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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어떤 부분은 분명 다른 사람입니다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비차’이다. 작가 사샤 소콜로프의 친구이자 이웃인 지적장애아 ‘비차 플랴스킨’. 그 이름을 굳이 외울 필요는 없다. 딱히 중요하지도 않다.

1.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소. 바람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모든 게 되어버리는 세상 또는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리는 세상. 이 문장에 대해선 누구도 명백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그걸 바랐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자유, 무엇이든 되지 않을 자유. 우선 자유라는 단어를 아주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한다. 비차가 그 무엇보다 자유를 선택했다니까 하는 말이다.

2. 당신은 완전한 하나인가?

‘비차’가 내게 물었다. 당신은 완전한 하나인가? 이런 질문은 너무 불편한데. 나는 적잖이 바보노릇을 해보았지만 역시 통하지 않았다. 정색하며 ‘당연히 완전한 하나야’라고 대답해봤자 소용없다. 거짓말하지 마. 언제나 비차는 나를 들들 볶는다. 비차의 목소리를 빌려 헛기침까지 해가며 대답했다. 그래, 맞아. 완전한 하나가 아니지. 정말로 어색하고 부끄럽고 그럼에도 퍽 쉬운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이니까.

“날짜는 누군가 생각나면 오는 거야. 때론 한번에 여러 날이 곧바로 오기도 하지. 혹은 오랫동안 하루도 오지 않는 때도 있어. 그때는 너는 공허 속에서 살아.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심하게 아프게 돼.”

문득 내가 지금 시간 밖에 있는지 시간 안에 있는지, 궁금했다. 그러다 날짜 없는 시간에 대해서 아주 진지한 자세로 골몰하기도 했다. 관자놀이를 쿡쿡 찔러가며 고민한 결과, 그게 바로 비차의 시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바보들을 위한 학교’에 다니는 미친 코흘리개, 특수학교의 형편없는 학생 비차가 이렇게 훌륭한 과학자였다니! 왜 아무도 몰랐을까? “내가 또 하고 싶은 말은, 각 사람에게는 누구와도 닮지 않은 자신만의 특별한 삶의 달력이 있다는 거야.”

어쩐지. 어쩐지.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어떤 실마리가 단숨에 풀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는 시간이 흘러 쌓이는 생의 두께랄까 층위에 대해 제대로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어쩐지. 어쩐지. 늘 속으며 사는 기분이더라니. 결론이 나왔다. 이 모든 불행은 우리가 가진 저만의 특별한 삶의 달력이 세상의 그것과 아주 일치하지 않은 탓이다. 우습고도 싱거운 일이다. 어느 날 나의 하루가 제 맘대로 내게 오지 않을까, 걱정이다. 나를 오래전에 죽은 사람으로 오해할까, 심히 불안하다. 비차, 넌 순식간에 나를 늙은이로 만들어버렸어.

3. 제 이름은 아무개예요. 당신은요?

비차는 자신을 그렇게 소개한다. 아무 해(年)의 아무 월(月)에 아무 일(日), 아무 곳의 아무개. 아무도 비차에게 다시 소개해달라는 부탁을 하거나 이름을 되묻지 않았다. 사람들에겐 누군가의 이름 따윈 별로 궁금하지 않은 게다. 오랫동안 개명할까, 고민했었는데 모두 쓸데없는 생각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순전히 재미 삼아 아무개라는 단어 위에 줄을 박박 그었다. 그 위에 내 이름을 덧씌웠다. 순전히 재미 삼아 벌인 짓이었다. 나는 행복해졌다. 별것 아닌 일로 행복했다. 이제 나는 내 이름을 비차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었다. 이름을 지우는 것만으로 그 모든 일들이 가능했다. 그것의 시작은 아주 사소한 놀이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비차가 선택한 자유가 무엇인지 슬슬 감이 오기 시작했다.

4. 우리 모두는 이전에 바보였지만, 바람을 나르는 자가 될 거예요.

바람을 나르는 자가 되기 위해선 자전거를 끌고 집 밖으로 나간 다음, 천천히 자전거의 페달을 밟으면 된다. 물론 이런 일쯤이야 누가 시키지 않아도 때가 되면 저절로 그리 될 일이다. 더 많은 모험을 원한다면 중절모와 지팡이를 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순식간에 어른이 될 수 있으니까. 비차가 이미 우리를 대신해서 그 많은 일들을 해치워버렸지만 누가 처음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바람을 나르는 자가 될 거예요.” 비차가 ‘우리’라고 말해줘서 고마웠다. 부분적으로, 우리는 ‘비차’임이 틀림없다. 그러니까 우리 중 누군가가 비차가 되어 슬그머니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5. 우리는 사라짐의 한 단계에 있어요.

“이 음악이 어제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들 중 그 누군가였지.”

그렇다면 이 음악의 내일도 우리들 중 그 누군가이겠지. 이 바람의 내일도.


황현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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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이상… 두 세계를 살아가는 소년

♣'바보들을 위한 학교'줄거리

러시아 현대 문학의 대표 작가이자 망명 3세대 중 가장 뛰어난 소설가로 주목받고 있는 사샤 소콜로프는 1943년 캐나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소련 스파이 활동이 발각돼 추방당한 후 소련에서 자랐으나, 몽상적이고 자유로운 기질 탓에 군사학교 등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결국 여러 번 탈출을 시도했으며 마침내 1975년 망명에 성공했다. 이러한 여정은 그의 작품에도 잘 드러나 있으며, 대표작인 『바보들을 위한 학교』는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효시가 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바보들을 위한 학교』의 주인공 비차 플랴스킨은 지적장애아들을 위한 특수학교에 다니는 소년으로, 자신을 두 명이라고 생각한다. 비차는 두 세계를 동시에 살아가는데 첫 번째 세계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현실의 세상이고, 두 번째 세계는 소년이 상상하고 꿈꾸는 동화 같은 세상이다. 이 두 번째 세상에서 비차는 특수학교의 학생으로 살기도 하고 이 소설의 ‘작가’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강에 핀 하얀 수련 님페야 알바로 변신한다. 성인으로 자라 비차가 짝사랑하는 선생님 베타 아카토바와 결혼을 앞두고 행복해하기도 한다. 소설 내내 두 세계를 오가며 펼쳐지는 비차의 상상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정신분열증을 앓는 소년의 내면을 마술 같은 언어로 그려낸 『바보들을 위한 학교』는 전 세계 문단의 극찬을 받았으며 소콜로프를 세계적인 작가로 자리잡게 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이 소설을 읽고 “매력적이고 감동적이며 비극적인 작품”이라고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원제: Школа дла дураков

저자: Саша Соколов(1943~)

발표: 1975년

분야: 러시아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바보들을 위한 학교

옮긴이: 권정임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58(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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