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문제적 인간의 탄생

천장을 빼곡히 메우고 있던 크고 작은 활자들 속에서 ‘스땅달’과 ‘적과 흑’이라는 글자를 찾아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배를 깔고 누워 책을 읽던 습관이 있던 때였다. 그 자세가 힘들어지면 옆으로 누워 읽었다. 반대쪽 페이지를 읽으려면 몸을 반대로 돌렸다. 그러다 잠깐 고개를 들면 작은 창 너머로 저 멀리 빛나고 있는 불빛들이 보였다. 1980년 초였다. 밝다고 해봐야 30와트짜리 백열등이었을 것이다. 밤이 깊어도 몇 점 불빛은 꺼질 줄 몰랐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들을 생각하다 읽던 책은 그대로 엎어두었다. 대신 나는 천장을 향해 몸을 바로 했다. 《적과 흑》이 소개된 그 팸플릿은 하필이면 내 코 바로 위에 붙어 있었다.

시간이 흘렀어도 그것만은 확실하다. 나는 《적과 흑》이라는 제목이 싫었다. 직감적으로 적과 흑으로 대변될 그 무언가에 대한 반감이 작동했을는지도 모른다. 대신 제목 아래 달린 줄거리 요약 속에 등장하는 줄리앙(쥘리앵이 아닌)이란 이름은 감미로웠다. 오, 나의 줄리앙. 줄거리 요약에서는 글의 결말을 감춘 채 여운을 남겨두었다. ‘그 사실을 안 줄리앙이 교회로 달려가는데……’ 이런 식이었을 것이다. 그 방 도처에 감미로운 글자들이 있었다. ‘사랑’이란 단어도 쉽게 눈에 띄었다. 뺨 왼쪽 위엔 ‘닥터 지바고’가 발치 아래쯤엔 ‘천일야화’가 있었다.

열네 살이었다. 팸플릿에 밀가루풀을 발라 도배를 하던 아버지의 심정은 안중에도 없었다. 왜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것인지, 아버지의 속에도 쥘리앵과 같은 열정과 자존심이 살아 펄떡이던 시절이 있었으리라곤 생각해보지 않았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여러 출판사를 전전했다. 직장을 옮길 때마다 ‘찌라시’로 불리는 출판사의 팸플릿이 집 안에 널렸다. 딱지를 접어도 접어도 넘쳤다. 어느 날, 아버지는 반 장난삼아 외풍 심한 다락을 찌라시로 도배했다. 집장사들이 활개를 치던 시절에 뚝딱 지어올린 단층 양옥이었다. 바닥을 밟을 때마다 삐걱거렸지만 집에서 가장 전망이 좋던 다락방은 그 집을 떠날 때까지 내 방이 되었다. 소설의 첫 문장을 끼적인 것도 그곳에서였다.

곰곰 생각해 보니 소설을 쓰게 된 건 다분히 그런 문학적인 환경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과장을 좀 보탠다면 그곳은 수천 권의 장서들로 가득한 도서관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딴 마음을 먹을 수 있었겠는가. 허리를 굽히고 다락방으로 들어서면 활자들이 별처럼 쏟아졌다, 라고 어느 글에 쓴 적이 있는데, 정말 어느 날은 창밖 가로등 불빛을 받아 아트지 위의 활자들이 희번덕하게 빛을 내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다시 《적과 흑》을 읽기 시작했을 때, 그가 처한 환경부터 보였다. 쥘리앵 소렐이 살다간 1830년의 프랑스 사회, 이 소설의 부제는 알려진 대로 ‘1830년의 연대기’이다. 쥘리앵은 비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손을 보탤 일꾼이 필요한 아버지에게 책이나 읽고 사색을 즐기는 아들은 무용지물일 뿐이다. 그는 야심으로 가득 차 있다. 방법은 둘, 군인과 성직자. 하지만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군인으로서의 출셋길은 막힌 상태이다. 귀족들은 로베스피에르와 같은 비천한 신분이지만 세상을 바꿀 인물이 나타날 것을 경계하고 있다. 그러니 똑똑하고 야심에 찬 젊은이의 출현이 반갑지만은 않다. 그런데도 정작 이 소설은 소설이 발표된 그 시대의 독자들의 공감을 사지는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그들 자신의 모습을 바로 알지 못했다.

《적과 흑》의 첫 독후감은 기억나지 않는다. 열일곱, ‘적과 흑’이라는 활자 아래에서 《적과 흑》을 읽었다. 아버지가 사준 고전 시리즈는 고급 장정에 금박 제목이란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게 옆으로 누워 읽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아마도 팸플릿에 적혀 있던 《적과 흑》의 요약본을 확인한 것에 불과한 독서였을 것이다. ‘교회로 달려가는데……’의 뒷부분을 확인한, 비상을 꿈꾸던 한 젊은이의 파멸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이렇게 외쳤을지도 모른다. 오, 나의 줄리앙!

열일곱 초여름에 그 집을 떠났다. 주인이 서너 번 바뀐 그 집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몇 년 전 그 집을 찾았을 때 이미 그곳은 아파트 개발로 파헤쳐져서 커다란 공동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오랫동안 그 구덩이를 내려다보았다. 그 다락방과 아슴푸레한 청년의 열정이 떠올랐다.

《적과 흑》을 다시 읽는 시간, 나는 이미 그 방에서 떠난 지 오래된 사람이다. 남은 열정과 자존심이 하루빨리 없어지기를 바라며 하루 종일 팸플릿에 풀을 발라 도배를 하던 아버지보다도 더 나이가 많은 사람이다.

사랑을 하면 왜 변덕쟁이가 되는지, 왜 마음과는 다른 행동들을 하게 되는 건지, 왜 때론 극단적인 생각으로 치달리는 건지, 파랗게 독이 오르도록 질투심에 사로잡히는 것은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을 이렇듯 글로 표현해놓다니. 쥘리앵과 레날 부인, 마틸드로 시선이 옮겨가며 드러나는 심리 묘사는 압권이다. 다락방에서는 분명히 어려워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사랑과 죄의식의 양극단에 동시에 설 수 있음을 그때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내 내면을 들여다보는 데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무방비로 내 속을 들켜버린다. 줄리앙이던 시절에서 쥘리앵으로 제 이름을 되찾기까지 이 청년의 매력은 사그라질 줄을 모른다. 욕망으로 들끓다가도 정작 그 속됨 속에서 진저리를 치는, 자존심이 상하는 순간 아무런 쓸모도 없어지는. 오, 나의 줄리앙!

---------------------------------------------------------------------

출세 위해 어쩔 수 없이 성직자의 길로…

♣‘적과 흑’ 줄거리

스탕달은 발자크와 함께 19세기 프랑스 문학의 양대 거장으로 꼽힌다. 낭만주의적 성향이 지배적인 문학 풍조에 맞서 ‘소설은 사회의 거울’이라는 생각으로 당대의 시대상을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예리하게 비판함으로써 사실주의 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스탕달의 대표작으로 1830년에 출간된 《적과 흑》은 당시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한 두 건의 치정사건을 바탕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소설의 제목인 ‘적과 흑’은 당대 젊은이들이 신분 상승을 위해 바라던 군인과 성직자의 신분을 상징한다. 주인공 쥘리앵 소렐은 하층계급으로 태어났으나 훌륭한 외모에 재능이 출중한 야심찬 젊은이다. 군인으로 출세를 꿈꾸나, 무명 병사에서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비천한 신분을 타고난 자가 출세할 수 있는 길은 성직자뿐임을 깨닫고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택한다. 하지만 야망을 좇고, 신분 높은 여성들과 사랑에 빠지면서 쥘리앵은 나락으로 떨어져 결국 교수형에 처해지게 된다. 사회상의 반영은 물론 스탕달은 쥘리앵이 여인들과 사랑에 빠지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겪는 연애심리를 매우 섬세하고 예리하게 묘사하며 연애심리에 대한 탁월한 혜안을 보여주기도 했다.

스탕달은 이 책에 역사적 사실들의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는 ‘연대기’라는 부제를 쓰면서도 “내 소설은 백 년 후의 독자들이나 이해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의 소설은 소설 발표 당시나 그가 죽은 후에도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본격적으로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원제:Le Rouge et le Noir

저자:Stendhal(1783~1842)

발표:1830년

분야:프랑스문학

한글번역본

제목:적과 흑 1, 2

옮긴이:이규식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17, 018(2009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