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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3년 8월 20일)
제목: "순종하지 않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말씀: 열왕기상 13:15~24
대표기도: 노주찬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
설교자: 김지찬 목사님-초빙(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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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3:15~24,
15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
16 대답하되 나는 그대와 함께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대와 함께 들어가지도 못하겠으며 내가 이 곳에서 그대와 함께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17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다.
18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19 이에 그 사람이 그와 함께 돌아가서 그의 집에서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니라.
20 그들이 상 앞에 앉아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하니.
21 그가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외쳐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22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하신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23 그리고 자기가 데리고 온 선지자가 떡을 먹고 물을 마신 후에 그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라.
24 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그를 만나 물어 죽이매 그의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서 있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서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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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찬 목사님-초빙(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2천 년대 들어서면서 우리나라는 기독교 후기 시대로 들어섰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너무 열악해서 기독교가 한 나라의 제도나 사회, 경제, 교육 등 국민의 삶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국가 위에 군림하거나 최소한 국가와 밀월 관계를 유지하던 기독교 시기가 지났다는 것입니다. 유럽은 18세기의 시민혁명으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었고, 경제는 오직 시장 논리로만 움직이고 사회 전 분야가 기독교적 가치관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건국 이후에 1960년대까지 200년 동안 기독교 시대를 누리다가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기독교 후기 시대로 들어갔습니다. 1962년에 국립학교에서 주기기도문, 암송이 금지된 것이 결정적 사건입니다. 한국 사회는 원래 세속국가인 데다가 기독교가 다수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서구 같은 형태의 기독교 시대였던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해방 이후에 1980년대까지 국가와 밀월관계를 유지하면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유사 기독교 시대라고 말합니다. 한국교회는 구한말 시대에 서구의 근대 문명을 받아들이고 양반과 천민이라는 신분 제도를 철폐하면서 계몽의 선두로 백성들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반공과 산업화가 국가 재건의 과제였는데, 한국교회가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사회의 기둥 역할을 했습니다. 실제로 13명의 대통령 가운데 개신교 출신이 4명이나 됩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면서 반미 정서가 생기고, 반공을 통치 이념으로 삼던 정권과 싸우던 운동권 세력이 기득권층을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세속화가 한국 사회에 들어오면서 한국은 기독교 후기 시대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후기 시대가 되는데 유럽은 1400년 걸렸고, 미국은 200년 걸렸는데, 한국은 채 100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기독교 후기 시대에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서구학자들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첫째, 사회의 중심에 있었던 교회와 교회의 스토리가 주변으로 밀려난다.
둘째, 사회 속에서 편안함을 누리던 그리스도인들이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소수를 느끼며 편안함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한다.
셋째, 기독교 후기 시대 현대인들은 기독교는 여러 세계관 중에 하나이며 웬만해서는 기독교 진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증거를 보여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면 이런 기독교 후기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미 기독교 후기 시대를 경험한 서구 학자들은 세 가지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첫째, 사회를 통제하려 하지 말고 복음의 증인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라.
둘째, 동교들이 이렇게 경쟁을 하고 있기 때문에 현상 유지하기보다는 적극적인 선교적 삶을 살아야 된다.
셋째, 제도적 기관으로서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교회는 강력한 생명운동과 구원 운동을 벌여야 된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포스트 그리스 덤 시대에, 기독교 후기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생명과 구원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진리의 증인으로서 적극적인 선교 적 삶을 살아야 한다. 이렇게 정의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복음의 증인으로서의 역할, 진리의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다른 이들이 기독교 진리가 무엇인지 알게 하려면 그 진리에 우리가 목숨을 걸어야 됩니다. 한 사람이 무엇에 목숨을 거는지를 봐야 그 사람이 믿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돈 버는 일에 목숨을 바친다면 그 사람에게는 돈이 진리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 후기 시대에서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가치와 신념에 목숨을 거는지 알고 싶어 하고 실제로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걸고 죽을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 진리가 뭐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거 아닙니까? 장차 주님이 심판주로 오셔서 믿는 자들에게는 영생을, 불신자들에게는 영원한 멸망을 선포하실 것이라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가 이 진리에 어느 정도까지 목숨을 걸고 순종해야 세상 사람들이 이 진리를 알아줄까요?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순종은 이 순종밖에 없음을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셨는데 아쉽게도 현대교회는 절대적 순종의 모습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아니 순종이라는 단어 자체도 싫어합니다. 이건 주례를 서보면 금방 압니다. 예전에는 신랑 신부가 주례사를 다소곳이 듣기만 했는데 요새 커플들은 주례사 중에 서로 쳐다보고 웃고 귓속말까지 합니다. 제가 이제 에베소서 5장 24절 본문을 가지고 아내들도 범사에 남편에게 복종할지라라고 권면하면 이전에는 그냥 아무 표정 없이 듣고 지나갔는데 묘사의 신부들은 저를 빤히 쳐다봅니다. 아니 어떻게 남편에게 복종을 하라고 하는 거예요라는 표정을 제가 얼굴에서 읽게 만듭니다. 제가 이제 앞에 5장 18절에서 21절에 보면 성령 충만의 4가지 결과가 나오는데 맨 마지막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가 나온다. 그러니까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피차 복종하는 게 더 큰 원리고 그 안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목숨을 내어주고 사랑해야 된다. 그러면 그때서야 신부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요. 이렇게 이런 신부가 한둘이 아닙니다. 요사이는 신부 눈치 보여서 주례사도 마음대로 못 합니다. 이렇게 복종이라는 단어가 가정과 교회에서 점차 잃어버린 영적 유산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 대해서 미국 복음주의 리더인 짐 몰리스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현대 교회의 크나 큰 비극은 믿음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은 많은데 순종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은 적다는 점이다. -짐 몰리스 목사님-
 
오늘 우리는 11기상 13장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느 정도까지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는지, 그리고 왜 순종을 요구하시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면서 절대 순종의 정신을 우리 모두 회복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열왕기상 13장을 이해하려면 역사적 배경을 좀 살펴야 돼요. 솔로몬 이후 르브함이 왕이 되었는데 왕국이 불로 분열이 됩니다. 북방 이스라엘 왕은 여러 보함이었는데 백성들의 마음이 남쪽으로 쏠릴까 봐 세 가지 조치를 취해요.
 
첫째, 예루살렘 순례를 막기 위해 북방 이스라엘의 남방 경계 근처인 벧엘에 사단 신전을 세웁니다. 벧엘은 야곱이 꿈을 꾼 곳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이고, 그곳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벧엘에 가서 3일마다 십일조를 드리려므나. 이렇게 호사가 얘기한 걸 보면은 굉장히 중요한 장소고, 사실은 이스라엘 안에서 예루살렘과 거의 맞먹는 중요한 영적인 어떤 장소가 벧엘이거든요. 그 벧엘에다가 이제 신전을 세우고 사당을 세우고, 그리고는 레위자손이 주로 예루살렘 성전 쪽으로 많이 붙어 있으니까
둘째, 일반 사람으로 제사장을 삼고 벧엘의 신전에서 담 옆에서 여러 보안 왕이 분향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벧엘의 단을 향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한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열왕기상 13:1,
1 이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단 곁에서 분양하는지라.
-하나님의 사람은 구약에서는 선지자를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이 없습니다. 어떤 묘사가 없습니다. 키가 얼마나 큰지, 성격이 어떤지, 어떤 출신인지, 배경이 어떤지 언급이 없어요. 딱 하나예요.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람은 외모가 출신과 배경이 어떻든 상관없이 오로지 여호와의 말씀에만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인 거죠.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아직은 여호와의 말씀이 자신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면서 보게 되겠지만, 여호와의 말씀 때문에 이 하나님의 사람은 생명을 잃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움직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때론 생명을 담보해야 될지 모르는 매우 위험한 사역에 뛰어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 온 이유도 뭐예요? 여호와 말씀 때문이죠.
 
*열왕기상 13:2,
2 하나님의 사람이 재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이르되, 제단화 재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아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내 위에 분양하는 산당 제사장을 내 위에서 재물로 바칠 것이오 또 사람의 뼈를 그 위에서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니까 다윗의 후손 중에, 그러니까 남방왕국의 다윗의 왕손 중에, 요시야 라는 왕이, 여로보암이 분양하고 있는 그 벧엘의 단 위에서 제사장을 재물로 드리고, 사람의 뼈를 그 단 위에서 불살라 부정하게 만들 것이라는 저주와 심판의 메시지였습니다. 이 본문 현재로는 이게 몇 년 후에 일어날 것인지는 본문에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나중에 역사를 보면 300년 후에 있을 일이에요. 어찌 되었든 여로보암 왕은 이런 저주를 듣고 그 사람을 체포하라고 명령하면서 손을 내밀어서 저 사람을 잡으라. 이렇게 하면서 손을 내밀었는데, 그 순간 몸에 이제 특별히 팔에 마비 증세로 인해 손을 거두어드릴 수가 없었어요. 여호와의 말씀에 능력이 나타나자 여로보암이 갑자기 태도를 바꿉니다.
 
*열왕기상 13:6,
6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청하건데 너는 나를 위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이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여호와의 말씀은 왕의 손을 마비시키는 권능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우리들은 인간 왕도 굴복시키는 능력의 말씀을 섬기는 자라는 점에서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한편 여러보암이 하나님의 말씀 능력에 굴복을 하자,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의 손을 치유하셨어요. 그러자 이제 여러보암이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서 나와 함께 집에 가서 쉬라. 내가 내게 예물을 주리라 이렇게 초청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유다에서부터 베델까지 약 20km 이상을 이제 여행한 것으로 보여요. 산길이기 때문에 나기를 탄다 해도 5시간 이상 걸렸을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왕의 면전에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고 왕과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아마 심신이 굉장히 많이 피곤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음식을 먹고 기력을 회복한 다음에 다시 길을 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게다가 여로보암 마왕이 유화적이 돼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예물까지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왕의 잔치 그다음에 얼마나 멋질까요? 왕의 예물이라고 하면 얼마나 대단할까요? 그럼 제가 한 30년 전에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서 한 교회에서 대학부 교육 목사를 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시간 강사를 할 때인데 외부로부터 처음으로 제 방에 전화가 걸려왔는데 대학부 부감 집사님이었습니다. 사업하시는 분인데 제 생일날 저와 제 가족을 대접하고 싶으니까 63빌딩으로 오라 그러더라고요. 59층 스카이라운지 룸에서 사실은 코스별로 이렇게 음식이 나오더니 맨 마지막에 이 큰 이 카트에 이렇게 케익이 나오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집사님이 식비 계산할 때 이렇게 어깨 너머로 보니까 35만 원이 나왔습니다. 당시 본국 70만 원 받을 테니까 순간 차라리 현찰로 주시지,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건 잠시 그랬을 뿐 그 후에는 식사 대접을 받은 게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로열패밀리의 잔치가 어떤 것인지를 조금은 맛보았고 행복한 추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는 그런 대접 안 받았으니까 오해하지 마시고 목사들은 뭐 그런 걸 좋아한다. 그러시면 안 돼요. 딱 한 번 사업을 하시는 분이 이 정도로 대접을 한다면 왕의 잔치 그러면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여로보암 왕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맛보고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면 왕의 잔치에 가서 먹고 마시면서 왕의 예물을 받는 거 괜찮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볼까요? 8절, 9절 보면
*열왕기상 13:8-9,
8 하나님의 사랑이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 절반을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9 이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왕에게 절반을 준다 해도 왕의 잔치와 왕의 예물을 받을 수가 없다고 거부합니다. 그 이유가 뭐예요? 여호와의 말씀 때문이죠. 그러면 여호와께서 무엇 때문에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고 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빙성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당장 이렇게 나와 있지 않지만 최소한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는 메시지는 미래에 일어날 일이에요. 언제 일어날지 언급이 없습니다. 나중에 보면 300년 일어나 제가 그랬잖아요. 그러면 더더욱 미래에 일어날 하나님의 말씀은 믿기가 힘들어요. 듣는 사람들이 먼 미래에 일어날 일 신빙성을 어떻게 확인하겠어요? 결국 그 메시지의 신빙성은 그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의 신빙성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델의 단을 저주하는 심판은 주전 930년이에요.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 하는 아들을 낳을 건데 이 사람이 이제 내 재단을 사실은 부정하게 만들 거다. 라고 했는데 열왕기하 22장 1절에 보면 요시야가 8살에 왕위에 올라요. 그게 640년이에요. 18년째 되던 해에 율법사를 발견하거든요. 그때가 622년이에요. 그리고 그 후에 이제 사실은 부정하게 만든 거니까. 300년 후에 있을 주요. 심판의 메시지가 있었는데 거기에 뭐가 달라붙어 있냐면 지금 지켜야 될 명령이 붙어 있는 거예요.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 이렇게 붙어 있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신빙성은 어떻게 알 수 있어요?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에 달려 있는 사소해 보이는 음식 금지 규정을 하나님의 사람이 지금 여기서 순종하느냐, 순종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의 신빙성을 확보하기 위해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는 음식 금지 명령을 주신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이 심지어는 왕의 잔치와 왕의 예물을 거절하면서까지 음식 금지 규정을 지금 여기서 지키는 모습에서 우리는 나중에 있을 하나님의 말씀의 신빙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음식 금지 규정은 인간적으로 볼 때는 가혹하기 그지없는 규정이에요. 원래 인간이 수고한 후에 이에 대한 대가로 먹고 마시는 것은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전도서 5장 19절에 보면 18절부터 볼까요?
 
*전도서 5:18-19,
18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
19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유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전도서에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한 게 마타트라고 하는 단어인데 왕이 내가 예물을 주리라고 했을 때 똑같이 ‘마타트’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수고한 다음에 먹고 마시는 거, 조금 낙을 누리는 거 이거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데 하나님의 말씀에 신빙성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선물, 최소한 먹고 마시는 낙조차도 허락되지 않은 거죠.
 
사랑의교회 부목을 하셨던 한 목사님이 저희 학교에 와서 간증을 하셨습니다. 토요일에 이제 설교 준비 때문에 바쁜데 한 권사님이 닭백숙을 해놨으니까 와서 식사하고 가라고 하셨다고 해요. 목사님의 사랑과 배려 감사하지만 설교 준비 때문에 죄송하다. 라고 하자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아니 그 설교가 맨 그 설교구만 왜 유난 떠는지 모르겠다. 이러면서 이제 뚫겠다고 그래요. 성도님들이 볼 때는 맨날 그 설교가 그 설교처럼 보일 수 있어요. 그러나 맨날 그 설교가 그 설교 같은 설교를 하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저같이 어쩌다가 단타 치고 빠지는 교수는 그나마 괜찮지만, 매주 설교하는 목사님들은 이게 보통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이제 그러니까 이제 하나님의 사람에게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인간적으로 너무 심하죠. 그러나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은 왕의 잔치와 예물을 거절할 만큼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는 사람인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이 땅을 살 때 그 먹고 마시는 그 낙을 충분히 누리게 해주면 좋을 것을, 왕의 예물도 조금 받아 누리고 좀 살면 될 거를 왜 그렇게 못하게 하시는 걸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신빙성이 확보돼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때로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허락하신 최소한의 선물조차 때로는 금지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찌 됐든 이런 절대적인 순종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의 신실함을 믿게 되는 거고, 앞으로 미래에 있을 그가 전한 벧엘을 향한 단의 향한 심판의 메시지를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거죠. 이것은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전화하는 기독교 진리가 뭐예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언젠가 주님이 도둑같이 재림하실 것이고, 그날 모든 인간은 행한 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 아닙니까?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하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한복음 5장 29절에서 주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29,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그런데 마치 우리가 이 세상이 전부인 양 먹고 마시는 것에 목숨을 걸고 이 땅에서 왕의 예물을 받고 재물을 쌓는 게 그곳에 생명을 건다면 주님이 영광중에 언젠가 재림하여 이 땅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기독교 진리를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요? 지금부터 이제 한 35년 전에 제가 이제 유학을 가기 전에 제가 번역을 하던 출판사에 이제 인사를 갔습니다. 그런데 그 방에 편집부장 방에 이장님 씨가 있었어요. 그 출판사의 직원이 숙제 그냥 거기에 직원이라는 걸 서로 이렇게 알고 있긴 했지만 초면인데 갑자기 저한테 언제 귀국하냐고 묻는 거예요. 한 7년쯤 걸린다고. 그러니까 갑자기 이 사람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더니 다 틀렸네. 이러더니 갑자기 방을 나갔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제 편집부장님에게 저 사람 왜 저래요? 물으니까, 이장님 씨가 두 명의 중학생이 받은 계시를 근거로 5년 뒤인 1992년 10월 28일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시한부 종말론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처음 알았어요. 이장님을, 제가 7년 후에 돌아온다고 그러니까 그전에 휴가가 있을 건데 유학은 다 쓸데없는 거라는 이유로 다 틀렸네. 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죠. 그러나 1992년 10월 28일에 휴거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건 휴거를 주장하는 이장님이 추종자들에게 수십억이 넘는 막대한 헌금을 받았습니다. 추종자들이 휴거까지만 먹고 살 돈 남기고 재산을 다미선교에 바친 것입니다. 정말로 웃긴 것은 이장님씨가 자신이 주장하는 휴가 날짜 이후인 1993년에 만기가 돌아오는 환매 조건부 채권을 구입한 사실로 사기죄로 구속되었습니다. 미친 거죠. 그러니까 이게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고 이야기하면 삶으로 그것을 입증해야 될 사람이 제정신이 아니죠.
 
다시 성경 본문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벧엘에 사는 한 늙은 선지자가 등장하면서 절대적으로 하나님 말씀에만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의 운명에 극적인 변화가 생깁니다. 이 늙은 베델의 선지자는 아들들에게서 베델의 신전에서 일어난 일을 듣게 되어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가서는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고 초대합니다. 그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두 번째 초청을 받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죠. 아니, 왕의 잔치를 거부한 사람이 평범한 노인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달리 생각해보면 그러나 왕의 잔치는 몰라도, 평범한 백성의 초대야 굳이 거부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의 사람은 여러 번 왕의 제안을 거절할 때와 거의 동일한 언어로 늙은 이 사람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나는 그대와 함께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대와 함께 들어가지도 못하겠으며 내가 이곳에서 그대와 함께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 내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내가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다.”
-여기서도 핵심은 중앙에 여호와의 말씀이 딱 들어 있습니다. 유다에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절대적인 순종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자 늙은 선지자가 방법을 달리합니다.
 
*열왕기상 13:18,
18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늙은 선지자가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다. 이렇게 말해요. 우리를 가장 쉽게 무너뜨리는 사람이 누굽니까? 선배 그리스도인들이죠. 너만 그리스도인이냐? 나도 그리스도인이다. 그런 거 하나 가지고 꼭 그럴 필요 있냐? 사회생활하려면 그것쯤이야. 넘어갈 줄 알아야지 이렇게 말하죠. 주로 똑같아요.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다. 이래놓고는 이제 여호와의 말씀에만 움직이는 사람임을 금방 간파한 늙은 선지자는 천사 운운하죠.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다가 천사를 덧붙였어요. 지금부터 춘사 운운하는 인간들은 조심하셔야 됩니다. 그리고는 이제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떡도 먹고 물도 마시라고 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 거죠. 하나님의 사람이 이것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모르지만, 성경 기자는 분명하게 이는 그를 속임이라고 못을 박고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은 선지자의 말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19절에 보면 이에 그 사람이 저와 함께 돌아가서 그 집에서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리라. 왜 그러면 하나님의 사람이 이 속임에 넘어갔나요? 성경 기자는 그의 동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늙은 선지자가 왜 속였는지도 동기가 안 나옵니다. 동기가 선하든 몰라서 그랬든 아무 상관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느냐 순종하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전혀 언급을 안 하는 거예요. 아마도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늙은 선지자의 말에 넘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늙은 선지자는 무엇 때문에 여호와의 말씀을 빙자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을 속이고 있는 걸까요? 본문에 안 나옵니다. 여로보암 산당근처에 살면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 이름으로 한가하지 않은 걸 보니까 타소 신앙을 잃어버렸는지도 몰라요. 벧엘의 선지자로 베델의 단을 저주한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이 거짓이기를 바랬는지도 몰라요. 벧엘의 사니까, 어찌 됐든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순간에 무슨 일이 벌어졌죠? 하나님의 말씀이요? 불순종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안 하고 그 전 하나님의 사람에게 임했는데, 하나님의 사람을 속인 늙은 선지자에게 임해요.
 
*열왕기상 13:21,
21절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돌아와서 요하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고 한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내 시체가 내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심판의 메시지가 즉시 실행돼요. 하나님의 말씀은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을 택해서 움직이는 거예요. 이 사람을 속였는데 왜 하나님 말씀이 이리로 임합니까? 여기가 순종 안 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 열리로 안 임하고 이리로 임하는 거예요. 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그를 만나 물어 죽임에 그의 시체가 길에 버린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서 있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서 있더라. 한 번의 실수인데, 그것도 순종하려고 했던 실수인데 어떻게 이렇게 비극적인 운명을 당해야 했을까? 저는 인간적으로 우리는 얼마든지 이 사람 동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 하나님의 사람을 꼭 죽이셔야만 했을까요? 인간적으로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순종한 하나님의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람의 불순종은 이 사람이 이어가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빙성을 위태롭게 만들기 때문이거든요. 하나님의 말씀의 신빙성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신빙성이 지탱하는 기둥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의 순종이 깨어졌기 때문에, 지금 당장 하나님의 말씀 음식 금지 규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먼 미래의 벧엘에 선포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에 신빙성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말씀에 의해 움직이는 하나님의 사람은 위험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삶으로 입증해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위험한 사역에 뛰어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절대적으로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는 결코 살아남을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인식해야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이 죽은 것이 인간적으로 마음이 아프지만, 하나님의 사람의 죽음이 오히려 그가 전한 말씀의 신빙성을 높이게 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를 봅니다. 그러니까 늙은 선지자가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말씀대로 바로 사자에게 물려 죽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을 향해 전한 말씀이 진리임을 확신하게 돼요.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 삶과 죽음은 벧엘의 늙은 선지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빙성과 능력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모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벧엘의 선지자가 자식들에게 내가 죽거든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묘실에 나를 장사하되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고 부탁한 거죠. 그리고는 32절에
 
*열왕기상 13:32,
32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성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이니라.
-벧엘의 선지자가 선포해요. 그러니까 벧엘에 살면서 약간은 탈락한 것으로 보이는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이 불순종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는 모습을 보고 회개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제 유다에 속은 하나님의 사람과 베드의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신빙성을 드러내는 형제 선지자가 된 거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행하다가 결국은 불순종하여 죽는다고 해도, 우리의 죽음이 다른 사람을 회개하게 만들 수 있다는 데 희망이 있는 거예요. 종종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신실한 종들을 때로는 선교지에서, 때로는 우리나라에서 갑자기 데려가시거든요. 절대적으로 순종하는데, 때로는 실수했는지도 모르지만 실수한 경우도 마찬가지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왜 이렇게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데려갈까? 순종하지 않고 약간 타락해 있는 늙은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이 경고하고 있는 거죠. 그러나 우리가 그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회개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제 내년 2월이면 은퇴라 65세거든요. 옛날에는 막 젊은 선지자, 막 이렇게 난리 치다가 요새는 이렇게 늙은이 나오면 갑자기 내 나이가 지금 이게 늙은이로 들어가고 있구나! 이래가지고 이제 저를 확실히 돌아보게 돼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찌 됐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승리의 행진에 초청을 받은 거예요. 때로는 우리들의 어리석음으로, 우리들의 불순종으로, 우리들의 믿음에 있어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이 승리의 행진을 하지 못하고 잠시 멈춰 설 수 있지만, 끝내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종과 불순종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승리하게 만드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 승리의 행진에 초청을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 기자와 베델의 선지자는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죽은 후에도 26, 29절과 31절에 보면 뭐라고 하냐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해요.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 이렇게 돼 있긴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인 거죠. 이 두 형제의 선지자는 순종하지 않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 제목을 순종하지 않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고 붙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로보암 왕은 이런 사실을 눈으로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결과는 눈에 뻔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 우리 34절에 보면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땅 위에서 끊어져 멸망하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열왕기하 3장 16절에 보면
 
*열왕기하 23:16,
16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산에 있는 무덤들을 보고 보내어 그 무덤에서 해골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 그 제단을 더럽게 하니라 이 일을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였더니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
-요시야가 한 비석을 가리키면서 이 비석이 뭐냐 그러니까 성읍 사람들이 요시야 왕이 방금 벧엘의 재단에 행한 일을 300년 전에 예언했던 하나님의 사람의 묘실이다. 라고 하자, 왕이 그대로 두고 그의 뼈를 옮기지 말라고 명령해요. 하나님의 사람이 열두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했던 하나님의 말씀이 완벽하게 성취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절대적으로 순종하지 않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순종하지 않고도 살아남으려고 이렇게 하다가 보면 베드로 늙은 선지자처럼 돼요. 그나마 젊은 선지자가 죽는 모습을 통해 회개하면 괜찮은데, 회개하지 않으면 그다음에는 방법이 없는 거죠.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절대적 순종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신앙의 선배 주기철 목사님이 우리에게 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절대적 순종을 보여주신 신앙의 영웅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주 목사님을 소재로 한 영화를 보면 인간적인 고민보다는 너무 영웅적인 모습만을 강조한 나머지 성도들을 좌절시키는 경향도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불에 타는 모판 위를 주기철 목사님이 걸어가는 장면이 영화에 나오는데, 이런 장면에서 성도님들은 주 목사님의 용기와 신앙에 감동하면서도 저런 상황에서 나는 신앙을 지킬 수 있을까? 순교는 특별한 사람만이 하는 게 아니야? 라고 포기할 수 있다고 지적하는 교회 사가들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숨을 내걸고 순종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교회 사과에 의하면 아들인 주강자 장로님은 아버지가 마지막 체포당할 때의 모습을 이렇게 증언했다고 합니다.
 
일본 경찰이 아버님을 잡으러 왔을 때 아버님은 팻마루 기둥을 붙잡으시고 가지 않으려 하셨습니다. 그러자 어머님께서 아버님을 끌어안고 목사님, 지금 문 밖에 교인들이 와 있습니다. 목사님은 개인이 아닙니다. 한국교회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하시면서 함께 우셨습니다. 그러자 아버님은 그래, 가야 할 길이라면 가야죠. 하시곤 두 분이 손을 잡고 오랫동안 기도하신 후 할머님께 하직 인사를 하시고 성경 찬송을 듣고 문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이 증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게세마네 기도를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 주님도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면서 이 자이 지나가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세 번씩이나 그리고 나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기철 목사님이 결사 각오로 절대적 순종의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주님과 교회를 향한 사랑,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간절함이 절대적 순종의 삶을 살 수 있었다고 한국교회사를 전공하는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주 목사님이 두 번째로 체포되어 6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고 풀려난 후에 산정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인간이 못할 일이다. 그러나 인간이 십자가를 지려고 한다면 십자가가 인간을 지고 간다. 그래서 갈보리 산상까지 갈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랑의 교회 성도 여러분, 절대적 순종의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마음속에 온전히 주님만 모셔놓고 우리의 정성을 다하여 주를 섬긴다면,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절대적 순종을 하려고 한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이끌고 십자가가 놓인 갈보리 선상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때 세상은 우리가 주님의 진정한 제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조금 후에 우리가 함께 부를 복음성가가 우리의 마음의 소원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의 마음속에 온전히 주님만 모셔놓고 나의 정성을 다하여 주를 섬기리. 기쁘나 슬프나 오직 한 마음 주위에 한평생 주만 모시고 찬송하며 살리라. 주는 나의 큰 능력, 주는 나의 큰 소망 내가 항상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이 찬송이 우리의 평생의 고백과 전생의 결단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약
절대 순종의 길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죽기까지 순종했던 주님의 본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믿는 복음, 진리를 위해 절대 순종의 길로 결심하며 나아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왕의 잔치와 예물을 거절하고, 때로는 먹고 마시는 것도 금하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할 때, 주님이 오시는 그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실 것을 기대하며, 주님이 날마다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이 세상에 나아가 세상을 이기고 승리를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유혹에 넘어갔다. 유혹은 인간의 육체적인 욕구와 결부되는 경우가 많은데, 유혹이 올 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적하는 것이다. 유혹에 넘어간 선지자는 사자에게 찢겨 죽는 결과를 맞았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언약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원하신다.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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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헌신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3년 8월 19일)
제목: "그 큰 사랑의 생수로"
말씀: 에베소서 2:1-7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백신종 목사님-초빙(메릴랜드 벧엘교회)
-------
 
*에베소서 2:1-7,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
 
백신종 목사님-초빙(메릴랜드 벧엘교회)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2013년도에 출간된 행복의 비밀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부재가 굉장히 흥미로운데요. 75년에 걸친 하버드의 인생 관찰 보고서라고 하는 제목입니다. 여러분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한 268명의 학생들을 75년에 걸쳐서 거의 전 인생을 관찰 조사한 보고서 중에 한 권이 바로 이 행복의 비밀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여러분, 이 책의 저자인 조지 베일런트라고 하는 분이 행복의 비결을 여러 가지로 설명하면서 그중에 가장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가 인생은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한 행복의 요인이 된다고 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선한 동역 자들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우리 사랑의 교회가 정말 만나면 행복한 교회 여러분 이 교회 많은 성도들과 함께 교제하면서 여러분의 인생이 행복해지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 자신이 먼저 그런 사람이 되어야 되겠죠. 누군가 나와 만나면 행복해지고 즐거워지고, 인생의 새로운 소망을 갖게 되고, 함께 기도하며, 인생의 고비 고비들을 넘어갈 수 있는 그런 믿음의 동역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책을 읽으면서 아주 의아했던 것이요. 10장의 제목이 ‘예상치 못한 발견’이라고 하는 챕터입니다. 여러분, 10장에서 저자인 조지 베일런는 인생을 그냥 일평생으로 두고 보지 아니하고 인류의 전 역사, 또 인생을 죽음 이후까지 바라보면서 정말 사람들의 마음을 행복 하는 중요한 요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신앙생활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누구를 만나느냐가 인생의 행복을 좌지우지할 뿐만 아니라 여러분 살아계신 하나님 만나는 것이 우리의 영원한 행복과 또 정말 우리의 삶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는 유일한 길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함께 잠시 살펴볼 에베소서는 바울이 이미 2천 년 전에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그 인생의 행복의 비결이야말로 지금도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에베소서 1장에 보면 1절부터 14절까지 사도바울은 성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의 타락한 인류를 속량하시기 위해서 어떤 신령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 그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가 하면 바로 이어지는 15절부터 마지막 23절까지는 에베소 성도들을 향해서 그들이 마음의 눈을 떠서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 창조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중보 하는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그런가 하면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2장 1절 말씀부터 1절에 보면 인간이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는 원인에 관해서 이렇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우리 1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에베소서 2:1,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여러분, 사실 우리 한글 성경에는 서술문처럼 기록이 되어 있지만, 원래 헬라어 성경, 원어 성경을 보면 그 은이라고 하는 주어와 살리셨도다. 라고 하는 서술어가 기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럼 킹 제임스 버전이라고 하는 성경의 번역 전통을 따라서 5절에 있는 주어와 서술어를 가져다가 번역한 것인데, 원래 사도바울이 이 에베소서를 기록할 때에는 주어와 서술어를 생략한 채 마치 법원의 판결문처럼 “너희는 죄와 허물로 죽었느니라.” 선언하고 있는 그런 구절입니다.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존재라고 하는 것이죠.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이지만, 하나님의 그 큰 사랑으로 말미암아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로 삼아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럼 그 하나님의 큰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 된 우리 인간의 본질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세상 사람들, 불신자들만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들이 아니라, 너희도 죄와 허물로 죽은 자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3절에 가서 보면
 
*에베소서 2:3,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행하여, 여러분 에베소교회 성도들뿐만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고 평생 그 복음을 위해서 살아갔던 사도바울 자신과 함께 동역했던 모든 동역 자들도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서 죽은 자라고 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에 관한 영적인 실상을 깨달아야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 그 은혜의 크기를 우리가 헤아릴 수 있고,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 결단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한평생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유혹과 또 육신의 정욕과 탐심으로 말미암아서 실패하고 무너질 때가 많이 있습니까? 여러분 한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젊은 목사님이 목회를 하면서 너무 육신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참 고통스러우니까, 은퇴하신 한 80대 되시는 은퇴 목사님을 찾아갔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목사님! 제가 정말 이런 정욕 때문에 목회하면서 많은 유혹에 시달리고 언제쯤 되어야 이런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그랬더니 목사님이 주보 한 장을 드시면서 그렇게 말씀하시더래요. 이 주보 한 장 들 수 없을 때까지야! 그렇게 말씀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평생 씨름해야 된다는 것이죠 여러분 인간의 본성은 타락한 죄와 허물로 죽은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 선한 것이 없음을 고백하면서 끊임없이 본성을 거스려서 하나님을 향한 경향을 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저와 여러분이 우리 죄와 욕망으로 죽은 우리의 자아를 인식하고요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여서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선하신 뜻을 이루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여러분 바울은 우리도 다 그 안에서 행하였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럼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 21절 이하에 죄로 인해서 갈등하고 그 안에 살아있는 정말 육신의 정욕과 욕망을 씨름하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로마서 7:21-24,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여러분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세상에 속한 죄인들만 죽은 존재가 아니라, 우리 과거의 삶만 죽은 존재가 아니라 여러분 그리스도인들도 살아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아니라, 살아있다고 착각하지만 어쩌면 우리 자신도 영적으로는 여전히 죄와 허물 가운데 죽은 존재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바울이 디모데서 디모데전서 5장 6절 말씀에 디모데에게 이렇게 교훈합니다.
 
*디모데전서 5:6,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그럼 세상의 향락을 좋아하는 자 자기 탐욕과 욕심에 이끌려서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가 주님을 따르는 제자라고 생각하지만 그럼 그 영적인 실상은 죽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럼 자기 향락을 추구해서 행복해질 수 있습니까? 돈이나 소유나 운동이나 관계나 세상 것에 집착해서 우리가 영원한 행복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주님 안에서 복음의 능력을 회복한 사람들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 여러분 감사와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아서 기쁨과 감사와 행복이 충만한 저와 여러분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은 이어지는 2절 말씀에서 우리가 죽은 자처럼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2절 말씀에 보면 반복되는 두 단어가 있는데요.
 
*에베소서 2:2,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 라는 표현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따르다. 라고 하는 표현이 헬라어로는 페리파테오라고 하는 단어인데 여러분 페리는 주변 혹은 옆에서 함께, 라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파테오는 걷다. 라고 하는 헬라어 단어인데 여러분 주변에서 함께 걷는다는 것이죠. 동행한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하나님과 동행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누구입니까? 에녹이라고 하는 인물이죠. 여러분 구약 성경에 보면 에녹이 65세의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무드셀라라고 부른 후에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더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는 자녀를 낳고 평범한 일상생활을 사는 사람이었지만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일상에서 주님의 뜻을 구하고 자녀를 낳으면서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에 서기를 원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약 성경에 보면 정말 그런 삶을 갈구했던 인물 중에 하나가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빌립보서 3장 12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시작
 
*빌립보서 3:12,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여러분 사도바울은 그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분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무언가를 잡기 위해서 달려가는데, 그것이 물질이든 관계이든 성공이든 승진이든 여러분 이 땅에서 무언가를 잡기 위해서 달려가는데 그럼 바울이 잡고자 한 그것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하나님의 손이 닿아 있는 그곳, 하나님의 마음이 닿아 있는 그곳에 바울이 먼저 달려가서 주님께 사로잡혀서 쓰임받기를 원했던 그런 간절한 기도의 어떤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저와 여러분이 주님 손에 잡힌 주님의 온전한 제자로 살아가실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그런 이야기가 있죠. 한 신사가 고속도로를 차를 타고 달려가는데 보니까 옆에 갑자기 닭 한 마리가 슝 하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너무 신기해서 그 닭을, 닭을 따라잡으려고 하는데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먼저 가다가 갑자기 한 농가로 쑥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 농가에 들어갔습니다. 주인을 만나서 혹시 빠르게 달리는 닭을 봤는데 당신 닭이요? 그랬더니 제 닭입니다. 이 주인에게 그럼 제가 천불을 드릴 테니까 이 닭을 파십시오. 그랬더니 안팝니다. 그러는 것입니다. 조금 어수룩하게 본 농부가 뭔가 물정을 아나 보다 생각을 하고 그러면 2천불 드릴 테니까 파십시오. 아니 안 판다니까요. 이 농부가 보통 대단한 농부가 아니다 생각을 하고 그럼 제가 만 불을 드릴 테니까 천만 원 드릴 테니까 그 닭 한 마리 파십시오. 이렇게 이야기했더니, 농부가 버럭 화를 내면서 아니 안파는 게 아니라 못 판다니까요 도대체 잡혀야 팔지요 그렇게 이야기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닭을 뭐라 그러는지 아십니까? ‘무용지닭’ 아무 쓸모없는 닭이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정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부르심 받았는데 여러분 정말 주님의 손에 붙잡혀서 사도바울이 간절하게 고백했던 것처럼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그럼 주님의 뜻과 계획 가운데 서지 아니하면 여러분 어떻게 보면 저와 여러분의 인생도 영적으로는 정말 우리 삶의 본질적인 모습은 어쩌면 허물과 죄로 죽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 부족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러분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던 이유는요. 그는 악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세상과 편리해서 그냥 세상에 휩쓸려서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죄를 거스려서 살아갔습니다. 유다서 14절, 15절 말씀에 보니까 이런 말씀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유다서 1:14-15,
14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여러분 악한 세대를 향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래서 에녹을 성경은 선지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럼 제가 구약 성경을 통해서 에녹이 도대체 어떤 예언을 했을까 좀 찾아보면서 한 가지 발견한 것 중에 하나는 여러분 에녹이 아들을 낳고 이름을 뭐라고 불렀습니까? 무드셀라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 무드셀라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 무투, 창이라고 하는 단어와 셀라 던지다라고 하는 히브리어의 합성어 던져진 창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기의 전쟁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여러분 고대 사회의 전쟁은 하나님의 심판, 신들의 전쟁이고 신의 심판인데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창을 던져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예언을 아들의 이름으로 부른 거예요. 여러분 사랑하는 아들을 낳고 자녀를 낳고 아무 이름이나 붙여주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그 자녀가 정말 아름다운 삶을 살기로 소원하면서 그 이름을 지어주는데 여러분 예를 들어서 제가 아들을 낳고 백시니까 제 아들 이름을 핵폭탄 이렇게 지었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러면 그 아들의 이름을 통해서 여러분 성경에 가장 오래 산 인물이 누구입니까? 무드셀라예요. 몇 년 살았습니까? 969세까지 살았습니다. 거의 천년을 살았습니다. 여러분, 천년 동안 그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다 이 악한세대를 거스려서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면서 여러분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간절히 초청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 년 동안 기다려주신 거예요. 여러분 그 무드셀라가 죽는 그 해에 바로 노아의 방주를 통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심판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의 메시지가 아니라 인류가 정말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부르시는 간절한 사랑의 메시지, 천년의 사랑을 우리에게 말씀하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바로 오늘 4절 말씀이죠. 여러분 4절 말씀이 원래 헬라어 성경에는 대라고 하는 그러나라고 하는 접속사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한글 성경에는 누락이 되었는데 혹시 여러분 성경과 펜이 있으시면 4절 앞에다 그러나라고 기록을 하시면 좋겠습니다.
 
*에베소서 2:4,
4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한글 성경에는 누락이 되었는데 혹시 여러분 성경과 펜이 있으시면 4절 앞에다 그러나 라고 기록을 하시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4절 말씀을 그런 나를 넣어서 우리가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본문 4절 말씀 시작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죽은 존재이지만 죄와 허물로 인하여서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그러나 여러분이 그러나, 의 위대한 반전을 바울이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베푸신 그 위대한 사랑 오늘도 정말 성령의 거룩한 생수와 같이 우리의 삶을 채워주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독생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로 그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상속자로 세워주신 여러분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얼마나 이해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저는 모태 신앙으로 자라서 신학교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공부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설교하는 목회자였지만 그럼 정말 하나님의 사랑이 그 깊이를 경험한 것은 선교 현장에서 정말 뼈저리게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사실 오늘은 제가 베델교회, 이민교회 목회자로 설교하기보다 제가 사랑의 교회, 또 후원받는 선교사로서, 캄보디아에서 사역했던 이야기를 간단하게 드리고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저희는 2014년도에 캄보디아의 선교사로 가서 저희가 2007년부터 캄보디아에 있는 cus라고 하는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과는 좀 사뭇 다른 모습이죠 우리 캄보디아에 있는 한 50만 명 정도 되는 무슬림 공동체 소수 민족이 있는데, 저희는 그 민족을 전도하기 위해서 선교사로 들어가서 사역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역 이외에 저희가 이제 처음 들어가서 공용어를 배우면서 캄보디아 사람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강의하던 캄보디아, 유니버스 스페셜티스라고 하는 현지의 대학인데요. 이 대학의 문화 교수로 제가 학생들을 가리키게 되면서 이것은 우리 학생들에게 대학생들에게 복음 전하라는 하나님의 계획이구나! 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학교에 부임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희 학장님이 그렇게 경고하시는 거예요. 백 선생님 제가 크리스찬인 거 아는데 우리 학교에 와서 함부로 복음 전하지 마십시오. 우리 클라스에 들어가시면 매 클라스마다 우리 불교 승려들이 한 교실마다 있는데, 복음 전하다가 그들이 가서 이렇게 신고라도 하게 되면 학교도 불이익 당하고 당신도 쫓겨날 수 있으니까 전도하지 마십시오. 이런 경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럼 그 말을 듣고 나니까 수업시간에 전도하려고 하면은 이 스님들이 자꾸 눈에 밟히는 거예요. 제가 이 스님들 때문에 전도 못해서 되겠나 하루는 저희 문화하기 전도하기 아주 좋은 과목입니다. 문화의 근본이 종교이고 그 종교 중에서 기독교에 관해서 강의할 수 있는 한 줄을 할당해서 내가 정말 복음에 관해서, 기독교 2천년 역사와 한국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렸는지 좀 전하면서 예수님을 전해야 되겠다. 마음을 먹고 저희 아내에게 제가 기도 부탁했습니다. 오늘 좀 전도하려고 하니까 함께 기도해 주세요. 이렇게 부탁하고 학교에 갔는데 그럼 그날따라 우리 스님들이 다 보통은 이렇게 흩어져서 뒤쪽 자리에 앉는데 제가 교실 문을 열었는데 보니까, 전부 다 앞쪽으로 전진 배치를 하셨더라고요. 귀신같이 알아듣고 오늘 또 전도하는데 영적인 방해가 심하구나. 제가 마음껏 전도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참 전도할 기회를 얻지 못해서 마음에 너무 불편한 마음이 있었어요. 하나님 이 불교 성도들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제가 2007년도였는데 그해 12월이 캄보디아가 굉장히 좀 시원했습니다. 날씨가 굉장히 저온이 내려가는데 2007년도 12월 17일, 날짜도 기억해 제가 그 몇 주 전에 이렇게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불교 승려들 다 지금 날씨도 기온이 많이 내려가고 추워지는데 다 감기 걸려서 못 오시게 하면,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복음 전하겠습니다. 우리 대학생들에게 복음 전하겠습니다. 근데 정말 2007년도 12월 17일에 새벽에 눈을 떴는데 몸이 상쾌한 거예요. 날씨가 굉장히 기온이 내려간 것입니다. 제가 그 며칠 뒤에 이렇게 신문을 보니까 캄보디아 사람들이 얼어 죽었다. 이런 기사가 신문에 났더라고요. 그런데 그때 기온이 17도였습니다. 제가 학교 가서 물어봤어요. 교수님들이 아니 이게 얼어 죽었다는데 무슨 얘기냐 그랬더니 그런 게 아니고 아마 심장마비로 죽었을 거다.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니까 늘 열대 30도 이상의 기온이었다가 하루 이틀 아주 내려간 적이 있는데 제가 그 17일 아침에 눈을 뜨는데 갑자기 마음이 상쾌해지고 아침에 큐티를 하면서 묵상하고 기도하는데 마음속에 오늘이다. 이런 음성이 들리는 하나님이 오늘 정말 이 불교 승려들 다 감기 걸려서 못 오겠구나. 오늘 복음 전해야 되겠구나. 제가 기대하는 마음으로 저희 아내랑 아침 식사하면서 묵상하면서 들은 이야기를 나누고, 오늘 정말 전도해야 되니까 나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고 제가 평소보다 좀 일찍 학교에 도착했습니다.
 
여러분 교실 문을 딱 열었는데 충격 받은 것이 아무도 와 있지 않고 불교 승려 7명만 딱 와서 앉아 있더라고 그럼 제가 마음속에 하나님 이게 뭡니까? 도대체 오늘 새벽에 분명히 하나님께서 오늘이다. 음성을 주셨는데 그게 제 생각일 수 없는데 하나님 이게 뭡니까? 너무 마음이 불편하고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서 제가 모교회가 저 혜화동에 해성교회가 제모교회인데 해성교회에서 우리 청년들이 와서 단기 선교하겠다. 무슨 사역을 할까 고민하다가 우리 대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리키는 사역을 합시다. 우리 케이팝 K문화가 많이 일어나고 있으니까 그래서 한글 반을 시작하기로 학장에게 이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글반을 오픈하려고 하는데 스페셜 코스로 우리가 오픈을 하면 학교와 교수가 이렇게 등록비를 조금 나눠서 받는데 내가 그거 필요 없으니까 50명만 딱 한 클래스 만들어 주십시오.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 대신 불교 승려는 등록받지 마십시오. 이렇게 부탁을 드렸는데 저희 학장님이 전과에 전 학년 교실을 돌아다니면서 너희들 훌륭한 사람 되려면 한국어 배워야 된다. 그래가지고 55명 짜리 클라스를 세 클라스를 만들어 주셨어요. 등록비를 꽤 많이 받으신 것 같아요. 그러면서 제가 첫 시간에 수업을 들어가 봤더니 불교 승려들이 또 와서 앉아 있는 제가 달려가 가지고 아니 학장님 제가 승려들은 등록받지 말라고 부탁드리지 않았냐, 그랬더니 이분들은 그냥 와서 등록하기 때문에 자기도 어쩔 수가 없다. 그냥 가르쳐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럼 단기 선교 팀들이 와서 일주일 동안 한국어 가르치는데 여러분 일주일 한 이틀만 가르치면 한국어를 다 읽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한국어 자모음이 몇 개입니까? 모음 10개 자음 합하여 24개죠 10개, 자음과 14개의 모음 갑자기 생각도 잘 안 나네요. 24개의 자모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캄보디아어는 자음이 33개, 거기에 받침 자음까지 외우려면 66개를 외워야 됩니다. 모음이 또 23개가 있어요. 그럼 독립 첨자라 그래서 11개가 있어 12 132자를 외워야 그 글을 읽을 수 있는데 이 캄보디아 형제들에게 24개의 알파벳으로 된 한글을 가르치면은요. 불과 한 하루 이틀이면 다 읽을 줄 압니다. 그리고 일주일 내내 한글 가르치면서 케이팝을 가르치는 거예요. 그래서 케이팝을 어떻게 가르치냐면 이런 노래 가르칩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한국어면 다 케이팝이니까, 열심히 외워서 막 우리 캄보디아 친구들이 부르고요. 금요일 날 초청해서 캄보디아어로 번역된 찬양을 가르쳐주고 우리가 왜 왔는지 예수님을 어떻게 만났는지 신앙 간증을 하면서 우리가 복음 전하자 계획을 가지고 제가 목요일 오후에 이 한글 반 클라스에 갔더니 가장 오른쪽에 얼굴을 들고 있는 친구가 라다나라고 하는 친구인데요. 이 친구가 저한테 물어보는 거예요. 로쿠로 선생님, 본 프로크너 아이나 제 형 어디 있어요? 내가 니 형을 어떻게 아니? 니 형이 누군데? 그랬더니 이 단기 선교 팀을 인솔해온 성중기 전도사님 지금은 목사님이신데요. 더 웨이츠를 개척한 목사님이신데 그 성중기 전도사님을 자기 형이라 그러는 거예요. 제가 그래서 참 신비한 얘기 한국어로나 영어로나 캄보디아어로 서로 소통이 안 되는 두 분이 불과 나흘 만에 호형호제하면서 전도사님과 스님이 이렇게 형제라는 것입니다. 전도사님이 라다나를 좀 꼭 초청해서 우리가 금요일 날 전도 만찬하면서 좋은 식사 고기와 이렇게 식사를 많이 준비해서 대접하는데 이 라다나 좀 먹였으면 좋겠어요. 선교사님 정말 불쌍하고 이렇게 사랑에 굶주린 것 같은 친구인데 좀 초청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첫날부터 승려들은 올 수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전도사님이 자꾸 오 초청하자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아니 전도사님 생각해 보세요. 이게 다 불교 학생들인데 승려가 뒤에 와서 앉아 있으면 우리가 예수님 전하고 결신하자고 손들라 그럴 때 누가 손들겠습니까? 전도하기 어렵습니다. 그랬더니 알았다. 나는 그런 승려가 아니라고 그러시면서 자꾸 이야기하시니까 제가 선교사로 어쩔 수도 없고 그 대신 와서 전도할 때는 위층에 따로 가서 앉아 계십시오. 식사는 같이 하는데, 그래서 저희가 한 38명 정도가 전도 만찬에 오겠다고 이렇게 같이 참석을 했고요. 여러분 그중에서 18명이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개척이 되어버렸어요. 마지막에 이 승녀 라따나와 우리 성중기 오른쪽에 계시는 분이 성중기 전도사님이신데 그 당시에 전도사님 지금 목사님이십니다. 이분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데 제가 중간에 통역하면서 상당히 좀 곤란했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마지막에 우리 송중기 전도사님이 라따나에게 그러는 거야. 라따나 내가 소원이 하나 있어. 우리 백 선생님 원래 성경 잘 가르키는 성경 선생님인데 난 니가 좀 우리 백 선생님이랑 성경 공부했으면 좋겠어.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제가 가슴이 철컹했습니다. 아니 스님이랑 성경 공부를 하라니 내가 이렇게 번역해야 되겠다. 라따나 나에겐 소원이 하나 있는데 성경은 좋은 책이야. 나는 니가 성경 열심히 읽었으면 좋겠어. 이렇게 통역을 하려고 생각을 했는데 저도 이상한 경험을 했어요. 이미 벌써 통역을 다 해버린 겁니다.
 
그러고 나서 더 놀라운 것이 이 친구가 내 형 그러는 거예요. 내 형!!, 성경 공부할게요. 그럼 제가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단기 팀들을 보내놓고 그날 저녁에 밤에 올라가서 제 방에서 이게 도대체 뭔가?? 아니 스님이 성경 공부하겠다니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앉아 있는데 마치 하나님이 저를 막 책망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백 목사야 백 목사야 그날 그 아침에 오늘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 다른 대학생들이 있으면 복음을 들을 수 없는 그 불교 승려들 7명을 하나님이 모아주셨는데, 여러분 저는 불교 승려들이 제 전도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분들은 제가 선교사로서 사랑하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어요. 여러분 늘 미워하면서 저분들만 없으면 내가 전도할 텐데 저분들만 없으면 내가 잘 정말 사역을 할 수 있을 텐데 여러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여러분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럼 하나님의 그 사랑에는 한계가 없다는 거죠. 하나님은 그 승려들도 사랑하고 변화되기를 원하셨다는 그래서 그날 그 아침에 모아주시고 말씀해 주셨는데 제가 불순종했더라고요. 그럼 그때 밤에 정말 펑펑 울면서 하나님 내가 다시는 인생의 선을 긋고 담장을 쌓고 누군가를 그 담 밖으로 밀어내지 않겠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랑으로 품고 사랑하겠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헌신하고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저와 여러분이 그 누구도 우리 인생에 그어진 선 밖으로 밀어내어서 여러분 우리가 미워해도 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을 사랑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용서는 감정이 풀어진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여전히 분노하고 미워하지만 우리 마음에 분노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위하여 독생 하신 아들을 내어주시고, 그 피로 죄를 사하셨기에 그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으로 선포하는 것이 용서예요. 여러분 이 아침에 용서를 선포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으로 풍성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그다음 사진에 보시면 그래서 제가 우리 불교 승녀랑 캄보디아에서 1대 1 제자 양육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대일 제자 양육을 하면서 보니까 어느 날은 우리가 몰래 나랑 너랑 몰래 성경 공부하는 거다 분명히 얘기했는데 누군가를 또 데려왔어요. 그래서 누구냐 그랬더니 아니 저래서 지금 승려가 되려고 제 밑에서 훈련받는 제자인데 제가 선생님이랑 제자 훈련받으니까 얘도 좀 제자 훈련 받아야 되지 않겠냐고 데려와 가지고 저희 교회로 데려오고요. 전도도 많이 해왔습니다. 제가 어느 날은 보니까 저를 초청장을 가져왔어요. 뭔가 봤더니, 깜뽕 잠에서 가장 큰 절을 짓고 봉헌 예배를 하는데, 저보고 오라는 것이 주지 스님이 보낸 초청장인데 그냥 가는 게 아니라 50불을 봉헌을 해야 돼요. 절에다가 돈을 줘야 됩니다.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성도들이 기도하면서 보낸 선교 헌금으로 살아가는 선교사가 그 돈을 절에다 50불 헌금한다. 좀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안 가야 되겠다. 이야기를 했더니 저희 아내가 듣더니 여보 그러지 말고 캄보디아 목사님들에게 한번 물어보세요. 제가 전화를 걸어서 여쭤봤더니 교수님, 교수님 그 꼭 하셔야 됩니다. 우리 깜뽕잠에서 교회를 등록하거나 개척하려면 종교성에 종교국의 허가를 받아야 되는데 그 주지 스님이 종교계 사인해 주는 국장이기 때문에 꼭 가서 좀 인사하시고 선교사님 후원금으로 가지 마시고 제가 우리 깜뽕짬 교회협의회 회비로 드릴 테니까 꼭 하십시오. 그래서 제가 가서 그 공원 예배에 참석을 했어요. 가서 보니까 우리 라타나라고 하는 승려가 저를 이렇게 쭉 데리고 다니면서 가장 오른쪽에 있는 친구가 나타나는데 저를 데리고 다니면서 소개하는데 이렇게 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 로우 그룹의 프리아산 노사스마크겠습니다. 우리 백 선생님은 기독교의 스님이셔” 이렇게 소개를 하는 그래서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나중에 알아봤더니 뿌리 꽁빌 목사라고 하는 단어를 모르고 성경을 읽다 보니까 프리아 성 스님이라는 단어를 캄보디아 성경에서는 제사장으로 번역을 했는데 구약 성경을 읽다가 같은 어떤 스님인가 보다 이렇게 생각을 한 것입니다. 나중에 또 이렇게 보니까 단기 선교팀들이랑 얘기하면서 너는 불교의 스님이고 우리 성중기 전도사님은 전도사님 쎄임이고 우리 백 목사님은 그거보다 조금 높은 목사님이야. 이렇게 얘기하다 보니까 저를 무슨 주지스님 정도로 생각을 하고 제가 얘기했어요. 라따나 니가 나보고, 기독교의 스님이라고 얘기했는데 너도 불교 스님 그만하고 기독교 스님 나랑 같이 하자. 이렇게 초청했더니 이 친구가 25살이 되기 전까지 그전에 파괴를 하면 귀신이 자기를 죽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 25살까지만 기다려 주세요. 그게 23살 초 무렵이었는데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가지고 갑자기 어느 날, 파괴를 하고 나타났어요. 그리고 하는 게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정말 변화될 그 승려들을 바라보고 계셨던 것이죠. 그래서 저희 교회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거의 사찰 집사님처럼 일도 하시고 저희가 이제 안식년으로 들어오면서 운전을 가르쳐서 또 필리핀에서 오신 선교사님, 학교를 하고 계시는 그 학교 운전기사로 취직했다가 나중에 신학 공부까지 하고 전도사로 학교에서 사역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한계가 없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그 사랑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로마서 5장 8절의 말씀대로
 
*로마서 5:8,
8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온전하고 깨끗해져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죄인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여전히 무너지고 죄 가운데 정말 우리의 삶이 그렇게 더럽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또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정결케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그 사랑을 기억하시고 정말 경계가 없는 사랑, 주인을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분들을 품고 사랑하는 우리 사랑의 교회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요약
사도바울의 고백과 권면대로 하나님 에베소 성도들이 그 처한 상황 속에서 우상과 물질과 향락으로 타락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나 하나님의 그 풍성하신 사랑으로 살아가게 하셨으니 진정으로 감사하며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붙잡고 우리도 그 위대한 사랑으로 살며, 우리 주변에 용서해야 될 사람들, 하나님의 사랑으로 넉넉하게 품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남은 삶이 정말 시대와 이 사회를 품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하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의 길을 걸을 수 있기를 간구하자.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신다는 의미는, 먼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와 허물로 죽었던 인간들이 새 생명을 얻는데, 이 새 생명은 어떤 인간의 공로나 행위 때문이 아닌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살리셨고(made us alive), 일으키셨으며(raised us up), 앉히셨다.(made us sit). 하나님은 이렇게 구원을 단계적으로 이루시며 끝까지 보전하고 완성하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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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8월 16일)
제목: "돌아가야 할 우리의 자리"
말씀: 호세아 6:1~6
찬양인도: 쉐키나(이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설교자: 박단열 부목사님
ㅡㅡㅡㅡㅡㅡ

*호세아 6:1~6,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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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베이컨이 그의 저서 ‘노붐 오르가눔’에 기록한 말입니다. 이 말은 인간의 능력은 그가 가진 지식에 정비례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지식이 많은 것이 능력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지식 중에서도 잘못된 지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사실에 근거한 지식이 아니라 자신의 선입견에 의해서 어긋난 사고를 할 수 있다고 그는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선입견을 4가지 우상,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으로는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 등으로 구분해서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에 근거해서 행동합니다. 즉 인간은 자신이 소유한 지식에 근거하여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보고 들은 모든 것을 통해 우리는 생각을 하게 되고요. 그 생각은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고, 형성된 가치관이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도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나면 우리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그 경로는 때로는 설교 말씀일 수도 있고요 성도 간의 교제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봉사와 섬김과 같은 그런 행동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로 통해서 각자가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결국 각자의 신앙관으로 정리되게 되고 실제적인 신앙의 행위로 드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때때로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선입관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오해로 인해 우리의 신앙 행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에서 벗어나 형식만을, 때로는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감정적이거나 여러 가지 잘못된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바른 앎을 추구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호세아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의 삶과 그의 예언 활동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자와 결혼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디블라임의 딸 고멜이라는 여인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리고 세 자녀를 낳게 .그 세 자녀의 이름이 사실 굉장히 놀랍습니다. 장남이었던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은 이제 각지로 흩어지게 될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고요 장녀 로르하마는 긍휼을 받지 못한 자, 그리고 막내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다. 라는 그런 이름을, 이름의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세 자녀를 낳고서도 그 아내는, 호세아의 아내는 계속해서 음란한 행동을 하고, 가출하고, 다른 남자에게 가는 그런 잘못된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성경을 보시면, 마지막에 호세아는 그 가출했던 아내를 또한 다시 돈을 주고 사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호세아라는 선지자의 가정을 통해 신랑 되신 하나님과 그의 언약 관계,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축소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멜이 남편 호세아를 버리고 음란하게 다른 남자를 만나고 음란한 삶을 살았듯이, 이스라엘은 그들의 남편 대신 여호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않고, 이방의 우상들을 음란하게 섬겼습니다.북이스라엘은 결국 호세아의 장남 이스라엘의 이름과 같이 온 사방에 흩어져 살게 되었고, 로르하마의 이름과 같이 긍휼을 받지 못한 자로 나라가 망하는 망국을 경험하여 유리방황하게 되었으며, 로암미라는 이름처럼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한 비참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음란한 아내를 용서하고, 다시 살아가는 호세아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회복시킬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대략 주전 760년에서 710년 사이에, 한 40~50년 정도 사역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에는 북이스라엘이 기원전 722년에 완전히 멸망한 것 같은 그런 시기도 거치게 됩니다.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라는 왕의 시대부터 활약합니다. 여로보암 2세 당시에 북이스라엘은 그들의 나라의 역사상 가장 큰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그 어떤 시대보다도 북이스라엘이 강력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들의 영토는 넓었고, 아직까지 아수르가 그리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이스라엘 왕국은 고대 근동 지역 중에서도 강력한 국가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에 북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는 강한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의 우상들을 섬기는 영적으로는 음란한 나라였습니다. 그리하여 여로보암 2세 이후에 약 30년간 북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굉장한 혼돈 기를 겪게 됩니다. 30년 동안 6명의 왕이 바뀌면서 때로는 6개월, 때로는 1년, 2년 이렇게 짧은 기간 재위 기간을 거치면서 북이스라엘은 굉장히 정치적으로 혼돈하게 되고요. 그리고 점차 멸망해 가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주전 722년 호세아 왕 9년에 아수레 왕 살마네세 로셉에 의해 사마리아가 함락되고, 북 이스라엘 왕국은 철저하게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에 대해서 호세아서에서 호세아 선지자는 분명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의 이유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들에게 부재했기 때문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호세야서 4장 1절 자막을 보시면 이렇게 나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호세아 4:1,
1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호세아 4:6,
6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망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은 특별히 하나님이 자신을 직접 보신 하나님의 말씀 구약에서는 그것을 모세의 오경으로 대변되는 율법으로 이야기하고 있 이 율법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아까 앞서 읽은 4장 6절 하반 절에서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계속해서 그들이 그 율법대로 살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것처럼 살아갔기 때문에 결국 이스라엘이 멸망한다. 라는 것이죠.

근데 여기에서 하나님을 아느니라. 라고 할 때 이 ‘알다’ 라는 말에 대해서 아마도 많은 설교 시간을 통해서 들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알다라는 히브리어 ‘야다’라는 단어는 지식적인 앎을 넘어선 경험적이나, 때로는 가장 친밀한 부부 관계를 표현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곤 합니다. 또한 고대 근동 시대에서는 어떤 언약을 맺을 때에 당사자들 간 그 언약이 굉장히 중요했기 때문에 이 언약을 맺을 때, 그 당사자들 간의 결합 관계를 의미할 때도 이 단어를 사용했고요. 또한 어떤 나라의 죽음과 신하의 주종 관계에서도 신하가 주인에게 드리는 충성을 아는 것, 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호세아서에서는 계속해서 2장 20절, 4장 6절, 5장 4절, 6장 6절, 8장 2절, 13장 4절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언급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하고 있습니다. 한번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2장 20절입니다.

*호세아 2:20,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호세아 4:6,
6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호세아 5:4,
4그들의 행위가 그들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그들의 행위가 그들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6장 6절입니다.
6 나는 이해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죄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8장 2절입니다.
2 그들이 장차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하나님이요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하리라.
13장 4절입니다.
4 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이렇게 반복해서 하나님 여호와를 알 것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호세아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5장 4절에 나타난 것처럼 그들의 마음 가운데 음란한 마음,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을 섬기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기를 거역하는 그런 잘못된 마음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말미암아 여호와를 바르게 아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자신들의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차지하기 위해 그릇된 지식으로 하나님을 잘못 섬겼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기는 알았지만 바르게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문제가 있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는 하나님을 섬긴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만족과 만족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이방의 신들을 즐거워하고 섬겼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멸망하게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호세아는 결국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린,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내어버린 북이스라엘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다시 회복해야 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면서, 오늘 우리가 읽었던 호세야 6장 1절부터 6절까지의 본문을 우리에게 준 것입니다. 이 본문을 통해서 호세아는 우리에게 크게 두 가지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권고는 바로

I.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지금까지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숭배했던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향해 우리의 방향을 고정하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지금껏 잘못된 삶을 통해 찢어졌던 삶을 하나님께서 낫게 하실 것이고, 그릇된 행동으로 인해 우리를 찢었더라도 다시 싸매어 주실 것을 이야기합니다. 또한 영적으로 완전히 죽은 것과 같았던 삶에서 우리를 일으키실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2절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셋째 날에 우리를, 우리를 일으키신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사람이 죽은 지 셋째 날이 되면, 그의 육체를, 육체 주위를 떠돌아다니던 영혼이 완전히 응부로 옮겨진다. 라고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즉, 셋째 날이 되었다는 것은 완전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신다는 말은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완전한 죽음과 같은 상태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여호와 앞에서 다시 완전히 살아날 수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권고는 3절에 나타납니다.

II.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이것은 우리 삶에서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언약의 거리가 다시금 굳게 맺어지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편견과 우리의 선입견으로 인해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그릇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의 마음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향한 바른 지식을 추구하자는 것입니다. 신랑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지식을 통해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삶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통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을 때에 우리가 참된 구원의 길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쌓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신 하나님의 살아있는 그 말씀을 통해 하나의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나의 구주로 믿고 의지합니다. 아마도 이곳에 계신 모든 우리 성도님들은 이 말에 동의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때로는 특별한 경험으로 하나님을 알 수도 있고요. 그리고 어떤 경로든지 예수를 믿게 된 이후에 우리의 신앙이 바르게 자라나기 위해서는 결국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토대 위에서 성장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을 알게 하는 중요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항상 말씀의 토대 위에서만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때로는 기도와 묵상, 교재와 전도, 봉사도 필요하지만 그 근본에는 하나님의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드러내신 말씀이 자리 잡아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에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나는 얼마나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있을까라는 것은 평소에 내 삶에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으로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지금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가까이 하지 않고 말씀을 잘 보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의 어떤 중대한 균열이 생겨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 깊이,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서 내가 하나님을 바르게 안다. 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근거가 부족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더 가까이 하고 더 깊이 알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쌓을 수 있고, 그로 말미암아 평소의 삶에서, 삶의 자리에서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올해 봄에 있었던 일입니다. 저희 집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저희 첫째 아이가 어느 날 이제 집에서 학교 후에 저녁에 집에서 수학 숙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초등학교 1학년짜리가 수학 숙제라고 해봤자 그렇게 막 대단한 문제가 있을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 굉장히 막 수능 시험에 넣을 만한 그런 문제는 전혀 나오지 않죠. 고작 해봐야 한 자릿수 혹은 두 자릿수에 덧셈 뺄셈 정도가 그에게 주어진 숙제입니다. 그런데 제가 옆에서 그래도 숙제를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옆에서 그래도 열심히 하라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옆자리에 앉아서 이렇게 지켜보고 있는데 열심히 하더라고요. 양손을 사용해서 9빼기 7을 하는데 막 그렇게 하는데, 저희 같은 어른들이라면 그냥 웬만하면 머리로 바로바로 생각해서 쓸 수 있는 답인데 막 열심히 하다가, 9빼기 7인데 당당하게 상을 딱 적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옆에서 보면서 아이고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제가 개입을 했습니다. 이게 정답이 맞을까? 라고 물어봤어요. 그러니까 저희 아이가 제 생각에 그랬어요. 이렇게 물어보면 내가 잘못했나? 한번 살펴보고 한번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금방 바로 된 정답을 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가만히 있는 거예요. 그래서 왜 그러지? 이거 쉬운 거니까 한 번 더 생각해 봐라. 지금 내가 볼 때 이 답이 잘못된 것 같으니까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어떨까라고 하는데 가만히 있는 거예요.

가만히 있는데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던 그 순간 저희 아들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두르락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누가 당황했을까요? 눈물을 흘린 아이가 당황했을까요? 제가 당황했을까요? 제가 갑자기 당황을 한 거예요. 그래서 왜 눈물을 흘릴까? 그래서 계속해서 얘기해보라고 하는데 몇 분 동안 대답을 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다가 제가 계속해서 물어봤습니다. 우영아 왜 울었냐? 라고 물어보니까 갑자기 그 아이가 저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빠가 나를 야단치는 것 같아서 울었어요. 라고 대답하는 거예요. 그때 저에게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먼저 일단 크게 반성을 했습니다. 혹시 내가 그동안 우리 아이에게 강압적인 모습이 나에게 혹시 나 있었지 않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은데 그런 모습을 보면서 설명을 했어요. 그런 게 아니다. 아빠는 네가 바른 답을 찾아가고 바르게 이 문제를 풀어가는 게 목적이지 니가 이거를 틀렸다거나 뭐 잘못했다고 해서 야단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설명을 하고 그렇게 넘어갔습니다. 넘어갔는데 그날 밤 자리에 누워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냐 하면 우리 아이의 이런 모습이 어쩌면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습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때론 여러 가지 시험 문제들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여러 가지 숙제들도 있고요 시험들도 다가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 그 시험 문제 그렇게 대단히 어렵거나 그렇게 복잡한 문제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제가 저희 아이의 그 수학 숙제의 답을 2, 3 옆에서 혼자 계속 암산으로 혼자 풀고 있던 저처럼, 하나님께서는 제 삶의 여러 가지 복, 제가 볼 때는 복잡하고 어려워 보이는 그 문제들을 끙끙대며 양손을 써가며 어떻게든지 풀어가려고 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옆에서 이미 답을 다 알고 계시고, 그 답을 하나님 생각에는 참 쉽게 우리가 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어려워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이 나의 모습이 아닐까라고 생각을 했던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그저 나에게 바른 길을 알려주시려고, 인도하시고 안내하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혹시 하나님이 나를 혼내시는 것은 아닐까? 나를 야단치시는 것은 아닐까? 내가 잘못된 길로 갔다가 하나 나에게 벌을 주는 것은 아닐까? 라고 하나님의 진심과 하나님의 마음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 나의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 라고 하면서도, 하나님 믿는다. 라고 하면서도, 때때로 우리는 굉장히 경험적인 것이 아니라, 그냥 나의 어떤 선입견과 나의 기본적인 하나님에 대한 인식으로 나의 삶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막기도 하고, 온전히 신뢰하지도 못하고 그렇게 살아갈 때가 참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하게 9빼기 7정도의 문제를 주심에도 불구하고,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바로바로 풀릴 수 있는 그 문제들을 나의 계획과 나의 생각이 앞서기 때문에 어떻게든지 내 방식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풀어보려고 그 간단한 문제를 복잡하게 풀다가 실패하고, 실패하고 난 뒤에는 하나님, 나에게 왜 이런 힘든 일을 주십니까? 왜 하나님 나에게 이렇게 야단치시고 나를 힘들게 하십니까? 라고 오히려 잘못된 반응을 하는 것이 연약한 나의 모습은 아닐까? 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삶에 놓여져 있는 우리 우리의 그런 문제들을 마주할 때에, 하나님에 대한 바른 앎이나 이해가 없이, 나의 생각으로 판단하고 살아갈 때에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어려운 일들이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되고요. 우리 인생의 여러 가지 시험 문제들과 과정들을 허락하신 출제자의 의도, 하나님의 의도를 바르게 파악하는 것이 우리가 인생 가운데 정말 큰 은혜와 복을 누릴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여름 휴가 동안에 저희 가족들과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중에 저희 아이들이 이제 저희 사역에 주일학교에 있으니까 또 찬양을 많이 듣습니다. 캔송 키즈 찬양을 듣는데요. 15집부터 쭉 거슬러 올라가다 어느덧 10집까지 들었어요. 10집까지 듣는데 캔송 키즈 10집에 이런 이런 제목의 찬양이 있습니다. ‘우리의 자리’라는 찬양이 있었는데요. 그 찬양의 가사를 듣다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번 가사를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1절 주님의 생명의 빛 비치는 그곳에, 주님의 음성이 잘 들리는 그곳에,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맞아주시는 내가 있어야 할 곳 할 곳, 내 자리가 있죠 잠시 잊었나요? 잠시 놓쳤나요?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십자가의 은혜가 넘치는 주님의 품, 그것이 우리의 자리죠.

​2절입니다. 주님의 생명에 비치는 그곳에 주님의 음성이 잘 들리는 그곳에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맞아주시는 내가 있어야 할 곳 내 자리가 있죠. 잠시 잊었나요? 잠시 놓쳤나요?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십자가의 은혜가 넘치는 주님의 품, 그곳이 우리의 자리죠. 잠시 잊었어도 잠시 놓쳤어도 주님은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시죠. 십자가의 은혜가 넘치는 주님의 품 그곳이 우리의 자리죠.
-아이들의 찬양인데 제가 듣다가 참 많은 어떤 울림이 제 마음 가운데 있었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고, 저희 가정은 제가 이제 5대째 신앙생활하고 있고요. 저는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모두 목회를 하셨습니다. 집안에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나서 말씀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알아가고 또한 목회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저이지만, 제가 이 찬양의 가사에서 어디서 제가 흔들렸냐 하면 잠시 잊었나요? 잠시 놓쳤나요? 에서 저 또한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고 잊고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가슴 깊이 느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오지만, 매주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고 살아가기 쉬운 존재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집에 돌아가면 금세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또 내 삶에, 내 생각대로 내 길을 걸어가기 위해 그렇게 애쓰는 모습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 사랑의 교회, 귀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기 위해 날마다 애쓰고 살아가십니까? 그렇게 살아간다 할지라도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그 뜻을 잊어버리기 쉬운 존재입니까? 우리 날마다 주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우리에게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하고요 또한 여호와께 돌아와야 합니다. 날마다 혹시나 내가 잘못된 길로 걸어가지 않을까 우리 스스로를 점검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 자신을 비추어서 그 길로 나아가기 위해 힘써야 하는 존재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께 돌아가는 삶 정도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이키고 열정을 갖고 하나님께 나아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으면 우리는 결국 의미 없거나, 한쪽으로 치우친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해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미 없는 종교 행위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에게 끊임없이 그 십자가의 은혜의 자리로 돌아오라고 하신 그 말씀에 반응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길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식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날마다 기억하며, 앞서서 말씀드린 우리의 자리에 앉은 찬양의 가사처럼, 때때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십자가의 은혜를 잠시 놓치기도 하고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계속해서 다시 주님께로 돌아가기 위해 힘써야 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갈 길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오늘도 은혜의 자리를 찾아 이 자리에 나오신 모든 사랑의 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바로 알고 우
리에게 허락된 은혜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요약
우리는 연약하여 하나님을 안다 하면서도 우리의 선입견과 경험에 의지하여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할 때가 많지만 한 결 같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자리를 마련하고 계신 하나님이 계심을 확인하며 우리가 돌아가야 할 자리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힘써 하나님을 바르게 알기를 소망하며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의 자리로 날마다 돌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주장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십자가의 은혜의 자리를 잊거나 놓치고 살아왔다면 다시 한 번 은혜의 자리로 나아갈 힘과 지혜를 허락해 주시기를 간구하자.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여기서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바로 알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닥치는 불행과 행복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다. 때문에, 재난에 빠졌을 때는 그 재난에서 자신을 구원하실 하나님의 처분, 곧 불쌍히 여기시고 건져 주실 것을 바라고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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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3년 8월 13일)
제목: "눈물로 꿈꾸는 추수"
말씀: 시편 123:1-6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대표기도: 양은규 부목사님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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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23:1-6,
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3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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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 목사님께서 “눈물로 꿈꾸는 추수”라는 제목으로 78주년 광복절 특별 메시지를 전해주시겠습니다.
 
▶오정현 담임목사님
-거룩한 기대감을 갖고 나온 모든 성도들 선한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보혜사의 능력으로 덮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는 주일 예배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금 저희는 78주년 해방 주일, 광복 주일이라는 그런 오늘 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해방’이라는 말은, 어떤 구속되고 포로 된 곳으로부터 벗어났다. 이런 뜻이고 ‘광복’이라는 말은 빛을 회복 한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 민족적으로도 감사한 일이지만 우리 영적으로도 우리 모두는 죄악의 포로로부터 벗어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빛의 자녀로서 온전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시대 앞에 빛의 역할을 사명을 감당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우리 한국 사회에 여러 이제 이슈를 앞에 놓고 정치적 성향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일에 대해서도 호불호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예수 믿는 저희들은 똑같은 우리 한 가지 목표가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가 돼야만 합니다. 대한민국이 좋은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대한민국이 좋은 나라가 되려면,,, 정부가 좋은 정부가 돼야 합니다. 그리고 지도자가 좋은 지도자가 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 예배를 통하여 좋은 정부, 좋은 지도자의 복, 좋은 나라의 복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단독 목회하고 35년 동안 한 주도 한 해도 빠지지 않고 광복주의를 간절한 마음으로 지켰습니다. 광복절을 지키는 이 간절한 소원은 뭐냐 하면 이 광복절을 지키는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 다시 한 번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평양에서 특새하게 하여 주시옵시고,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제사장 나라, 빛의 나라가 되게 하여 주시옵시며, 저 북한에도 북한 아이들을 성경으로 신앙으로 교육할 수 있는 북한에도 정말 아름다운 주일 학교가 있게 하여 주십시오. 뭐 그런 우리가 간절한 소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여러분 시편 126편의 이 말씀 오늘 눈물로 꿈꾸는 추수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눈물의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은 어떤 결과를 주실까? 거기에 대해서 조금 더 말씀 중심으로 그다음 시대 앞에서 우리가 참 이게 주님이 내게 주신 말씀이구나! 그렇게 확인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126편은 얼마나 이 시가 좋은 시였냐 하면 ‘성전으로 올라가는 시’라고 그랬어요. 너무나 좋아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 가운데서 해방 받아 나와 가지고 그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좋은지, 성전에 올라갈 때마다 자주자주 부르는 시가 되었습니다. 어떤 뜻입니까? 1절에,
 
*시편 123:1,
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포로를 돌리실 때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다.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때는 우리 혀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의 입에는 찬양이 가득하도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가 뭐 하도다. 기쁘도다. 너무너무 기쁘다. 너무너무 기쁘다. 대사,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여 주신 것이 여러분과 저의 가장 큰 능력이 돼야 되는 것이에요. 지금 여러분들이 어디 뭘 좋은 걸 찾으세요? 뭐 하고 싶으세요? 다른 거 없어요. 오늘 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 교회와 우리 개인 교인, 우리 성도들, 우리 민족을 위여 하나님의 큰일을 행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이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의 힘이라고 그랬는데, 그 힘을 저희들에게 허락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1절부터 6절까지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올라가면서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이렇게 다 나와 있는 과거는 하나님께서 포로를 돌리시고, 그 은혜가 너무 크니까 그 찬양과 감사가 감사에 대한 1, 2, 3절에는 감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4절에는 주여 우리를 다시 한 번 난방 신내들처럼 만들어 달라고 현재의 강구가 나오고 그다음에 5절, 6절에서는 하나님 아버지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단을 가져올 줄로 믿습니다.
 
*시편 123:1-6,
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3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123절은 감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보내소서.
- 4절은 주여! 우리를 다시 한 번 남방 시내들처럼 만들어 달라고 현재의 간구가 나오고,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5절 6절은 하나님 아버지!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단을 가져올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울며 씨를 뿌리면 반드시, 반드시 적는 기쁨으로 추수하게 되실 줄로 믿습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이 확실한 그래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2절 뒤에 보니까 이방 사람들, 못 이웃 사람들, 다른 나라 사람들도 야 야 야 야 야!!!!! 여호와께서 유대민족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신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을 하게 되는 겁니다.
 
오늘 이 시편 126편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과 우리 민족의 고백이 되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가 전제를 하나 해야 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I.. 눈물로 기도하는 남은 자를 통해 일하신다.
-첫 번째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보면서 눈물로 기도하는 남은 자를 통하여 주님이 일하시는 것을 깨달아야 되는 것이 다시요! 뭐로 기도하는 것이냐면요? 눈물로 기도하는 어떤 사람을 통하여 남은 자 남은 자에다가 점을 딱딱딱! 쳐보세요. 눈물로 기도하는 남은 자를 통하여 일하신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갔습니다. 유대 민족이 망해가지고 갔는데 여러분 그 망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안타까운 목자의 심정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하다가 망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세요? 유대민족 가운데 다 잘못했겠어요? 유대민족 가운데 경건한 자가 하나도 없었겠어요? 다니엘 같은 그런 사람들을 비롯해서 유대민족 가운데서도 상당수의 경건한 자들, 거룩한 자들,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순종하고 사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었어요. 그런데 그들의 경건과 그들의 헌신과 그들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민족 전체가 망하니까 휩쓸려가는 것이 다 휩쓸려 가는 거예요. 따라서 저와 여러분이 나라를 위하여 진짜 간절히 기도하고 사모해야 할 것은 뭐냐 하면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해도 나라가 잘못되면 우리도 고난 겪는 것이에요. 북한 보세요. 지금 그러니까 나라 사랑과 나라 잘 되는 것과 우리 잘 되는 것이 같이 가야 되는 것이에요. 여기에, 여기에 에서서 하나님 사모하고, 하나님 영광 사모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전력투구하고, 순종과 헌신과 거룩을 가진 백성들 가운데서도 그냥 포로로 잡혀가는 그러니까 그 포로로 잡혀가 가지고 그런 사람들이 남은 자들인데 또 포로로 잡혀갔는데 그걸로 끝난 것이 아니에요. 그 바벨론 사람들이 조롱하는 거예요. 조롱(嘲弄)과 멸시(蔑視)와 그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 얼마나 나중에 여러분들 아시잖아요? 모르드개와 하만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했어요? 잡아매려고 그랬잖아요. 에스더 시대에,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경건한 소수의 사람들이 울부짖는데도 불구하고 나라가 무너지는 바람에 다 고생하고 이것 자체가 억울하고 슬픈 일이죠.
 
그런데 그 억울하고 슬픔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않고 남은 자로서, 자신을 지켜내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에요. 바벨론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었겠어요. 노리개 감으로 삼고 희롱하고 무시를 했어요. 에스더서에 보면 유대민족 전체가 멸종을 당할 위기도 당한 것이야. 그러니까 오죽하면 밤낮 금식하고 티끌을 뒤집어쓰고, 통곡하고, 탄식하고, 그야말로 눈물로 씨를 뿌리는 거에요. 예레미야애가 표현처럼 마치 쑥과 담즙을 마시는 것처럼, 담즙은 뭡니까? 곰의 쓸개를 마시는 것 같은 쓴잔이었어요. 생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도 있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당시 세계 최고의 발달된 제국 바벨론 제국, 문화에 그 문화와 현실에 타협하라는 미혹 앞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진짜 남은 자로 눈물로 씨를 부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포로 생활 10년, 20년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이게 50년, 60년을 가니까 동족들 가운데 신앙 팔아먹고 배신하는 그런 사람들, 부패한 사과 하나가 상자에 있으면 삽시간에 사과 박스 전체를 부패시키듯이, 이 패배주의자들의 논리가 남은 자들의 마음을 더 어렵게 하는 것이었어요. 그 가운데 신앙을 지키는 것은 그야말로 눈물로 씨를 뿌리고 남은 자, 남은 자에요. 여러분 제가 초대 교회사를 보니까 초대 교회사에는 ‘필립 샤프’라는 분이 초대 교회사, 교회사 책을 7권을 써서 집대성을 했는데 초대 교회사에 보면, 로마 황제를 주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말하는 사람은 딱 그 많은 사람은 두 가지 결과밖에 없다. 하나는 순교를 하든지, 또 하나는 남은 자로서 고백자가 되든지, 멀터가 되든지, 아니면 컨페서(Confessor)라는 말 알죠? 컨페서(Confessor)라는 말 우리가 고백한다. 컨페서 (Confessor) 마트가 되든지, 컨페서(Confessor)가 되든지, 둘 중에 하나라는 것이 우리는 지금 우리 사회를 보세요.
 
저는 기독교를 폄하하고 함부로, 함부로 교회를 정말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고 이런 어떤 그 반기독교 문화 사회 가운데서 마치 바벨론 포로 시대에 바벨론이 희롱하고 욕하고 그렇게 하는 것처럼 또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이 무신론자들 강력한 프레임을 갖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이 탈락한 세속 문화 이 가운데 우리가 신앙을 올곧게 지켜내는 것 자체가 우리는 남은 자가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몫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남은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일하시는 것이에요. 남은 자들을 통하여 일제 36년 시기 가운데서 눈물로 나라를 위하여 애국 구국기도를 하고 평양 부흥을 경험한 그 일들을 통하여 그래도 이 나라를 지켜낸 것이에요. 6.25 때도 마찬가지고, 다 안 된다고 다 끝났다고 그러는데 6.2의 참상을 견뎌내는 눈물로 기도로 씨앗을 부리는 사람들, 한국교회 부흥의 시기에 눈물로 간절히 기도할 때, 그 부흥의 결과로 나타나고, 지금도 교회가 이래 많은데 이렇게 나라가 뭐 이렇다 이런 사람들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교회가 있으니까 이만큼이라도 된 겁니다. 교회가 있으니까 이만큼이라도 된 겁니다. 교회가 있으니까 지금 이 동성애법 이것도 참 기가 막힌 거예요.
 
제가 지난주에 미국에서 한 분들 얘기를 들어보니까, 지금 미국의 큰 병원의 책임자가 지금 고민을 한 게 지금 뭐가 있냐면요. 아이들 이제 외과 의사들이 어린아이들이 내가 남자다 그러면 여자 아이를 남자로 수술하고, 또 여자아이가 나는 남자 남자가 내가 여자다 그러면 남자를 여자아이로 수술하는 그 지금 훈련을 하고 있대요. 지금 여러분 이게 말이 되냐고?? 이 가운데서 우리가 한국교회가 지금 이만큼 하니까 동성애 차별 금지법을 우리가 막고 있는 것이에요. 지금 눈물로 신을 뿌리는 거죠.
 
지난 목요일 날 저녁에 우리 교회는 영국의 2천여 명과 10개국에 한 4천여 명이 와가지고 본당과 이렇게 보이스카웃 잼버리 청소년들이 함께했다. 새만금 난리 났는데, 참 우리가 독립운동 하는 마음으로 사랑의 교회가 독립운동 하는 마음으로 새만금의 관군들이 잘못한 걸, 우리 의병들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이에요. 눈물로 씨를 뿌리는 거에요. 너무나 놀라운 시편 126편의 말씀이 나오기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키겠다고 말트 아니면 컨페서(Confessor)로서, 고백자로서 눈물로 씨를 뿌리는 기도로 지키는 자들 여러분들 때문에 오늘 이 자리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도 또 그래 돼야 되고 그래서 오늘 두 가지를 적용하겠습니다. 둘째 우리가 눈물로 씨를 뿌릴 때, 기도의 씨를 부릴 때 하나님이 기뻐하는 씨는 씨를 뿌려야 되는 것이에요. 진리의 씨를 뿌리다 갈라디아서 6장 8절에 보니까 다 같이 보겠습니다.
 
II.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씨를 뿌리야.
*갈라디아서 6:8,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리의 씨는 성령의 역사를 통한 눈물의 씨가 뿌려져야 한다는 것이에요. 똑같은 대통령이지만 미국의 죤 에프(John F 케네디 대통령은 공립학교에서 성경 과목 성경 가르치는 거 주기도문을 폐지해버렸어요. 그것 때문에 그때부터 그 강력한 미국이 수많은 미국에 참 복음주의자들이 고통을 겪었습니다. 저 어느 지역은 지금 전부 다 화장실을 남녀 화장실을 다, 다 개조를 하는 거죠. 멀쩡한 남자 화장실 여자 화장실을 다 개조를 유니섹스로 해가지고 다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도록!! 여러분 진짜 미치지 않았어요? 그거 그런데 우리가 볼 때는 그런데 그거 지금 거기에 당연하게 그리 되고 있는 것이 진리의 씨를 뿌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성경은 진리의 영, 진리의 씨가 뿌려진 곳에는 항상 선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줄로 맺는 것입니다. 진선미가 나타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진리의 씨를 뿌릴 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씨를 뿌릴 때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뿌려야 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 많은 사람들이 진리의 씨를 뿌린다 할 때 진리를 선포하는 거예요. 진리를 주장하는 거예요. 말하는 것 ,그것만 하면 안 되고 거기에다가 진리의 씨를 뿌릴 때 사랑이 포함되는 것이 여러분과 저는 사랑의 교회는 앞으로 시대 앞에 쓰임 받을 때 우리는 개혁하는 것이 목표가 아닌 거예요. 우리는 막 개혁하고 바꾸고 이게 목표가 아니라 우리는 세우는 것이 목표가 되는 거예요. 개혁 정도가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 목적이 돼야 할 줄을 확신하는 것이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진리가 중요한데 진리와 함께 세우려면 교회를 세우고 가정을 세우고 나라를 세우려면 진리와 함께 뭐 같이 가야 되는 거예요? 사랑이 같이 가야 되는 거 선포만 하면 안 되죠. 그래서 에베소 4장에 보니까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뭐예요? 말해라. 진리와 사랑이 같이 가야 되는 거에요.
 
*에베소서 4:25,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이것은 때로는 고통이나 괴로움으로 눈물이 나는 상황 가운데서도 참된 것을 말하는데,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사랑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에요. 사랑이 없는 공의 혹은 사랑이 없는 정의는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것이에요. 그래서 제가 한 번씩 말씀드렸어요. 우리가 정직 운동을 해야 되지만 정직과 감사가 같이 가야 되고, 정직과 사랑이 같이 가야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5절에 보니까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라는 것이 복수형이에요.
 
*시편 126:5,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Those who sow in tears)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눈물을 흘리고 함께 진리의 시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방식으로 뿌릴 때에 복수의 보수 형이에요. 그래서 우리와 함께 이 예배를 드리는 모두가 다 함께 진리의 씨를 뿌릴 수 있는 축복을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무슨 일을 함께 뿌릴 때에, 함께 6절에는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간 자는 단수형으로 돼 있어요.
*시편 126:6,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그러니까 함께 또 개인적으로 함께 기도하되, 또 단독자로 주님 앞에 설 때에 4절에 남방 시내들 같이 된다. 남방 시내들이라는 말이 놀라운 말이에요.
*시편 126:4,
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보내소서.
-남방 네게브 사막은요 완전히 사막이에요. 그런데 거기에 남방의 1년 내내 메마른 곳에 하나님께서 꿈꾸는 추수를 위하여 비를 쏟아주시는데, 그 비가 은 하나님의 은혜로 쏟아지게 되면 그 남방이 완전히 메마른 곳이 진초록의 정원으로 바뀌는 거예요. 대단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 다시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시를 진리와 사랑으로 같이 가가지고 뿌릴 때에 하나님이 역사하신 줄로 믿습니다. 메마른 곳에 그래서 오늘 찬송에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메었던 종들이 돌아오네.~~ 할렐루야 3절에 뭐예요? 말랐던 시냇물이 흘러 광야에 화초가 피고... 말랐던 시냇물이 흘러오네. 말랐던 곳에 광야의 네게브 사막이 진초록의 정문으로 바뀌는 그런 축복을 받는 것이에요. 또 하나 또 하나 우리가 정리 첫째는 씨를 부릴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또 하나 우리가 정리할 것은 뭐냐 하면 반드시 은혜를 가진 소망을 가진 6절에 이렇게 나와 있어요.
 
III. 반드시 은혜로 믿어야
*시편 126:6,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Shouts of joy)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뭐라고 돼 있습니까?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뭐라고 돼 있어요? 반드시 기쁨으로 확실하게 쇼리 그리고 열매 확실하게 그리고 어느 정도인가 하면 기쁨으로라는 영어 단어를 보니까 샤우트 오브 조이 그러니까 복수예요. 복수. 단순한 기쁨이야. 기쁨들이에요. 이게 3절 5절 6절에 세 번이 나오는데 한글 성경에는 기쁨으로 나오지만 조금 약해요. 사실은 기쁨의 외침들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 우리가 기쁨의 외침들이 될 정도로 반드시, 반드시 기쁨의 단을 가져오리라. 는 이 소망을 믿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요 씨 뿌리고, 수고하고, 김매고 인내하는 그건 우리의 몫이지만 열매를 맺게 하고 추수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에요. 너무 중요한 거예요. 과정은 어려워요. 수많은 간난, 신고가 있어요. 수많은 즐거움이 있어요. 그런데 저와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정말 죽을 때까지 놓치지 말아야 될 것이 뭐냐 우리가 주님 앞에서 적어도 진리의 씨와 이 은혜를 받아가지고 울면서 주님 앞에 기도할 때는 하나님이 반드시, 반드시 기쁨의, 기쁨의 단들을 거두게 하여 주실 것이다. 곡식 단도 그냥, 그냥 뭡니까? 단수가 아니라 복수예요. 반드시 그러니까 이 단들 안에는 수많은 것들이 들어가요.
 
여러분들의 삶의 정서적인 고통, 수많은 어려움들, 그다음에 삶의 보람들, 동시에 여기에 경제적인 부요 이런 것도 다 들어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어마어마한 인도예요. 반드시 반드시 주시리로다. 제가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포로가 되지 않았다면 해방의 기쁨도 몰랐을 거예요. 우리가 고생을 안 해봤으면 이 추수의 은혜도 잘 실감이 안 갈 거예요. 우리가 코로나의 강을 건너면서 죽을 똥 말똥 해봤기 때문에, 일상의 기쁨도 아는 거 아닙니까? 오늘도 좀 몸이 면역이 좀 떨어진 분들은 마스크 다 끼고 오셨잖아요. 옛날 같으면 마스크 안 해도 되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이거 하면서 야 이거 우리가 몇 년 우리가 이렇게 건강하게 예배드리고 사는 것도 진짜 주님의 축복 옛날에는 뭐 그거 당연한 줄 알았지. 포로 된 자였기 때문에 해방의 기쁨이 더 크게 되는 것이에요. 그 이런 걸 생각하면서 우리는 이게, 이게 추수의 역설이고 눈물과 슬픔의 역설이 되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흐릴 때도 있고 어떨 때는 비 오는 날씨를 버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반드시, 반드시 우리는 기쁨의 단들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이 세상에 무슨 도덕이나 이 세상의 스타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도 고진감래(苦盡甘來)를 얘기해요. 어려운 날 끝나면 고생 끝에 낙이 온다. 막 그런 얘기하는데 제가 말하는 것은 여러분 고생 끝에 낙이 오는 그 정도의 그런 차원이 아니에요. 제가 말한 것은 두 가지가 근거된 것이에요. 이것이 뭐예요? 저희 얘기가 아니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에요. 말씀에 근거한 것이에요. 성경으로 올라갈 때마다 유대인들이 정말 체험하고 눈물로 확신하고, 감격하고, 증명되고 확정된 것들을 매주 마다 선포하는데 그것이 우리에게 확인될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니까, 세상의 고진감래하고 다른 것이에요. 그리고 또 하나는 이 말씀을 하신 분이 누굽니까?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야훼,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인격과 신실성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미쁘시니 하나님 자체에 신실하심에 근거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능하심과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근거해가지고 이것을 믿는 것이에요. 그래서 히브리 10장 23절에 보면,
 
*히브리서 10:23,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으라.
-오늘 그러면 이 21세기 오늘, 광복 78주년을 맞는 이 시기에, 이 말씀이 눈물로 씨를 뿌린다는 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개인의 가정의 삶에는 이것이 어떤 뜻으로 다가와야 합니까? 반드시 소망은 어떤 뜻으로 다가와야 합니까? 이런 것입니다. 믿지 않는 남편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수십 년을 기도했는데도 아직까지 응답이 안 되었을 때 그 눈물로 애통하는 아내의 기도는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에요. 그걸 믿는 거예요. 저희 아버지가 개척할 때에 그 가난한 달동네에서 맨날 남편들이 구타하고 지금도 기억해요. 집에 다 닫아 붙어 있으니까 달동네는 1일 노동자들이잖아요. 그러니까 고생이 많아. 그러니까 1일 노동해가지고 저녁에 술 한 잔 마시고 들어와 가지고 아내 보고 막 때리는 거예요. 왜 때리냐 보니까, 반찬을 형편없이 해야 했는데 남편한테 이게 뭐냐 그러니까 아내가 또 얘기하잖아. ‘돈만 많이 벌어줘 봐라 내가 좋은 거 안 해주나?’ 그러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아내가 예수를 믿고 새벽 기도를 나오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 남편은 변화되지 않고 그러니까 이게 실화에요. 남편의 신발을 가슴에 품고 새벽에 나와 가지고 울면서 기도하는 거예요. 그거 다 봤어요. 저는.근데 그런 남편이 변화돼 가지고 자신을 추스리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고 아이들을 교육하고 그래서 그 아이들 가운데 시대 앞에서 임하는 아이들도 있어요. 다시요 평생을 기도해도 응답받지 않는 남편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눈물의 아내의 기도가 반드시 소망으로 결실하는 것이에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혼기를 놓친 자매들, 좋은 신랑만 예수 잘 믿는 신랑 만나겠다고 기다리다가 혼기를 놓친 자매들, 하나님이 반드시 보상하실 것이에요. 떼돈을 벌 수 있었는데 신앙 때문에 타협하지 아니하고 포기하는 분들 하나님께서 반드시 소망을 허락해 주시는 것이에요. 이거는 진리의 씨가 아니야 이거는 이게 진리 선포만 하는 게 사랑이 포함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생각해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는 그분들의 헌신을 하나님 앞에 반드시 샤우츠(Shouts)! 기쁨의 단들을 가져오도록 만들어 주실 것이요. 그래서 우리가 암송하듯이 갈라디아서 6장 9절에
 
*갈라디아서 6:9-10,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뭐 하지 말지니 낙심하지 말지니 그다음에 뭐예요 포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고요? 이 반드시, 저는 이 갈라디아서 6장 9절의 말씀이 시편 120편 6절이 신약의 재해석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세상의 법칙에는 예외가 있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반드시 소망의 법칙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반드시 6절에 기쁨으로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반드시...
 
오늘 이 자리에 많은 성도들, 중직자들 한번 믿음으로 한번 주님을 섬겨보겠다는 그 헌신의 눈물, 부모님들 가운데 한 번 믿음의 일대로 아브라함처럼 살아봐야 되겠다는 마음의 각오의 눈물, 주일학교 교사로서 다음 세대를 제대로 키워봐야 되겠다는 눈물에 참 기도의 헌신 순장으로서 청년대학부 리더로서, 헌신한 분들의 눈물의 기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주차 안내 교육 봉사하시는 분들 사랑 부에서 형제자매들, 아이들을 한 결 같이 섬기는 분들의 수고를 하나님은 반드시 갚아주실 것입니다.
 
제가 이거 반드시 갚아주는 것 때문에 헌신하는 건 아니지만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을 우리는 그대로 믿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격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보통 인생은 시간과 재능에 의하여 시간 곱하기 재능 그 재능과 시간이 합쳐져 가지고 그 삶의 어떤 축복과 열매로 나타난다고 결정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저는 시간과 재능에다가 눈물로 흘리는 기도의 씨앗에 의하여 100배의 차이가 날 줄로 확신하는 것이에요. 한국교회의 선대의 귀한 우리 목회자들, 선대의 귀한 참 영적 지도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제가 네 분의 목사님이 참 귀한 역할을 했다. 한경직 목사님 한국 민족 사회의 기독교가 무엇인지, 신앙이 무엇인지, 조용기 목사님은 성령으로 부흥의 역사가 무엇인지, 우리 옥한흠 목사님은 목회의 본질이 제자 훈련을 통하여 한 사람을 세우라는 것이 무엇인지, 교회는 어떻게 제대로 양육하고 세워져야 되는 것인지, 근데 또 한 분이 있어요. 김준곤 목사님이 계세요. 캠퍼스 크루세이드 크라이스 한국 대학생 선교에 창설하신 김준곤 목사님은 우리 민족을 향하여 애국 애족의 눈물의 씨를 부르셨어요. 제가 김수범 목사님 제가 최근에 이게 설교하신 것 가운데 에스더 기도 운동을 위하여 말씀하셨던 부분이 있었어요. 제가 너무 감동이 됐어요. 제가 다는 못하겠고 제가 웬만하면 영상은 잘 안 해요. 왜냐하면 영상을 하면 설교는 안 남고 영상만 남는 거예요. 제가 거의 영상을 안 하는데 오늘 이 영상을 한, 2분 50초 정도 영사하는 이유가 있어요. 우리가 민족을 향하여 눈물로, 눈물로 기도의 씨를 부린다는 게 어떤 뜻인지, 보시겠습니다.
※한국교회는 원래 기도를 많이 하는 교회입니다마는 안으로 밖으로 마귀들이 교회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세력이 많습니다. 참 보면 너무도 통곡할 지경입니다. 이것은 힘으로 내 눈물로도 안 되고 오직 성령으로만 될 수 있는데, 성령이 우리 앞에서 막아주고 쌓아줘야 되겠는데 그 혁명의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교회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주기철 목사가 감옥에 들어가서 선교를 기다리고 있을 때 일본 경찰에게 부탁해서 최선 교회 설교하기 에서 나와서 설교를 했습니다. !!~~ 기도용사가 되어야 한다.
 
-Prayer, more prayer, much prayer-빌리 그래함 목사- 프레이어, 모어 프레이어 마치 프레이어!!!
오늘 오후에 저희들은 청계산에 갈 것입니다. 반드시 소망을 가지고 올라가기를 바라는 것이 그럴 때 하나님은 어떻게 역사하실지 한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얍복 강가의 기도의 씨름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통절하게 가슴 아파하는 과부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셔서 여러분 개인도 살리고 우리 교회도 살고 민족도 살리는 우리나라 좋은 나라 될 수 있도록 은혜 주실 주님을 믿고 순종하고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두 손을 펼치고 하늘 문이 열리고 은혜의 밑줄기 기도에 불이 떨어지게 하여 주십시오. 능력이 나타나게 하여 주십시오. 평생 소원하는 기도가 응답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자리가 천계산 예고편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런 마음을 우리가 찬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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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3년 8월 12일)
제목: "믿음의 기반"
말씀: 고린도전서 2:1-5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대표기도: 김도훈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이충희 목사님-초빙(Blessed International 교회)
ㅡㅡㅡㅡㅡㅡ

*고린도전서 2:1-5,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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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할렐루야. 여름 토요 성령 집회 그 여섯 번째 시간 함께하시는 모든 영 가족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1절부터 5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제가 가진 성경으로는 신약 264면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절부터 5절까지의 말씀 그 말씀을 우리가 한 절씩 교독하고 마지막 절은 합독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 말씀입니다.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오늘은 미국 la 블래스트 인터네셔널 처치를 섬기시는 우리 라이언 이충희 목사님께서 “믿음의 기반” 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 주시겠습니다. 목사님을 보내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박수로 올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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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희 목사님-초빙(Blessed International 교회)
네 감사합니다. 제가 12살 때 미국에 이민을 가가지고 어느새 40년, 4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때 당시에 변호사가 돼서 흔히 우리 부모님들이 좋아하시는 ‘돈을 많이 버는 장로가 되자’ 이렇게 생각을 했었는데, 그때 우리 오정현 목사님을 제가 청년 시절 때 만나면서 이렇게 목사로 헌신을 하게 됐습니다. 어떨 때는 오 목사님이 좀 미안해하실 때도 있는 것 같은데 사실 저에게는 큰 축복입니다. 아멘!!. 목사가 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제가 지난 40년, 몇 년 동안 이렇게 미국에서 살아왔는데요. 물론 저희 부모님들의 사랑과 헌신이 있었고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지만 저는 오 목사님한테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목사님을 거의 30년 이상 제가 옆에서 지켜봤는데 진짜 사랑의 교회 담임 목사님이신 게 확실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목사님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사랑의 교회에서 쭉 있다가, 남가주사랑교회에서 쭉 있다가 성령 체험을 하고 주위에서 이제 다민족 성경 사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제일 처음에는 성경 은사들도 잘 모르고 성령님, 깊이를 잘 몰랐는데 그동안 지난 한 20년 동안 하나님께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어요. 그러다 보니까 이제 성령 사역을 한다고 그러니까 주위에서 힘들어하시는 분들이 많이 저희들을 찾아오셔서 기도를 받으세요.

예를 들어서 자녀들이 마약 중독 때문에 벗어나기가 어려운 분들도 있고 부부 관계가 어려운 분들도 있고 그리고 또 저희들이 저랑 저희 와이프가, 이제 약 30개국을 돌아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또 사역을 하는데 사역할 때마다 그런 어려운 분들이 찾아와서 기도를 봤습니다. 특별히 악한 병에 걸린 사람들이나 불치의 병 걸린 사람들이 찾아와서 기도를 받을 때가 많은데, 한 번은 제가 퍼토리골을 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말씀을 전하고 사람들이 이렇게 쭉 줄을 서서 기도를 봤는데 어떤 여인이 자기 남편이랑 울면서 저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기도 제목이 뭐냐고 이제 통역관을 통해서 물어보니까 자기는 고아로 어렸을 때 컸기 때문에, 일평생 원하는 것은 가정을 갖는 것을 원했는데 지금 결혼한 지가 20년이 됐는데, 유산을 벌써 8번에서 9번 했고, 아이를 못 갖는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 마흔이 넘어가는 나이에 들어섰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을 들었을 때 과연 내가 이분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를 해줘야 되는지 이런 고민들을 한 적이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이런 많은 분들이 찾아왔을 때 이런 고민들을 갖고 찾아왔을 때, 제가 이런 고민을 혼자 많이 해봤어요. 물론 모든 게 병 고치는 것과 병 낫는 것 이런 게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안에 있지만 나로서 하나님과 어떻게 최선을 다해서 파트너 십을 할 수 있을까? 그거를 놓고 많이 고민하면서 제가 깨달았던 게 바로 오늘 이 성경 말씀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이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충만한 교회였어요. 그런데 이 교회에 그렇게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많았는데도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여기 보니까 다툼과 분열 분쟁이 생겼다고 얘기를 합니다. 1장에 쭉 보면 나는 바울에게 속했다는 사람들도 있고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다는 사람들도 있고, 나는 개바에게 속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을 쭉 보면 그런 분열에 대해서 얘기를 합니다. 하나님은 정말 강력한 방식으로 성령님을 부어주셨고, 그전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사 안에서 작용하는 하나님의 강력한 도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쁜 일이, 안 좋은 일이 교회 안에서 생기고 있었다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마귀에게 속아서 경쟁심과 분열 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을 할 수가 있을까요? 절대 이 사랑의 교회에서는 이런 일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아멘. 경쟁, 시기, 질투 이런 일이 있으면 안 되죠. 그런데 그때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냐면 그리스와 로마 세계 그 당시에는 순회하는 철학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소피스트였으며 종종 내용보다는 프레젠테이션이 더 세련됐는지 안 됐는지 거기에 더 관심을 많이 갖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렇게 하다 보니까 실제 그 사람들한테 중요했던 것은 본질이 아니고 스타일이었습니다. 스타일 누가 더 많은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을까 그 스타일이 그 사람들한테는 더 중요했던 것이죠. 근데 이런 사회에서 살다 보니까 어느새 이 고린도 교인들도 자기네들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세상적인 생각들이 교회에 스며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세상적인 지혜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2장, 3장을 보면 지혜에 대한 많은 얘기가 있는데 거기에서 나오는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적인 지혜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적인 지혜를 추구하다 보니까 본질을 점점 잃어가고 그 스타일을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나는 바울이 좋아. 바울은 아주 간단하게 파워풀하게 설교를 하고 설교를 할 때마다 이적들이 따르고 병도 낳고 그래. 그럼 반대쪽에서는 바울은 너무 지루하고 길게 설교해가지고 그 유두고 알잖아 유두고 그냥 밤새 끊지 않고 그냥 설교해가지고 유도고가 떨어져서 죽었잖아. 막 이런 얘기도 하고, 서로 이렇게 스타일이랑 겉면에 있는 거,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것에 포커스가 되기 시작하니까 이 본질을 잃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외적인 것, 물질적인 것, 육적인 것들 세속적인 것 이런 것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면 마귀가 들어와서 교회에 혼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아멘. 그래서 다툼이 심하고 그래서 저도 이렇게 교회를 보면서 또 저도 설교자로서 담임 목회자로서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은 이런 것을 방치하고 어떻게 하면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 요즘에 인터넷에는 이제 많은 목회자들의 설교가 있죠. 그러면 흔히 성도님들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어떤, 어떤 목사님은 말씀을 진짜 잘 쪼갠다고 그런 말씀 들어 보셨어요? 근데 저도 그래서 이제 한 번 들어봤어요. 나도 이제 배워야 되니까 근데 어떤 목사님들은 말씀을 쪼개고, 쪼개고, 쪼개다 보니까 남는 게 없더라고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근데 여기에서 보면은 사도 바울이 얘기하는 게 뭐냐 하면은 나는 유창하게 설교하는 게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십자가를 알고, 십자가의 돌을 프리치하는 게 나한테는 중요하다고 사도 바울은 2장에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우리의 믿음을 두어야 된다고 얘기를 하고 계신 것이죠. 인간의 지혜는 우리가 정복해야 하는 것, 주로 죄와 결과를 정복할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도, 하나님의 지혜만이 그런 것들을 정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2장에 복음 메시지의 핵심, 그 중심 성을 얘기하면서 우리가 다시 그 십자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돌아가야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그 십자가에서 나오기 때문이었다는 것이죠. 아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거기에서 살아나신 그 십자가에서만이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점점점점, 우리가 십자가에서 멀어지면은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아멘.

저도 설교자로서 그래서 이 지혜가 아닌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가지고 교회에 오는데 어떻게 하면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기반으로 십자가를 기반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지, 고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좀 설교를 아름답게 해보고도 싶고, 말도 좀 유창하게 해보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요. 제가 중고등부 사역을 오래 하다 보니까요. 애들한테 얘기하는 것처럼 얘기할 수밖에 없게 그거는 잘 되는데, 어른들처럼 유창하게 잘 안 되더라고요. 그런데 결국 이 말씀을 통해서 제가 위로를 많이 받습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로 돌아가서 그 십자가의 능력이 결국은 교회에 있느냐? 없느냐? 이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나는 우리의 주요 임무가 그 십자가의 메시지를 전하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고요. 그 메시지에 힘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성령님의 사역 그리고 말씀의 사역으로 이렇게 나눠서 얘기할 때가 있어요. 말씀 사역하는 교회, 성령 사역하는 교회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생각해 보면 성령 사역이 말씀 사역이고 말씀 사역이 성령 사역입니다. 아멘. 뭐냐면 결국은 말씀은 누가 쓰셨습니까? 성령님이 쓰신 거고, 말씀을 다 보기 위해서는 성령님이 필요하고 또 말씀을 보고 묵상을 하다 보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시는 거잖아요. 그래가지고 저는 이 성경 사역, 사람들이 얘기하는 성경 사역을 하다 보니까요 진짜 사람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고 성령님이 임하시면 말씀 중심으로 삶이 변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이제 그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잖아요. 진짜 이게 성령님이 임하셔서 하는 일인지, 아니면 마귀가 카운터 핏을 하는 것인지 그 열매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셔서 하는 일들은 사람들을 그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게 해요. 말씀의 핵심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요한복음 14:26,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아멘. 무슨 말씀입니까? 성령님이 오시면 성령님은 말씀으로 모든 것을 초점을 맞추고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춘다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의 핵심은 뭡니까? 십자가라는 거죠. 아멘. 16장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16장 요한복음 16장 13절부터 14절.

*요한복음 16:13-14,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유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내 일을 너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아멘. 결국 성령님을 알고 성령님을 체험하고 성령 충만함을 받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게 되고 내 삶 가운데서 예수님이 나타나고 내 삶 가운데서 십자가가 나타난다는 것이죠. 아멘. 그러면 그 십자가가 어떻게 나타날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성령님은 우리 상기케 하시고 다시 기억나게 하시고 그것을 그 말씀을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저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구원을 받는 은혜가 아니라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을 때는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이겨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은혜가 그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는 말씀을 순종하면 순종할수록 그 은혜를 더욱더 경험하고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죠. 아멘. 그래서 예수님께서 결정적인 얘기를 누가복음 9장 23절에 하시죠.

* 누가복음 9:23,
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우리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려거는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뭐라 그러십니까?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아야 된다고, 예 결국 뭐냐 하면은요 우리가 말씀의 핵심인 십자가로 돌아가서, 십자가를 사모하고 사랑하고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우리가 살아갈 때에는 성령님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삶 가운데 나타난다는 거예요. 아멘. 아멘이 조금 소리가 적은 거 보니까 아직 그 삶을 안 살고 계신 분들이 있나 본데요. 오늘 그 삶을 사시면서 성령님의 그 능력에 나타나심을 경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아멘.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십자가를 사모하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갔을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저도 목사로서 또 사역자로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하나님과 파트너를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내가 매일매일 깨어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육신을 죽이고, 십자가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그 팩트를 그 진실을 가지고, 매일매일 살아나갔을 때, 그 십자가의 능력이 거기에서 나타난다는 거예요.

하루는 저희 교인이 저한테 연락이 왔는데 자기 아들이 이제 한 40대 중반 청년이라고 그러긴 그렇고 아저씨인데, 40대 중반 요새는 뭐 60대 70대도 청년이라는 소리를 많이 하더라고요. 근데 40대 중반 아저씨가 이제 자기 아들인데, 갑자기 이 암이 걸렸다고 연락이 왔다고 근데 그래서 이제 암 3기가 됐는데, 이 피부 피부암이 있죠, 스킨 캔슬, 스킨 캔슬인데 그게 이제 완전히 레어 포 스킨 캔슬, 아주 특이한 스킨 캔슬에 의해서, 키모드 받을 수 없고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그렇게 이제 의사가 얘기를 했다고 그래서 저한테 연락이 와서 그럼 데리고 와라. 그래가지고 이제 같이 기도를 하자. 그래서 우리 저랑 우리 와이프랑 또 우리 교회 치유하는 사역자들이랑 같이 기도를 하는데, 제일 처음에 제가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 아무게씨는 예수님을 믿습니까? 교회를 다니십니까? 그러니까 이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자기가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었는데, 지난 한 10몇 년 동안 교회를 안 다녔다고 그래서 왜 교회를 안 다니시게 됐습니까? 그랬더니 자기 라이프가 자기의 삶이 괜찮았었는데 갑자기 자기 사랑하는 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이 티네이저가 되면서 자기는 동성연애자라고 발표를 했대요. 그래가지고 이 아버지가 마음에 너무 큰 상처를 입은 거예요. 미국 사람인데 그래가지고 근데 자기 아들을 너무 사랑은 하는데 성경은 동성연애자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를 합니까? 죄라고 얘기를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맞지가 않으니까 자기 안에 이제 고통이 있고 스트로글이 생긴 거예요. 왜냐하면 동성연애의 삶을 사는 사람은 결국은 회개를 안 한 사람이기 때문에 천국을 갈 수가 없잖아요. 근데 자기가 너무 사랑하는 아들인데 그 아들이 천국을 갈 수 없다는 것을 자기가 믿고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던 거예요. 그래가지고 동성연애를 그래도 이렇게 지지하고 믿는 교회도 다녀봤는데 아무리 달려봐도 자기가 성경을 읽으면 이거는 죄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계속 느끼니까 더 이상 교회를 못 다니겠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10년 전에 교회를 떠났다고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성도님, 힘드신 건 알지만 교회를 떠나시면 절대 안 됩니다. 교회로 다시 돌아가셔서 아들을 위해서 중보를 하셔야지 교회를 떠나면 그거는 성도님한테도 안 좋은 거고 아들한테도 더 안 좋은 거라고요. 아드님이 다시 예수님 앞으로 돌아올 가능성을 위해서 그 가능성이 만약 있다면 성도님이 금식을 하시면서 기도하셔야 된다.”고 회개하시고 먼저 돌아오셔야 된다고 그랬더니 눈물을 흘리시면서 우시더라고요. 내가 우리 아들을 너무 사랑해서 그런 잘못된 판단을 했다고 그러면서 그 자리에서 회개를 하시고 다시 예수님한테 자기 삶을 드리고 같이 기도하고 그 병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그 아들이 올바른 판단을 하고 진리를 알고 예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같이 기도를 했어요. 그리고 기도를 하고 이제 집에 보냈는데 3주 후에 연락이 왔습니다. 3주 후에 이제 병원에 다시 암의 상태를 보기 위해서 갔는데 ct 스캔을 찍어봤더니 암이 싹 다 없어져 버렸더래요. 할렐루야!!! 아멘. 저도 너무 감사하고 놀랐어요. 제가 뭐 특별히 한 것도 없고요 다시 그분을 십자가로 앞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초점을 맞춰준 것였고 성경이 말씀하는 그대로 병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 그러잖아요. 그 기도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역사가 또 일어나서 저한테도 너무 감사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보고 그 십자가의 삶을 살면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그 부활의 능력이 우리 삶 가운데서 나타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그런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제가 한 번은 성경을 읽다가 이제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그 장면을 보면서 마리아가 이제 예수님의 시체를 보러 가죠. 근데 이제 주일날 아침에 갔더니 시체가 없고 천사들만 있었고 거기서 울면서 있는데 요한복음 20장에 이런 말씀이 나오는데 울면서 거기 있는데 그때 예수님이 바로 자기 옆에 나타나신 거예요. 그런데 요한복음 20장 14절에 이렇게 말씀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20:14,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인 줄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의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 지기인 줄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든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다.
-마리아가요 그 장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옆에 서 계신데 모르는 거예요. 그 동산 지기인 줄로만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갑자기 성령님이 제 마음에 이런 마음을 주신 거예요. 오늘날 너무나도 많은 성도님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옆에 계시고 우리 안에 살아계신 거를 모른다고,,, 그래가지고 우리가 이런 찬송을 하잖아요. 살아계신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이렇게 찬양을 하고 집에 가서는 걱정 주심을 하시잖아요. 교회에 와서는 막 짐을 싸가지고 와가지고 자기 문제 다 풀어놓고 기도하고 걱정 근심 다 풀어놓고 거기까진 좋은데 그걸 또 다시 다 싸가지고 짊어지고 간단 말이에요.

♬살아계신 주가 내 옆에 있고 내가 살아있으면 사실 우리는 걱정 근심이 없어야 된다는 게 맞는 말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찬양을 하고 그런 고백을 하는데 아직도 우리가 살아계신 주님을 잘 모른다는 거예요. 경험을 많이 못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는 그 살아계신 주님이 내 옆에서 나를 최선의 길로 인도해 주실 거라는 것을 아직 믿지를 못하고 있어요. 조용한 거 보니까 좀 찔리시는 부분들이 있으신가 봐요. 제가요 이제 50대 들었으니까 흰머리들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40대 한 중반부터... 그러니까 이제 저희 딸이 저를 너무너무 사랑해가지고 머리를 이제 흰머리가 보이면 하나하나씩 뽑아주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아빠 오늘도 두 개 뽑았다 그러고 이렇게 뽑는데 이제 어느 날 보니까, 더 이상 안 뽑더라고요. 그래서 야! 딸아, 이리 와서 머리 좀 뽑아줘. 그러니까 더 이상 뽑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너무 많아가지고 아빠 포기해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뒤쪽으로 좀 하얀 머리가 있는데, 포기를 했는데 근데 가끔 가다 신경이 쓰여요. 내가 뒤쪽에 있으니까 흰 머리가 몇 개가 있는지를 알고 싶은데, 모르니까 그래서 하루는 그걸 갖고 이제 생각을 하는데요. 여러분, 제가 흰머리가 제 머리카락 안에 몇 개가 있는지 전 잘 모르지만 누구는 아시겠어요? 하나님은 아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아시거든요. 오늘도 이제 좀 이렇게 저도 이제 저희 아버님이 이제 머리카락이 많이 없으시기 때문에 또 그런 것도 걱정이 되더라고요. 샤워할 때 머리카락이 빠지면 혹시 오늘 몇 개나 빠졌을까? 저는 몰라도 하나님은 정확하게 아십니다. 이게 무슨 얘기냐 하면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얼마나 아는지에 대한 한계가 있어요.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신다는 겁니다. 아멘. 그런데 보세요. 이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13,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그럽니다. 무슨 얘기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짐을 안 주신다는 것이죠. 아멘. 그러면 이거를 반대로 생각해 보면 무슨 뜻이냐면 어려운 시험이 우리한테 다가왔을 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뭐라고 얘기를 하시는 거냐면 이 시험은 네가 충분히 감당할 걸 난 안다 이거예요. 너는 모를 수 있지만 나는 너를 알아. 너는 니 믿음으로 나와 함께 이 시험을 감당할 수 있어. 라고 하나님께서는 얘기하신다는 거예요. 그 살아계신 하나님이 옆에서 이렇게 음성을 들려주시고 우리랑 함께하시고 우리가 모든 것을 승리하고 이길 수 있는 그런 삶을 살 수 있게 다 해주셨는데요. 아직도 우리가 어떨 때는 패배자 같이 살고 있고요. 낙심하면서, 실망하면서 그러다 보니까 요즘에는 디프레션이 많더라고요. 우울증, 조울증 그렇죠. 저희 사역하는 데도 우울증 때문에 조울증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고 참 힘든 사람들이 많아요. 특별히 어린 학생들 중고등부 학생들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공부를 하다 보니까 그런 우울증에 빠지는 학생들이 종종 있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부모님들 보고 다 그런 사람들 저희 교회 데리고 오세요. 그래요 왜냐하면 저는 이 십자가의 능력을 믿거든요. 그 사람들이 십자가 앞으로 돌아오고 그 십자가의 삶을 살면 그 사람들 삶 가운데서 그 능력이 나타난다고 저는 믿어요. 아멘. 그리고 실질적으로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상황에서 아무 약도 안 먹고 이제 그 우울증이나 조울증을 이겨낸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죠. 저희들은 이 복음의 단순성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그런 믿음으로 살아야 되고 사람들을 십자가로 인도해야 됩니다. 그러면은 성령님이 임하시고 말씀이 살아서 우리 삶 가운데서 운행을 하시면요. 그 말씀이 살아서 운행하시기 때문에 능력이 나타날 수밖에 없어요.

제가 오 목사님을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봤는데요. 사모님이랑 거의 이렇게 다투시는 적이 한 번도 없으신 것 같아요. 너무너무 거룩하셔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사실 뭐 목사들이야 이렇게 다투면 안 되죠. 그렇죠? 우리가 좀 이렇게 열정적인 토론의 시간은 가질 수 있어도,,, 그런데 제가 이렇게 우리 와이프랑 그런 열정적인 토론의 시간을 가지면 성령님이 꼭 찾아오십니다. 꼭 찾아오셔서 저보고 그래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내 아내를 사랑하라 그럼 싫어요. “저는 그리스도가 아니에요.”여자 분들도 마찬가지잖아요. 그쵸?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이 복종을 하라고. 사실 성령님께서 말씀하신 것만 우리가 다 지키잖아요. 이 말씀에 쓰여 진 것만 다 지키잖아요. 그러면은 부흥이 우리 삶 가운데 일어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성령 충만은 말씀 충만 이고, 말씀 충만은 성령 충만 이기 때문에 거기서 능력이 나타나는 거예요. 목사님 목사님은 제 상황에 안 들어가 보셨기 때문에 몰라요. 우리 남편 이상한 사람이에요. 저보고 찾아와서 그런 얘기를 하는 분들이 있어요. 저희 교회에서도 우리 남편은 마귀인 것 같아요. 막 이러고,,,그럼 저는 뭐라 그러는지 아세요? 자매님 남편을 예수님 섬기듯이 한번 섬겨보세요. 사랑해 보세요. 가면 다시는 상담을 안 오더라고요. 근데 그게 키 인데 그게 키 인데 그 남편을 용서하고, 남편을 사랑해주고 그게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게 성령 충만한 성령 사역이고 말씀 사역이고 말씀이 살아나는 게 능력이 나타나야 되잖아요.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우리 자식들이 우리를 봤을 때도 엄마 아빠가 맨날 싸우고 다투고 교회는 다니고, 장로님이시고, 권사님이시고 그런데 맨날 싸우고, 다투고 그러면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 능력이 안 나타나잖아요.

제가 중고등부 때 있을 때 사역을 할 때요 제가 중고등부 학생들한테 이런 얘기를 꼭 했어요. 엄마 아빠가 싸우면 그 앞에 그냥 엎드려서 기도를 하라고 통성으로 기도를 하라고 주여 이 죄인들을 용서하시옵소서! 아니 목사님 그러다 맞으면 어떡해요? 보기 힘든 차는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다고 괜찮아 더 큰 상금이 있을 거야. 아이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그거거든요. 사실 부모들이 자기 앞에서 싸우는 거 그런데 그게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산다면 이런 거 완벽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노력은 해야 된다는 거죠. 그리고 그렇게 살면 우리 삶의 다른 분야에서도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분야에서도 그 능력이 나타난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아파 그러면 아프면 그냥 기도해. 기도하는데 그 능력이 나타날 수가 있다는 것이죠. 저희 교회 제일 처음에 이제 성령님이 임하시고 이제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 많이 기도하고 그러는데 어떤 학생이 저를 찾아와서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자기가 최대한 성령님 충만으로 살기 위해서 말씀을 그렇게 많이 읽었대요. 그리고 순종하려고 노력을 많이 하다 보니까 너무너무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는데 자기 어머님이 갑자기 유방암이 재발하신 거예요. 그래서 그게 폐까지 퍼져가지고 2주 안에 이제 수술을 하셔야 된다고 그래가지고 그거를 놓고 자기가 막 열심히 기도를 했대요. 새벽에 이 16살짜리 아이가 새벽에 혼자 일어나서 4시, 5시에 일어나서 몇 시간씩 자기 엄마를 위해서 기도를 한 거예요.

그런데 하루는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자기 오른팔이 찌릿찌릿하면서 무슨 전기가 오는 것 같더래요.그래서 이게 심상치 않아서 성령님이 무슨 사인을 주는 것 같아서 그냥 어머니 주무시는 데 가서 그 발에다가 이 손을 놓고 기도를 했대요. 그리고 이제 어머님이 일어나셨을 때 엄마 이런 일이 있어가지고 기도했는데 엄마가 나을 것 같아 그랬더니 에이 쓸데없는 얘기하지 마 이러시더래요. 근데 2주 후에 병원을 가서 ct스캔을 이제 수술하기 전에 ct 스캔을 했는데 이 유방에 있던 암은 싹없어졌더래요. 그리고 폐에 약간의 뭐가 있어가지고 수술을 하기 위해서 그 폐를 오픈했는데 그것도 없어져 버렸더래요. 이게 어떤 목사가 기도한 것도 아니고 장로님이 기도한 것도 아니고 16살짜리 어린 소녀가 자기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했는데 그런 능력이 나타났다는 거예요. 이 성경의 말씀은 남녀노소 상관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사모하고 그 삶을 사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그런 능력이 종종 나타난다는 거죠.

제가 이제 말씀을 매듭짓겠는데요. 페도 있고 그 기억나시죠? 20년 동안 아이를 부 저는 부임 때문에 힘들어하시는 분들을 너무나도 많이 기도했는데, 다들 그냥 아이를 가졌으면 좋겠지만 한 그래도 많이, 많이 하나님께서 저를 도구로 쓰셔서 불임한 자들이 하고 불임 때문에, 어려웠던 자매님들이 아이를 가진 분들이 참 많아요. 근데 이 스토리가 저한테는 제일 큰 스토리였어요. 그래서 저도 이제 그렇게 울길래 와가지고 울길래, 그냥 잠깐 그냥 기도해서 축복의 기도나 해주자 위로의 기도나 해주자 이거는 내가 생각해도 20년 동안 유산을 8번 9번이나 했는데 이게 가능할까 막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손을 얻고 기도를 하는데 성령님이 제 안에서 아주 큰 음성을 들려주셨어요. “선포하라 금년 말까지 이 자매가 아이를 가질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게 이게 뭐야 이거 마귀야 물러가라 막 별 생각이 다 나더라고요. 왜냐하면 이게 상식적으로는 이게 말이 안 되는 얘기잖아요. 그래서 그리고 괜히 이상한 얘기했다가 괜히 이 교회 초청 또 다시 못 받으면 안 되니까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고 그냥 계속 기도했는데 또 한 번 울리더라고요. “선포하라” 금년 말까지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그래서 내가 이제 그 자매를 놓고 이런 음성이 들리는데 한번 같이 기도하자 남편이랑 일단 배에다 손을 넣고 혹시 용서할 사람들은 다 용서해야 된다. 용서를 못한 것 때문에 성령님의 이게 운행 말씀의 운행하심이 끊길 때가 있거든요. 그래서 용서할 사람은 다 용서하고 우리 같이 기도하자 기도했어요. 이제 한 4~5개월이 지났는데 그 목사님한테 와서 저한테 이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 목사님이 그 자매가 4개월 임신이 됐다고 처음으로 3개월을 지난 거래요. 그러더니 결국은 아이를 낳고 또 그 첫 아이를 낳은 다음에도 힘들었는데 둘째까지 낳았어요. 이게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특별히 뭐 그렇게 하실 분들은 그렇게 하셔도 되는데, 특별히 산에 올라가서 40일 금식을 하고 뭐 다 그런 거 하셔도 좋긴 좋습니다. 그런데 매일매일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 거기 안에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시면 사실 나타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성령님은 분명히 우리 말씀을 순종하게 만드시고 그 말씀을 순종함 안에서는 엄청난 능력이 있기 때문에, 기적과 이적이 나타나고, 병이 낫고, 귀신이 쫓겨나가고, 우울증이 쫓겨나가고 이런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멘, 아멘!!

♣요약
하나님께서는 우리 옆에 서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시면서 도와주시길 원하시듯이 같이 파트너 십으로 그 어려운 일들을 해결하시고 승리하게 해 주실 줄 믿고 그 믿음을 가지고, 오늘 같이 기도를 해야 한다. 첫째로 용서하시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다 용서를 하여야 한다. 특별히 고부 관계, 부부관계, 자식들이 잘못한 것들, 다 첫째 용서를 하고, 그다음에 이제 그 어려운 일들을 위해서 같이 기도를 간절히 기도를 해야 한다. 그 말씀의 핵심인 십자가의 도로 돌아가서 그게 신앙의 기반이 되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나갈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불임도 해결되는 것처럼, 믿고 선포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우울증, 조울증도 해결주실 줄 믿고 선포하여서 어떤 일이 닥칠지라도 우리 위대하신 하나님보다 더 크신 분은 없으니 주님께서 모든 일을 해결해 주시고 최선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 체험하기를 소원한다. 광복주일을 맞아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우리 모든 성도들이 청계산 산상 구국기도회 현장이 갈멜산이 되어서 나라와 민족, 한국교회가 부흥의 세대가 되고, 이번 제 25회 세계스카우트 잼버리가 우리 교회에 초대됨에 감사함을 가지고 우리 나라와 세계가 한 마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되고 헌신하여 다음 세대를 키우는 변화의 마중물이 되기를 소원하자.
-전도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련해 보이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전도의 능력은 인간의 능력이 아닌 성령의 인도하심과 함께 기도가 있어야 나타나게 된다. 또한 자신에게는 그 능력이 없다는 철저한 겸손함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는 기도를 통하여 주어진다.


▶담임 목사님 마무리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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