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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아버지와 아들들

세상에는 수많은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최근 제가 접한 것만 해도 몇 가지는 떠올릴 수 있겠군요.

코맥 매카시의 ‘로드’는 아버지와 아들의 과묵한 종말론적 여행기입니다.

‘한낮의 시선’을 포함한 이승우의 소설은 아버지=신에 대한 기나긴 애증서사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김애란의 근작 ‘두근두근 내 인생’은 먼저 늙어가는 자식과 어린 부모에 대한 속 깊은 청춘소설입니다.

황정은의 ‘모자’는 아버지가 조용하고 침울한 모자가 되어버리는 매력적인 이야기였죠.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의 원제는 ‘아버지들과 아들들’입니다.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어떤 아버지와 어떤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구세대로서의 ‘아버지들’과 신세대로서의 ‘아들들’에 대한 이야기인 거죠.

소설 속의 아버지들은 귀족의 정신과 로맨틱한 몽상, 그리고 예술에 대한 숭배에 익숙한 세대입니다.

유럽과 러시아에서 19세기 초중반 수십년을 풍미한 게 이른바 낭만주의였으니 그럴 법도 합니다.

 그런 낭만적 ‘아버지들’에 대한 ‘아들들’의 반항이 시작됩니다.

 예술적 ‘교양’이 넘쳤던 ‘아버지들’에 대한 반작용으로, 아들들은 거칠고 완강한 유물론자가 되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술과 영혼의 단련보다 개구리 해부를 선호했습니다.

 그들을 매료시킨 것은 고상한 미적 취향이 아니라 유물론적인 사고였습니다. 물론 아직 성숙한 ‘이념’에는 이르지 못해서 ‘속류적’ 유물론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만.

당시 사람들은 이 신세대들을 ‘허무주의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니힐리즘이라는 말 자체가 이 무렵 만들어졌다고 해요.

그때는 우리가 지금 쓰는 것처럼 ‘인생이 허무하다’는 식의 수동적이고 퇴행적인 의미가 아니었던 것이죠.

1860, 1870년대의 소위 ‘니힐리스트들’은 당대를 지배하던 가치들을 ‘무(nihil)’로 돌리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귀족적이고 교양 있는 아버지들과 달리 일부러 행색을 헝클어뜨리고, 일부러 무례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반항아들이기도 했습니다.

 주류에 대한 적의야말로 ‘아들들’의 에너지였겠지요.

나중에 사상가이자 소설가였던 체르니스키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이 니힐리즘을 혁명의 동력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반대로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었던 도스토옙스키는 ‘악령’이나 ‘죄와 벌’ 등에서 이 급진적 니힐리즘을 비판하고자 했습니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의 ‘선배’가 바로 ‘아버지와 아들’의 바자로프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이 단지 19세기의 산물인 것만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모든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 사이의 긴장과 갈등이 들어 있습니다.

그 긴장과 갈등을 넘어서는 애증의 드라마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사랑과 인정을 원하면서 동시에 서로를 밀어냅니다.

그 애증의 드라마들은 인간의 시간을 앞으로 이끌어가는 힘이기도 합니다. 역사란 그렇게 절뚝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만으로는, 반대로 증오만으로는, 걸어갈 수 없는 한 사람처럼 말이죠.

아버지들과 아들들(‘어머니들’과 ‘딸들’까지 포함하는 말로 이해해주시기를)은 단지 ‘세대차’ 때문에 싸우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는 어떻게든 다른 세계를 살아가도록 운명지어져 있습니다.

 때로는 그것 때문에 슬프고, 때로는 그 때문에 기쁠 것입니다. 그렇게 다른 세계를 살아가면서, 아들들은 이윽고 아버지들이 됩니다. 사라진 아버지들도 다만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라진 아버지들은 또 후대에 먼 아들들의 정신 속에 환생할 테니까요.

그것이 시간이라는 것인지도, 또는 역사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대 폼페이의 폐허에서도 “요새 젊은 것들은”으로 시작하는 글귀가 발견되었다고 하지요.

생각해보면 어쩐지 정감이 가는 말이기도 합니다.

며칠 전 늙으신 아버지와 밤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인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최근 들어 부쩍 죽음과 친해진 표정입니다. 그것은 이미 나이듦에 대한 하소연 같은 것은 아닙니다.

아들을 앞에 두고도, 영혼의 한쪽은 이미 먼 곳에 가 계신 느낌입니다. 삶의 저편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역사에도 그런 시간이 올까?

말하자면 역사가 죽음에 가까이 가서, 아버지들과 아들들의 갈등이 희미하고 아련해지는 시간이?

 글쎄요. 잘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세계와 역사가 존속되는 한, 아버지들과 아들들의 이야기는 계속될 거라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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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감정이라 여겼던 사랑에 빠져…

‘아버지와 아들’줄거리

《아버지와 아들》은 19세기 러시아의 사실주의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의 대표작이다. 투르게네프는 당시의 시대상과 인간상을 서정적 필치로 묘사하며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연대기 작가’로 불렸다.

당시의 이상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을 ‘아버지 세대’로,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을 ‘아들 세대’로 대표해 그 갈등과 대립을 세밀하게 그린 이 작품은 세대 간, 계급 간의 갈등뿐 아니라 자식을 향한 부모의 변함없는 애정을 아름답게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뜨거운 열정, 인생에 대한 철학적 사색과 아름다운 러시아의 자연 등 시·공간을 초월한 소재를 조화롭게 녹여내며 소설가 나보코프에게 “투르게네프의 최고 걸작일 뿐 아니라 19세기의 가장 훌륭한 소설”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대학을 졸업한 아르카디와 바자로프가 아르카디의 고향 마리노 마을에 도착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친구 아르카디의 저택에 잠시 머무르게 된 바자로프는 귀족주의에 젖어 아무 생산 활동도 하지 않은 채 탁상공론만 일삼는 아르카디의 큰아버지 파벨과 정치·사상·문화·예술 등 모든 방면에서 대립한다.

진보적이며 급진적 성향을 띤 바자로프는 스스로를 니힐리스트라 칭하며 세상의 모든 가치와 권위를 부정하고 심지어 인간의 사랑까지 부정한다.

그러면서 아르카디의 아버지 니콜라이가 아들에게 보이는 애정까지 전부 쓸모없는 로맨티시즘으로 치부해버린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파티에서 만난 오딘초바 부인에게 열렬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평소 자신이 주장했던 것과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고 바자로프는 고뇌에 빠지는데…….

원제: Отцы и дети

저자: 이반 투르게네프 (1818~1883)

발표: 1861년

분야: 러시아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아버지와 아들

옮긴이: 이항재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65(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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