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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주후 2024년 1월 31일)
제목: 말씀 대로(大路)
말씀: 이사야 55:6~9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설성환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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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55:6~9,
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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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존귀하신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시니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주님 이 시간 드려지는 이 예배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이름만이 높아지는 예배가 되게 하시고 이 시간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온전히 깨닫게 하셔서 평생 주님과 동행하며 말씀대로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우리의 삶의 이유와 목적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한 수요 저녁 기도회에 나오신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은 수요 저녁 기도회를 통하여서 회복을 넘어 부흥의 르네상스를 경험하는 이 현장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이사야 55장 6절부터 9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주신 말씀 이사야 55장 6절에서 9절 말씀을 저와 함께 교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55:6~9,
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아멘, 사람은 태어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그리고 아침에 눈을 떠서 또 저녁에 이르기까지 매 순간 수많은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들도 있겠지만, 우리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우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런 생각들도 있을 것입니다.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 있는 퀸즈 대학 교회 심리학자들이 수행한 연구에 따르면 평균적으로 사람은 하루에 6,200번 정도의 생각을 하면서 살아간다. 라고 합니다. 지금 현재 수요 저녁 기도회 현장에 참석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우리 모두는 6,200번의 생각 중에 포함되는 여러 가지의 생각들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이 순간에 어떠한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을 살펴보게 되면 우리가 삶속에서 하게 되는 수많은 생각들이 때로는 하나님 보시기에 영광이 되고 또 기쁜 그런 생각이 될 때도 있겠지만, 때로는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르지 못하고 하나님의 생각과는 다른 그런 생각들을 우리가 취할 때가 있다. 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말씀을 함께 보면서 여러분들은 어떠한 생각이 지금 이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시나요?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들었던 생각은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일평생 살아가게 되면서 지금까지 경험한 대로 그리고 우리의 마음대로 정한 그러한 기준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평생 하나님 마음에 딱 맞는 그러한 생각으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평생 내 이기적인 욕심과 그러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그러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꽉 차 있는 그런 생각으로 매일매일을 살아가게 되는 것, 저와 여러분들이 이렇게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시는 그러한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하는 마음이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 머리 가운데 가득 채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각을 하고 또 그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그러한 삶을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오늘 본문 말씀 6절과 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또 하나님을 부르고 또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그러한 첫 단추가 깨어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전적으로 붙드는바 되지 않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을 부르지도 않으며 날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는 인생은 결단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각을 할 수도 없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절대로 살아갈 수 없다. 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각, 그리고 그러한 삶을 우리가 살아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찾아야 되고 또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께로 날마다 돌아가는 그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이 그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성도로서 경험하게 되는 영적인 유익은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첫 번째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I. 첫 번째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삶이 온전하게 붙들려서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주님을 간절히 부르는 사람, 하나님께로 늘 돌아가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고 또 그것이 시작되었다. 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 라는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리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될 때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떠한 변화들이 일어나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모든 일들을 바라보면서 저와 여러분들의 입술의 고백이 하나님의 선하신 고백을 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들 중에서 고난과 여러 가지 문제들이 함께 섞여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우리의 삶 가운데 신뢰한다. 라는 것은 우리에게 처해 있는 상황에 의해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고백이 결코 바뀌는 삶이 아닌 줄로 믿습니다. 상황과 환경에 따라서 신뢰하는 그러한 행동은 옆집 이웃에게도 흔히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그런 행동과 태도일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어떠한 상황이나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힘은 하나님과의 그 지속적인 관계를 통해서만이 가능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오래된 하나님과의 관계와 교재의 시간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두터운 신뢰 관계를 만들어내게 된다. 라는 사실입니다. 그 두터운 신뢰 관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생기게 된다면 이전에는 오직 나 스스로만 믿고 나 자신만을 의지하는 생각으로 살았던 그런 사람에서 이제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부르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하나님께 의존하는 사람으로 변화하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일들을 그저 이해하며 넘어갈 때가 너무나도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해한다. 라는 것은요 내가 상황을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일 때에만 내가 비로소 행동하겠다. 라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철저한 상황과 환경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 상식 안에서 또 내 지식 안에서, 나의 경험 안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라는 거죠.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이해관계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들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함을 통하여서 하나님과 자녀와의 관계가 되었기 때문에 그 복음의 능력으로 깊은 친밀감이 형성되어 있는 관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그 선하심 가운데 하나님을 온전하게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야고보서 1장 17절의 말씀을 보게 되면,
 
*야고보서 1:17,
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은 상황과 그리고 환경에 따라서 정말 수시로 변하는 그러한 모습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전적으로 사람을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늘 한 결 같이 신실하게 변함없이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우리가 믿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신뢰할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나의 상식에서 벗어난 그런 상황을 우리가 맞이하게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지만 또는 내가 생각했던 길과는 다르지만 저와 여러분들이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함으로 순종하며 뚜벅뚜벅 걸어가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 길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시온의 대로(大路)였다. 라는 것을 깨닫는 날이 올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또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는 사람들은 내 지식과 내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로마서 8:28,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아멘. 의사는 환자를 진찰하고 또 진찰한 것에 따라 적절한 처방을 내리게 됩니다. 어떠한 약을 먹어야 할지 그 처방전을 통하여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의사가 진찰한 것과 상관없이 약을 처방해 주지는 않는다. 라는 것이죠. 또한 처방된 이 약들을 만약 우리가 따로 사용한다면 그 한 알 한 알 우리가 따로 복용하고 따로 사용한다면 때로는 그 약의 성분이 우리의 몸에 해로운 약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의사의 처방전에 의해서 이 약들이 조합되었을 때는 우리에게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까? 각각의 약들이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그 기능들이 섞여서 아픈 환자의 병이 잘 치료될 수 있게 하는 그러한 역할을 하게 한다. 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겪은 일들을 하나씩 따로 떼어놓고 보면 때로는 우리의 인생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거나 때로는 좋아 보이지 않는 그런 일들을 우리가 경험하게 될 때도 있겠지만, 그런데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그 하나하나의 일들을 이어 붙이셔서 가장 선하게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의 눈으로 목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불행한 환경에 놓이게 되면 어떻게 이것이 내 인생에서 선을 이룰 수 있겠느냐, 라고 질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신뢰하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그 하나하나의 일들을 놓고 보게 되었을 때, 그것이 때로는 고난이고 때로는 그것이 우리의 삶 가운데 문제의 시간이라고 생각했었던 그 사건들이 결국에는 우리들을 그리스도인답게 성장시키고 다듬어가고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게 만드는 하나님의 숨겨진 축복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이사야서 55장 8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목소리로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이사야서 55:8,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아멘. 하나님의 생각과 또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길과는 다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또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며 하나님과 평생토록 우리가 교제하며 살기를 원한다면 유언하고 연약한 그러한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각으로 날마다 바꿔가는 그러한 우리의 모습이 있어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우리가 믿고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한다. 라는 것은 예수님이 가셨던 길을 따라가는 그러한 삶인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가셨던 길을 우리가 따라간다. 라는 것은요 그분을 믿는다. 라는 것이고 또 그분을 신뢰한다. 라는 우리들의 신앙 고백이 됩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온전히 구하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매 순간 결정할 때 그 마음과 생각과 행동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 그 생각을 받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내 생각과 내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과 그 생각으로 가득 채워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을 찾는 하나님을 찾고 그분을 부르고 하나님께로 날마다 우리가 돌아가게 될 때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경험하게 되는 영적인 유익
 
II. 두 번째는 우리의 생각보다 높으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붙들려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간절히 부르고 날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될 때, 우리를 향한 그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깨닫게 되고, 그 하나님의 위대한 여정에 함께 동참하게 되는 그러한 복된 삶을 누리게 됩니다. 그 여정 가운데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신실하게 인도하시는 것을 우리가 경험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죽음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을 때, 우리의 경험과 우리의 역량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의 위대한 인도하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을 우리는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건을 우리가 생각해 본다면 가장 대표적으로 홍해가 갈라진 그 사건을 우리가 기억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해서 그 광야를 지나가게 될 때 뒤에는 수많은 애굽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려고 쫓아오고 있는 그런 긴박한 상황입니다. 앞에는 홍해 바다 때문에 막히게 돼서 앞으로 갈 수도 없고, 또 뒤에는 그 애굽 군대가 쫓아오고 있기 때문에 뒤로도 갈 수도 없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바다를 반으로 가르시고 그 길로 행하게 하신다. 라는 것을 우리의 머릿속으로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아무도 그러한 일들을 생각해 보지 못했을 것 같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으로 보았을 때, 그 홍해의 바다는 자신들이 애굽 군대에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러한 장소로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어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과 분명하게 달랐다. 라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상상하지 못한 높으신 하나님의 생각이 거기에 숨겨져 있었다. 라는 겁니다. 우리들은 우리를 향한 높으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미 분명하게 예비 되어 있다. 라는 사실에 우리의 시선을 주목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삶에 허락하시는 그 문제들과 어려움들을 우리의 삶 가운데 지나게 하실 때 문제를 피할 길과 해결할 길을 이미 분명하게 예비해 두셨다. 라는 것을 우리가 분명하게 믿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높으신 그 하나님의 계획,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그 홍해 바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게 만드는 죽음의 바다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고 애굽 군대를 수장시키는 구원의 바다였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고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홍해 바다를 갈랐던 그 사건뿐만이 아니라 요셉의 인생을 다뤄가셨던 그 하나님을 보면 동일하게 하나님의 높으신 계획과 그 생각을 우리가 볼 수 있게 됩니다. 야곱의 11번째 아들이었던 요셉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자라나게 됩니다. 아버지 야곱이 그 요셉을 특별히 차별하고 사랑해서 그 아끼는 모습에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고 또 질투하는 그런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마음이 점점 자라나게 돼서 결국에는 요셉을 죽이고자 하는 그런 마음까지 이 형들이 갖게 됐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유다의 제안으로 요셉은 요셉을 죽이지 않고 애굽의 노예로 팔리게 하는 그러한 일을 행하게 합니다. 요셉이 애굽의 노예로 팔려간 이후에도 바로의 신하 보디발의 집에서 머물게 되었던 그 과정들, 그리고 그 집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그 억울한 일로 인하여서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에 갇히게 되고, 또 그 감옥에서 있었던 일들 인간적인 눈으로 보게 되었을 때 너무나도 암울한 현실을 경험하였었던 요셉이었지만, 결국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그 인도하심 안에서 애굽의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그런 요셉을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 가운데서 요셉은 자신을 애굽으로 팔아넘긴 그 형들을 용서하고 창세기 50장 20절 말씀에서처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목소리로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창세기 50:20,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아멘 요셉의 고백은 어떻게 고백하고 있습니까? 자신이 경험한 수많은 이해되지 않는 상황과 환경을 하나님께서 선으로 바꿔주셨다. 라고 그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신이 경험한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난의 시간들이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의 일부였다. 라는 것을 깨닫고 고백하는 그러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라는 거예요. 우리들은 이러한 성경의 이야기들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들의 생각보다 높다는 것을 다시금 분명하게 확인해야 합니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태복음 16장 21절의 말씀을 보게 되면,
 
*마태복음 16:21,
21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서 많은 고난을 받게 되고 또한 죽임을 당하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게 되실 것을 말씀해 주는 장면이 나오게 됩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 말씀인데요. 우리 한목소리로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3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아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고 또 죽임 당하시고 다시 3일 만에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죄를 해결해 주시고 우리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한 일들을 예수님께서 감당할 것을 얘기해 주시는 장면이 이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2절의 말씀을 보게 되면,
 
*마태복음 16:22,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제자 베드로는 그 예수님의 말씀에 이렇게 반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태복음 16장 23절의 말씀을 보면 이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 말씀에 대해서 이렇게 반응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16:23,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 라고 강하게 질책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당장 우리의 눈에 좋아 보이는 그러한 길에 집중하고 있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생각을 늘 마음에 품고 행동하시는 그러한 모습이었다.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서 모든 고통과 고난도 다 당하시고 죽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한 그러한 생각이셨지만, 베드로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고난을 보고 인간적인 생각을 했던 그러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이 계획하고 생각한 대로 되지 않아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온전하게 신뢰하기 때문이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가장 완벽하게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수도 없이 겪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나한테 이러한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게 될까?’ 라는 생각이 들 만한 그런 수많은 일들이 계속 우리의 인생 가운데 끊임없이 나타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내 생각은, 내 계획은, 이렇게 하면 잘 돼야 되는데 왜 그렇게 되지 않을까라고 불평하고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결국 그 사건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의 순간이었고, 그렇게 축복의 순간이었다. 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고백하게 하시는 그 은혜의 순간을 우리에게 주실 줄로 믿습니다.
 
내가 원했던 문이 열리지 않아서, 차선책으로 다른 문으로 들어봤는데 뒤돌아보니까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처음 가려고 했었던 그 길보다 오히려 훨씬 더 좋은 길이었다. 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날이 올 줄로 믿습니다.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길을 우리의 기준과 경험과 생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라고 해서 하나님의 길이 틀렸다라고 속단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실수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선하신 그 방법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실수가 없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온전히 굳건히 믿고 우리의 인생 가운데 가장 신실하게 인도하고 계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께 날마다 붙들려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그 말씀의 대로를 기쁨으로 걸어가는 복된 매일의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요약
오늘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더욱 친밀함을 누리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늘 고백하며 일평생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환경을 경험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생각 생각보다 더 큰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말씀대로 더 높은 하나님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당장 인간적인 관점으로 좋아 보이는 길에 집중하는 인생이 아니라, 실수가 없으신 그 하나님의 높은 뜻과 계획을 늘 신뢰하여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에 늘 붙들린바 되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살아갈 수 있는 복된 평생이 되기를 간구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기로 작정하신 때를 말한다. 또한 만날 만한 때란 죄인이 회개하고 죄에서 돌아서겠다고 하는 결단을 내리는 때를 의미한다. 여호와께서는 그를 찾는 이에게 나타나시고 그에게 청종하는 자를 가까이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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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금융 상식 퀴즈 O X] 1월 22일 (830)




1. 현재 우리나라 기준금리는 얼마일까?
① 연 3.0% ② 연 3.25%
③ 연 3.5% ④ 연 3.75%

2. 다음 중 개인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고 신용카드를 사용할 때마다 불어나는 지표를 고르면?
① 국가채무 ② 가계신용
③ 담보인정비율(LTV) ④ 잠재성장률

3. 국제유가가 폭등할 때 서민의 물가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정부가 시행할 수 있는 정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기준금리 인상 ② 유류세 인하
③ 취득세 인하 ④ 조정대상지역 확대

4. 경제에 대한 공포와 불안 심리가 퍼지면서 투자자들이 자산을 부랴부랴 팔아치우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은?
① 패닉 셀 ② 패닉 바잉
③ 어닝쇼크 ④ 어닝서프라이즈

5. 지난 13일 진행된 이 나라 총통 선거가 세계적 관심을 받았다. ‘타이베이’와 ‘TSMC’ 하면 떠오르는 나라는?
① 태국 ② 대만
③ 싱가포르 ④ 필리핀

6. 국제유가 기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3대 원유가 아닌 것을 고르면?
① 서부텍사스원유 ② 브렌트유
③ 두바이유 ④ 팜유

7.국회에서 소수당 의원이 본회의에서 일부러 장시간 발언을 이어감으로써 다수당의 일방적 의사진행을 합법적으로 저지할 수 있게 만든 제도는?
① 캐스팅보트 ② 필리버스터
③ 플리바기닝 ④ 포이즌필

8. 저작권, 미술품, 상업용 빌딩 등 개인이 접근하기 어려웠던 자산에 여러 사람이 소액 투자하고 이익을 함께 나눠 갖는 신종 투자 방식은?
① 분산투자 ② 조각투자
③ 대체투자 ④ 퀀트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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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제도권 진입 성공…암호화폐의 앞날은?



비트코인 가격을 따라 움직이게 만든 금융상품인 비트코인 현물 상장지수펀드(ETF) 11개가 지난 10일 미국 증시에 처음으로 상장됐습니다. 비트코인의 미래 가격을 반영하는 선물 ETF가 미국 시카고상품거래소(CME)에서 거래되고 있지만, 현물을 기초자산으로 한 ETF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첫 승인을 받은 겁니다. 이로써 세계 최대 자본시장인 미국 증시를 통해 비트코인에 투자할 수 있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습니다. “암호화폐가 제도권(시장)에 진입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암호화폐는 디지털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 중 하나입니다. 나카모토 사토시(일종의 필명)란 사람이 2008년 11월 ‘개인 간(P2P) 전자 화폐 시스템’이란 글을 이메일로 뿌리면서 등장했는데요, 나카모토는 이 글에서 정부(중앙은행)의 화폐 발행 독점권을 비판합니다. 정부로선 화폐 발행량을 늘리려는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고, 이에 따른 화폐가치 하락으로 사람들이 고통받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탈중앙화한 시스템을 만들고 거기에 맞는 전자화폐를 개발해 통용시키겠다고 선언합니다.

비트코인 현물 ETF 승인이 이런 나카모토의 꿈을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될지 주목됩니다. 암호화폐가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법정통화와 경쟁하며 과연 화폐로서 기능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세계 각국이 대항마로 추진 중인 중앙은행디지털화폐(CBDC)는 암호화폐와 어떻게 다른지 4·5면에서 살펴봤습니다.

암호화폐, '투기의 온상' 오명 벗을지 관심
'디지털 금(金)' 공인받는 계기 마련했죠.


암호화폐가 세상에 나온 지 벌써 15년이 흘렀습니다. 비트코인과 블록체인 기술에 대해 한 번쯤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암호화폐 가격이 급등락하거나 거래와 관련한 큰 사건이 터질 때만 관심이 쏠린 터라 암호화폐의 개념이 가물거릴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살펴볼까요?

디지털 신용화폐, 발상은 훌륭하지만…

현재 통용되는 화폐 가운데 금화나 은화를 빼고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 경우는 드뭅니다. 세계 각국의 법정화폐는 중앙은행에 대한 신뢰, 사회적 약속에 뿌리를 둔 신용화폐의 일종이죠. 이런 중앙은행이나 금융기관의 존재 없이도 안전하게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화폐는 과연 없을까요? 그러려면 일단 거래 당사자 외에는 거래 내용을 볼 수 없게 암호화해야 할 겁니다. 다음으로 이런 거래 정보를 담은 장부인 원장(ledger, 元帳)을 모든 거래 당사자가 보관하고, 새로운 거래가 발생하면 그 내용을 기록한 장부를 똑같이 업데이트하도록 하면 됩니다.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기술이 블록체인(blockchain)이고, 이를 기초로 암호화폐가 탄생한 것입니다.

요즘 ‘OO페이’ 등으로 간편하게 쓸 수 있는 디지털화폐가 많은데, 이렇게 어려운 개념의 암호화폐가 왜 필요할까요? 예를 하나 들어보죠. 우리는 몸이 아플 때 병원과 약국을 이용하며 많은 개인정보를 남기게 됩니다. 한편으론 편리하지만, 건강 관련 개인정보가 아무렇게나 유통되지 않을까 불안한 게 사실입니다. 개인이 자신의 건강 정보를 직접 소유·통제하고, 의료기관이 개인의 허락을 받아 그 정보를 활용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관련한 암호화폐를 개발해 이런 데이터의 흐름과 이용을 원활하게 해준 사람에게 대가로 준다면 인기가 많을 겁니다. 암호화폐는 이와 같은 디지털 시대의 요구로 등장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암호화폐 자체가 투기의 온상처럼 된 점은 큰 문제입니다. 2009년 비트코인 한 개 가격은 0.0009달러에 불과했어요. 경품으로 비트코인을 받던 시절이었죠. 그런데 이게 2021년 9월 우리 돈으로 8000만 원을 넘더니, 다시 2000만 원대까지 떨어졌다가 이번 현물 상장지수펀드(ETF) 승인 기대감에 6000만 원까지 치솟았습니다. 시가총액 51조 원까지 상승했던 테라-루나 코인은 2022년 가치 유지에 대한 의문이 확산되며 가격이 거의 제로(0)가 되고 맙니다. FTX 같은 암호화폐 거래소들이 파산하면서 투자자들이 어마어마한 피해를 본 부작용도 적지 않았습니다.

안전한 거래, 수요 급팽창에 관심

하지만 이번 비트코인 현물 ETF의 상장 및 거래 승인으로 암호화폐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누구나 증권계좌를 통해 비트코인을 사고팔 수 있게 됐고, 증권거래위원회(SEC)가 거래를 승인함으로써 어느 정도 안전한 거래가 이뤄질 것이란 기대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게리 겐슬러 SEC 위원장의 말부터 달라졌습니다. 그는 2021년 비트코인 선물 ETF를 승인하고 현물 ETF는 불허하면서 “투자자들은 암호화폐 시장에서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으며, 마치 서부시대와 같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는데요, 이번엔 확 바뀌었습니다. 겐슬러 위원장은 “증권이 아닌 원자재 현물 ETF를 감독한 SEC의 경험을 비트코인 ETF 거래를 감독하는 데 유용하게 활용할 것”이라고 했죠. 암호화폐에 대한 감독당국의 입장이 그만큼 너그러워졌고, 달라진 암호화폐의 위상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암호화폐 수요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팽창할 겁니다. 미국 증권시장은 세계 증시 시가총액의 절반을 차지하는 최대 자본시장이기 때문입니다. ETF로 좁혀보면 세계 ETF 거래량의 70%가량이 미국에서 이뤄집니다. 블랙록, 피델리티 등 전통적인 자본시장 참여자들이 이 ETF를 사고판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니 비트코인 ETF로 132조 원에 달하는 투자금이 몰려들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겁니다. 2004년 금 ETF가 나온 뒤 금 관련 투자가 혁명적으로 바뀐 때가 있었는데요, 이번엔 암호화폐가 ‘디지털 금’으로 등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NIE 포인트
1. 블록체인 기술과 그에 기반한 암호화폐의 구조에 대해 공부해보자.
2. 암호화폐 거래소를 통한 암호화폐 매매가 왜 위험성이 큰지 토론해보자.
3. ETF가 무엇이고, 비트코인 ETF는 어떻게 거래되는지 알아보자.

화폐는 가치저장, 교환·매매 수단이어야
암호화폐 한계 분명하다는 지적도 많아.



화폐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기능을 갖춰야 합니다. 교환과 거래·지급결제의 수단, 모든 상품과 서비스의 가치를 매기는 수단, 마지막으로 가치를 저장하는 수단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 비트코인 가치가 비싸지 않았을 때는 피자 가게에서 비트코인을 돈 대신 받았다는 뉴스도 나왔죠. 당시 피자값을 비트코인으로 지불한 게 어리석은 일 같지만, 실은 비트코인 창시자인 나카모토 사토시의 생각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비트코인이 진정한 화폐가 될 수 없는 이유

미국의 비트코인 현물 ETF 승인은 그런 나카모토의 이상(理想)에 한 걸음 다가간 걸까요? 당장은 부정적 평가가 많습니다. 이번에 전 세계적 관심을 모은 것은 비트코인이 법정화폐를 대체할 수 있느냐가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세계 곳곳의 자금이 얼마나 몰려들까’ ‘비트코인 가치가 얼마까지 상승할까’ ‘한국에서도 비트코인 ETF를 매매할 수 있을까’ ‘다른 코인에 미리 투자해볼까’ 등에만 관심이 쏠렸죠. 앞으로 비트코인이 교환과 매매, 지급결제 수단으로서 각광받을지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습니다. 이처럼 투자 대상으로서의 암호화폐만 주목받으면서 역설적으로 ‘비트코인은 화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줬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코인이 제도권 금융을 대체한다기보다 제도권 금융이 코인을 흡수하는 모양새라는 얘기도 있고요.

통화정책 혼란 부를 암호화폐의 위험성

그런데 한편에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암호화폐가 법정화폐로 통용될 가능성에 엄청난 두려움을 느껴온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 국제경제기구에 속한 사람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로 작년 말 국제통화기금(IMF)의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총재는 서울에서 열린 한 콘퍼런스에서 “암호화폐가 법정화폐로 인정되면 금리로 물가를 잡기 어려워지는 데다 돈세탁과 범죄가 난무하고, 세금 거두기도 힘들어지는 혼란이 벌어질 것”이라고 경고했죠. 작년 10월 말 기준으로 세계 암호화폐의 시장가치는 약 1조2800억 달러(약 1720조 원) 규모에 달합니다. 이는 세계 4대 중앙은행(미국·영국·일본·유럽연합) 통화량(M2 기준, 84조2500억 달러)의 1.5%를 차지합니다. 적지 않은 규모이고, 앞으로 더 커질 수 있지요. 이 때문에 통화량과 금리를 조절해 물가와 경기를 관리하던 기존 통화정책의 작동에 큰 문제가 생길 것이란 우려가 높아지는 겁니다.

중앙은행과 암호화폐 격전 불가피

세계 각국 중앙은행들은 암호화폐의 부상에 대응할 카드를 연구해왔는데요, 그게 바로 중앙은행디지털화폐(CBDC)입니다. 중국 등지에서 진행한 CBDC 실험을 보면, 개인은 일단 주민번호에 연계된 모바일 지갑을 만듭니다. 그리고 보유한 현금을 CBDC로 환전해 이 지갑에 전송하고 사용합니다. 은행 계좌에 돈을 넣거나 신용카드 가입·등록 과정 없이 그냥 지폐나 동전을 스마트폰 속에 담아 쓰면 됩니다. 하지만 많은 점에서 암호화폐와 다릅니다. 먼저 암호화폐는 분산 원장 기술을 사용해 탈중앙화를 지향하는 데 반해, CBDC는 기존 화폐처럼 중앙은행이 관리·감독합니다. 또 암호화폐는 그 자체의 수급에 따라 가치가 변화하지만, CBDC는 액면가가 고정돼 있지요. 암호화폐는 보유자 이름을 숨길 수 있어 돈세탁 등 부정행위에 동원될 수 있지만, CBDC는 모든 거래 기록이 남아 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롬 파월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은 과거 “CBDC가 생기면 암호화폐는 필요 없어질 것”이라고 의회에서 밝히기도 했습니다. 물론 반론이 없지 않습니다. 달러화가 불태환 기축통화가 됐을 때 금이 사라지지 않았듯, CBDC가 나온다고 해서 비트코인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란 주장이 그것입니다. 특히 달러 등의 가치에 연동되게 만든 스테이블 코인이 더욱 발전한다면 이런 가능성은 더욱 높아집니다. 암호화폐가 세계 각국의 통화 체제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될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NIE 포인트
1. 달러화, 금, 비트코인의 가격 변동성을 비교해보자.

2. 통화정책 효과가 암호화폐로 왜 약화할 수 있는지 토론해보자.

3. 중앙은행디지털화폐 실험이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는지 알아보자.

장규호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daniel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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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4년 1월 28일)
제목: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첫 번째 강해(예수님은 누구신가?)
말씀: 마태복음 16:13-18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대표기도: 김건 부목사님(1부)
사회: 임병영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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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16:13-18,
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ㅡㅡㅡㅡㅡ

※강철 신발을 신고, 기쁨의 면류관을 쓰고, 빛의 갑옷을 입고...

▶오늘부터 “예수님은 누구신가?”(Who is Jesus?) 시리즈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우리 젊은이들 용으로 예수님으로 여러분들의 삶에 밑줄을 쭉 치는 인생 되기를 바랍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면 좀 내가 나이가 들었구나 생각하시면 되고 제가 이번 시리즈에 대해서 광고가 되어서 그런지 여러분들이 저에게 목사님 이번 시리즈를 설레이며, 기대합니다라는 e메일을 보내왔어요. 설레며 기대합니다. 제가 그 e 메일을 받고 기뻤겠어요? 어떻겠어요? 물론 기쁨도 있었겠지만 거룩한 부담이 많이 되었습니다. 말씀의 능력 말씀 자체가 능력이 있으니까 말씀의 능력으로 우리의 모든 기대와 기대를 채우시고 또 저희에게 더 큰 부담을 극복시켜 주시길 바랍니다. 말씀의 능력을 더 말수 능력을 얘기하니까 제가 올해 시작하면서 무슨 신발을 신고요? 강철 신발은 신고, 기쁨의 면류관, 쓰고, 빛의 갑옷을 입고, 무슨 옷을 입고요 빛의 갑옷을 입고 무슨 모자를 쓰고요. 기쁨의 면류관을 쓰고요... 그리고 특별히 이 한 해 동안 2024년이니까, 우리가 감사를 몇 번 하자 그랬죠? 2034번, 2024번을 감사하려면 하루에 몇 번 감사해야 한다고요? 하루에 6번, 6번 감사는 간단하다고 그랬죠? 식사하기 전에도 감사하고, 식사 마치고도 감사하고,,,

제가 얼마 전에 이렇게 저녁 식사를 같이 하면서 집사람한테 고기가 왜 이래 질겨요? 그러니까 우리집사람이 가만히 있더니, “여보 감사합시다!” 그러더라고요. 그래 감사를 제가 하니까 그다음 고기가 부드러운 고기가 되었어요. 부드러운 고기가 되었어요. 그러니까 고기가 질기다가 뭐라고 했다가 금방 감사하니까 그다음에 고기가 안 질겼습니다. 그걸 보고 내가 야 이게 순종의 파워가 이렇게 심하냐 순종의 파워가 있구나! 그러니까 앞으로 저나 여러분이나 이 말씀의 수준에 의하여 우리의 삶의 수준이 결정되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이 시리즈를 왜 시작하게 되었는가? 두 가지 때문에 이 시리즈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첫 번째는 다 안다고 하지만 우리 성도들이 예수님에 대한 삶의, 예수님에 대한 성경적인 어떤 지식과 깨달음이 너무 피상적이에요. 교회를 30년, 40년 믿은 분이 어떤 분에게 이런 얘기를 해요.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겁니까? 예수님을 믿는 겁니까?’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한국교회에 뭔가 문제가 있구나! 지금 답 안 할 거예요. 좀 이따 할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상식선을 넘어서지 못하고, 마치 눈 먼 자 이 장님이 앞을 못 보는 사람의 코끼리 만지듯이 피상적이기 때문에,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믿음이 작동하지 않는 겁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에요.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정말 중요한 순간에는 믿지 않는 사람하고 똑같은 결정을 하고 사는 거예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능력 없는 삶을 사는 것이에요.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군중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군중들 가운데 12회 혈루(血淚) 증(症)을 앓던 여인 진짜 기적이 필요한 그 여인이 긴급할 때 예수님의 옷자락을 딱 잡아서 그래 했을 때, 그 여인이 치유를 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치유 받았죠. 그런데 대부분의 군중들은 따르기는 했지만 그런 기적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마치 이것은 무엇 같다면 여러 스마트폰에 있잖아요. 우리 휴대폰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사람들 가운데 스마트폰에 많은 기능들이 있잖아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가지고 이제 모든 걸 처리하고 내가 아는 어떤 목사님은요 이제 모든 걸 다 치워버려 스마트폰 하나만 갖고 설교하러 올라갈 때도, 요즘 젊은 것 같고 다 모두 그런 처리해요. 근데 어떤 우리 어른들은 전화로만 쓰잖아요. 이것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시면,,, 그러니까 휴대폰 기능을 제대로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도 크잖아요. 상당한데, 이건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이거는 어마어마한 것이 신앙의 작동 기능이 다를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또 제가 비유를 생각해서 여러분들이 갖고 이 예수님을 향한 여러분들이 갖고 스마트폰의 기능이 어느 정도인지, 오늘 이번 시리즈 하시면서 여러분들 예수님 때문에 여러분들의 삶에 결정적일 때 믿음이 역사하기를 바라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피상적인 신앙생활 탈피,

두 번째로는 지금 전 세계적으로 고난의 전쟁이다 팔레스타인이나, 또 우리 한국에는 이 극단적인 진영, 진영 갈등, 러시아 같은 데는 지금 푸틴이 황제 같고, 중국 공산 전체주의가 반응하고 있고, 근데 우리는 이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야 되잖아요. 근데 우리가 말씀을 들었습니다마는 자유민주주의의 제일 큰 피해가 뭡니까? 방임과 방종이에요. 그러니까 기독교 정신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제대로 품위 있게 지켜야 하는데 이걸 제대로 못하니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제대로 모르니까, 이 방임(放任)과 방종(放縱)이 와가지고 동성애가 생기고 트랜스젠더가 타락하고, 마약으로, 마약으로 젊은 때 찌들어 버리고, 최근 미국의 마약 때문에 아이들이 이 거북이 등처럼 돼가지고 그 영상을 보면서 제가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그런 걸 보면서 이 공산주의자들하고 이슬람 전체주의자들이 얼마나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자유민주주의라는 걸 막 조롱을 하는지 몰라요.

이런 우리가 조롱을 당해야 되겠느냐고요. 이런 조롱을 당하지 않고, 우리가 방임, 방종하지 않도록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명확하게 알아가지고 이 나라 이 국가를 지켜나가야 되는 것이에요. 이 나라를 지켜야 되는 것이에요. 이 나라를 먼저 예수님을 제대로 알게 되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제대로 알게 되면 주님과 동행하는 줄로 믿습니다.

어떤 꼬마가 천둥번개 벼락 소리를 듣고 놀라가지고 아빠를 찾았어요. 아빠 어디 계세요? 빨리 오세요. 아빠 무서워요. 그때 아빠가 이렇게 대답했어요. “얘야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이 널 사랑하셔. 예수님이 계시니까 너 염려하지 마.” 그러니까 얘가 아빠 나 하나님 사랑하는 것 알아요. 그렇지만 누가 내 곁에 계시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어린아이가 머리로는 알지만 손에 잡히고, 기댈 수 있고, 볼 수 있는 곁에 계신 분이 실제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먼저 제가 생각할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 그랬을 때 예수님은 내 곁에 계시는 하나님이세요. 다시요. 예수님은 누구 곁에요? 저와 여러분 곁에 계시는 하나님이세요. 이 한마디가 여러분들에게 참된 위로와 격려가 되기를 바랍니다.

너무 중요한 거예요. 너무 신앙이 피상적이고, 예수님이 지금 여러분과 저희 곁에 계신다니까요. 그러니까 오늘 96장 예수님이 누구신가, 우는 자의~~ 할 때 거기에 수많은 예수님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는데, 거기에 내 하나로 들어보게 와 닿아야 되는 것이에요. 가슴에... 예수님이 내 곁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이거 하나만 기억하셔도 오늘 제대로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제 생애에 저의 삶에 저의 생애에 결정적인 사건이 몇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18살에 부모님을 따라 제가 부산에서 상경을 했어요. 상경을 하는데 부친이 저에게 편지를 하나 주셨어요. 많은 걸 알겠지만 저는 '그 안에 돈이 얼마나 들었을까?' 이렇게 생각하는데 돈은 한 푼도 안 들고, 그 안에 성경 구절이 있었어요. 그중에 하나가,

*고린도전서 3:16,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리고 네 몸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여러분 저것이 내 곁에 계시는 하나님이 그것이 제게 좀 실감이 더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곁에 계신 하나님이 저에게 저를 격려도 했지만 또 저를 지키기도 했어요. 수많은 유혹과 이런 것 가운데서도 젊음의 유혹과 그런 가운데서도, 내 곁에 계신 하나님이 나를 눈 뜨고 나를 지켜 나를 보고 해주신다는 것, 그래서 우리 부처는 항상 육신의 아버지보다도 영적인 아버지가 너 곁에 있으니까, 돈도 육신의 아버지에게 구하지 말고, 영적인 아버지 구하라. 그래서 결정적인 제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예수님은 내 곁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내 곁에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오늘까지 이렇게 주님을 섬기는 중요한 원인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이런 제가 서론 격으로 말씀을 드리고 이제 오늘 본문을 또박또박 해석을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라 빌립보로 가셨어요. 그러면서 주님이 13절에,

* 마태복음 16:13-18,
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나를 누구라 하느냐? 왜 주님께서는 가이사라 빌립보에서 이런 중요한 질문을 하셨을까요? 가이사라 필리포는 구약 시대는 다 숭배의 중심지였어요. 우상숭배 신약시대에는 이방신들도 헬라 이방신들을 섬기는 웅장한 신전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헬라어 성들이 많았어요.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아주 그냥 우상숭배가 만연한 영적으로 아주 어둡고도 암흑한 지역이었어요. 그 지역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확실하게 대답했고, 예수님은 그 베드로의 고백 뒤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엄청난 비밀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보면 우상을 숭배를 만물이 우상이 되어 있고, 수많은 신념이 우상이 되는 이런 어떤 우상이 우글거리는 이 강남의 한복판에서, 요셉이 기독교의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우리가 제대로 신앙 고백을 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몸 된 교회, 교회와 한국교회와 무역 교인 우리 자신도 세워지고 공교회의 또 유형 교회도 세워지는 그런 축복을 받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 마태복음 오늘 이 고백 위에 바로 뒤에 있어 28장에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엄청난 사명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고백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러니까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냐 물으니까 14절에 보니까,

* 마태복음 16:14,
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더러는 엘리야다 어떤 예레미야다. 제가 이것도 다 설명을 해야 되는데 시간이 없어서 못 해요.

헤롯 같은 사람은 세례요한 아닌가, 이런 식으로 얘기하고 그래서 오늘 이 본문을 가지고 이제 한두 가지 생각을 했는데 먼저 그러면 주님께서 세례요한이다. 예레미야다, 다니엘, 다 엘리야다, 이런 식으로 주장하니까, 그럼 “너희들은 제자들을 보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오늘 이 자리에서 주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 1부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에게, ‘너는 나를 누구로 하느냐?’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합니까? 여러분들과 저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합니까? 기다리시면, 어제 보니까 특새는, 토비새는 물맷돌이다. 토요일 전일 새벽 예배는 소망이다. 토요일 새벽 예배는 내 은혜의 진원지다. 이런 식으로 고백합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합니까? 사랑의 교회는 여러분들 많은 교회가 간증을 할 때, 내가 예수 믿기 전에 내 상태 BC가(Before Christ)있어요. 그다음에 예수 믿게 되는 과정은 온 크라이스트 그다음에 예수 믿고 난 다음에 결과가 에프터 크라이스트(After Crist), 대개 이제 이 감성이 그런 구조가 돼 있어요.

그런데 우리 교회는 되돌려 할 때 예수님 믿기 전의 상태 비폴 프라이스 예수 믿게 되는 과정에 온 크라이스트 (On Christ), 그다음에 예수님 믿고 난 다음에 에프터 크라이스트(After Crist)가 있는데, 우리 교회는 하나가 추가돼 있어요. 온 크라이스트 가운데 그러니까 BC, OC, AC가 있는데 중간에 CC가 있어요. CC가 뭔 줄 알아요? 컴퓨터 그래픽? 뭐냐면, 컨페셔널 크라이스트(Confessional(고백적) of Christ)-예수님께 대한 나의 고백이에요. 사랑의 교회 성도들은 누구보다도 한국교회 성도들은 다 그래 해야 되겠지만, 누구보다도 예수님께 대한 내 고백임을 분명히 여기는 것이에요. 이 고백이 분명하려면 먼저는 너희는 나를 누구냐, 고백이 분명 먼저는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그러니까 그 고백을 하는데 베드로가 기가 막힌 고백을 하는 것이에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그다음 뭐예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주는 그리스도이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너무나 명확한 고백을 하니까 그다음에 뭐라고 했습니다. 17절에,

* 마태복음 16:17,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이를 너희에게 알게 하려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너의 뭐 아버지,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주셔서 깨닫게 해주셨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어. 여러분들과 제가 CC,- Confessional-of Christ 예수님에 대한 제대로 된 고백을 하려면,

I. 첫 번째, 예수님은 계시를 통해 깨달을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가 계시를 통해서만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에요. 성령께서 눈을 열어주셔서 깨닫게 해 주셨다고 말씀하셨으니, 그러기에 여러분과 저는 기독교는 계시(啓示)의 종교라고 우리가 말을 하는데 종교란 말보다 하여튼 우리는 계시(啓示)예요. 계시 기독교는 계시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신 것, 이걸 계시라고 그래요. 오늘 이 자리에 어떤 분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싶고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싶은데도 믿어주지 않는다는 분들이 많아요. 그러니까 오늘 믿어지지 않는 분들은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계시의 말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우리 위에 다 덮여지고 어두워졌던 것이 밝게 드러나는 시간되기를 바라는 거예요. 본래 우리 피조물들은, 피조물인 인간의 능력, 우리 피조물인 우리 인간의 능력과 한계로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가 없어요.

특별히 범죄(犯罪)하고 타락(墮落)한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사라지고 훼손(毁損)이 돼버렸어요.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 알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스스로 우리에게 계시를 하셨어요. 그 계시의 절정이 바로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에요. 이해가 됩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통하여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고 계시의 절정인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가 있는 것이에요.

오늘 제가 Who is Jesus! 예수님, 시리즈인데 이게 계속 지내는 동안에 아까 제가 처음에 이제 말씀을 드렸죠. 우리가 하나님 믿느냐, 예수님 믿느냐 예수님을 30년, 40년 전에도 정신이 이거 아주 명확하게 안 분들이 계시는데, 오늘 분명히 말씀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통하여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계시의 절정인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는 것이에요.
-교회를 오래 다니는 분들조차 내가 누구를 믿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슬람과 기독교의 차이도 헷갈리는 것도 있고, 주님께서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고, 하나님을 깊이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제대로 깨닫고 예수님의 심정을 제대로 깨달으면 우리가 제대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너무나 신비로운 은혜를 주시는 것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계시의 절정을 놓쳐버리는 것이에요.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C.S 루이스처럼,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깨닫게 되고 그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구원자, 나의 창조자로 고백하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동일한 은혜가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통한 계시에 대해서, 히브리서 1장 2절에,

*히브리서 1:2,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 기독교는 하나님으로서의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을 통한 계시,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에 이르는 계시,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이루는 계시에 기초하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이 계시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있기에, 예수님을 깨닫지 못하고는 하나님의 계시를 깨달을 수가 없고,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확신하게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예수님은 10년, 20년, 30년, 50년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 예수님에 대해서 누군지, 잘 모른다고 그러면 나중에 예수님도 주여, 주여, 하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데 내가 너를 모른다. 사탄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압니다. 그러나 사탄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정보가 사탄처럼 없는 어린아이도, 예수님을 성령으로 그대로 순전하게 믿는 축복을 받는 것이에요. 예수님에 대한 신앙 책을 500페이지 천 페이지 쓰는 세계적인 석학도 예수님에 대해서 모를 수가 있어요. 성경에 계시된 예수님을 제대로 모르니까 너무 불쌍한 거예요. 이게 계시의 눈. 따라서 오늘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계시의 불이 우리 성도님들에게 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모세가 불붙은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발견해가지고, 남은 인생을 하나님의 사명과 동행한 것처럼, 우리 모두 예수님에 대한 계시의 불이 가슴에 붙어가지고 예수님을 알고, 나를 알아 주님과 동행하는 평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 곁에 계시는 인격적인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이 주님과 동행하면 동행할수록 믿음, 우리 믿음이 자라기르를, 주님을 알면 알수록 세상적인 두려움은 사라지기 시작하고,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어찌 즐거운 일 아닌가?’ 그래서 오늘 첫 번째는 예수님은 뭘 통해서 깨달을 수 있다고요? 계시 그러면 계시의 핵심이 뭐냐?

예수님의 계시의 핵심은 참 권력이 뭐냐 계시의 핵심은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세 이게 예수님의 계시의 핵심이죠.

II. 계시의 핵심은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시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육신의 몸을 입고 계신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은 육신의 몸을 입고 계시는 거예요. 육신의 몸을 입고 계신 예수님을 보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지금 몸은 초라한 인간의 몸을 입고 있는데, 고백은 뭐냐 하면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몸은 100% 인간의 몸을 입고 계시는데, 하나님은 주님 하나님의 몸을 입고 계시는 그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시다. 너무나 놀라운 거. 그리고 이걸 깨닫게 한 분이 계시를 통해 깨닫게 했다고 이게 말씀드릴 때 여러분 예수님이 100% 인간이시고 100% 하나님이신 것 아는 여러분들이 하지만 이게, 이게 여러분들 이게, 이게, 이게, 이게 믿어진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지금은요. 신학적으로 정리가 돼 있으니까 이걸 우리가 이해를 하지만 AD 4세기 5세기 될 때까지, AD 4세기 5세기 특별히 5세기 451년에, 라틴으로 칼 키돈 공회라고 그러는데 영어로 ‘칼 세돈’이라고 그러고 칼 세돈 공회가 공의회에서 결정되기 전까지, 한 400년 동안 피 피기는 전쟁을 하고, 노략(擄掠)을 당하고 이단과의 싸움으로 수많은 전쟁이 일어나고, 이것 때문에 공예가 수차례 결정이 되고, 얼마나,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지,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시라는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 이 사실이 결정되기까지, 이 사실이 진리로 확정될 때까지, 이 계시가 우리에게 깨달아질 때까지 어마어마한 수고를 했어요. 어떻게 한 인격 안에 완전한 생성과 완전한 인성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무지무지한 논쟁에, 소위 ‘신인 합체’라는 수많은 영적 전쟁과 피 흘린 너무나 많은 선배들의 고난과 소위 크리스토라지(Christology)라. 기독론의 고난, 계시의 절정이 예수 그리스도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핵심 골간이 뭘까? 참 하나님과 참 사람 되셨다. 이게 오늘날 내가 밥 먹고 살고 저녁을 준비해야 되고 매일매일 직장 나가는 우리하고 무슨 관계입니까? 우선 AD 450년의 칼케돈 공회에서 완벽하게 정리가 된 걸 여러분들에게 먼저 말씀을 드렸고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완전하게 구별된 거, 하나님으로 연합된 걸 확정한 거예요. 제가 그걸 여러분들에게 어렵지만 한번 보시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이 두 본성으로 되어 있으며, 그 두 본성은 변하지 않고, 혼합되지도 않으며, 분리되지도 않고, 나누어지지도 않으며, 그 두 본성은 서로 병행하여 존재하며, 한 인격 속에 하나를 이루고 있다.”-(칼케돈 공의회(451년)-
-이거 나올 때까지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신 줄로 믿습니다. 참 하나님이라는 참 하나님은 참 사람이라는 말이 이 이 헬라어로 허모우시우스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이 허무시우스라는 말은 동일 본질이다 같은 본질이다 그 말이에요.

*호모시오스(homoouios)-우리는 이것을 믿는 것이다.
*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os)-X
-그런데 호모시오스라는 이 헬라어 안에 요트라고 아이, 글자를 넣어가지고, 호머이우시오스, 이거는 뭐냐 하면 유사 본질이에요. 요거 자가 하나 더 들어가면 유사 이타가 들어가 유사 본질인데 이거 하나 더 들어가고요. 피 티기는 전쟁을 한 거예요. 이거는 여러분 우리는 호모시오스를 믿는 거지 호모시우시우스를 믿는 게 아니에요.

목사님, 나 어려우니까 나 안 할랍니다. ㅋㅋㅋ~~, 그러지 말고 요요 이오타 이라고 아이들하고 보이시죠? 저거 하나 때문에 죽을 전쟁을 하고, 이단이 되고 쫓겨나고, 피 튀기고 근데 우리는 지금 편안하게 앉아가지고 칼케돈의 공의회에서 결정된 최고의 계시 결정을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나눌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영광스러운 것이에요. 지난 2천년 교회 예루살렘은 그렇게 슈퍼 피셔가 피상적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교회를 함부로 조롱하고, 껍데기 어디 함부로 또 OOO 같은 인간이 함부로 얘기를 합니까? 제대로 별로 알지도, 잘 모르면서요... ㅋㅋㅋㅋㅋㅋ 그래서 골로새서 2장 9절에 다 같이,, 시작

*골로새서 2:9,
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주님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보이다. 참 하나님과 뭐가 되셨다고요? 참 하나님이, 보이는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신성이 같이 있다. 하나님의 충만함이 육체로 구하시는 예수님 안에 거하신다. 이걸 성경 여러분들에게 증명할 수 있지만, 제가 여러분들과 함께 이 예수님을 허머이오시오서가 아니라 바로 호모시오스(homoouios)가 됩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 하루는 마태복음 14장 22절, 23절에,

*마태복음 14:22-23,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예수님 뭐 하러 따로 계셨다고, 기도하러,, 따로 사는 예수님이 기도하러 올라가셨다. 예수님이 기도하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람 되신 예수님의 인성을 말하는 거예요.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이 기도했다는 말이 없어요. 연약하니까 도움이 필요하니까 기도하시는 것이 하나님은 기도할 필요가 없고 기도할 이유가 없어요. 기도는 인간이 할 일이 인간이 기도한다. 기도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고, 예배를 올려드리는 표현이고, 연약함을, 연약함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자 능하시고 모든 것들이, 모든 것이 되시고,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기도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뭐예요? 인성의 즉 인성을 가르친 거예요. 마태복음 17장 22절, 23절 그다음에 25절, 이어서 바로 보면,,

*마태복음 14:25,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기도하는 예수님은 100% 참 사람이시고,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분은 100% 참 하나님이시다. 여기에 신성과 인성이 있는 것이에요. 참 사랑과 참 하나님 믿게 되는 기가 막힌 내용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무나 놀라가지고 바다로 걸어오신 예수님을 보고 마태복음 14장 뒤에 33절에,

*마태복음 14:33,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배어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서라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만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그럴 수 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누가복음 8장을 보면, 폭풍이 있는데 예수님이 주무셨어요.

누가복음 8:23,
23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여러분 광풍이 몰아쳐가지고 배가 요동을 치는데 어떻게 잠을 잘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너무 피곤하신데 너무 피곤하셔요. 그게 우리 인간이 예수님 인생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 인간이 인간 완전한 인간이잖아요. 육신의 몸에 고 완전한 인간, 너무나 인성을 가르치고 찰스 스폴전 목사는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하는 거예요. 너무나 참 표현을 잘했어요. 시작

“무한하고 무한하신 분, 영원하고 영원하신 분께서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셨다. 전능하신 분께서 여인의 젖을 먹고 자라셨다. 우주를 붙들고 주장하신 분이 엄마의 품에 안기셔서 보호받으셨다. 천군 천사를 다스리는 하늘의 왕께서 요셉의 아들이라고 불리셨으며,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목수의 아들이 되셨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_
-이해가 되십니까?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목수의 아들이 되신 거, 이렇게 말씀드릴 때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간, 그런데 주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는데 참 사람이시다. 누가복음 8장 24절 바로 이어서 뭐라고 그러냐면,

*누가복음 8:24,
24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그쳐 잔잔하여 옵니다. 여기서 우리가 빛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풍랑 이는 바다 가운데서 고하게 주무시는 예수님이 인성을 우리가 깨닫고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우리가 믿을 때에, 바람과 물결이 잔잔하게 된다는 축복을 주시는 것이에요. 여기 잔잔하다는 말이 슬릭(slick)이에요. 이 말은 거울처럼 깨끗한 상태, 완전한 고요한 상태, 마치 동전 하나를 던지면 그 파장이 나갈 정도로 달이 고요하게 비치며 완전한 고요함을 느끼는 상태를 슬릭이라고 합니다. 광풍 이는 갈릴리, 바다와 바다가 이와 같은 신성을 지닌 주님의 꾸짖음 때문에 절대 고요, 절대 슬릭(slick)의 상태가 된 것입니다. 너무나 놀라가지고, 누가복음 8장 25절에,

*누가복음 8:25,
25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오늘 여러분들과 저의 인생에 수많은 풍랑과 광풍이 몰아친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제대로 깨달으면, 우리 인생의 풍랑과 어려움 가운데 신하고 고민한 것들을 주님이 처리해 주시는 것이에요. 이게 이제 너무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베드로가 고백하는 “주는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모든 것들을 최종적으로 경험하고 난 다음에 베드로가 한 고백이 ‘주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메시아이시다. 메시아라는 말은 뭐예요? 왕 직을 갖고 계시고, 제사장 직을 갖고 계시고, 선지자 직을 갖고 계시는 통치자이시다. 그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예수님의 참 참 힘되시고 참 인성을 듣고 인성과 신성을 갈구하심을 완벽하게 우리가 깨닫고 고백을 하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통치가 우리에게 임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저의 삶의 주님이 그리스도가 되게 해 주셔서 메시아가 그에게 주셔서 어떤 삶의 곤경(困境)과 난관(難關)도 주님이 해결해 주시는 것이에요. 기적 같은 수많은 일들을 이어주시는 것이에요. 100% 인성, 100% 신성을 갖고 계시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한 면이 스스로 완벽하게 해결되는 거 또 그다음에 이쪽에도 한 면이 완벽하게 해결되는 것 남들은 다 안 된다고 그러지만 주님이 해결해 주시는 것이에요.

이거는 비교한 자가 될지 모르지만 제가 미국에 사역할 때 영어를 해야 되나 한국말을 해야 되나 100% 아메리칸이 되어야 되나 100% 코리안이 돼야 되나, 대개 이제 교회에서 휴일 학교를 50% 영어 가르치고 50% 한국말 가르치고, 다 이렇게 뭔가 방향이 잡히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30몇 년 전 어느 날 이걸 깨달으면서 그렇지,,, 예수는 100% 신성을 가지시고 100% 인간의 인성을 가지셨기 때문에 100% 코리안이야!!! 그러다 100% 아메리칸이야!!! 미국에서 그 동안에 그때부터 수많은 인재들이 매출이 됐고, 수많은 여기서는 별로 실감이 안 나는데, 제가 외국에서 이거 어마어마하 100% 캐나디아, 100% 코리아, 100%, 100% 네덜란드 사람, 100% 한국 사람... 양쪽. 오늘 이 땅에 우리가 강남에 살면서 우리가 100%의 예수님이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면서 세상사에 수 많은 수많은 100%의 삶을 살아가야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영광 되신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이 100% 하나님의 그리스도 대신을 믿을 때 태어난 신성과 영광과 능력을 우리가 100%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예수님이 참 사람이시고, 참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거친 파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 사람이시고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삶의 광풍이 잠잠해지는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삶을 주관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것을 깨닫고 수많은 난제들이 해결될 것입니다. 100% 신성과 100% 인성을 깨닫는 순간, 예수님의 행적과 사적을 우리가 깨닫는 순간, 주는 그리스도이시오, 사랑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 날마다 베드로처럼 우리에게도 계시의 주님의 계시 문이 열릴 것이고, 주님 우리의 삶에 그리스도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것입니다. 18절,

*마태복음 16:18,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문법적으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지 못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구원의 계시사적, 전체를 방어하는 100% 인성과 100%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눈에 보이는 육신의 몸을 입고 계신 예수님을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그 고백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셨다는 것이에요. 영광스런 그 고백의 주님의 교회를 그리고 그 교회를 세울 때에 그다음에 18절 뒤에 뭐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6:18b,
18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사탄과 지옥의 영생을 이기지 못하리라. 지옥의 문들, 각종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끊임없는 공격을 우리가 받을 수 있겠지만, 참 신과 참 사랑을 제대로 깨달을 그걸 고백할 때, 어떤 사탄의 공격이 와도 우리는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 모든 사탄을 공격할 때 가장 안전한 장소가 하나님의 교회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신 것이에요. 사탄의 공격뿐만 아니라, 여러분 주님이 심판하실 때도 제일 안전하게 거할 장소가 교회밖에 없는 것이에요. 홍수의 날의 날에도 물 위를 유유히 뜯어내는 광주가 유일한 장소가 교회가 돼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21세기에 베드로가 되어가지고, 예수님에 대한 참된 신앙 고백에 위에 세워진 하느님의 교회 안에서 세상의 모든 외로움과 거룩감이 다 회복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한 생일 동안 이 음보의 권세를 이기지 못하는 교회에서 호흡하고, 한 교회를 통하여 여러분의 인생의 사명과 목적을 이루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공동체 안에서 수많은 광풍과 풍랑과 상처 가운데 이런 분들이 사랑으로 녹아지고 새로워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서로서로 이 음부의 권세에 이기려면, 수많은 세상의 공격으로부터 교회를, 교회가 이제 완전히 거할 장소가 될 것이다.

오늘 가장 심각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뭡니까? 외로움이 상처 입고, 외로울 것이, 그 외로움을 교회만의 해결도 할 수 있는 것이, 작년도 미국 공중위생국장 비맥 머피가 ‘외로움이 흡연이나 비만보다 더 심각한 공중보건의 위기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반려동물이 아니라, 반려로봇의 삶의 현실이 되고 있다는 거, 앞으로 7년 뒤가 되면 반려로봇 로봇의 시장 가치, 반려 로봇의 시장이 70조 이상이 될 것을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려 로봇이 여러분 외로움을 해결할 수 있습니까? 반려 견들, 반려 견들이 여러분들이 인생 문제 해결할 수 있습니까? 아이고야, 요즘 뭐 그냥 난리네. 다들 털들도 날리고,, 여러분 해결됩니까? 일시적인 이로운 결심으로 진짜 해결됩니까? 진짜 해결되는가? 진짜 기로 날마다 예수님은 참 인사를 하시고 묵상하고 예수님이 참 신선하게 묵상하고 인생을 가지고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위로할지 묵상하고 그분이 주님만 여기에 계신다는 걸 묵상하고 그런 하나님의 교회가 공동체를 이루어가지고 우리가 여러분 다락방 식구들 함께 서로 위로하고 그때가 진짜 위로가 되는 것이고 참된 오아시스가 되는 것이고 참된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것이고, 물질주의와 세속주의에 중독된 우리 사회를 해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처음 말씀드렸던 두 가지 날짜를 오늘 참 신성과 참 인성을 가지신 그 주님에 대한 제대로 한 고백을 가지고 그 구세주 되시고 메시아 되신 그분을 당신 앞에 우리가 나아갈 때, 여러분의 삶에 많이 문제적 기도의 제목들이 응답될 줄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찬송 가운데 우리가 엎드려 절하세. 엎드려 절하세. 이 세상에 주께서 탄생할 때에 참 신과 참 사랑이시라는 .저 동정녀 몸에서 나셨으니 여호와의 말씀이 육신을 입어 날 구원할 구주가 되시고 참신과 참 사람이 되시는 찬송을 부르겠습니다.

요약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시면, 지체없이 “주는 그리스도이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고백하고 100%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믿는 계시의 불이 우리 가슴에 임하길 간절히 소원하며 모든 지옥의 권세를 이기게 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곤경과 난관도 돌파해 주시는 주님을 체험하여 주일 시리즈 예수님은 누구이신가?를 통해 예수님의 위로와 치유를 받고 그 사랑을 풍성히 누리기를 소망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에 관하여 제자들이 지니고 있는 생각을 개별적으로 질문하는 내용을 대하게 된다. 가이사라 빌립보 지방과 같은 그런 벽지에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그리스도를 따랐던 무리들은 다른 곳보다 더 적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제자들과 개별적인 대화를 나누실 수 있도록 여유를 갖게 했다. 베드로는 나머지 다른 제자들을 대표해서 대답한다. 나머지 제자들은 모두 베드로의 답변에 동의했으며 또 의견을 같이 했다. 베드로의 기질은 그로 하여금 이런 기회가 생길 때마다 앞에 나서서 말하게 했다. 때때로 말을 잘 하기도 했고 잘못 하기도 했다. 어느 단체에서나 말은 잘 못해도 어느 정도 열성 적이고 대담한 사람들이 발견된다. 그런데 베드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베드로의 답변은 간단하지만 완전하고 진실하며 적절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것은 바로 모든 문제의 결론이자 해결이었다. 백성들은 예수를 한 선지자 즉 그 선지자`로 불렀지만 제자들은 그를 그리스도 곧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인정하고 있다. 예수의 외적인 모습은 유대인들이 메시야에 대해 가졌던 일반적인 생각과는 매우 대조적이었기 때문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를 인자라고 불렀지만 제자들은 그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 아니라 세상의 생명이 되신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것을 믿었다. 우리도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서 "주 예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의 답변을 어떻게 시인하시는지 주목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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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헌신 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4년 01월 27일)
제목: "왜 오직 예수님인가?"(정성욱 목사님-덴버신학교 교수님)-사랑의 교회
말씀: 요한복음 14:6, 사도행전 4:12
대표기도: 박정주 권사님(포에버 회장)
찬양인도: 포에버 찬양대(트럼펫-박상범, 오르간-김명회)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말씀읽기: 박환희(초등4부),나예빈(초등4부)

설교자: 정성욱 목사님(덴버신학교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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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4:6,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사도행전 4:12,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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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네 오늘 이 새벽에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들에게 하늘의 기쁨, 평강, 행복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유일성’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오정현 담임 목사님께서 내일부터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시리즈로 예수님에 대해서 포커스를 해주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는 오늘 그 예수님이 유일한 분이다라는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춰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정말 힘들고 어려운 공격(攻擊)이 그리스도인을 향한 공격이 심해지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하나님의 거룩한 법과 원칙을 반대하는 사람들, 그걸 반대하면서 엔티크리스천, 엔티 가스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것을 소리 높여서 외치면서 하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이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장 비건한 예가 결국은 우리 많은 성도님들이 공감하시겠지만 성적인 문제 동성애라든가 이제는 동성애보다 더 심한 것들이 사실은 등장해 왔고 벌써 오래 되었지만 트랜스젠더리즘, 유치원생인데 유치원생이 분명히 남자아이인데 이 남자 아이가 나는 남자가 아닌 것 같아요.

I feel like a woman!(나는 여자인 것처럼 느껴져요). 분명히 남잔데 생물학적으로 내가 여자라고 느끼면 너 성을 바꿔줄까? 유치원생이 어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단을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근데 바꿔줄까? 해가지고 yes 하면은 바꾼다는 거죠. 강제로 바꾸든 그걸 자발적으로 바꾸든 그렇게 바꾸는 것이 합법화되었고 지금 제가 미국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마치 인간의 인권을 존중하는 것처럼 그 사람의 인권과 자유를 존중하는 것처럼 그렇게 색칠하고, 그렇게 드라마를 만들고, 하나님이 금지하신 법이죠. 하나님이 정해주신 원래의 법, 원래의 원칙, 자연적인 도덕의 질서, 이것을 무너뜨리는 그것을 반대하는 그러면서 하나님을 반대하고, 예수님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전 세계적으로 힘을 얻고 있는 이 시대 우리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죠. 대한민국에도 언제 트랜스젠더리즘이 단순히 들어오는 걸 넘어서 그것이 한국 사회를 휩쓸어 갈지, 제가 동남아에 가보니까 벌써 트랜스젠더리즘, 성을 바꾸려고 하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성을 거부하고 바꾸려고 하는 그런 흐름들이 태국과 같은 나라, 또 대만과 같은 그런 나라는 굉장히 팽배해 있다. 그것이 앞으로 한국이 나아갈 수 있는 혹시라도 그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어떤 그런 흐름을 타는 것 아닌가, 많은 우려들을 많은 우려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절대 진리라고 믿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반대하고 예수님을 반대하는 이 공격에 맞서서 우리는 ‘오직 예수님이 진리요 길이요 생명임을’ 우리의 생명을 걸고 지켜나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럼 예수님만이 왜 진리인가 왜 예수님만이 왜 생명인가 예수님만이 왜 길인가 여러 가지 각도에서 말씀을 드릴 수 있지만 오늘 몇 가지 포인트만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미 여러분들이 다 알고 계신 걸 제가 정리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왜 예수님이 진리인가?
I. 첫 번째, 예수님의 본성의 유일성입니다. -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본성의 유일성 그 얘기는 예수님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다. 라는 거죠.

II. 두 번째, 예수님의 탄생의 유일성이에요. -성령으로 잉태하여 동정녀 마리아
-탄생의 유일성,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남녀의 일반적 관계에 의해서 태어나지 않고 성령으로 잉태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탄생의 유일성입니다. 일반 모든 사람은 부모님의 자연적인 관계 속에서 태어나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사람으로 오셨는데 성령으로 잉태하여 동정녀에게 나셨다. 이것이 이사야 선지자 그 외의 다양한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유일성이다. 예수님의 독특성이다.

III. 세 번째, 예수님의 삶의 유일성입니다. -모든 순간을 하나님께 순종, 위로는 하나님, 수평으로 이웃사랑
-예수님은 오셔서 당신을 위해 사신 적이 없으시고, 한순간도 당신을 위해 사신 적이 없고, 예수님은 모든 순간을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오직 당신 옆에 있는 이웃을 위해서 사셨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전적으로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율법의 원래의 정신, 내 마음을 다하고, 내 목숨을 다하고, 내 힘을 다하고, 너의 모든 것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 수직적인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사랑에 대한 계명과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는 수평적인 그 사랑의 계명 이 계명을 한시도 한순간도 잊지 않으시고 놓치지 않으시고 전적으로 순종하며 살아가셨다. 그리고 그분이 단순한 삶이 아니라, 기적의 삶, 메시아가 오면 메시아가 오면, 귀 먹은 자가 귀 먹은 자의 귀가 열리고, 눈 먼 자의 눈이 뜨여지고, 걷지 못하던 자가 걷게 되고, 심지어 죽은 자도 살아나리라. 했던 메시아가 오시고 나서 그 메시아가 어떤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한 구약의 예언과 약속을 주님은 지켜주시고 이루어 주시고, 그 삶의 유일성, 주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와 인내와 놀라운 그 삶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의 삶의 유일하다는 것을, 삶이 유일하다는 걸 독특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Ⅳ. 네 번째, 예수님의 죽으심의 유일성이에요. -우리를 위해 죽으심.
-한번 해볼까요? 예수님의 죽으심의 유일성, 예수님은 어떻게 죽으셨습니까? 모든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자기의 죄 때문에 죽음을 당합니다. 자기의 죄의 삯이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할 때 이 사망은 영원한 지옥에서의 사망과 더불어 육신적인 죽음도 포함하는 개념인데, 모든 인간은 죽음을 맞이할 때, 죄 때문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죽음이 우리에게는 하나님께로 가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죽음의 의미가 바뀌지만,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인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인간들은 사람들은 다 죽을 때, 그 죽음이 자기의 죗값으로 죽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죗값으로 죽거나 자기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죗값 때문에,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셔서 당신의 몸을 우리 죄에 대한 속죄, 제물로, 화목 죄의 제물로 들이시고,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덮으시고 용서하시고 사해주시기 위함 속죄, 죄의 죽음, 속죄, 제사의 죽음, 제물로 당신의 몸을 들이신 죽음이시기 때문에, 어느 인간도 자기 몸을 들여서 우리들의 죄를 속할 수 없고, 하나님 앞에 흠(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예수 그리스도. 죽임을 당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결코 자신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게 아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죄 때문에, 죄 짐을 지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주님의 죽으심이 유일하다는 유일하다. 절대적이다. 특별하다 독특하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유일성

Ⅴ. 다섯 번째는 예수님의 부활의 유일성입니다.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영원히 살아계심, 지금도 역사하심.
-이 땅에 태어난 어느 인간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은 없습니다. 의학적으로 뇌사 판정을 받았습니다. 분명히 죽었다고 사망 선고를 내렸는데, 이 사람이 1시간 후에 깨어나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는 하루가 지났는데 깨어나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런 경우가 의학적으로 보고되는 경우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걸 거부하는 것은 아니에요. 근데 그 사람이 사망 선고를 받은 다음에 다시 살아났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영원히 살아남았습니까? 결국 어떤 시간이 지나면 그도 다시 죽고 많은 것이죠.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매장당하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영원히 살아계신 줄로 믿습니다. 살아계셔서 지금 우리 가운데 이 자리에 함께하시고, 저와 여러분의 심령 가운데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움직이고 계신다. 그 예수님의 부활의 유일성이세요.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사망의 권세를 깨뜨린 자가 없는 역사 속의 역사 인류 역사의 최종 승리자는 사망이고 죽음이라고 하는 수많은 철학자들과 시인들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조롱하면서 죽음을 비웃으면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영원히 살아계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육신을 가지고 계시면서 성령으로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Ⅵ.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재림의 유일성이다. -내가 반드시 다시 오리라.
-예수님은 하늘나라로 승천하시면서 내가 반드시 다시 오리라 한번 해볼까요? 내가 반드시 다시 오리라 약속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제 오실지 누구도 그 날짜와 그 시간은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내가 속히 오리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대를 볼 때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 온 것이 너무나 가까워 온 것이 아닌가. 우리는 동성애가 인류가 저지를 수 있는 최후의 죄라고 생각을 했는데, 알고 보니까 동성애는 이미 성경에서 레위기에서, 로마서에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동성애라는 자는 역사, 인류의 역사 속에 편만에 있어요. 근데 동성애를 넘어서서 트랜스젠더리즘 성을 바꾸는 것은 역사상 일어난 적이 없어요. 왜? 그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그 의료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몰라요. 개인적으로 그가 겉으로 보기엔 남자인데 속은 여자였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괴로워했던 인생은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학 기술을 활용해서 그 사람의 실제적인 젠더를 바꾼다. 그런 일은 역사 속에 일어나지 않았는데, 20세기, 21세기 인류의 과학기술이 발전되면서 하나님을 반대하는 기술도 하나님을 반대하는 방법도 정교해지고, 세련되어지고,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오실 날 얼마 남지 않은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확인하고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의 구원을 얻을 만한,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주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에요. 예수님은 거짓말하지 아니하시고 참되고 진실하신 분이시기에 그 예수님의 말씀이 온전히 절대적인 진리라고 우리가 믿기에 오늘 이 아침에도 나와서 주 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지막 때까지 지켜야 할 유일한 진리, 많은 진리들을 지켜야 되고, 많은 진리들을 우리는 진리와 복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승리하며 살아가야 되지만,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예수!, 지저스 솔로! 크라이스트 로드(Christ Lord)!!,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유일한 구원자이시고,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이시고,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시고, 다시 오실 그 주님을 우리는 기다리며 거룩한 신부로 우리의 삶을 담당하고 주 앞에 영광 돌리는 삶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고, ‘2033-50 비전’을 이루어 드려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랑의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요약
하나님을 반대하고,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이 마지막 세대에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그리스도의 군사로 불러주셨음에 감사해야 한다. 오직 예수의 진리로, 오직 그리스도의 진리로 무장하여서, 악한 세대에서 우리 자신들을 거룩하게 구별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굳게 세워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 한국교회 전체가 이 진리 위에, 이 절대적인 복음의 명확한 진리 위에 서서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하고, 그러면서도 사랑으로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이끌어내는 참으로 살아있는 믿음의 사람들의 공동체가 우리 한국교회가 되고, 이민 교회가 되고, 세계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교회가 되도록 주님 인도해 주시길 간절하게 간구하자. 그리하여 우리가 "왜 오직 예수님인가? 를 늘 체험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자로 헌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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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01월 24일)
제목: "약해질 용기, 신앙의 꽃"
말씀: 창세기 32:28
찬양인도: 쉐키나(이동선 부목사님)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유재원 부목사님
ㅡㅡㅡㅡ
*창세기 32:28,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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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수요 저녁 기도에 참여하신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수요 저녁 기도회를 통해 회복을 넘어 부흥의 르네상스를 경험하는 복된 시간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2장 28절입니다. 제가 가진 성경책으로 구약 성경 50면에 있습니다. 한 절이므로 저와 합독하시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창세기 32:28,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아멘, 참으로 긴 여행이었습니다. 긴 인생의 끝자락에 다 닿은 야곱은 이제 고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향으로 향하는 야곱에게 돌아온 것은 따뜻한 환대가 아닌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는 형의 분노였습니다. 형이 400명을 거느리고 자신을 향해 달려온다는 사실을 들은 야곱은 심히 답답하고 두려웠습니다. 야곱은 쌍둥이로 자랐기 때문에 형, 에서의 불같은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형의 분노를 누그러뜨릴 계략을 찾기 시작합니다. 야곱은 형의 진노를 누그러뜨릴 선물이 필요하다 생각하여 염소와 낙타와 나귀 등 많은 가축들을 형을 위한 선물로 준비했으나 이상하게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아내와 자식들, 모든 선물들, 모든 것들이 먼저 강을 건너가게 한 야곱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밤 야곱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밤을 맞이하게 됩니다.
 
오늘의 창세기 32장 24절에서는 야곱의 현재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가 읽습니다.
 
*창세기 32:24,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야곱은 강 건너편에서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형 에서 때문에 강을 건너지 못하고 밤을 맞이하게 됩니다. 모든 걸 떠나보내고 야곱은 지금 혼자 남아 있습니다. 창세기 32장에서 만나는 이 위태로운 야곱의 모습 인생의 위기에 빠져 있는 나루터의 야곱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의 모습일지 모르겠습니다. 인생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걸 다 했지만 여전히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고독과 불안의 밤을 맞은 야곱의 모습은 첨단 산업과 인공지능으로 무장했지만 여전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얍복강의 야곱은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깊은 고독과 절망의 밤을 맞이합니다. 누구나 외로워하고 힘들어하는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나 다 자신이 무서워하는 깊은 절망의 밤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 오신 성도님들 중 누군가는 자식의 성공과 학업 때문에 고민하실 지도 모릅니다. 또는 어떤 분은 일터의 문제로 인해, 신앙적 문제로 인해, 관계의 문제로 인해 깊은 절망의 밤을 홀로지 새고 있을지 모릅니다. 또한 어떤 성도님께서는 말하지 못하는 개인의 비밀한 문제로 홀로 눈물로 밤을 지새며 뼈아픈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밤에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건넌 야곱이 한 가지 선택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힘으로 위기를 돌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이미 자신의 힘으로 많은 것들을 이루었습니다. 그가 이룬 모든 것들이 그의 결과물입니다. 두 아내와 두 여종과 많은 아들들과 수많은 양떼와 소떼들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지금 자신이 이룬 모든 것들을 떠나보내고 홀로 남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의 이때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그동안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들을 이룩해온 야곱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비참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야곱을 이런 상태로 내버려 두시는 것일까요?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무언가 중요한 말씀을 하시려는 것 같습니다. 홀로 밤을 지새며 고뇌에 빠져 있던 야곱에게 한 가지 특수한 상황이 발생합니다. 야곱은 달밤에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와 사력을 다해 씨름을 하게 됩니다. 창세기 32장 24절입니다. 제가 읽습니다.
 
*창세기 32:24,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씨름은 ‘아바크’라는 말인데 먼지라.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씨름은 아바크라는 말인데 먼지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이 씨름은 온몸에 흙먼지가 가득 묻을 정도로 매우 치열하고 격렬한 몸싸움을 뜻합니다. 생사를 건 치열한 씨름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씨름은 밤이 새도록 계속됩니다. 그러나 밤이 새도록 계속된 이 씨름 가운데 진정한 승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무승부로 결판이 나는 것 같습니다. 이때 야곱과 씨름하는 정체불명의 인물은 씨름 도중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25절입니다. 이번에는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32:25,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야곱과 씨름을 하던 사람은 자신이 이기지 못하자 야곱의 환도 뼈 즉 넓적다리의 위쪽 가운데 뼈를 쳐서 탈골시킵니다. 오늘 읽으신 개혁 개정 버전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이후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부위에 힘줄을 먹지 않기 시작하는 전통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 일로 인해 야곱은 힘이 급격하게 약화되며 씨름에서 패자가 되는 상황으로 몰리게 됩니다. 과연 이 싸움은 누가 이기게 될까요? 위기(危機)에 몰린 야곱이 이번에는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환도 뼈를 부러뜨린 그 사람에게 자신을 축복하기 전에는 놓아주지 않겠다고 말을 한 것입니다. 상황이 참 이상합니다. 난데없이 달밤에 씨름을 하는 것도 야곱에게 씨름을 걸어온 사람도 씨름을 하다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關節)을 치는 상황도, 허벅지 관절이 어긋난 야곱이 자신의 뼈를 어긋나게 한 사람에게 축복을 해달라는 이상한 부탁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야곱과 씨름을 하던 이 사람은 야곱이 자신을 놓아주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7절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창세기 32:27,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내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다.
-그 사람은 야곱의 이름을 묻습니다. 야곱의 이름의 뜻은 잘 아시듯이 ‘속이는 자 발 뒤꿈치를 잡은 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야곱의 무언가를 바꾸려고 하는데요. 그게 무엇인지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28절 말씀인데요.
 
창세기 32:28,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에 저희가 한 번 더 같이 합독하도록 하겠습니다. 드디어 야곱과 씨름하던 그 사람의 정체가 밝혀졌습니다. 야곱과 씨름을 시도한 존재는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드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굳이 야곱과 씨름을 하셨을까요? 하나님과 씨름을 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누가 이기겠습니까? 온 땅의 주인이시며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씨름을 한다면 씨름의 모든 기술을 마스터하고 계실 씨름의 근원 되신 하나님이 이기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지금 왜 도대체 야곱과 씨름을 하고 계신 것일까요? 여기에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씨름을 하시는 이유는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씨름을 통해서 야곱의 인생을 새롭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누군가의 인생을 온전하게 하시기 위해서 씨름을 걸어오실 때 절대로 지는 씨름은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이기는 씨름만 하십니다. 하나님은 지는 씨름 따위는 아예 염두에 두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온전하게 하시기 위해 씨름을 걸어올 때, 자신이 이길 수 없는 그 씨름 때문에 자신의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그 씨름 때문에 공평하지 못하다고 하나님께 불평을 하곤 합니다.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이죠? 약해지는 것입니다. 패배하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돼야 하는데, 내 자녀의 성적이 더 좋아져야 하는데, 일터에서 더 큰 성공을 거둬야 하는데, 내 인맥이 더 넓어져야 하는데 문제가 해결돼서 좋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데, 본이 되는 모습이 되면 좋겠는데, 내가 저 사람보다는 더 열심히 살았으니까 하나님께서 이만한 보상을 내게 해주셔야 맞지 않는가?, 이런 식으로 고백하며 하나님 이건 공평하지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바는 저의 뜻은 도대체 언제 이루어진단 말입니까? 하나님께 불평을 하는 경우들이 분명 있습니다. 저는 왜 늘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 약해져야만 하는 것입니까? 주님,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맞습니까? 주님, 이것이 성도의 삶이 맞습니까? 주님, 저는 왜 이럴 수밖에 없단 말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어떻게 행동을 하겠습니까? 지혜로운 사람은요 여기에서 약해질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내 삶 가운데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나의 삶 가운데 이루어질 때 우리의 삶이 내가 원하는 뜻과 방향보다 훨씬 더 풍요롭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야곱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지금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임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씨름에 더 간절하게 야곱이 매달렸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 간절한 이 야곱의 인생을 지금 이 순간 새롭게 하십니다. 32장 28절 저희 다시 한 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32:28,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스라’는 히브리어로 싸웠다 씨름했다. 다스린다. 라는 뜻입니다. 엘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이 해석을 보통 저희가 이야기할 때 성경의 말씀에 따르면 내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이렇게 해석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제임스 보이스라는 목사님께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름 중에 동사의 하나님의 이름이 사용될 때 하나님은 그 동사의 목적어가 아니라, 항상 주어여야 한다.” 이렇게 말입니다. 실제로 항상 동사에 하나님의 이름이 섞여 나왔을 때는 하나님은 목적어가 아니라 주어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이 주어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이 심판받는다. 이렇게 해석하면 틀린 해석이 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하나님이 재판하신다. 이렇게 해석을 해야 맞습니다. 사무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어떻습니까? 사무엘이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었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 이렇게 해석을 해야 맞습니다. 같은 원리로 해석을 한다면 오늘 저희가 함께 봉독했던 창세기 32장 28절의 말씀 해석은 조금 바뀌게 됩니다. 어떻게 바뀌게 됩니까? 스라-싸웠다 씨름했다 다스린다. 엘, 하나님을 이 부분을 뒤집으면 이렇게 해석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기신다. 하나님이 싸우신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야곱의 인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에서를 속여 장작 권을 얻어냈지만 형과의 관계에서는 처참한 실패를 맛봤습니다. 눈 먼 아버지를 속여 축복은 받아냈지만 그는 아버지를 아프게 한 아들이었습니다. 형에게는 더 없는 실패를 안긴 동생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야곱에게 만족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많은 것들을 가졌을지라도 말입니다. 평생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원하는 것을 얻어냈고 성취했던 그 야곱이 지금 하나님과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만약 여러분들에게 씨름을 걸어오신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기시겠습니까? 지시겠습니까? 그런데 그 씨름에서 야곱은 지금 어떤 상태가 되죠? 뼈가 어긋나는 고통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야곱을 보고 내가 하나님과 이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야곱의 지금 모습이 승리자의 모습입니까? 하나님을 이긴 사람의 모습이 맞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의 지금 모습은 다리를 절뚝이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치셨기 때문에 이런 고통을 가지면 다리를 절뚝이면서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야곱은 패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니가 하나님과 이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은 역설의 책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야곱의 모습을 보고 그래 야곱아, 이제는 내가 승리자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약해진 야곱에게 패배한 야곱에게 승리자라고 하신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 야곱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이제 서야 약함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약해질 용기를 갖게 된 것입니다. 내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중요함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씨름을 걸어오셨습니까? 그때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숨어 있습니다. 약해지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약할 때 하나님으로 인해 강해지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강하심이 진짜 나의 삶의 강함이자 승리라는 것을 깨닫는 자들이 바로 성도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약해질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진짜 힘과 능력을 공급받아 매일, 매일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약할 때 역사(役事)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약한 것은 패배가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를 대신하여 일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힘으로 살아오셨습니까? 그렇다면 야곱처럼 나의 모든 힘과 능력으로 이기는 삶을 살려 했던 그 시간들을 뒤로 하고 힘을 빼고 약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이렇게 기도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 저는 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하나님 나의 힘이 되어 주시기 원합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 저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내가 주어가 되는 기도보다 훨씬 더 멋진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저는 약합니다. 그런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어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오늘 이 본문을 통해 아직도 야곱처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사랑하는 나의 딸아, 이 시대에 야곱아 지금까지는 너의 힘과 능력으로 살아왔고, 너의 머리를 써서 최선을 다해 승리했지만, 그것은 결코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란다. 나의 자녀가 제자가 살아가는 방식은 삶의 주인을 인정하고 약함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이란다. 내가 너의 허벅 관절을 친 이유도 바로 그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란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전히 강해지려 하십니까? 약해질 용기가 없으십니까? 기꺼이 약해지십시오. 우리는 약해져야 합니다. 약해지는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기시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싸우실 것이다. 라는 고백이 우리의 입술 가운데 나와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약함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이 참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약해지는 것이 두렵습니다. 저에게는 9살 된 딸과 7살 된 아들이 있습니다. 저의 아들과 놀 때만 해도 저는 잘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저희 아들은 저를 닮아 눈썹이 굉장히 진하고, 그리고 저를 보신 분은 저의 아들을 보시면 그냥 바로 아시더라고요. 유재원 목사의 아들이다. 그 아이와 놀 때 전 항상 이기려 하고 있습니다. 아빠인 제가 7살 아들을 이기려 할 때 저의 모습을 보면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목사인 저조차도 저의 일상의 삶 가운데서 약함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말씀을 전할 땐 좋은 설교자가 되고 싶습니다. 무언가를 할 땐 굉장히 잘하고 싶습니다. 누군가와 경쟁을 할 땐 이기고 싶은 심리가 당연히 저에게도 있습니다. 이런 저와 같은 자를 위해 여전히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일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야곱처럼 절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가셔야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전부이시다. 라는 고백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벌거벗은 몸으로 가장 낮은 모습으로, 가장 약하며 천한 모습으로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그 모습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약함을 실패가 아닌 하나님의 강하심으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약해지는 것이 두려우십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단어에는 단 하나입니다. 약해져도 괜찮다. 약해질 용기가 너희들에게 기꺼이 필요하구나. 내가 너희들과 함께하도록 하겠다. 하나님께서 지금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약해질 용기를 기꺼이 가지십시오. 우리를 위하여 약한 모습으로 이 땅 가운데 찾아오신 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는 약하지만 강해질 수 있고 부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강하신 하나님 나의 힘이 되어 주시옵소서. 강하신 하나님 저는 연약하지만 하나님이 저를 대신하여 싸우시고 이기시는 줄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회복을 넘어 부흥의 르네상스를 경험하는 2024년 한 해를 보내게 될 줄 믿습니다.
 
♣요약
내 힘과 능력이 아닌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며 나아가 하나님의 맞춤형 새 은혜, 승리하는 새 역사를 목도하여야 한다. 약할 때 강함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우리는 연약하여 넘어지고 다치고 깨지기 일쑤인데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여전히 나의 머리와 노력과 실력으로 개인의 지혜로 장애물을 뛰어넘으려 할 때가 너무도 많음을 깨달아서 이제는 하나님이 이기심을 진정으로 믿고 ‘하나님이 싸우십니다’ 라고 고백하며 우리를 위하여 약해지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약함을 자랑으로 강하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시간으로 삼아야 한다. 이런 성경적 방식과 원리로 살아갈 때 회복을 넘어 부흥의 르네상스를 경험하는 약해질 용기, 신앙의 꽃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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