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
슬프고…그래서 더 장엄한…
어렸을 때 큰집에는 어린이 세계명작동화 전집이 있었다. 큰집보다 형편이 좋지 못했던 우리 집에서는 전집을 살 수가 없어서 나는 돈이 생길 때마다 한 권 한 권씩 사 모아야 했는데, 큰집에 갈 때마다 내 전의가 불타올랐다. 계림문고판 어린이 세계명작전집. 그 책들을 전부 다 갖고 싶어 애가 닳았다.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욕망도 전의도 충족되지는 못했으나, 책 한 권을 새로 갖게 될 때마다 그 책들을 순서대로 배열하는 즐거움이 짜릿했다. 가나다 순서로도 배열해보고, 전집 번호대로 배열해보기도 하고, 내가 정한 명작 순위로도 배열해보았다. 『폭풍의 언덕』은 언제나 내가 정한 명작 순위의 1위에 있었다.
어렸을 때 내가 읽었던 계림문고판 『폭풍의 언덕』은 어린이들이 읽기 쉽게 원작을 재구성해놓은 책이었다. 소설은 캐서린의 아버지가 히스클리프를 데리고 오던 날로부터 시작되어 히스클리프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러니까 이 광대한 이야기의 전달자인 록우드나 엘렌 딘은 나오지도 않았거나 나와도 아주 슬쩍 나왔다는 것이다. 나중에 이 책의 완역본을 읽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도대체 내가 뭘 읽었던 거야?
당혹감과 노여움과 부끄러움이 마구잡이로 뒤섞인 감정이었다. 나는 그 계림문고판 『폭풍의 언덕』을 잊고 싶었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나는 지금도 『폭풍의 언덕』의 한 장면을 떠올리라고 하면 계림문고의 삽화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히스클리프가 창가에 서서 이미 죽은 캐서린에게 제발 들어와달라고 울부짖는 장면의 기억은 아직도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열두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폭풍의 언덕』은 그 어린아이의 무엇을 건드렸던 것일까.
기억은 나이와 함께 자라고, 인생의 슬픔과 고독과 더불어 변형된다. 열두 살 무렵에 처음 읽었던 폭풍의 언덕을 나는 이십대에도 다시 읽었고, 삼십대에도 다시 읽었다. 그리고 엊그제에도 다시 읽었다. 번역이 나쁘기만 해봐, 당장 물어뜯어줄 테니. 그런 심정으로 책장을 펼쳤던 것은 『폭풍의 언덕』에 대한 내 첫 경험과 큰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문학동네 판 『폭풍의 언덕』을 읽었다. ‘티티새 지나는 농원’, 에드거의 집이고 나중에는 캐서린의 집이 되며, 또 나중에는 헤어턴과 어린 캐서린의 집이 되는 그 저택의 이름에서 눈길이 멎었다. 그렇구나. 『폭풍의 언덕』에는 ‘폭풍의 언덕’만 있던 것은 아니었구나.
‘폭풍의 언덕’과 ‘티티새 지나는 농원’을 오가는 광기의 기록들이 다시 펼쳐졌다. 내 생의 기억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랑을 하고야 말겠다는, 혹은 받고야 말겠다는 어린 나이의 순진한 갈망은 불에 델 것 같은 광기에 대한 환멸이나 두려움으로 변한 것이 사실이다. 뜨거운 것이 좋은 나이일 때도 있고, 그런 것이 다 속절없게 여겨지는 나이일 때도 있었다. 아마도 내 삶의 고비마다 이 책이 다르게 읽혔을 것이다. 엊그제 읽을 때는 자신의 목숨이 다했음을 느끼는 히스클리프가 엘렌 딘에게 “시시한 결말이야, 그치?”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잠시 시간이 멎는 듯했다.
하나의 사랑에 자신의 인생 전부를 바치고 그로 인해 복수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던 한 남자가 결국 도달한 곳은 ‘시시한 결말’이다. 이 대사가 내게는 참회나 회환으로 읽히지 않는다. 다 태워버린 곳의 빈자리인 것이다. 다 태웠으니 이제 남은 게 없다는 것인데, 그래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남은 게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더니 거기에 있는 것이 또 하나의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엘렌 딘은 이야기를 멈출 수 없고, 그 이야기를 듣는 록우드도 이야기 듣기를 멈출 수 없다. 사실 이 소설에서는 이야기의 위대함도 빼놓을 수가 없다. 이야기를 하는 엘렌 딘이 없고 그 이야기를 듣는 록우드가 없다면, 폭풍의 언덕은 어떻게 존재했을 것인가. 그 처연함과 그 황량함은 어떻게 우리에게 올 수 있었을 것인가. 시시하다고 말하는 히스클리프의 목소리는 어떻게 들을 수 있었을 것인가.
다시 시시하다는 말에 주목한다. 대를 이어 계속되는 사랑의 이야기. 생의 바닥을 다 뒤집어놓은 듯한, 그래서 어느 한 군데에도 온순한 구석이 없는 이 남자의 삶조차도 시시하다. 그래서 인생이다. 그곳이 폭풍의 언덕이든, 서울의 어느 한구석이든, 다 그렇다. 그래서 슬프고, 그래서 장엄하다.
사랑과 복수라는 극히 통속적인 서사를 갖고 있음에도 이 소설이 견딜 수 없게 매력적인 것은, 인물들의 개성에 있다. 이토록 독특하고 이토록 튀는 인물들이 서로의 빈구석에 자신의 빈구석을 끼워 맞추면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는 것을 보면 놀랍기가 그지없다.
캐서린은 그냥 캐서린이 아니라 히스클리프의 캐서린이다. 히스클리프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광기로 똘똘 뭉쳐진 극히 독립적인 개인이면서도 서로에게 등 대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인물들이다. 이 튀는 개성들이 살아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고, 그것이 감동인 것은 내게 역시 빈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책을 덮으며 나는 다시 열두 살 때 계림문고판을 읽던 때로 돌아간다. 폭풍의 언덕에서 불행한 캐서린이 되고 싶어서 잠을 설쳤던 그 어린아이는 지금 무엇이 되어 있나. 고전이 괜히 고전이 아니다. 이 한 권의 책이 내 인생 전체를 돌아보게 하니. 읽을 때마다 매번 새롭게 한숨을 내쉬게 하니.
김인숙 소설가·손홍주 카피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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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정적 사랑을 그린 영문학 3대 비극
♣'폭풍의 언덕'줄거리
에밀리 브론테는 영국 요크셔 벽촌의 목사 딸로 태어나 평생을 시골집에서 살다가 서른 살에 미혼으로 세상을 떠났다. 거칠고 삭막한 황야에서 정신적인 고독의 한계를 경험한 에밀리 브론테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발표한 장편소설이 『폭풍의 언덕』이다.
영국 신사 록우드가 ‘티티새 지나는 농원’을 빌려 세 들어 살기로 한 첫날, 어린 캐서린의 유령과 그것을 향해 울부짖는 히스클리프를 목격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록우드는 그 일로 저택 주인 히스클리프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되고, 하녀장 엘렌 딘에게 이야기를 청한다. 엘렌 딘은 히스클리프와 캐서린, 그리고 린턴의 2대에 걸친 사랑과 증오, 복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폭풍의 언덕’이라는 저택을 배경으로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격정적인 사랑을 그린 이 작품은 서머싯 몸이 선정한 ‘세계 10대 소설’ 중 하나이며, 셰익스피어의『리어 왕』 멜빌의『모비 딕』과 더불어 영문학 3대 비극으로 꼽힌다.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문학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고 영화와 연극, 드라마, 오페라 등으로 끊임없이 재생산되며 작가가 죽은 지 150년이 훨씬 지난 현재까지도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원제: wuthering Heights
저자: Emily Bront (1818~1848)
발표: 1847년
분야: 영미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폭풍의 언덕
옮긴이: 김정아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86(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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