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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1월 5일) 제목: "축복의 씨앗, 아브라함 공동체" 말씀: 창세기 18:18-19 찬양인도: 쉐키나찬양대, 김원준 부목사님 설교자: 유선비 부목사님 ------------------------------- *창세기 18:18-19, 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늘 사모하며 치유와 응답을 체험하는 수요저녁기도회에 함께 하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한다. 오늘 저녁 기도회를 통해 풍성한 기쁨과 맞춤형 응답이 가득한 시간되길 소망한다. 오늘 우리에게 주실 말씀을 보겠다. 성도님들 주님 안에서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바라는 소망을 꿈꾸며, 주님 안에서 아름다운 사람으로 사용되며 기도한 모든 것들이 응답되기를 소망한다. 꿈과 목표에 관한 실험을 한 흥미로운 목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이 실험은 수십 년간 인지 심리학 역사에서 아주 굉장히 명장면으로 꼽히는 실험이라고 한다. 굉장히 기대감을 조성하고 있다. 먼저 화면을 보면 여러 물체가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원도 있고 정육면체도 있고 원뿔도 있고, 원통도 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는 물체들이 있다. 이런 물체들을 가지고 초등학생들에게 실험을 했다고 한다. 첫 번째 반에 가서 마음에 드는 것 다서 개를 골라보라고 했다고 한다. 다 고르고 나면 그것으로 신기하고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보라고 미션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주로 직사각형 정사각형, 원통, 이렇게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것들을 택하고 그것을 가지고 대부분의 남자아이들은 기차나 자동차를 만들고, 여자 아이들은 집을 짓는다고 한다. 창의성이 아닌 천편일률적인 것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 두 번째 반에 가서는 재료들을 보여주지 않고 여러분은 새롭고 신기한 것을 만든다면 무엇을 만들고 싶으나를 말하고 먼저 하고 싶은 것을 물어본 것이다. 그리고 한 아이가 새롭고 신기한 것을 말하면 굉장히 잘했다고 칭찬해주고 그러면 다음 아이는 더 센 것을 말한다고 한다. 다른 친구들이 상상하기 못한 것을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영원히 충전하지 않아도 되는 스마트폰, 기름을 넣지 않아도 가는 자동차 등, 이런 것은 식상하는 것이 되고 요즘 아이들은 논술 공부도 많이 하기 때문에 여야 상생과 도출을 내는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는 초등학생도 있다고 한다. 모두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나면 그제서야 이런 물체를 주면서 이것 중에 다섯 가지를 골라서 만들어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럼 처음에 아이들은 굉장히 당황해하고 얼굴이 어두워지고 눈물을 글썽거리기까지 한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평범한 물체를 가지고 어마한 것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조금 지나면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진다고 한다. 거의 아이들의 눈빛은 에디슨 혹은 아인슈타인 같이 반짝반짝 한다는 것이다. 이 두 번째 반 아이들은 물체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물체를 만지고, 돌리고 굴려보고, 부딪혀서 소리도 들어보고, 심지어 냄새도 맡아보고, 핥아보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남들이 보지 않는 것을, 남들이 하지 않는 행동들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평범한 것을 가지고 어마어마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반 아이들이 만든 작품을 가지고 창의력 올림피아드 상 받은 작품과 비교해 봐도 손색이 없다고 한다. 인지 심리학자 김경일 박사님의 책에 나오는 예화이다. 그 박사님이 이 실험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인지심리학자들은 창의적 인재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나를 창의적으로 만드는 상황에 들어갈 줄 아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쓸 뿐이다. 왜냐하면 능력이 만들어내는 변수보다 상황이 사람을 바꾸는 영향력, 다른 말로 하면 꿈이 사람을 바꾸는 영향력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인간은 대단한 결과를 만들려면 대단한 도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큰 결과를 만들어 내려면 어마어마한 도구를 가지고 만들어야 한다는 고집스런 착각을 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반은 변변치 않는 도구를 보았기 때문에 큰일을 못한 것이다. 같은 도구이지만 큰일을 한, 두 번째 반은 변변치 않는 도구를 보기 전에 ‘나는 무엇을 만들고 싶은 사람’이라고 먼저 이야기했다. 그것을 먼저 보았고 먼저 이야기 했으니 변변치 않은 도구를 볼 때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행위를 꿈을 꾼다라고 이야기 한다. 현실 가능한 일을 내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은 진도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목표라고 하지만 목표와 달리 꿈은 현실 가능성이 비교적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목표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창의적으로 혁신적으로 연결형 인간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이렇게 제한한다. 친한 친구에게조차 이야기 하면 ‘너 미쳤구나!’ 이런 소리를 들을 정도의 큰 꿈을 만들어 놓으라고 한다. 그걸 실현하려고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계속 그것을 가지고 잠잘 때나 산책할 때나 재미있게 그 꿈을 가지고 놀아야지만 남들과 다른 새로운 창조적인 관점과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2022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어떤 꿈을 꾸는가? 어떤 목표를 계획하는가? 새해 며칠이 속히 지나가서 아마 그것을 놓친 분도 계실 것 같다. 다시 한 번 또 다른 질문을 던져보겠다. 성도님들 가운데 꿈들 가운데 세상에서 제일 큰 꿈, 들어본 중에 제일 큰 꿈은 무엇인가? 제가 들어본 가장 큰 꿈은 ‘아브라함의 꿈’이라 여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꿈이다. 이 시간 일상을 잠시 떠나 말씀의 숲을 거닐며 하나님의 꿈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꿈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자. 바로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라는 꿈이다. 정말 어마어마한 꿈이다. 여러분은 이 꿈이 어떻게 들리는가? 아마도 이 꿈을 들을 때에 과하다. 허풍이 세다. 라고 들릴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꿈은 누구의 꿈인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만약 이 꿈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렇게 들어주시라고 말을 했다면 허망하고 헛되고 너무 허풍이 세고 현실감이 없는 말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 꿈은 하나님의 꿈이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꿈이다. 따라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꾸시는 꿈은 현실 가능한 꿈이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꿈은 그 꿈을 아브라함이 꾼다면 아브라함은 결코 과한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꾸라고 주신 꿈을 꾸지 않는다면, 아브라함은 겸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 아브라함의 꿈은 어떠한 성경의 거대 서사 가운데 위치에 있는지를 살펴보면서 말씀을 좀 더 보도록 하겠다. 성경에 거대서사. 메타네러티브(metanarrative)라고 한다. 큰 역사의 이야기가 흘러가는데 아브라함은 변곡점에 선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면서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악과 고통과 저주가 가득하게 되었다. 죄의 파급력이 얼마나 컸는지 창세기에 아브라함이 등장하기 전 11장까지 아주 잘 나온다. 아담이 범죄 한 후에 살인사건도 일어난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다. 또한 노아시대를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서 포악함이 온 땅에 가득했다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이 보셨을 때 땅에 숨을 쉬고 있는 모든 자의 행위가 부패했다라고 창세기는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자신 원하는 대로 패역한 삶을 사는 것에 정점은 바벨탑 사건이라고도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이 등장하기 전 11장에 나온다. *창세기 11:4,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땅에 생육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라고 하신다. 번성하고 흩어져서 땅을 정복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과 정 반대에 하나님의 말씀과 정반대의 삶을 바벨탑 사건을 통하여 인류가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바벨탑은 하나님이 없는 문명, 하나님이 없이 자기 스스로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고 하나님이 말씀과 반대되는 삶을 살겠다는 선언적인 그러한 탑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신 11장까지 이렇게 하나님이 보기에 아름답지 않은 죄로 말미암아 악과 고통과 저주와 무질서와 인간이 주인이 되어서 마음대로 사는 그러한 역사가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타락으로 인해서 인류가 망가진 것같이 보일 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신적 개입으로 사람들과 피조세계의 전반을 회복시키시고자 구원하시고자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셨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오염된 이 땅에 하나님의 새 판 짜기가 아브라함을 통하여 시작된 것이다.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성경의 거대한 흐름 가운데 하나님의 구속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서막을 알리는 굉장히 중요한 변곡점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타락으로 인한 이 세상을 회복시키시는데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을 부르시면서 회복시키고 계신다. 하나님이 이 거대한 세상을 회복시키시는데 바로 75세인 아이를 낳지 못하는 힘이 없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부터 그 거대한 꿈을 이루시겠다고 하시는 것을 보며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는가? 뭔가 거창한 방법? 하나님이 위대하시니까 정말 멋지고 위대하시니 누구나 봐도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야! 라고 이러한 생각이 들 만한 그러한 뭔가가 나와야 될 것 같은데, 우리가 보기에는 이것은 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75세에 아이를 낳지 않고 비전이 없는 한 나이 많은 한 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온 땅을 회복시키시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아브라함을 통해 이 땅을 회복시키시겠다고 하시는 꿈이 얼마나 큰지 그것은 여러분 창세기 12장 1-3절에서 보면 ‘축복’이라는 단어가 다른 형태로 다섯 번이나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창세기 1-11장까지 ‘저주’라는 단어가 다섯 번 등장한다. 그런데 이 저주라는 단어에 맞추어서 창세기 12장 1-3절은 짧은 본문에 축복이라는 단어가 여러 형태로 다섯 번 등장하는데 이것은 죄로 말미암아 저주가 임한 이 땅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축복의 역습을 하시겠다는 것이다. 본전을 회복시키시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11장까지 저주가 다섯 번이 나오고 창세기 12장에 짧은 본문에 축복이 다섯 번 나왔다고 해서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완전히 아브라함을 통하여 저주가 축복이 되게 하겠다는 해석은 너무 무리한 해석이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창세기는 고대 유대 문학이라는 장르의 기반으로 쓰여 졌다. 고대 문학이는 장르로 쓰여 졌다고 하니까 창세기가 소설이나 허구나 픽션이나 가짜 이야기로 썼다라고 말씀 드리는 것은 아니다. 창세기는 변하지 않는 진리, 하나님의 진리, 역사를 기록한 참된 책이다. 그리스도인의 방식을 고대 유대 문학의 방식을 택했다는 것이다. 고대 유대 문학은 현대소설과는 다르다고 한다. 현대소설은 보면은 초반에 읽다 보면 배경 설명이 엄청나게 자세하다. 그래서 본론을 원하는 분들은 읽기 어려운 책이기도 하다. 너무 배경 설명이 많다보니까 정작 내용은 별로 없는 그런 상황까지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창세기는 현대소설과는 다르게 굉장하게 어떻게 비교해보면 헐겁게 쓰여 져 있다. 뭔가 사건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렇게 디테일한 설명들이 없는 이 책에 고대 문학 형태에서 저자가 의도적인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는 디테일한 균형과 뭔가를 장치를 쓴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11장까지 저주가 다섯 번 등장하고 12장에 축복이 다섯 번 등장하는 것을 통하여 이렇게 정교한 배치를 통하여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저주를 축복으로 완전히 역전시키실 것이라는 해석하는 것을 많은 성경학자들은 그렇게 해석하고 그 해석을 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창세기 12장 1-3절을 보자. *창세기 12:1-3,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땅에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 너로 말미암아 축복을 얻을 것이라고 이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여기에서 우리가 그러면 어떻게 하면 창세기 아브라함을 통하여 열방이 복을 얻을까 하는 이 본문을 통해 보면, 이렇게 생각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1절에 근거로 해서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면 열방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열방이 있는 곳에 이사 가면 자동적으로 열방이 복을 받는가? 오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천하 만민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아브라함에게 주신 꿈과 비전을 제시하시고 나서 그것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조금씩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 읽은 18:18-19절의 말씀을 읽은 것이다. *창세기 18:18-19, 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것은 창세기 12장에 나와 있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꿈을 재 진술하고 요약한 것이다. 천하 만민이 어떻게 이루어진다는 것인가? 바로 18장 19절 상반부에 나온다. 그것은 바로 자녀들과 후손들을 의롭고 선한 일을 하게하며 경건한 삶을 살게 하는 방식을 통하여 그 방법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열방이 복을 받는 것이 아브라함의 자녀 신앙교육 자녀 제자훈련을 통하여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포함해서 그 식솔들, 권속들, 이렇게 말씀 교육하고 삶으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성품이 반영된 그 사랑의 말씀, 공의로운 말씀을 실천하면서 자녀들에게 그렇게 살게 하는 가정교육, 자녀 교육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고 이 땅이 회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너무 빈약한 것 같지 않은가? 뭔가 전 세계적으로 아주 거대한 스펙터클한 뭔가를 해야 될 것 같은데 이삭 교육 시키는 것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다 라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행복은 전염된다.’ 라는 책이 있다. 원제는 커넥티드이다. 연결된 것이라는 책이다. 이것은 사회적 네트워크가 얼마나 광범위한 것인지에 대해 연구한 책이다. 아 이 책에는 먼저 초반에 6단계 분리 이론이라는 것이 나온다. 그것은 나로부터 여섯 단계만 지나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 교회에서도 경험한다. 세 명이상의 성도님들이 모이면, ‘너 이분 어떻게 알아?’ 하면 우리 순장님의 남편의 아들이야라고 이렇게 해서 알게 되기도 한다. 제자반 집사님의 동기분의 다락방 순장님이라고 하기도 하고 한 다리 두 다리 연결되어 다 아는 사람이 된다. 이 저자는 이 육 단계 분리 이론이 단지 교회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 사람이 여섯 단계만 지나면 다 연결되어 있다는 스텐리 밀 교수의 그런 이론을 조금 더 발전시켰는데, 뭐라고 말하면 3단계 영향 규칙이라는 것을 연구해서 이제 맞다고 발표했는데 어렵게 느끼지만 아무것도 아니다. 들어보라. 우리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네트워크를 통해 물결치며 나아가서 내 친구, 내 친구의 친구, 내 친구의 친구의 친구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육 단계까지는 다 아는 사람이 되는데 그중에 나로부터 3단계가지는 영향력이 미치는 관계라는 것이다. 내 친구는 나를 만나지만 내 친구의 친구는 나를 만나지 않더라도 내 영향력이 흘러간다는 것이다. 내가 행복하면 내 친구가 15프로 증가하고 내 친구의 친구가 내가 만나지 않는 내 친구의 친구의 친구는 10프로 행복할 확률이 늘어난다고 한다. 그리고 내 친구의 친구의 친구의 친구는 6프로 영향이 간다는 연구 결과를 내고 있다. 단지 행복감만이 아니라 정치 성향, 종교, 그리고 문화 심지어 몸무게까지 여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를 들어서 아는 사람이 50명이라면 친구의 친구도 50명, 제 친구의 친구의 친구의 친구도 아는 사람이 50명이라고 가정한다면 한 사람의 영향이 3단계까지 가니까 50x50x50이 되어서 12만 5천명에가지 영향이 미친다는 것이다. 진짜 이런 식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면 집에서 자녀들을 가르치는 전업 주부인 한 엄마 한 사람이 예를 들어 변화되면 그 자녀가 다니는 초등학교 한 반에 영향을 미치고 그 초등학교 학생들의 사는 가정까지 부모님에게까지 영향이 미쳐진다는 것이다. 만약에 선생님이 엄청난 행복감이 미친다고 하면 학생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리고 그 학생의 부모님께 영향을 미친다. 그 학생의 부모님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의 직장을 다니실 것이다. 그래서 모든 영역에 한 선생님의 영역이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원리가 영적인 원리가 작용된다는 것이다. 똑같은 퍼센티지라고 주장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이 충만하게 되면 그를 통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다. 그 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도가 흘러가고 이웃을 사랑하는 거룩한 정서가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자 발버둥 칠 때, 직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게 되도 그 직장을 다니는 가정과 동료들에게까지 그 자녀들의 학교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영적인 차원에서도 덧셈이 아니라 곱셈의 차원의 확장인 승법 번식이 일어나는 것이다. 담임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영적 제곱근의 법칙이 실제로 작동을 하는 것이다. *이사야 60:22, 22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덧셈이 아니라 곱셈으로 승법 번식으로 영적 제곱근의 원칙에 의해서 아주 작은 자가 완전히 변화되면, 그로 인해 어머 어마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그의 식솔들을 잘 교육하고 변화시키는 것이 어쩌면 모든 민족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며 유일한 방법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방법은 예수님도 사용한 방법이다. 그냥 한때 흘러간 방법이 아니다. 예수님도 아브라함과 같이 본토 친척인 아버지 집을 떠나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사역 말고, 그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에 비견하는 중요한 것이 제자를 삼는 것, 3년 동안 제자들과 동거동락하며 예수님께서 제자훈련을 시키셨고 제자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하게 거하게 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서를 알려주었고 이웃을 사랑하는 거룩한 정서를 주었다. 예수님이 제자훈련을 하셔서 그 제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가? 2천년 후에 서울에 사랑의 교회가 어떻게 지금 있는 것인가? 어떻게 우리가 여기에서 제자훈련, 사역훈련을 하고 토비새를 하고 특새를 하고 어떻게 우리가 전도폭발을 하며 지역사회에 나아가서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인가?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 삼으신 그 소수를 통하여 예수님이 집중하신 그 소수를 통하여 지금 이 극동에까지 복음이 증거 된 것이다. 예수님은 한 명을 품으시고 제자들을 세우시는데 집중하실 뿐 아니라 마태복음 28장 18-20절에 보면, *마태복음 28장 18-20,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꿈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역사는 신구약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연관성 있게 바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그 열방의 복이 되는 약속의 효시가 되는 가장 효과적이고 어쩌면 유일한 방법을 예수님에게도 실천할 수 있도록 주님은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질문을 던지면서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다. 첫째, 나의 영적의 이삭은 누구인가? -이런 말씀을 들었을 때 여러분은 떠오르는 분이 계신가? 아마도 바울에게 물었다면 반드시 바울은 디모데라고 말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말씀하셨을 것이다. 만약에 이런 질문을 물어본다면 누군가에게 말할 수 없다면 어쩌면 우리는 아브라함의 그 꿈을 이루는 가장 효과적인 사명의 전략을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큰 꿈은 있지만 어쩌면 목표는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2022년을 시작하면서 나의 영적인 이삭을 찾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간절하게 소망한다. 둘째, 나는 나의 영적인 이삭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명을 열방의 아비로 키우시기 위해서 굉장히 많은 시간을 보내셨다. 창세기를 보면 놀랍지 않는가? 아브라함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아브라함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수많은 대화를 나누시고 마치 아브라함 한 명만 상대하는 것처럼 창세기 수많은 분량이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런 놀라운 시간을 충분한 시간을 보내며 아브라함을 훈련시키시고 아브라함을 키우셨다. 그와 같이 그러한 하나님의 양육과 훈련을 방은 아브라함은 그러한 방식으로 그 자리를 양육해야만 했던 것이다. 우리도 영적인 이삭을 찾는다면 그를 위해서 충분한 시간을 보내기를 소망한다. 요즘에 수많은 사람과 관계하기 때문에 우리의 에너지와 우리의 물질이나 시간들을 나누어줄 수밖에 없다. 소셜 네트워크를 통하여 아주 많은 사람들과 상대를 하고 관계를 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집중하기 어려운 시간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소수에게 나의 삶의 많은 부분을 헌신하고 섬기라는 것이다. 나의 영적인 이삭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살펴보는 복된 22년이 되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 영적인 이삭은 바로 우리 다락방에 있을 것이고, 우리 제자 반, 사역 반, 혹은 1:1양육이 시작되는데 그 양육 가운데에 일어날 것이며 전도폭발 가운데 일어날 것이다. 셋째, 나는 나의 영적인 이삭에게 그를 향한 하나님의 꿈을 지속적으로 선포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자신의 재료를 보고 자신의 육신적 한계를 보고 절망할 때, 다가오셔서 꿈을 계속 말씀해 주신다. 심지어 이름을 바꾸어주신다. 아브라함으로, 열방의 아비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를 때, 아브라함아, 열국의 아비야, 심지어 이름을 바꾸어 주신다. 하나님의 꿈을 지속적으로 선포하고 계신다. 아브라함의 미래는 아브라함의 자질과 그 가능성이 아브라함의 미래를 견인하고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속적이고 끊임없는 호명하시고 하나님의 아브라함을 향한 꿈과 부르심이 아브라함의 꿈이 형성해 갔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도 영적인 이삭을 만나면 성경이 말하는 그를 향한 계획을 꿈을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선포해 주실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소망한다. 마무리를 하겠다. 지난주일 담임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하나님의 일은 누군가가 소원하고 누군가가 부흥하고 설레여야 일이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셨다. 22년 새해를 시작하는 1월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꿈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한다. 나의 영적인 이삭을 물어보면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면 나의 영적인 꿈을 찾고, 나의 아브라함의 공동체를 찾아서 그들을 위해 나의 기쁘게 헌신하고 드리는 귀한 가르침과 양육과 훈련의 시간으로 그 생명 사역을 하나님께 기쁘게 드릴 수 있는 귀한 22년이 되기를 소망한다. 한 번뿐인 인생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소중한 일을 하며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꿈에 동참하는 사명의 설레이는 여정을 살기를 바란다. ♣요약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꿈을 꾸게 하심처럼 우리를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려는 꿈을 꾸시며 오래 참으시고 한 결 같이 이끄시는 주님께 감사하며 찬양한다. 우리를 영적인 공동체인 우리의 이삭을 잘 훈련하고 잘 섬기며 영적인 재생산에 참여하는 복된 삶이 되어야 한다. 나의 영적인 이삭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며 가르치고 양육하고 훈련시키는 섬김의 헌신하기를 실천하고 믿음의 계승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일에 힘써야 하고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목적은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기 위함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면 강대한 나라가 되고 만민이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 목적에 맞게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는 일에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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