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주후 2021년 8월 11일)
제목:''하나님 앞에 선, 아브라함 그리고 나''
말씀: 창세기 22:1~10
찬양인도: 오준석 전도사님
설교자: 오정호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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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2:1~12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2021년 올 상반기동안 성도의 온전함 말씀 시리즈를 통해서 자신과 가정, 공동체를 회복하고자 전력 적으로 달려왔다. 그렇다면 그 회복의 구체적인 증거는 무엇인가? 다름 아닌 예수님을 닮는 온전함이 진정한 회복인 줄 믿는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온전하고도 완벽한 대속 제물로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셨고, 온전함의 모범을 보이시며 우리에게 새로운 차원으로 다다르게 다름 아닌 순종할 힘을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토록 사모해 온 온전함으로의 초대, 그 전과 후, 비포와 에프터가 달라져야 한다고들 많이 들었다. 그 온전함으로의 초대, 전과 후를 구별하는 핵심이자 관건은 바로 l예수님의 온전함을 닮아가기 위해 우리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고비마다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께 붙들린 거룩한 순종을 드리고자 어떻게 몸부림 쳐오며, 끝내 어떤 선택하는가에 달려있을 것이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브라함 역시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수수께 같은 명령 속에서도 고통 가득한 시간 속에서 고도로 집중된 순종을 드리고자 사투와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오늘 말씀이 이미 결정된 남의 이야기로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선 아브라함’, 그리고 오늘 설교 제목처럼 나의 문제, 자기문제만의 귀한 시간이길 축원한다.
 
오늘 본문 창세기 22장은 성경 주석가들에게 이른바 아께다 본문으로 불려진다. 아케다는 결박이라는 뜻이다. 본문은 아브라함의 신앙의 최악의 위기였지만 동시에 아브라함의 신앙의 최고의 정수를 보여기도 한다. 키에르 케고르가 공포와 전율의 제단이라고 묘사했던 이삭의 번제를 요구하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성경적 신앙 안에도 불확실함 정도가 아니라 가장 모순적인 요구, 얼핏 보면 하나님의 성품과도 충돌하는 듯한 상황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견디어 낸다는 것이 때로는 얼마나 고통스러울 수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그것은 결코 낭만적인 영역이 아닐 것이다. 신앙은 어쩌면 벼랑 아래로 자신을 던져버리는 것 같은, 단지 모험이라는 표현을 넘어서서 죽음을 넘어서는, 죽음에 경계에 선 자신을 마주하는 절대적인 사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그것이 더 어렵고 힘든 이유는 그 극단을 요구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 사랑이 많으신 정도가 아니라 그 자체이신, 그분의 이해할 수 없는 반인륜적인 요구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오늘 아브라함을 가장 괴롭게 하고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비참한 정도까지 몰아가시는 분, 다름 아닌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의 가장 큰 적, 대적으로 오신 하나님, 그 존재를 박살내고자 작정하신 것 같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든 가운데, 아브라함이 스스로 해결해 할 사투가 바로 오늘 본문의 핵심이자 설교의 핵심이다.
 
*창세기 22:1,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읽은 22장 1절은 이 사건을 이해함에 있어서 필요한 예비적인 지식을 제공해 준다. 성경기자는 그 루엘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바로 앞장인 21장에 사건들, 이삭이 태어나 이스마엘의 출가, 아비멜렉의 언약 등의 일련의 시간이 흘렀음을 말해준다. 이삭은 어느 새 십대가 되었고 약속의 아들로 인해 가족의 기쁨과 행복이 극대화된 그 시점이 되었다. 이어서 성경기자는 처음부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라는 언급을 명백히 함으로써 하나님의 진정한 목적에 대해 어떠한 의심도 가라앉힌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알지 못한다. 이 순간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누군가처럼 말이다. 바로 욥이다. 우리에게 결과가 예정된 시험이지만, 우리는 끝을 알고 있지만, 아브라함과 욥에게 당면했던 그 시험은 고통스런 실재였으며 현실이었다. 오늘 본문 서술 가운데 놀라운 특징은 성경 기자가 말한다.
 
첫째, 하나님의 요구를 수행하는 동안에 아브라함의 실질적인 생각이나 말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성경을 읽는 우리의 시선은 아브라함의 내적, 심리적 갈등에 맞추게 된다. 우리가 아브라함과 같은 심리적인 고통가운데 놓여있게 한다. 다시 말하면 독자인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신이 받은 충격 받은 만큼 그대로 하나님의 직설적인 이해할 수 없는 요구에 대해 당혹할 수밖에 없다.
 
둘째,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독자인 우리는 하나님의 그 요구, 이삭 번제에 대해서 어떠한 설명도 듣지 못한다. 왜 이식을 요구하시는지에 대한 그 어떤 설명도 없다. 하나님의 요구는 단순하다. 단 세 가지 2절에 명령에 나온다.

*창세기 22:2절에,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무 설명도 없다. 그러나 불합리함을 넘어서 이 잔인한 명령에 대해 아브라함의 반응은 무거운 침묵과 함께 말없는 순종이었다. 그것도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 떨어진 바로 다음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이다. 3절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다. 언뜻 보면 아브라함은 삶을 초월하는 것 같이 보인다. 믿음으로 무장했기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린 참 남의 이야기는 쉬운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쉽게 말하면 안 된다. 지금 아브라함이 가는 길은, 가야할 목적은 하나님이 명하신 그 산에 가서 자신의 유일한 아들, 백 세 때에 얻은 그 언약의 유업으로 받은 그 이삭을 자기 손으로 그야말로 잡아야 하는 것이다. 그도 인간이다. 게다가 그는 사랑하는 아들을 가진 노년의 아버지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실상은 아브라함은 공포와 전율을 가득 안고서 맨 정신이 아닌 반은 얼이 나간 상태에서 삼일간의 먼 길을 떠났을 것이다. 브엘세바에서 모리아 산까지의 지리적인 거리가 100킬로 정도 된다고 한다. 이 삼일간의 강요된 여정 속에서 아브라함은 내내 동안 어떤 생각을 했겠는가?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일이 떠오를 것이다. 이삭을 얻기까지 그 파란만장한 일들과 실패, 좌절, 부끄러웠던 일들이 다시 떠올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우여곡절 끝에 이삭은 태어났고, 이름만큼이나 웃음을 허락했던 그 아들의 존재로 인해 다시 사는 것 같았던 정말 꿈과 같은 시간들이 주마등(走馬燈)처럼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삭만 생각하던 어느 한 순간, 마치 자신이 이삭만을 생각하듯,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자신을 품어 오신 것도 깨달았을 것이다. 갈대아 우르에서 주권적으로 자신을 부르신 순간부터 하란에서 주저하며 잠시 정착했을 때, 또 애굽의 바로에게 자신의 아내인 사라를 누이로 속였던 부끄러운 일들, 그리고 이른바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 혼자서 약속하신 그 기억들, 그 모든 부족함 덩어리였던 그 자신을 여기까지 이끌어주시며 참아주시고 기다려주셨던 하나님의 그 모든 인내의 과정들을 다시 새록새록 기억하고 반추했을 것이다. 이삭에게만 갇혀있던 시선을 넘어서 마침내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시는지 주시고자 하는지, 뚜렷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과 함께 했던 그 수많은 날을 소급해가며 그 추억 안에 영원히 감추고 싶은 자신의 모자람을 끝까지 덮어 주셨던 하나님과의 그 소중한 시간을 마음에 새기며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다시 고민하고 또 고민해 보았을 것이다. 아브라함에 3일의 시간은 지난 시절을 다시 반추하는 추억의 시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더하 나위 없이 잔인한 시간이기도 했다. 또한 3일의 시간은 그가 얼마든지 마음을 달리하여 다시 브엘세바로 돌아갈 수도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3일은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다. 잊지 말아야 한다. 믿음과 불신앙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왜 하나님의 3일간의 여정 끝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3일이란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3일간의 여정은 과연 아브라함의 마음에 일관성 있는 믿음의 태도가 유지되는지 시험할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 잔인한 3일의 여정에 대해
 
※칼빈은 다음과 같이 주석을 했다.
왜 하나님이 이삭의 번제를 3일에 기한을 주었을까?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다들을 곧바로 죽이는 것을 요구 하지시는 않으시지만 그로 하여금 3일내내 명령을 실행하는 것, 곧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것에 대해 생각으로 시달리게 하신다.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준비를 하면서 그는 더 극심하게 자신의 모든 의식과 감정이 완전히 소진되며 극단의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칼빈-
 
이 순간 사랑의 하나님은 없다. 오직 비할 바 없이 잔인한 대적으로 오신 하나님, 우리의 위로의 하나님이 아니라 가장 큰 적으로 오신 하나님만이 아브라함 앞에 서 계실 뿐이다. 마침내 엄청난 불안감으로 그가 고통을 안고 심연처럼 가라앉은 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수행한다. 그 장면을 떠올려보라. 손에 불과 칼을 꼭 쥔 채 말없이 제단으로 접근하는 아버지 아브라함, 바로 앞에는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 있다. 그는 자신을 번제로 태울 제단 나무를 지고 한 걸음 앞에서 걸어가고 있다. 이 비장하고 고독한 신앙의 사투 앞에 침묵을 깨는 이삭의 질문 앞에 아브라함은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목마름과 함께 극단의 고통과 가슴 저림을 느꼈을 것이다.
 
*창세기 22:7-8,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의 대답은 얼핏 담담해 보인다. 아브라함은 뭐라고 말하는가?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대화를 통한 이 비애감은 이삭의 꾸밈없는 호기심, 아버지는 아브라함의 억누를 길 없는 애정, 아브라함의 모호한 대답 속에 담긴 마음까지 드러나게 하면서 우리를 눈물짓게 한다. 이 짧은 대화가 끝나고는 목적지에 다다를 때까지 내내 침묵이 이어지는 것 같다. 성경은 아무 대화도 말하지 않는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다.
 
※스파이저라는 신학자는 이를 두고 ‘인간의 모든 문학에서 가장 가슴을 애이고 슬픔을 자아내는 작은 침묵이다’라고 말했다.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라는 이 아브라함의 고백은 그냥 임기응변이라는 말이라기보다는 이 이야기의 전환점으로서 믿음의 진술로서 혹은 이후에 대한 예언으로서 혹은 기대에 대한 기도와 같은 아브라함의 바램으로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창세기 22:9-10,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0대의 나이가 충분이 되었을 법한 소년 이삭이 백세가 훨씬 넘은 노인 아버지에게 잠잠히 결박당하는 장면을 보면, 어쩌면 이 번제 사건은 아브라함의 신앙의 정수이면서 동시에 이삭 신앙의 정수임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했지만 이삭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브라함 모두에게 순종했기 때문이다.
 
*창세기 22:12,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키에르 케고르가 ‘ 포와 전율의 제단’ 라고 잘 이름 지은 것 같다. 이 제단은 이제 하나님을 드리는 제단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8절에 다소 무오하게 표현된 말은 아브라함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 실제적으로 완전하고 정확히 성취되었다. 마침내 그 산의 이름은 여호와께 준비하시리라, 혹은 다른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여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를 뜻하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가장 깊은 고통 속에 있는 자들에게 다가 오신다는 것을 마침내 전인격적으로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시험은 끝났다. 분명 이 시험은 아브라함을 연단하고자 하는 목적이 일차적으로 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 시험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과 더 깊은 신뢰 관계로 나아가고자하는 하나님 당신의 더 깊은 관계로의 부르심이자 초청임을 밝혀진 것이 아닌가? 그 잔인한 시험의 정체는 하나님 당신의 더 깊은 관계로의 부르심이자 초청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아브람이 가장 사랑했던 자식을 요구하고 나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애가 타들어가는 아브라함을 보면서 단지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평가하겠다는 시험의 수준으로 그를 평가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흔히 말하듯 우리가 아주 쉽게 단정해서 말하듯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하나님이 눈여겨보시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가 그것을 당신께 바칠 수 있는지, 아닌지, 유혹처럼 시험하시는 하나님도 아니다. 우리의 마음속 내내 힘들게 했던 그 시험이라는 말에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사실은 우리를 하나님 당신과 더 가까운 관계로 이끌어내기 위한 단련이었으며 훈련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 시험의 마침은 마침내 모든 복의 근원이자 사랑의 종결인 자기 자신, 곧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아버지의 마음인 것이다. 이제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의 절망적인 곤경은 하나님이 예기치 않은 준비하신 우리가 아주 쉽게 알고 있는 여호와 이레, 때문에 축제와 환희로 반전되었다. 여호와 이레에서 준비되신다는 것의 첫 번째 뜻은 ’본다‘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준비하시기로 했지만 그 아브라함의 시험의 과정을 보고 계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신다는 것이 여러분에게 어떠한 의미로 가다가오는가? 이제 아브라함은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것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된 믿음의 사람, 진정한 의미에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욥처럼 아브라함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되었음을 끝내 증명이 되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칠 수 있었던 최종적인 판단의 결론에 성경은 아주 세밀하게 말한다.
 
*히브리서 11:17-19절,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믿음과 순종을 끝도 없이 시험받아야 하는 삶의 위기는 여전히 성도인 우리들에게 역시 감당해야 할 대가이자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과정일 것이다. 우리가 성도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지를 시험하는 과정은 원치는 않지만 우리에게 항상 다가오는 것 같다. 그러한 문제는 여호와의 분명한 명령에 대한 순종의 시험일 때 그것이 때로는 아주 많은 경우 불합리함을 넘어서 때로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고 급기야 우리 인간으로서의 어떤 정서와 문제의 정체성을 파괴한 것 같은 순간으로 우리에게 공포와 전율의 순간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창세기 22장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아브라함은 결국 순종했음의 간단한 결론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실 때, 그 시험의 의미는 우리 신실함의 질을 가늠하시는 권한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그 축복이라는 섭리의 중심에는 필연적으로는 역경이 있고 무엇보다 희생이 자리하며, 그것은 때로는 실패의 길처럼 보이지만 실패의 길처럼 보이기에 우리에게 가장 큰 대적으로 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를 풀어주고 힘과 위로의 대상인 만유의 주제이신 그분이 우리에게 가장 큰 숙제와 부담으로서 우리의 시련의 이유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제임스 크라슈어라는 신학자는 창세기 22장에 의미를 이렇게 도전적으로 평가했다. 간단히 말해서 ‘이삭의 번제의 이 부분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라는 것에 중요한 질문에 대답한다. 어떤 사람들에게 진정한 의미란 하나님께 버림받은 상태로 외로이 걷는 것을 의미하며 더 나쁜 것은 때로는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장 악한 대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헬렌 로즈비어라는 선교사님이 있었다. 여자 선교사인 이 헬렌은 영국에서 캠브리지 의대를 졸업하고 1953년 선교사로 콩고에 파송되어 나간다. 의료선교를 활발히 잘 현지에서 감당하던 중에 1964년 콩고전이 시작되었다. 격동의 시간동안 수많은 동료 선교사들을 잃고 운전을 해주었던 평신도 친구는 이층에서 뛰어내려서 사람을 폴더 핸드폰처럼 밟고 짓이기는 살육을 당했다. 헬렌 역시 반란군들의 집단으로 성폭행과 윤간을 당하며 극단의 고통을 겪었다. 그분이 자신이 어떻게 엄청난 시련 앞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가에 대해 고백한 영상에서 제가 받아 적은 부분이 있다. ‘잊혀 진 가방’이라는 영화에 고백이 나온다. 여러분은 모든 것을 던져서 캠브리지 의대의 최우수로 졸업해서 졸업한 그날 가방을 가지고 왝이라는 선교 단체에 와서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지난날을 두고 콩고라는 나라로 가서 두문불출 선교에 힘썼는데 이런 극단적으로 동료들이 죽고 자신이 성폭행을 당하며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이분에게 믿음을 가진 신앙인인 우리가 어떻게 위로를 할 수 있는가? 잊혀 진 가방에서 헬렌 선교사님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반란군이 포로로 잡힌 적이 있었다. 지독하게 무서운 어느 날 밤 악하고 못된 사람들에게 혼자 잡혀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래도 나에게 감사할 수 있느냐?“고 물으셨다. 저는 ”감사할 수 없다“고 하나님께 말씀드렸다.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믿는 것에 대해 나에게 감사할 수 있니?” 제가 하나님을 믿는다고만 생각했지 하나님께서 저를 믿는다는 것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믿는다는 것이, 저를 믿기 때문에 허락하신 일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시라면 그날 밤 제가 대답하기를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모두 이해가 안 되고 이 말도 안 되는 절망과 실패가 어떻게 하나님께 도움이 되는지도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퍼즐 한 가운데 제가 있고 또 있기를 하나님 당신께서 원하신다면 ‘네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저는 그 말을 하자마자 하나님의 놀라운 평안이 저의 마음을 지배했음을 거부할 수 없이 분명히 깨달았다. 어떠한 어려움, 끔찍한 환경 속에서도 저를 믿어주시는 하나님께 비로소 마침내 전적으로 저는 감사했다.”
 
여러분, 제대로 들었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믿으신다니,,, 놀랍지 않는가? 그러나 진실이다. 그분은 우리를 신뢰하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고 동시에 우리에게 고난과 핍절됨을 주셨고, 좌절과 낙망과 서러움을 허락하셨다. 그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부잣집 시어머니 같이 하나님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너무 친정이 가난한데 친정 때문에 눈물 짖는 며느리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관망자가 아니셨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아브라함은 자신의 삶 전체를 인도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그 가슴벅찬 기억들을 결코 잊을 수 없었기에 그분을 따랐지만 아름답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알지 못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인식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까지는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의 삶을 역사하신 하나님을 넘어서 하늘 보좌를 막자고 그 영광을 버리시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지 않는가? 그 절절한 하나님의 사랑인 우리가 아브라함도 상상할 수 없었을 그 엄청난 사랑에 절절하다고 못해 자신의 살을 찢겨 죽기까지 내 주신 그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 안 우리가 어떻게 이대로 그저 나, 나의 철저히 묶여버린 나만의 삶에 매몰되어 살 수 있는가?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주변을 둘러보면 우리는 너무나 힘든 시절을 그야말로 악의 관용에 살고 있다. 숨 막히는 악의 전쟁을 하루하루 고통스럽게 묵도하고 있다 이제 단지 사람을 죽인다고 뉴스에 나올 것 같지 않다. 어떻게 사람을 잔혹하게 죽여야 뉴스에 나올 수 있는가? 10대, 20대, 30대, 모든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인 한국 사회에서 태어나서 30대에 이르기까지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인 사회에서 아프칸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처럼 실질적으로 전쟁에서 죽은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한국 사회에서 과연 이 희망이 실종된 한국 사회에서 어쩌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신앙을 가진다는 것, 믿음을 말한다는 것은 고단함을 넘어서 기적 같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아는 바대로 세상이 믿는 자를 향해서, 교회를 향해서 교회에 희망이 있는지, 신앙인에게 희망이 있는지 기독교에게 희망이 있다는 적을 말한 적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 2천년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였으며 피 흘림의 역사였다. 코로나여서 힘든 것이 아니라 원래도 우리의 삶은 늘 힘들었다. 늘 만만치 않았다. 언제 한 번 지금 너무 행복해서 이 행복이 이전과 기억도 나지 않는 어떤 단절된 시간이 우리에게 있었는가? 우리는 세상이 인정해서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우리는 이미 희망 그 자체이다. 왜 그런가? 우리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언제나처럼 어김없이 묵묵히 오늘도 이루어가시기 때문이다.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아브라함이 만약에 하나님이 드리라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면 모리아 산에서 가는 여정에서 다시 돌아갔거나, 그랬다면 우리가 아는 아브라함,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되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요 절대로 그렇지 못할 것이다. 왜 그런가? 창세기는 50장까지 있다. 아브라함이 설사 이삭을 번제로 드리지 못했을지라도 우리의 신실한 하나님께서는 창세기가 50장이 아니라 60장, 70장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아브라함을 아브라함 되게 하셨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브라함이 어떠해서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억하라. 아브라함이 탁월한 것은 단지 이삭을 바친 그 행위의 결과 자체인 것이 아니라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 속에서도 아브라함에게 말하고 싶으신, 알려주고 싶으신, 하나님 당신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버렸기 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 한다.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을 애틋하게 바라보며 그의 삶 전체를 이끄셨던 그 하나님이 바로 여러분과 저, 우리 아버지이시며 우리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가 다시 한 번 일어설 힘을 얻을 수 있다면 그리하여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힘을 잃어버려서 좌절가운데 핍절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들에게 유일한 우리의 희망과 구원의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이름을 전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가장 빛나는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우리의 성공과 잘남, 그 어떠한 성취와 상관없이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요한복음 5장 41절의 말씀으로 단언하신 그 하나님께서 헬렌 선교사님의 고백대로 우리를 믿으신다면, 신뢰하신다면, 시험과 좌절, 낙망은 이미 주 안에서 버팀의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우리를 언제든 다시 좌절 가운데 넘어진 그 자리에서 세울 수 있는 유일하지만 강력한 단 하나의 희망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요약
우리를 하나님 당신과 더 가까운 관계로 이끌어내기 위한 단련이었음을 깨달아서 그 시험의 마침내 모든 복의 근원이자 사랑의 종결인 자기 자신, 곧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아버지의 마음인 것이니,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음을 인식하고 우리 안에 순간적으로 때때로 역사하여 버리는 욕망의 욕구들,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마저 우리의 수단과 과정으로 왜곡하여 버리고 그 하나님을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지 않고 사는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여 브엘세바에서 모리아 산까지 걸어갔던 3일의 여정 가운데 찢겨버린 심정 가운데 하나님이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처럼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오전함의 고봉을 향해 더욱 훈련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연단은 더 깊은 관계로의 부르심임을 깨달아서 하나님 앞에 선 아브라함과 나 자신임을 기억하여 믿음으로 은혜의 보좌로 담대하게 나아가야 한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지시하신 모리아 산은 예루살렘에 있는 것으로 브엘세바에서는 약 80Km 떨어진 곳이었다. 거기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가혹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하나의 시험으로써, 아브라함의 믿음을 성장시키려는 계획이었다. 이처럼 상상도 못할 어려운 시련 뒤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숨겨져 있는 경우가 있음을 깨닫고 우리는 이 시련을 믿음으로 잘 극복해야 할 것이다. 이 말은 번제에 쓸 어린 양이 어디 있느냐는 이삭의 물음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이다. 이 대답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고뇌와 신앙의 승리를 읽을 수 있다. 그는 모든 것, 곧 독자 이삭까지도 하나님의 손에 맡겼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대로 따르겠다는 그의 결단으로 인해 그의 신앙은 완성에 이르게 될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하여 단 위에 놓고 칼로 잡으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경외가 참되다는 것을 인정하셨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중심이며, 이 중심은 일순간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평생 동안 지속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지체하지 않고 신속하게 순종했다. 그는 중심이 흔들리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중심에서 우러난 행위가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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