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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12월 20일)
제목: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먈씀: 마가복음 5:35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설교자: 이민건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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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5:35-42,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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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살아계신 아버지 오늘 수요 저녁 기도회를 통해 여전히 죄로 인해 공고한 우리들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다는 분명한 믿음과 그 사실로 다시 기쁨을 회복하여 주옵소서. 주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성탄의 달 12월에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한 수요 저녁 기도에 참여하신 성도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이 예배를 통해서 예수님을 꼭 만나셔서 오늘 설교 제목처럼 크게 놀라고 놀라는 인생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시 한 번 더 간절히 소망 드립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은 마가복음 5장 35절에서 42절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살면서 크게 놀라고 놀랐던 경험 혹시 계십니까? 제가 10년 전의 일인데요. 지인 1명이 로또 한 장을 주시더라고요. 거절했습니다. 사실 저는 목사라서 로또를 피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습니다. 제가 아는 로또는 지난번 담임 목사님께서 이 설교 시간에 말씀하신 창세기 12장 4절에 나오는 그 롯만 제가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 로또인데요. 이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여하튼 그분과 헤어지고 기차역으로 갔는데 그분이 전화가 오셨습니다. “목사님 가방에 로또를 넣어두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가방을 열어서 생전에 처음 보는 그 종이 그 조각이 뭐라고 심장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저의 심장을 뜨게 하는 그 마법의 종이를 제가 이제 보기 시작했는데요. 한 칸씩 한 칸씩 보는데 첫째 자리도, 둘째 자리도, 셋째 자리도 맞는 겁니다. 그때 제가 기차역에 있었는데요. 저도 모르게 기차역에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와, 대박!!! 그런데 저도 정말 저를 놀라게 만드는 일은 그다음 자리부터였습니다. 여러분 넷째 자리도 맞는 겁니다. 정말 오늘 설교 제목처럼 제가 크게 놀라고 놀랐습니다. 정말 여러분 심장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찬송가 288장의 가사처럼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저를 오랜 가난 가운데서 구원해 줄 그 종이만 보였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은 이 믿음 없는 목사가 물질을 의지하면서 살까 봐 두 자리는 모두 틀리게 하셔서 저는 5만 원에 당첨이 되었습니다. 사실 제가 1등을 했다면 절대 여러분에게 이 자리에서 말하지 않을 겁니다.
 
오늘 본문에도 여러분 이 크게 놀라고 놀라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이 사건은 제가 로또 1등이 될 뻔한 사건과는 정말 비교도 안 되는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교회를 오랫동안 다니신 분들은 몇 번 들어봤던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본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제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25절에 나오는 한 여인이 믿음이 좋아서 병이 나았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야이로 라는 사람이 아주 큰 믿음이 있어서 병이 낫고 딸을 살렸다. 여러분 이 정도의 의미만을 가진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왜냐하면 저와 여러분이 들고 있는 이 성경은 우리 인간의 믿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시며, 인간을 향한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에 대부분의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믿음이 매우 컸기 때문에 오늘 제가 설교 제목으로 정한 크게 놀라고 놀라는 이런 기적적인 일이 생긴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크고 크게 놀라고 놀라는 일이 오늘 본문의 주인공들에게 일어난 것일까요? 먼저 오늘 본문의 사건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사건입니다. 혜성같이 등장한 예수란 서른 초반의 청년이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면서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길을 가다가 무슨 기준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12명의 제자들을 세우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라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개념을 이야기하고 다니셨고,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정확한 타이밍에 폭풍이 불고 있는 배 안에서 주무시다가 일어나서 바다를 꾸짖으셨는데, 갑자기 바람이 그치고 심지어 성난 이 바다를 잠잠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사건 바로 직전에 거라사 인 지방에서는 귀신 들린 사람이 이 청년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말할 만큼 그는 그 시대에 혜성같이 등장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이었죠 그 청년이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건너가고 계셨는데, 이미 이 청년의 소문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회담장 중에 한 사람이고 이름은 야이로 라고 하는 사람이 갑자기 예수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간곡히 부탁을 하고 있는 거예요. 회당 장은 당시 회당의 건물 기구 두루마리 성경을 관리하는 사회적 지위가 매우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여러분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간곡히 부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22절 23절 함께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5:22-23,
22 회담장 중에 하나인 야유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앞에 엎드려.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아멘 그런데 여러분 이게 웬일입니까? 그 시대에 회담장의 지위가 높아서 그런지 아니면 그가 너무 간절하게 부탁해서 그런지 예수님은 그를 따라 나서십니다. 24절도 한번 보세요.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 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큰 무리가 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상상이 가십니까?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서로 밀고 당기고 있었습니다. 아마 거리가 홍대 거리처럼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한 여자가 등장합니다. 25절, 26절 제가 한번 읽어드릴게요.
 
*마가복음 5:25-26,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라고 기록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혈루 증으로 12년간 고생을 하고 있는 여자였습니다. 여러분 혈루증이란 오늘날로 말하면 만성 자궁 출혈증입니다. 보통 여자는 생리 때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피가 나오지만 이 병은 생리와 상관없이 불규칙적으로 한 번 하열하면 멈추지 않는 아주 무서운 질병이었습니다. 당시 의술이 지금처럼 발전되지 않았기에 26절에 나오는 것처럼 많은 의사에게 그 여자는 많은 괴로움을 받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처럼 여성 병원도 있지 않았습니다. 비록 의사였지만 다른 남성에게 여성의 하체를 보여준다는 것은 얼마나 수치스러웠겠습니까? 또한 그 여자는 12년간 긴 세월을 이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12년, 4,380일 시간으로는 10만 5,120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 설명해 드린 고통은 그 시대에 시대적 상황, 종교적 상황을 배제하고 설명 드린 것입니다. 이 여자는 더 이 여자에게 있어서 더 큰 문제는 혈루 증으로 인해 모두에게 부정한 여자로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라는 것입니다. 레위기 15장에 보면 이 유출 병 기류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나와 있는데요. 이 여인은 레위기에 나오는 율법처럼 유출 병으로 인해 부정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 이 여자가 유출 병으로 부정한 것도 문제였지만 이 여자가 걸린 유출은 정상적이 아닌 비정상적인 유출이었습니다. 생리와 같은 정상적인 유출은 옷을 빨고 목욕을 하고 정결케 하면 해결이 됩니다. 하지만 이 유출 병에 걸린 부정한 사람은 속죄제를 들여서 속죄할 만큼 하나님 앞에 또한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죄 있는 사람으로 취급을 당한 것이 그 여자를 정말 더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레위기 15장 25절 말씀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레위기 15:25,
25 만일 여인의 피의 유출이 그의 불결기가 아닌데도 여러 날이 간다든지 그 유출이 그의 불 결기를 지나도 계속되면 그 부정을 유출하는 모든 날 동안은 그 불결한 때와 같이 부정한즉.
그의 불결기가 아닌데도 여러 날이 간다든지 그 유출이 그의 불 결기를 지나도 계속되면 제사장은 그 한 마리는 속죄제로 여호와 앞에서 속죄해야 된다. 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죄가 있는 여인이었다. 라는 거예요. 그리고 제사장은 제사장에게 가서 그 죄를 해결해야 하는 여자였습니다. 이런 부정한 여인이 지금 수많은 군중들을 해치고 예수님의 손에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여자가 이렇게 행동한 동기에 대해서 또 이렇게 설명합니다. 28절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5:28,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이로라.
-곧이어 성경은 그녀의 혈류 근원이 곧 말랐고 병이 나은 줄 그녀 스스로가 느낄 만큼 매우 강력한 치유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의 몸이 느낄 만큼 강력한 치유가 그 순간 일어났습니다. 요즘 고등학생들이 힘들어하는 3년의 시간이 아니라, 그 4배에 시간 동안 그녀를 괴롭게 하던 질병이 그 뿌리까지 나았으니까 여러분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저 같으면 소리를 지르고 정말 난리가 났을 겁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기쁨을 느낄 틈도 없이 우리 예수님은 갑자기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옷의 손을 되었느냐?” 여러분 예수님의 의도를 전혀 알지 못했던 제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런 겁니다. 왜 당연한 걸 물으십니까?” 그때 예수님은 이 일을 행한 여자를 보려고 주변을 둘러보십니다. 그때 여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33절 말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5:33,
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여자는 이실직고 합니다. 이런 말이 되겠죠? 예수님 저는 유출 병으로 12년간 고생을 했습니다. 많은 의사들에게 가서 수치를 당하고 재산까지 다 허비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방금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이후로 제 몸이 완전히 다 나았습니다. 부정한 제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여자가 단순히 예수님 몰래 예수님 옷자락에 손을 댄 사실을 들켜서, 지금 예수님 앞에 엎드려 여러분 지금 두려움에 떨고 있었을까요? 사실 이 사건은 지금 설교를 듣는 저와 여러분에게는 별 감흥이 없지만 당시에는 여자가 병을 나았던 이 기적만큼이나 이 여자의 고백이 이 상황을 함께 지켜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유출 병이 있는 여자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다면 예수님도 그 순간 부정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죄가 없다던 그분이 그 순간 죄인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자가 전한 그 속사정을 들은 주변의 사람들은 분명히 웅성거렸을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저 능력을 행하는 예수란 청년이 부정해졌대. 그리고 예수님 옆에서 이 상황을 부정이라는 의미가 어떤 의미이고, 그리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가장 잘 알았던 회당 장 야이로가 여러분 지금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어요. 성경에 나오지 않은 이야기를 제가 상상을 조금 더 더해서 죄송하지만 분명히 이 야이로는 율법을 가르치고 절하는 회당장이라서 분명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예수님 유출 병에 걸린 여자와 접촉했으면 예수님도 부정했을 건데, 율법대로 지금부터 저녁까지 무리와 격리를 해야 하는데, 내 딸은 어떡하지? 저 여자가 진짜 나은 것이 맞다면, 지금 가서 제사장에게 보여야 하는데, 나는 1초라도 급한데 난 어떡하지 이런 생각들로 야이로의 마음은 매우 힘들었을 겁니다. 야이로의 마음이 매우 다급했다고 생각하고요. 특별히 그가 가진 신학적 율법적 기준들 때문에 야이로가 매우 혼란한 상태였을 것 같습니다.
 
작년에 있었던 일인데요. 갑자기 아버지가 쓰러지셨다고 제 동생이 전화가 왔더라고요. 정말 그 순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만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급하게 아내와 함께 밤늦게 아버지가 계시는 대구로 내려갔는데 다행히 약물 부작용이란 의사의 소견을 받고 다음 날 퇴원을 할 수가 있었는데요. 제가 그때 밤늦게 대구로 운전해서 내려가면서 차 안에서 지금까지 제가 수십 년간 공부했던 신학적 율법적 가치들은 정말 일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힘없이 기도만 나오더라고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좀 살려주세요.” 지금은 아닌 것 같아요. 야이로의 신정 또 아마 이와 같았을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고민할 틈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35절 말씀 여러분이 한번 읽어주시겠습니다.
 
*마가복음 5:35,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 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여러분 이게 뭡니까? 아직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자신이 그렇게 사랑했던 딸이 죽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은 작고하신 고 이어령 씨가 쓴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에 그는 죽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은 타인의 죽음이었어. 동물원 창살 철창 속에 호랑이였지 지금은 아니야. 철창을 나온 호랑이가 나에게 덤벼들어 바깥에 있던 죽음이 내 살 갓을 뚫고 오지.’ 이어령씨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책에서 회고한 내용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야에로의 딸이 딸의 죽음은 회당 장 야이로에게 바깥에 있던 죽음이 자신의 살 갓을 뚫고 들어오는 매우 실존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이 절망을 깨고 우리 멋진 예수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6절을 한번 보세요.
 
*마가복음 5:36,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 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아멘, 예수님의 목소리의 톤이 어떠했는지, 그 목소리가 컸는지 작았는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은 회당 장에게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고 38절에 나오는 것처럼 회담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미 통곡함을 보시고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셨어요. 당시 장례식에는 헌화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집에서는 통상 2명의 피리 연주자들과 손으로 두드리는 이 타악기를 갖고 연주하는 장례 풍습이 있었죠. 회당장의 사회적 지위로 볼 때 이 규모는 훨씬 더 크고 모인 사람들도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헌화하는 자들의 소리가 야이로의 마음에 딸의 죽음에 대한 더 확실한 객관적인 증거와 40절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고 있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보면서 이 아이로는 절망했을 겁니다. 요즘 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야이로 딸의 죽음은 팩트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야이로의 부부와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데리고 죽은 아이가 있는 이 절망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41절처럼 행동하십니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내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시니라.” 아람어 이 달리다굼은 탈리타 소녀, 어린아이의 의미와 쿰 일어나라. 라는 뜻의 결합된 단어입니다. 학자들은 당시 이 어머니가 사랑하는 자녀들을 깨울 때 따라 일어나 탈리타 쿰. 라고 말했다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41절을 자세히 보시면 근원적으로 이 사실을 기록하고 이 본문을 읽는 우리에게도 분명히 무언가를 전하고 싶은가 봅니다. 여러분 41절을 다시 한 번 더 보시면요. 이렇게 기록합니다.
 
*마가복음 5:41,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여러분 그냥 예수님이 말을 하면 되는데요. 왜 굳이 손을 잡았겠습니까? 41절에 여러분 그 아이 누굽니까? 네, 야유로의 딸이 맞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그 아이의 상태는 지금 어떤가요? 네 죽은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그 아이는 죽은 그 상태부터 그 순간부터 부정해졌다. 라는 말입니다. 민수기 5장 2절에서 3절을 보시면요. 이렇게 나와 있어요.
 
*민수기 5:2-3,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모든 나병 환자와 유출 병이 있는 자와 죽음으로 부정하게 된 자를 다 진정 밖으로 내보내되.
3 남녀를 막론하고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 그들이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 내가 그 진영 가운데에 거하느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님은 이 사건만 해도 벌써 율법에 의하면 두 번이나 부정하게 되신 겁니다. 유출병자와 접촉을 했고, 죽음으로 부정하게 된 자를 만져서 부정하게 된 것이죠.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스라엘 진정 밖으로 지금 당장 내보내야 하는 부정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정한 30대 초반의 청년이 죽음과 부정과 모든 율법을 초월한 선포를 지금 41절 42절에서 하고 있습니다. 우리 큰 목소리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5:41-42,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아멘 내가 내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내가 내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시니까 죽음으로 부정하게 된 그 소녀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던 내 사랑하는 딸이 30대 청년의 말씀에, 즉각 반응에 지금 아버지 야이로의 눈앞에서 일어나 여러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사건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죽었던 딸이 갑자기 살아나서인지 아니면 하루에 두 번 부정을 저질렀던 이 메시아로 불리던 한 사람이 행했던 두 번의 부정을 이기고, 심지어 율법과 죄의 문제를 넘어서는 놀라운 기적 때문인지, ‘크게 놀라고 놀라워했다.’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오늘 이야기는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립니다.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12년 동안 혈루 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저와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그 고생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 그것을 복음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12년 동안 너무나 사랑스럽게 키운 딸이 갑자기 죽었던 그 절망의 순간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친히 개입하셔서 병을 치유해 주시는 것도 복음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죄로 부정해진 저와 여러분, 우리 인생의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시려고 우리 인생의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오셔서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그것이 이 위대한 사실이, 바로 복음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이 복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여러분 이 예배 때마다 크게 놀라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저와 여러분에게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예배 때마다 커피 한 잔 하면서 다리를 꼬면서, 핸드폰이나 보면서, 방관하는 자세로 예배를 드리면 안 된다. 라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시간 또 말씀으로 저와 여러분의 부정해진 모든 것을 살려내는 기적의 현장이 바로 이 예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복음, 이 변화의 시작, 크게 놀라고 놀라는 것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만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마가복음 5장 35절 이렇게 시작하는데요.
 
*마가복음 5:35,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아멘 놀랍게도 제가 복음서에 ‘아직 말씀하실 때’ 라는 구절을 설교를 준비하면서 찾아보니까 10번 넘게 나오더라고요. 국어사전에 ‘아직’이라는 단어 이런 뜻이 있었습니다. 아직 부사로 어떤 일이나 상태 또는 어떻게 되기까지 시간이 더 지나야 함을 나타내거나 어떤 일이나 상태가 끝나지 아니하고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아직 사업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아직 나의 사랑하는 가족이 사경을 헤매고 있으며, 아직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고,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연약한 모습으로 안아주신 내 본당에 앉아 기도밖에 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 예수님이 한 번만 말씀하시면 예수님만 저와 여러분의 곁에 계시면, 크게 놀라고 놀라는 일이 지금도 저와 여러분에게 일어날 수 있음을 여러분 이 시간 꼭 기억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래서 우리 오정현 담임 목사님께서 여러분 여기서 매주 목이 터져라 말씀하시잖아요. 기적의 토비새 나오라고요. 평범한 인생이 신적 개입을 통해 비범한 인생이 된다고요.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러 오는 장소에 온 힘을 쏟아서 나오시기를 다시 한 번 더 소망합니다. 그러면 ‘크게 놀라고 놀라운 일’이 저와 여러분에게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이 복음을 매주일, 매 토비새 때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 말씀을 듣는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에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여 따라서 ‘2033-50의 비전’뿐만 아니라 2023년 남아있는 2주밖에 없지만 기적의 주인공이 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요약
모든 부정을 이기신 전능하신 예수님을, 우리도 말씀으로 만나서 우리 모두 질병과 죽음의 문제까지도 해결 받는 은혜를 경험해야 한다. 두 번의 부정한 사건도 심지어 소녀의 죽음까지도 우리 예수님의 복음 앞에 사라지는 능력을 오늘 말씀을 통해 들었듯이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믿고 12년 동안 혈루 병 걸린 여인처럼 긴 시간 동안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의 문제도, 12살 때는 정말 미래가 창창한 아이에게 일어난 문제도 우리 예수님 앞에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음을 믿고, 우리 인생도 지루하고 힘없고 문제투성이의 인생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크고 놀라고 놀랄 수 있는 복된 인생이 되고, 경탄할 만한 인생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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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3년 12월 17일)
제목: "성탄에 깨닫는 태초 진행형 생명"
말씀: 요한일서 1:1~4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나님), 영광찬양대
대표기도: 안승훈 부목사님(1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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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1:1~4,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이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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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 영하의 강추위를 뚫고 여러분 나오셨는데 아무도 그냥 돌아가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거룩한 기대감을 가지고 이 안아주신 본당에 오신 여러분 성탄의 확실한 기쁨을 분명히 체험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지금 성탄의 절정기 이제 한 주일 남겨놓고 있는데 한국 사회는 한 몇 십 년 만에 후진국 중진국 선진국을 다 경험을 했어요. 문제는 뭐냐 하면 이렇게 하다 보니까 세대 간의 개성이랄까, 어떤 공통점이 쉽지가 않아요. 우리 지금 아이들은 이렇게 유리창 지나가면서 일을 하잖아요. 이렇게 스마트폰 이래 하면 다 나오니까 근데 어른들은 그거 쉽지가 않은데요.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 성탄의 진리와 기쁨이 온 세대가 공유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온 세대가 그래서 이번 주 다음 주 또 다음 주로 성찬식도 하고 또 25일 날 성탄 축하 예배드릴 터인데, 이 세 번에 걸쳐서 한국교회가 어른 세대나, 우리 자녀 세대나 공유할 수 있는 성탄의 확실한 진리와 기쁨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성탄에 깨닫는 태초 진행형 생명”이다. 그래서 한 번 들으면 무슨 말인가 잘 이해가 안 될 텐데 이런 뜻입니다. 오늘 1장 1절에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이렇게 나와 있죠.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이렇게 하려고 하다가, 그것만으로 끝나지 말고 이것이 오늘 내게 그대로 접목되고 확인되고 내 것으로 체험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런 의미에서 태초 진행형 생명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이제 제목을 붙였는데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기록된 말씀으로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 기록된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고 지금 우리를 변화시키는 말씀이 돼야 하는 것이에요. 이걸 일으켜서 기록된 말씀은 뤼튼 워드(Written Word) 기록되어 있죠? 그것은 예를 들어서 오늘 이 우리 육신의 차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금 나에게 하시는 말씀, 지금 나를 변화시키는 말씀은 세이 워드(Say word), 소위 ‘레마’의 말씀이다. 이런 말씀을 많이 하는데,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야 그물을 깊은 데 가서 내리라.’ 그러는데 베드로 입장에서는 지금 오전 10시쯤 돼갖고 깊은 데 그물 내려오면 고기 없어요. 자기 생각에는 그렇지만 자기의 생각과 경험과 이성을 뛰어넘는 ‘주님의 말씀이니까 듣겠습니다.’ 하고 그 말씀이 베드로에게 역사하는 말씀이 되었을 때, 베드로에게 처음 드는 말씀이 되었을 때, 그걸 레마의 말씀이다. 이런 말씀하는데 오늘 이 말씀이 기록된 말씀으로 끝나지 말고, 저와 여러분에게 지금 체험된 말씀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제가 이 요한 사도의 말씀을 여러분들과 같이 나누는데, 제가 지난번에 요한의 말씀은 굉장히 신비한 ‘영적 언어’라고 그랬어요. 이건 우리의 영의 눈이 열려야 된다고 말씀을 드린 것이에요.

예를 들어서,
사도바울이 하는 역할이 있고, 베드로가 하는 역할이 있고, 요한이 하는 역할이 있는데,
1. 베드로가 하는 역할은 여러분 아시는 대로 베드로는 스타트 끊는 사람이고 천국 열쇠를 가졌고 예루살렘 공교회를 세워가지고 시작하는 은사를 받았어요. 시작의 은사를 받았어요. 다시 베드로가 뭘 은사를 받았다고요? 시작은 우리들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잖아요.

2. 바울은 어떤 사람이냐? 바울은 고린도서에 보면 지혜로운 건축자 이런 말이 나오는데 바울은 세우고 집을 짓는 은사를 받았어요. 그래서 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바울이에요. 기독교를 비방하는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들이 바울이에요. 바울이 기독교의 모든 교리와 토대를 세운 것이에요.

3. 근데 요한이 한 일이 뭐냐? 요한이 예수님께서 요한을 불렀을 때, 이 이 신비로운 요한일서 이 말씀을 기록한 요한이 한 일이 뭐냐, 요한은 예수님이 요한을 불렀을 때 어떤 때 예수 요한을 불렀을까요? 마가복음에 보면,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석 그물을 어떻게 하는데요? 깁는데, 부르셨다. 여기에 중요한 뜻이 담겨 있는데 그물을 깁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요한을 불렀어요.

-무슨 바다에 나가 있을 때도 아니고 다른 거 할 때가 아니라 그물을 깁는다는 말이 영어로 맨딩(mending)한다. 그물을 고친다. 그물을 찢어진 곳을 다시 이렇게 메꾼다. 이런 뜻이 포함돼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한의 사역은 베드로와 바울에 비해서 요한은 찢어진 자, 상처 난 자, 정말 인생의 모든 것들이 다 포기된 자들을 다시 세우고 치유하고 힐링하는 데 은사를 받은 거예요. 그러니 오늘 우리가 이 성탄의 계절에 이 말씀을 우리가 들을 때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통해 치유가 돼야 되는 것이에요. 여기 여러분들이 고침을 받아야 되는 것이 상처 난 곳이 이렇게 꿰매져야 되는 것이에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오늘 요한일서를 이 썼던 때가 어떤 때인가 하면 AD 90년 이후에요. 사도들 가운데 요한이 제일 장수를 했어요. 1세대 2세대 다 거의 다 사라지고 요한만 남은 거예요. 그러니까 무슨 뜻인가 하면 1세대 2세대 시간이 60년, 70년, 80년, 90년이 지나고 나니까,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초대교회의 역동성, 소위 복음의 능력 치유, 대단한 변화, 기름 부음 이런 것들이 점점 사라지고 건조해지기 시작하고 매너리즘에 빠지기 시작한 거예요.

이걸 요한이 보다 견딜 수가 없네!!!. 이러면 안 되는데 복음은 능력이 있고 복음은 치유가 있고 복음은 힐링이 되는 것인데 왜 사람들이 이렇게 건조하고 힘들게 했을까? 요한이 너무 안타까워 가지고 더더구나, 초대교회가 요한 일서를 썼을 때 에베소에서 목회를 할 때였고 에베소 교인들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 많았는데 요한이 뭐라고 그러냐면, 에베소 교회가 잘했지만 너희는 첫 사랑을 버렸느니라. 정신 차려라 그걸 다시 치유하고 깨물고 새롭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에요. 그리고 이 요한일서를 쓴 배경 중에 또 하나는 당시에 이단들이 발호하기 시작했어요. 이단들이 막, 막 그냥 영지주의자들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들 여러분 만약에 예수님의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면 예수님의 성육신과 이 땅에 성탄에 오시는 걸 부인하고, 예수님의 육체로 오시는 걸 부인하면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완성될 수가 없어요. 피 흘림이 있어야 죄 사함을 받는데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게 되면 예수님의 구원 사역과 부활의 능력이 다 사라지게 되는 거예요.

거기에다가 AD 90년경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제 매일 박해를 받고, 도미티에노스 황제라는 이 악도가는 황제가 얼마나 박해를 하는지, 교회의 내면적으로는 역동성과 기름부음이 사라졌고, 이단들이 발로하기 시작했고, 강력한 핍박이 왔을 때 이걸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마치 사도 요한이 오늘 이 자리에 나타나가지고 여러분과 저를 격려하는 마음으로 그런 입장에서 이 말씀을 주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오늘 이 순간 사도 요한이 나타나가지고 저와 여러분들을 만지시면서 우리를 치유하시면서 우리에게 찢어진 그물을 다시 한 번 고치는 그런 마음으로 주신 말씀인 줄 믿으시기 바라는 것이에요. 아멘!!! 그리고 오늘 이 말씀을 할 때에 1장에는요. 나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전부 다 우리가, 우리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해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주목하고, 손으로 만짐 바라. 어떤 단선적인 것이 아니라 입체적인 거, 스트로가 됐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런 말씀을 할 때 우리는 가족 관계를 가지고 그러니까 사랑의 교회 오늘 오신 모든 성도들은 예수님 안에서 형제 , 자매인 줄로 믿습니다. 한국교회 전체가 형제자매가 된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입장에서 좀 더 깊이 들어 우리는 영적 가족이 된 것입니다. 영원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요한은 가족의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가족들이 잘 될 것인가? 어떻게 하면 가족들이 좀 제대로 이 생명의 역사, 복음의 역사, 능력의 역사, 이돈들 이단들의 발로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핍박받는 가운데서도 강력한 하나님의 은혜를 유지할 수가 있을 것인가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도 요한이 뭐라고 그러냐 2장 1절에 보니까 자녀들아 같이 읽죠.

*요한일서 2:1,
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 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에게 쓰면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니라.
-오늘 요한일서 1장부터 이걸 쓴 이유가 뭐냐, 가족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자녀들아 요한이 90이 넘었으니까,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자녀들아 너희들이 좀 행복하게 살려면, 너희들이 좀 제대로 살려면 너희들이 죄를 범하지 말아야 돼. 아니 죄를 처리해야 돼. 오늘 이 예배에 오신 여러분, 여러분 행복 하고 싶습니까? 여러분들이 정말 안정되길 원하십니까? 여러분들이 주님과 나만이 알 수 있는 샬롬의 평강을 유지하길 원하십니까? “주여! 우리 성도들의 모든 죄 문제를 해결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는 예수 믿을 때 구원받았지만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행복하게 살아야 될 거 아니에요. 그래서 뒤에 요한 1장 9절에,
*요한일서 1:9,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주님 앞에 자백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리라.
-그러신 거예요. 가족들 가운데서, 제발 미끄러지지 말고 넘어지지 말라. 오늘 강추위인데 연세 드신 분들이 제일 어려운 것이 넘어지면 안 되잖아요. 제가 넘어지지 않는 비결을 말씀드릴게요. 발뒤꿈치에 끝에 힘을 주고 그러면 안 넘어집니다. 젊은 분들은 이 중요성을 몰라요. 발뒤꿈치 끝에다가 힘 줘가지고 그러면 안 넘어지는 거예요. 60이 넘은 분들은 조심하기를 바래요. 이거는 팁이에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드리는 특전사에서 산악 눈 오는 산악지형을 탈 때 발뒤꿈치 끝에다 힘을 주고 탁 하면 물론 저도 배운 것이지만 여러분, 그런 마음으로 요한은 내가 이 요한일서를 쓴 이유가 뭐냐, 너희가 죄를 범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가족의 생명의 역사를 누려야만 될 것이다. 그거예요. 또 요한일서 5장 뒤에 보니까,
*요한일서 5:13,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한일서를 쓰는 중요한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게 함이라 영원한 생명의 수준을 제대로 깨닫기를 원하는 것이라. 그래서 이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하여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말씀하는 거예요. 영원한 생명을 이해하기 위하여 저와 여러분들이 가진 하나님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을 이해하기 위하여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태초가 크게 두 가지죠.
하나는 뭐냐 하면 물리적인 생명 시간적인 태초가 있어요.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거는 시간적인 시작 소위 물리적인 시작, 그러니까 영어로 말해 인 더 비기닝(In the Beginning)이에요. 그런데 요한이 얘기한 태초는 태초부터 있는 말씀 이거는 인 더 비기닝이 아니라, 프롬 더 비기닝(From the Beginning), 이거는 영혼의 시작, 영혼의 시작, 영원한 관점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그 시간에 대한 얘기예요. 그러니까 시간에 대한 개념이 많이 다른 거죠. 하나는 물리적인 시작이고 하나는 또 뭐죠? 영원한 시작인 것이 영원한 시점에서, 그런데 오늘 요한이 말하는 것은 물리적인 시작인 태초 1장 1절도 창세기 1장 1절도 중요하고, 또 요한복음 1장 1절에 있는 말씀 다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지금 여러분들이 경험해야 된다는 것이 지금 내 것이 돼야 한다는 것이 그걸 일컬어 “태초 진행형 생명”이다. 제가 이런 용어를 써보았어요. 다시요. 여러분 이 말씀이 기록된 것으로 또 물리적인 시간 혹은 영원한 시점에서의 시작 정도가 아니라 이것이 저와 여러분에게 지금 실제적으로 체험돼야 한다는 것이에요. 이걸 일컬어서 “태초 진행형 생명이다.” 제가 써놨어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예요.

▷태초 진행형 생명은 신앙 세계에서 체험하는 실존주의적인 시작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시작을 말한다.

-아무리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무리 태초부터 있는 말씀이 있어도, 지금 제가 저와 여러분들이 이 생명의 역사를 지금 내가 체험해야 ‘태초 진행형 생명이 돼야 오늘 영원한 생명의 수준을 저와 여러분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에요. 이런 거 있잖아요.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어떻게 해요? 풍성하게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 생명은 두 종류의 생명이 있어요. 하나는 뭐예요? 육신의 생명, 소위 ‘비오스’라는 거예요. 물리적인 생명이에요. 그런데 영적인 생명이 있어요. ‘조에’라는 생명이 있어요. 영원한 생명이 있어요.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얼마나 더 풍성히 누리느냐, 이걸 위하여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뭐냐 하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기록된 말씀으로 끝나지 말고, 이것이 너희에게 지금 체험되는 말씀이 되게 하라 이거예요. 지금 내게 레마의 말씀이 되게 하라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 태초 진행형 말씀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태초부터 신앙 세계 실존주의적 다시 한 번 시작.

▷태초 진행형 생명은 신앙세계에서 체험하는 실존주의적인 시작,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시작을 말하는 것이다.
-아멘. 내가 경험하는 태초 진행형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녀들아 요한이 볼 때 너희 메마르고 건조하고 생명력 없고 힘들고 여러분들 다 메너리즘에 빠져 있다면, 지금 이 모든 것들이 있다면 지금 시대 신선하게 지금 새롭게 지금 생명력 넘치는 것을 체험하기를 바란다 이거예요. 이게 태초 진행인 것이에요. 지금 성탄절 기간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성탄을 얘기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성탄의 은혜가 지금 내게 임해야 되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 토비새 있잖아요? ‘토비새, 토비새 나오면 은혜가 있다.’ 그리고 토비세 안 나오면 무슨 은혜가 있겠어요? 어제 우리 아침에는 토비새 때, ‘행복’이라는 찬송을 불렀어요.

◎“1. 화려하지 않아도 정결하게 사는 삶 가진 것이 적어도 감사하며 사는 삶, 내게 주신 작은 힘 나눠주며 사는 삶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2. 눈물 날 일 많지만 기도할 수 있다는 것, 억울한 일 많으나 주를 위해 참는 것, 비록 짧은작은 삶 주의 뜻대로 사는 것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고 이것이 행복 행복이라오.
-행복을 알지만 이런 것들이 여러분들에게 체화될 때 그것이 지금 나에게 주신 말씀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3절을 저희가 새로 창작을 했어요.
3. 믿음의 눈 가지고 소망하는 우리 꿈, 203,350의 비전 품고 걷는 삶, 주신 사명 붙들고 달려가는 우리 삶,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그리고 그다음에 뭐냐 하면 토비새에 오면 행복이라오. 세상에 줄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 토비새에 오면 행복이라오. 7천기도 용사와 기도하는 것 이것이 행복이라오. 몇 명만 아멘 하죠?.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인데, 아무리 이것이 있어도 지금 내게 체화가 되는 지금 진행형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제목을 ‘성탄에 깨닫는 태초 지능형 생명’이다. 이것이 얼마나 강력한지, 이것이 공동체적 체험으로, 가족의 체험으로 얼마나 강력한지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주먹하고 만진 바라.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그대로 가만히 있죠. 그리고 이제 그것이 아니라 이게 너무 강요하기 때문에 1절부터 4절까지 주동사가 있어요. 핵심 동사 그것이 ‘전함은’, ‘전함은’ 이라는 게 있어요.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는 뭐예요? 전함은, 너무 강력하니까 전하는 이게 핵심 동사에 그러니까 오늘 이것을 우리가 뭘 전하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이 내용을 좀 더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침체에 빠진 교회, 연약해진 성도 메마른 신앙 상황을 제대로 극복할 수 있도록 이 태초부터 생명의 말씀과 이걸 생명의 역사를 내 것으로 어떻게 현재 진행형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그리고 바울은 세우고, 베드로는 시작했다면, 요한은 우리를 고쳐주는데, 요한의 고침과 치유가 우리에게 있을 때, 태초부터는 이 생명이 우리에게 접목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오늘 오늘 핵심이에요.

▷현재 태초 지행형 생명에는 어떤 은혜가 있는가?
-그것이 나에게는 무슨 의미를 말하는 것인가?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능력을 삶의 현장에서 경험하는 자에게 어떤 은혜가 있을까요? 조금 깊이 들어가면 태초 진행형 생명의 역사가 있을 때 어떤 은혜가 있을까요? 하나 딱 말씀드린 이것이에요. 이것이 제대로 되면 태초 진행형 생명을 깨달으면 하나님의 모든 것이 내 것이 되는 것이에요. 너무나 놀라운 것이 시작되는 하나님의 모든 것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인격, 하나님의 영광이 이걸 제대로 깨닫는 자에게 진행형으로 깨닫는 자에게 내게 전가되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모든 것이 내게 부어지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이것도 여러분들 아멘, 이 정도가 아니라 오늘 이것이 여러분들의 실체적으로 실존적으로 경험되기를 바라는 겁니다. 이걸 위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에요. 다 같이 에베소서 1장 3절 시작!
*에베소서 1:3,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할렐루야 뭐가 전가되는가? 우리가 이런 태초 진행형 생명에 대한 눈을 뜰 때에 하늘에 속한 모든 신뢰감 복을 저와 여러분에게 맞춤형으로 나눠주신다. 이 말이에요. 이것이 되면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것인데, 다시요. 하늘에 속한 신랑 것이 우리 모두에게 부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찬송과 영광과 존귀와 부요와 지혜와 능력과 힘이 여러분들 개인에게 맞춤형으로 부어주신다는 것이에요.

부모가 자식에게 주고 싶은데 자식은 이거에 대한 어떤 간절함이라든지 또 필요가 별로 없는 것 같아서 그냥, 그냥 뚱하고 있으면요. 그건 부모 입장에서 굉장히 안타까운 것이죠. 좋은 걸 손녀딸에게 주고 싶은데, 손녀딸은 별로 관심이 없어! 얼빵한 거야. 그러면 부모 입장에서는 야 이게 참 안타깝다. 여러분 그런 일들이 우리 주위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에요. 아이들이 모르니까 부모님이 많은 걸 준비하고 계시는데 아이들은 잘 몰라요. 오늘 성탄의 여기 태초 진행형 생명의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접목될 때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것이 우리에게 부어주는 줄로 믿습니다. 이거예요.

저는 요한일서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을 청년 시절에 깨닫고 제가 뭡니까? 아무것도 아니죠. 그런데 이 말씀을 깨닫고 난 다음에 영의 눈이 열린 거예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주목하고 손으로 눈으로 보고 막 입체적으로 깨닫고 난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지냐 “오주여 내 주여 내 아버지여 이 몸을 사랑하사 생명을 주셨네. 이 몸을 사랑하사 하늘의 부유를 주셨네. 이 몸을 사랑하사 하늘의 영광과 능력을 부어주셨네!” 그걸 깨닫기 시작하고 난 다음에 삶의 차원이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한 거예요.

우리가 그러고 난 다음 우리가 갖고 있는 수많은 한계들을 극복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는데, 제가 여러분 제가 자세히 다 말씀을 드릴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 여러분 오늘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 ‘현재 진행형으로 실존적으로 여러분의 것을 깨달아서 눈이 열리기 시작하고, 영안이 열리기 시작하고 요한이 고쳐주시길 원하는 그 고침을 받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이것이 접목이 되기 시작하면 하늘의 모든 부요와 능력이 여러분의 것으로 체험될 줄로 확신하는 것이에요.’ 이걸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도 바울이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골로새서 2장에 뭐라고 말씀하는가? 다 같이 우리 크게 읽겠습니다.
*골로새서 2:2-3,
2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할렐루야! 이걸 여러분들이 오늘 삶으로 또 지금 내게 하시는 말씀으로 깨닫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뜻이에요. 그게 가만히 있고요. 하나님의 모든 것이 누구에게 있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에 담겨 있는 것이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누구에게 담겨 있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오늘 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 진행형이 우리에게 될 때에 그 예수님의 모든 것이 지극히 적고도 적은 부족한 나에게 그것이 다 부어진다. 이것이에요. 하늘의 지혜와 지식의 모든 부요가 여러분들에게 이 성탄의 계절에 부어지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탄에 우리가 구유에 누신 아기를 찬양한다. 이 정도가 아니에요.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이 여러분들과 저에게 부어지는 것이에요. 놀라운 차원이에요. 놀라운 선물이고 능력인 것이에요. 하늘에 있는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여러분 이런 뜻입니다. 삶의 난제가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습니다,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2천년 지난 교회의 역사 동안 하나님의 모든 것이 예수님께 있고, 예수님의 모든 것이 지극히 작은 자인 나에게 부어준다고 생각할 때에, 그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할 것이 없는 것이에요. 기가 막힌 일인 것이에요. 인생의 수많은 난제. 만약에 우리 정치하는 사람들도 이걸 깨닫고 진실로 집중했다면 하나님이 많은 것들을 처리해 주실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최고가 되는 것이에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이 성탄의 계절에 기록된 말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우리의 것으로 ing로, 현재 진행형으로, 우리에게 허락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그러면 삶의 모든 난자에도 어떠한 난제도 해답이 있다. 어떠한 난제도 해답이 있다. 오늘 지혜와 지식의 모든 부하가 감추어지는 것을 체험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죽하면 이걸 요한이 깨닫고 요한복음 15장 15절에 뭐라고 하는가?
*요한복음 15:15,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아멘 우리는 뭐라고 얘기한다고요? 친구, 친구라, 그러고 그리고 주님께서 하늘의 모든 부유와 지혜를 우리에게 다 주셨다고 그랬을 , 그게 대체 무슨 뜻인가?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보니까 놀라운 말씀이 있어요.
*고린도후서 8:9,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할렐루야,. 주님은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셨어요.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유하게 하려 하심이라. 태초부터 있는 이 생명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깨닫고, 성탄에 확인하고 접목되는 자에게는 하늘의 모든 신령한 것들이 우리에게 그대로 부어지고, 트랜스퍼 되는데 그중에 하나가 주님의 가난하심을 통하여 우리가 부유하게 되는 것이에요. 주님은 얼마나 가난하셨습니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집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그래서 최초의 홈리스(homeless)가 누구냐, 예수님이에요. 집이 없어서요.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어요. 우리를 부유하게 하시려고 가난하게 되신 것이에요. 이것이 하늘의 지혜와 능력과 은혜가 우리에게 접목되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여러분, 이걸 깨달으면요. 오늘 아까 주동사가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이렇게 했을 때 세례도 주고 가서 가르치고 또 또 또 여러 가지 일들을 하지만 핵심은 뭐냐 제자 삼는 것이 주동사인 것처럼, 마태복음 28장에,, 오늘 요한일서 1장 1절 4절까지 핵심 주동사가 뭐냐 하면, ‘전함은’, 아까 말한 전함은 우리에게 하늘의 부여와 능력과 은혜로 다 채워 주셔가지고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살라고 한 게 아니에요. 우리 배만 두드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은혜와 능력을 전하라는 것이에요. 이 성탄의 계절에 이런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이제 그렇게 됐을 때, 이런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질 때, 하늘의 모든 부여와 능력이 우리에게 이렇게 접목되는 걸 깨닫고 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그 결과 자연스럽게 4절의 기쁨이에요.
*요한일서 1:4,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이 기쁨은 예수님의 가장 좋은 것이 내 것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내면에 좀 기쁘다. 내면이 참 좋다. 평안하다. 그 정도의 기쁨이 아니고, 이 기쁨은 기가 막힌 기쁨이고, 아주 익사이팅(exciting)하고, 신명나는 인생을 만들어주는 기쁨이 총체적 기쁨의 대상자가 되는 것이 내면으로 조용히 기뻐하고, 가만히 있는 정도가 아니라, 젊은이들 같은 경우는 이 사실을 제대로 깨달으면 기뻐서 펄쩍펄쩍 뛰는 것이에요. 오죽하면 담임 목사가 특새 할 때, 이 60이 넘은 인생에 펄쩍펄쩍 뛰면서 찬송하겠어요. 생명의 예수님께 우리가 접속하고, 현재 진행형 태초부터 생명의 역사를 우리가 깨닫고 주님께 의탁하면 주님이 주신 영광과 부여와 지혜를 누리게 될 때 그것이 세상이 알지 못한 기쁨 우리게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 기쁨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쁨이에요. 다시, 내면적으로 1차원적인 기쁨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에 떨림과 울림을 주는 기쁨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누구도 빼앗지 못하는 것이에요.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만났습니다. 삭개오에 내려오라. 그래가지고 삭개오를 만나주셨습니다. 삭개오에게 지금 태초부터 생명이신 예수님이 접붙임이 되었습니다. 진행형이 되었습니다. 그 순간 삭개오가 제일 먼저 한 게 뭔지 압니까? 19장에 이렇게 나와 있어요. 제일 먼저 한 것이 삭개오의 제일 첫 번째 행 형태가 뭐냐 뭐였어요? 즐거워하며 기뻐했어요.
*누가복음 19:6,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태초부터 생명과 접목이 되니까, 즐거움이 넘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가 이런 즐거움의 시간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고, 이번 성탄 계절에 이런 주님의 즐거움이 여러분들에게 넘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있는 매너리즘, 모든 건조함, 모든 영적 건조증이 이렇게 해결이 될 겁니다. 에베소서 5장 14절에 다 같이 보겠습니다.
*에베소서 5:14,
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오늘 이 가운데 영적으로 잠자고 힘들고 있는 어려운 분들 계시면 벌떡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벌떡 일어나라 이런 것들이 이 기쁨은 이런 건조증과 이런 것들을 이런 매너리즘을 해결하는 것이에요. 습관적 신앙, 관성적 신앙 매너리즘에 빠진 신앙들을 볼 때, 이렇게 우리가 ‘2033-50 비전’을 얘기한다 할 때 이거 뭐 말도 안 되고 우리 내 몸도 하나 못 가는데 그게 아니에요. 벌떡 일어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52장 2절에는 특별히 우리에게 경고하는 말씀이 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사아 52:2,
2 너는 티끌을 털어 버릴지어다 예루살렘이여 일어나 앉을지어다 사로잡힌 딸 시온이여 네 목의 줄을 스스로 풀지어다.


-매너리즘에 벗어나는 길은 주저앉은 자리에서 자세를 고쳐서 무거운 몸을 다시 일으키는 것이에요. 스스로, 스스로 내 목줄을 감고 있는 것을 풀어버리는 것이 이것이에요. 태초 진행형 생명에 접속되고 위탁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축복이라고 믿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다시요. 이 생명은 적당한 생명이 아니에요. 육신의 생명 정도가 아니라, 영적으로 살아서 움직이는 펄펄 나는 생명이 우리에게 확인될 수가 있는 겁니다. 아까 행복이라는 찬송 제가 이렇게 했는데요. 이 찬송 집에 가서 부르시기 바랍니다. 집에 가서 부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여러분들 와 닿아야 되는 거예요.

오늘 정리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시작하는 사람이고, 바울은 세우는 사람이라면 요한 사도는 고치는 사람입니다.
-뭘 고칩니까? 생명력 없이 메너리즘에 빠져서 관성적으로 저 사람은 잃어버리고, 헤매는 그 성도들에게 우리라는 가족적인 개념을 심어주시고, 이것이 입체적으로 체험될 때에, 하나님의 모든 부요하심이 우리의 것으로 접목되는 줄로 믿습니다. 뭐가 될지, 그것이 어떻게 신비한 것이 될지 2천년 교회 역사에 하늘의 부요와 지혜와 능력은요 말로 다 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 같이 부족한 인생이라도 하나님의 신비를 깨닫고 하늘의 부요와 사명을 주님 앞에서 기도하고, 사명을 주님 앞에서 고백하고, 그렇게 이루어지도록 마음을 모으고 한 생애를 달려가는 줄로 확신합니다. 그래서 이 성탄의 계절에 이런 축복 여러분들에게 한 번 한 번 주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요약
우리가 영원한 태초부터 지금까지 이 신선하고도 새롭고도 압도적인 생명의 능력으로 우리를 붙잡아주신 주님을 경외하고 감사하고 찬양해야 한다. 귀로 듣고, 자세히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반 된, 생생하고 강력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능력’을 모두가 다 체험하고 그것을 전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피상적이고 나약하고 무력한 우리의 침체와 잠재적인 불신앙을 박차고 일어나게 될 줄 확신한다. 우리가 ‘태초 진행형 생명’의 교제를 우리에게 부어주심을 받아, 하나님의 모든 위대하심, 지혜, 권능, 인격, 영광이 우리의 것이 되어, 하나님 폭포수와 같은 생명의 능력, 참된 교제의 축복, 기쁨의 실체를 경험하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로 헌신하고, 진정한 지상명령인 ‘전함’을 실천해야 한다.
-본서를 기록한 목적이 그리스도에 대해 바르게 증거 하여 성도들로 그분 안에서 하나님과 참된 교제를 나누게 하는 데 있음을 밝히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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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헌신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3년 12월 16일)
제목: "기도의 7천 지팡이"
말씀: 출애굽기 17:8~13
대표기도: 김영수 안수집사님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찬양인도: 남순장반 연합찬양대
말씀읽기: 윤하율 어린이(초등부), 이시온 어린이(유년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ㅡㅡㅡㅡㅡ

*출애굽기 17:8~13,
8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10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ㅡㅡㅡㅡㅡ

▶할렐루야!! 아마 강남의 한복판에서 우리 아이들이 토요일 날 새벽에 나와 가지고 성경 봉독 한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 지난 한 해를 우리가 돌이켜보면 많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시고 어떻게 보면 은총의 보호막이 되셔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영적으로 오늘까지 은혜 받고 성공하게 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남 순장님들 늘 평생 기억할 것은 인생은 영적으로 성공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겉으로 볼 때 뭐 대단한 것 같지만. 사람은 우리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성공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토비새가 영적으로 성공하는 은혜의 장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그러면 영적으로 성공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고난을 받아야 돼요.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죠? 다시 한 번 영적으로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고요? 고난을 받아야 되는 거야 고난은 두 종류의 고난이 있는 거예요. 하나는 뭐냐 하면, 그냥 환경적으로 소위 인생의 여러 가지 환난 또 우수사려와 수많은 환경적인 어려움들이 많이 가정적으로나 또 수많은 사고들 이런 일을 통하여 고난 받고 경제적으로, 건강으로 또 갑작스럽게 우한 이런 것들이 있어 고난당해가지고 정신 바짝 차리는 게 있고, 많은 경우 그런 일이 많습니다.

여러분들, 우리 세례 받을 때 세례 간증 자들 한번 얘기 한번 다 들어보세요. 아이들이 어렵다든지 가정이 이래가지고 그것 때문에 주님을 만나는 케이스가 있고, 그러나 모든 분들이 다 그런 건 아니고 또 어떤 경우는 영적으로 좀 눈이 빨리 띄어져가지고 토비새 나오면 뭐 어떻게 된다고요? 토비새에 나오면 버린 돌 인생이 신적 개입을 통하여 뭐가 된다고요? 모퉁이 돌 인생이 된다고요. 수많은 어려움 같은 사람들이 토비새에 나오면 왜? 은총의 표징을 체험하고 토비새에 나오면, 한국교회의 강점을 배우고 토비새에 나오면 거룩한 습관과 환경이 조성되고, 균형 감각을 가지고 시대적 영향력이 생긴다고 그러니까, 하나는 환경적으로 어떻게 보면 소극적인 권한이고, 어떤 경우는 이 자발적인 권한, 미리미리 알아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무장될 수 있도록 미리미리 알아서 하나님께서 그를 연단하고 미리미리 알아서 나와서 기도의 훈련을 받고, 미리미리 나와서 주님 앞에 납작 엎드리고 미리미리 나와서 훈련받고, 오늘 우리 여기 우리 캔송 키즈 아이들이요. 어젯밤에 잠포지움을 했어요. 잠포지움이 뭔지 알죠? 잠을 포기하는 심포지움, 어제 같이 이렇게 나는 그게 좀 괜찮을지 모르겠네... 밤에는 안 자고 낮에는 또 자는 거야? 정상적으로 살아야 되는데 그래도 밤늦게까지 저 기도하고 오늘 새벽에 나오고 우리 아이들 입장에서는 이게 굉장한 거룩한 고난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제자 훈련을 한다. 칠천기도 용서가 된다. 새벽에 나온다 하는 모든 것들 그리고 어떤 목사님들은요. 새벽 기도가 왜 필요하냐고, 그냥 평소에 루틴에서 승리한 그 말씀도 맞아요. 맞는데 그 목사님은 가만히 보면 유학하시고, 잘 되시고, 모든 것들이 잘 잘 이렇게 잘 가는 분은 물론 개인적으로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그러니까 인생의 뜨거운 맛을 아직 저처럼 많이 안 본 분이에요. 인생의 뜨거운 맛을 본 사람들은 새벽에 안 나오면 안 될 상황이에요. 그리고 너무 중요한 거 있는 사람들은 새벽에 나와 기도하고 일찍 일찍부터 준비를 하는 것이에요. 오늘 이 내일은 영 영하 11도, 또 영하 3도라고 그랬잖아. 내일은 내일 주일 예배 안 나올 거야. 영하가 20도가 되든 30도가 되든 주일 예배 나오는 거 아닙니까? 이거는 우리가 자발적인 거룩한 좋은 의미에서 거룩한 자발적 고난의 행군을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에요.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리 잘 살고 아무리 많은 걸 누리고 아무리 대단하게 사람들에게 명예롭게 좋은 평가받아도 하나님께서 쓰시고, 하나님의 하나님께서 그의 생애를 붙잡으시고 마지막까지 영적으로 성공하지 않으면 겉으로 드러나는 건 아무것도 아닌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쓰시려면 반드시 고난을 받아야 돼요. 고난을 받을 때 환경적인 고난도 고난이지만 미리미리 자발적으로 고난 받는 것은 너무 소중한 것이에요.

제가 이렇게도 7천기도 용사, 장년 세대, 다음 세대 7천을 강조한 이유는, 사랑의 교회 교우들이 환경 때문에 주위에 어떤 우수사려, 인생의 우한 때문에 어려움을 당해 그거 해결하려고 기도하면서 그것도 참 중요한 일이지만 그러나 미리미리 영적으로 영혼의 근육, 믿음의 근육을 강화해가지고 미리미리 하나님 앞에 자발적 고난을 감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한 용사가 되어서 주님이 쓰실 때 그것이 너무 소중하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보세요. 오늘 출애굽기 17장은 모세의 얘기 아닙니까? 모세는 너무너무 똑똑한 사람이었어요. 모세는 사도행전 7장 오면 애굽의 박사학위가 여러 개가 있는 사람이에요. 근데 아무리 똑똑해도 하나님이 쓰시려고 할 때는 이게 고난을 받아야 됩니다.

그래서 모세는 애굽의 왕실, 뭡니까? 유니버스 킹덤 오브 이집트(Kingdom of Egypt), 그러니까 이집트 최고의 왕립대학에 7개의 박사학위를 가진 거예요. 건축학 박사, 천문학 박사 또 문학 박사, 역사학 박사 온갖 박사를 다 받았어요. 근데 그건 아무런 하나님께서 그게,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고난을 통과하고 하나님의 손을 거친 사람이면 그것은 효과 있게 쓰임 받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자기 힘과 자기 똑똑함을 가지고 결국은 살인하는 사람밖에 안 된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를 쓰시기 위하여 광야로 쫓아내버렸죠. 미디안 광야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호렙 산에서 하나님 만나는 경험하고 그리고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면서 수많은 고난, 수많은 어려움 가운데서 그야말로 기도의 지팡이를 들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오늘도 17장 8절에 나오잖아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산에 아말렉과의 전쟁을 위하여 산에 올라갔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모세에게 필요한 것은 애굽 궁정의 체험뿐만 아니라 호렙 산의 경험과 미디안의 광야의 고난 대학을 거치는 것이에요. 바울도 마찬가지였죠.

그러니까 바울이 똑똑하고 최고 아니었습니까? 근데 그가 가진 최고의 지성과 똑똑함을 가지고 결과가 뭐예요? 스데반을 때려죽이는, 그 바울의 손이 뭡니까? 다른 사람을 돌로 때려죽이는 그 역할밖에 못한 거예요. 모세도 마찬가지 자기 똑똑한 손들고 사람 때려 죽였잖아요. 그거 안 된다고 그래 바울을 하나님께서 다메섹을 통하여 아라비아 광야에 몰아내가지고 그 광야 대학에서 3년간이나,, 갈라디아서에 나오잖아요? 3년간이나 죽을 고생하고 죽을 고생해가지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 그분들을 통하여 역사하시고 일하시고 그래서 저는 이 7천기도 용사, 앞으로 777, 7천 이것이 무슨 구호가 아니고 구호가 아니고 이걸 통하여 모두 우리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공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저는 꿈이 뭐냐 우리 교회의 수많은 성도들 가운데 7천 기도용사에 많이 계시잖아요. 그러면 그분들이 여러분들이 이 토비새나 여러분들이 기도하는 기도의 지팡이를 들고, 똑똑한 손이 기도의 손이 되어가지고 주님 앞에 쓰임 받는 그걸 보면서 야 나도 당신처럼 될 수 있겠느냐, 나 어떻게 하면 되지 토비새에 나와, 토비새에 나오면 성공하지 토비새에 나와서 7천 기도의 지팡이를 들어봐! 그런 여러 평온한 은총을 받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단순한 무슨 뭐 구호가 아니에요. 사랑의 교회 기도의 지팡이, 이거는 긴 거고, 이거는 평소에 수행용이고, 이거는 중요합니다. 이 기도의 지팡이를 들고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교회의 어떤 사역을 위해서 혹은 기도하는 정도가 아니고, 여러분들의 인생사가 결정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셔야 되는 거죠. 그리고 제가 이 말씀 드리면 야 그거 아직까지 이해가 잘 안 된다. 그런 분은 아직까지 인생의 뜨거운 맛을 안 본 분들이에요.

여러분, 정말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고난을 통하여 다듬어져야 하는데 어떻게 다듬어야 할까? 우리가 환경에 어려움을 당하기 전에 미리미리 알아서, 거룩한 자발적 고난의 행군을 감행하는 것이 7천기도 용서인 줄로 믿습니다. 이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이 모세가 오늘 보니까 모세가 이제 올라가는데 모세만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누가 같이 아론과 홀이 같이 올라갔죠? 모세가 그 산에 올라가 가지고 기도할 때,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피곤하니까 손을 내릴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니까 아론과 홀이 오늘 여기 나와 있잖아요. 여러분들 뉴스레터 앞에서 한번 보세요. 아론과 홀이, 근데 나는 여기,, 누가 아론이고, 누가 홀일까요? 누가 아론이고, 누가 홀일까요? 존 밀레이가 이걸 ‘오! 주여 승리하소서.’ 제가 볼 때, 오른쪽이 아론이고 왼쪽이 홀이겠죠. 왜냐하면 형제끼리니까 머리가 좀 약하네요. 모세는 지금 기도하는 손이고, 아론과 훌은 무슨 손이에요? 서로 봉사하고 섬기는 손이고 그다음에 밑에 여호수아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전투하는 손이에요.

사랑의 교회 7천기도 용사 이 안에 포함된 것은 이 안에 우리가 기도하는 손, 섬김과 협력과 봉사의 손, 그다음에 영적 전투에 승리하는 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에요. 앞으로 우리 교회가 7천기도 용사 7천, 7천, 7천 할 때에, 각 세대별로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성공하게 하시고 꼭 써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다이요 모두가 다 고난을 겪어야 되는데 거룩한 광야 대학을 나와야 되는데, 광야대학을 우리가 환경과 우수사려의 어려움을 통하여 받는 것이 아니라, 미리미리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은혜의 광야에 나아가지고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교제하고, 주님의 축복을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는 그런 축복이 한 분 한 분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에요. 그거요. 그리고 또 하나는 왜 이렇게 해야 되는가 아말렉이라는, 오늘 보니까 아말렉이라는 이 강력한 이 참 대적들, 이 아말렉과의 전쟁은 굉장한 위기였어요. 고대 전쟁사를 보면 위기였고, 이 아말렉은 전투력 막강이 돼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넘지 못할 강이었고, 도무지 헤쳐 나갈 수 없는 커다란 벽처럼 보이게 되는 거 그것이 바로 아말렉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희한한 전쟁을 작전을 지시하는 거예요. 무슨 군사력을 이만큼 동원하라, 뭐 아멜렉과 싸우기 위하여 이러이러한 전략을 세워라, 이런 조직을 하라. 또 후방 부대를 이렇게 도우라 이렇게 하지 아니하고 전략을 짠 게 아니라, 딱 하나 산 위에 올라가 기도하라. 기도하는 손들고 전략이 아니라 기도하는 손들고, 병참이 아니라, 기도하는 손을 들고, 오늘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우리 앞에는 수많은 아말렉이 있는 거예요.

먼저 우리 속에 있는 아말렉, 여러분과 제가 마음먹고 참 이렇게 사오하고 뭐 좀 잘하기를 원하지만 우리 속에 있는 육신의 본성들 나약함 때문에 작심 3일이고 또 실패하고 또 실패하고 그런 일이 얼마나 많아요? 얼마나 많아요? 우리 속에 있는 육신의 본성에 대한 이 아멜리아 어떻게 보면 가혹할 정도로 젊은이 여러분 육신의 정욕을 여러분들을 중독하게 하고 힘들게 하는 수많은 아멜렉이 얼마나 많아요? 이 수많은 아말렉을, 내 육신의 본성을 이겨낼 수 있는 비결은 오늘 기도하는 손밖에 없다는 것이에요. 옆에서 함께 협력하는 손인 것이에요. 그리고 직접 우리가 영적 전투를 감당해야 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은 우리 속에 있는 본능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에 있는 수많은 공격들, 저는 이 한국에서 지금 21년째 이걸 이제 제가 미국에 21년 살고 한국에 지금 21년째인데 21년 살면서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 미국은 예를 들어서 팩트 잘하면 잘하고, 또 괜찮으면 괜찮다 이래 해야 되는데, 한국은 딱 진영 논리로 나눠져 가지고 무조건 잘해도 못한다. 그러고 또 못해도 잘 한다 그러고, 어떻게 팩트 대로 안 사는지 몰라요. 팩트 좀 이상하네. 이게 진리대로 살아야 되는데, 그리고 사람들이 어떻게 분별력이 없는지 몰라, 그러니까 이 디셀먼트(inselment), 이 분별력이 없는 것 자체가 우리 분별력을 가지고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거는 아말렉이야 아말렉 이런 아말렉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이 아말렉이 얼마나 끈질기고 못되먹었냐면 여기 보세요. 신명기 25장 17절 18절 한번 보세요. 같이 읽겠습니다.

*신명기 25:17-18,
17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18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요 괴롭히는 아말렉은, 어떤 못 되어 먹었냐면요.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찾고, 그래서 옛날에 우리 밤에 어두울 때 공동묘지 올라갈 때 제일 뒤에 있는 사람이 제일 겁이 나가지고 약한 자들을 치는 거에요. 우리 속에 있는 약한 것들을 치는 거예요. 한국교회 부족한 점들을 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19절로 19절,
19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 우리 속에 있는 아말렉, 또 강력한 현재 사탄의 전략 같은 아말렉, 분별력 없는 아말렉, 사랑의 교회 모든 성도들은 지역, 출신, 모든 것들을 다 뛰어넘어 가지고, 여러분 어떤 정치적인 어떤 스탠스 이런 거 다 뛰어넘어가지고, 성경적 시각과 하나님 나라 가치관에 위하여 방향을 잡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다른 거 아니에요 하나님 말씀 다 조금만 더 객관성을 보면 다 알 수가 있는 것이 신문을 해독할 능력 정도 되면 오늘 이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기본적으로 다 나와 있는 거에요. 사랑의 교회는 제자 훈련과 사역 훈련, 큐티와 성경 강해, 그리고 말씀 읽기를 통하여 기본적으로 우리 교회는 성경의 말씀에 이 방향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대부분 다 동의할 수 있는 시각들이 많아요. 근데 그 말도 아닌 여러 가지 세상의 상황들 때문에 영향 받지 말고, 여러분들은 이 시대에 모세가 되고 아론과 훌이 되고, 7천기도 용사가 세상을 변화시켜야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2033- 50 비전을 앞에 놓고 기도하는데, 저는 그러잖아요. 우리 모두는 이런 현실적인 수많은 영적 전쟁과 아말렉이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을 가지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많은 비전들을 가지고 그걸 이루어져 나가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이루어 나가는가? 그냥 꿈만 꾸면 되는 것인가 우리가 이런 기도의 용서가 되어가지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도의 제목들을 가지고 집중을 하면, 하나님이 ‘2033-50 비전’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건 단순히 어떤 사랑의 교회 구호가 아닌 것이에요. 구호가 아니기에, 여러분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기도의 제목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한국 사회가 수많은 어떤 대단한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이런 7천, 7천기도 용사 여러분 한번 말씀드려 100명이 제대로 하면 1만 명을 섬길 수 있다. 이게 루트 제곱근의 원리예요. 한 번 말씀드렸죠. 사랑의 교회 토비새는 여러분들은 이 시대에 제곱근의 역할을 하는 것이에요. 100명이 있으면 만 명을 100 곱하기 100의 제곱이니까, 그다음에 예를 들어서 천 명이 있으면 100만 명을 다는 거 천 제곱이니까, 그러면 7천이 있으면 어떻게 돼요? 만의 제곱이 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1억 아닙니까? 그렇죠? 제가 뭐 수학을 잘못 계산했나요? 만의 제곱은 만의 제곱은 1억 아닙니까? 맞죠? 그러면 7천에 적으면 어때? 7x7=49, 4,900만, 그러니까 이 7천기도 용사, 7천 7천 7천 7천 제대로 역할을 할 때 5천만이 변화될 줄로 믿습니다. 이거 여러분 이 기도가 영적 최고권의 역할을 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우리의 이 기도가 고난을 이기게 하시고, 고난을 통과한 기도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기도가 단순히 기도가 아니라 섬김의 기도, 영적 전투의 기도, 지팡이가 되게 하시고 또 거룩한 제국군이 되어 시대를 변화시키는 영향을 끼치리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주간에 지지난 주간도 그렇고, 행복이라는 찬송을, 저는 이런 거 한국 사람이 쓴 건 제가 거의 잘 안 불러요. 왜냐하면 뭔가가 좀 그래요. 그래 좀 약간 그 뽕짝 스타일 있잖아요. 한국은 좀 그런 거 있잖아요. 세상에서 방황할 때의 그거 다 귀한 거예요. 다 귀한 거긴 하지만 그런데 행복을 부르는데 이 가사가 좀 마음에 와 닿았어요. 손경민이라는 분이 작곡을 한 것인데 이 이 행복이라는 거 한번 보세요. 1절, 화려하지 않아도 정결하게 사는 삶, 가진 것이 적어도 감사하며 사는 삶, 내게 주신 작은 힘 나눠주며 사는 삶,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고.... 2절, 눈물 날 일 많지만 기도할 수 있는 것 억울한 일 많으나 주를 위해 참는 것, 비록 짧은 작은 삶의 주 뜻대로 사는 것,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고,,, 7천기도 용사가 돼가지고 기도하면서 눈물 날 일 많지만 기도할 수 있는 것. 억울한 일 많으나 주를 위해 참는 것. 비록 짧은 작은 삶, 주 뜻대로 사는 것, 이것이 나의 삶이 이것이 행복이라고, 세상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 이것이 행복이라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행복이라고. 근데 이거는 좀 와 닿았어요. 그리고 3절을 저희가 작사를 했어요.

3절을 잘 들어보세요. 써놓았죠.
-믿음의 눈 가지고 소망하는 우리 꿈, 2033-50의 비전 품고 걷는 삶, 주신 사명 붙들고 달려가는 우리 삶,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고, 그다음 가사가 너무 좋아요. 토비새에 오면 행복이라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 토비새에 오면 행복이라고, 그다음에 7천기도 용사와 기도하는 것, 이것이 행복이라고,,, 자꾸 말씀드리는 거예요. 여러분 고난 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쓸모가 없어요. 그리고 그 고난 받지 않는 똑똑하면 똑똑할수록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어요. 모세가 그랬고, 바울이 그랬어요. 바울의 아라비아 광야대학, 모세의 위대한 광야대학, 거치고 그래서 7천기도 용사, 이 토비새가 여러분들의 생애 광야대학의 좋은 의미에서 그리고 이 일을 통하여 우리 속에 있는 우리 밖에 있는 아말렉을 물리칠 수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끈질긴 못된 아말렉을 그냥 아말렉 죄송합니다. 머리를 그냥 내쳐야 되는 것이에요. 고마운 것은 연말에 통계를 보니까 작년 한 해 여러 종교들 가운데 2023년 한 해 기독교가 지난 몇 회에 비해서 제일 많이 뭐라 그럴까요? 기독교에 대한 어떤 호감도랄까? 이것이 많이 상승을 했어요. 5.3%가 올랐어요. 기독교 천주교 불교는 1% 1.6% 중 1% 대인데 우리는 5.5% 이상 올랐어요. 이유가 뭐냐 그중에 하나가 한국교회가 스카우트 저기 잼보리 대회, 그런 것들이 다 포함 된 것 같아요. 우리가 한교섬, 그런 것들이 다 포함이 된 것 같아요. 사랑의 교회 이 안에 주신 본당이 그렇게 쓰임받게 된 거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우리가 수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마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주위에 있는 수많은 아말렉과 같은 환경 상황 이것들을 그냥 기도의 지팡이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한 분, 한 분 허락해 주시길 바랍니다. 행복을 부르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1절, 화려하지 않아도 정결하게 사는 삶, 가진 것이 적어도 감사하며 사는 삶, 내게 주신 작은 힘 나눠주며 사는 삶,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고,,,
2절, 눈물 날 일 많지만 기도할 수 있는 것 억울한 일 많으나 주를 위해 참는 것, 비록 짧은 작은 삶의 주 뜻대로 사는 것,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고,,,
믿음의 눈 가지고 소망하는 우리 꿈, 2033-50의 비전 품고 걷는 삶, 주신 사명 붙들고 달려가는 우리 삶,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고, 그다음 가사가 너무 좋아요. 토비새에 오면 행복이라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 토비새에 오면 행복이라고,,,
-크게 부르고 아이들도 이런 행복을 아는데 어른이 모르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 같이 이 찬송을 다시 한 번 힘차게 일어나서 합시다 일어나고 악보 들어보고 다 같이 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유튜브는 알고리즘이니까 제가 유튜브를 한 번씩 틀면 저는 이제 7천기도 용사, 한국교회를 섬기는 날, 이것이 익숙한데요. 어제는 탁 트니까요. 토비새가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교회가 아니고 수많은 전국에 있잖아 토비새가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토비새는 어디서 출발했습니까? 제가 뭘 말하는가 하면 이게 플랫폼이에요. 한국교회가 적어도 안 되면 우리 한국교회 섬김의 날에 이게 지금 참여한 7,500 교회가, 토비새가 되고 아니면 금요 철학에도 좋고, 이렇게 함께 기도의 이 기도의 플랫폼이 될 때에, 또 이것이 우리 새 생명 축제를 통한 태신자를 위한 우리 생명에 대한 플랫폼이 될 때에, 또 이것이 세계 선교를 위한 유럽이나 또 우리 제자 훈련 전체 세계 디사이플 메이킹 글로벌 파트너, 플랫폼이 될 때에, 한국교회가 반드시 복음적 평화 통일의 선봉장이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남북문제도 주님이 해결해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정치가 해결 못합니다. 한국교회가 바로 가야 이 민족이 바로 가는 것입니다. 피 토하듯이 얘기하고 싶은 것인데 정치 얘기를 못합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세요. 알겠습니까? 내년 4월 총선에 목을 맨 분들이 너무 많아요. 목을 매는 거는 좋은 일인데 바로 매라고 알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시도록 토비새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역사하시도록, 나는 지금도 2012년 대통령 국가조찬기도회 할 때에 설교하고 대통령 국가 고위 관리들이 나와서, 오 놀라운 구세주, 같이 눈물 흘리며 찬송할 때 그때의 총선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셨어요.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전국적으로 토비새도 그러고 오늘 이 이 ‘행복’이 이거 3절 앞으로 유행하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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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금융 상식 퀴즈 O X] 12월 11일 (825)
1. 다음 중 기업이 영업을 중단하는 상황을 가정하고 산출하는 수치는?
① 순자산가치 ② 내재가치
③ 존속가치 ④ 청산가치

2. ‘무기력증’에 비유되는 경제 상황이다. 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면서 경기 침체가 깊어지는 이것은?
① 달러라이제이션
② 디플레이션
③ 스태그플레이션
④ 젠트리피케이션

3. 다음 중 ‘금산분리’ 규제에 따라 대기업의 진입이 제한되는 업종은 무엇일까?
① 방산 ② 플랫폼
③ 은행 ④ 전력

4. 발생 가능성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음에도 이를 간과하다가 맞는 위기 상황을 비유하는 말은?
① 블랙 스완 ② 어닝 서프라이즈
③ 회색 코뿔소 ④ 오일 쇼크

5. 다음 중 기업 인수합병(M&A) 과정에서 잠재적 투자자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자료에 해당하는 것은?
① 그린 메일 ② 아그레망
③ 티저 레터 ④ 베이지 북

6. 한 가지 금융상품에 몰아서 투자하지 않고 여러 자산에 분산 투자하는 가장 큰 목적은?
① 고위험·고수익 달성
② 복리 효과 극대화
③ 레버리지 활용
④ 리스크 관리

7. 상장된 모든 주식을 실제 거래되는 가격에 따라 평가한 금액을 말한다. 주식시장 규모를 나타내는 지표는?
① 시가총액 ② 대손충당금
③ 예비비 ④ 액면가

8. 기존 시장에 엄청난 변화를 불러오는 혁신적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나 기업을 가리키는 경영 용어는?
① 슈퍼 사이클 ② 게임 체인저
③ 레드 오션 ④ 치킨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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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다인종국 한국'…인구위기에 도움 줄까?


그래픽=추덕영 한국경제신문 기자

요즘 우리 국민은 한 달에 한 번씩 나라 걱정을 합니다. 통계청이 매달 인구 동향을 발표할 때마다 그렇습니다. 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인 합계출산율이 작년 세계 최저 수준인 0.78명까지 떨어진 데 따른 충격이 컸던 것 같습니다. ‘자기 파멸적인 사회’라는 외신 보도도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했죠.

최근 통계청의 9월 인구 동향 발표는 우려를 더욱 키웁니다. 3분기 합계출산율이 역대 최저인 0.70명까지 떨어졌고, 인구 감소세가 49개월째 이어졌습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이를 두고 “흑사병 때보다 더 빠른 속도의 한국 인구 감소세”라고 했습니다. 치열한 입시 경쟁 등 한국인의 팍팍한 삶이 낮은 출산율의 원인이라고 해외 토픽처럼 소개합니다.

한국인의 이런 자화상에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출산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닙니다. 다들 자기 인생 살기도 벅차다고 하소연합니다. 이런 현실이 개선되지 않으니 17년째 추진해온 저출산 대책이 먹히지 않는 겁니다.

손에 잡히는 인구 대책은 이민 수용 확대가 유일합니다. 마침 내년 외국인 비율이 전체 인구의 5%를 넘어 한국도 ‘다인종·다문화 국가’가 됩니다. 좋은 계기일 수 있습니다. 이민자를 많이 받으려면 이주민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각도 바뀌어야 합니다. 왜 인구 감소세가 지속되고 있는지, 이주민 유입을 늘리기 위한 노력은 어떻게 기울여야 할지 4·5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청년세대의 박탈감이 저출산 근본 원인
능력발휘 돕고 양성평등에 노력해야죠


지난해 세종특별자치시 청년취업박람회를 찾은 구직자들이 채용공고 현황판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세종특별자치시 청년취업박람회를 찾은 구직자들이 채용공고 현황판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세종특별자치시 청년취업박람회를 찾은 구직자들이 채용공고 현황판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에서 저출산 문제는 거의 ‘포비아(공포증)’ 수준입니다. 사망자 수가 출생아 수보다 많아 인구가 자연 감소하는 인구 데드크로스 현상은 이미 2020년에 발생했는데요, 이 추세라면 2067년 인구가 3500만 명으로 줄어들 것이란 전망을 통계청이 이미 내놨습니다. 여기에 4분기 합계출산율이 0.6명대로 추락할 수 있다는 비관론까지 가세한 상황입니다. “한국이 지구에서 사라지는 최초의 국가가 될 것”이란 해외 석학의 경고가 빈말이 아닙니다.

▷저출산, 사회의 지속 가능성 해쳐

도대체 저출산의 위험이 얼마나 크길래 그럴까요? 초저출산과 인구 감소는 경제부터 망가뜨립니다. “노동인구에 펑크가 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입니다. 실제로 15~64세 생산가능인구는 2017년 3763만 명으로 정점을 찍었고, 2050년이면 2481만 명으로 35%가량 쪼그라들 전망입니다. 국내총생산과 성장률의 타격은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노동생산성을 끌어올리기도 쉽지 않습니다. 노인이 많아지면 내구재보다 노동집약적 서비스 수요가 늘고, 이는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떨어뜨립니다. 세금 낼 사람이 줄어 정부 세수는 감소하지만, 반대로 복지지출 수요는 급증합니다. 밀레니얼Z 세대는 부모 부양하느라 허리 부러질 지경이 되고, 복지체계가 무너질 수 있습니다. 지방소멸 위험성도 높아집니다. 사회 전체의 지속 가능하고 조화로운 발전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겁니다. 심지어 <뉴욕타임스>는 한국이 인구 감소로 야전군 유지를 못 하면 북한이 남침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정부의 안이한 대처가 화 키워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걸까요? 먼저 우리 정부의 안이한 대처를 꼽을 수 있습니다. 정부는 2006년 저출산 대책을 세울 때부터 청년세대의 상대적 박탈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절대적 소득이 결혼과 출산의 결정 요인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여러 경제학자가 밝혀냈지만, 한국의 저출산 문제에 이를 적용하지 못한 것이죠. 미국 경제학자 리처드 이스털린의 상대소득 가설에 따르면 개인의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절대적 소득이 아닌 ‘기대 수준 대비 상대 소득’입니다. 즉 부모 슬하에서 경험한 풍요로움에 기준을 두기 때문에 취업난 등으로 인해 이와 같은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어렵다면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다는 겁니다. 한국은행은 이런 연구를 바탕으로 최근 초저출산·초고령사회 관련 보고서를 냈습니다. 청년층이 느끼는 경쟁에 대한 압박감, 고용·주거·육아 불안 등이 출산을 꺼리게 한다는 분석입니다.

정책을 추진하는 방식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합니다. 출산율 끌어올리기를 경제성장률이나 물가상승률 목표를 내걸듯이 하고, 저출산 예산이란 꼬리표를 달아 지원만 늘리면 해결될 것처럼 생각한 것이지요.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대통령 직속임에도 과거 정부에서는 대통령이 한 번도 회의를 주재하지 않았습니다.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을 세운 지 17년이 지났고, 예산 280조 원을 들였지만 결과는 참담합니다.

▷국민 의식 바꾸는 캠페인 중요

저출산에 현명하게 대처한 모범 사례를 봐야 합니다. 출산율 회복 국가인 스웨덴은 출산율 제고를 직접적 목표로 내걸지 않았습니다. 남녀 공동육아, 여성 고용 확대 등 양성평등사회를 만드는 것을 가족정책의 최고 목표로 삼았죠. 남자도 240일의 육아휴직을 할 수 있는데, 이 중 90일은 사용하지 않으면 소멸되도록 해 육아 참여를 유도합니다. 아이를 돌보는 아빠인 ‘라테 파파’가 스웨덴인의 일상이 된 것도 이 때문이죠. 일본은 사회 전체가 육아를 지원하고 아이를 소중히 여기는 사회를 구축하는 것을 가족정책 목표로 세웁니다. 또 누구나 사회와 직장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사회인 ‘1억 총활약 사회’를 경제정책 표어로 내걸고 가족정책을 핵심축으로 삼습니다. 두 나라 모두 국민 의식을 바꾸려는 노력을 앞세운 것이죠. 우리나라의 법정 육아휴직 기간은 남녀 모두 52주로 보장되지만, 남성의 실제 사용률은 여성의 절반도 안 되는 현실입니다. 제도만 잘 갖췄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NIE 포인트
1. 저출산 문제가 악화된 배경에 대해 알아보자.
2. 지금 같은 사회라면 본인은 장래에 결혼과 출산을 하고 싶은지 얘기해보자.
3.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어떤 가족정책이 필요한지 토론해보자.

외국인 250만…한국도 '다인종 국가' 대열
이주민 포용해야 인구위기 넘을 수 있어요

지난해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 입국장에 외국인 근로자들이 입국하고 있는 모습. /뉴스1

지난해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 입국장에 외국인 근로자들이 입국하고 있는 모습. /뉴스1
지난해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 입국장에 외국인 근로자들이 입국하고 있는 모습. /뉴스1
노동경제학계를 대표하는 남성일 서강대 명예교수는 10년 전 논문에서 “특별한 이민정책이 없을 경우 2010년대 후반부터 경제활동인구가 줄어들고 소비·투자 등 총수요가 감소해 경제성장률이 2020년대엔 1%대로 낮아질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1.4%로 전망되는데요, 남 교수의 예상이 맞아떨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여기엔 세계적 금리 인상, 미·중 공급망 갈등의 영향이 컸겠죠. 그러나 0%대 성장의 늪에 빠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큰 상황에서 저성장의 근본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인 건 분명합니다.

이민 확대는 경제 안정의 보증수표

남 교수는 당시 논문에서 “이민자들이 한국 사회에 적응력을 키우고 빈곤층으로 추락할 가능성을 최대한 낮추는 제도가 뒷받침된다면 정주형 이민정책으로 점진적 이민자 도입을 확대하는 것이 안정적인 거시경제 지표 개선을 위한 최선의 방안”이라고 밝혔습니다. 저출산과 급속한 고령화에 맞서 경제활동인구를 유지할 수 있는 방안으로 정년 연장, 고령자 고용, 여성 경제활동 참가 확대 등도 있습니다. 생산 자동화와 디지털 컨버전스로 노동생산성을 끌어올리는 것도 대안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선진 각국이 경제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 가장 많이 쓴 대책이 바로 이주민 유입을 늘리는 정책이란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충남 인구로 늘어난 국내 외국인

선진국들은 전체 인구 중 이민자 비율이 14%를 웃돕니다. 이민 확대 정책에다 세계화가 가속된 결과인데요, 2019년 UN 자료를 보면 호주가 30.0%, 캐나다 21.3%, 독일 15.7%, 미국 15.4% 등입니다. 우리나라는 작년 말 3.4%(175만 명)에 이릅니다. 그런데 주민등록 외국인에 장단기 체류 외국인까지 합하면 이 숫자가 지난 9월 말 현재 251만 명, 4.9%로 늘어납니다. 충청남도 인구와 비슷합니다. 이게 내년엔 5%를 넘고 우리나라도 본격적으로 ‘다인종·다문화 국가’로 분류되게 됩니다.

국내 외국인 인구는 1990년대 초부터 국제결혼이 늘고, 고용허가제를 통해 외국인 근로자 유입이 시작되면서 증가해왔습니다. 이제는 중소기업, 음식점, 시골 농가 등이 외국인 일손 없이 돌아가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외국인 유학생을 흔히 볼 수 있고, 귀화해 국회의원이 된 사례도 있습니다. 최근 우리 정부는 제조업 인력 부족 문제를 풀기 위해 비전문 취업비자(E-9)의 취업 가능 업종을 크게 늘리기로 했습니다. 통계청은 2040년이 되면 외국인 인구가 323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6.4%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사회불안 요소 줄일 방안 고민해야

이런 인구의 변화는 경제에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이주민으로 인한 범죄 증가, 내국인과의 종교·일자리 갈등, 사회적 따돌림, 거주지역 슬럼화 등 적지 않은 사회문제를 일으킬 겁니다. 토종 한국인과의 정서적 통합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민 2세에 이르면 기존 사회에 동화하긴 하지만, 하위계층으로 남아 사회통합을 더욱 어렵게 할 수 있습니다. 동화되긴 해도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분절적 동화’, 다양한 민족이 하류층을 형성한다는 ‘무지개 하류 계층’ 등 용어는 이런 부작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이제 한국도 다인종 국가로서 미국의 ‘멜팅 포트(melting pot)’, 캐나다 ‘샐러드볼’처럼 다문화 현상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사회통합을 이뤄나갈지 고민해야 합니다. 기회균등과 차별 배제, 다문화주의라는 사회정책도 모든 법률과 제도에서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깊은 성찰이 요구되는 부분입니다. 국민도 외국인을 저임금 노동자로만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이주민 확대 속에서 인구 위기 극복의 이익을 공유하고, 사회적 혼란과 같은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어 공용화 등 다중언어 정책, 미국의 어퍼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과 같은 한국식 소수인종 우대정책에 대한 논의도 필요해 보입니다. 지지부진한 이민청 설립 논의도 재개될 필요가 있습니다.

NIE 포인트
1. 자신의 생활 주변에서 외국인과 교류한 경험을 얘기해보자.
2. 외국인과의 갈등 요소를 어떻게 줄일 수 있을지 생각해보자.
3. 소수인종 우대정책에 대해 찬반 토론을 벌여보자.

장규호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daniel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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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3년 12월 10일)
제목: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의 초대"
말씀: 마태복음 11:25~30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강도사님), 영광찬양대-'사랑이 예 오셨네'
대표기도: 윤주은 부목사님(1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김지찬 목사님(총신대학 신학대학원 교수)
ㅡㅡㅡㅡㅡ

*마태복음 11:25~30,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ㅡㅡㅡㅡㅡ

사랑하는 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낭독한 본문은 주일 예배를 드릴 때 예배를 추천의 본문으로 자주 사용되는 구절입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듣기만 해도 위로가 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해석자들은 이 구절이 공관복음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려고 하면 해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첫째,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라고 했는데 그러면 무엇을 수고하고 어떤 무거움 을 진자들은 이야기하는가?
둘째, 주님께서는 내가 쉬게 해주리라. 라고 하시고 내 멍에를 메라고 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셋째, 주님께서는 나의 먹매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시면서 나는 마음이 우유하고 겸손함이라. 라고 했는데, 그런 온유와 겸손은 예수님의 마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이렇게 이 본문은 쉬워 보이지만 막상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하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어떤 세상의 슬기로운 학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은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빈 그릇이고, 그 안에 무엇이든지 채워 넣으면 되는 그런 말씀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구체적인 내용이 없이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앞에 25절에서,
‘천지의 주제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1:25,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에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의 태도를 버리고, 어린 아이들처럼 단순하게 주님의 말씀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들으면 영혼의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 복된 시간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첫 번째 질문,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여기에 수고하다. 라고 하는 동의어는 헬라어로 ‘코피아오’입니다. 우리 한글로 코피나오!, 굉장히 비슷하기 때문에 코피 이해하기 쉬울 것 같아요. 이 ‘코피아오’ 라는 동사는 신약 성경에서는 ‘일상적인 삶의 노동’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특별히 농업이나 어업에 종사하는 자들의 일상적인 육체적 ‘노동’을 가리킵니다. 마태복음 6장 28절에 보면,

*마태복음 6:28,
28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둘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라고 한 걸 보면, 농부가 씨앗을 뿌리고 거두는 노동의 수고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5장 5장 5절을 보면,

*누가복음 5:5,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이라고 했는데, 여기에 수고하였으되. 라고 하는 동사는 어부들의 고기를 낚는 육체노동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수고하다. 수고하고. 라고 할 때 이 동사가 현재 분사형으로 쓰였기 때문에 현재 분사는 지속적인 일상적인 행동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수고하는 자들이란 매일같이 일상적인 삶의 요구를 요구로 애쓰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아담의 범죄 후에는 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며 수고하는 존재고, 이것이 일상적인 인간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고기를 낚기 위해 밤새 수고하는 어부들과 같습니다.

특별히 요즘 젊은 세대는 밤새 컴퓨터와 핸드폰을 켜놓고, 비트코인이나 암호 화폐를 사고파느라 밤을 새며 수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안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매일같이 지속적으로 수고한 결과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무거운 짐을 진 자, 라는 것은 짐을 싣다. 는 동사의 완료 수동 분사 형태인데, 이미 완료된 행동에 결과로 현재 존재하게 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매일같이 반복되는 수고로운 행동으로 인해 현재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의 상태가 되었다. 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그러면 그렇게 만든 것인가요? 어떤 학자들은 말로 쓰던 OO형으로 이해하여 스스로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운 자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짐을 지운 것도 사실이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가 지고 있는 대부분의 짐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짐입니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이든 구한 사람이든 차이가 없습니다. 흔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 그러면 외적으로 도로한 환경에 있던 나는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가난한 이들이 내일의 생계를 위해 하루하루 힘들게 수고하며 무거운 짐 진 자들이 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부유한 자들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를 부유층에서 찾으셨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어떤 부자 관리가 예수님께 나아와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이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신이 근심했다고 하였습니다. 이 관리는 자신이 원하는 부와 명예를 얻었지만 내면은 기쁨과 안식을 누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물질적 부로 인해 생긴 내면의 고통과 불안함이 무거운 짐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왜 빈부를 물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수고하고 끝내는 무거운 짐진자들이 되는 것일까요? 수고하여 재물을 많이 얻으면, 영혼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2장 16절 이하에서 주님은 이 점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2:16-19,
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여기에 평안히 쉬다, 내 영혼을 평안히 쉬자. 라고 했을 때 이 평안히 쉬다. 라는 단어가 예수님께서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내 영혼이 힘을 얻으니 우리 한글 성경에는 내 마음이라고 되어 있는데, 기억하면 영혼이 똑같은 언어입니다. 이 부자가 소출이 많아지자 국가를 더 크게 짓고 급식과 물건을 쌓아놓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기 위해서입니다. 옛날만 그런 게 아니라 현재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기기 위해 돈을 많이 벌려는 것이 대부분의 현대인들의 삶의 목표가 아닙니까? 그러나 이 큰 재물을 얻는다 하여도 영혼의 안식을 얻을 수 없다고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영혼의 양식은커녕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날에는 자신의 영혼마저 잃어버리게 된다고 주님이 경고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비유의 끝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이유가 영혼을 영혼의 안식을 얻기 위한 것인데,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영혼의 안식은커녕 영혼을 잃어버린다면 도대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수고하고 애를 쓰는 것입니까? 따라서 주님은 마태복음 16장 25절 이하에서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 26,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주님이 이렇게 경경하신 거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자들이 영혼의 안식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뭐냐면, 영혼의 안식은커녕 영혼을 잃어버리게 되면 천하를 얻은 데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경고하시면서 지금 우리를 향해 이렇게 초청하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 앉아 있는 우리 가운데 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가 아니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아마 한 분도 계시지 않을 겁니다. 겉으로는 남부럽지 않고 행복해 보여도 깊은 내면에 외로움과 두려움, 불안과 공포에 무거운 짐을 안고 사는 분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신 것은 저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를 향한 초청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주님에게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우성 우리는 세상에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서 떠나야 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전문가들이 나와서 이런저런 조언과 폭로로 우리를 정신 못 차리게 만들고, 결국은 무거운 짐을 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주식을 사라. 아니다. 펀드를 해야 된다. 아니다. 안전자산의 금을 살 때다. 지금이 암호 화폐에 투자하여 적기이다. 아니다. 환율을 보면 1번 화폐 n에 투자해야 된다. 지금은 부동산 투자하고 아파트를 살 마지막 기회다. 8일만 바르면 얼굴이 하얘진다. 샴푸만 해도 머리가 까맣게 바뀐 거죠. 몇 년 전에 8일만 바르면 하해진다는 비타민 앰플을 지혜로운 전문가에게 듣고 샀습니다. 제가 웬만해가지고는 광고에 안 넘어갔는데 테니스를 치면서 이제 얼굴이 검게 박힌 데다가 아내가 툭툭 그냥 얼굴이 왜 그래 뭐 이렇게 잔소리를 하는 바람에 스트레스가 생겼습니다. 이러다 보니까 사람 이렇게 사람들처럼 큰 대형 화면 가지고 외울 때마다 제 얼굴이 나오니까 신경이 쓰여서 얼굴이 하얘진다는 말에 그만 귀가 솔깃해졌어요. 지금은 잘 안 보이는 이유는 BB크림을 발라서 그렇습니다. 특히 그 기대를 가지고 이제 한국 사람들이 비타민 앰플을 샀어요. 8일 동안 발랐는데 별 차이가 없는 거죠. 몇 달 바르면 낫겠지만 몇 달리를 바랐는데 하나도 효과가 없어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왜 이래 비타민 에플을 사야 되나 엄청 비싸서 때려 치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습니다. 제가 왜 그 광고에 넘어가서 비타민 앰플을 샀겠습니까? 얼굴이 하얘지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크니까 마음이 귀가 얄팍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런 세상에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의 말에 너무 많이 귀를 기울이면 안 됩니다. 이들은 종종 옛날 바리새인처럼 자신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하는 자들입니다. 누가복음 11장 45절에 보면,

*누가복음 11:46,
46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 도다.
-여기에 어려우심을 사람에게 지우고 라고 할지 지우사, 자나가 오늘 무거운 짐을 쥔 자들하고 똑같은 단어에요. 우리는. 그런데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의 조언, 특별히 돈을 쉽게 벌게 해주겠다는 전문가들의 말에 넘어가선 안 됩니다. 이들의 마을에 넘어가서 숙식을 하고, 비트코인을 하고 영 끌, 아파트를 샀다가 재산을 탕진하고 빚더미 짐에 달린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인간의 욕망을 호소하면서 결국은 자신의 명예와 도를 추구하는 소위 세상에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들일 가능성이 큽니다. 왜 인간들이 지혜롭고 슬기로운 세상의 사람들의 말에 넘어가는 걸까요? 인간은 다 풍요와 만물을 생성하기 때문에 풍요롭게 해주겠다.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말에 쉽게 속아 넘어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망원의 우상이 우리를 풍요롭게 하기는커녕 우리에게 큰 짐이 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끝내는 많은 현대인들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제가 이제 지난 11월 28일에 은퇴 예배를 드리고 이제 내년 2월에는 은퇴를 하게 되는데, 어떻게 제 생년월일을 알아가지고 유튜브나 아니면 이렇게 광고가 계속 와요. 은퇴 현금을 어떻게 관리해야 되는지 그거를 알아보려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퇴직금을 한꺼번에 받아라. 아니다. 나누어서 어디다가 뭐라 제가 몇 개를 봤는데요. 전문가들이랑 말이 다 달라요. 다 달라, 더 이상 안 듣기로 했어요. 이때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뭐냐 하면, 세상에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 볼 때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 주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승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한 그 말씀을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순진하고 순박하게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방법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을 쉬게 하실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에게 그를 돕는 방법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첫 번째,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의 어깨에서 짐을 내려주고 목에서 멍에를 풀어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지고 가는 짐을 계속 질 수 있도록 짐을 조금 가볍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방법과는 전혀 다른 우리가 전혀 예상치 않은 말씀을 하십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왜냐하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기 때문이라 그리하면 너의 영혼이 쉼을 얻으리라.”
-힘을 얻는 방법이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에게 배우는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의 멍에를 매라. 라는 것은 이미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에게는 전혀 기대하지 않는 말씀이에요. 따라서 어떤 유대교 교사나 선지자들도 제자들이나 백성에게 내 멍에를 매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내 멍에를 매라는 예수님의 요청은 그야말로 독특하기 그지없는 특이한 초청이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따라서 ‘내 멍에를 매라’는 속성은 그 누구도 알거나 가르치지 않았던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들어오라는 주님의 초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초청하는 전혀 새로운 삶의 방식은 무엇입니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멍에를 매는 게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6:14,
14 너희는 잊지 않는 자의 명에를 함께 내지 말라. 의와 율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섞이며,
-그러니까 함께 멍에를 맨다는 것은 함께 살고, 함께 사귀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과의 교제 안으로 초청을 하신 거죠. 우리가 주님의 멍에를 메면 멍에는 서로 묶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하고 주님과 함께 사귀는 것을 의미해요. 따라서 주님의 멍에를 매면 주님과 함께하고 주님 곁에 머무르고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으로부터 배우게 된다는 것이에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 영원히 안식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주님과의 교제 안으로 들어가는 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고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 문에서
“오 하나님, 내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얻을 때까지 나의 인생에는 진정한 휴식이 없었습니다.”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신 것은 창이 하나님의 형상 안으로 우리를 부르시며 신성한 삶의 방식으로 살라고 우리를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삶의 방식 밖에 모르는 인간들에게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초청이야말로 전혀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의 초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무엇을 배우라는 것일까?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왜냐하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기 때문이다. 그리하면 너의 영혼이 힘을 얻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한글 성경에 순서를 보니까 알죠? 내게 배우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성품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내게 배우라고 하시면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기 때문이다. 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성품은 온유와 겸손인데,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에게서 오이와 겸손을 배우면 비로소 우리의 영혼이 쉼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성품인 온유와 겸손을 배우면 왜 우리의 영의 힘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제부터 그 이유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유라고 하면 우리 한글 표현으로 보면은 성격과 태도 따위가 온화하고 부드럽다. 라고 정의되어 있기 때문에 온유하고 그러면 온유라고 그러면 더 따뜻하고 부드러움으로 이해하는데 성경에 온유는 그렇지 않습니다. 온유의 인문서라고 불리우는 시편 37편을 보면 성경에서의 온유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 전적인 의존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시편 37편을 읽어보면 온유한 자란 오직 이것만을 의지하고 여호와만을 바라보고 여호와만을 소망하면서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선을 행하는 의미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게 예수님의 모습 아닙니까? 물론 온유한 자가 살아남는 세상은 불평하고 희귀할 수밖에 없음을 시편 기자로 인정해요. 그래서 37편 12, 14, 21절에 보면,

*시편 37:12-15,
12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그를 향하여 그의 이를 가는도다
14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겨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21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겨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려뜨리고, 악인은 꾸고 갚지 않지만 그 길이 형통하고 큰 세력을 유지하고 무성하게 된다. 인정해요. 그러나 시편 기자는 37편 1절부터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편해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을 쉬게 하지 말라. 라고 권면해요. 왜냐하면 이 악인들의 길이 형통한 것 때문에 분노하고 화를 내고 불평하고 시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악인들의 형통과 부우는 잠시 있다가 개입을 당하는 풀과 같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온유한 자들은 오직 여호와만 바라보고 의지하기 때문에 땅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온유한 자들은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절대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악인들이 잠시 형통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불평하거나 원망하거나 시기하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온유한 자는 하나님만을 신뢰하기에 불평하거나, 시기하지 않으니까 영혼의 안식을 누릴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고 하시면서 나는 온유하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죠. 그리고는 그렇게 되면, ‘내 영혼이 쉼을 얻게 될 거다.’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영혼의 안식을 누리려면?
-예수님의 마약을 매고 예수님의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겸손은 우리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말해요. 그런데 현대인들은 이렇게 성경적인 겸손을 이해하지 못하고 겸손이라고 그러면 그냥 인식의 문제로만 봅니다. 우리나라 표준 국어 대사전을 보면 겸손이란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는 내세우지 않는 태도, 이것을 온유라고 말해요. 룩맨이라고 하는 이제 영영 사전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자신에 대해 너무 자랑스러워하지 않는 성격, 이게 겸손으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속 철학이나 세속 문화에서는 겸손을 자기를 낮게 생각하는 인식의 방식을 가리켜요. 자기를 높게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이렇게 대할 때 자기를 존중하기보다는 남을 존중하며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자기를 낮추는 것을 겸손이라고 생각하는데, 심지어는 그리스도인들도 겸손을 이 정도의 인식의 어떤 문제로만 보면 평안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비교해 보면 자신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알고, 하나님 앞에서 악하기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고,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면 충분히 겸손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문제는 이런 인식만으로는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오랜 동안 자신은 하나님 앞에 별것 아닌 존재며 자신은 죄인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한순간도 설 수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안식을 이루지 못했다고 고백록에서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어거스틴 자신은 죄인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는 인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지고 있던 악한 성적인 나쁜 습관을 오랜 동안 버릴 수가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자기를 낮게 생각하는 인식의 변화만으로는 성경이 말하는 겸손, 예수님의 겸손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예수님의 겸손일까요? 라고스는 빌립보서 2장 6절과 8절에서 예수님의 겸손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빌립보서 2장 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 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 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체가 같으신데 하나님과 동동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신 거 이거는 인식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시 자신을 하나님과 원래 본체로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는 면에서 인식의 문제에서 겸손한 것도 사실이지만, 실제로 예수님은 거기에 머무신 게 아니라,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들과 같이 계셨다는 거죠. 이것이 예수님의 첫 번째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주님은 자기의 의지를 꺾고 성도의 뜻에 복종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겸손하셨는데, 이것이 예수님의 두 번째 겸손이라는 거죠. 그러기에 예수님의 겸손은 어거스틴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성도에게 복종하는 의지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영혼의 안식을 얻기 위해서는 이렇게 죽기까지 복종하는 전문성이 있어야 되는 건데, 죽기까지 복종하는 이 겸손은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라는 것이죠. 어거스틴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죽음에 이르는 심정으로 자신을 겸손하게 하신 예수님에게서 겸손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의 본이 아니었다면 이런 불순종이 기쁨에 이르는 길임을 배울 수 없었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결국 겸손은 의지의 문제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임을 깨닫고 비로소 어거스틴은 그의 악한 성적 습관을 버릴 수만 있었고, 비로소 안식을 누릴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 겸손은 이 세상에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 알지 못하는 기독교만의 신비로운 하늘의 비밀인 거예요.

사실은 우리 목사님이 임직예배 때에 축사를 동영상을 하시면서 리타이어먼트는 이게 바퀴를 다시 갈아 끼우는 정도가 아니라, 리파이어다, 이러면서 저한테 설교를 맡기는 바람에 제가 은퇴 후에 쉬지 못하고 설교 준비하다가 입술이 터졌어요. 그러면서 사실은 몸의 안식을 누리지 못했지만, 진정한 안식이 무엇인지를 어거스틴을 통해서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아는 거 아닙니까? 이게 그냥 들으면 뻔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 모두 여기 앉아 있는 분들이 왜 안식을 못 누리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보다 크시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고,, 사실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살 수 없다고 그냥 인식할 뿐이지, 실제로 나의 의지를 꺾고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며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진정한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들은 이런 걸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 기껏해야 겸손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사람 앞에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또 어떤 학자들은 겸손이 미덕이냐 그런 건 미덕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속으로는 안 그런데 겉으로는 겸손한 척하면서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과연 진정한 미덕일 수 있느냐? 라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그런데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겸손을 이야기한다면 이 예수님의 겸손은 미덕중에 미덕이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경륜을 본받지 않고는 진정한 영혼의 안식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어거스틴은 자신의 삶에서 절감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내게 기독교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아무리 자주 묻는다 해도 나의 대답은 항상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목이 곧아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목이 곧은 우리가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우리의 의지를 꺾고 하나님의 의지에 굴복하여 죽기까지 순종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기준에서는 충분히 겸손한 것 같은데, 진정으로 안식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의 의지를 꺾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예수님의 경선을 아직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어거스틴은 가르칩니다. 자신의 의지를 꺾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낮게 평가하는 세상의 겸손이 오히려 교만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한 반에 한 반에서 가장 이제 운동 실력이 없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사람이 나는 우리 반에서 가장 운동 신경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자기 평가를 하고 있다고 해서 이 사람을 겸손하다고 할 수 없다는 거죠. 아무리 운동 신경이 모자라도 운동 실력을 높이려면 열심히 노력을 해야 되는데, 운동 연습을 게을리 하면서 나는 원래 운동력이 없다. 나는 원래 무능하다. 운동 신경에 있어서는, 라고 인정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오히려 교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신뢰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자기의 의지를 꺾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행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겸손인 거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라고 한 것이야말로 진정한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였기 때문에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흥부와 공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에요. 만약에 나를 어려운 상황 고통 가운데 주님께서 이렇게 밀어 넣으시면 내 뜻을 꺾고, 주님의 뜻에 불복하면서 살아내니까 비천해 할 수도 있는 거고, 때로는 풍부한 가운데 우리를 하나님께서 밀어 넣으시면 그 풍부 가운데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내 의지를 꺾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되면 풍부에 처할 줄도 알게 된다는 거죠.

보통 이렇게 이제 의지가 저는 의지가 강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요. 내가 이제 아내한테 스트레스를 주면은 당신은 의지가 강하니까 오래 잘하지만 나는 의지가 원래 약하기 때문에 못한다. 이러거든요. 수술이나 약한 경이 자랑하지 않는 이상이라고 이야기 지금 나도 그냥 안 해 가지 집도 쉽게 닦고 그럴 텐데 이해를 할 게 별로 없어요. 다른 사람 예 들면 또 이제 실망하니까 서로 꾸준히 그게 있습니다. 당신은 원래 의지가 제가 원래 의지가 조금 더 강한 건 사실일지 모르지만 의지가 약하다고 뒤로 물러서면 안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뭐예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할 수 있다. 라고 이렇게 말을 하시면 말씀하시면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꺾고 그래 우리 주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니까 내가 한번 해보겠다. 라고 자기 의지를 꺾고 주님의 의지에 굴복하여 순종하게 되면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는 거고, 그래서 바울이 내가 약한 데서 강한 욕심이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핵심은 뭐냐 하면 의지인 거예요. 왜 못합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한 것은 그냥 바울이 그냥 어쩌다가 하늘에 던 번개 같은 계시를 받고 한 말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의지를 굴복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죽기까지 복종했을 때, 그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 안에서 내가 모든 걸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 라고 고백을 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우리 사랑 교회 성도 여러분,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멍에를 메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독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 길은 우리의 의지를 꺾고, 주님의 뜻을 행해야 하는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이죠. 게다가 십자가의 길을 가려고 하면 시련과 환난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님의 짐이 가볍다고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7절 이하에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4:17-18,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여기 환란에 경한 것이라고 할 때 그 경함이 핼라어라는 ‘내 짐은 가벼움이라.’의 가벼움과 같은 답이 우리가 주님을 따르다가 받아야 하는 환난의 짐은 우리가 받을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에요. 환난은 잠시지만 영광은 영원한 것입니다. 지극히 큰 영광에 임하면 환난은 가벼운 것입니다. 잠시 동안의 환난이 끝내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영원한 영광 민족이 한다면, 그 환난은 가벼울 수밖에 없는 거고, 이에 주님께서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 성도 여러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십니까? 그럴 때마다 우리를 안식으로 초대하는 예수님에게로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겸손은, 자기 의지를 꺾고 성도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겸손이었음을 기억하고 나를 현재 이런 상황에 두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우리의 의지를 꺾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평안과 안식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남은 생에 여러분과 제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멍에를 멘 자로서 그리스도의 평안을 함께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약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의 삶의 방식 외에는 알지 못했던 우리를 불러 전혀 새로운 삶의 양식으로 우리를 초대하심에 감사를 올려드려야 한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에게 온유와 겸손을 배우며, 그 말씀에 우리의 뜻을 굴복시켜 죽기까지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안식을 주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을 기대하며, 믿고 신뢰하며 우리 남은 생애가 주님과 멍에를 메는 삶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겸손은, 자기 의지를 꺾고 성도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겸손이었음을 기억하고 나를 현재 이런 상황에 두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우리의 의지를 꺾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평안과 안식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어린아이들에게 복음의 비밀들을 나타내신 그의 은혜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그 말씀이 대답이라고 불리운 것은, 그 말씀이 앞에 나타난 우울한 생각들에 대해 아주 위로를 주는 회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생각을 함으로써 원기를 되찾으신다. 그리고 그 생각을 더욱 새롭게 하기 위해 그는 그 사실에 대해 감사를 드리신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 보아도 우리를 낙담케 하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우러러 보는 가운데서 커다란 격려를 얻을 수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감사하나이다. 감사는 어둡고 불안한 생각들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며, 그 생각들을 잠재우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찬양의 노래는 의기소침해지는 영혼에 잘 듣는 최상의 강심제이다. 우리가 슬픔과 두려움의 생각들에 대처할 수 있는 다른 어떤 해답을 갖고 있지 못할 때, 우리는 `아버지여! 감사하나이다`라는 이 말씀에 호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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