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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4년 01월 21일)
제목: "순종, 왕께 드리는 종의 찬미"
말씀: 시편 145:1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1부)
대표기도: 김은석 부목사님
사회: 임병영 부목사님(1부)
설교자: 박성규 목사님(총신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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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45:1,
1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 하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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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찬양을 해주신 우리 찬양대 지휘자님과 우리 찬양대 오케스트라 우리 박수로 한번 격려합시다. 정말 큰 감동의 시간이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주일학교 교사로 또 예배 안내로 그리고 밖에서 추운 가운데 주차 안내로 수고하신 분들도 박수로 한번 격려합시다.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일주일간 삶의 현장, 전쟁터 같은 삶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다가 돌아오신 옆에 계신 우리의 동료들, 영 가족들 박수로 한번 수고했다고 환영합시다. 격려합시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을 오늘까지 인도하시고 영원토록 인도하실 우리 사랑의 교회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립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오늘 말씀은 우리의 일생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신앙생활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를 가르쳐주는 아주 중요한 말씀이 될 것입니다. ‘송축(頌祝), 왕께 드리는 종의 찬미(讚美)’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은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다. 대단한 신앙 고백을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오늘 두 가지 포인트로 말씀을 살펴볼 텐데
 
1. 첫 번째로는 다윗은 하나님을 왕과 주인으로 섬겼습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여러분 대단한 고백이 아닐까요? 그는 이스라엘의 가장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내 인생의 진정한 왕, 내가 통치하는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과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이 고백은 오늘의 세속 사상과 얼마나 배치되는 고백입니까? 세속 정신은 인간 자신이 죄인이며 내 인생의 통치자는 나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광고를 통하여 교육을 통하여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네가 인생에 그리고 우주의 중심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인간을 존중하지만 우주의 중심은 하나님이시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만이 주인이시오. 하나님만이 진정한 왕입니다. 사람이 높아지면요 어느덧 목에 힘이 들어가고 내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려고 하는 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다윗이 위대한 이유는 가장 훌륭한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잠시 바세바 사건과 인구 조사 사건을 빼놓고는 항상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아드 폰테스라는 라틴 경구를 사용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아드는 라틴어의 전치사로서 어디 어디까지 폰테스는 샘이라는 명사입니다. 따라서 아드 폰테스는 샘까지라는 뜻입니다. 한 번 더 풀이하면 금원까지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한 번만 더 풀이한다면 본질로 돌아가자. 종교개혁자들은 중세 로마 카톨릭이 변질되었기 때문에 본질로 돌아가자. 라는 슬로건을 외치며 본질로 돌아가는 운동을 펼쳤던 것이죠. 그러면 종교개혁자들이 말한 본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첫째로는 성경이요 둘째로는 교부들의 신학이었습니다. 중세 카톨릭이 성경을 떠나 사람들의 사상과 가르침을 따라 움직였을 뿐만 아니라, 미신적인 종교 행위에 빠졌기 때문에 성경으로 돌아가는 이 본질의 회복을 외쳤던 것이죠. 본질의 첫 번째는 성경이요. 본질로 돌아가자는 말은 성경으로 돌아가자. 라는 가르침입니다. 또 하나는 교부들의 신학입니다. 교부들은 교회의 아버지들을 가리킵니다. 사도들이 죽고 난 다음에 교회를 이끌었던 사람들, AD 2세기부터 7세기까지 교회를 이끌었던 사람들을 교부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이 사람들은 이단으로부터 교회를 지켰습니다. 잘못된 이단 사상에 반응할 때마다 그들은 성경을 깊게 연구해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정리하고 체계화함으로써 기독교의 신학 수립에 앞장섰던 사람들, 그래서 이단으로부터 교회를 지킨 사람들이기 때문에 교회의 아버지. 또 하나는 로마의 모진 박해로부터 목숨을 바쳐가며 교회를 지켰습니다. 순교로서 교회의 순수성을 지켰던 사람들. 그래서 이들을 교회의 역사는 처치 파더스(Church Fathers) 교회의 아버지, 교부라고 부르는 것이죠.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가 그랬습니다. 그는 정말 신학적 체계를 잘 세웠을 뿐만 아니라 순교했죠. 폴리캅, 서무나이, 폴리캅도 목숨을 걸고 교회를 지켰죠. 터틀리안도, 암브로스, 그리고 어거스틴까지 그들은 신학의 체계를 세우며 교회를 이단으로부터 보호했던 훌륭한 초기 기독교회의 아버지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질로 돌아가자는 얘기는 성경으로 돌아가자 그리고 교부들의 신학으로 돌아가자 인데, 그중에 본질인 성경에 초점을 맞춰서 이 성경의 핵심 진리는 무엇일까요? 여러 내용이 있지만 그중에 하나를 오늘 본문에 근거해서 말씀드린다면 하나님은 왕이시고 우리는 종이다. 이것이 성경의 본질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분께 순종하는 종이 될 때 우리는 일생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복된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열왕기상 8장은 솔로몬이 성전을 다 지은 다음에 봉원 예배를 드릴 때 ,이 봉헌식의 기도를 왕인 솔로몬이 하나님께 드리는 내용입니다.
-이르되 이제 기도가 시작된다는 말이에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위로 하늘과 아래로 땅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그다음 중요한 문구가 나오죠. 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전심으로 주 앞에서 코람되어 죄 앞에서 행하는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나이다.
 
보배로운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성도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일생 은혜를 베풀어 주시냐면 주 앞에서 전심으로 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복된 신앙생활을 일생 누리기를 원한다면 종으로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한번 따라해 볼까요? 종이 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종이 되는 거예요. 근데 여러분 이렇게 부드럽게 말하면 예배당 문을 열고 나갈 때 다 여러분 반납하고 갑니다. 충격을 받아야 여러분들이 기억이 오래 갈 것입니다. 그래서 종이 되겠습니다보다는 형제들은 저를 한번 따라해 보십시다. 흰머리 소년들까지 “종놈이 되겠습니다!” 형제들 시작, 우리 자매들은 어떻게 해야 될까요? 예, “종년되겠습니다.”

한번 해봅시다. 시작. 옆에 있는 분에게 좋은 종놈, 종년 되라고 하이파이브로 두세 분 이상 인사합시다. 시작. 이게 정말 제가 성경을 연구할수록 핵심이에요. 이 봉헌기도에서 보면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을 지칭할 때 왕으로 부르지 않아요. 세 번 나오는데 종으로 불러요.종놈이 되겠습니다!” 종년이 되겠습니다.”!!!!! 열왕기상 8장 24절, 
 
*열왕기상 8:24,
24 “주께서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을 지키사 주의 입으로 말씀하신 것을 손으로 이루심이 오늘과 같으니이다.”
-내 아들이 성전을 짓겠다는 것을 이루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솔로몬의 고백은 뭐냐 하면 본인과 백성들이 정성을 들여 건축을 했지만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의 손으로 건축이 완성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가 노력하고 애쓰지만 하나님의 돌보심이 없었다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헌신하는 물질도 하나님이 주지 않으셨다면 성전 건축은 불가한 거죠. 그러므로 성전 건축의 궁극적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표현으로 주의 손으로 이루심이 오늘과 같으니이다.. 여러분 성경학자들은 구약 성경을 성전을 지을 때, 얼마의 돈이 들어갔을까 900조 원이 들어가실 거라고 합니다. 놀라게 될 때 안 놀라면 제가 놀라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가 나도 그 정도는 있어야 하고 앉아 계시는데 어마어마하죠. 돌로 지었습니다. 백향목을 입혔어요. 그 비싼 그 고가의 백향목을 그리고 지성서의 성물들은 전부 금으로 입히거나 금을 두드려서 주조가 아닙니다. 부은 것이 아니라 두드렸으니 얼마나 많이 들어가겠어요? 900조원, 그러나 우리의 헌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손으로 이 일을 이끄셨다는 고백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 모두가 하나님의 손으로 이루어졌음을 고백하며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어집니다. 25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 자기 길을 삼가서 네가 내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행한 것 같이 내 앞에서 행하기만 하면 내게서 나서 이스라엘의 왕위에 앉을 사람이 내 입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종으로 살았던 것처럼, 너의 후대의 왕들도 내 앞에 종이 된다면 반드시 이 왕조가 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다윗처럼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은 왕들, 자기가 최고 높은 왕이라고 착각하여 하나님을 배반했던 왕들이 있었기에 다윗의 왕조는 무너졌던 것이죠.

보배로운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일생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종으로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의 인생은 끝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8장 26절 그런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요 원하건데 주는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이 확실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의 이때의 심정은 하나님, 제가 저도 종으로 살겠습니다. 제 자녀들도 그렇게 하겠으니까 이 왕조가 끊어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솔로몬은 아버지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 솔로몬도 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28절 자매들, 시작! 그러나 솔로몬도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형제들 29절, 주께서 주의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소서.
30절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 주는 하나님을 주라고 말하죠.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위대했던 왕들이 한 결 같이 종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이었습
니다. 그들의 인생의 어려움은 자기가 왕이 될 때, 밧세바 사건 인구조사죠. 솔로몬은 이방 여인들을 부인으로 맞이하며 그들의 우상을 섬길 때, 그러나 인생에 황혼 역에 그는 하나님께 돌아와 전도서를 쓰면서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젊은 날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만이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시 종의 위치로 돌아오는 것이죠.
 
보배로운 성도 여러분,
2023년도에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과 왕이 되었다면 2024년도부터는 오직 하나님만이 내 인생의 왕과 주인이 되시는 복된 종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제 문제를 내드립니다. 일생을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선택할 질문은 두 개인데, 저는 주로 정답을 2번에 둔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1번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 2번 순종하는 종으로 살아야 한다.
 
-정답은 몇 번일까요? 예 여러분 저를 신뢰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2번입니다. 순종하는 종으로 살 때만 그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 하지 않습니까? 일생 행복할 수 있는 것이에요. 한 번만 더 옆에 있는 분에게 우리 이번에는 부드럽게 말합시다. 꼭 종으로 사세요!!.

-근데 여러분 요즘 젊은이들은 컴퓨터와 SNS에 종이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거기에 매여 사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컴퓨터를 위한 기도문도 나왔다고 하지 않습니까? 한번 들어보셨을 텐데요. 메모리에 있는 우리 프로그램 마무를 거룩하게 하옵시며, 운영 체계에 임하옵시며 명령이 모니터에서 이룬 것 같이 프린터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용할 데이터를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파일의 에러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다운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다만 정전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cpo와 하드와 USB가 컴퓨터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엔터(Enter), 기억하십시오. 컴퓨터는 우리를 우리에게 속죄의 은총을 줄 수 없고 영생을 줄 수 없죠.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인생을 속죄하여 구원하시며, 우리를 영원토록 이끌 참된 왕, 목자 같은 왕, 선한 목자 같은 왕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이제 오늘부터 다시 한 번 일생을 하나님의 종으로 살기로 다짐했는데, 그렇다면 좋은 종은 어떤 종일까요? 고대의 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네 가지가 있어요. 고대의 좋은 종들은 네 가지가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첫 번째, 자기 뜻이 없었어요.
아무리 하고 싶어도 주인이 안 돼 하지 마, 하면 거기서 딱 멈췄어요. 아무리 하기 싫어도 주인이 해 하면 그 일을 감당했던 사람이 좋은종이에요. 여러분이 정말 일세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풍성한 은혜 가운데 살기를 원하십니까?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십시오. 하기 싫어도 하라고 하시면 하시고, 하고 싶어도 하지 말라고 하시면 하지 말아보세요. 또한 이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기록된 말씀인 성경과 선포된 말씀인 설교가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근거가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3,
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바울이 데살로니카 교회를 향하여 3주밖에 사역을 하지 않았지만,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믿음으로 소문난 교회,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었던 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 이런 말씀을 하지 않습니까? 너희가 우리가 전한 말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너희 속에 역사하느니라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를 인문학 강의로 생각하면 그 정도의 영향만 받을 거예요. 그러나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인생 속에 강력하게 역사할 줄로 믿습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묵상하거나 선포된 말씀을 받을 때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조건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 좋은 종은 자기 돈이 없었어요.
돈이 많으나 적으나 내 마음대로 쓰지 않고 주인이신 주인의 뜻을 따라 썼으며, 이걸 우리 성도들에게 적용한다면, 주인이신 왕이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쓰는 사람이 좋은 종이죠. 좋은 성도 은혜 받는 성도가 되는 것이죠.
※제가 군목으로 처음 갔던 부대는 특공연대입니다. 강원도에 특공인 들을 줄여서 특공대라고 하는데 특공대는 어떤 사람이 가냐면 특별히 공부는 못하지만 대가리가 큰 사람들이 가는 부대입니다. 이 부대는 전원이 공수 교육을 받아야 돼요. 공수 교육을 안 받으면 공병 여단이나 이런 데로 전출을 시키는 부대였습니다. 저도 공수 교육을 받았습니다. 지상 3주 태어나서 가장 힘든 훈련을 받고 4주차에는 공중 400m에서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리는 훈련을 합니다. 이제 낙하산을 받는 날이 됐어요. 낙하산 정비 대에서 와서 군번과 이름을 쓰고 받게 해요. 순간 그 기분이 묘합니다. 이 낙하산이 안 펴지면 이 낙하산을 접었던 낙하산 정비 대 대원을 추적해서 그 사람에게 책임을 묻기 때문에 그 용지에 이름을 쓸 때 혹시 내 낙하산이 안 펴지면,, 이런 생각을 하면서 봤죠. 배낭에 들어 있어요. 꺼내가지고 주낙하산을 배낭처럼 딱 메고요. 자루에 들어있는 걸 꺼내서 멜빵을 딱 메고 앞에 고리를 다 겁니다. 그리고 이 주낙하산이 고장 났을 때는 제가 수동으로 펴야 되는 예비 낙하산 예비 산이 한 요만합니다. 이걸 앞에 착용을 딱 합니다. 그리고 올라갑니다. 400m로 비행기나 기구로 올라가는데요. 이 특수부대는 어떤 믿음이 있냐 하면 군목(軍牧)일 때는 1번 강하(降下)하는 군목이다. 왜냐하면 군목은 하나님과 가깝기 때문에 군목이 안전하면 우리도 안전하다는 이런 생각을 하는데, 실제 저희들도 많이 떨립니다. 제가 떨면 뒤에 있는 병사들이 또 떨기 때문에 하나도 안 떠는 것처럼 기도하고 담대하게 나가죠. 그래서 여러분 400m에서 쫙 일번 강하지로 뛰어내리는 거예요. 뛰어내리면 4초 동안 쭉 떨어져요. 그런 다음에 펴지거든요. 왜냐하면 라이프라인이라는 게 있어서 그걸 비행기나 기구 위에 걸고 뛰어내리면 이 줄이 펴진 다음에 낙하산을 잡아당겨주는 거거든요. 이 4초 동안 70m를 떨어집니다. 아찔합니다. 쭉 떨어지는데요. 눈을 뜨고 저 아래를 보니까 땅이 보여요. 약 35초 동안 안 펴지만 저기 가서 부딪히면 제 몸의 뼈가 다 부러져서 죽는 거예요. 아찔한 순간이죠. 그래서 4초 후에는 선계 검사해가지고 낙하산이 펴졌는가, 확인하고 안 펴졌으면 예비 낙하산을 당기는 거죠. 왜냐하면 얼굴을 돌리는 이유는 우산처럼 스프링이 튀어나오기 때문에 이렇게 하고 있으면 얼굴이 다 긁히게 됩니다. 당기게 돼 있죠. 그래서 숫자를 세는데 공중에서 바람이 입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1초, 2초 하면 4초 만에 펴지지만 내 귀에 소리가 안 들려요. 그래서 뭐라고 하냐면 1만, 2만, 3만, 4만 감사하게도 낙하산이 쫙 펴져 있더라고요. 이게 낙하산이 펴질 때는요. 속도가 줄어들기 때문에 갑자기 몸이 뜨는 느낌이 들어요. 할렐루야, 막 펴져 있더라고요. 너무 좋아가지고 할렐루야, 할렐루야 찬양하면서 내려오는데요. 이 28가닥의 낙하산 줄 가운데 오른쪽과 왼쪽에 테크 라인이라고 조종하는 줄이 있어요. 그리고 그 깍지가 볼펜 한 몇 마디 되는 요 정도예요. 이걸 오른쪽으로 확 돌리면 당기면 오른쪽으로 가요. 그리고 왼쪽으로 쫙 돌리면 왼쪽으로 가요. 두 개 다 잡아당기면 균형 있게 찌그러져서 빨리 떨어져요. 여러분 펴지고 난 다음에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그 하늘에서요. 이 400m에서 뛰어내려서 한 330m쯤 펴지고 내려오는데 진짜 그 위에서 볼 때 너무 기분이 좋아요. 여러분도 꼭 한번 뛰어보기를 바랍니다. 정말 좋아요. 정말 그리고 잠시 후에 지상 30m 지점이 되면 자세를 정리합니다. 앞 꿈치 무릎을 모아야 돼요. 왜냐하면 다리를 벌리면 왼쪽이나 오른쪽에 본인이 힘을 주기 원하는 쪽으로 자기 생각과 상관없이 무의식중에 가면 그 다리가 부러지거든요. 그래서 앞꿈치 무릎 모으고 착륙하면 안전하게 제가 디스크였거든요. 지금까지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이 창공에서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이 기쁨을 맛 보려면요. 반드시 지상 교육의 3주 교육의 마지막 하이라이트인 모형 탑에서 제대로 자세를 갖추고 뛰어내려야 돼요. 그건 뭐냐 하면요. 뛰어내릴 때 눈 감으면 안 되고 두 번째로는 뛰어내리자마자 두 손은 예비 낙하산을 잡아야 돼요. 이게 안 펴졌으면 이걸 바로 잠겨야 되니까, 이 자세가 되는 게 쉽지 않아요. 이 모형 탑 영어로 막 타워(model tower)라고 그러는데요. 땅에서 바라볼 때는 저 모형 탑이 그렇게 안 높아 보여요. 근데 희한하게 올라가면 그렇게 겁날 수가 없어요. 높게 느껴지고 진짜 겁나요? 여러분 하도 안 떼어내리면 이제 기다리는 사람이 수백 명이니까 훈련생이 조교가 발로 뻥 차요. 그럼 이 병사가 죽은 줄 알고 하고 떨어지거든요. 근데 안 죽었어요. 도로 위에 달려가지고 대롱대롱 매달려서 안전하게 가고 있어요. 창군 이래 모형 탑에서 죽은 사람 없어요. 왜냐하면 콘크리트 구조물 앞에 강철 이렇게 굵은 선이 지나가고 거기에 도르래를 걸어놓고 내 낙하산 하늘 슬을 걸었기 때문에 전혀 죽는 사람이 없어요. 근데 희한하게 그 앞에 서면 겁나요? 그래서 저희는 이 높이를 ‘공포에 11m’ 라고 부릅니다. 성도들에게도 공포에 11m가 있으니 11조 헌금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이 얘기하려고 공수교육 얘기를 했습니다. 여러분 11조는 신앙 고백이에요. 11조 안다고 안 죽어요. 모형 탑에서 죽는 사람 없듯이 안 죽어요. 오히려 11m 공포의 11m를 뛰어넘어야 창궁에서 내려오는 기쁨을 맛보듯, 11조를 드리며 물질로 헌신할 때, 신앙의 새로운 기쁨을 맛보는 것입니다. 저희 어머님은 제가 10살 때 아버님 돌아가셔서 6남매 키우면서 고생하셨는데 11조를 될 때 그래요. “성규야, 하나님께 드리는 게 기뻐!” 제 작년에 돌아가셨는데 지금도 제 어릴 때 듣던 그 목소리가 생각납니다.
 
2023년도까지 자기 돈에 대해서 하나님의 주인 되심, 왕 되심을 인정하지 않는 분이 있다면 바로 이번 달부터 시작하기를 바랍니다. 자기 돈이 없는 사람이 좋은 종이에요. 11조뿐만 아니라 십의 9까지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쓰는 사람이죠.
 
▷세 번째로는 자기 자녀가 없습니다.
아무리 내 자녀라도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하는 거죠.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는 여러분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기준으로 자녀들을 함부로 평가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으로 그 자녀들을 양육하시기를 바랍니다. 선교사 나간다고 할 때, 선교사만은 가지 마라 이러면 안 됩니다. 주님이 소명을 주었으면 보내야 되죠. 선교사 간다고 하면 정말 기도했니? 하나님의 부르심이 확실하니? 이걸 물어봐야지 안 돼 이러면 안 되는 거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지원한다고 할 때 목사는 안 된다. 이러면 안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의 자녀가 총신대학 신학대학원에 온다면 저는 장학금을 줄 준비를 하고 있답니다. 그리고 앞으로 10년 후에는 담임 목사 인원도 채우지 못할 만큼 전국적으로 줄어들었어요. 옛날에 지방 신학교인 부산 신학교가 전교생이 300명이었는데 지금 30명으로 줄어들었어요. 엄청나게 줄어들고 있는 이 상황 속에 오정현 담임 목사님이 ‘2033 50의 비전’을 이룬다면 한국교회가 얼마나 많이 부응되겠어요 근데 목사가 없는 시절이 올 수 있어요.
 
저는 한 해에 우리 사랑의 교회 대학 청년부에서 적어도 50명의 신대원생이 나와야 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많이 권면해 주세요. 한국교회를 살리도록, 그러나 목사, 선교사뿐만 아니라 정말 자녀가 성경적 가치관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하려고 할 때 한없는 격려를 해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 번째 고대의 좋은 종은 자기 생명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주인이 원하시면 생명까지도 초개와 같이 바쳤던 사람들이죠. 최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박관준 장로님을 우리가 존경하는 이유는 이분들은 자기의 뜻도, 자기의 돈도, 자기의 자녀도, 심지어 자기의 생명까지도 주인 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쳤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모든 것을 주인의 뜻에 맞춰 사는 종들로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것이 일생의 복이 되는 것입니다. 한 번만 더 환하게 웃으면서 영혼을 담아 축복합시다. 좋은 종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1. 첫 번째 포인트는 다윗은 하나님을 왕과 주인으로 섬겼다는 것이었죠.
이제
2. 두 번째 다윗은 하나님을 송축했습니다.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송축하다라는 히브리어는 마라크입니다. 한번 따라해보실까요? 마라크 거의 신대원 수준으로 발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어로는 Blesses라고 하죠. 이 바라크라는 히브리어 동사는 주어와 목적어에 따라 세 가지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신대원생이라면 기말고사에 내고 싶은 문제입니다.
 
*첫 번째 사람이 주어가 돼서 다른 사람을 바라 한독 할 때는 축복하다. 빌 축자의 복 복자 복을 빌어주다. 라는 얘기죠.
*두 번째 하나님께서 주어가 되셔서 사람을 바라크 한다고 할 때는 복을 주시다. 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은 복을 빌어주시는 분이 아니라 복 자체를 주시는 만복의 근원이시죠.
*세 번째 사람이 하나님께 바라크 한다고 할 때는 찬송한다는 의미, 송축하다로 번역이 됩니다. 이 단어를 지금 띄워드린 히브리어 영어 원어 사전에 보면 이렇게 설명하고 있어요. 투어도 찬미한다는 거죠 웨이드 무엇을 가지고죠? 밴디드 니드, 무릎을 꿇고 찬미한다는 겁니다. 근데 무릎이라는 단어가 복수로 사용된 것이죠. 제가 시원해 드린다면 바로 이것이죠. 이 바라크라는 찬송한다는 동사는 한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고요. 두 무릎을 다 꿇은 것입니다. 고대의 두 무릎을 꿇은 부복은, 왕 앞에서 백성이 예절을 표하는 것이었죠. 따라서 바라크라는 찬송하다. 라는 단어는 보통 찬송이 아니라 하나님을 왕으로 높이며 내가 종으로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뜻이 바라크입니다. 히브리어에 찬양한다는 나라가 대표적으로 할랄인데 여기서 할렐루야가 나왔죠.

할렐루는 너희들은 찬양하라 야는 여호와의 주님 말이에요. 너희들은 여호와를 찬양하라 복수 2인칭 명령입니다. 그다음에 찬양하다라는 단어 가운데 자마르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찬양하다는 뜻으로도 쓰이고, 저렇게 악기를 가지고 오케스트라가 함께 찬양할 때 자마르를 씁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찬양할 때 손을 들고 찬양하지 않습니까? 야다가 손인데 야다아는 일반적인 찬양하다는 동사로도 쓰이지만 손을 들고 찬양하다라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이렇게 찬양하다. 라는 동사가 여러 개가 있습니다. 이보다 더 있습니다. 근데 그중에 최고는 저는 바라크라고 생각해요. 두 무릎을 꿇고 창조주 하나님 이 역사를 통치하시는 만왕의 왕 앞에 나는 종입니다. 라는 마음의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을 최고로 높여드리는 나라가 바라크예요. 한번 따라해 볼까요? 바라크 옆에 하이파이브 하면서 축복합시다. 바라크!! 너무 좋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찬양하고 예배할 때마다 마음에 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런 예배 자가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제 소개해 드리는 본문들은 바라크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주어와 목적어에 따라 어떻게 달리 번역되었는지를 소개해 드리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3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창세기 12:3,(아브라함)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아브라함을 어떤 사람이 바라카 할 때는 축복이라고 번역했어요. 내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바라크를 쓸 때는 복을 내리고로 번역되었습니다.
*민수기 6:27,(제사장에게 이스라엘을 축복하라고 함)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제사장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라고 하신 다음에 그들의 축복에 대해서 이렇게 반응하시겠다고 말씀하시죠. 그들은 제사장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뭐 할지니, 축복할 지는 이게 바라크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바라크 하는 것은 축복으로 번역되었어요. 제사장도 사람이잖아요. 내가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에게 바라크 할 때는 뭐라고요? 복을 주리라. 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네 우리는 하나님께도 축복해 달라는 말을 하죠. 왜냐하면 우리가 너무 입에 붙어서 그렇습니다. 저도 그럴 때가 있어요. 그러나 점차 우리가 바꾸면 좋을 것 같아요. 하나님 하나님의 복을 주십시오. 축복과 주라는 말이 운율이 서로 좀 다르니까 여러분이 발음하기 힘들면 하나님의 복을 주십시오. 이렇게 우리가 기도할 수 있겠죠.
 
*역대하 31:8,(히스기야 왕 신앙 개혁 후,성도들 십일조 회복)
31장에는 히스기야 왕이 신앙의 개혁 운동을 벌입니다. 선대의 왕이 우상숭배를 많이 했는데 그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신앙의 개혁이 되는 장면입니다. 그 가운데 성도들이 11조가 회복이 되요. 11조가 회복이 되었다는 것은 돈이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 되었다는 신앙 회복의 표징이죠.
8 히스기야와 방백들이 와서 쌓인 더미들을 보고 여호와를 송축하고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축복하니라.
-성경에 보면 4개월 동안 11조 밀렸던 것을 가져오는데 너무 많으니까 4개월 동안 전국에서 11조를 가져온 거예요. 그래서 히스야와 방백들이 여호와를 송축했고요.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뭐 했다고요? 축복 하니라. 제가 히브리어 원문을 보니까 바라크라는 단어가 미완료 3인칭 복수 왜 복수냐 하면 히스기아와 방백들이 바라한 거니까요. 이 바라크라는 동사는 우리말에는 두 개가 나오는 것 같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하나만 쓰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이 ‘에트 아도나이’ 여호와를 바라크 한다고 할 때는 송축함으로 우리말로 번역하고 무엇 무엇을이라는 선지사예요. 모 그의 백성이라는 말이고 이스라엘 이게 또 하나의 목적어인데 이스라엘을 가리킬 때는 하나밖에 바라크를 쓰지 않았지만 축복하니라. 로 우리말로 번역했습니다. 우리 말 번역이 아주 아주 잘된 것이죠. 기억하십시오. 역대야 31장 8절에 바라크라는 동사는 한 번만 쓰였지만 목적어에 따라 우리말로 옮길 때는 하나님께는 송축함으로 번역했고 이스라엘을 위한 바라크는 축복하니라. 로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이런 구분을 할 수 있으면 더 좋겠습니다. 송축은 예배자의 태도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느헤미야 8장 6절 함께 읽어요. 시작
 
*느헤미야 8:6,
6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비하니라.

-여러분, 이 말씀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이 바람 탈 때 무릎만 꿇은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높였냐면. 얼굴을 땅에 댄 거예요. 제가 한번 대보도록 할게요. 여러분 별로 감동이 없는 것 같아요. 한 번 더 할게요. 그러니까 이분들의 마음의 중심이 어떤가를 이 본문에서 느끼는 거예요. 하나님을 최대한 높여드리고 싶은 거예요. 포로에서 돌아와 가지고, 이 성벽을 재건하고, 그리고 말씀의 부흥 운동이 일어나니까, 너무나 감격이 되니까 이분들이 무릎 꿇은 것으로 만족을 못하는 거예요. 얼굴까지 댔다는 것은요. 완전히 엎드렸다는 거예요. 최대한의 예의를 표했다는 거예요. 최대한의 공경 심을 표했다는 거예요.
 
주 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배에 이 자세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전국에 또 이민교회 설교를 비교적 많이 나가는 목사이다 보니까요. 사랑의 교회 예배가 얼마나 좋은지요? 참 하나님께서 오정현 목사님을 너무나 귀하게 했었어요. 제가 14년 군목을 마치고 남가주 사랑교회 첫 예배에 참석했을 때, 영광송부터 예배 자들이 울더라고요. 임시 생활이 얼마나 힘들어요. 정말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강력하게 느끼는 예배예요. 사랑의 교 예배도 그래요. 오 목사님께 특별한 은사를 하나님이 주신 것 같아요.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사랑의 찬양대 같은 찬양대가 지구상에 또 있을까요? 없습니다. 정말 우리는 살아있는 예배가 뭔지를 아는 복된 성도들이에요. 그런데 혹시 이 가운데도 예배의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어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그런 예배 자가 아니라 그런 찬양자가 아니라 그저 무덤덤하게 입으로만 찬양하고 예배할 수 있어요. 바라기는 우리의 예배와 찬양 가운데 바라크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이에 대해서 시편은 이렇게 말하죠.
 
*시편 103:1,
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이게 무슨 말이에요? 그냥 입으로만 하지 말라는 거예요. 내 뼛속 깊이 내 온 마음이 동원된다는 얘기예요. 내 영혼 전체를 쏟아 붓는 예배 자가 된다는 거예요. 우리 찬양대가 일주일 동안 안보하고 정말 쏟아 붓듯이 우리 모두가 그렇게 찬양하고 그렇게 예배드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높이, 높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 여기서 블레스 바라크는 송축하다 두 무릎을 꿇고 찬양한다는 얘기예요. 그리고 예배는 블레스, 바라크 두 무릎을 꿇은 예배라는 것이죠.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송축, 왕께 드리는 종의 찬미, 여러분의 일생에 정말 복된 신앙생활,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길 원한다면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종이 되십시오. 끝나려고 했는데 아멘이 적어서 못 끝날 것 같아요. 철저하게 종이 되십시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사랑 위에 성도들이 다 종놈이고 정년이면, 하나님이 얼마나 이 사랑 위를 더 귀하게 쓰시겠습니까? 예 한 번만 더 인사합시다. 좋은 종 되시기 바랍니다. 좋은 종은 4가지가 없는 사람이에요. 마지막으로 모든 예배와 찬양을, 무릎을 꿇고, 얼굴을 엎드리며,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감사하는 찬양과 예배가 되어 하나님께서 높이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 인생에 부어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경험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약
우리의 신앙생활에 내가 왕과 주인이 된 변질된 모습이 있지 않는가를 돌아보고 철저하게 주님 말씀하시면 나아가고 주님 뜻이 아니면 멈춰서는 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 혹 우리 가운데 매너리즘에 빠진 예배 자가 있다면, 찬양자가 있다면 오늘부터 두 무릎을 하나님 앞에 꿇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내 얼굴을 땅에 베고 하나님을 높이며 찬양하는 그 마음, 그 심정으로 예배와 찬양 드려야 한다.
-본문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광대하심을 주제로 한 다윗의 찬송 시로써,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웃과 그의 크신 능력을 대대로 전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데 거룩하고 존귀하심을 알아, 기쁠 때나 슬플 때를 불문하고 모든 환경과 상황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높여 드려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루신 일은 가장 지혜롭고 인생을 궁극적으로 유익하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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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주후 2024년 01월 14일)
제목: "과연 빛으로 살 수 있을까?"
말씀: 요한1서 1:5~7
대표기도: 이윤기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사회: 임병영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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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1서 1:5~7,
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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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대 귀한 찬송 감사합니다. 어느덧 1월 14일이 되었습니다. 세월 가는 줄 모르시죠? 너무나 놀랍게 빨리 시간들이 지나가는데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인 줄로 믿습니다. 살다가 여러분, 내가 뭐 삶의 의미가 있나, 이런 생각할 때마다 내 인생의 의미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 그러면 그게 답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여러분 회중찬송도 잘 하셨습니다마는 ‘주여 나를 도우사 세월 허송 않고서 어두운 세상 지날 때, 햇빛되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 찬송이 여러분의 것으로 그대로 고백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겁니다.

한국에 중요한 고위직을 지낸 어떤 연세 드신 분이요. 그냥 찬송을 앞에 놓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여, 나를 도우사... 연세도 많으시죠. 세월 허송 안고서. 어두운 세상 지날 때 햇빛 되게 하소서. 그런 찬송을 진심으로, 진정으로 부르는 걸 제가 보면서 제가 얼마나 은혜를 받는지 몰라요. 가슴이 뭉클한데요. 여러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이 한 해 동안 '주여, 나를 도우사 세월 허송하지 않고서 어두운 세상 지날 때 햇빛 되게 하여 주십시오!'

오늘 말씀의 제목이 "과연 빛으로 살 수 있는가?", 내가 과연 빛으로 살 수 있는가, 내 한 몸 가누기도 힘든데 내가 어떻게 빛 되는 삶을 살 수 있겠는가? 어떤 그런 면에 있어서 좀 거리감이 느껴진다든지 또 삶의 한계가 느껴지는 분들은 오늘 이 말씀 앞에 바싹 다가 앉는 축복을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 5절은 이렇게 나와 있어 5절에 뭐라고 나와 있느냐면,

*요한일서 1:5,
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빛이시다. 거꾸로 하면 순서를 거꾸로 하면 안 돼요. 빛이 하나님이다. 이게 아니에요. 우리가 빛이 하나님이라고 그랬을 때에는 뭐 이집트의 태양신을 섬기는 이집트 사람이나 아침에 태양을 향하여 이렇게 뭐라 그럴까요? 향을 피우는 인디안 들의 빛이 하나님이라고 그러면 하나님을 더 잘 경계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빛이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뭐예요? 하나님이 빛이라 이 개념을 이 생각 이 뜻을 잘 이해를 해야 되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빛이라 그랬을 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우리 지금 핍박과 이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빛이 있으라 하심에 빛이 있었고 기억나시죠?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그런데 그 빛에는 여러분 우리가 일월 성신, 태양과 달과 그다음에 별과 이런 이제 일월성신이라고 그러는데 태양과 달과 별 이런 걸 언제 지었죠? 며칠째 지었죠? 오늘 이 예배에 오신 여러분 성경 실력 언제 지었어요? 나흘째 지었어요. 나흘째, 근데 첫날 빛이 있으라, 빛이 있어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들 생각하는 이런 빛의 개념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빛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에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빛의 개념은 더 순전하고 더 영광스럽고 더 여러분 구약의 쉐키나 영광을 말하는데 인간으로 이해할 수 인간의 머리로서는 다 상상할 수 없는 너무나 놀랍고도, 너무나 순수하고, 너무나 진실하시고, 너무나 의로우신, 포괄적인 빛의 개념이 담겨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렇게 얘기하면 아멘, 그러는데 좀 못 알아듣는 것 같아가지고, 그러니까 우리가 오늘 말씀하시는 이 빛의 이 뜻은 그냥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이나 물리적인 이 정도의 빛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 핍박해가지고 막 죽이려고 그러면서 다마스커스로 막 달리다가 하늘의 빛을 보고 그게 거꾸로 졌어요. 거기 보면 사도행전 26장 13절 보면 뭐라고 나와 있냐면 이렇게 나와 있어. 사도행전 26장 13절에 거기 보면 이렇게 나와 있어요.

*사도행전 26:13,
13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오늘 내가 빛에 대한 얘기를 했을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빛 하면 태양빛을 생각하는데 여기서 빛은 뭡니까? 해보다 더 밝은 빛이 4일째 만들어진 그런 창조의 태양의 빛보다도 게임이 안 되는 빛이에요. 이 빛은 더 순수하고 더 영광스럽고 더 진리이시고 더 온전하고 더 완벽한 빛이에요. 그래서 이걸 사도바울이 깨닫고 난 다음에 고린도후서 4장 6절에 뭐라고 하냐면,

*고린도후서4:6,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그러니까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은 진리 자체이시고, 진리의 빛이신데 우리가 상상한 이 정도의 빛이 아니고 너무나 영광스럽고 너무나 온전하고 너무나 순수한 빛이 오늘 이 빛이 여러분들에게 깨달아지기를 바랍니다. 이 빛을 비추는 이 빛이 있는 자들에게는 어떤 축복이 있는가? 오늘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한다고 그랬는데 6절에 보니까, 빛 가운데 거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어떤 사람인가 하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빛이 아니라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지를 행하지 않는 거짓말을 하고 지를 행하지 않는 그 당시에는 영지주의자라고 있었어요. 영지주의자, 노스티시즘이라고 그러는데 그 사람들은 예수님의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고, 영적으로 진리만 깨달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래갖고 육신은 자기 마음대로 사는 거예요. 옛날에 그 구원파, 여기 세모 구원파, 있잖아요. 그 마음대로, 마음대로 그것 거짓말하는 거 그건 빛 가운데 가하는 것이 아니다. 참된 교재가 없는 것이다. 주님과의 참된 사귐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과의 참된 교재가 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지난 주일날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주님과의 참된 교재가 있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주님의 가장 귀한 것들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제가 요한일서를 가지고 지금 피해의 복음, 그다음에 지난주에 기쁨의 복음, 오늘은 빛의 복음, 을 말씀할 터인데 우리가 연말연시 하나님 앞에서 받은 기도의 제목이 있죠?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삶에 수많은 험산준령, 산악 지역이라도 무슨 신발을 주신다고요? 강철 신발, 강철 신발 주시고, 그다음에 우리에게 지난 주일날 기쁨의 복음을 통하여 기쁨에 뭘 준다고 면류관 기쁨의 모자를 쓰고, 오늘은 빛의 갑옷을 입고, 이 한 해를 살아가야 되는 것이 빛의 갑옷을 입고 그래서 이걸 사랑의 교회 이 한 해 동안 모든 성도들, 우리 찬양대 오케스트라 또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이 빛의 갑옷을 입게 되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이 하늘을 뚜벅뚜벅 걸어갈 수가 있는 것이에요. 다시 한 번 강철 신발 신고 그다음에 뭐예요? 빛의 면류관을 쓰고 그다음에 뭡니까? 기쁨의 면류관을 쓰고 여러분도 주일날 설교를 여러 번 해보세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요? 다시 뭐예요? 기쁨의 모자를 쓰고, 그다음에 빛이 뭐예요? 갑옷을 입고, 그러니까 오늘 이거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꼭 필요한 진리를 여러분들이 깨닫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은 진리의 빛이신데, 그 빛 대신 주님과의 교제를 하면 주님의 가장 소중한 것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데 먼저 빛의 자녀 된 하나님의 빛으로 걸어가는 사람, 빛의 자녀가 된 하나님의 사람에게 주신 축복이 몇 가지, 첫째 이건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빛보다 더 높은 수준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물리적으로 우리가 이해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먼저 우리가 빛은 위험을 피하게 해 주실 거예요. 빛 가운데 거하면 주님과의 교제를 또 빛 가운데 거하면 모든 뭘 피할 수 있다. -여러분 여기에 5절에 보니까,

I. 빛 가운데 거하면 모든 위험을 피할 수 있다.

*요한일서 1:5,
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 더 없다 그랬어요. 어두움이라는 것은 방향이 없는 상태를 의미해요. 사람들은 빛의 복음이 없으면 방향 감각이 사라지는 것이에요. 우리 앞에 있는 웅덩이와 구덩이에 빠져가지고 어떻게 방향 감각이 없으니까. 그러나 올바른 진리의 빛이 우리 속에 있으면 우리가 방향 감각을 가지고 우리가 위험을 피할 수가 있는 것이에요.

※저는 어릴 때 지금도 기억나는 게 자전거를 중학교 다닐 때 자전거를 타고 막 자전거를 막 열심히 타고 그리고 조금 길이 좀 넓은 데는 내가 잘 아는 길이다. 해가지고 막 달리고 이랬는데 어느 날 저녁에 깜깜한 데 자전거를 타게 됐어요. 이제 시골에 있는 교회를 가게 됐는데, 거기를 제가 잘 아는 길이어서 빛이 없더라도 내가 아는 길이니까 자전거 타고 내가 가겠다고 내가 막 타고 가다가 그냥 어두운 데서 그냥 돌 뿌리에 처해가지고 어땠냐면 옆에 있는 겨울 물에다가 확 몸에 처박혔어요. 사투리를 또랑이라고 그러는데 도랑에 그냥 쳐 박혀가지고 내가 그때 내가 다시는 밤에는 자전거 안탄다. 는 생각을 했어요. 내가 여러분 빛의 가치는 위험을 피하게 해주는 겁니다.

어둠 가운데 걷다가는 나무 가지에 걸릴 수도 있고, 가시에 찔릴 수도 있고, 구덩이에 빠질 수도 있고,, 낭떠러지에 떨어질 수도 있어요. 그런데 영광의 빛을 우리가 진리의 빛을 우리가 확인하고 이 진리의 빛 가운데 우리가 거하게 될 때 인생의 거친 들이나, 독사나, 절벽이나, 수많은 방해들의 나뭇가지도 다 피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영광스러운 빛을 통하여 우리 앞에 예기치 않게 버티고 있는 가시나 돌멩이나 절벽이나 거친 독사을 다 피할 수 있도록 은혜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기 전에 10가지 재앙이 애굽에 내렸는데, 9번째 재앙이 뭐냐 하면요. 내가 물어보지 않겠어요 물어보면 또 답을 못할 것 같아 갖고, 9번째 10번째, 10가지 재앙 가운데 10가지 마지막 재앙은 알죠? 장자 죽음 그건 다 알죠? 9번째 재앙은 강도를 막 높여가는데, 애굽의 강물이 피가 되는 것부터 시작해가지고 개구리 뭐부터 시작해가지고 쫙 하는데, 아홉 번째 제일 강도 높은 것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흑암이었어요. 9번째 재앙이 암흑의 재앙이었어요. 흑암의 재앙이었어요. 흑암을 어두움의 재앙이었는데, 며칠 동안 지속이 됐냐? 3일 동안, 3일 동안, 3일 동안 애굽 쪽의 애굽 나라의 그냥 막 깜깜하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완벽한 어둠에 임했어요. 모든 것이 중단되었어요. 여러분 만약 3일 동안에 모든 것이 깜깜해가지고 모든 게 중단되고, 인터넷도 안 되고, SNS도 안 되고, 전기도 안 들어오고, 모든 것이 깜깜하다면 여러분 어떡하겠어요? 굉장히 위험한 거죠.

요한계시록 16장에 보면, 그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진노를 내리실 때에 심판 날에 진노를 내리실 때 일곱 대접을 통해 7가지 진노를 내리시는데, 그중에 다섯 번째 대접, 거기에 뭐가 나오는 다섯 번째 대접을 쏟았는데, 요한계시록 16장 10절에 뭐라고 하냐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6:10,
10 또 다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다섯 번째 천사가 그 대접을 짐승의 왕자에 쏟으니 심판하는데 그다음 읽어보겠습니다.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었다. 완벽한 어둠이 오니까 그 고통이 얼마나 대단한지 자기 혀를 깨무는 것이에요. 오늘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어두움과 문제 앞에서 우리 혀를 깨물만한 그런 일도 생기는 거예요. 그런데 대조적으로 출애굽기 10장 23절에 보면 뭐라고 나와 있느냐 함께 보죠.

*출애굽기 10:23,
23 그 동안은 사람들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더라.
-이집트 지역 애굽 사람들이 사는 그쪽에는 완벽한 어둠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주하는 고센 땅에는 빛이 있었더라. 할렐루야!!! 하나는 아주 그냥 아주 극적인 대조죠. 하나는 너무나 암흑이고 하나는 빛이 있는 거예요. 이걸 보고 많은 이방 족속들 가운데 여러 성경을 잡족, 여러 부족 이라고 그러는데 멀티플 트라이브(Multiple Tribe) 여러 족속들이 우리 이스라엘 백성을 따라 가는 게 낫겠네. 이렇게 해서 출애굽 할 때, 잡족 들이 13만 8천 명이나 같이 왔어요. 여러 족속들이 나왔어요. 마음 뭘 말하는가 어둠에 살며 혀를 깨물만한 그런 고통을 갖는 사람들이, 여러분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빛을 보고 주님 앞에 돌아오는 축복을 허락해 주시기를 원하는 것이에요. 어둠을, 그러니까 위험을 피하게 해 주는 빛에요.

두 번째로는 오늘 5절 다시 한 번 그에게는 조금 더 뭡니까? 어둠이 없다. 어둠이 조금 더 없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빛 자체이신 예수님이 계시면 어둠이 물러간다. 그 뜻이에요. 빛 가운데 가면 모든 어둠이 다 그냥 어둠이 물러가고 다른 말로 어둠이 드러나는 것이에요.

II. 빛 가운데 거하면 모든 어둠이 드러난다.

*요한일서 1:5,
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그리고 5절에 어둠이 조금도 없다는 말은 다시 빛 자체이신 예수님이 계시면 어둠이 다 뭐예요? 드러나는 어둠을 다 드러내주는 거예요. 빛은 다들 어둠은 가리우지만, 빛은 다 드러내는 거예요. 빛은 우리의 삶과 연결시키면, 빛을 우리의 삶과 연결시키면 빛은 우리의 현실을 정확하게 볼 수가 있다는 것이에요. 젊은이들이 쓰는 말은 현타,-현실 자각 타이밍이 온 거예요. 빛이 오면 내 속에 있는 내 부족한 어둠을 드러내는 거야. 젊은이들 가운데 내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진정한 삶의 가치는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나는 왜 살아야 하나? 나는 내 인생을 어떻게 이해하고 내 삶을 꾸려나갈 것인가? 수많은 난제들이 있는데, 빛이 오면 그 난자들이 빛이 오면 다 드러나게 돼 가지고 수많은 난제에 대한 빛을 발견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삶이 더 혼란스럽지가 않고 갈 길이 분명해지는 것이 갈 길이 분명해지는 것이에요. 아까 사도행전 26장 13절에 사도바울이 그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이 비추어짐에, 밝은 빛이 비추어줌에 자기를 비추니까 그다음 구절이 뭐냐 하면요. 주여 뉘시니까 그다음에 주여 내가 무엇을 할까 후아유(Who are you? 주님 누구시냐고, 왓 셀 아이 두-What shell I do, What can I do?)? -내가 뭘 할 것이냐고,,,, 삶의 난제가 해결되기 시작한 거예요. 빛이 비춤으로 사울의 삶이 다, 바울의 삶이 다 드러나게 된 것이에요. 살다 보면 우리가 어두움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영광의 빛, 신뢰의 빛이 발견되면 영원히 회복되고, 우리의 삶에 아주 그 비참한 그 처절함 들이 해결되는 것이에요. 내 영혼의 햇빛 빛이니 수많은 인생에 이 의문점이 바울처럼 풀리게 되는 거예요. 내 영혼이 해빛 비추니 주님의 영혼과 찬란하고 주의 영광 빛난 광채 내게 비춰주실 때, 그 밝은 얼굴 뵈올 때 내 삶의 모든 어려움들은 드러나게 되고 진리의 빛을 통해 난제가 해결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오늘 앞으로 우리 이제 4월 총선 앞에 놓고 나라가 시끄러울 겁니다. 주여, 이 나라의 수많은 난제들을 주님 진리의 빛을 비춰 가지고 다 드러나게 하여 주십시오. 다 드러나게 하여 주십시오. 다 드러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럴 때, 여러분들이 하나 깨달아야 할 것은, 그 문제를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자기 자신을 좀 더 객관화하고, 빛으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문제를 직시를 해야 되는 것이 이런 뜻이에요. 예를 들어서 결혼 생활에 있어서 주님이 다 드러낸다는 게 어떤 뜻이에요? 왜 사람들이 배우자를 버리고 왜 엉뚱한 짓을 합니까? 저 남자와 결혼하면 배우자가 있어도 한 눈 팔면서 저 남자와 혹은 저 여자하고 다시 살면 내가 좀 더 행복해질 것 같은 그런 이상한 잘못된 어떤 매력을 느끼는 거예요. 매력 있다고 생각하니까 바보짓을 하지 매력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는데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뭔가 인간적인 뭔가 자기 나름대로 뭐가 있으니까, 그런데 이 진리의 빛은 그 상황 자체를 다 드러내는 거예요. 아까 말한 대로 영적인 현타가 오는 거예요. 현실 자각 타임이 오는 거예요. 내가 매력이 있다고 생각해가지고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사랑에 빠져가지고 가정이 지루하고 희망이 없이 느껴져 가지고 그래서 조강지처 버리고 새로운 사람과 새 출발을 하겠다고 유혹에 빠진다면, 그게 이제 그게 이제 그런 또 뭔가 거부하기 힘들 정도로 매력이 있어가지고 그런 게 있다면 그 순간 하나님의 진리에 빛이 비춰지면요. 다 드러나게 되는 것이 다 드러나게 되는 것이에요. 지금은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앞으로 그것이 얼마나 그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고, 그리고 관계된 사람들을 다 상처를 줄 뿐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드러내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아 이거 제대로 아이고야, 이거 내가 잘못되었구나! 내가 이런 짓 하면 안 되겠구나 견적이 나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제가 결혼 생활을 얘기했지만,

여러분 삶에 수많은 일들이 그런 게 있을 거예요. 지금은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의 진리 빛에 오셔가지고 그 어리석은 매력을 어리석은 매력을 어매, 라고 그래요. 어매-어리석은 매력을, 어리석은 매력을 다 드러내게 되면, 아 이게 앞으로는 진짜 지금은 그게 내가 좋아 보이지만 나중에 진짜 나를 상처 주겠네. 오늘 이런 영적인 통찰력을 여러분들에게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에요. 진리의 빛은 복음의 핵심을 드러내고 그중에서도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를 더 드러내는 것이에요. 진리의 빛은 저희 미국 신학교 선배였던 존 네카드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합니다.

※“참 슬픈 일이 있다. 슬픈 일이 뭐냐 진리의 빛을 비춰 보니까, 죄송하지만 타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 힌두교도 구원이 없고, 타 종교에 구원이 없다. 제가 지금 조심스럽게 설명 드리고 더 강하게 말씀하고 싶은데 하여튼 제가 뭉뚱거려서 타 종교는 구원이 없다. -존 네카드 목사님-
-이게 진리의 빛을 비춰보면 드러나는 슬픈 현실이에요. 진리의 빛을 비춰 보니까 천하의 구원을 주실 만한 이름은 예수님밖에 없다 이 말이에요.

오늘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영혼의 빛을 진리의 빛에 대한 안목이 떠져가지고 예수님이 내 삶의 참된 구원자이시구나! 이걸 여러분 깨달으셔야 되는 거예요. 그게 슬픈 일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타 종교의 구원이 없는 이 슬픈 일보다도 더 슬픈 일이 있다. 더 슬픈 일이 뭔가 교회 안에서도 진리의 빛에 대해서 눈을 뜨지 못한 교회 안에 가라지 들이 많다. 그건 또 너무 아멘!! 하면 돼. 교회, 교회 안에 오죽하면 아멘 하겠어요? 오죽하면 이게 더 슬픈 일인데 교회 안에 가라지 들이 많은데 현대판 바리새인들, 그 사람들이 영혼들을 해치고 사람을 물어뜯는 늑대 같은 사람들, 오늘 6절 뒤에 있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고도 진리를 행치 않는 사람들, 교회의 오늘 혹시 그런 성향 그런 거 있다면 우리가 주님의 진리의 빛으로 다시 옮기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에요. 슬픈 일들 타종교에는 구원이 없다. 교회 안에 있는 더 슬픈 일 가라지들.. 그런데 진리의 빛이 오면, 아까 처음에 위험도 피하게 해주고, 그다음에 모든 어둠움 들을 다 드러내는데, 어두움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적극적으로는요. 말라기 4장 2절에 보니까 놀라운 말씀이 있어요.

*말라기4:2,
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할렐루야!,, 치료하는 광선,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가지고 치료하는 광선, 태양빛 정도가 아니라 그 완벽하고도 온전하고도 영광스러운 빛이 비춰지면 이 빛에 대한 눈이 열려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치유하는 광선을 비춰준다는 것이에요. 너무 아파가지고 몸이 너무 힘들어가지고 내가 이거 어떻게 살면 좋은가 이런 분이 게시판에 오늘 이 말씀이 내게 빛이 된 줄로 믿습니다. 주여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어 주셔서 나도 좀 이렇게 맨날 아파가지고 누워 있는데, 나도 좀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송아지가 펄떡펄떡 뛰잖아요. 오늘 마칠 때 우리가 주님 당신의 사랑의 빛 찬송할 때 여러분 송아지같이 펄쩍펄쩍 뛰는 축복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진리의 빛 치료하는 광선이 비춰지면, 우리는 정말 역동적이에요. 되는 거 역동적으로 이런 말씀을 드려도 문제가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나님이 이런 은혜의 빛을 비춰주실 때, 그 빛을 등지고 있으면 등지고 있으면 빛이 주시는 축복을 못 누리는 것입니다.

흔히들 말하는 예수님의 반사체가 될 수가 없습니다. 새해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비춰주실 때, 등을 지고 반대 방향에 서 있지 말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발 은혜의 빛에 주류, 주류의 메인 스타디움에 서시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삐딱선 타지 말고, 아무리 은혜의 비가 내려도 그릇이 엎어져 있으면 한 방울에 단비도 그릇에 담기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빛을 비춰주셔도 여러분 창문을 꼭꼭 닫아두고 의심의 커튼으로 다 가리고 있으면 빛이 들어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창문이 기쁨과 감사의 창문이 되기를 바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새로워진 창문이 되기를 바라고, 이렇게 됐을 때,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빛이 완벽하게 여러분들에게 비춰 들어올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빛은 태양빛 정도가 아니라, 이 예수님의 빛은 너무나 놀랍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면에서 빛은 우리에게 위험을 제거해 주고, 빛은 우리의 모든 어둠을 드러내주고, 빛은 우리에게 치료하는 광선을 비춰주는 것인데, 또 하나 있다면 빛은 우리가 빛 가운데까지 빛은 우리에게 영적인 에너지와 생명의 능력을 공급하는 것이에요. 여러분, 빛은 위험을 피하게 해주고, 빛은 어두움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에너지를 주는 영적 에너지를 주는 것이에요. 빛의 가장 큰 특징은 빛은 생명을 주고 벌떡 일어나게 하고 생동감 있게 하고 활발하게 하고 에너지를 주는 것입니다. 빛이 들어올 때에 우리의 삶이 어떻게 생동감을 줍니까? 시편 27편 1절에 보니까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III. 빛에 거하면 모든 참된 힘을 공급 받는다.

*시편 27:1,
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이 빛이 들어오면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이에요. 삶에 은근히 배어 있는 나도 모르는 뭔가 2%로 뭔가 복잡하고 뭔가 아픈 거, 뭔가 두통 나는 거, 그 모든 것들을 진리의 빛 가운데서 다 제거하는 영적인 에너지와 능력이 여러분들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어두운 밤에는 어려운 일들이 많지만 아침에 밝은 태양이 떠오를 때 잠든 세상을 비추는 빛을 비춰주는 것이에요. 다시 시작할 힘을 주시는 것이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 빛이신 하나님과 동행할 때 파괴된 것들을 고치시고 생명력 있는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럴 때 엎어져 있지 아니하고, 절망 속에 그냥 헤매지 아니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의 에너지가 고갈될 때마다 빛이신 주님 앞에 나와 찬양하고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빛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빛이시기 때문에 빛 되신 주, 어둠 가운데 비춰 주사 내 눈을 열어주십시오. 비추소서 우리의 삶에 주님 당신의 사랑의 빛을 비춰주십시오. 오늘 저 빛은 위험을 피하게 해주고 빛은 어둠을 드러내고 빛은 우리에게 영적 에너지를 준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에너자이저가 되고 남들에게 에너지를 주고, 에너지 뺏는 사람 되지 마시고, 그걸 위해서 우리가 크게 두 가지 적용을 하겠어요.

첫 째 적용이 뭘까요?
국가적으로, 우리 한국교회 앞에서 한국교회 앞에 뭘 적용할 것인가? 아파하는 사람들과 그러면 한국 교회 우리가 빛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아파하는 자와 함께 아파하고, 그다음에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고 같은 마음 같은 가족 의식, 같은 동료 의식, 같은 형제자매의 어떤 브라더시스터 의식, 이걸 가질 때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향한 빛의 역할을 감당해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이거예요. 무슨 뜻인가 하면, 어느 날 예수님께 요한복음 8장 가면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데리고 왔어요. 바리새인들 소위 잘 나간다는 종교 지도자들이 여인이 현장 잡힌 여자를 데리고 와가지고 막 내팽개치면서, 선생님 이 여자 어떡하면 좋습니까?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 여자 돌로 처 죽여야 돼. 그런데 선생님 맨날 사랑을 강조했으니, 그럼 처 죽이지 말라 그러면 율법을 범하게 되고, 그러면 또 저기 뭐야 처 죽이라. 그러면 사랑 강조는 어긋난다고 그래가지고, 딱 추레베 걸어가지고 막 그랬어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 무슨 말을 하느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그 여인과 그 여인에 대해 주님께서는 너 어쩌다 이렇게 됐네 같은 식구 같은 마음, 같은 누이 같은 마음으로 같은, 같은 가족 같은 마음으로, 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그리고 요한복음 8장 11절에 그렇게 말씀하시고 12절이 너무나 중요한 요한 8장 12절에 시작

*요한복음 8:12,
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아멘, 그러니까 아파하는 자와 함께 아파하라는 거예요. 이게 뭘 말하는가 하면 한국교회 안에 무슨 어떤 사람, 유체이탈-遺體離脫, 화법의 사람들이 있어요. 자기는 잘났고 자기는 괜찮고 자기는 어려운데 다 잘못됐다는 거야. 한국교회가 세속화돼 있다. 한국교회가 너무 우민화되어 있다. 한국교회가 너무 부족하다. 뭐가 어떻다 뭐가 어떻다 막 뭐라고 공격하는 거예요. 물론 우리가 조심조심하고 우리가 고쳐야 할 거 많이 있지만 여러분 가족은요. 그래 하면 안 되는 거에요. 가족은 같이 마음 아파해야 되는 거예요. 내 자식은 아무리 잘못해도 내 자식 잘 되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 마음이에요. 자식이 잘못했다고, 부모 진짜 부모는 자식이 잘못하면 가슴이 같이 가슴 아파하고, 너 어쩌다가 이렇게 됐냐고, 진짜 집안의 가장은 집 밖에 나가서 자식 욕 안 합니다. 흉악한 자식이라도 돌아오길 원해야지 어떻게 비난만 하는 겁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위대한 비판자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참된 같은 목자의 심정을 지닌 같은 마음을 가지라고,,, 한국교회와 여러분 자신을 일치시켜야 되는 것이고, 가족이 돼야 되는 거에요..

오늘 우리 사랑의 교회 교인들, 아니 한국 교회 교인들이 서로가 한 가족처럼 일치가 돼가지고, 우리에게도 부족한 점들은 우리가 회개하지만, 우리가 서로를 아끼고 보호하고 유체이탈 화법을 가지고 누가 어떻다 뭐라 그렇다. 여러분,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심판자를 키우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야 우리가 한국교회가 시대 앞에 빛으로 소금으로 살 수 있는 것이에요. 그동안 우리 신학교가 너무 비판적 선지자들을 많이 키웠어요. 이제는 참된 목자들을 키워야 할 줄로 믿는 것이에요. 비판적 선지자 키우지 말고, 참된 목자 키우고, 그래서 이 안에 또한 저희 교회 제자 훈련 사역 훈련하면서 참된 목자들 키우고, 순장 반에서 참된 목자들 키우고, 제사장적 책임으로 이 시대를 섬기겠다. 그게 바로 빛으로 사는 것이에요. 그게 바로 이렇게 될 때, 우리가 진짜 복음을 깨닫고, 어두움의 열매인 공로 의식을 내려놓고 빛의 열매인 은혜 의식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고, 이렇게 될 때 어두움의 열매인 자아실현을 내려놓고 빛의 열매인 자기 부인으로 사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유체이탈 화법을 쓰지 말고 같이 마음 아파하고 심판자가 되지 말고 같이 목자가 되고 그렇게 해서 한국교회가 시대 앞에 빛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적용, 또 하나, 우리 개인적으로 적용할 걸 어떻게 빛으로 살 수 있을 것인가 저는 참 좋은 멘토들을 귀한 멘토들을 통하여 많은 제가 은혜를 받았고, 또 그런데 멘토들 가운데 다이렉트 멘토가 있고 직접 멘토가 있고, 인다렉트 멘토가 있어요. 간접 멘토가 있어요. 간접 멘토는 어릴 때부터 책을 읽으면서 찰하던 스폴존이라든지, 시티스터들, 저에게는 또 데이빗 브레인어드라든지 이런 사람도 있지만 그중에 한 명이 저에게 참 제가 제게 좋은 멘토 중에 하나가 어릴 때 책 읽은 가운데서 땅콩 박사라 그래가지고 닥터 조지 워싱턴 카버라고 있어요. 이분은 흑인으로 태어났어요. 너무나 비참하게 태어났어요. 얼마나 비참하게 태어났냐면요. 조지 워싱턴 카버는요. 생일을 몰라요. 너무나 비참하게 태어나고 그냥 상처와 혀를 깨물고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환경이었어요. 근데 이분이 복음의 빛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어요. 미국 노예로 태어나가지고 한탄할 수 있는 인생이었지만, 복음의 빛을 받아가지고 영적 역동성을 가지고 미국이 배출한 가장 위대한 과학자 중에 하나가 되었어요. 그의 연구로 전 세계가 축복을 받았어요. 그가 어느 날 하나님 앞에 이런 질문을 했어요.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왜 세상을 만드셨습니까? 그랬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이런 깨달음을 주셨어요. 야 그거 너무 너에게는 무리한 질문이다. 우주만물을 너의 지성으로 아는 거 쉽지 않다. 그러니까 이 카버가 하나님 그러면 왜 사람을 만드셨습니까? 그러니까 그것도 어려운 질문이다. 너의 지성이 알아서 쉽지 않다. 네가 깨달을 수 있는 질문 좀 하라. 그리고 갑자기 그의 마음에 어떤 섬광처럼 빛이 비추었는데, 주님, 그렇다면 땅콩은 왜 만드셨습니까? 자기가 고민하다. 땅콩 생각이 나가지고 주님이 땅콩을 왜 만드셨냐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뭐라고 대답해 야 너 진짜 제대로 질문했구나. 네가 알아들을 수 있는 질문을 했구나. 그 순간 그 순간 워싱턴 카버가 자기 뭐야 방에서 밭으로 쫓아 나가지고 땅콩을 한 움큼 들고 자기 실험실로 들어갔어요.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땅콩에 감춰진 비밀을 알려주기 시작했어요. 남들이 보기에 땅콩인 거 아무것도 아니죠. 그런데 거기에 놀라운 것이 담겨 있었어요. 여러분 제가 야고보서 1장 17절 앞에 말씀을 안 드리고 넘어갔는데요.

*야고보서 1:17,
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우리가 진리의 빛이 비춰지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면 뭐라고 나와 있냐면요. 같이 읽겠습니다. 할렐루야!!! 빛들의 아버지, 빛이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가 빛이신, 그 빛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면 온갖 좋은 은사와, 그다음에 너무 멋있고 귀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것이에요. 그 땅콩이 어떻게 됩니까? 물어보니 하니까 하나님께서 막 이 땅콩에 원해서 온갖 좋은 선물과 온갖 좋은 은사를 다 부어주시니까 이 닥터 조지 워싱턴 카버가 흑인 흑인으로 처음으로 박사가 된 땅콩을 통해서 박사가 되는데 뭐 나오느냐 땅콩을 통하여 기쁨과 에너지를 체험하고 위험을 피하고 다 드러나게 하시니까 땅콩에서 땅콩버터, 땅콩밍크, 땅콩 잉크 왜 땅콩에서 어떻게 잉크가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잉크 땅콩물감, 구두약, 연고, 크림 등 무려 땅콩에서 105가지 음식, 105가지 음식과 200여 가지의 실용품을 발명해가지고 땅콩 박사라는 별명을 갖게 됐습니다.

제가 오늘 말씀 여러분들에게 주신 땅콩이 뭐예요? 주님의 진리의 빛으로 여러분들의 땅콩을 어떻게 비출 거예요? 그 땅콩이 나에게는 가정 예배가 될 수도 있고,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뭐가 될 수도 있고 여러분의 직업이 될 수도 있고, 여러분 삶의 현장에서 제가 다 모르는 어떤 것이 될 수가 있어요. 그 땅콩에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비춰주시기 바랍니다. 태양빛 정도가 아니고, 온전하고도 완벽한 빛을 비춰주시면 빛으로 빛의 갑옷으로 무장되면 많은 것들, 많은 지혜들, 많은 열매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기 때문에 이 한 해 동안 우리 모든 성도들 빛 안에서 걷는 능력을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빛 대신 주님이 주신 에너지와 지혜를 가지고 영적인 힘을 가지고, 닥터 조지 워싱턴 카버 같은 이 빛의 능력으로 우리 교회와 여러분들에게 주신 소명을 이루어가는 귀한 한 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요약
주님의 참된 생명의 교제 가운데 거짓은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의 갑옷을 입는 인생으로 살아가며, 흑암 중에 고통 하는 영혼들이 해보다 더 밝은 찬란한 진리의 빛을 보아야 한다. 인생의 수수께끼 같은 난제들이 다 해결되고, 개인과 공동체와 우리 민족 위에 치료의 광선으로 은혜로 비추어 주심을 믿고 빛의 주류에 서서, 목자의 심정을 가진 지도자의 복을 허락하심을 믿고 진리의 능력을 받아 거듭난 인생, 순종의 삶을 살아서 이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야 한다.
-빛의 근원이신 주님과의 깊은 교재를 깨닫게 하심을 감사하며,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온갖 귀한 것들을 깨닫고 경험하는 이 한 해가 되어야 한다. 위험으로부터 피하게 하시는 빛의 능력을 받게 하시니 어두움을 드러내고 수수께끼와 같은 난제들을 다 풀리게 하는 진리의 능력을 확보하는 자로 거듭나야 한다.. 바울 사도 같이 참 빛 앞에 자신을 깨닫고, What can I do?,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깨닫고, 어둠의 열매인 공로 의식은 내려놓고, 빛의 열매인 은혜의 의식으로 완전히 무장한 순종의 삶, 빛과 소금의 살아가야 한다. 우리 가운데 치유하는 광선을 필요한 분들에게는 지금 주님의 빛의 갑옷을 입혀주어야 한다..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빛 가운데 행하는 자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음을 보여 준다.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즉, 그들은 우리와 함께, 우리는 그들과 함께, 또한 우리와 그들 모두는 하나님과 함께 사귐이 있게 된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적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의 피는 우리를 위하여 거룩한 능력을 행하셨으며, 이로써 죄는 더욱 더 뿌리 뽑혀지고 종국에는 온전히 소멸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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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4년 01월 07일)
제목: "기쁨이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말씀: 요한1서 1:3~5
찬양인도: 쉐키나(이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대표기도: 하상범 부목사님
사회: 임병영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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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1서 1:3~5,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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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광스러운 신년 첫 주 신년 주일 예배에 이렇게 나올 수 있도록 하나님 건강 주시고 믿음 주시고 환경 주시고 은혜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한 해 동안 이 강단을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심정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선포함으로 말미암아 매주 마다 도전과 치유가 나는 그런 영광스러운 감각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일부 찬양에 우리가 아침 8시에 이렇게 영광스러운 찬양을 들을 수 있다는 게 축복 아닙니다. 다시 한 번 주님께 감사합시다. 늘 하나님께 잘 영광 돌리지만 오늘은 베스트 오브 베스트(Best of best!), 매주 마다 이렇게 할 수 있겠어요?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이 주 근데 내 마음대로 하세요. 2부도 하고 3부도 하고 4부도 다 하고 싶은데, 또 2부는 2부대로 3부는 3부대로 4부는 4부대로 은혜 주시길 주님을 찬양합니다. 저는 담임 목사로서 담임 목회자로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덕담을 하나 하고 싶은데요. 뭐냐 하면 올해가 몇 년이죠? 24년 아저씨 무슨 해가 됐는지 이제 올해가 2024년, 2024년에 제가 좀 이런 생각이 좀 들었어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은 이 한 해 동안2024번의 감사가 있게 하여 주십시오.

목사님, 그게 진짜 가능할까요? 가정에 하루에 6번씩 가수 하루에 6번씩 어떤 분은 이제 목사님 1년에 100번이라도 ‘감사’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면 1년에 100번은 일주일에 두 번씩인데 일주일에 두 번 감사하는 사람과 하루에 6번 감사하는 사람은 삶의 퀄러티가 삶의 질이 완전히 달라요. 그래도 안 믿어지시죠? 가능해요. 아침 점심 저녁 드시면서 기도하시면 감사하시면서 하루에 세 번이 진심으로 그러니까 올해 식사 기도는 옛날하고 달라야 합니다. 아시겠죠? 그러면 여러분들이 음식 자체가 달라질 것이에요. 그리고 식사 기도할 때도 시작할 때, 감사하시고 마칠 때 감사하시고, 그러면 하루에 6번 자동적으로 이 한해 완전히 달라지는 거에요. 알 사람은 알도다. 그리고 오늘 제목을 이제 그래서 어떻게 하면 감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냥 감사는 안 되고 기쁨에 감사하면 되죠. 그렇죠? 기쁨이 있어야 감사가 되지. 그래서 사실 제가 기쁨이 없는 그분은 그 부분이 아니라 제가 이 설교자를 붙이면서도 어마어마하게 부담이 됐어요. 이래 놓고 우리 의원들은 기뻐하지 못하고 나는 원래 죽는데 참 좀 어떻게 보면 리스크가 큰 위험이 내재된 그런 설교 제목인데 하여튼 오늘 이 예배를 마치고 나갈 때는 기쁨이 충만해서 나가셔야 됩니다. 다음에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기뻐할 수 있는가? 사실은 기쁨이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능력이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또 어떻게 보면 감사가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은혜가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이해가 되시죠? 그런데 이게 과연 가능한가? 가능한 거예요. 왜 가능한가,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고린도후서 3:6,
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영이라는 것은 성령 성령은 우리를 다시 뭐예요? 살리는 것 살린다는 말은 우리를 능력 주시고 새롭게 하시고 이렇게 하시는 어떻게 살립니까? 성경에 보시면 먼저 사도행전 2장에 보니까 제일 먼저 오순절 성경 강의 일어났을 때, 우리 사도행전 2장 17절에 뭐라 하냐면,

*사도행전 2:17,
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주의 영이 임하면 주의 영이 우리 몸에 임하면 우리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다른 우리 아이들이 벌써 예언을 말씀을 깨닫는다. 그 말이에요. 너희 젊은이는 환상을 본다. 젊었을 때 꿈을 꾼다는 것이 그리고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리라. 그러니까 성년이나 나이 드신 분이나 상관없이 하늘나라 비전과 꿈을 갖게 된다 이 말이에요. 주의 영이 임하면 그 꿈이 있는 곳에는 기쁨이 생길 수 있고 감사가 생길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이가 많아도 하나님 나라의 꿈을 꾸면 성령이 임하시면 모두가 다 뭐가 되는 거예요? 청년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 주시는 꿈을 꾸는 이 예배이기 때문에 여기는 뭐가 없다고요? 세대 차이가 없어요..

교회가 제가 한 번 그 얘기 드렸는데, 제가 이스라엘 대사관에 사바디너라고 금요일 날 초청을 받아 왔는데 대사관에 거실에 어떤 여자 분이 앉아 있는 거예요 앉아 있는데 보니까 중동 여자 분이에요. 얼굴도 좀 그렇고, 이스라엘 대사관 안에 이스라엘 대사님은 뭐냐 하면, 어떻게 중동 분이 사모님이시냐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모님 예멘 출신이시래요. 예멘이라는 나라 아시죠? 예멘이라는 출신이시랍니다. 어떻게 된 거냐 그러니까, 예멘 출신 그러니까 현 대사는 미국의 콜롬비아 대학 가고 뉴욕 출신 백인인데 웨베 출신하고 중동 출신도 거기하고 뉴욕 출신하고 이렇게 서로 잘 되신 거냐고 물었더니요. 그러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십니다. 우리 어릴 때는 똑같은 토라로 교육받고 똑같은 성경 공부하고 똑같이 하니까, 컬처 계획도 없고, 신학의 교육도 같았다고 해요. 제가 어마어마한 정신을 받았어요. 그래서 제 마음에 사랑의 교회 모든 성도들은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문화 차이가 없게 하여 주십시오. 어떤 세대 차이를 갖게 하여 주십시오. 왜 동일한 말씀이니까요.

저는 꿈을 가져요. 앞으로 사랑의 교회 주일 학교 교육 정책, 사랑 글로벌 아카데미가 제대로 되면 전 세계가 다 통일될 수 있는 전 세계에 있는 코리안 디아스포라 750만과 한국에 있는 모든 주일학교 아이들 모두가 다 똑같은 커리큘럼 똑같은 신학, 사원 똑같은 문화, 똑같은 어떤 수준 똑같이 하면 어디 출신이든지 다 똑같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거기에 사는 아이들끼리 서로 결혼하면 한국 교회가 보존되는 것이 저는 좋은데 여러분이 보통이 아 그러면 한국 교회는 도전되는 것이에요. 이게 우리나라의 꿈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역사가 있으면 하나님의 역사가 있으면 그러니까 성령이 역사하시는 곳에는 뭐가 있든 없다고요. 세대 차이가 없고, 여러분들 모두는 다 나이가 들어도 영적인 청년들이 되는 것이에요. 우리 자리에 계신 어른들 다 영적인 청년들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어떻게 우리는 영적 청년의 기백을 끝까지 유지하지 않아요. 늙으면요. 웃지를 않아요. 늙으면 이게 웃음이 많이 사라져요. 무표정이에요. 청년들은 조그마한 웃고 까르르 웃고, 특별히 어린 아이들은 더 잘 웃고, 그러니까 오늘 이 예배 끝나고 난 다음에 우리 나이 드신 분들은 다 젊은이로 돌아가는 것이에요. 오늘 본문을 통하여 몇 가지 좀 정리를 하겠습니다. 오늘 다시 한 번 기쁨이 없는 복음은 뭐가 아니라고요? 복음이 아니다.

제가 오늘 본문을 쓴 요한에 대해서 얘기하기를 먼저 우리 베드로는, 사도 베드로는 뭐든지 선봉장이고 개척자이고, 그다음 바울은 집을 세우는 지을 집 짓는 세우는 자이고, 요한은 어떻게 된다고 그랬죠? 사도는 치유하는 자라고 그랬어요. 제가 한 3주일 전에 말씀을 드렸는데 기억이 안 나십니까? 베드로는 개척자 선봉장이고 바울은 집을 짓는 자로 우리가 비유를 한다면, 사도 요한은 그물을 고치고 짓는 거에요. 사람들을 고치고 치유하는 사람인데, 그 당시에 요한일서를 기록한 이 배경은 에베소 지역에 있습니다. 에베소에서 이 기록이 에베소 교육 자체가 철저하지만 첫 사랑과 첫 기도를 이루는 그리고 이단이 바로 하고, 그런 상황에서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 말씀을 듣는 성도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듯이, 이건 에베소 교회뿐만 아니라, 21세기를 살아온 우리 교회도 동일하게 그리고 머리로만 하는 신앙이 아니라 지금 내 가슴에 불이 지르듯이... 그러면서 먼저 그렇게 되기 위하여 이 복음과 생명의 역사 복음에 대해서 입체적으로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데 오늘 뭐라고 돼 있습니까? 3절에,

*요한일서 1:3,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에게 전함은 우리와 뭐가 있게 하려니 사람들이 우리의 사임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림이라고 그랬어요. 여기 보니까 내가 아니라, 우리가 공동체가 사랑의 교회라는 이 공동체가 누리는 기쁨인데 주님과의 교재가 공동체에서 교재가 되면 무슨 일이 있느냐 이걸 이 교재의 은혜가 있을 때, 제가 교재 주님과의 교제 권에 들어갈 때에 제일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 트랜스퍼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주님과의 교제를 누리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좋은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제가 에베소서 1장 3절에 찬송하리로다.

*에베소서 1:3,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 했을 때, 그 신령한 복을 주신 결과가 뭐냐 자연스러운 결과가 뭐냐면 1장 4절에,

*요한일서 1:4,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아멘.. 저와 여러분에게 뭐가 있게 하기 위하여 기쁨이 충만하게 하신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죽하면 오죽하면, 시편 16편 11절에 똑같이 나오는데요.

*시편 16:11,
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정리하겠습니다. 잠깐만요. 시편 16편을, 사도행전 2장에 성령 충만한 베드로가 다시 그대로 설교를 해가지고 반복을 하는데 저게 사도행전 2장도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저 말씀이 나와 있는데 뭐라고 말씀하는가, 주님과의 올바른 교재가 있고 우리의 복음이 입체적이 되고 우리의 복음의 능력이 있을 때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주님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거기에 나타나는 중요한 현상 중에 하나가 주의 앞에는 뭐가 있고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손에는 뭐예요?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에 모든 것이 주님 앞에는 즐거움과 기쁨이 충만한 줄로 확신합니다. 이거는 뭡니까? 그게 없어요. 이거는 저기 뭡니까? 에누리도 없어요. 이거는 디스카운트도 안 돼요.

모든 온 모든 머리부터 발끝까지 있어요.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이 들어가는 곳마다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걸 깨닫고 난 다음에 빌립보서 4장에 보면요.

*빌립보서 4:1,
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바울은 그리스도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나의 기쁨이며,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 이라는 이 표현을 함으로 말미암아 구체적으로 문법 적으로는요. 기쁨과 면류관은 카이라고 엔드로 연결되는 동격이에요. 그러니까 바울은 사랑하는 빌립보 교인들을 기쁨이라고 부르고 있는 거에요. 여러분, 빌립보 교우들은 어떻게 형성되었습니까? 빌립보 교회가? 빌립보 감옥의 간수, 루디아 또 류오디아 선두계, 류오디아 선두계, 이런 그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이름이 다 우리 나와 있는데 사실은 다시 빌립보 4장 1절에 다시 보면,

*빌립보서 4:1,
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이름이 기쁨으로 바뀌는 거예요. 기쁨 간수, 기쁨은 류디아, 기쁨 선두계, 기쁨 류오디아, 그리고 그 그 기쁨과 면류관이 동격이 되는 것이에요. 깊이 들어가면 기쁨을 면류관처럼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실체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빌립보 교인들에게 바울은 그저 기쁨이 멋진 수사나 논리적인 이론이 아니요. 기쁨 자체로 기쁨 실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지난주는 여러분들이 이 한 해를 걸어갈 때에 지난주에는 여러분 놋과 철로 된 문빗장이 있었지만 매일매일 저녁에는 그것으로 보호받고 아침에는 강철 신발을 신고 나가라고 그랬잖아요.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는 그렇다면 신발은 강철 신발을 신고 나간다면, 오늘부터 여러분 머리에 모자와 머리는 머리는 뭐예요? 기쁨의 면류관, 기쁨의 모자를 쓰고 나가는 것이에요. 하늘을 날을 때 다 아침마다 기쁨의 모자를 쓰고, 또 신발 강철 신발을 신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주님이 신겨주시고 주님께서 씌워주신 그 기쁨을 가지고, 이 한해가 여러분들의 삶으로 연결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에요. 이게 저도 이걸 고민 좀 많이 했어요. 우리 교회 부모들이 어떻게 하면 매일 아침마다 머리에 기쁨에 관을 쓰고, 신발은 강철의 신발을 신고, 매일매일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제가 말하는 이 기쁨은 성령이 주시는 기쁨인 줄로 믿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기쁨은 오직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뭐예요? 희락이라. 기쁨은 이 성령이 역사에서 끊어질 수 없는 것이고, 그다음에 성령이 역사할 때, 성령의 열매 가운데 오직 성령의 열매는 첫 번째는 사랑이고, 두 번째는 뭐예요? 희락이라, 사랑과 희락 이 희락과 사랑과 기독교의 사랑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존속할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의 기쁨이 어떤 존재의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기쁨은 여기에 성경에 기록된 언어 정도가 아니고, 또 우리가 기대하는 정도가 아니라, 오늘 이걸 손으로 만지고 매일 매일 마다 쓰고 나갈 수 있는 실체가 될 수 있는 것이에요. 실체가 돼야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안에서 경험하는 기쁨은 자가 발전된 고양된 감정 정도가 아니에요. 그냥 뭔가 없던 상태 그 정도가 아니에요. 여러분과 저의 신앙의 근본을 세우는 실체가 되는 것이에요. 기쁨은 복음의 열매이고 성령의 열매이고 하나님의 본성에 뿌리를 두고 있는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 앞에 주님의 모두에서 우리에게 트랜스퍼 되는데, 주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동선자(同船者)구의 기쁨으로 주님을 다,,, 그리고 이 기쁨은 2024년도 한 해를 매일매일 살아가는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우리를 살게 하는 능력으로서의 실체인 줄 믿으셔야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성도가 누리는 기쁨은 어떤 느낌 정도가 아니에요? 현실에서 실제적으로 우리 자신을 회복시키고 살아가는 강력한 힘으로서의 실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거는 구약시대 때부터 우리를 너무나 잘 알지요.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은 너희의 뭐예요? 힘이라, The joy of the Lord! 하나님과 하나님을 통하여 얻는 이 기쁨이 우리의 삶에 가장 강력한 힘이 된다.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안토니 캄폴로’ 라는 크리스천 사회학자는 ‘하나님의 나라는 기쁨의 잔치다.’ 그분은 필라델피아 빈촌에 들어가고 정말 어려운 사람들 막 도우면서 고생하고 있잖아요. 빈자들을 섬기는 그런 분이에요. 그런데 만약에 그분이 인상 확 바뀌면서 왜 다른 사람들은 왜 다른 사람들은 교회가 말이지 뭐 화려하고 이러면서 왜 영원한 어려운 사람 안 섬기냐, 그런 것을 뭐라 삿대질하면서 자기가 그렇게 하는 사람이 아니고, 기쁨이 충만해 아주 자연스럽게, 그는 그게 내 역할이 있는 거고, 나는 내 역할이 있다 면서 기쁨으로 빈자들을 섬기는 거예요.

이해가 되십니까? 무슨 말인지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잔칫집이라는 것이 그 어려운 일을 하면서도 잔치 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면 제가 목사님 이 기쁨은 예수님 처음 믿을 때 기쁨만을 얘기합니까? NO! 예수 믿고 나서도 수많은 고통과 고난의 연속에 있어도 우리가 기뻐한 것이 이게 바울이 그렇게 고백하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12장 9절 너무 잘 하는 말씀 다 함께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2:9,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지금 어떤 순간입니까? 바울이 바울에게 이런 가시가 있어가지고,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하나님께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다. 그랬어요. 제발 다시 없애달라고요. 그런데 1장 9절은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지기 때문에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은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한 자랑이라. 약하고 힘들고 어렵고 문제된 것들도 오히려 기쁨을 앗아갈 수가 없고, 오히려 그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력과 박해와 어려움을 기뻐하며 그 기쁨이 나를 온전하게 하고, 강하게 하고 내 삶을 풍성하다는 것을 확신 있게 선포하는 것이에요. 약해도 약한 가운데서도 하나님 사랑하고 약한 가운데서도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하니까, 기쁨을 저는 확신하는 게 하나 있어요. 뭐냐면요. 하나님이 주시는 거는 나쁜 게 없어요. 다시요. 철저한 믿어요. 하나님이 주시는 건 나쁜 게 없어요.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비에게 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지만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들에게 살짝 믿을 거 하나님이 주신 거는 나쁜 게 없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주신 이가. 우리에게 모든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시니, 그러니까 제가 어려울수록 설렌다 그랬잖아요? 그러면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기쁨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하나님 삶의 원칙인 줄 믿으셔야 되기를 바랍니다. 만일 성도가 누리는 기쁨이 그저 고취된 감성이나, 수사적 표현이라면 여러분 어떻게 우리가 변화무쌍한 새해 환경에서 변치 않는 확고한 즐거움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냥 적당한 감정, 그렇다면 그게 어떻게 환경을 초월하여 삶을 회복시키고 움직이는 힘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이 기쁨이 그리스도의 적당한 감정이라면 그게 어떻게 한 해 내내 시련과 고통조차도 삶의 풍성한 자원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것이 적당한 감정이라면 이 땅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기초석을 우리가 기쁨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비 콕스라는 좀 자유주의 신학자고 이렇게 이분이 사신 신학이라고 그분 강의를 한번 들어봤는데요. 제가 그 과목을 듣다가 무릎을 친 내용이 있어요.

이 하바드에 있는 하비 콕스는 유명한 책이 있어요. 지금도 살아 계시고, 신학을 하는 거는 하비 콕스의 사진 신학을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근데 그분이 리서치를 한 거예요. 학자니까, 기독교 예배에서 그다음에 기독교 신앙에서, 기쁨의 축제성이 사라진 다음부터 하나님의 죽음의 신앙이 나왔다 그랬어요. 저는 너무 어려운 얘기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쉽게 말하면 기독교의 기쁨의 실체가 사라지고 난 다음부터 실제로는 교회 내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이 능력이 사라지고 난 다음부터 죽음의 신학, 하나님이 죽었던 사신 신학이라고 해요. 사랑하는 우리 영 가족 여러분들의 기쁨의 은혜 때문에 복음의 신앙이 다시 회복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 기쁨이 예수님이 갖고 계시는 것, 주님이 우리에게 세워주신 면류관이 우리의 삶에 2024년의 실체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이게 있어야 여러분들을 흔들 때 붙들어주고 넘어질 때 이렇게 세워주고, 고통으로 찢겨진 가슴을 떼워 줄 수 있도록 다른 길이 없어요. 남은 자 올해는 제가 실체적으로 우리 성도들과 함께 계속 제가 강조하고 싶은 건 그것이 뭐냐 하면 여러분들의 장래가 뭐냐 여러분 장래는 제가 대가는 아니지만 지금 앉아 있는 여러분들의 얼굴 표정이 여러분들의 장래이에요. 무표정이 장래가 뭐가 될 겁니다. 여러분들의 얼굴 표정은 설레이고 기쁨의 면류관을 쓰고 예수님 자체가 기쁨이기 때문에 내가 주님과 영적 교재와 주님의 은혜가 있을 때, 주님의 그 은혜가 내게도 최소 된다고 하고, 주님의 기쁨이 내게 들어와서 변소 별로 주님의 기쁨이 내게 들어왔을 때, 거기서 갖는 얼굴 표정, 그게 여러분들의 장래가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죽을 때가 우리의 삶에 피크가 될 수가 있는 것이에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는데 여러분과 저는 바울이 고백한 대로 주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 오늘 여기 여기 1 2 3층니까, 우리 모든 중직자들 다 여러분들 이름이 저는 오 기쁨이에요. 오 기쁨, 제 이름은 기쁨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요. 내 마음이 너무 가슴 찌릿찌릿하고 감사한 거에요. 이래도 안 되는 분들은 오늘 여기서 안 깨지면 희망이 없어요.

*시편 51:8,
8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꺾어진 뼈는 극심한 고통과 절망적 상태를 보여주는 거에요. 꺾어진 뼈는 고통의 소리를 말할 뿐이지 결코 즐거움의 노래를 부를 수가 없어요. 우리가 그 스스로 오실 때는 다윗이 범죄하고 난 다음에 책망 받고 눈물로 회개하는 시대 아닙니까? 가슴 찢어지는 회개기도 가운데 오죽하면 주의 성령을 내 곁에 거두지 말아달라고 그렇게 비탄을 열심을 하고 있는데 오늘 8절에 다윗은 주님 그래도 주께서 꺾으신 자들도 즐거워하게 하여 주십시오. 라고 합니다. 이게 없으면 살 수가 없어요. 살에 난 상처도 고통스럽지만 뼈가 꺾어졌다. 뼈가 뭉개질 정도로 부러질 때, 오는 고통은 극심한 겁니다. 이 고통으로 밤이나 낮이나 편할 수가 없습니다. 뼈 하나가 부러져도 고통스럽겠는데 오늘 주께서 꺾어진 뼈들도 복수 여러 개의 뼈들이 부러져 있는 상태입니다.

다윗이 더 이상 당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그런데 지금 다윗은 고통 중에 있습니다.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과 회복될 증거가 즐거워하게 바라고, 회개의 증거가 뭡니까? 즐거움이에요. 이 수준을 저와 여러분이 올라가야 돼요. 한국에 잘난 사람들 교회 향하여 선지자 들고 하는 사람들, 홰개 하라, 회개하라 하는데, 그러면서 그 얼굴에는 기쁨이 하나도 없어요. 여러분, 회개의 수준에서 회개에 진짜 올라가면 즐거운 일이에요. 진짜 회개하면, 즐거운 게 있는 거예요. 사랑하는 교회 모든 중직 자들과 모든 교육자들과 직원들, 오늘 나오신 모든 분들 여러분, 우리가 회개조차도 즐거움으로 승화돼야 되는 것이에요.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뭐 하게 해달라고요? 우리 가운데 죄로 인해서 세상에 걸친 돌풍으로 인해서, 뼈가 꺾어지는 고통 속 분들이 있다면, 항암 치료로 고통 가운데 계신 분들이 있다면, 그것이 즐거워하게 하여 주십시오. 인간관계에서, 재정에서, 하고 있는 일에서 얻어진 수많은 영혼들을 즐거움으로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기도를 다시 주목하십시오. 다윗은 꺾어진 뼈에 고통이 잦아들고 잠잠해져서 편안해지기를 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 꺾어진 뼈들이 무감각하게 되어가지고 고통을 덜 느끼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더 높은 수준, 주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여 주십시오. 기가 막힌 차원이에요. 아마 우리 생애에 회개가, 회개의 가장 강력한 표현은 즐거움이다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을 거예요. 저는 이 말씀을 듣고, 아, 회개와 성숙과 주님 앞에서의 자세를 제대로 한 사람은 즐거움이 넘친다. 여러분 상황을 제가 다 모릅니다만 심히 고통하고 있습니까? 그런 고통 가운데 어떤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까? 고통이 없기를 기도하십니까? 고통을 못 느끼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한 단계 더 올라가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연약함으로, 자신의 잘못으로 겪는 고통 중에서도 꺾으신 뼈도 즐거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합니다. 불을 지른 뼈들이 하나님을 기쁨으로 노래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기쁨이 있어야, 기쁨이 있는 복음이 되는 것이 이것이 진짜 복음이 될 수가 있는 것이에요. 찬송이라는 거는 꺾으신 뼈들이 즐거워하는 거예요. 여러분 다시오. 하나님이 주신 거 나쁜 거 있어요. 없어요. 아마 여러분 고통 가운데 있으면 하나님 주신 건 나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꺾으신 뼈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하고 기뻐하면 여러분 그 순간 그 환경이 여러분 인생의 베스트가 될 거예요.

골든타임이 될 거에요. 최고의 기쁨이에요. 우리도 우리 교회도 지난 시간을 보면요. 우리가 어려울 때가 최고 시간이에요. 나비처럼 그게 최고의 시간이라는 것이에요. 주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기쁨이 회복되며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지 심지어 다윗처럼 꺾어진 뼈들도 심히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는 은혜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새초부터 새말까지 우리는 한 번도 걸어가 보지 못한 설렘, 미담의 길을 걸을 때 예기치 않은 일들로 인생의 뼈들이 부러질 정도로 어려움을 겪을 수 있지만, 그럴 때마다 다시 한 번 이 강력한 복음에 선포를 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주여, 부러지는 은혜도 즐거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이때 복음의 능력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쁨이 없는 복음은 복은 아닙니다. 이 한해를 즐거워할 수 있도록 그 수준에 올라갈 수 있도록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입혀주시길 바라는 것입니다.

제가 주중에 우리 교회 집사님께 이 메일을 받았습니다. 목사님 2033-50 비전을 이루어 가려는데 전도도 해야 되고, 복음 선포도 해야 되고, 우리가 북한 사역, 북한 하루아침에도 그렇게 해가지고 앞으로 10년에 우리 민족의 50%가 구원받게 하여 주십시오. 그런데 진짜 끝까지 뼈들이 뭘까? 제 마음에 인적이 아들, 영적 고아들, 한국에 지금 고아들이 너무 많아요. 미혼모들 아이들도 그렇고, 꺾어진 뼈들이 많아요. 그리고 영적인 고아들, 저는 어릴 때 고아원 옆에 제가 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교호 앞에 그 고아원이 있어요. 우리 고아들 그 얼굴을 나는 늘 눈빛이 나도 들을 수가 없어요. 걔네들은 부모의 사랑을 못 받으니까, 그 사랑하는 눈빛이 그러니까 기쁨이 안 생기는 거예요. 기쁨이 없는 빛이 꺾어진 거에요. 그리고 영적인 고아들 젊은이들 가운데 아이들 가운데 심한 것이 아동학대도 있고 이런 거 있지만 OECD 가입국 가운데서 우리 청소년 가운데 자살률 1위, 고독사도 1위에요. 코로나로 사망한 사람보다도 자살로 사망한 사람이 더 많아요. 그래서 고아를 긍휼히 여기시고 꺾으실 때도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이 육적인 고아, 영적인 고아, 여기 자녀분들이 없는 분들은 혹시 은혜가 젊은 분들 가운데 입양할 수 있으면 입양하면 너무 좋겠어요. 그럴 때 그 인간적으로 생기는 입양해 가지고 생기는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 안에 주시는 이 영광스러운 복음의 기쁨이 충분하게 될 거예요.

미국에 이에나 버거가 있습니다. 1948년도에 캘리포니아 첫 번째 헴버거 가게를 열었습니다. 제가 미국 가면 꼭 그 가게를 들립니다. 드라이브 쓰루(Drive Thru)로, 몇 사람이 따라올 것을 거의 드라이브 쓰루로 이렇게 받는데 그 주인이 신실한 크리스천입니다. 이네라 버거의 기업 정신이 뭐냐면요. 이네라 버거를 사서 가게 문을 열고 나갈 때는 행복하고 기뻐해야 한다. 이에나 버거 이걸 통해서 사람들이 행복하고 기뻐한다. 엄청나게 줄을 섭니다. 그는 식사를 점심시간 때면요. 줄을 서거 자동차가 십 대가 줄 서 있어요. 거기서 감자튀김을 주문하는 싱싱한 감자를 그 자리에서 잘라갖고 튀겨주고 엄청나게 맛있습니다. 근데요 내가 기가 차요. 사이 모르는 사람 모르는 거예요. 그 프렌차이점, 감자튀김 박스 밑에다가 뭘 써놨는지 압니까? 잠언 24장 16절입니다. 시작

*잠언24:16,
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햄버거 프로파일 밑에다가 그리고 햄버거 봉지 안에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써놨어요.
*요한복음 3:16,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한국에서 안 써놓고 팔면 그거 사기예요. 이 햄버거 하나를 팔아도 이거 하나 갖고 기쁨이 있기를 바란다고 해요. 그러면 우리는 복음을 바꿔야 돼요. 우리 사랑의 교회 많은 제자들을 가지고 수많은 영적인 훈련들이 이런 말씀을 가지고 다른 영혼을 섬길 수 있도록 준비가 돼 있는데 여러분 때문에 다른 영혼의 기쁨이 없다면 이건 사기예요.

여러분들 은혜 오늘 우리 한국교회 우리 교회 성도들 주위에 수많은 기쁨의 능력이 충만해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7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게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다시 기쁨이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꺾어진 뼈들도 즐거워하는 이 복음을 가지고 신발은 뭘 신고요? 모자는 뭘 쓰고요? 기쁨의 면류관, 뚜벅뚜벅 걸어가면 2천 24번의 감사가 되는 것이에요. 그 어떤 해보다도 영광스럽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의 은혜를 주시를 믿습니다. 할렐루야!

♬매일 내 마음에 기쁨이 넘치네. 더욱 섬길수록 더 구한 주님!!!!!~~~~
다음에 제가 오늘 오전은 찬양을 안 했어요. 다음 주에 하겠습니다.

♣요약
주님의 영이 임하여서 하루 여섯 번이상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로 예배드리고, 불붙는 가슴으로 영적 청년의 기백을 유지하는 인생으로 살아가야 한다. 날마다 머리에는 성령님께서 주시는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의 면류관을 쓰고, 발에는 강철신발을 신고 걸어갈 때, 나의 꺾어진 뼈들도 즐겁도록 기쁨과 감사로 만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육신의 고아, 영적인 고아들을 기쁨으로 섬길 때, 하나님의 모든 좋은 것을 내려받는 은혜의 한 해가 되기를 간구하자.
-우리는 주님과의 교재를 더한 기쁨이 우리에게 전수되고, 기쁨이 우리에게 와 닿으면 꺾어진 뼈 같은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꺾어진 뼈들도 기뻐하게 하시는 복음의 능력을 통하여 날마다 승리하는 2024년 되어, 이 땅에 육신의 고아도, 영적인 고아도, 경제적인 아픔이나 질병의 고통을 끌고 있는 인생들도 주님께서 주신 기쁨으로, 복음으로 다시 살아나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나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믿고,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이 우리에게 충만히 주실 줄로 확신하며, 기쁨의 원천이신 주님과 진심으로 우리는 교제하면서 주님의 가장 귀한 모든 것을 풍성히 받아들이는 자로 기쁨의 복음을 가지고 헌신하는 올해를 만들어가야 한다.













※  위 영상은 2부예배입니다. 1부 예배와 약간의 내용이 다를 수 있습니다.  설교 내용 맥락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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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3년 12월 31일)
제목: "사는 날 동안 능력이 있으리로다"
말씀: 신명기 33:24~25
대표기도: 남동우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ㅡㅡㅡㅡㅡ

*신명기 33:24~25,
24 아셀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아셀은 아들들 중에 더 복을 받으며 그의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의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25 네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가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너무 애를 많이 쓰시고 헌신하셨습니다. 찬양대 하나님께 쓰임 받은 거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지난 한 해 진짜 빨리 지나갔습니다. 맞습니까? 속히 지나갔습니다. 오늘로써 우리 묵은해를 보내고 내일 이제 새로운 새해를 앞에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마음속에 유대인들은 한 해를 마무리할 때 반드시 죄를 처리하고 새해를 맞이한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 삶의 은서의 강물에다가 우리가 지었던 수많은 잘못들, 죄악들 허물들 실수들 후회들, 아픔과 힘을 다 던져버리십시다. 나는 한 해의 마지막 시간에 또 새해를 맞이하는 시간에 우리가 갖는 소명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보니까 빈 그물이었어요. 빈 배, 빈 그물이었어요. 1년 동안 수고를 했지만 지금 여러분들 생각에 ‘나는 이게 나는 빈 그물만 갖고 있네.’ ‘내 인생 내 삶은 왜 이렇게 분명인가?’ 이렇게 좀 뭐라고 그럴까요? 열매가 없다고 안타깝게 생각하는 게 있을지 모르겠고, 또 어떤 분은 믿음 부분을 통하여 놀라운 축복을 받아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나 이제 어떻게 주님 앞에 더 헌신하면 좋겠나? 이런 상황까지 올라오는 게 있을 것입니다. 두 종류입니다. 임금을 임재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고, 또 한 분은 너무 감사해서 주님 앞에다 이렇게 ‘내가 주님이 내 인생을 참으로 가치 있게 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헌신의 차원까지 올라온 게 있을 거예요.

근데 빈 그물이든지 아니면 믿음 보고의 차원이든지 헌신의 차원이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삶의 광야 길을 걸어갑니다. 그럴 때마다 저와 여러분은 내 힘과 내 능력으로만 사는 사람이 아니고,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달라요. 우리는 영적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본능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심을 느끼고 있는 것인데,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우리 자신을 능가하는 우리 인생을 능가하는 어떤 초월적 존재감, 초월적 실체가 내 삶을 인도하고 있다는 이 사실, 이걸 제대로 깨달을 때 아무리 어려워도 내 삶에 나도 모르는 가슴에 떨리는 뭔가가 있는 것이에요. 맞습니까? 그래서 인생은 초월적 실체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을 바라볼 때 완전히 달라요. 그러니까 무슨 말인가 하면 여러분이나 저는 초월적 실체에 의하여 인도되는 존재로 보느냐, 아니면 내 인생을 내 스스로 내 힘으로만 살아가는 존재로 보느냐, 거기에 따라서 확연히 달라지는 것이다.

저는 철저하게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삶을 초월적 존재 주신 하나님의 인생을 끌고 간다. 맞습니까? 우리는 내 인과 내 실력만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님을 고백하는 것이에요. 무신론자들이라든지, 또 이런 사람들은 인생을 진화된 존재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신론자들 진화된 존재로, 진화된 존재로 인생을 보면 모든 인생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존재로 볼 수밖에 없어요. 인생은 다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나 인생을 창조된 존재 피조물의 관점에서 볼 때는 인생은 초월적 실체에 의하여 인도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는 것이에요. 처음부터 제가 좀 너무 거대담론(巨大談論) 같은 걸 말씀해서 죄송한 마음이 있지만 어제도 제가 아침에 말씀드렸잖아요. 사람은 환경에 의해서 영향도 받고 자기가 노력하는 거에 의해서 나름대로 인생의 방향을 잡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우리의 삶에 인생의 모든 육신을 능가하는 초월적 하나님의 영성을 이끌고 계신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 적으로 볼 때, 내 힘으로 자기의 힘만으로 살면 기초적으로 사는 것 같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그런 삶이 좀 약간 피동적인 삶 같은 세상 사람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시는 삶의 가장 가치 있는 삶이고, 하나님이 나를 지으신 목적에 걸 맞는 삶을 우리는 믿습니다. 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신명기 33장, 이 말씀을 썼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광야로 이끌어낸 그런 역할을 했죠? 모세는 출애굽기 오늘 본문을 썼던 신명기 썼더니 모세는 출애굽기 3장에서 호렙 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장면이 나옵니다. 애굽에서 왕자로 있으면서 동족을 구하려다가 애굽 사람을 죽이고 위대한 광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제사장, 미디안 제사장 딸을 만나고 양을 치는 목자로 살다가 어느 날 호렙 산이 왔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만났고,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내라는 사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거는 모세의 자기 생각이나, 이거는 모세의 마음에 본래 없던 인생의 시나리오였어요. 자기가 상상도 하지 못한 거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하니 모세가 왕자로서 애굽의 모든 것을 누리고 있을 그때에도, 위대한 광야에서 양치는 목자로서 손에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때에도, 초월적 존재이신 하나님의 인도에 의하여 그 인생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지하든 인지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다 부족합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 우리의 모든 것을 초월하신 하나님, 우리 인생에 주시는 그 하나님이 나를 이끌고 있다는 그 사실을 철저히 깨닫는 순간, 여러분과 저의 가슴이 뛸 수밖에 없어요. 이 시간 우리의 심장이 그 순간 하나님과 연결되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의 심장을 터치하는 순간이고, 이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하나님과 내가 연결 되어 있음을 느낄 때, 우리의 환희에 차고 우리의 오감은 전율하는 것이에요. 하나님과 연결되는 순간, 하나님과 연결되는 순간 우리의 영혼의 스파크가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참 가슴이 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새벽에,,,,

*시편37:23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 He touch me, ‘;험한 세상 내 마음을 원하지만 그러나 사랑스러운 주님의 손길이 내 인생을 항상 터치하신 날이에요. 오! 주님 나의 주님, 그럴 때 내 마음에 기쁨이 넘치네. 내 마음에 전율이 넘치네. 내 마음에 감사가 넘치네. 그다음에 나의 기쁨, 나의 생명 주 손길을 나를 구원했네.’ 너무나 놀라워요. ♪ 나의 기쁨 나의 생명, 주 손길을 날 영어 가사는 히 터치 미, 오! He touch me, 그다음에 and oh the joys that floods my soul. 내 영혼의 홍수가 일어나요. 기쁨의 홍수가 일어나요. 그다음 가사 Something happened... 초월적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그 사실 앞에 내 인생은 Something happened 이에요. 무언가가 일어나는 것이에요.Something happened, 반응도 안 하시고... 그러 영어하는 사람들은 Something happened이 어마어마한 거예요. Something happened. 제가 이래도 어떤 것들은 나는 초월적 하나님과 관계없다. 나는 그걸 잘 이해가 안 된다. CS. 루이스라는 말로 이런 얘기를 합니다.

“우리는 ‘갈증을 느낀다’는 것은 우리가 물을 마시기 원하는 존재로 창조 되었다.는 증거다.”
-C.S. 루이스-
-우리 삶에 우리 육신의 갈증이 있죠? 우리는 물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로 지어진 거예요. 맞습니까? 마찬가지예요. 우리 마음 한 구석에 세상 어떤 것으로도 채우지 않는 인생은 뻥 뚫린 구멍이 있어요. 모든 걸 다 이뤄보세요. 모든 위치에 올라가고 모든 걸 다 가져보세요. 거기에도 허무하고 뻥 뚫린 구멍이 있는 거예요. 그건 뭐냐? 우리 인생 자체가 초자연적인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갈망하도록 지어졌다는 사실이에요. 이런 것들은 무신론자들, 진화론자들은 결코 설명 못합니다. 그건 그들의 영원한 숙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같이 한 해의 마지막 날, 성경은 전도서 3장 11절,

*전도서 3:11,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모든 인생에 분명하게 초월적 존재를 찾고, 초월적 존재에 의해서만 우리의 갈망이 해결될 수 있도록 우리의 허무함과 갈망이 해결될 수 있도록, 이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돼요? 말아야 돼요? 근데 우리 주위에 진화론자들 또 다른 진화론자들, 무신론자들, 또 우리 주위의 좌파적 문화 엘리트들, 기독교 하부를 조롱하는 친구들, 그러나 겉으로 그들이 자신만만해 보이지만 삶의 카튼 뒤에서는 오늘 같은 날은 자기 한 몸조차 어쩌지를 못하는 인간의 무력함에 당혹해 할 것이에요. 조금 제가 어려운 말 썼는데 세상에 잘 나가는 사람들 문화에서 엘리트들, 기독교 한 분은 서로 편안한 친구들 오늘 같은 날 아주 그냥 자기는 어쩔 수 없는 고민 때문에 술 마시고 마약하니 그 인간의 무력함에 당황해하고 당혹해하는 것이에요. 따라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 우리는 내 인생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 내 인생을 이끌어간다는 것을 고백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줄로 믿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 이걸 깨닫는 은혜가 있는 사람에게 오늘 주님이 두 가지를 주시는 거예요. 오늘 이 두 가지를 여러분들의 마음속을 가지고 갈 때, 오늘 이 송구영신(送舊迎新)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신명기 33장 오늘 본문은 모세가 죽기 전에 아셀 지파에게 예언한 내용이 아셀 지파는 이스라엘이지만 하이파 지역에 해당하는 해안가로부터 또 남부 레바론 산악 지역까지는 땅을 분배 받았어요. 본래 이 아셀은 야곱의 첫째 부인이었던 레아의 시종 시녀였던 실바의 소생입니다. 환경적으로는 어떻게 보면 흑 수저 같아 하인의 몸에서 그것도 둘째로 태어났고, 자기 아버지 이름, 자기 아버지 이름도 안 지어주고 자기 시녀로 해서 자기 어머니가 시녀인데, 시녀의 어머니 레아가 그냥 이름을 지어줬어요. 그런데 그가 오늘 뒤에 글 나지만 행복 자, 24절에 다시 한 번 시작,

*신명기 33:24,
24 아셀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아셀은 아들들 중에 더 복을 받으며 그의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의 발이 기름에 잠길 지로다.
-그의 기름에 잠긴다는 것은 축복을 받았다고 물질적인 축복도 받았다고 하는 것이며 그리고 더 좋은 것은 물질적 축복이 더 중요한 것은 그의 형제에게 뭐가 돼요? 기쁨, 그 앞에 그의 형제들과 아들 중에서 뭐예요? 그 더 복을 받아야 되는 받았다는 것이에요. 평생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산다. 그래서 누가복음에 지난주에 구세주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만난, 아기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난 그 안나 여선지자가 아셀 지파였어요. 기쁨의 역할을 했어요. 그리고 아셀 지파에게 분배된 땅은 기름진 땅도 있었지만, 산악지대, 그 험한 지역에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아셀 지파는 이방 민족과의 경계선에 있었어요. 북쪽에...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은 단순히 아셀 지파 정도가 아니라, 약속의 땅을 앞에 둔 새로운 세대, 모세가 이제 40년을 다 그의 생애를 마무리하면서 모세의 지도력 40년을 마무리하면서, 그가 이제 주님 앞에 부름 받기 전에 여기 최후의 모세 34장 그의 제자가 뒤에 덧붙인 거예요. 34장, 33장 5절이 마무리예요. 마무리 야곱이 열 두 아들을 축복하듯이 모세는 12지파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대를 향하여 오늘 이 말씀은 삶의 경계선상에 있는 분들 오늘 이스라엘을 넘어 지금 우리에게 지금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으면 큰 축복이 될 것입니다. 단순히 아셀 지파 정도가 아니라 뭐라고 말씀하는가, 그 험한 지역 그 광야 그 산악 지역을 점령해야 할 아셀 지파에게 뭐라고 말씀 25절에, 너의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다.

*신명기 33:25,
25 네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가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철과 놋으로 만든 문빗장으로 보호막을 쳐주신다. 이걸 다른 King James 장에서는 너무나 우리에게 더 실감 가는 구절인데 영어로, (Thy shoes shall be iron and brass). 다이 슈즈 셀 비 아이언 앤 브레스..라고 그랬어요. -너의 신발이 강철 신발이 될 것이야. 철과 놋으로 우리의 문빗장을 주시고 너의 발이 강철 신발을 신을 것이다. 하나님 우리를 보호하는 문빗장이 되고 또 하나는 여기에 이제 히브리어로 뜻으로 주어지는 것이 좀 있기 때문에 문빗장과 강철 신발 같이 생각해도 될 것 같아. 철과 놋으로 만든 문빗장 보호막을 쳐주시고, 강철과 놋으로 만든 신발을 통하여 우리를 걸어가고, 인도하도록 만들어 주신다는 것이에요. 아셀 지파가 유다 지파나 무슨 레이지파 같은 대단한 지파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부여된 산악지대나 바위를 걸어가기 위해서는 강철 신발이 필요한데, 그걸 주신다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오늘 저는 이게 송년 예배이자, 내일 1월 1일이기 때문에 오늘 이 예배는 송년예배이자 새해를 맞이하는 오늘 밤 오늘 12시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없는 대신에 오늘 이 말씀을 한꺼번에 드리는 거니까, 내일 아침에 1월 1일날 여러분들이 가정 예배를 드릴 때도 이 말씀을 같이 사용하면 좋겠다 싶어서 제가 한꺼번에 드리는 거니까.

하나님 아버지, 사랑의 교회 모든 성도들, 올해 내년 한 해 하나님께서 모든 일마다 강철 목과 그다음에 철로 된 문빗장 보호를 허락하여 주시옵시고, 그다음에 한 해 내 일을 걸어갈 때마다 강철 신발을 신고 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는 이거 이게 너무 제 마음에 와 닿는 거예요. 아마 여러분들도 평생에 이런 설교를 들어보지 못했을 거예요. 저도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 마음이 뛰었어요. 초월적 하나님이 내 인생에게 문빗장을 주실 뿐만 아니라 강철 신발을 신고 건너가게 하시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무장이 필요합니다. 하늘을 앞에 놓고 우리 앞에 삶의 순례와 광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떤지는 다 알 수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걸어가는 길의 모든 것이 비단길이고, 카페트 깔린 비단길이라면 모든 길이 비옥한 평야만 있다면, 철과 놋에, 눈빗상과 강철과 놋의 신발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요즘같이 눈길을 걸을 때, 어제도 보니까 할머니 할아버지가 어그정 어그정 걷더라고요. 눈길을 걷을 때 그 튼튼한 신발이 필요한 아이젠이 필요하잖아요. 특별히 연약한 분일수록 다리에 힘이 없는 분일수록 최고의 신발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내년 한 해 동안 사랑의 교회 성도들이 받아야 할 보호막 문빗장과 내년 한 해 동안 우리가 걸어가야 할 우리 이 모든 과정들을 앞에 ㄴㄴㄴ놓고, 우리에게 강철 신발이 뭘까요? 그 강철 신발이 바로 오늘 25절 뒷부분에 있는 이 내용이 우리의 삶의 최고의 강철 신발과 문빗장이 될 것입니다. 다 함께 25절 시작

*신명기 33:25,
25 네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가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내년 한 해 동안 노력해 주신 약속의 말씀 같은 것이에요. 우리 교회 전체적으로 또 다른 게 있을 수 있지만, 여러분 개인적으로는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사는 날 동안 능력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여기에 사는 나를 따라서란 말씀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매일매일 힘을 주신다. 내일과 이에 그대로 믿으세요.

I. 사는 날 동안 능력을 주실 것이다.
-매일매일 하나님이 힘을 주신다. 살아가는 날, 매일매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을 주실 것이다. 우리가 살다 보면 힘든 일을 겪는 날이 올 수도 있어요. 힘든 일을 겪는 날, 그날도 힘을 주실 것이다. 어떨 때는 건강을 잃을 수도 있어요. 그때도 힘을 주실 것이다. 의심스럽고 혼란스러운 날도 있을 수 있어요. 그때도 힘을 주실 것이다. 여러분 이거 진짜 어려울 때, 삶의 광야 가운데서 주님이 내 인생의 철과 옷에 문빗장이 되게 해 주실 것이다. 매일매일 삶의 걸음에 험악한 산악 지역이라 할지라도 강철 신발을 신고 건너가게 하실 것이다. 오늘 이 말씀이 20대, 30대, 40대, 20대 30대는 좀 시간 덜 갈지 몰라요. 그러나 60대 70대가 훨씬 더 진지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젊은이들 가운데 육신의 물리적인 힘이 약해지지 않을 때는 사는 날 동안이라는 게 실감이 덜할 것이에요. 그러나 40이 넘고 50을 넘고 60이 넘고 이렇게 되면 물리적인 몸의 신호가 옵니다. 몸속에 에너지가 많이 남아 있지 않고 체력이 달리고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이 말이 뭔지 좀 더 실감이 갈 거예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이 말씀을 제대로 기억하는 동안 여러분 이런 믿음의 역량을 갖고 있는 동안 그 사람은 부패하거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능력을 받게 되는 겁니다. 오죽하면 내가 지난주에 그랬잖아요. 우리의 삶에 우리의 삶에 죽음이 최고의 전초가 피크가 되게 해달라고요.. 저는 1982년 3월 1일 장가간 날입니다. 거의 42년이 됐는데 그때 제게 주의하신 목사님이 잠언 4장 18절 말씀을 주셨어요.

*잠언 4:18,
18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
-그 당시에 배교파는 의인의 길은 점점 번뇌할 것 같아서 원만한 광명의 이르러니와. 요즘은 의인의 길은 도면의 뜻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에 광명에 이른다. 그러니까 의인의 길은 가면 갈수록 돋는 햇살과 같아서, 그러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결혼 이후의 여정에 하나님이 놋과 철에 문빗장을 주시고 매일의 삶의 여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강철 신발을 주셨다는 그 말이에요. 목사님 결혼식 할 때 설교를 어떻게 다 기억하십니까? 성경 말씀이니까, 기억을 하는 거예요. 그냥 좋은 말 말고 적당한 말대로 다 지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여러분 제가 가만히 제가 가만히 기억하니까 사는 날 동안 능력을 주실 것이다. 이게 저에게는 우리 볼 때마다 제게는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약속의 말씀이었어요. 네가 사는 동안 능력이 있을 것이다 이런 거룩한 담대함을 여러분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는 날 또한 능력을 주실 것이다. 라는 것이 하나님이 힘주시지 않는 날은 단 하루도 없다고, 나중에 고백하게 될 것이에요. 그리고 사는 날 동안 능력을 주실 것이다. 이 말씀에 하나 더 추가하면 사는 날 동안 능력을 주실 것이다. 매일매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을 것이다 되겠습니까? 두 번째로는 뭐냐? 사는 날 동안 능력을 주신다는 것은 주님은 우리보다 앞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앞서 인도하는 새해가 되는 것, 앞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하잖아요. 여러분들 모두에게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는 지금 당장 닥친 문제 때문에 머리를 싸매고 힘들어하고 아주 당장 닥친 문제를 해결하려고 막 싸우고 있습니다. 근데 하나님은 앞서 인도 하신다는 말은 우리는 지금 당장 당면한 문제 때문에 막 이렇게 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내일 직면할 해결책을 갖고 계세요. 하나님은 우리보다 먼저 앞서가서 미리미리 준비하고 계세요. 그 이런 용어를 정리해 봤어. 우리가 일, 우리가 월요일을 피투성이로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은 목요일에 회복된 날을 이미 예배하고 계신 것이에요. 따가운 하늘을, 월요일을 피투성이로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은 목요일에 회복된 날을 이미 예배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움을 겪을 것을 미리 아시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먼저 일하고 계신다. 그래서 다음 주에 다가올 일을 너무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세요. 내년도도 주님께 맡기세요. 거기 주님이 계시는 거죠. 주님은 우리와 동행도 하시지만, 우리보다 먼저 가셔서 미리 우리의 길을 예비하시고, 구체적인 걸 준비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이게 사는 날 동안에 너희에게 능력이 있으리로다.

하나님은 내년 2월, 내년 4월에 있을 일을 미리 준비하고 계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저는 내년 10월 21일 내년에는 제3기 한국교회 섬김의 날이에요. 내년에도 수많은 사역이 있어요. 근데 하나님이 그때 거기 가서 미리 준비하고 계실 것처럼 확신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런 하나님 안에서 이런 주신 사명을 가지고 이렇게 살았을 때 거의 주님께서 제 기대를 얻어가게 하신 건 없어요. 사는 날 동안 너는 너에게 능력이 있으리로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이런 기대를 갖고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미래를 향해서 너무 고민하지 말고, 나 혼자 진화론자든, 무신론자도 잘 나 혼자 고군분투하고 나 혼자 그걸 하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시도록 그렇게 은혜를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미리미리 근심하지 말고 매일매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대로 살고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에 항상 기뻐하라, 항상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자빠져도 십자가 앞에 자빠져라. 요거 하나 하나만 더 우리가 설명한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우리에게는 이 세상 사람들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거룩한 성령이 있어요.

II.그 결과,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거룩한 설렘
-그 결과 세상 사람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뭐가 있다고요? 거룩한 설렘이 있어요. 거룩한 DNA가 우리 설렘의 DNA가 우리에에 있어요. 여러분은 모세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아셀을 선포한 모세를 생각해 봅시다. 모세의 상황과 우리의 상황을 연결해 보십시다. 모세는 앞에 홍해가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왼쪽은 거친 산악과 낭 떨어진 산에 있었습니다. 오른쪽에는 황량한 군대가 있고, 뒤에는 지금 애굽 군대가 죽이겠다고 쫓아온다고 하면 여러분 어떻게 할 겁니까? 몇 분들은 이게 뭔가 다시 풍력 다 갖고 있고 왼쪽은 거친 산악과 낭 떨어진 산이 있고, 오른쪽에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광경을 펼쳐져 있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죽이겠다고 쫓아오는 것입니다. 사면초가(四面楚歌)에요. 아시는 것처럼 산악지대를 맞이하여 이방인과의 경계선상에 이럴 때, 하나님이 앞서 인도하신 나를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냐? 우리는 지금 모세가 어떻게 걸쳐왔는지 우리는 전지적 시점을 갖고 있어요. 성경을 가지고 다 알고 있으니까 우리의 생명에 관해서도 결과론적으로 우리가 스스로 전지적 시점을 갖고 있어야 돼요. 전지적 시점이라는 말 알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멀리 오면 어떻게 될 것인지, 알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그래서 우리는 그런 사면초가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어떻게 인도하시고 어떻게 붙잡으셨는지를 우리가 알기 때문에 또 그들이 홍해를 건너고 찬양을 하고, 그걸 알고 그 기적과 해답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어려운 순간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기에 딱 알 맞는 시간이에요. 이런 뜻이 저 같은 경우는 60년 넘게 살고, 살아오면서,

저는 어릴 때 초등학교 1학년 때요. 우리 부친하고 나하고 둘만 있었어요. 우리 부친은 그 당시에 저 29살밖에 안 됐어요. 저하고 21살 차이기 때문에 우리 모처는 시골에 있어 갖고 제가 학교를 1년 먼저 제가 부산시 경북 의성이라는 곳에 시골에 가서 시골에서 부산에 가서 1년 동안 29살 되는 남자분이 교회를 개척해갖고 교회를 시작하는데, 어떻게 나를 케어 하겠어요? 이해가 안 가십니까?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들어가고요. 한 몇 달 동안 학교를 못 갔어요. 아파고 영양실조 그다음에 한 달 그래서 제가 몇 달 동안 걷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저도 안 믿는 사람이 있겠지만,,, 누가 업고 침을 맞게 하고 하여튼 그런 일이 있어 갖고 그런 어려움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내가 이럴 때 성경을 읽으니까 나도 모르게 야 내가 왜 이렇게 인생이 고란이 많나, 이런 생각을 그 이후에 60년 이후를 살아오면서 피투성이도 되어보고, 수많은 눈물도 흘려보고, 어떨 때는 며칠 동안 이불을 뒤집어쓰고 나오기도 못했고, 피눈물도 있었지만 근데 이상하게도 그럴 때마다 제 마음 깊은 곳에는요, 희한한 설렘 같은 것이 있었어요.

오늘 말씀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다음 달 앞으로 미리 가셔가지고 앞서 인도 하시고, 사는 날 동안 능력을 주실 것이라는 말씀이 내 나름대로 체화가 돼서 그런지 고통도 아픔도 피눈물도 그 가운데서도 희한한 설렘이 있었어요. 어쩌면 초월적 하나님께 대한 근본 믿음을 주신 것이에요. 그 설렘은 아마 이런 걸 겁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험준한 산악 밖에 보이지 않는 황량한 광야 같은 상황에서, 그 순간은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아,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인도하실 것인가 그 기대감에서 오는 설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설레임이 될 것입니다. 저만이 아니라 우리 교회 많은 성도들이 그럴 것이고, 또 지난 2천년 교회 역사의 사면초가와 같은 홍해를 경험해 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 많이 사람이 그랬을 거예요. 그래서 오늘 송구영신 예배 오늘 마치고, 여러분 예배 마치고 나가시면서 딱 이사야 45장 2절,

*이사야 45:2,
2 내가 너보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하게 하며 놋 문을 쳐서 부수며 쇠 빗장을 꺾고.
-내가 너보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겠다. 평범한 얘기지만 하나님이 한쪽 문을 닫으시면 한쪽 문을 반드시 열 것이다. 거기에 대한 설레임, 이것은 진화론자들, 무신론자들, 자기 실력만으로 사는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희한한 설렘이 되는 것이에요. 우리 모두에게는 고난 가운데서도 이런 설렘의 뒤내를 주신 주님을 찬양합시다. 이렇게 말하니까, 모세가 강령을 선포한 것이에요. 하나님 백성들에게 오고 온 수많은 백성들에게 오늘 29절 본문 뒤에 29절,

*신명기 33:29,
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오늘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다. 오늘 1부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들 한 분 한 분 이름을 다 불러가면서 여러분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로다. 행복한 사람 막 가슴이 떨리는 거 떨기나무 앞에서의 초월적 떨림이 너는 행복한 자로다. 라는 최고의 선포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에요. 모세는 마지막까지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설렘에 관한한 그는 비온 후의 새싹이었고, 점점 도는 햇볕이었고, 마르지 않는 샘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 이런 동일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나중에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했겠습니까? 모세 인생의 최고의 사건이 뭡니까? 애굽의 왕자 되는 것도 아니었고,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는 것도 아니었고, 이스라엘의 존경받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일마다 때마다 나 같은 사람이 홍해의 고난과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나 같은 인생을 앞서서 인도해 주셨다는 그 사실 앞에 가슴이 맥박치고, 입술에는 찬양이 끊이지 않았고, 마음이 설레였다는 것이에요.

오늘 이 자리에는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힘든 분들 있습니다. 또 세상적으로 대단한 성취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설레게 하는 게 뭡니까? 오늘 아셀에게 말한 그 얘기는 모세 자신을 얘기에요. 하나님께서 120년 동안 모세의 삶의 험악한 산악과 같은 광야 여정의 멋과 철의 문빗장으로 보호해 주시고, 일마다 때마다 강철 신발을 챙기셔서 걸어가게 하시고, 이게 너무너무 신기하니까, 아마 필설로 혁명할 수 없는 이 인문학적, 어떤 시적 표현이 이상 할 수 없는 오늘 26절에 뭐라고 돼 있느냐면,

*신명기 33:26,
26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이가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오늘 하나님은 이 사랑의 성도들 한 분 한 분을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고 궁창에서 위험을 나타내시는도다.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예배는 하나님이 영광의 수레를 타고 오시는 은혜 아닙니까? 유일한 표현을 어떻게 하느냐면, 하늘을 타고 궁창에서 위험을 나타내시는 도다. 그리고 27절에

*신명기 33:27,
27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 도다.
-모세는 홍해 이후에 수많은 위기를 겪었습니다. 반역과 배신을 경험했습니다. 그래도 살려왔습니다. 그를 계속 만나주시고 반석에 샘을 터지게 합니다. 심지어 설렘의 파워가 얼마나 큰지, 모세를 반역하던 고라 자손은 하루아침에 땅위에 입을 벌려 삼켜버렸어요. 이 설렘과 기대의 파장이 얼마나 큰지, 여러분들을 어렵게 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고하게 하고, 고통을 받게 하는 그 사람들이 언젠가 우리 이 설렘과 감격과 하늘, 하늘의 영광 오늘 말씀한 것처럼 바로 하늘이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 그 위엄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렵게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파장을 일으켜버리시는 거에요.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기쁨이 있게 하시고 설렘의 파워를 갖게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고라 자손들을 날리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입을 닫아주시고, 심지어 신약시대에는 바다가 갈라지지 않으면 바다 위를 걷게 하시는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누구나 삶의 어려움을 겪습니다. 노아 같은 놈도 홍수위기를 만났고, 요셉 같은 사람도 감옥의 위기를 만났고, 다니엘 세 친구 같이 신실한 사람도 풀무불의 위기를 만났고, 초대교회 교인들은 예수 믿는다고 화영대의 이슬과 사자의 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거룩한 인내와 설렘이 있는 동안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요. 세상 사람들은 위기가 절망의 시간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소망과 설렘의 시간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오늘 이런 가족 여러분 여러분들은 행복한 사람으로 다 너는 행복한 자로다. 2024년도 매 해 내일부터 하나님 사랑하는 교회 모든 성도들과 우리 믿음의 4세들에게 은혜의 은혜를 주시옵소서. 문빗장을 허락하여 주시옵시고, 하나님이 예배하시는 강철 신발을 신고 건너가게 하여 주옵소서. 여러분이 비록 한 해 동안 빈 대와 빈 그물을 가져왔다고 한탄하고 있다 할지라도, 오늘 이 말씀 믿고 가면 하나님이 일하실 것입니다. 내일 미리 하고 다음 주에 미리 일하실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 마지막 한 번 제가 묻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초월적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강철 선발과 문빗장 때문에 여러분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다시 한 번 오늘 이 마지막 시간 여러분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모든 짐들을 벗겨주시기를 바랍니다. 매일 매일 삶의 현장에 거룩한 설렘의 비밀을 가지고 살아가는 축복을 허락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매일매일 사는 날 동안 너에게 뭐가 있으리로다. 사는 날 동안 문빗장을 주신 것, 사는 날 동안 강철 신발신고 살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삶의 경계선상에 있는 분들, 산악지대를 맞이하는 분들에게도 동일한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주님, 인생이 내 힘만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무시된 것들을 다 용서하여 주시옵시고, 초월적 하나님의 은혜로 인도 받는 인생으로 완전히 우리의 삶이 무장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셀 지파처럼 하나님의 은혜에 문빗장을 경험하게 하시고, 매일매일 삶의 현장을 강철 신발로 걸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월요일을 피투성이로 살고 있을지라도 회복된 나의 목요일을 앞서 가시는 창조신 예수님을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요약
초월적인 하나님께서 문빗장으로 보호하시니, 주님이 신겨주시는 강철 신발을 신도 삶의 광야와 산악지대도 넉넉히 건너가야 한다. 월요일에 겪는 고난 중에도 앞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회복된 목요일을 앞서 예비하시니 사는 날 동안 매일 매일 주님의 능력을 맥박처럼 경험하여 우리 교회가 2033-50 비전 앞에 거룩한 설레임으로 가슴이 쿵쿵 뛸 때, 이 민족 위에 부흥의 르네상스와 피 흘림 없는 복음적 평화통일의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믿고 간절히 기도하며 새해에도 '사는 날 동안 능력을 주실 것이다' 확신하며 주님 앞에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자.
-하나님께서 늘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리라는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의 복을 예표한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하나님의 복을 평가하거나 축소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그들의 기력과 원기가 계속 넘칠 것이다.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너의 노년의 기력이 네 젊은 날의 기력과 같아서 너는 쇠함을 느끼지 아니하며 지칠줄도 모르고 네 젊음이 더욱 새로워지리로다. 네 발 뿐만 아니라 네 뼈도 철과 놋 같으리로다" 라고 의역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맡겨진 일이 있는가, 그들은 일할 기력을 얻게 될 것이다. 짊어질 짐이 있는가, 견딜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코 `감당할 시험 밖에는 당할 것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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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3년 12월 24일)
제목: "피의 복음은 항상 우리를 살린다"
말씀: 히브리서 9:22b, 요한1서 1:7
대표기도: 남수현 부목사님(1부)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ㅡㅡㅡㅡㅡ
 
*히브리서 9:22b,
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요한1서 1:7,
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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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성탄 시즌의 절정이 되었습니다. 내일이 성탄 축하 예배이고, 오늘 보니까 하얀 눈이 내렸어요 눈이 내려도 이제는 별 가뭄도 없고 미끄러질까 싶어 걱정만 하고 ㅎㅎㅎ ~어제 우리 새벽산 토비세를 냈는데 참 저희가 대형교회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릴 때, 시골교회에 그 따뜻함과 배려가 있었습니다. 어제 누가 그러더라고요 영어를 하는 분인데 퍼블릭(public)한 예배가 펄스널하게(Personally )다가왔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공적 예배가 내 개인적인 은혜로 느껴졌다 그 말이죠. 성탄의 기쁨을 선물 박수로 받는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제가 좀 부족함이 있지만 그래도 제가 확신하고 장담하는 거 하나 있는데, 그건 뭐냐 하면 어릴 때 새벽송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절대로 신앙 팔아먹지 않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저는 은혜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 사역자 중에 하나가 어릴 때 강원도 어느 교회에 새벽 송을 드렸는데 가니까 귤을 주더래요. 그 당시에 귤은 굉장히 귀했는데 귤을 주고 또 고구마도 구워주고, 과자도 주고 그랬는데 그 말이 그다음 말의 걸작이에요. “그런 은혜를 받고 어떻게 곁길로 가겠느냐!” 그랬어요. 어제 새벽 추위를 뚫고 토 토비의 새벽 송에 나온 예배에 나온 우리 자녀들 하나님이 평생 보호해 주실 줄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어른들도 또 순전한 마음으로 오늘 이 말씀을 받을 때 하나님이 여러분들 예비하신 하나님의 치유와 능력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피해 복음은 항상 우리를 살린다.’ 그랬는데 성탄이 무슨 피의 복음인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피 흘리셔서 우리를 생명 주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그래서요 성탄과 성찬은 어울리는 겁니다. 운율도 비슷하잖아요. 성탄과 성찬 그리고 성령의 역사에 이걸 깨달으면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이 강남 소위 소피스케이트하다는, 이 지적으로 똑똑하다는 이 강남 지역에 오늘 이 피의 복음의 은혜를 이 성탄 날 전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어떻게 보면 너무 원색적이지만 영적인 깊은 은혜를 오늘 깨닫고 성탄의 하나님이 예배하신 선물을 하나씩 다 받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7절 여러분들이 본문으로 읽었는데 7절 뒷부분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요한일서 1:7b,
7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너무나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성탄의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성육신을 하셔서 이 땅에 오셔서 피 흘리신 것은 비유도 아니고, 또 상징도 아니고, 그리고 은유도 아니고, 이 피는 실제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피의 복음은 뭐라고요? 실체다. 그리고 실체가 있다. 이 피는 예수님의 혈관 속에서 흐른 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 사회 그때는 형이상학이라고 그래서 메타피직스라고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해 철학이 지성 사회를 지배를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죽하면 골로새서 2장 28절에 보면,
 
*골로새서 2:8,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그랬어요. 옛날 성경은 너희를 노력할까, 왜냐하면 당시에 예수님의 피 그게 실체인가? 영지주의자들은 육신은 악한 것이고, 영은 고귀한 것인데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왔다는 그 내용이 어떻게 보면 그냥 육신을 육체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다. 라고 하면서 소위 가현설(假現說)이라고 그래서 예수님의 피의 실체를 부인했어요. 이게 그러니까 능력이 안 나타나는 거죠.
 
요한복음 1장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에 예수님의 이 육신으로 오심을 부인하면 피의 복음이 흐려져 버리는 것이에요. 그래서 다시 한 번 이 피는 은유도 아니고 상징도 아니고 비유도 아니고 과장도 아니고 실체인 줄로 믿습니다. 예요. 다시 한 번 요한일서 1장 7절. 지난번 요한일서 1장 앞부분에,
*요한일서 1:7b,
7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복음에 대해서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주먹으로 만지고 입체적인 것인데 조금 더 구체적으로 실감 있게 다시 한 번 더요.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할렐루야. 이것이 얼마나 확실한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요한복음 19장 34절에 보니까,
 
*요한복음 19:34,
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예수님이 십자가로 돌아가실 때, 진짜 돌아가셨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창을 가지고 찔렀는데 이제 죽으면 피와 물이 분리가 돼서 나오는데 실제로 피가 나오더라. 저는 그 상황을 그림으로나 영상으로 보면서 내 마음이 너무 가슴이 뻐근하고 아픈 거예요. 예수님을 찌른 로마 병정은 단단한 몸매와 건장한 몸매와 아주 그냥 근육질의 예수님 찌른 로마 병사들은 다 되는데, 예수님은 초췌(憔悴)하시고 연약(軟弱)하시고 다부진 몸을 가진 로마 병사가 창을 가지고 예수님의 허리를 찌를 때 얼마나 그 실감이 가는지,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예수님께서는 연약하고 지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계시는데 대조적으로 로마 병정을 찌르는 거예요. 강인한 몸을 가진 한 사람이 힘없는 예수님을 찌르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향한 어떻게 보면 과한 희생이세요. 그 자리에 있는 주님이 흘리신 그 피를 로마 병정들이 다 본 거예요. 로마 백부장도 본 것이에요. 서기관과 장로들도 본 거예요. 오늘 이 성탄의 이 성탄의 피를 여러분들이 한번 묵상할 때 하나님이 이 성탄의 큰 축복이 오는 거예요. 좀 이따 말씀드리겠습니다만. 그리고 로마 백부장이 예수님의 그 피를 보고 그 죽음을 보고 뭐라고 그랬어요? 로마 백부장이 뭐라고 그랬냐면, 예수를 향하여 섰던 그 백부장에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뭐예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로마 백부자의 눈을 뜨게 해준 거예요. 그때 로마 시대 때는 황제가 신의 아들이라 그래갖고 신의 아들이 잔인하게 백성들을 핍박하고, 사람들을 사자의 입에 찢김을 당하게 하고 화영대 이슬로 사라지게 하는 그것이 황제 간의 일이었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예수님은 무슨 일이 있어났나? 예수님은 피를 흘리시고 그걸 보고 충격 받고 “아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걸 이제 종합적으로 요한 사도가 깨닫고 오늘 요한일서 뒤에 5장 6절부터 8절까지 특별히 5장 6절 이렇게 나와 있어요.
 
*요한일서 5:6~8,
6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7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8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뭐라고 나와 있느냐?
여기에 물과 피와 성령 이 세 가지가 피의 복음의 실체에 대해서 6~7절에 보니까 증언하는 이가 셋이라고 그랬어요. 증거 증거가 있다. 성령과 물과 피, 이 셋은 합하여 하나입니다. 오늘 이 성탄 주일날 이 성탄의 을 깨닫는데 저와 여러분은 세 가지 증거를 통하여 확정을 해야 되는 거예요.
 
첫 번째 물과 그다음에 피와 그다음에 성령의 역사예요.
-제가 말씀드린 이것을 성령께서 여러분들에게 깨닫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지금 일부 예배라면 지금 제가 펄펄 날 텐데 예수의 흘린 피 날리게 하오니 평안함과 소망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여기에 물과 피와 성령이 이걸 성령님을 깨닫는 건데 물의 역사는 뭐냐 물은 세례를 의미하는 것이에요. 예수님께서 물로 세례를 받으셨어요. 맞습니까? 그래서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예수님의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이에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공생애를 마감하셨어요. 그러니까 물은 시작이고 피는 마감하는 것인데 예수님의 물의 세례가 왜 중요한가? 예수님이 물의 세례를 받으신 것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어요. 마가복음 1장에 보면 요한의 세례가 회개의 세례라고 그랬어요. 요한에게 세례 받은 것은 죄인들과 회개하는 사람이 세례를 받는 거예요. 예수님은 무지한 분이시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가 없는 분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죄인처럼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거예요. 물의 세례를 받으신 거예요. 우리가 서야 할 자리, 우리가 갚아야 할 자리, 우리가 받아야 할 그 어떤 어려움의 자리를 예수님이 대신 차고 앉으셔갖고 우리의 모든 것들을 주님이 짊어지신 줄로 믿습니다. 이거 그게 물의 은혜예요. 피의 은혜는 말할 것도 없고 피를 통하여 죄 사함을 허락하신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에요. 이걸 성령으로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성찬식에 참여하면서 물과 피와 성령의 역사 새 증인이 여러분들의 심령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까 피는 실체이다. 그리고 실체라는 것을 증언하는 것 세 가지다.
 
두 번째. 그래서 존경한 주보열이 우리를 새롭게 하고 나의 죄를 지키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이걸 통해서 볼 때에 피의 복음이 우리를 살리는 거예요. 이게 이제 피해 복음은 우리를 살린다고 그 결과 피의 복음이 우리를 살린다.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해서 막연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잖아요.예수님은 구세주이시겠지, 예수님이 역사에 등장하셨겠지, 라고 적당한 깨달음을 갖고 계신 분들은 오늘 예수님의 피의 복음에 더욱 가까이 다가앉기를 원합니다. 피해 복음의 은혜가 여러분 머리 정수리부터 머리끝부터 시작해가지고 발끝까지 덮어줄 때, 이 성탄이 참으로 축복이 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자녀들도 덮어주시길 바라고 왜냐하면 피해 복음이 우리 자녀들도 살리고 우리 가정도 살리고 피해 복음은 항상 나를 살리는 것입니다. 따라 하겠습니다. “피의 복음은 나를 살린다. 항상 살린다.” 어떻게 피해 복음이 우리를 항상 살리는 것입니까? 거기에 대한 명확한 구절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가지고 다 돌아가 직전에 전날 무슨 일이 벌어졌죠? 성만찬 우리 성찬을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만찬을 하셨어요. 그럴 때,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면, 오늘 이거 하실 때 여러분들이 하시는 말씀이, 누가복음 22장 20절 다 같이 또박또박 읽겠습니다.
 
*누가복음22:20,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떡은 예수님의 몸이고, 이 잔은 예수님의 보혈과 피예요. 그래서 이 자는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 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피의 복음의 은혜를 오늘 이 성탄의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 성육신으로 안 오시면 피를 흘릴 수가 없어요.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시기 때문에 대신 죄 없는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셨어요. 그럴 때 그 피의 복음의 은혜가 우리에게는 실제화 되고 내게 효력이 발생이 되는 것인데 그리고 피의 복음이 나를 살린다고 그랬을 때 살린다는 건 어떤 뜻일까? 새 언약에 들어가는 것이 여러분들과 제가 오늘 성찬식 하면서 이 성탄절 날, 성탄 주일날, 이 성찬식에 참여하면서 여러분들과 저는 새 언약에 들어가는 것이에요. 삶의 수준이 새로운 스탠다드로 올라가는 것이에요. 그것이 뭐냐 하면 새 언약이 그러면 옛 언약도 있느냐 그렇습니다. 옛 언약이 있어 옛 언약은 율법이라고 그랬어요. 옛 언약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구약의 말씀은 옛 언약이죠. 구약의 말씀은 옛 언약이고 모세를 통하여 율법으로 주신 모세의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면 축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 언약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우리가 잠깐은 순종할 수 있지만 잠깐은 양과 염소의 제사를 드려가지고 우리의 죄를 사함을 받을 수 있지만, 언제까지나 영원히 끝없이 우리가 용서를 받고 죄 사함을 받고 우리는 깨끗함을 받는다. 그건 아닌 거예요. 우리는 부패한 본성을 가진 연약한 인생이기 때문에 아무리 구약에 우리가 열심히 살고 율법으로 열심히 산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죄를 짓게 돼 있는 것이에요. 언젠가는 연약하게 돼 있는 것이고 언젠가는 불순종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그 율법을 지키지 못할 때, 율법을 불순종할 때 뭐가 임하는 거예요? 저주가 임하는 언약이에요. 옛 언약은 그러니까 저주가 저와 여러분의 숙명이에요. 그런데 저주가 숙명인 우리가, 오늘 이 잔을 기념함으로 말미암아 예수의 보일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디에 들어간다고요? 새 언약에 들어가요. 새 언약에 들어갈 때 여러분과 저에게 하는 모든 삶의 저주가 물러가는 것이에요. 아이고!!! 내 앞날이 어떻게 되겠나 걱정하고 예수를 믿어도 항상 불안에 떨고, 예수 믿고 그냥 여러 가지 뭐 우리가 은혜를 받지만, 그러나 항상 뭔가 2%가 있잖아요. 늘 이 프로가 우울하고 이 프로가 무언가가 예수를 믿어도 뭔가가 처리가 안 되는 부분이 있는데, 오늘 이 성찬에 참여하면서 그 처리를 모 모든 저주가 물러가게 하여 주십시오. 저주 말도 하는 얘기 피의 능력은 효력의 발생은 안 미치는 곳이 없는 곳이에요. 피의 능력이 효력이 미치지 않을 곳에는 없는 거예요. 모든 영역에 이 피의 효력이 미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걸 알고 하나님 오늘 내게 있는 모든 저주가 물러가게 하여 주십시오. 이게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강력한 힘이에요. 우리는 밝게 살 수밖에 없고 결국은 하늘의 황태자께서 이 땅에 오셔가지고 피의 복음을 주셨고 피의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결국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끝까지 믿음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에요. 아무리 어려워도,
 
※옛날에 고구마 전도 왕이라고 김기동 집사 그 당시 집사님이었는데 고구마 전도 왕이라고 했는데 이분이 과천에 사셨는데 과천에 아파트가 있는데 자기들이 이제 좀 어떻게 좀 살 곳을 찾는데 아파트를 찾는데 어느 아파트가 반값이래요? 아파트가 다른 주위에 있는 모든 아파트는 다 이제 제값 받는데 그 아파트값만 아파트만 제가 반값을 받더라고요. 왜 그러노? 하고 알아보니까 그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다 저주받아 죽어 나온다는 거예요. 전 주인도 그렇고 전 주인도 그랬고 그러니까 김기동이지 그 당시 집사님이 좋습니다. 나는 거기 가겠습니다. 그리고 이 ‘피의 복음과 생명의 복음으로 피해 복음의 은혜를 찬양하면서 했잖아요.
 
그래서 그 아파트에 임한 모든 저주가 물러간 줄 믿으세요. 예를 들어서 그런 것이에요. 피의 복음은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속죄입니다. 그리고 이 폭음 피의 복음의 은혜 때문에 실제적인 피의 복음의 은혜야말로 성도들에게 최고의 위로를 주고 우리를 살리는 생명줄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피의 복음이 없으면 우리는 다 헤매는 것이 사탄은 이 은혜를 못 깨닫게 하려고 피의 복음의 실체 성을 부인하고 새 언약을 깨닫지 못하도록 그렇게도 사탄은 유혹하고 그렇게도 발버둥을 치고, 그렇게도 우리를 못 살게 구는 것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피의 복음이 우리를 살리는 줄로 확신합니다. 이 피의 복음이 없으면 우리는 다 죽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우리 우리의 피가 a형, b형, o형, ab형이지만 오늘부터 우리의 피가 보혈 형으로 바뀌었어요. 우리의 피가 새 언약의 피로 바뀌었어요. 참 기가 막힌 거예요. 다시 한 번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뭡니까?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은유나 상징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새 언약으로 들어갈 때에 히브리서 9장 12절에 뭐라고 말씀하느냐 하면 다 같이 읽겠습니다.
 
*히브리서 9:12,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구약의 옛 언약은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그때만 깨끗하게 되는 것이고, 죄를 지을 때마다 또 해야 되는 것이고 반복해야 되는 것이고,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의 피의 냄새가 흥건하고 피 냄새가 났어요. 지금도 이런 거 잘 모르는 힌두교 교도들 보면요. 지금도 인도에 가면 그 도시 도시들마다 중앙에 흰두 신전이 있는데 피 냄새가 막 진동을 하는 거야 잘못된 거예요. 이거 구약의 대제사장이 속죄일, 대속죄일 날 염소 피, 대 속죄일 날, 무슨 일이 있는가? 염소 두 마리를 갖다가 딱 택해가지고 그 두 마리 중에 하나는 이제 제비뽑기를 해서 한 염소는 모든 한 염소의 뭡니까? 피를 흘려가지고 그걸 지성소 위에 뿌려요. 그리고 한 염소는 어떻게 하느냐, 대제사장이 어떻게 기도하는가 하면,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의 모든 죄와 허물과 저주를 그 머리에 다 전가하는 거예요. 그 머리에다 다 뒤집어씌우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광야로 쫓아내는 거예요. 그걸 아사셀 양이라고 우리는 얘기하는데, 제가 40여 년 전에 신학교 갔을 때, 미국 신학교 16mm 옛날 영사기로 해가지고 돌려가지고 그걸 제가 보고 막 눈물이 나요. 너무 불쌍하다고 해서 그저 저 염소가 예수님은 말도 안 되는 이런, 이런 희생당한 염소처럼, 주님은 인생에 오고 오는 모든 인생들을 피의 복음을 믿는 모든 주의 백성들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다 뒤집어씌우고 다 뒤집어 쓰셔갖고, 광야로 쫓겨나는 것입니다. 광야로 쫓겨나는 그 염소는 우리의 죄가 깨끗하게 없어졌다는 상징인 줄로 믿으셔야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이런 은혜 때문에 여러분 컴퓨터 키보드에 딜리트(delete) 버튼을 누르면 삭제가 되잖아요? 누가 또 그러대요? 그 말하니까 목사님 되돌리기 화살표를 누르면 삭제됐던 것이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는 그런 거 없어요. 이거 되돌릴 필요도 없어요. 예수님의 속죄의 피는 죄가 되살아나지 않도록 완벽한 죄 사함을 허락해 주신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는 내용을 그의 피로 말미암아 로마서 5장 9절에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로마서 5:9,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에베소서 2장에 보니까,
*에베소서 2:13,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이전에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어떻게 됐습니까? 가까워진 것이 할렐루야!!~ 오늘 이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이 성찬에 주님의 이 보혈의 자리를 높이 들고 우리가 보혈의 속죄가 미치지 않는 영역이 없다고 생각하고 감사하며, 이 성찬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출애굽기 12장 13절에 보니까,
 
*출애굽기 12:13,
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실제 피를 보세요. 내가 피를 볼 때 너를 실제 피를 문설주 인방에 바르니까, 그 피를 보고 죽음의 천사가 넘어갔어요. 저주가 임하지 않았어요. 죽음이 임하는 것이 없어졌어요. 그러면서 그 안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덕적으로 애굽 사람보다 부족한 사람도 많은데, 문설주의 양의 피를 바른 곳만 해결이 되고, 죽음의 천사가 넘어가고 애굽에 아무리 똑똑하고 철학적으로 대단하고 대단한 위치에 있는 사람도 그 피를 바르지 않으면 다 죽었어요. 장자가 다 죽었어요. 그러니 나는 저걸 보면서 피의 복음의 은혜를 깨달으면서 내가 받은 구원이 내 능력에 달려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나는 능력이 너무나 부족한 것을 알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받은 이 구원이 내 지식에 달려 있지 않은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요즘처럼 AI 인공지능 시대에, 60이 넘은 저희들은 얼마나 제한되어 있는지, 저는 인터넷 뱅킹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사옵나이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나는 이대로 가면 굶어 죽어요. AI 시대에,,, 우리 목사님이 AI에 대단히 무식하구나!! 또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거 또 알아요. 내가 그걸 안 해서 그런 거지. 그리고 내가 받은 구원이 내 의로움과 도덕에 달려 있지 않고, 내가 받은 구원이 내 실력과 내 인내심에 달려 있지 않은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우리는 다 작심삼일(作心三日) 아닙니까? 오늘 예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 것을 감사하며 실체가 되게 하여 주시옵시고, 여러분들이 새로운 새 언약의 장에 올라가서, 삶의 모든 저주가 물러가는 영광스러운 성찬식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같이 우리 다 손을 펼치시고,,, 찬양 존귀한 주 보혈이...♪♬
♪♬보혈을 통해 종교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네,,,♪♬ 존귀한 주 보혈이 교회를 새롭게 하는 존귀한 주 보혈이 모든 저주와 아픔을 물러가게 하시네!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기도-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피로 새 언약을 세우시고 율법 대신 은혜로 우리 다 주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게 하심을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이 속죄와 구원의 피가 피의 능력이 머리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덮어주시니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속죄 능력이 미치지 않는 영역이 하나도 없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 사랑의 교회 주일 강단이 피의 복음이 뿜어져 나오는 강단 되게 하여 주시옵시고, 개인적으로도 피의 복음의 능력을 온전히 체험하는 성찬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탄의 성찬의 능력을 성령님의 역사로 체험하는 귀한 시간 되게 해 주실 것을 믿사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간절히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사랑의 교회 성찬식은 구원의 확신이 있고, 세례 받은 분들이 참여할 수가 있습니다. 떡과 잔을 이제 기념하겠습니다. 혹시 받지 못하는 분들은 손을 들어 표해 주시면 섬기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주님의 몸을 기념함으로 모든 옛 언약은 다 처리되고 새 언약의 세계에 들어가 하나님이 주시는 이 생명과 피의 역사의 은혜와 기적을 체험하기를 모든 저주가 물러가는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기념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이 떡을 기념함으로 말미암아 한약 없이 부어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체험하는 시간 되게 하신 거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를 이 한순간이 아니라 영원히 살리시는 생명의 떡이신 주님의 능력을 온전히 체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지난 2023년 한 해 동안 우리를 짓눌렀던 온갖 연약한 것들, 은밀한 죄들, 오염되고 부끄러운 것들은 다 정리되게 하여 주시옵시고, 이 떡을 기념하는 모든 성도들마다 자유와 생명의 능력과 복음의 능력을 깨닫는 성찬의 능력을 체험하는 시간 되게 하여 주옵소서. 계속 이어지는 주님의 보혈의 자녀를 통하여 우리 영 가족 모두가 다 성령 안에서 하나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오늘 이 순간은 참으로 소중한 시간입니다. 특별히 올해는 성탄절에 성찬식을 하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귀한지 먼저 이 시간 여러분들이 합심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은 꼭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시간적인 차이가 있어서 그렇지 결국은 이 성찬의 은혜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힘입고 감사하면서 합심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은 베풀 만한 자비를 베푸시고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합심해서 기도할 제목 세 가지 드리게. 첫째, 지난 한 해를 인도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께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하십시다. 비록 우리 앞에 놓인 상황이 녹록지 않았지만 우리가 그래도 주님의 크신 은혜로 믿음의 전진을 한 줄로 믿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감사하시고 두 번째, 하나님 오늘 이 보일의 능력과 십자가의 피의 능력이 오늘 그대로 새 언약의 역사로 기적으로 임하게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모든 아픔과 저주가 물러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 번째, 우리가 이렇게 기도할 때 우리 민족의 갈등과 우리 주위의 갈등이 해결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주여 성찬의 은혜를 주옵소서. 주여 성찬의 은혜를 주옵소서. 두 번 크게 외치고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주여 성찬의 은혜를 주옵소서. 주여 성찬의 은혜를 주옵소서. 아멘,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이 놀라운 시간을 주신 것 감사합니다.
 
요약
주의 보혈이 은유나 상징이 아니라, 속죄의 실체인 줄 믿고, 거룩한 성찬을 통해 나의 생애를 그리스도께 드려야 한다. 어떠한 저주도 이기는 피의 복음의 능력으로 우리를 살리시는 주님을 날마다 영원한 믿음의 주로 우리는 살아가며 승리해야 한다. 피의 복음의 실체와 그 능력이 성찬식을 통한 죄 사함과 새로운 언약의 장이 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피의 복음을 체험하는 성찬식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견해와 회개를 통해 하늘의 부요와 영광을 체험케 하심과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성탄을 축하여야 한다.
-피의 복음의 실체와 그 능력이 성찬식을 통한 죄 사함과 새로운 언약의 장이 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피의 복음을 체험하는 성찬식의 중요하며, 하나님과 친밀한 견해와 회개를 통해 하늘의 부요와 영광을 체험케 하심과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성탄 주일 예배로 나아가야한다. 성탄과 성찬은 어울리는 말씀이며, 성탄의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성육신을 하셔서 이 땅에 오셔서 피 흘리신 것은 비유도 아니고 상징도 아니고 은유도 아니고 실제이다. 예수님의 피는 예수님의 혈관 속에서 흐른 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물과 피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 피의 복음의 실체를 깨닫고 확정해야 한다. 성탄의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의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 되는 것이다. 옛 언약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면 축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 언약이었지만, 우리는 부패한 본성을 가진 연약한 인생이기 때문에 아무리 구약에 열심히 살고, 율법으로 열심히 산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죄를 짓게 돼 있기에, 예수를 믿어도 항상 불안에 떨고, 예수를 믿고 그냥 여러 가지 은혜를 받지만, 항상 뭔가 2%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속죄의 피는 죄가 되살아나지 않도록 완벽한 죄 사함을 허락해 주신 것임을 확신해야 한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 것을 감사하며, 실체가 되게 하여 주실 것이다. 새로운 새 언약의 장에 올라가서 삶의 모든 저주가 물러가는 영광스러운 성찬식이 되기를 축원한다. 사랑의 교회 주일 강단이 피의 복음이 뿜어져 나오는 강단 되게 해 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은 개인적으로도, 공동체적으로도, 피의 복음의 능력을 온전히 체험하는 성찬식이 되게 해 주실 것을 믿으며, 성탄의 성찬의 능력을 성령님의 역사로 체험하는 귀한 시간 되게 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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