간다. 그런데 이 소망은 천국에 도착하면 이 소망이 끝나는 소망인가? 아니다. 우리 시대의 신앙의 큰 스승이었던 영국의 옥스퍼드의 CS루이스 교수는 천국을 설명하면서 천국은 ‘우리의 거룩해지는 자가 끝없이 확장되는 것이 천국’이라고 말하고 있다. 천국에서 여전히 우리의 할 일이 있고 그 일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천국은 우리의 못다 이룬 우리의 자아의 꿈을 실현하는 곳이라고 말한다. 이 세상이 만약 삶의 전부이고 그래서 우리의 사랑하는 이의 삶이 죽음과 함께 다 끝난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언페어(Unfair), 불공평한 인생이 아니겠는가? 루이스 교수는 지옥을 설명하며 지옥이란 ‘더 이상의 끔이 없는 곳,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는 곳’이 지옥이라고 말한다.
 
저는 제 아들이 천국에서 못 다한 꿈을 이루게 될 것을 믿게 되었다. 그래서 천국은 여전히 소망의 나라이다. 우리들의 어머니는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이 소망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누구보다 믿어주시고 그 소망을 향해서 우리의 걸음마를 가르쳐주신 소망의 어머니였다. 어머님의 품이 우리의 미래였고 우리의 소망이었다. 이 소망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올리자.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 13절에서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사랑이 없는 믿음은 상상 되는가? 사랑이 없는 곳에서 믿음이 자랄 수 있을까? 이 땅의 가정에서 우리가 경험해온 모든 상처, 그 상처는 서로를 믿지 못한 때문이고, 우리가 믿지 못한 까닭은 결국은 그들의 사랑이 결핍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제 사랑이 없는 소망을 상상해 보자. 더 이상 사랑을 기다리지 못하는 곳에 무엇을 소망하고 있겠는가? 사랑이 없는 곳에 무엇이 있는가? 이 땅에서 소망을 접어버린 모든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왜 소망을 포기(抛棄)했느냐고,,,, 그들의 소망을 키워주는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로마서 5:5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그렇다 사랑이 소망을 지키는 것이다. 사랑이 소망을 키운다. 우리들의 어머니야말로 우리들에게 이 사랑을 보여주시고, 이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주신 사랑의 화신, 그리고 사랑의 성육신, 자식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희생할 수 있었던 어머니들의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말한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한다. 천국은 믿음의 나라이고, 소망의 나라이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천국은 사랑의 나라이다. 왜냐하면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 다스리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믿고 구원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아직 우리는 온전해지지 못한 상태에서 지금 여기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믿음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우리의 소망도 불완전하고 우리들의 사랑도 불완전하다. 그러나 그때에, 우리의 성화가 완성되어 천국에 들어가는 그때에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사랑을 경험하게 될 줄로 믿는다.
 
C.S루이스 교수는 그‘때에 그 나라에서는 우리가 천국 가서는 우리의 충동대로 마음껏 행동해도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참으로 흥미 있는 관찰이 아닌가? 이 땅에서는 모든 상처가 우리의 충동적인 행동 때문에 이루어진 것들이다. 천국이란 마음대로 행동해도 상처받지 않는 곳이 천국이라고 말한다. 이 땅에서는 사랑의 이름으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고받았는지 마치 고슴도치처럼 우리는 외로워서, 고독해서, 서로에게, 이웃들에게 접근했다가 서로를 찌르고 상처를 또 주고 받지 않았는가? 그런데 저 천국은 상처 받지 않는 사람으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지옥은 치료받지 못한 이기심으로 끝없이 상처를 내는 곳이 바로 지옥이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매우 구원받은 것을 기뻐하자. 은혜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어진 것을 기뻐하고 은혜로 우리가 지옥에서 천국의 백성으로 옮겨진 것을 기뻐하자. 천국은 은혜가 완전하게 통치하는 곳이다. 완전한 사랑이 통치하는 곳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나라에 간 것을 그러면 기뻐하자. 할렐루야~~!! 그리고 머지 않는 그때에 거기서 다시 만나 서로를 용서하면 영원토록 살아갈 것을 기대하자. 이 은혜와 사랑을 주신 주님을 거기서 영원토록 즐거워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영광의 예배를 드릴 것을 기대해 보자. 그때에 빛난 하늘 집에서 주의 얼굴 뵈옵고,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얼굴을 다시 뵈올 것을 기대하자. 우리가 자주 부르는 소망의 찬송 가운데 489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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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요단강 건너편에 찬란하게 ~~!!찬양이 있다. 영어 원문에 보면 이 찬양의 제목은-‘Face to Face With Christ My Saviour’이다. 나의 구주이신 그리스도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이 찬양의 원래의 제목이다. 만들어진 유래가 있다. 교우를 위해 병원에를 방문했다가 치유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데 목사님을 터치하며 목사님께 자신을 위해서 치유기도를 하지 않아도 된다며 이제는 주님 앞에 가고 싶다고 말한다.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특별한 감동을 느끼면서 편지가 왔는데 어떤 분이 시를 하나 보내왔다 그래서 자기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을 한 가사여서 그것을 작곡한 찬송이 바로 이 찬송이다.

 
그때 거기서 우리 주님과 사랑하는 이들을 다시 만날 것을 기대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오늘 이 예배의 자리도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소망과 우리의 사랑을 더욱 견고히 하고 하늘 위로를 경험하는 자리가 되길 주 이름으로 축복한다. 지금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넘어서서 그때 소망을 바라보는 것을 기도한다.
 
오늘은 주일이다. 주일은 부활의 날이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할 것인가를 기대하는 감사하는 날이기도 하다. 초대교회 전통을 가장 따르고 있다고 자부하는 정교회에 가면 주일 날 예배를 전후해서 이런 인사를 나눈다고 한다. 정교회 주일날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Christ Risen!!!`-대답은 이렇다. His is risen indeed~!!! 그들은 참으로 부활하셨다. 그 부활의 은혜 안에 다시 만납시다. 라고 말한다고 한다. 그들은 결코 급박하게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곧 다시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부활의 은혜 안에서 다시 만남을 약속하는 소망하는 오늘 소망하는 그 오늘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요약
교회적으로 오늘은 슬픈 날, 담임 목사님의 어머니의 소천으로 천국으로 떠나보낸 것을 우리가 마무리하고 드리는 첫 주일이다. 위로의 기도를 드리며, 우리가 천국을 소망하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 찬란한 그 영광을 바라보아야 한다. 지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천붕지통의 아픔이 있을지라도 주님 안에서 살아 있는 소망, 복된 소망, 확실한 소망으로 승리하여 사랑이 완전하게 통치하는 천국을 사모할 때, 바람에 흔들리는 꽃을 피우는 인생길에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사랑을 선물하여 주실 것이다.
 
ㅡ은사장 사이에 있는 본장은 사랑이 은사를 사용하여 교회를 세우는 길임을 시사한다. 고대에는 유리에 수은을 입혀 만든 오늘날과 같은 거울이 없었다. 당시 사람들은 청동이나 놋쇠, 운모판 등을 연마해 거울로 사용했다. 따라서 그것으로 사물을 비추어 볼 수는 있어도 비친 것이 선명하지 않고 흐릿하게 보일 뿐이었다. 바울이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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