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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3년 9월 17일)
제목: "고통에서 믿음으로 가는 길"(1부)
말씀: 마가복음 5:21~24, 35~43
찬양인도: 쉐키나(이다니엘 부목사님),영광찬양대
대표기도: 장은진 부목사님(1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시지 삐레이라 깔데스 목사님)-초빙-브라질 멕켄지장로교단 총재(1부)-통역 조영규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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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5:21~24, 35~43,
*마가복음 5:21~25,
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마가복음 5:35~43,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좋은 아침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제가 이곳에서 여러분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함께 묵상하는 것이 저에게는 큰 영광이 됩니다. 먼저 감사드리는 것은 우리 오정현 목사님 저희를 이렇게 정중하게 환대해 주시고, 또 이렇게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먼저 저는 매켄지 장로교 대학교 153년 된 이 대학교의 이름으로 여러분들한테 문안을 드립니다. 그리고 특별히 저희가 150주년을 맞이해서 맥켄지 장로대학교에서는 오정현 목사님에게 명예박사를 받을 수 있는
그런 귀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오정현 목사님도 저희 매켄지에 대한 일원이십니다. 아멘.

저는 참 먼 데서 왔습니다. 불행하게도 저는 여기 한 분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리오데 자르에서 전용 비행기를 타고 뮌헨을 거쳐서 이에서 다시 이렇게 왔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동안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도대체 여기 와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때 저에게 확 떠올린 것은 바로 다름 아닌 그것은 바로 나, 역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제자이기 때문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기 때문에 일맥상통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로 하여금 이것을 목격했고 제가 아무도 모르는 사람 같지만 사실 이것이 저로 하여금 이 강단까지도 친근함을 주고 여러분들과 함께 말씀을 나눈 것이 우리가 한 형제임을 다시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유, 이 한 가지 때문에 우리는 이 자리에 함께 모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그 삶에 대해서 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에 대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잘 알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해변을 중심으로 해서 사역하시고 여러 가지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예수님은 이 땅의 생애에 있어서 갈릴리의 그 광경을 통해서 여러 가지 일들을 활동했고 사역했던 것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해 주셨고, 그 예수님이 치유한 것 때문에 예수님은 질책을 받았고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았습니다. 특히 이 전에는 이 사람들이 돼지 떼를 잃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람들보다 돼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내가 여기서 자리를 옮겨야 되겠구나!...

그리고 내가 꼭 내가 만나야 할 사람들, 나를 만나야 할 사람들을 향해 내가 말하겠다. 바로 오늘 이 장면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죽음을 맞이했으니까요. 여러분이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 주변에 있어 우리는 죽음을 늘 대면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여기도 분명히 많은 성도님들이 죽음에서 또 죽음 같은 그런 상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 이유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 삶속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 우리를 죽음으로 끌고 갔으며, 그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앞에 만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도를 받게 되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바로 오늘 읽은 본문에서 바로 죽음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던 그 장면입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으로 찾아간 사람입니다. 먼저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 사람은 지금 말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환란 속에 처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사랑하는 딸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외향적이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는 고난과 환란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에서 오신 것은 단순히 우리의 고통이 사라져버리고 우리의 모든 문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우리가 고통과 환란과 역병을 통해서 어떻게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 생명의 길로 찾아가는 것인지, 인도되는 것을 밝혀준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환란과 고통은 우리의 인생을 허무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로 하는 환란과 역경과 고난은 생명을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알아갑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이 환란과 역경 속에서 예수님 앞에 더욱더 가깝게 나가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로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여기에 김장 이문은 바로 그 회당장입니다. 그 회당에서 리더급 되는 야이로의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은 종교인이고, 그 주변에서는 인정받는 사람이고, 그는 월납 사람으로서 정말 율법을 잘 아는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심지어는 자기의 위험과 자기 자격과 자기의 체면까지도 다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그는 믿었습니다. ‘나는 이분을 꼭 만나야 된다.’ 기쁘게 만나야 된다. 용기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은 늘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담대하라 용감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늘 우리 얘기한다. 담대하고 기다려라.

여러분, 이 담대함이 사실 우리는 표현되어지고 사람들한테 보여줄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야이로는 자기의 불안과 환란을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세 가지 모습으로 드러냅니다. 오늘 저 마침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제 야이로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여러분 누가 꿈을 꿨습니까? 이 사람 겸손한 사람입니다. 누가 무릎을 꿇습니까? 자기가 이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무릎을 꿇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협과 능력이 확실한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사위로는 예수님과 대화를 했습니다. 이 야이로는 적극적으로 예수님과 대화를 했습니다. 그는 한 아버지로서 죽어가는 자기 딸의 그 형편을 인정했고, 그것을 이실 직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새로운 변화를 일으켜 주실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가정에서 자기 가족 중에 자기 딸의 죽음에서 살아나야 하는 일을 직시하고 그것을 인정하고 예수님께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주님을 찾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주님 앞에 드러내야 할 것이 무엇인가? 내가 이토록 주님을 간절히 찾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이렇게 주님을 만나야 하고 드러내야 할 말씀의 이유는 무엇인가? 야이로는 예수님을 좋아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인정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찾아가고, 예수님과 대화하는 것은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의 딸이 살아날 것을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조심해야 될 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무의식 속에서 이것은 좀 부정적인 생각과 힘든 건데 이것은 어려운 건데 이런 무의식적인 부정적인 생각을 없애야 합니다. 우리는 무의식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그 주변의 환경과 역경을 통해서 생각합니다. 나한테는 도무지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길이고, 나한테는 일어날 수 없는 길이며, 나는 안 되는 사람인가 보다. 라고 하는 그 생각을 없애야 합니다.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믿음은 삶까지도 움직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기의 고통과 환란을 인정하고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담대하십시오. 그 싸우기 전과 너무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는 담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우리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마당을 통해서 이 장면 속에서 이 사람 통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그를 인도하는지 아주 그것을 단계적으로 잘 보여주고 계십니다. 35절 이하부터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그때서부터 예수님은 이제 야유의 집으로 사랑하시고 그 집에 있는 모든 문제를 변화시키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잘 아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저쪽 편에서 배를 타고 오셨습니다. 해변을 내리셨습니다. 그때 야이로는 그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우리는 잘 알다시피 야이로는 정말 예수님을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의 길을 향해서 가고 있는 도중에 이 중간에 정말 불청객이 뛰어들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은 예수님은 마침내 그 회담장 야이로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에 들어가 있는데 여기에 보면 거기에 벌써 어떤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야이로의 집에 벌써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그 야이로의 집에 있었을까? 저는 잘 모릅니다. 우리는 그 이름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이 아이로와 그 가정과 굉장히 밀접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담대 하라! 그리고 믿어라! 그리고 그렇게 확신적인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야이의 집에서 온 그 전달자는 얘기 했습니다. “예수님을 더 이상 괴롭히게 하지마! 그렇게 하지 마라 더 이상 예수님을 귀찮게 하지 마라. 당신의 딸이 이미 죽었다.”

이것은 사탄의 공격이요 이거는 거짓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시간과 하나님의 그 간섭에 대해서 우리는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도대체 누굽니까? 우리가 누굽니까? 말하기는 이제 협상 방법이 없습니다. 이젠 난 안 됩니다. 당신이 누구 길래? 이런 확신이 당신의 경험이 얼마나 많길래? 이거는 안 돼. 나도 해봤어 이제는 이거는 안 되는 일이야 세상을 봐 이것을 봐 이건 도무지 안 돼 당신이 보내신 누구 이길래?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또 여기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한테 더 이상 예수님을 괴롭히지 마라. 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그런 말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치 예수님을 생각해서 얘기한 것처럼, 예수님을 귀찮게 하지 마라 당신은 벌써 이미 다 끝났다 하고 얘기를 하지만은 이것은 오히려 예수님이 마치 예수님을 알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어떤 능력과 한계성을 알고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완전히 상실한 것으로 하나님의 개입을 완전히 폐쇄한 것이며 그건 거짓말입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 것들이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이제는 제가 뭐가 바로 진짜가 뭐가 정말 정말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왜? 예수님이 그와 함께 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일어나는 일들이 아직 그 사건이 우리에게 부정적이고 그것이 불가능하게 보여도,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하리라. 36절에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야유에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5:36,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그것이 진짜입니다. 뭐가 진짜입니까? 담대하라. 믿기만 하라. 그대로 한다고 하시는 그 말씀이 정말입니다. 더 계속해야 할 것은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지금 우리의 머리를 얘기합니다. 니가 이해되는 것만 믿어라. 그리고 나의 경험을 봐라. 경험으로서는 무덤에서 돌아오는 사람이 없다. 우리의 감정은 완전히 우리의 감정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 상황과 분위기 모든 것들이 우리를 위축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바로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담대하라 그리고 믿어라! 내가 바로 너의 오직 한 소망이다. 내가 너의 길이요. 생명이다.”

이것은 우리가 브라질에서 부르는 찬양 찬송입니다.
♬절대로 낙심하지 마라 하나님의 모든 것을 얘기하신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기를 하나님이 날개로 너를 덮어주신다. 하나님께서 너에게 모든 것을 드러내신다. 하나님께서 너희의 고통 속에서 모든 것을 지켜주신다 내가 사랑으로 너를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널 지키실 것이다. ~~♪

그러나 여러분들 기억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들어가셔서 그 집에서 모든 사람을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삶속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사람들까지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삶 속에서 우리가 정말 밖으로 버려야 될 것, 벗어버려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회담장 야이로의 집에서 어떤 일들을 하셨습니까? 37절에 보면 예수님은 그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동반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5:37,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그 모든 무리들은 그 집에서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 집에 밀접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도 다 나라라고 했습니다. 거기서 모든 영향을 주는 사람들도 다 나가라고 했습니다. 내용 그 주님은 오직 그 야이로와 아내 그 부부와 그리고 자기의 새 제자 밖에는 없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자치 장례식은 다 끝났습니다. 이 구원의 핵심 구원의 다이아몬드 같은 핵심은 바로 죽음에서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간증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고, 어떻게 교회 생활을 하게 됐는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간증을 하다 보면 이런 것들로 그냥 우리는 습관화돼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전혀 새로운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또 이 중에 누군가는 오늘서부터 새롭게 정말 새 삶으로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모여 있는 우리들도 때로는 우리 가정을 우리의 삶을 청소해야 되고, 정리 정돈을 해야 합니다. 이제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새로운 길로 가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곳에선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랑의 권세를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그 야이로의 딸이 있는 곳에 들어오셨습니다. 그 두 손을 잡았으니 달리다굼! 이라고 얘기하셨습니다. 그 소녀는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12살 먹은 사춘기의 소녀가 일어났습니다. 모든 사람이 놀랐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참 경이롭고 거기에 대해서 정말 그 환희를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죽음의 마지막 단어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남아야 할 간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다시 새 생명을 얻었고, 그 구활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번에 영생을 갖고,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이 우리의 간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성도의 자기의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죽음을 향해서 창조되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은 여기서 마지막 장면을 보면 얼마나 친밀하시고, 아주 개인적이고, 적극적이었는지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말했습니다. 시편 25편 14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시편 25:14,
14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유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오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주님은 친밀하십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과의 그 친밀한, 긴밀한 그 교제를 누리셔야 합니다. 잘못하면 우리도 이 야이로 회장단 집에 있었던 그 죽음 때문에 모이고, 죽음 때문에 말하는 사람들처럼 살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돕는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늘 부정적으로 죽음에 쫓기고 있고 그런 생각을 갖고 살게 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여기 야외 회담장 집에 모여서 정말 통곡하고 울고 괴로워하고 하는 거 우리는 늘 우는 걸로만 표현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긴밀한 교제의 자리에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다 바깥으로 나가게 했습니다. 이제 그 과정에는 그 가정 사도만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제자들 또는 예수 그리스도 일도 있고 새 생명을 찾는 사람들만 거기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는 이제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사람들만 남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를 죽음의 상황에서 끄집어내어서 우리로 하여금 생명 새로운 삶을 살라고 그렇게 인도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야 할 믿음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의 가정을 청소해 주십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은 꼭 필요한 사람들을 우리 가정에 머물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 죽음은 쫓겨났어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생명을 주기 위함이며 풍성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드립니다.

♧요약
죽음 같은 고난이 닥쳐올 때, 사망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과 능력을 의지하여 모든 불신을 몰아내고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낙심하지 말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야이로는 어린 딸의 죽음이라는 심각한 문제의 해답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로 나아왔다. 이 문제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야이로는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주님이 오셔서 손을 얹으시기만 하면 죽은 자신의 딸이 살아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도 기도하며 믿음으로 예수님 앞으로 나아와야 한다. 이 길이 곧 문제 해답의 길이다. ‘달리다굼’의 의미 ( 5:41-42 )이 말은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는 뜻이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이적 중에서 죽은 자를 살리신 최초의 기적이다. 성도들은 믿음을 통하여 핍박과 환란 중에 도우시는 주님을 경험함으로써 위로를 받고, 부활의 소망으로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나가야 한다. 예수님께서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은, 육체의 죽음 후에는 부활이 있고, 예수님은 죽은 자도 살리는 신적 권능의 소유자이시며, 예수님 안에 있는 자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부활을 암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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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3년 9월 16일)
제목: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소명, 일, 축복"
말씀: 에베소서 2:8~10
찬양인도: 쉐키나(이다니엘 부목사님), 목양 5팀
대표기도: 김명규 안수집사님(목양5팀 남자대교구장)
말씀읽기: 최우진 학생(고등 1,2부), 김시온 학생(다니엘 중등부)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마우튼 클라비아 박사(브라질 멕켄지대학 이사장)
마무리 기도: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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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2:8~10,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ㅡㅡㅡㅡㅡㅡ
 
​▶담임목사님 소개: 오늘 이제 지금 이사장님 남편 밀턴 우리 마우라 박사님, 마우스 뉴턴 박사님 맞습니까? 유석 박사님이 이사장님이신데 2시간 고영규 목사님 잘 아시죠? 목사님 네 분 박수합시다. 설
 
오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소명, 일, 축복
짧은 시간이지만 완전히 여러분들 해결 받고 기도 제목 삼아가지고 여러분들의 소명과 일과 축복이 참으로 하나님이 부어 주신 축복의 현장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분 나올 때 박수로 환영하겠습니다
▶마우튼 클라비아 박사(브라질 멕켄지대학 이사장)
좋은 아침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시간에 함께 있다는 것은 자기의 큰 축복입니다. 제가 여기 있으면서 처음부터 마음에 여러분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것은 한 단어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예수라는 그분의 이름으로 그분의 평화와 은혜로 여러분에게 인사드립니다. 특별히 존경하는 오정현 목사님 그리고 당 회원들 장로님들 또 귀한 성도님들이 저희들을 이렇게 환대해 주시고 저희들이 이 자리에 설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특별히 오늘 굉장히 감동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정말 위대하고 정말 세계적인 성교적 사명과 비전을 소개한 교회의 강단에 서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이 세 단어를 오늘 같이 나누기를 원합니다. 저와 함께 나라에서 반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소명, 일, 축복!!!”
 
우리는 이 세 가지 중요한 주제를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이 세 단어는 저희 인생에 주가 되며 특별히 제 일상에서 제 현실적인 직장에서 제가 오늘날까지 살아오면서 저를 이끌어준 그러한 귀한 주제입니다. 저는 교회를 섬기는 한 30년 동안 교회를 섬기는 가운데 있을 때에 한 12년 전에 맥켄지 학교 재단에서 저를 이사로 초대해줬습니다. 제가 9년 동안 이사로 활동하고 있는 가운데 이 재단에서는 저를 맥킨지 대학 이사장으로 그렇게 초대해 주었습니다. 저는 100여 명이 넘는 이 교육기관에 이사장으로 제가 사역하고 있는 것은 지금 2년 3개월이 되었습니다. 제가 섬기는 이 대학교는 올해 153년을 맞이했습니다. 이 맥켄지 대학은 처음에는 1870년도에 시작되었습니다. 미국 여성교사님이 자기 가정에서 3명의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시작한 것이 출발이었습니다. 현재 제가 다니고 있는 매켄지 학원은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교까지 현재 4만 5천 명의 학생이 있고, 그리고 본교까지 같이 사역하는 학원에 소속돼 있는 기관은 9만 명이 됩니다.
 
저희들은 이 기독교를 통해서 저희들이 만들어낸 이 방법론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해서 저희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한테 다른 학교에게 이 교육 방법을 전달하는가 하는 데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정말 절대적인 절대 진리가 상실되고 있는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절대 진리인 것을 우리가 그 토대로 해서 이 교육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맥킨지 재단은 교육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육영사업에 있어서 그래서 저희는 두 개의 종합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두 종합병원은 그 지역사회에 도움이 돼서 브라질 중, 서 지역과 특히 남부 지역에 약 250만 명의 시민들을 직접 간접적으로 돌보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이러한 교육과 양육 또 돌봄에 있어서 그것은 절대 진리인 성경을 토대로 해서 그렇게 우리가 다른 지역과 함께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의 공유를 하심으로 우리가 처음 시작서부터 이 교육 기관과 이런 사회 구제의 섬김을 통해서 저희들이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이 정신을 갖고 이 성경적 주제를 중점을 갖고 오늘날까지 이렇게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우리가 이렇게 이 성경적 주제를 토대로 해서 지금까지 나올 수 있는 것은 바로 오늘 주신 이 말씀입니다. 이 에베소 2장 8절에서 10절에 있는 말씀으로,
 
이 세 가지 주제를 놓고서 우리가 어떻게 그 일상에서 또 지속적으로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나눌 수가 있고 또 제시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 하나님께서 여러분 이 귀한 공동체 안에서도 지금 분명하게 사역하고 있음을 선한 능력으로 사역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이제 세 가지 주제를 우리가 나누겠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오. 하나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나님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도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소명, 일, 축복입니다. 우리가 그러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고 함으로 출발됩니다.
 
*에베소서 2:8~10,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면 우리의 인생의 출발은 이제 달라집니다. 그것은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전환된 것입니다. 그 삶 전체가 변화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이요 우리의 소명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원히 각성되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계속해서 변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에게 특성이 나타납니다. 이 소명는 무엇인가? 이 소명은 바로 하나님의 일이십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뭐예요?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이 스스로 개입하신 일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영광으로 출발되었기 때문에 이 영광은 하나님은 이 부르신다는 이 영광은 그 누구하고도 나누지 않습니다. 이게 이 하나님의 영광은 누구하고도 나눌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요, 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고 하는 이 소명은 하나님의 영광에 의해 속한 것입니다. 바로 소명은 하나님의 작품이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요, 하나님의 영광이요 그러나 그것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부르시고 계십니다. 이것은 바로 이 다양하게 부르시는 이 사명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서로 여러 가지 일들을 부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 있는 말씀을 보면,
*에베소서 4:11-12,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로 저들에게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심이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다양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로 여러분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십니다. 여러분들은 우리는 이것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그 일이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요. 우리는 이 일을 통해서 서로가 나누고 다양한 모습으로 교제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일상에서 일어난 일들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펼쳐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초대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있는 말씀처럼 이제는 더 이상 니가 산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2:20,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게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우리가 취할 자세는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능력 앞에 순종할 때 우리는 온전하게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셨다. 즉 내가 소명자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위한 소명을 말했다고 하는 것이니, 그래서 우리가 함께 모였을 때 우리가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하게 세우는 것입니다. 네 우리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소명 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일을 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소명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그러나 말씀하시죠?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군지 자랑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일에 일하는 이 작업의 모델은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일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영원토록, 영원토록 하나님은 그 일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는 잘 압니다.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못에서 그 38년 동안 그 환자를 고쳐줬었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신다고 일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창조의 하시는 일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일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도 그 일도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적으로만, 성도로서만 말하는 일이 아닙니다. 분명하고 우리가 성도로서 교회적으로 일을 해야 되지만 우리는 세상에서 세상 적으로도 우리는 이 주제를 갖고 일을 해야 합니다. 이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가 교회에서 일을 하고, 세상에서 일을 할 때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서 이 소명을 확고해집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특히 우리가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을 우리에게 그렇게 해서 부어주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일을 할 때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모든 우리의 일을 하고 동역을 하고 공유하는 걸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고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2장에서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그 도시도 우리는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교회 안에서나 세상에서나 우리는 사람을 향해서 일하는 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 일하는 것이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지 우리는 상관없습니다. 어떤 일이든 우리가 할 때 어디서 우리가 무슨 일을 해야 할 때,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 일에 나를 부르셨다. 그것은 시편 기자가 그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편 128편 1절, 2절에 이런 말씀입니다.
 
*시편 128:1-2,
1 여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2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부르심을 받은 자가 어느 상황에서든지 일을 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자연적으로 축복의 자리에 있게 됩니다. 이제 새 사람이 된 우리는 자기의 이익과 자기의 유익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자기 성취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리기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보좌하기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그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까지 우리는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일을 한다는 것은 바로 그 우리가 부르심을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감당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일하라고 부르셨습니다. 제가 이 시간에 제 다른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제가 맥켄지 이사장으로 그렇게 섬기고 있지만, 저는 사실 농부입니다. 농부 제 직업은 농부입니다.
저는 오렌지를 생산합니다. 이분은 브라질의 오렌지 농장주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제가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여기 대부분의 사람이 조금이라도 제일 오렌지 브라질 산을 드셨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여러분들한테 아주 신선한 오렌지고 맛이 좋았으리라 제가 믿습니다. 저희 농장에는 매일 오전 일하기 전에 묵상의, 그러니까 기도하는 묵상의 시간이 있습니다. 먼저는 일하는 노동자들, 그 농부들의 농부들을 축복하기 위한 시간입니다. 저희들이 한 전략을 세웠습니다. 어떻게 이 농부들이 여기서 일하는 그 모든 노동자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전략이었습니다. 작년에 양이 제가 농자의 어마어마한 얄의 오렌지를 엄청나게 수확했습니다. 굉장한 양입니다. 이 한 오렌지마다, 이 한 오렌지를 통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우리 오렌지를 수확한다면 오렌지를 따면 되죠. 그리고 이 농장의 역할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지역 사람들이 일터를 일을 제공하고 일터와 또 모든 생계를 직결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부탁을 했습니다. 오렌지를 하나하나 거둘 때마다 그 하나를 수확을 할 때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7800만 번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습니다. 7,800만 개의 올해 그러니까 7,800만 번의 영광 돌릴 수가 있습니다. 농부들이 어떻게 떼야 되냐면 그 수확을 할 때마다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께, 하나님께 영광! 그렇게 하라고 이렇게 전략했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일하시면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기 위한 전략은 무엇입니까? 이들은 여러분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방법으로 어떤 전략을 세우셨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내가 산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다. 소명자로 삼으라. 그때 우리가 그 일을 통해서 우리의 소명 받은 것을 확인해야 되고, 그 일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의 사람인 것이 우리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 말씀은 에베소서 2장 10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2:10,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라분, 축복은 우리의 일의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한 이름들을 비추어 주십니다. 왜?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을 행하면서 살아가고 그렇게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 사람으로 산다. 새 삶을 산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의 모범이 되셔서 우리가 일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모델로 삼고 우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하는 그 삶 자체가 바로 축복의 원천이 됩니다. 제가 말씀드렸던 제 오렌지 농장의 농부들에게 하는 일들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오렌지 꽃이 피고 열매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놀라운 일에 우리를 초대해 주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놀라운 일이 일어날 때에 그 일로 말미암아 소명자의 삶 속에서 축복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정말 신중하게 생각하고 그렇게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일들은 전혀 방해물이 아니요, 나를 지키게 하는 일도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소명자라고 한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그러므로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정말 우리가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그 놀라운 그런 복들이, 하나님의 그 선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환난을 만났을 때 우리는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이 시험의 연단을 연단의 소망을 이루어낸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축복은 마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받은 자가 일을 할 때 그 일이 하나님의 영광에 우리가 조준한다면 축복은 자연스럽게 생산되고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이 모든 일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전에 벌써 준비해 주신 그 축복을 우리가 받고 전달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꼭 적용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걸 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하루를 시작할 겁니다. 이렇게 같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까지 교회 내가 되어서 우리가 교제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고 또 우리 자녀들에게도 그들 역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일하는 일터에서 어느 상황이 되든지 그 일이 하나님의 놀라운 일에 동참하는 그런 통로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교회 안에서 일을 하든지 내가 교회 밖에서 세속적으로 일을 하든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의 영광에 조준이 된다는 그것은 반드시 축복을 당기는, 축복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일을 합시다. 기쁘게 왜?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축복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 이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합시다. 그 능력 속에서 우리는 순종하며 나아갑시다. 우리가 지금 이 시간 기도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이렇게 기도하시는 분들이니까 간절히 부탁합니다. 브라질 장로교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그리고 맥켄지 재단을 위해서 비열리 단체로 우리가 섬기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온전하게 일을 해서 축복을 받고 저희도 전달하는 자로 살 수 있도록 여러분의 기도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렇게 마무리 짓고 싶습니다. 제가 이사야 64장, 64장 4절에 있는 말씀으로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사야 64:4,
4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옛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들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소명, 일, 축복.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소명을 통해서 일하면서 살 것입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 오늘로부터 영원토록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립니다.
요약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소명, 일, 축복이니 열심히 주님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하며 우리가 어느 상황이 되든지 그 일이 하나님의 놀라운 일에 동참하는 그런 통로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회심한 우리 죄인들은 구원받은 자들이다. 우리들을 구원하는 은혜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분에 넘치는 선이며 은총이다. 또한 그는 그들을 구원하시되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신다고 하셨다. 믿음과 구원은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주어지도록 모든 것을 정하셨다.
 
▶오정현 담임목사님
제가 2006년도 7년도 그때부터 계속 강조한 것 중에 하나가 한국 교회가 이 시대를 향하여 글로벌 플랫폼이 돼야 합니다. 그때 플랫폼이 뭔지도 연구가 수가 잘 아는데도 오늘 우리가 2033 50 표준도 얘기하고 이렇게 얘기하면서 이제 제가 하나 더 선포하는데 디바인 커먼스 이제 독특한 용어인데요. 디바인 커먼스란 말이 뭐냐 하면 신적인 공유입니다. 어차피 이 세상은 무한대로 나가게 돼 있습니다. 모든 것들이 디지털 시대에 다 함부로 한도를 나가게 돼 있는 것입니다. 나가게 돼 있는데 그 무한대로 나가기로 했는데 우리가 이제 우리의 마음속에 사명과 열 가지고 하는 2033 5번 그거 되겠나 여러분 그거 아니에요 제가 80년대 중반에 대한민국 교회가 앞으로 50% 예수 될지 모르니까 준비하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때 우리가 준비가 제대로 못 됐었어요. 우리가 제대로 우리라도 제대로 준비하면 앞으로 10년 뒤에 하나님 이 민족의 50% 예수 믿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초대 교회보다 우리가 지금 나은 거예요.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제가 아침에 사이가 공동 특강할 때 제가 드릴 말씀 중에 좀 영원한 말씀을 드리는데 이제 글로벌 플랫폼이 이제는 디바인 커먼스라고 하나님이 주시는 무한한 공유지가 돼가지고 전 세계 분들이 다 서로 소통을 일으켜갖고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통해 일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라는데 특별히 우리 아이들 우리 아이들은 완전히 다른 세상에 태어나가지고 우리 아이들 10대 20대까지 하나님은 어떻게 일을 하시는지 우리가 기대하면서 복음의 영광에 쓰임받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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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9월 13일)
제목: "고난 가운데 넘치는 위로"
말씀: 고린도후서 1:3~11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임병영 부목사님
ㅡㅡㅡㅡㅡㅡ

*고린도후서 1:3~11,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수요 저녁 기도회에 참여하신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이 시간 우리가 회복을 넘어 부흥의 산 역사를 경험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옆에 있는 분들에게 한번 이렇게 인사했으면 좋겠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네 잘 오셨습니다. 말씀을 통하여서 주시는 강력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시는 시간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장 3절에서 11절까지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3절에서 11절까지 말씀을 제가 한 절, 여러분들이 한 절 교독하신 후에 마지막 절은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 요즘 제 주변을 돌아보면 고난 중에 있는 분들을 참 많이 보게 됩니다. 얼마 전 다녀온 장례식의 경우에도 자녀를 먼저 하나님께 보내고, 또다시 오래지 않아서 남편을 하나님께로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분과 함께 남편의 죽음을 준비하면서 병원 신방인과 또 임종 예배, 그리고 장례 예배를 치르면서 지척에서 아픔 가운데 있는 분들을 보게 되어 마음이 무척이나 힘들었던 경우가 있었습니다. 또 어떤 분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기도 중에 있는데, 오래전 자녀를 먼저 보내고 근래에 남편이 항암 치료 중인 데다가 또 다른 자녀마저 시한부라고 하는 소식을 듣고 무척 힘겨워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그저 한숨만 나오는 안타까움에 솔직히 어떻게 위로해야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을 갖고 있는 중입니다. 전화를 드렸지만 전화는 받지 않으시고, 여러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 어떻게 하면 그분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할 수 있을까요? 하는 기도하는 마음 중에, 아마 오늘 이렇게 고난 가운데 위로에 대한 말씀을 전하게 된 것 같습니다.

비단 제 주변의 이야기만 있을까요? 건강하게 잘 지내는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검사를 받다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한부라는 사식을 듣게 되었다면 여러분은 그 사실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오랫동안 경제적인 압박에 시달리면서 언제쯤 숨통이 트일지 감당하기 쉽지 않은 그런 상황 속에서 한숨만 내쉬고 남모를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또 얼마나 많으실까요? 오랫동안 임신하지 못하고, 여러 번의 시술에도 결과 없이 답답한 마음을 보내는 날들이 원망스러운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침묵하고 계신다고 생각되어서 마음에 큰 상처와 아픔을 가지신 분들도 이곳에 계실 거라 믿습니다.

이런 분들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이분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요? 따뜻한 말 한마디, 그리고 손을 잡아주면서 격려하는 행동들이 그분들에게 얼마큼 위로가 될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때론 그 고통을 겪고 있는 분과 만나는 것을 두려운 마음으로 마주하기도 합니다. 나에겐 그분을 위로할 힘이나 준비가 아직 안 돼 있다. 라고 생각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심지어 많은 고난을 겪고 있는 분들을 만나게 되면,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분의 삶이 도대체 어떻하길래 이렇게 고난이 많을까라고 고민했던 적도 있습니다. 혹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벌을 받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감히 입 밖에는 내놓지 못하지만, 마음속으로 그분의 상황들을 살펴보며 안타까워하는 경우도 있겠죠. 도무지 그 많은 고난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 고난을 받은 사람들이 참 많이 있죠. 그중에 대표적인 인물을 한 사람 이야기한다면 바울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울은 그런 면에서 고난을 받았다. 라는 그 경험 때문에 하나님의 벌을 받고 있는 것 아닌가라고 하는 오해를 받기에 충분할 정도로 많은 고난을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았는지, 그를 대적하던 사람들이 바울을 공격하는 수단으로도 그 고난을 이용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시다시피, 바울이라는 사람은 다메섹으로 가는 그 길 위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하는 모든 날 동안에 수많은 고난을 겪었던 사람이죠.

40, 40에 하나를 감안한 매, 다시 말하면 39대의 매를 여러 번 맞았고, 감옥에도 갇히고, 여러 번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상황도 경험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고난의 시간들을 살펴보면 과연 그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도가 맞는지 의심이 들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 있던 바울의 대접 자들은 바울이 겪은 고난으로 인해서 그가 사도로서는 부적합하다. 라고 생각하면서 사도직 자체를 부인하는 근거로 삼고 공격했던 것입니다. 그럼 그들에게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보내서 고난이 자신의 사도직을 부인할 근거가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을 위로를 경험한 큰 증거로 고백하면서 고난을 찬양하며 대적들의 말에 반박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고린도후서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함께 읽었던 바울의 이야기들 중에 우리가 함께 읽었던 본문의 핵심적인 내용을 한번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로, 본문에서 바울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I.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참된 위로 자가 되신다.

-함께 고린도후서 1장 3절 말씀을 읽어볼까요? 같이 읽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이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지칭하면서, 위로의 하나님께서 모든 환란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실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한 근거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의 사람으로 오신 사건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사람으로 오셔서 33년 동안 공생애를 겪으면서 인간이 겪게 되는 모든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다 경험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래서 모든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을 능히 위로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예수님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참된 위로 자가 될 수 있다. 라고 말하는 거죠.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만드신, 어딘가 저 멀리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피조물의 삶을 경험하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살펴서 온전히 위로하시는 참된 위로 자가 되실 수 있는 것이죠. 그러면 바울은 어떻게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바울은 당시에 매우 견디기 힘든 환란을 통과하면서 많은 위로와 구원의 손길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 9절 말씀을 보면,

*고린도후서 1:8-9,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바울이 아시아에서 겪었던 그 환란은 어떤 환란인지 성경에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습니다. 여러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예배소에서 짐승들과 함께 덤벼들은 사람들과 싸웠던 사건, 또는 은장색 데메드리오에 의한 소동의 사건, 또는 배가 난파되는 사건 등을 견해로 제시하고 있지만,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상황이, 그는 살 소망이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라는 겁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때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우면서, 하나님만이 참된 위로 자가 되시는 것을 깊이 체험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깊은 고난 가운데서도 참된 위로 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두 번째 핵심은 어떤 걸까요? 이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은 자들은 모든 환란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할 수 있다. 라는 거죠. 함께 읽어볼까요? 고린도후서 1장 4절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 1:4,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살려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자는 능히 모든 환란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할 수 있다. 라고 말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고난은 그리스도로 인하여서 위로받는 통로가 되었고, 그가 경험한 위로는 다른 환란 중에 있는 자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세워가는 큰 능력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겪은 환란은 결코 가볍지가 않았죠. 여러 번 죽을 뻔했다. 라는 사실은 그가 죽지 않았다라고 하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정말 죽을 정도로 큰 위험 가운데 놓였다. 라는 말도 됩니다. 엄청난 고통과 고난과 아픔을 그는 계속해서 경험하고 있었다. 라는 거죠. 그럼에도 그는 복음을 증거 하면서 환란을 피해가지 않았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환란을 통해서 하나님의 깊은 위로를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다른 환란 가운데 있는 자들을 위로할 수 있는 능력을 계속 갖게 되었다. 라는 것들을, 그는 고난을 통과하면 하면 할수록 알게 되고, 확인하게 되고, 쌓았기 때문에, 그 모든 사실들을 위로할 수 있는 자로 고백할 수 있었던 거죠. 바울은 더 나아가서 자신이 겪은 환란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 6절에서 7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죠.

*고린도후서 1:6-7,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바울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자신이 겪은 환란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상황에서 발생된 것이고, 또 그로 인한 환란에서 이길 만한 위로를 경험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도 자신과 같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겪는 환란도 두려워하지 말고, 견딜 수 있는 이유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라는 격려를 하고 있는 것이죠. 바울은 이렇게 자신을 공격할 수단으로 고난을 언급했던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그 고난을 통해 어떤 하나님의 위로가 있는지, 그리고 그 위로는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고난은 단순히 힘겹고 고통을 겪게 되는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겪은 여러 번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참된 위로자 되심을 명확하게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살 소망이 끊어져 사형 선고를 받은 자처럼, 바울이 자신이 아닌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만드는 복된 위로의 시간이 된 것입니다. 또한 바울에게 있어서 고난은 단순히 자신만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는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자신을 통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비롯한 또 다른 사람들을 능히 위로해 줄 수 있는 하나님의 도구로 재인식할 수 있었던 시간이 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많은 고난 가운데 놓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이 결코 저와 여러분들을 절망과 좌절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게 놔둘 수 없는 줄 믿습니다. 고난으로, 깊은 상처와 아픔으로 비전을 향해 달리지 못하게 하거나, 공동체 속에서 생명을 살리는 일에도 제외하지 못할 것을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바울이 고난을 통해 경험한 위로의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 되시고, 또한 저와 여러분처럼 연약하고, 부족하고, 어디 쓸데없는 그 사람을 들어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는 위로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를 보면 별로 고난을 많이 겪지 않은 사람처럼 보이죠? 진짜로 그렇게 보이시는가 봅니다. 사실 제 삶이 그렇게 넉넉한 삶은 아니었습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여러 번의 설교의 과정이 있었고, 또 시간들이 있었지만, 이 이야기는 처음 하는 것 같아요. 부모님께서 목회를 하시다가 지방으로 가시게 돼서,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에 동생들과 서울에 따로 살게 되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동생 2명과 부모님을 떠나서 따로 지내는 것이 처음에는 무척이나 달콤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리고 동생들을 제가 돌봐야 된다. 라는 그 책임이 참 무겁게 느껴지는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사고로 바로 아래에 있는 가운데 동생을 먼저 천국으로 보내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경험은 지금도 쉽사리 잊혀 지지 않는 저만의 상처가 되었어요. 가장 먼저 시체를 확인하고 그의 죽음을 확인하였던 그 시간은 저에게 힘겨웠던 경험이 되었고, 지금도 부모님께 쉽게 말씀을 드리지 못하는 죄송함으로 남아 있는 상처가 되었습니다. 물론 저희 부모님께서는 자녀를 먼저 천국으로 보내야 했던 그 아픔으로 어쩌면 저보다 더 큰 아쉬움과 후회와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한동안 동생을 먼저 보내야 했던 상처에서 쉽게 나오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그 시간을 지금 돌이켜보면 한 2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분명 고난의 어려운 시간이 되었지만, 죽음에 대한 빠른 인식과 그 아픔이 하나님에 대해서 더욱 분명하게 이해하고 인식하게 되는 시간이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을 어렸을 때부터 의식하고 의지하면서 그분의 위로를 경험하고 살았던 시간이 되었던 거죠. 그래서 그 시간이 너무나 큰 아픔이었고, 절망이었고, 상처였고, 고통이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나한테, 저한테 큰 힘이 되어서 비슷한 상황 속에 놓여 있는 가정을 위로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어 감사한 시간이 됩니다.

비단 저뿐이겠습니까? 이 자리에 혹은 영상으로 예배를 참여하는 많은 분들이 각양각색의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와 그 능력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한 위로로 끝나지 않고 다른 이들을 위로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서 이 사실을 가지고 우리가 함께 적용해 볼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먼저 첫 번째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도록 할까요?

▷우리는 어떤 고난 앞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의 참된 위로 자 되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어떤 고난 앞에서도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의 참된 위로 자가 되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위로로 우리의 위로를 채울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라는 것은 앞으로 어떤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위로 자가 되실 것이란 확실한 보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위로 자가 되신다. 라는 확실한 보증은 더 이상 옛사람으로 채웠던 위로를 가지고 채울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함께 읽어볼까요?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 5:17,
17 그런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는 이미 옛 사람이 아닌 세 사람이 되었다. 라는 거죠. 그래서 세상에 어떤 좋은 위로라고 해도 하나님이 우리의 참된 위로 자가 되심을 뛰어넘을 만한 위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만족케 하는 위로는 하나님밖에 없다. 라는 것을 저와 여러분들은 이제 아셔야 되고 알았다. 라는 거죠. 다시 제가 서두에 말씀드렸던 장례 이야기로 잠시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자녀를 먼저 하나님의 품으로 보내고 다시 남편을 하나님께로 보내는 그분의 마음을 세상에 어떤 것으로 위로할 수 있을까요? 한동안 그분과 연락이 잘 안 되었습니다. 자녀의 장례를 치르고 같이 있었던 카톡 방에서도 탈퇴하시고 연락이 잘 안 되었어요. 한동안 연락이 잘 안 되는 그 가운데에 소문이 들렸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긴 원망과 불평이 그분의 입술을 통해서 고백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연락이 안 되는 가운데 저와 그분을 사랑하는 신앙 공동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하나님께서 그분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하나님이 그분의 참된 위로 자가 되시기를 강구하는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그것 외에는 그분의 빈 것 같은 그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마지막이 되었다라고 생각이 되었을 때에 그분이 저를 감사하게 불러주셨어요. 그리고 그분의 임종 예배와 남편의 얘기입니다. 임종 예배와 장례 예배 등을 함께 치르게 되었습니다. 나름 저의 경험한 고난이 있잖아요. 먼저 동생을 떠나보내는 천국으로 보내는 그 아픔과 상처 있었기 때문에 저의 경험한 고난이 그분을 위로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접근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장례 예배를 치르고,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그분의 참된 위로 자가 될 수 없다. 라는 확신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참된 위로 자가 되어 주심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분으로 하여금 천국 소망을 품고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을 견디고자 하는 다짐하는 그분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분의 참된 위로 자가 되어 주심을 보게 되어서 참 감사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고난 중에 우리를 만족케 하고 온전케 하고 위로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님으로 여러분들의 고난을 넉넉히 극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것으로 채울 수가 없습니다. 이미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그 완전한 위로, 놀라우신 위로,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그 위로를 경험하신 분들입니다. 그 그릇에 세상에 어떤 것으로 담아서 채울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 한 분만 그것들을 채울 수 있는 분이 줄 확신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두 번째 같이 있습니다.

II. 우리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참된 위로 자 되신다. 라는 확신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을 때에 생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이 된 것, 잘못되었을 때 그 잘못된 자기감정이나 사탄의 거짓으로 인해서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도와주는 바른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바른 하나님에 대한 인식 가운데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참된 위로 자 되신다. 라는 사실을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일에 거한다면 우리는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방황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소망과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제 저녁에 제가 교리 대학을 강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화요일 저녁에 교리 대학을 강의하고, 수요일 오전에 사역 훈련을 하고, 수요일 저녁에 수요 예배까지 하는 이 치열한 영적 전투의 현장은 저로 하여금 어떻게 끝나자마자 빨리 집에 가야지라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가득하게 하고 난 후에 강의를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교리 대학이 끝마치는 그 시간에 한 청년이 저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순간 불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 청년이 질문을 하러 오는 것 같은데 그 표정이 심상치 않았어요. 내심 빨리 끝내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설교 준비해야 되는데, 사역 훈련 준비해야 되는데 그런 마음 가운데 있는데 그 청년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요 어느덧 시간이 40분이 넘게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의 이야기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근래에 깊은 고난과 분노가 있었는데, 교리대학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앎이 더해지면서 생각이 바뀌고 작은 변화가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 청년은 그동안 고난 중에 늘 침묵하던 하나님 때문에 불평과 원망이 늘 가득했고, 내 감정으로, 내 마음으로,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이성으로라도 하나님을 아는 방법을 끝까지 한번 가보자 노력했다라고 해요. 그런데 다시 한 번도 그 마음의 그 갈급한 심정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하나님을 다시 한 번 알아가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교리 대학을 들어왔고, 단 두 번의 수업, 두 번째 수업이었거든요. 어저께 단 두 번의 수업 만에 하나님에 대해 배우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그 일로 인해서 이제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셨다. 라는 생각이 변화로 나타나서 위로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말이 좀 어려웠죠. 고난 중에 늘 원망과 불평했던 그 마음이 하나님에 대해서 단 두 번 배우고 익히는 과정을 통하여서 그 마음이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네가 나에게로 오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라는 인식으로 바뀌어서 그 마음의 위로를 받고 돌아갔다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깊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어떤 고난도 극복할 수 있는 위로를 경험하게 됩니다. 불평과 원망에 쌓여 있던 그 마음에 어쩌면 하나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 아닌가라고 하는 스쳐 지나가는 하나님에 대한 앎이 깊어지며, 나에게 허락된 그 위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정한 위로를 경험하고 돌아가는 그 청년을 통하여서 하나님은 이렇게 나를 위로하시는구나! 내일 설교해야 되는데 이렇게 귀한 지체를 보내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눌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구나! 라는 위로 또한 저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누구보다도 온전히 위로하실 참된 위로 자가 되 그러기에 어떤 고난 가운데 있다 해도 주저하거나 머뭇거리지 말고 위로자 되신 하나님을 확신하면서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한번 말씀 읽어볼까요? 데살로니가 후서 2장 16절에서 17절까지 말씀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16-17,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17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참된 위로 자 되시는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써 나아간다면 그가 우리의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시는 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믿고 고난 중에 넘치는 위로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같이 한번 볼까요? 세 번째입니다.

III. 하나님의 위로를 나누고 경험하는 교회 공동체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 위로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허락된 위로로 또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를 들어서 하나님의 위로의 도구로 사용하실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반드시 위로를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우리가 속한 예배 공동체, 그리고 말씀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훈련반이나 다락방에서도 활발하게 일어나는 일이죠. 함께 예배하며, 함께 말씀을 나누고, 함께 울며,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위로받는 공동체를 통해 우리에게 깊은 위로를 허락해 주심을 경험합니다.

오늘도 사역 훈련하는 가운데에 뜨겁게 기도하고 울며 외치는 시간들을 통해서 마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가득가득 경험했던 시간을 경험했습니다. 또한 주일 예배나 수요 예배, 토요일 비전, 새벽 예배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자들이 모여서 예배하는 시간입니다. 온라인으로 경험하지 않고, 현장에 나와서 예배할 때 주위를 한번 둘러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찬양과 말씀을 통해서 위로하시는 것들을 목도할 수 있습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졸던 분이 찬양하는 가운데에 두 손 들고 찬양하는 모습을 보게 되고, 말씀에 깊이 들어가며 그 마음 가운데에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표정 가운데에 있는 분도 목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로하실 때에 그 위로가 또한 나에게까지 전해지는 것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 여러분, 찬양을 부르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다. 라는 것을 경험하셨죠? 경험이 없으신가 보네요.

저는 있었습니다. 예전에 하나님께 크게 실망하고 상심했던 적이 있어요. 그때 아내가 저를 불러서 가정 예배를 드리자고 했습니다. 가정 예배에 평소 자녀들을 데리고 억지로 앉히고 막 말씀 익히고 찬양 부르면서 했던 예배였는데, 그때는 자녀들도 억지로 앉히지 않고 오로지 둘만 예배가 드리는 예배가 되었습니다. 사실 왔다 갔다 하는 그 아이들 앉혀놓고 예배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아내가 선곡한 찬양을 처음 부르는데 목사님, 제 입에서 찬양이 나오지 않는 거예요.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아내 혼자 그 한곡을 다 부르더라고요. 그런데 그런 저를 아내는 책망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또 다른 찬양을 선곡하여서 함께 부르자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도 여전히 저의 입에서는 찬양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목사인데, 라는 마음이 들어서 입만 조금 뻥긋거리는 찬양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평소 제 아내분이 그럴 분이 아니신데, 또 그 찬양을 다 부르고 난 다음에 한국을 더 부르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 마음이 참 불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심지어 투덜거리고 왜 또 찬양을 하려고 이러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무부 장관 되시는 그분께서 얘기하시는 그 찬양을 억지로 펴서 억지로 찬양을 따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저에게 이러실 수 있냐며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했던 제 마음이었기 때문에 정말로 찬양을 하고 싶지 않았던 저의 모습이 그대로 그 표정 가운데 나타났던 건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계속 홀로 부르던 아내의 찬양에 맞춰서 제가 찬양을 하고 있는 겁니다. 심지어 눈물 가득히 찬양하면서 우리 두 부부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올려드리고, 그 위로로 가득한 가정 예배를 처음 경험해 봤는데, 그 시간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울컥거리는 마음이 있어요.

그 찬양의 가사가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너희 마음을 위로한다, 내가 너의 아버지다. 그런 찬양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 앞에 영광을 올려드리고, 그분을 경배하고, 송축하는 찬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눈물이 나고 하나님의 위로를 깊이 체험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한 동안 그 찬양을 가정 예배에서 부르면서 은혜를 나눴던 기억이 있습니다. 때론 우리는 고난을 경험하면서, 하나님과 단절된 경험을 하면서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을 때가 있습니다. 찬양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가득한 때도 있죠. 그런데 그럴 때일수록 교회 공동체에 나가야 됩니다. 말씀 공동체, 예배 공동체, 가정에서도 은혜 공동체, 다락방 훈련 공동체 여러분 그렇게 그 공동체로 나아가서 함께하는 그 사람들로 인하여 고난을 극복할 넘치는 위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위로를 나누고 경험하는 교회 공동체에 깊이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더 이상 온라인 예배가 우리의 위로를 채울 수 없다.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장으로 나오셔야 됩니다. 현장에 나와서 함께 위로받은 자들을 목도하며 함께 위로를 전하며 하나님 앞에 영광의 예배를 올려드릴 때에 우리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고난과 염려와 근심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위로로, 넘치는 위로로 경험되는 시간들을 체험하게 되실 겁니다. 함께 예배하고 찬양하는 영 가족을 통해서 우리는 고난 중에도 큰 위로를 경험하고 특별히 예배 현장에 나와 경험하는 그 위로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영광과 찬송을 올려드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고난 중에서도 우리를 붙드셔서 넘치는 위로로 채우시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귀한 도구로 사용하심으로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로 나아가게 하는 은혜를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요약
-세상이 주는 위로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참되신 위자 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은혜롭고 넘치는 은혜와 위로를 경험해야 한다. 하나님 우리에게 많은 아픔과 고통이 동반된 고난이 있더라도 이 고난을 하나님이 아니시면 해결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궁유를 베풀어주심을 믿고 현장 예배를 사모하여 공동체 안에서 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이 우리의 참된 위로 자가 되시는 주님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한다.
 -그들이 환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장차 임할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때 주님께서 성도의 눈물을 친히 씻어 주실 것이다. 그리고 고난과 영광의 관계를 깨닫게 될 때 고난은 기쁨으로 바뀔 수 있다.

-그들이 환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장차 임할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때 주님께서 성도의 눈물을 친히 씻어 주실 것이다. 그리고 고난과 영광의 관계를 깨닫게 될 때 고난은 기쁨으로 바뀔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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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3년 9월 10일)
제목: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
말씀: 느헤미야 11:1~9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영광찬양대(1부-He is)
대표기도: 오소협 부목사님(1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ㅡㅡㅡㅡㅡ
 
*느헤미야 11:1~9,
1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 그 십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2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
3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솔로몬의 신하들의 자손은 유다 여러 성읍에서 각각 자기 성읍 자기 기업에 거주하였느니라 예루살렘에 거주한 그 지방의 지도자들은 이러하니.
4 예루살렘에 거주한 자는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 몇 명이라 유다 자손 중에는 베레스 자손 아다야이니 그는 웃시야의 아들이요 스가랴의 손자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스바댜의 현손이요 마할랄렐의 오대 손이며.
5 또 마아세야니 그는 바룩의 아들이요 골호세의 손자요 하사야의 증손이요 아다야의 현손이요 요야립의 오대 손이요 스가랴의 육대 손이요 실로 사람의 칠대 손이라.
6 예루살렘에 거주한 베레스 자손은 모두 사백육십팔 명이니 다 용사였느니라.
7 베냐민 자손은 살루이니 그는 므술람의 아들이요 요엣의 손자요 브다야의 증손이요 골라야의 현손이요 마아세야의 오대 손이요 이디엘의 육대 손이요 여사야의 칠대 손이며.
8 그 다음은 갑배와 살래 등이니 모두 구백이십팔 명이라.
9 시그리의 아들 요엘이 그들의 감독이 되었고 핫스누아의 아들 유다는 버금이 되어 성읍을 다스렸느니라.
ㅡㅡㅡㅡㅡ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설교시리즈 25번째 강의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
 
-할렐루야 설교를 찬양대가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 정말 찬양대 갈 때 우리가 아내라면 예배 구경꾼에서 참여자가 되고 예배의 방관자에서 참 예배 자가 될 것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하여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인생 역전을 가능하게 하시고, 또 수많은 상처를 치유하시고, 패자 부활전도 가능하게 하시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 하나님의 일하시는 시나리오 메시지를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본문을 다 읽어보면요. 사람 이름 발음도 참 잘 하 내용을 설교자가 이걸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실 겁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스타일에 눈이 열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절이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느헤미야 11:1,
1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 그 십 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무슨 뜻인가 앞에 6장 15절에 보면 성벽 역사가 52일 만에 끝났다.
 
*느헤미야 6:15,
15 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 만인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약 160년 동안 성벽이 없어서 폐허가 된 성이었어요. 어떻게 보면 거대한 쓰레기더미였습니다. 오죽하면 느헤미야가 밤에 돌아보면서 엉엉 울었을 때, 근데 그 성벽 쓰레기더미를 치우고 52일 동안 힘을 합쳐 성벽을 완성했습니다. 근데 생활에 들어가 사는 거 쉽지가 않았어요. 성적은 지어졌지만 사회 기반 시설 소시 인프라가 부족했고 쓰레기도 치워야 되고 특별히 외부에서 공격이 오면 그 예루살렘 성부터 먼저 공격하니까, 가능하면 예루살렘 성 밖에서 멀찌감치 저 지방 쪽에서 정상을 예루살렘 산에 들어가 사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다. 그런 뜻이 근데 지도자들이 모범을 보이려고 먼저 안에 들어가 살았습니다. 그리고 백성들 가운데 저들을 뽑아 10분의 1이 예루살렘 성안에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생활에 들어가는 것은 위험과 희생을 각오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2절에 보니까 예루살렘 이전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어떻게 한다고요?
 
*느헤미야 11:2,
2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
-자발적으로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다는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자본에서 예루살렘에 들어간 사람들에게서 복을 빌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 산다는 것은 특권이 아니라, 대적들의 공격을 받는 목숨을 얻는 일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예루살렘에 들어가 살겠다 하는 이런 상황이 된 것입니다. 황폐해진 곳을 다시 재건하는데 매일매일이 어떻게 보면 힘든 연속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쓰레기, 파편, 도구들을 다 치워버렸습니다.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가 선뜻 선택하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근데 제비 뽑혀서 예루살렘 안에 거주하게 된 사람들은 불평하지 아니하고 자발적으로 거주하겠다. 그러고 그리고 예루살렘을 다시 깨끗하게 세우고 민족 공동체 회복과 공헌한 희생을 강요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유명한 여기에 지도자였는데 내미는 선교 프로젝트 52일 만에도 참여하는 시기 뭐냐고요? 피플 매니지먼트(People Management)! 사람 관리도 아주 잘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이와 같이 참 참 어떻게 보면 좀 쉽지 않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여러분과 제가 삶의 수많은 난제들을 부딪치면서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스타일과 방식을 깨닫고, 이걸 제대로 우리의 것으로 잘 접목만 하면 하나님은 오늘도 동일하게 메시아 시대처럼 역사하여 주신다고 확신합니다. 첫 번째 제가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차별 대우하지 않으신다.
 
I.하나님은 차별대우 안하신다.
-뭐 안 하신다고요? 무슨 말인가? 오늘 6절에 보니까 예루살렘에 거주한 베레스 수는 모두 몇 명이었죠? 468명이니 그다음에,
*느헤미야 11:6,
6 예루살렘에 거주한 베레스 자손은 모두 사백육십팔 명이니 다 용사였느니라.
다 큰 용사였더라. 이걸 보면서 이런 베레스가 누구입니까? 유다의 아들이고 야곱의 손자입니다. 베레스가 창세기 38장에 나오는데, 창세기 37장으로 요셉의 얘기가 나오다가 갑자기 엉뚱하게 좀 생뚱맞게 38장 베레스 얘기가 나오는데, 아주 여기에는 좀 상당히 불편한 얘기가 나옵니다. 베레스는 오늘 용사다. 믿음의 영웅으로 불릴 만큼 그런 좋은 배경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는 분들은 아시겠습니다마는 창세기 38장에 베레스의 출생은 거론하기가 죄송할 정도였어요. 야곱의 아들 유다가 아들을 잃고 어떤 여인과 관계를 맺는데 오늘 어떤 분이 이 선부에 참석하는 분이요. 그래요 목사님 1부 때 좀 살살하시고 1부 때는 좀 살살하시고 2~3부 때, 목사님 힘줘달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지금 좀 살살하고 있어요. 지금 그렇지만 알아듣기는 찰떡같이 알아들으시기를 바래요.
 
야곱의 아들 유다가 아내를 잃고 그냥 길거리에서 어떤 여인과 관계를 맺었는데 여인이 며느리 다말 이였어요. 기가 막힌 내용이죠. 그쵸? 그리고 유다와 다말과의 사이에서 낳은 그 자식이 베레스였어요. 그러니까 베레스의 출생 자체는 어둡고, 글을 지고 축복받을 만한 복을 받을 만한 상황이 이었어요. 하나님이 이런 베레스를 유다 지파장에서 정말 가장 위대한 영웅 중의 하나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베네시오의 1500년 이후에 오늘 리마 시대에 그를 민족의 영웅으로 이렇게 하고, 그리고 용서라고 얘기하고 있 다시 예루살렘에 가는 베레스의 자손들은 몇 명이에요? 468명입니다. 다시 한 번 다 어떤 용서했더라. 용사, 제가 이걸 보면서 그리고 베레스의 자손들이 보아스가 있고 나중에 아합 왕이 있고 이 가문에서 예수님이 탄생하는 이걸 통해서 누구나 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귀하게 쓰임 받을 수가 있다. 이 그리고 두 번째로 7절 8절 보니까 베냐민 자수는 모두 928명이라 베냐민 자손은 베레스 자손보다 거의 두 배였어요. 여러분 베냐민은 12지파 가운데 제일 적은 지파였어요. 유다 지파보다도 두 배나 많이 언급되었어요. 하지만 베냐민의 배경은 그렇지 못했어요. 사사기에 보면 베냐민 지파의 부끄러운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사기의 마지막 장들은 성적인 죄에 빠지고 아주 끔찍한 내용이 나옵니다. 사람을 죽이고 각을 떠가지고 이란 지파에게 보내고, 이스라엘 역사 중에서 가장 불행한 역사 중에 하나였습니다. 수많은 죽음과 오점과 참 필사를 경험할 수 없는 비참한 시기였어요. 그 끔찍하고도 불행한 사건 중에 베냐민 지파가 핵심이었어요. 너무나 이 베냐민 지파가 잘못을 범해가지고 다른 지파들이 베냐민 지파를 가만히 둘 수가 없다고 해가지고 거의 멸절 왜냐면 남자들 거의 다 죽이거든요. 그런데 그런 스파가 오늘 이런 대단한 언식을 하고 나중에 충성스러운 지파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바울은 어느 지파 출신입니까? 사랑의 교회 성도 여러분, 베냐민 어느 지파출신인가? 베냐민 출신이에요. 그래서 자기는 다른 건 몰라도 하나님께 충성한 하나는 로열 티 하나는 확실했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 오늘 하나님 방식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시고 누추하고 비천하는 것을 따지지 않으시고, 또 상황 자체도 여러분 지금 참 마음이 누추하다. 참 마음이 이거 너무 상처받았다. 너무 힘들다. 하는 그 자체를 하나님은 역전시켜주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똑똑한 사역 방식은 무초한 사람을 깨끗하게 하시고.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길을 열어주시고, 완전히 낙오된 인생도 선택하셔서 귀하게 사용할 수 있는 그릇을 만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이런 일들을 참 기뻐하십니다. 이런 일들을 하나님은 정말 기뻐하신 분이에요. 약한 자를 통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초라한 인생들을 모으셔서 예루살렘의 이런 은혜를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 이 내용의 한국 사회에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치열한 이런 문제를 이 세대 간의 갈등이 양 이런, 이런 진정과 이런 것들을 여러분 이걸 어떻게 해결합니까? 차별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붙잡아주시는 이 이 능력의 복음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베레스와 베냐민을 쓰시는 축복하시는 사생아를, 그 누추한 그룹들을 쓰시는 복음의 능력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다시 한 번 하나님은 하나님이 차별하지 않으셨다. 않으신다. 그 뜻은 과거를 극복하게 하셨다는 뜻이, 여러분 말고도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다 우리 구조 하에 다 있죠. 아니 우리의 삶 자체가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난 자체가 우리는 육신의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늘 주님 앞에 얼굴이 떳떳하고 죄송한 거 많이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살겠어요? 하나님이 오늘 은혜 주셔가지고 하나님께서 과거를 극복해 하셨다. 베르스라든지 베냐민을 통하여 이걸 볼 때에 우리의 과거를 어떻게 새롭게 하시는 이사야 43장 18절, 19절 너무 중요한 말씀 잘하는 말씀이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사야 43:18-19,
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들이 몇 프로 믿느냐에 따라서 여러분들의 장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너무 중요한 거 있습니다. 이 구절은 과거를 잊어라. 그 정도가 아니에요. 그것은 아니고 그 정도가 아니고 과거에 붙들리거나 과거에 함몰되지 말고 오히려 과거를 새 일을 위한 새로운 토대로 삼아라. 이 말이에요. 그리스도인은 광야나 사막을 사람이 살 수 없는 특수 환경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광야 같은 과거, 광야 사막 같은 어려운 과거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인생의 길이 되고, 사람을 살리는 강이 되도록 과거를 새롭게 하시는 영적인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은혜를 주신다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도 구원받고 오늘 일부에 오신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도 과거에 발목 잡히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그런데 과거에 발목 잡히지 않는 오늘 귀한 성도들 되기를 축원합니다. 너무 중요한 거예요 너무 중요한 거...
 
신약에도 고린도후서 5장에 새로운 피조물로만 나와 있죠 무슨 말? 우리 몸 자체는 이전과는 달라진 것이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새로이 된다는 것이이요. 제가 이제 늘 말씀드리지만 이런 말씀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과거의 이력도 우리를 새롭게 하실 것이에요. 그 하나님의 과거를 과거 이력을 새롭게 하시오. 그래서 늘 말은 이미 결정된 것 가지고 인생을 낭비하지 아니하고, 우리 과거의 삶은 부족하다 어떻게 하겠어 이미 결정했는데 그러나 앞으로 더 잘하면 되는 것이에요. 그게 하나님의 은혜고 복음의 능력이에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피의 복음이에요. 우리의 재능과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사고는 그렇게 못하는 거예요. 그러나 피의 복음은 그것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주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다 만드는 거예요 다.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예수의 피로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구절들은 과거에 대한 인간의 편견을 초월하시고 과거의 상처와 허물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그 자리에 머물지 않게 하시고, 우리를 끌어내어 과거의 이력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저는 목회 원칙 중에 하나가 아무리 힘들어도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차별하지 않으심으로 과거를 거부하게 되면 결정된 것을 이미 결정된 것에 휘두르지 않다는 것이에요. 이것을 사도바울이 빌립소서 3장 13절, 14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빌립보서 3:13~14,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바울은 이미 결정된 바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와 미래에 초점을 맞춰버린 것입니다. 한 번씩 제가 말씀드리지만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은 우리 자신 외에는 없는 거예요. 우리 자신을 망하게 우리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회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왜 이렇게 중요한가 하면 우리가 결정된 것에 이미 결정된 것에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더 잘할 수 있는 것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여기에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식이 깃들어 있습니다. 뭐가 깃들어 있다고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식의 그래서 제가 그걸 썼어요.
 
▷“우리의 과거는 이미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속에서 녹아져 현재와 미래를 위한 디딤돌로 조각되었다. 인이 과거에 집착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대한 불신의 또 다른 면일 뿐이다. 과거에 붙들려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계획하시는 미래로 전진할 수 없다. 과거에 집착하는 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새로운 열린 문과 축복을 볼 수 없다. 아멘.
 
-제가 사랑하는 교우를 마음에 생각하면서 세월을 썼어요. 여러분과 제가 과거에 어는요 하나님의 주권적 승리에 대한 불신의 또 다른 표현이 되는 것이에요. 우리 앞으로 과거에 집착하게 하는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우리 주님도 잘 닮아갈 수 있는 신실한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을 더 사랑하고 더 간절한 마 몸과 마음 자체가 이렇게 될 때 더 신선하고 창조적이고 혁신적이 될 수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달란트 비유는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얘기하는데, 이 달란트 비유는 이미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결정된 거예요. 달란트는, 달란트는 내가 원한다고 더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 체육하는 분들 잘 뛰는 사람들을 보면요 똑같은 형제들인데 어떤 형제는 막 가피고 어떤 형제들은 뒤에 가는 게 순서인 사람도 있고 음악적 재능 기회가 있어요. 근데 달란트 비유는 자신이 가진 것 자신에게 결정된 것, 이미 정해진 과거에 붙잡히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반응한 것이기 때문이에요. 신돌 목사님이 뭐라고 이야기냐면 “결정된 과거에 집착하는 삶은 하나님께서 내일 새벽에 오늘이라는 새해 선물을 놓아두신 것을 보지 못한다.” 라고 그랬어요. 여러분 오늘은 얼마나 신선합니까? 오늘 아침에 오시면서 여러분 기대하고 오신 것이에요.
 
사랑의 교회는 한 주가 한 역사예요. 오늘 저 배 안 나오신 분들은 그 말을 못 들었어요. 그리고 이렇게 박수를 두 번 치는 걸 누가 알겠습니까? 앞으로도 오늘 여러분 기억하시길 바라며 오늘 일어난 새 삶이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매일 아침 어마어마한 거예요. 매일 아침마다 다음에 나는 내일 아침 생일 줄 것을 어떤 것인가 너무나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나이가 들어갈수록 오늘이 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더 기대하시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어차피 젊은 사람들이야 날마다 좋을 테니까 아닌가요? 오늘, 오늘 다시 결정된 과거에 집착된 상황, 하나님께서 매일 새벽에 오늘이라는 새 선물을 놓아두신 것을 보지 못합니다. 매일매일 오늘날 새 선물을 볼 수 있도록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요셉을 보세요. 그냥 죄수였어요. 근데 그 죄수하고 그 요셉이 평탄하고 거기에 집중하고 그 고통 받았다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데, 요셉은 내일 오늘을 기대한 것이 그 증거가 뭡니까? 요셉이 아들을 낳고 아들 이름이 뭔지 알아요? 므낫세. 므낫세. 이런 뜻이 뭔지 아십니까? ‘과거는 잊어버렸다.’ 오늘 이 시간이 복음의 므낫세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잘못된 일 가지고 있어도 주님께 맡기세요. 어차피 내가 애쓰고 수고한다고 해도 주님이 안 도와주면 안 되는 거예요. 아시겠죠?
 
여러분, 마음이 섭섭하고 힘든 거 있어도 주님이 은혜 주시면 은혜 주셔야 해결되는 거지 내가 한다고 해결되는 거 아니에요. 주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잊는다. 잊어버린다는 뜻이 므낫세라고 이름을 지었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24절 25절은 유대인들에게 사실의 하나 가반맵을 다섯 번이나 저녁을 묵상하다가 참 재밌었어요.
 
*고린도전서 11:24-25,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여러분, 이미 결정된 과거 여러분 정리하고, 내가 더 답할 수 있는 것에 목숨을 걸고 축복을 주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내일 새로운 날로 옮겨가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II. 하나님의 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11장에 보면 하나님의 일을 혼자 하는 것은 아니에요. 11장 뒤에 보면 예루살렘 성에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뭐 있는가? 제사장 그룹이 있고 레위 그룹이 있어요. 그러니까 첫째는 제사장 그룹 결제는 레위 그룹 첫째로 성직이 있고, 우리 식으로 말하면 주차, 교육, 안내, 봉사 모든 걸 다 다 같습니다. 또 24절에 보니까 왕의 수하에서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들 소위 분쟁 조절 자들이 사람 사는 수많은 분쟁들이 있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역 스타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힘을 가지고 우리 하나님은 혼자 잘하는 것보다도 같이 잘하는 것을 더 기뻐하세요. 그래서 성령 안에서 하나 되라. 고 하시는 것이 제가 지금 주님이 이렇게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저는 이 말씀을 전하지만 사실이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수많은 보이지 않는 섬김이 필요하죠. 방송 팀이 수고하고, 안내, 주차, 사역 인터넷, 재정, 지도 수료학교 교사 사랑 부 국사서 중국어 일어 영어 다 같이 다 함께하는 거에요. 그래서 다시 하나님은 혼자서 자 자라는 것을 더 기뻐하는 줄로 믿습니다. 1이라는 숫자는요 아무리 큰 숫자를 곱해도요 1밖에 안 돼요. 1 곱하기 만은 뭐예요. 만이에요. 수확이 안 됐습니까? 2 곱하기 100만 개도요. 어마어마 2 곱하기 2 곱하기 한 1천 쯤 되는데 아니, 1 곱하기 1은, 1밖에 안 돼. 근데 2 곱하기 100제곱만 해도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지는 것이 수학자들 앞에서 제가 바울처럼 간절하고 그렇게 안 하는 거 아는 수학자들은 다 이해해 주세요.
 
교회에는 최전방 금지가 있고, 후방 금지가 있습니다. 그 선교에 있는 사람들은 온갖 비판과 불평의 총알이 날아다니는 곳에서 최전방, 후방에서는 또 그런 분들을 격려하고 기도하고 그래서 우리가 각별하게 영 가족이 되고, 근데 이걸 누가 잘 못하는지 알아요? 대부분 똑똑한 분들, 알리스 매크로스라고 지난번 우리나라에서 우리 OOO께서는 세계 최고 기술이 만들어지는 시대라고 하는 그 똑똑한 사람들을 둘이 옥스포드 동창이었어요. 다윗은 왜 뭐라고 얘기했냐면 자신의 신앙생활 초기에 고민했던 실수를 고백했어요. 나는 그리스도의 몸의 의미를 충분히 몰랐다. 내 시야에는 다분히 개인주의적인 경향이 강했고 아무것도 받을 필요가 없다는 듯 영적 독불장군으로 살았다. 그래서 그 실수예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에 우리는 지체 지체는 결코 독불장군이라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신앙의 독불장군 한 고전 12장 21절에 뭐라고 돼 있어요“ 누가 손 들어 내가 너를 쓸데없다.
 
*고린도전서 12:21,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너와 머리가 말 들어 내가 너를 쓸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요
 
신앙은 독불장군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첫째 기독교 신앙은 결코 혼자만의 신앙이 아니며, 둘째 법불장군처럼 혼자만의 신앙을 살려 하나님께서 대하신 풍성한 삶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교회는 다락방이 너무 소중한 것입니다. 제가 감히 말씀드리는데 나이가 들수록 사랑의 교회 다락방은 너무 소중한 것이에요. 노년 보복을 제일 두려워하는 거 아닙니까? 세상은 사랑입니다. 다락방은 앞으로 가면 레가 이렇게 해가지고 앞으로 가면 이런 풍성 하도록 할 거예요. 주님과 함께 풍성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기쁨으로 행복하게 주님 앞에 살다가 그냥 어느 순간 삭삭 가는 거예요. 그리고 그 또 하나 하나님의 뜻이 뭐냐면, 이름 없는 분들의 관심이 너무 소중합니다. 오늘 여기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11장에 언급되고 있어요. 물론 이름을 다 쓰지는 않지만 숫자를 많이 가지고 수천 명 사는데 여기에 적힌 분들보다도 안 적힌 분들이 더 많아요. 안 적힌 분들을 통하여 더 많은 역사가 일어났어요. 소위 무명의 열정 있는 섬김 때문에, 너무나 놀라운 것입니다. 찬양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섬김이 소중한 것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봉사하는 우리 성도들의 섬김이 위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6장 10절에 보니까,
 
*히브리서 6:10,
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라...보면 각광받지 못해 남에게 인정받지 못해 서운해질 때마다 우리의 섬김을 하나님이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니라. 훨씬 더 우리를 무게감 있게 하고 우리를 더 소중하게 하고 우리를 보람 있게 하는 것이 그래서 근본적으로 우리가 무슨 생각할 때, 사람 앞에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사는 거, 무슨 일을 하든 주께 하듯 하라. 이는 유혹의 상을 사람이 주는 게 아니라 주께서 주실 줄 앎이니라. 하셨어요. 그러니까 여기에 하나님과 나만이 하는 영적인 섬김의 비밀이 있고, 하나님과 나만이 하는 수고의 비밀이 있는 거에요. 사랑의교회 중직 자, 사랑의교회 성도들 모든 성도들은 한 명도 없이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섬김과 수고의 비밀을 이 영적인 감탄사를 갖고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가 무슨 얘기하잖아요. 대한민국은요 나라가 위기 때, 결정적일 때 관군들이 그러니까 뭘 하는 게 없어요. 그 이름 된 사람들은 이름 없는 의병들이 이 나라를 지킨 것이에요. 의병이 지킨 나라, 대한민국,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신실한 백성들이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때 지킨 하나님의 교회, 저는 이 4계절을 보면서 계절이 변화를 보면, 구원이 되어도 아직까지 겪기는 하지만, 이름 없는, 이름 없이 수고하는 헌신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꽃들이나 나무나 과실수는 언제나 있는 그 자리에서 때가 되면 묵묵히 꽃을 피우고 봄이 되면 꽃을 피고 여름에 잎을 내고, 가을에 과실을 맺어 이른 봄 사랑 속에서 꽃이 피기 시작해가지고 가을에 과실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누가 칭찬하는 것도 아니고 도와주는 사람도 없어도 숨은 자리에서 묵묵하게 자기 책임을 다해가지고, 꽃 피우고 또 자라고 또 가을에 과실을 맺는 것이에요. 봄에 피는 꽃이 있고 여름에 짙은 푸르름을 보이는 잎들이 있고, 가을에 열매를 맺는 과실이 있어요. 서로가 희생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는 것이 그 어떤 이런 얘기를 하는 분들이 있을지 몰라요.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일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몇 년을 수고했는데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은 섭섭하고 서운하다. 하루 이틀이지!!! 몇 년을 죽으라고 했는데도 안 알아주는데 섭섭하다. 그런 분이 계시다면 제가 또 드릴 말씀이 있어요. “산속 깊숙이 절벽 바위틈에 핀 꽃의 소리를 들어보세요. 사람들은 내가 핀 꽃을 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산속 깊숙이 절벽 바위틈에서 새벽이면 이슬을 맞고 아침이면 햇빛을 비춰주시고 때가 되면 비를 내리시어 나를 만져주시는 분이 됩시다.”
 
때로 교회 봉사자들 가운데 바위틈에 꽃을 피우고 창조주와 대화하는 그런 분들을 제가 보면서 자신의 헌신과 수고를 우리가 다시 한 번 추스리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경에는 이름 없이 헌신했던 수많은 이름들이 있습니다. 이름 없이 예수님의 사역을 도왔던 여인들, 예수님은 유월절 마지막 만찬을 준비하였던 집주인, 이런 분들 구약에는 하나님께 헌신했습니다.
 
※미국 워싱턴 DC를 가면 ‘알링턴 국립묘지’ 거기에 무명용사의 묘지가 있습니다. 그 앞에 이런 묘비의 글귀가 있습니다.
“여기에 오직 하나님만 알고 계신 미국의 용사가 영광 중에 쉬고 있다.”-미국 워싱턴 DC를 가면 알링턴 국립묘지 묘비 명 中-
 
하나님 나라 용사가 영광 돌리신 분입니다. 이 교회는 사랑의 교회는 하나님만이 되고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서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이런 소리가 거룩함을 받아 나오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랍니다.
 
결론으로, 저희가 9월 26일 작년에 우리 한국교회 승인을 했는데 저희들이 이 백서를 만들고 있는데요. 작년에 모든 과정들을 보니까 너무나 우리 교우들이 무명을 지을 지금 제가 말씀한 대로 알아주지 않아도 바에 꽃을 피우며 하나님 앞에서 섬겨주셨어요. 여러분들이 수고가 얼마나 많았는지, 이게 우리 한국교회 전 세계 참 은혜의 메시지가 될 수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596명이 참석하고 그래서 올해는 9월 26일 하려고 했더니 그때 마침, 추석 기간 올려 제2의 ‘한국교회 섬김의 날’ 한교섬을 10월 23일, 23일, 10일, 23일 제 날짜를 해가지고 한 3~4일 전에 저희들이 광고를 처음 했어요. 그럼 오늘 아침에 제가 그걸 아침 6시 현재 3893명이 등록을 했습니다. 이것도 며칠인데, 사흘 정도밖에 안 됐는데 이 서는 이건 한국 교역 사적으로도 놀라운 일이에요. 너무너무 놀라워요. 그러니까 이게 뭘 말하는가 하면 그만큼 간절하고 그만큼 여러분들의 헌신과 섬김이 이렇게 역사한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아마 우리가 여기에 만 명도 받을 수 있는데, 이거 만 명받아요? 우리가 어떻게 할 거예요 우리가 만 명 다 스테이 할 수 있겠네요. 우리가 만 명 받을까요? 아멘.
 
지금 이런 일 있을 수 없어요. 작년에는 하기 전 2주일 전에 끝났는데 올해는 5주 전에 끝나요. 등록 한국교회에 이런 일이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관심과 성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래서 어제 백석 교단이 수만 명이 모여가지고 사무실에서 제가 어제 설교를 했어요.
 
예수님이 ad 33년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고 주님이 부활하셨고 그다음에 성령 강림이 됐고 예루살렘 공교회가 세워졌고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해인데 이 33년을 기억해가지고, 2033년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사명 주신 2천 주년이 되는 것이에요. 앞으로 향후 10년 동안 하나님 은혜 주셔가지고 한국교회가 50%가 복음화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러분 훌륭하시네요. 그러나 똑똑한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 무슨 50%가 되느냐? 할 것이지만, ad 33년 그때 초대교회 그때가 더 힘들었습니까? 지금 우리가 더 힘들었습니까? 빨리 들면 내가 옛날에 힘들었지 옛날에도 초대교회 그때가 더 힘들었습니까? 지금이 더 힘들었습니까? 나 백배가 힘들었지요. 다시 2033년까지 얼마에요? 50%, 50%가 예수님 믿게 하여 주시옵시오!!!. 이 민족의 다시 한 번 피 묻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변별이 돌아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50% 택도 없다. 말도 아니다. 왜? 택도 없어요? 남북이 갑자기 해결돼가지고 북한은 김일성 주체사상이고 김일성교예요. 여기서 김일성이라는 말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를 딱 합치면요 딱 바꾸면 2400만이 한꺼번에 돌아오는 것이에요. 그럼 퍼센테이지 50%, “너희는 나오라, 돈 없이 갑도 없이 오라.” 이사야의 말씀을 그대로 북한에서 그대로 쓰고 있어요. 성령님이 임하거나, 혼자 일하지 않고 팀워크 갖고 일하게 하시고, 무명의 성도들의 관심에서 받아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203350이 되리라 믿습니다.
 
♣요약
예수님의 피의 능력으로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불신의 죄를 씻어주시는 주님을 찬양하며 날마다 새 선물을 받아 영적인 상전벽해를 경험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이름이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 새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기념식에 기록된 우리가 될 줄로 믿고, 나에게 주신 말씀을 받아들이고 세상은 몰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기억한다는 것을 믿고 끝까지 승리하는 하나님을 진실한 자녀가 되어야 한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일을 구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약속해 주신다는 것을 확신하며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와 말씀이 나에게도 그대로 역사하게 되시기를 간구하자.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 제사장과 레위인 및 성전 봉사자들 등이다. 예루살렘에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많이 있었는데 이것은 예루살렘이 정치, 군사, 경제의 중심지이고 성전이 중심인 종교의 중심지라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하나님을 섬겨야 하며 또한 언제나 깨어서 기도하여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말씀을 상고하고 언제나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동시에, 성도들을 구제하고 믿음이 약한 자를 돌봐야 한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항상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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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헌신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3년 9월 9일)
제목: "하나님을 위한 빈 자리"
말씀: 마태복음 27:3~5 열왕기상 3:7
대표기도: 박경희집사 목양4팀(여직장인대교구장)
찬양인도: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말씀읽기: 김성훈 형제(청년4국), 김선호 자매(대학4부)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박지웅 목사님(내수동 교회)
마무리 기도: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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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7:3~5 열왕기상 3:7,
*마태복음 27:3~5
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열왕기상 3:7
7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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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웅 목사님(내수동 교회)
대단히 반갑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가장 위대한 인생이 어떤 인생일까요? 반대로 하나님께서 보실 때 가장 별 볼 일 없는 인생 이게 어떤 인생일까요? 여러분, 오늘 새벽에 우리가 함께 모인 것도 우리가 위대한 인생을 살기 원하는 그런 우리의 소원 때문 아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아니고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 그것도 아니고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위대한 인생, 그리고 영광스러운 인생, 이 말은 우리가 하는 판단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판단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죠. 사실은 다를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대단히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위대한 인생은 어떤 인생일까? 우리가 함께 읽는 게 본문 말씀인데 먼저 우리 요한복음 17장 12절을 잠깐 보시면은 예수님 기도의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7:12,
12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그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렇게 돼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 멸망의 자식을 누구를 가르치신 말씀인지 여러분 잘 아시죠? 이 멸망의 자식은 가롯 유다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가롯 유다의 인생을 가리켜서 멸망의 인생, 멸망의 자식 때, 왜 가롯유다의 인생을 망할 인생 멸망의 인생이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인가? 여러분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바랐기 때문에, 틀린 것은 아닌데 사실 그렇게 따져보면 베드로도 별반 사실은 차이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냥 부인하지 않고 성경에는 뭐라고 돼 있는 저주하며 부인했다. 그렇게 돼 있거든요. 가롯 유다를 향해서 멸망의 인생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우리가 오늘 읽은 이 본문 속에 아주 중요한 힌트가 있습니다. 읽은 본문 3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면 뭐라고 읽는가 하면요.

*마태복음 27:3-5,
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5절 말씀을 한번 보시면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놓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여 죽은 자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스스로라는 말을 우리가 유인했으면 좋겠습니다. 스스로 말 그대로 말 그대로 스스로입니다. 자기의 마음대로, 여러분, 뉘우쳤으면 회개하고 돌아오면 되는데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여러분 이 스스로라는 말은 좋게 말하면 소신대로, 나쁘게 말하면 지 마음대로, 이제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이 스스로라는 말 속에 가려 유다의 인생의 특징 아주 중요한 그 특징을 이 말씀이 우리 가운데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롯 유다의 인생은 어떤 인생이냐?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죽을 때도 자기의 마음대로 소신대로 자기 마음대로 죽어버려요. 하나님께서 이 가롯 유다의 인생 가운데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자기의 생각 자기의 마음으로 그의 인생은 막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 예를 하나 생각해 보십시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마리아가 황유복합을 깨뜨리는 그 순간에 가리유다가 했던 말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4절 5절에 보면,

*요한복음 12:4~5,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가롯 유다가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이 향유를 예 300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면 좋겠다. 근데 여러분 저 말씀을 하고 난 그다음에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는가? 입니다. 그는 도적이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부정적이죠. 여러분, 가난한 사람들에게 300데나리온을 팔아주는 이게 뭐가 잘못됐습니까? 그렇게 하면 좋죠. 근데 성령은 이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왜? 그건 가롯 유다에게 자기 생각이 하나님께서 주신 생각도 아니고, 하나님과 의논을 하는 것도 아니고요. 하나님과는 아무 무관한 그것으로 300개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하는 것이 이게 나쁜 것은 아닌데, 문제는 이게 전부 그냥 자기 생각인 거예요. 자기 생각.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 가정 유다 말하자면 멸망의 인생, 망할 인생, 이 망할 인생의 특징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고요. 오늘 설교 제목처럼 빈자리라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빈자리라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이게 망할 인생입니다. 반대로 여러분 열왕기상 우리가 읽은 본문에 대표적으로 솔로몬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솔로몬이 하나님한테 믿음이 제일 좋았을 때, 그때 뭐라고 말하는가?

*열왕기상 3:7 ,
7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이 솔로몬의 고백입니다. 출입을 할 줄 모른다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들어오고 나가는 것도 나는 못합니다. 나는 기본적인 건 아무것도 못합니다. 나는 숨 쉬지도 못합니다.

여러분, 솔로몬은 바보가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솔로몬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가장 위대한 천재죠. 천재, 근데 어떻게 이 사람이 출입을 못한다는 말을 한 것일까요? 솔로몬의 인생 위대한 인생 적어도 말년에 탈락을 하기 전까지 그가 위대한 인생을 사는 그 순간에 그의 인생의 단적인 특징,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빈자리가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을 빌기 위한 빈자리가 너무너무 많습니다. 위대한 해 책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위대한 이 책과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위대한 인생이 이게 다릅니다. 많이 많이 다릅니다. 여러분 성경은 어떤 인생이 위대한 인생이냐? 시간이 가면 갈수록 하나님을 위한 존재니까 가면 갈수록 더 많아지는 인생, 그래서 하나님 백성의 특징을 설명하실 때 예수님께서 하나님 백성의 특징 8가지로 설명을 하실 때, 그때 처음 나오는 첫 번째 내 백성은 이런 백성이 내 백성이다. 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첫 번째 말씀하시는 말씀이 우리가 잘 아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이게 위대한 인생입니다. 여러분 기도원을 한번 생각해 봐 주십시오.

기드온 왜 하나님께서 기도원을 찾아오셨을까요? 왜 기도원이 하나님의 대안이냐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찾아오실 때 미디안의 압제를 위해서,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서 기드온을 찾아오실 때 왜 기드온이었느냐? 그 이유를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사자에게 하는 이 첫마디 그가 하는 이 한마디 말이 그 이유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사사기 6장 13절 앞에 한번 보시면 기도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사기 6:13,
13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 모든 기적이 지금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여호와의 사자 앞에 기드온이 마치 옆에까지 꽉 눌러 있던 그 무언가를 그냥 쏟아내는 것 같은 그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얼른 보면 좋은 말이 아닌 것 같은데 이게 바로 기드온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이유였습니다.

왜 기드온이냐? 여러분, 기드온은 하나님을 향해서 오늘 본문에 우리가 읽은 이 말씀처럼 말이죠. 실망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이적은 도대체 어디가 가느냐 이거죠. 그럼 여러분 이 실망이 많다는 것은 뭘 말씀하는지 뒤집어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실망이 많다는 것은 뭘 말씀하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기대가 많이 할 것입니다. 여러분 부부가 왜 싸웁니까? 기대하다 여러분 기대 안 하는 사람이 싸우는 거 봤습니까? 기대하지 않으면 절대로 싸우는 일이 없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을 향해서 실망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여태까지 너무너무 기대를 많이 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기대를 많이 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빈자리가 많다는 뜻입니다. 기드온이 인생의 특징은 다른 것이 아니고요. 하나님을 위한 빈자리가 너무너무 많았던 인생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찾아오신 이유는 너무너무 간단합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이 보실 때 하나님을 위한 빈자리가 많았기 때문이 그러면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오랜 세월 미리안의 악재 속에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했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 이유도 대단히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여태까지 찾아오지 못했던 이유 그 이유는 다른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오실 수 있는 빈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죠 여러분 우리가 식당을 들어가도 빈자리가 있어야 들어갈 거 아니에요 근데 이스라엘에는 하나님께서 들어오실 수 있는 빈자리가 없었습니다. 근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빈자리를 딱 하나를 발견하신 것이죠. 하나님께서 발견하신 그 빈자리가 어디냐? 기드온이 있어요. 기드온의 마음속에 실망이 많았던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와서 하시는 첫마디가 뭔가 하니까 큰 용사여!. 니가 큰 용사다. 왜? 네가 빈자리니까, 이 빈자리 속에 내가 함께하면 너는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인생을 살 것이니까, 너는 큰 용사가 맞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믿는 이 성경 진리의 말씀을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원리를 우리가 정리를 좀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적인 타락이라는 것이 도대체 뭘까요? 여러분 영적인 타락이라고 하는 것은 술 먹고 방탕한 것, 그게 영적인 타락의 본질이 아니죠. 물론 술 먹고 방탕하면 안 되겠지만 술 먹고 방탕한 이게 영적인 타락의 본질이 아니고, 오늘 이 말씀 대로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을 위하여 빈자리가 점점 점점 없어지는 것 이게 영적인 타락입니다.

얼마 전에 승천하신 조용기 목사님께서 후배 목사님들을 향해서 강의를 하실 때 참 제가 잊을 수 없는 한마디가 있습니다. 그분이 살아계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한 평생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치마 자락을 붙잡고 징징대고 늘어지는 것처럼 본인은 매일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나도 못해요. 하나님 나 못해요. 하나님, 성령 충만 주세요. 하나님 성령 충만 주세요. 성령 충만, 성령 충만, 매일매일, 그 심정으로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살았다. 그 이야기로 기억을 하고 있다. 빈자리가 가면 갈수록 원하지만 인생이 되어야 한다. 여러분, 100년 전, 20세기 초에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한국의 부흥이 오기 전에 영국 웨일리스에 큰 부흥이 왔습니다. 정말 그 시대의 기록들을 이렇게 보면 정말 놀랍습니다. 영국에서 왔던 그 큰 부흥이 한국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인도의 부흥 그리고 호주의 부흥, 그리고 더 크게는 미국의 아디사스트릿 미국의 부흥으로 이렇게 이제 전 세계 부흥의 역사가 이렇게 확장이 되는 웨일스의 영국 웨일스의 부흥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영국 웨일스의 부흥의 기록들을 이렇게 보면은 뭔가 이렇게 우리에게 느껴지는 기록들이 있는데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기도회를 한 번 열었더니 이 기도회가 8시간이 지나도 기도회가 끝나지 않겠다. 이런 이야기가 있고요. 술집에서 사람들이 이렇게 술을 마시는데 하나님의 임재가 얼마나 강했는지 술잔을 들어 올리는데 팔이 갑자기 한순간에 그냥 마비가 되었다. 이런 기록도 있습니다. 그 당시에 이제 이 광부들, 광산에서 석탄을 캐는 광부들이 은혜를 받고 났더니 제일 먼저 나타났던 현상이 자기가 하는 말이 바뀌었다. 이게 말이 말이 바뀌고 났더니, 석탄 생산량의 차질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왜? 석탄 생산량에 차질이 생겼을까요? 이 석탄을 이거 이제 이걸 실어 나르는, 그 당시는 철도가 아니고 이제 노새들 말들, 노새들이 이 석탄을 이렇게 이동을 하는데, 주인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를 못해요. 이전에는 계속 욕을 듣다가 처음 보는 건 아니지, 이게 저는 진짜인지 아닌지 하여튼 역사 경력은 그렇게 돼 있어요. 그래서 이 모세를 다시 훈련을 시켜야 돼요. 다시 훈련을 놀라운 이야기죠 이런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예배의 임재가 왜 하나님의 예배 속에 인재가 강했던지 설교자가 설교를 못했다. 그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어서 그 자리에 물러서 있어야 될 정도,,, 어떤 기록에는 이런 기록도 있습니다. 여호수아 새 조수아라고 하는 목사님이 1904년 9월 20일 그의 일기에 보면 낮에 예배가 시작이 됐는데 이 예배가 밤 12시 시작되어도 끝나지를 않는 상황 집에 돌아가라고 아무리 광고를 해도 이게 통제가 안 되고 밤 1시가 넘어가고 그래도 통제가 안 되고 이런 기록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 영국 웨일스에 있었던 이 강력한 영적인 부호 이 부흥에 가장 성공해서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던 유명한 한 청년이 있죠. 한번 이름을 들어 보셨으리라고 생각하는데 “에반 로버츠” 그 당시 26살 27살 26살, 이 에반 로버츠라는 청년은 그의 나이 13살 때부터 무려 13년간 이 부흥을 위해서 기도했다고 돼 있습니다. 자기가 골방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결정적으로 그를 붙들어서 그 기도가 끝난 이후에 에반 로버츠는 이전의 에반 로버츠와 전혀 다른 사람이 돼가지고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이 에반 로버츠를 그야말로 마음껏, 마음껏 사용했다. 그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정적인 계기는 이 에반 로버츠가 하나님 앞에 씨름하면서 기도를 했던 그 기도인데요. 그 기도가 무슨 기도였는가?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나를 굴복시켜 주십시오. 나를 굴복시켜 주십시오!!” 이게 에반 로버츠의 기도의 제목이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 짧은 기도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에반 로버츠가 지금 뭘 기도하고 있는지 이해가 됩니까? “하나님 나를 굴복시키십시오.” 뒤집어 말하면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굴복이 안 된다 그 말이죠. 굴복이 안 된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 속에서 자기가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들어와야 할 빈자리가 있어야 되는데, 그 빈자리도 없고 오늘 가벼운 유대와 같이 그냥 말 그대로 스스로 우리가 스스로 제 마음대로 살다가 죽을 때도 자기 마음대로 죽어버려요.

하나님을 몰아내려고 하는 자아죠. 자아, 이걸 에반 로버츠가 발견을 하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위한 빈자리를 만들기를 원하는데 굴복되지 않는 자기의 자아다. 이걸 가로막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씨름 씨름하면서 기도를 했던 그 기도가 바로 에반 로버츠의 결정적인 기도였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를 굴복시키십시오.” “나를 굴복시켜 주십시오.” 그리고 나서 에반 로버츠스가 하나님의 손에 쓰임을 받을 때에는 이 에바 로버츠가 자기의 인생에 찾아오신 이 하나님을 위한 빈자리 이걸 얼마나 강력하게 생각했던지 얼마나 귀하게 생각했던지 그의 기록에 보면은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자기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느껴지지 못할 때에는 회중들을 앞에 두고 무려 3시간 동안 설교를 하지 않고 중단을 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성령께서 지금 내 속에서 쭉 충만하게 말씀하시는 그때까지 3시간을 기다렸다가 15분 설교하고 내려와야 했대요. 교인들 집에 안 갔는지 몰라요. 놀라운 게 아니죠. 여러분 위대한 인생입니다. 위대한 인생 하나님을 위한 빈자리 시간이 가면 갈수록 여러분 우리의 빈자리가 커지는 인생 하나님께서는 그 인생을 위기는 인생이 말씀을 좀 정리를 해야겠습니다.

※2016년도 제가 내수동교회에서 허락을 받아서 1년은 좀 귀한 안식년을 보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이제 호주에서 마지막 몇 달을 이렇게 보낼 기회가 있는데 그때 이제 저희 아이들하고 제가 좀 특별한 대화를 한 번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잊을 수 없는 이유가 지금은 이제 아이들이 다 갔지만 그때는 이제 중, 고등학교 아이들 학생들이었죠. 아이들이 저한테 인생에 대해서 신앙에 대해서 무슨 진지한 이렇게 질문을 한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그냥 편안하게 이야기를 하지 뭐 이렇게 진지하게 근데 그날 손을 잡고 저한테 와가지고 정말 진지하게 질문을 했습니다. 처음이었습니다. 무슨 질문을 하느냐 우리가 아빠를 볼 때에 아빠는 별로 능력이 없는 것 같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래도 너희들 이제 그다음 이야기인데요. 아무리 봐도 아빠는 그렇게 능력은 많은 것 같지는 않은데, 근데 참 쉽게 그렇다고 해서 안 되는 것도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인생이 그냥 이렇게 그냥 이렇게 되는 것 같아요. 분명히 우리가 볼 때는 별로 이렇게 능력이 없는데 그러면 이게 이제 인생이 자꾸 이렇게 막히고 그래야 될 것 같은데 근데 뭔가 이렇게 그런 것 같지도 않고, 그래서 정말 한 가지 묻고 싶다 이거죠. 없는 능력으로 이 땅을 사는 비결이 뭐야? 그래서 진짜 깜짝 놀랐습니다. 애들이 저런 질문을 하는 것도 놀랐고 애들 눈에 비친 아빠의 모습도 갖고 굉장히 제가 연구를 받았어요. 근데 여러분 제가 처음 질문인데 한 번도 제가 의도적으로 제 입에서 하지 않았던 말이 제 입에서 나왔습니다. 근데 그걸 일부러 이야기를 안 했던 것이 아니고 그리고 또 일부러 그런 생각을 한 것도 아닌 것 같아요. 그냥 깊은 곳에 묻어 있는 묻어 있는 묻혀놓은 생각인데 이걸 일부러 굳이 꺼내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었던 것 같아요. 능력 없는 사람이 이 땅을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 아빠가 있기는 있는데, 이거는 여태까지 아빠가 한 번도 입 밖에 베어서 말을 해본 적이 없다. 너희들이 그냥 적당히 들을 것 같으면 아빠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고 정말 진지하게 이 아빠의 말을 듣고 싶으면 아빠가 이야기를 한다. 처음 하는 이야기 실제로 그렇습니다. 처음 능력이 없는 사람이 이 땅을 살아가는 구경이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어떻게 해야 될지, 하나님께서 나를 봤을 때 좀 불쌍하게 보여라 불쌍하게, 저거는 내가 버린 게 아니겠지. 저는 인생을 도저히 살 수 없는 인생이라, 그래서 기도할 때도 그냥 기도하지 말고 조금 이렇게 불쌍한 모습이라고 뭐 이렇게 좀 이렇게 없는 티를 좀 내면서 사실 일부러 제가 그런 생각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일부러 사는 것도 아닌데 그냥 그 당황스러운 질문을 받고 났더니 제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던 이런 생각이 내가 했었구나 하는 그 생각이 그제서야 이제 생각이 납니다. 나와 그 아이들한테 진지하게 제가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빠가 볼 때 이 땅을 살아가는 가장 위대한 비결은 하나님께서 나를 보실 때, 어떻게 하든지 내가 저기 도와줘야 되겠다. 그런 생각이 들도록 만들어야 돼. 여러분 제가 시간이 지나고 나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도대체 뭘까? 이렇게 한번 정리가 되는 거죠. 능력의 근원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능력의 근원은 하나님의 임재에 있습니다. 아멘. 그래서 위대한 인생은 여러분 시간이 갈수록 빈자리가 늘어나는 인생입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젊을 때보다는 들었을 때 가면 갈수록 솔로몬의 고백처럼, 솔로몬, 근데 하나님 앞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힘이 큰 것이 심이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사람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하니라.”

♣요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대한 인생을 살기 원하신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그러한 인생을 살지 못함을 깨달아서 오늘 이 세상에 방법과 이 세상의 삶이 너무나도 다른 세상을 우리 하나님께서 하나님 백성들에게 오늘도 찾아오기를 원해야 한다. 우리의 빈자리를 찾기 원하시고 그러므로 우리의 남은 인생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하나님을 위한 빈자리가 많아지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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