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閨 怨 [규 원] 여인의 원망 - 林悌[임제]
十五越溪女 [십오월계녀] 열 다섯 어여쁜 월계 아가씨
羞人無語別 [수인무어별] 부끄러 말 못하고 헤어지고는
歸來掩重門 [귀래엄중문] 돌아와 중문도 닫아 걸고서
泣向梨花月 [읍향이화월] 배꽃 달 바라보며 울었답니다.
'無語別[무어별] 말없는 이별' 이란 시제(詩題)로 불리기도 하는 詩.
가냘픈 소녀의 안타까운 첫사랑을 노래했다.
월계는 중국 남쪽 월나라의 시내다.
월계는 달리 완사계(浣紗溪) 또는 야계(耶溪)로 부르기도 한다.
월나라의 유명한 미녀 서시(西施)가 빨래하던 곳이다.
그녀는 이곳에서 빨래를 하다가 그 빼어난 미모가 눈에 띄어, 오왕 부차에게 보내진다.
그녀의 미모에 흠뻑 빠진 부차는 나라 일도 돌보지 않고 오로지 그녀만 바라보다,
결국 월왕 구천의 군대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만다.
그러니까 월계의 아가씨란 서시처럼 예쁜 아가씨란 뜻이다.
더구나 그녀의 나이는 방년 열 다섯. 아직 이팔청춘도 안된 앳된 나이다.
이 시에서 가장 정채로운 부분은 제 2구이다.
'무어별(無語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헤어진 것이 아니라,
하고픈 말은 너무도 많은데 부끄러워 한 마디도 못한채 헤어진 이별이다.
임이 부끄러워서기 보다는 내가 임과 만나는 것을 혹 누가 보기라도 했을까봐 부끄럽다.
'수인(羞人)'은 정감이고, '무어별'은 형상이다. 음미할수록 맛이 있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아직도 부끄러움이 남아,
바깥 문을 닫고 그래도 부족해 중문까지 꽁꽁 닫아 걸었다.
그리고는 그토록 기다려 만난 임 앞에서 정작 한 마디도 못한 자신이 너무 속 상해서
배꽃처럼 흰 달빛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남녀간에 과연 이런 사랑이 가능했을까?
사람 사는 세상인데 다를 게 뭐 있겠는가?
하지만 이 시는 남녀간의 실제 상황을 노래한 것은 아니다.
월계녀란 말에서 이미 시인은 이 노래가 중국 남방에서 즐겨 불려졌던
남녀의 사랑을 노래한 악부풍의 시임을 명백히 밝혔다.
그러니까 시 속의 소녀는 분방하면서도 수줍음을 간직한
중국 남방의 어느 소녀를 생각하며 떠올린 상황이다.
임제가 활동하던 시기의 시인들은 중국 남조 민가풍의 악부시를 많이 지었다.
남녀의 사랑은 이 시기에 아주 즐겨 부르던 주제였다.
같은 풍의 한시 한 수를 더 읽어 보자.
- 采蓮曲 [채련곡] 연밥따는 노래 - 許蘭雪軒[허난설현]
秋淨長湖碧玉流 [추정장호벽옥류] 맑은 가을 긴 호수에 벽옥같은 물 흐르고
荷花深處係蘭舟 [하화심처계란주] 무성한 연꽃 속에 목란배를 매었다네
逢郞隔水投蓮子 [봉랑격수투련자] 임 만나 물 건너로 연밥을 던지다가
遙被人知半日羞 [요피인지반일수] 남의 눈에 띄었을까 반나절 무안했네
가을날 호수물은 쪽빛 하늘을 닮아 벽옥처럼 푸르다.
그 강물 위로 쪽닥배를 저어간다. 연꽃이 가장 무성한 곳 아래 배를 묶는다.
연밥을 따기 위해서가 아니다. 임과 물가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임과의 밀회 장면을 다른 사람들이 보아서는 곤란하겠기에,
무성한 연잎 속에 숨어 임이 오시기만을 기다린다.
마침내 저쪽에서 임은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나 있는 물가 쪽으로 걸어온다.
물가에 멈춰선다. 나를 찾지 못하는 그가 안타깝다.
그래서 연밥 하나를 따서 불쑥 임의 발치에 던졌다.
'저 여기 있어요'라고 말도 못하고 말이다.
그리고는 혹시 그 모습을 누가 보았을까봐 반 나절 동안이나
두 볼에서 붉은 빛이 가시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가 던진 것이 '연자(蓮子)' 즉 연밥인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연자(蓮子)'는 '연자(憐子)', 즉 '그대를 사랑한다' 는 말과 발음이 같다.
따라서 그녀가 임의 발치에 던진 것은 단순히
'저 여기 있어요' 가 아니라 사실은 ' 당신을 사랑해요' 의 의미를 띤다.
이런 것을 한시에서는 쌍관의(雙關義)라고 한다.
그녀가 반나절 동안이나 양볼의 홍조가 가시지 않았던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수줍지만 대담한 남방 소녀들의 이러한 사랑 노래는
당시 조선의 독자들에게는 아주 낭만적인 이국정서를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사실 사랑하는 남녀가 부끄럽게 만나 사랑을 속삭이는 것은
얼마나 두근거리고 설레이는 일인가?
이것을 아름답게 여기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